말씀으로 주께 피하는 자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시 18:30)
녹취자: 나기화
이 시는 다윗이 사울의 모든 박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승리한 때 지은 찬송시입니다. 찬송과 함께 자신이 겪었던 고난과 전쟁에서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다윗은 자신이 그 길고 치열한 원수들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방패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때가 주전 10세기경 이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입니다. 로마가 기동성 있는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각 전투 단위 부대들을 아주 작게 만들고 기동력이 강한 부대로 만들 때 방패 모양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수비를 위한 방패가 아니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작은 방패를 만들어 기동성을 높였습니다. 그전까지 방패는 굉장히 큰 크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는 희랍군대가 사용하던 방패는 매우 커서 방패를 세우고 그 뒤에 숨으면 사람을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크기였습니다.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방패도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보호의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어로 방패가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방패는 바로 그 방패를 말합니다. 전쟁터를 누빈 군인으로서 다윗은 비처럼 날아오는 수많은 화살과 혹은 창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데 방패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시련과 환란의 길을 겪으면서 주님이 자기를 보호해 주신 것이 마차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방패가 자기를 보호해준 것과 같았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 당시에 함께 전투에 참여해 본 사람이었다면 아마 다윗의 이 표현에 대해 훨씬 깊은 공감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아무튼 (첫 번째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즉 우리 주님 뒤에 숨는 사람들은 결코 안전하며, 주님의 뜻을 거슬러 주님이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을 원수가 헤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편 3편에서도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향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적군들과 함께 치열하게 싸우며 일생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할지라도 단 하나의 화살이 심장을 관통하면 그는 절명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방패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용감한 군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시인이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라”고 하는 이 감격스러운 고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이해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방패는 모든 사람에게 방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피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신앙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힘으로 인생을 살라고 가르치지만, 신앙은 주님을 의지하며 인생을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주님께 매달리라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우리들이 마음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사랑의 감정인 동시에 의존의 정서입니다. 그래서 한 심장 안에 은혜가 넘칠 때는 하나님을 향해 무한한 의존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존의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그분께 순종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이에 비해서 은혜가 사라지게 되면 신자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는 기도의 원천입니다. 마음에 은혜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신자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신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는 자는 약하지만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한 사람이 되고,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은 주님을 향해서는 담대하고, 세상을 향해서는 비굴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과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에 잠길 때 많은 성도들은 예배 속에서 주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렇게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은 겸비해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소낙비처럼 화살이 날아오는 전투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리고는 방패가 되신 우리 주님 뒤에 숨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간절한 개인기도로 나타납니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아니하든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감정은 하나님께 매달리도록 만들어줍니다. 그 기도는 비록 어린아이의 기도라 할지라도 하늘을 뚫고 주님의 보좌에 오르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세상에서는 결코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결정적인 자원이 필요한데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것은 모두 처음부터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하늘로부터 오는 그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받게끔 만들어 줍니다. 자기 연민 대신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줍니다. 그리고 기도는 자신의 행복에 아랑곳 하지 않고 주님이 살기를 원하시는 삶을 살아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 갈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런 점에서 정말 오늘 우리가 주님께 피하는 모든 자에 속하는 사람들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했을 때 여러분들은 간절한 기도 속에서 살았음을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뿐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면서 한계를 느낄 때마다 혹은 집에서 골방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교회에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가면 저녁때 퇴근하면서 어김없이 교회에 들려서 기도하고 가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다른 삶을 만들까요? “예, 주님이 아니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나는 설 수도 엎드러질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나의 피할 바위요 산성이요 방패는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라고 그분께 피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연약해 보이지만 신기하게 누구에 의해서도 해를 받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붙들어 주십니다. 더욱이 나쁜 일이 생기고 악인이 그에게 악을 행한 것 같아도 하나님은 신기하게 그 악한 일을 통해서 그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선을 안겨 주셔서 결국은 자기를 연단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아름다운 영혼의 특징은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깊이 의지할 때 거기서 모든 좋은 것이 흘러서 나오는 것이 신앙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우리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문제는 주님께로 부터 흐르는 충만한 은혜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은혜로써 우리를 에워싸심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방패가 되시는 우리 주님께 피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로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주님께 피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 질문에 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인은 방패 되신 우리 주님께 피한다는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니라.” 그러면 무슨 뜻일까요? 주님께 피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다는 의미임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도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데레크’()라는 단어인데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느 장소에서 어느 장소로 이동할 때에 다른 곳으로 걷지 않고 그 길을 따라 걷기로 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길 밖에 있는 것들을 때로는 보호하기 위해서 약속을 한 것이고 때로는 그 길 이외에 다른 곳으로 가면 불편하거나 위험하기 때문에 그 길로 가도록 서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길은 정확하게 시작하는 지점이 있고 정확하게 도달하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 길은 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길이고, 길을 처음 만든 사람들이 그 길이 그곳에서 그곳까지 가는데 가장 적합하고 안전하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그래서 길을 잘못 만들어 놓으면 엄청난 사고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그것에 관련된 기술들을 도로공학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요즘에 엄청나게 도로 만드는 기술이 발달해서 터널을 금세, 금세 뚫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번에 제2영동고속도로가 생겨나고, 그 다음에 강릉 속초 쪽으로 가는 길이 뚫려서 1시간 반이면 가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 11km정도 되는 터널이 뚫렸습니다. 그 공사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예전에는 터널을 그냥 뚫고 그리고 터널 앞에 생긴 길대로 길을 냈는데 그렇게 하고 보니까 많은 사고가 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터널 안에서 서서히 곡선으로 만들어서 터널 밖으로 나올 때는 이미 앞에 있는 길하고 직선을 이루도록 만들어서 도로공학적인 고려를 가지고 설계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길이 모든 사람이 다녀도 길이 안전한 길을 만들어 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그런 완벽한 도로공학 속에서 길을 만드는 최고의 기술자처럼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가며 인생을 살아야 할지를 만들어 놓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을 우리가 인간이 사는 도리를 가르쳐서 하나님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니” 라고 할 때 ‘완전하다’는 단어는 ‘타밈’()이라는 히브리어를 사용합니다. (‘완전하다’를 챠라프로, ‘순수하다’를 타밈으로 바꾸어서 잘못 설교하셨음, 아래 설교는 적당하게 고친 내용임)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도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인간이 혹은 인간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이 대충 만들어서 놓은 그러한 임시 통로가 아니라 많은 공학적인 고려 속에 우리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인간이 그 길을 걸어가므로 인간자신이 행복하고 모든 인류가 행복해지고 하나님도 인류사회를 기뻐하실 수 있는 완벽한 길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의 계명은 무겁지 않습니다. 쉬운 계명은 자기가 충분히 지키며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려운 계명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하나는 자기 같은 사람을 그 높은 수준의 계명으로 불러주신 주님의 특별대우 때문에 감사하고 또 하나는 그런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방패가 되시는 우리 하나님께 피하며 사는 성도들의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여러 번 제련되어 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말씀의 약속대로 살만한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이렇게 며칠 동안 텔레비전도 없이 그리고 매스컴에서도 끊어진 채, 핸드폰이 남아 있긴 하지만 잠시 그것을 가방에 넣어두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뿐이라면 그것이 과연 방패가 되신 우리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말씀을, 그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지식과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주셨던 십자가 사랑을 더욱 불타오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만큼 확실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뜨거운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에 있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애정이 타오르는 불길이라면 지식과 총명의 말씀은 그 불속에 끊임없이 던져지는 장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땔감을 태우면서 사랑의 불길은 더욱 치열하게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도로 피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도에 비추어 불순종한 삶이 있으면 정직하게 고백을 하고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 도의 말씀에 비추어서 하나님 앞에, 그 길에 어긋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의도했던 것이든 혹은 그렇게 크게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든 그것이 잘못된 거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다시 그 길로 돌아서도록, 하나님 앞에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다가 자동차가 길에서 이탈해서 논두렁에 빠지거나 혹은 졸다가 차선을 이탈해서 포장도 되지 않은 갓길을 달리고 있고 조금 더 가면 논두렁에 빠질 것 같은 위기를 만났습니다. 가는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단은 차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탈된 차선을 다시 이탈된 차선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차가 길을 벗어나서 논두렁에 빠졌으면 달구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다시 그 차를 끌어내어 온전한 차로에 세워야지만 그 차가 가지고 있는 성능이나 속도가 비로소 의미 있게 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최근에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나 혹은 개인적인 성경 읽기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뜨겁게 움직였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리게 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매일매일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있는 일은 쉽지 않다고 할지라도 수시로 그렇게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감화를 받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여호와의 도에 행할 수 없고, 여호와의 도를 행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방패 뒤에 숨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라고 말합니다. 이 ‘순수하다’ 는 말이 ‘연단하다’ 는 말에 수동태 분사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챠라프’()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고대의 금과 은을 만들 때 이물질이 섞인 광석을 불에 녹이고 녹인 그곳에서 재료를 분리해서 금이나 은, 물을 꺼내고 그것을 다시 굳혀서 또 용광로에 녹여서 또 다시 불순물을 걸러내고 하는 여러 번의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매우 순수하게 되는 것, 그 과정과 그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노아의 순수함을 가리킬 때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순전함.’ 우리 인간에게 이 말씀이 적용될 때에는 절대적인 순전함이 아니라 상대적인 순전함이 그래서 당대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 비교해서 볼 때에 노아는 매우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칭찬할 때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요. 의인이요. 이런 의미에서 ‘챠라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될 때에는 절대적인 순수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커다란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고의 판단이 잘못된 사상에 감염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고 그럴 경우에 그의 정신 작용은 순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서도 경험적으로 그리스도인인데 평범하지 않고 매우 진실하고 특별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실해지기 위해서는 그 진리라고 하는 기준에 자기를 합치 시켜야지만 진실해지고 그 진실한 인격에서 올바른 삶이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수시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 표준에서 이탈된 자신을 발견하며 회개하고 자기를 반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거짓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책을 느끼고 자기 깨어짐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더 순수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시인은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고 어느 순간도 자신의 생명을 담보할 수 없는 전쟁터를 누비며 결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했습니다. 원수가 다윗보다 훨씬 강했으나 결국 하나님이 다윗의 편에 있었기 때문에 원수의 수효와는 상관없이 그 방패 아래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이 영적인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함으로써 가능해질까요? 매일 예배 속에서 깨닫고 감화 받는 하나님의 말씀, 바쁘고 고단한 삶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그 말씀에 의해 달콤한 하나님의 교제를 나누는 은혜의 시간, 그 앞에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던 자기 자신을 보이고 그 하나님 앞에서 말씀으로 인하여 깨닫고 뉘우치고 다시 그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작용이 없이는 누구도 주님께 피할 수 없습니다. 그는 결국 방패 밖으로 자신의 몸을 노출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노리고 있는 악한 자들의 활시위가 당겨지는 소리가 나면 여러분들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이시고 주님께 피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피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런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길을 지나면서 그 모든 상처와 고통을 이기게 만들었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늘 아래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에 꼭 붙들려서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를 숨겨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찬송)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그 손으로 덮으시네.
주님의 말씀에 충만한 은혜를 받고 주님의 방패 뒤에 안전하게 보호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