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주일
녹취자: 최원정
I. 주일 규정과 성수 방식
(.......)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8절에서 안식일의 주인은 그리스도라고 말했고 마가복음 2장에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실제로 부활 후 첫날에 모였는데 구속사적으로 일어났던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의미로 주일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안식일과 주일이 어떤 관계가 있느냐가 중요한 쟁점입니다. ‘안식일이 계속 영속적으로 되어서 주일을 포함하는 것이냐?’ 아니면 ‘안식일은 구약으로 끝난 것이냐?’가 가장 중요한 쟁점입니다. 이에 관해 크게 견해가 둘로 나뉩니다. 마르틴 루터나 칼빈 등은 안식일 제도가 폐지되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지만 청교도들과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핫지 같은 사람들은 안식일이 영속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안식일 제도의 폐지론을 보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화면에 나와 있는 글을 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어디서든지 그날이 단순히 그날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된다면 만약 어디서든지 유대교적 근거를 두고 준수하게 된다면 나는 그날에 일하고 말을 타고 춤추고 연회를 열고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제거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지 하라고 명할 것이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가 남긴 주일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걸출한 종교개혁자는 안식일 제도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폐지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식일이 주는 어떤 신학적 중요한 의미까지도 모두 폐기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안식일 제도는 폐기되었지만 안식일 제도 안에 있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신학적인 의미들을 말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이 일주일에 하루는 노동으로부터 쉬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마음을 모아 경배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안식이 미래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안식일 제도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의식법과 함께 폐지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존 칼빈도 역시 같은 견해를 따랐습니다. 이 안식일 제도의 개명은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폐지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날들의 차별을 두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더 중요한 날이 있고 덜 중요한 날이 있다고 차별을 두는 것은 미신적인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거룩히 지킴에 있어서 안식일의 율법을 준수하는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 그는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칼빈 역시 안식일이 가지고 있는 종말론적인 의미와 현실적인 실천에 있어서 필요성은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것이고 이 날을 지킴으로써 신자는 전생애에 걸쳐서 온전해져 간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명기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까지는 율법 아래에 있는 그림자였다. 율법이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본질과 실체를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의 그림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이처럼 칼빈은 안식일 제도가 갖는 모든 신학적인 의미가 폐지되었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의 계명을 두신 것이 3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영적인 안식의 표로 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sign of eternal rest. 두 번째는 정해진 날에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예배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로 종들과 다른 사람들이 노동으로부터 쉬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버렸고 나머지 두 가지는 지금도 영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봤습니다.
루터나 칼빈이 주일을 매우 특별한 날로 강조하지 않은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와 칼빈이 살았던 당시대는 1세기 후인 청교도들이 살았던 시대와는 매우 다른 처지에 있었습니다. 루터와 칼빈 시대에는 가톨릭 시대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날들과 절기들을 교회에서 정했습니다.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절이나 감사절, 성탄절뿐만 아니라 수많은 절기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년 365일 중에 거의 180~200일 정도 전부 매우 특별한 어떤 이름을 가진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지키는 데 여러 가지 미신적인 요소들이 등장하였습니다. 19세기에 유명한 교회 사각 가운데 프랑스 사람 장 레를 도비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1794년~1872년까지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쓴 8권으로 된 책이 있는데 ‘16세기 종교개혁사’ 라는 책입니다. 가장 아주 풍부한 역사자료를 갖고 있는 책입니다. 그 때 당시에 16세기에 절기를 지키는 데 있어서 만연했던 불경건한 정신을 이런 식으로 기술했습니다. 약간 길긴 하지만 꼭 필요해서 인용해보겠습니다. “불경한 정신이 신앙을 침범하여 믿는 자들에게 자기 성찰과 사랑을 강력하게 요청해야 할 교회의 거룩한 절기들이 저속한 익살과 이교도의 신성모독으로 불경해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부활주일에는 기쁨의 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아주 저속한 방법으로 웃기기 위해서 수많은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지어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수많은 절기의 이름 아래에서 행해졌던 것입니다. 이런 미신적인 절기들이 미신적인 방법으로 지키는 풍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에 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절기로 강조했다면 또 다른 미신들을 만들어낼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와 칼빈은 주일 성수를 비롯하여 어떤 행위에 의무들을 규정해서 그것을 어느 날 속에서 집어넣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공로주의적인 사상이 팽배해있었기 때문에 주일을 어떤 의무조항들로 강조할 때 그것을 지킨 공로를 주장하게 되고 또 미신적인 어떤 풍습들이 일어나게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보는 것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안식일 제도의 폐지론을 주장했던 이유였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안식일 제도의 영속론입니다. 주일과 안식일 사이에는 신학적인 연속성이 있으며 주일은 안식일 제도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청교도들의 이런 견해는 이제 당시의 영국 왕이었던 제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의 정치적 박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인 박해를 받으면서 주일이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리기 위한 날이 아니라 자연법에 근거를 둔 날이라는 점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것입니다. 주일이라고 하는 것이 종교적으로 지켜야 할 날인 동시에 모든 인류를 이렇게 일정한 시간을 쉬게 하는 것이 모든 인류가 새로운 힘을 얻고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배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일 성수의 근거를 부활의 기쁨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6일 창조 후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에서 이제 주일의 근거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자신의 신앙고백 속에서 주일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상세하게 제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주일성수가 종파적인 이슈가 아니라 자연법적 질서 안에서 인류의 복지를 위한 항구적인 법칙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표본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고 나서 유대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안식일을 지키던 그 방식을 영원한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고수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여러 가지 많은 토론이 필요합니다. 이 유대인들은 일평생 유대교를 믿어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율법주의에 젖어 있던 사람입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이 가르쳐 주는 모든 신학적인 의미를 포괄적으로 적용할 줄은 아직 몰랐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던 방식을 그대로 날짜만 바꿔서 그대로 태도를 고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이제 사도들의 시대가 지나가고 속사도 시대 그리고 교부시대가 오면서 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생각은 복음주의적인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교부들도 아주 확고하게 주일을 그리스도의 구속의 중심으로 보았고 율법주의적으로 주일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안식일 제도가 영원히 계속 되고 주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도 그 영속적으로 계속되는 안식일 제도 안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주일에 대한 아주 엄격한 견해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청교도나 조나단 에드워즈나 찰스 핫지 이전에 중세에서도 이미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대교부들에 의해서 정확하게 자리를 잡았던 주일에 대한 개념이 중세에 들어오면서 복음을 이탈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합니다.
II. 청교도들의 주일성수
청교도들은 어느 정도 그런 것들을 지금 말씀드리려는 여러 가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다시 계승하였다고 봐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영국에 제임스 1세라고 하는 왕입니다. 이 사람이 1607년에 스포츠 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서 오후에는 스포츠를 즐겨도 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이미 이제 카톨릭에서 이탈해서 알다시피 헨리 8세의 앤 불린과의 결혼 문제로 교황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독자적으로 영국 성공회의 길을 걸었습니다.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머리를 영국의 왕으로 보고 그 왕 아래 모든 교회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청교도들은 그런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교회의 머리는 교황, 영국왕도 아닌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 중에서도 국교도와 비국교도가 있었습니다. 국교도를 따르는 청교도는 청교도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공회에 속한 사람이었고 비국교도는 성공회를 이탈한 따로 분리된 독립교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1617년에 제임스 1세가 랑카셔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지역주민들로부터 탄원서(청원서)가 들어왔습니다. 그 청원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청교도 지도자들은 교회지도자들과 청교도 사상을 가진 관리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주일날은 일체 오락과 스포츠를 못하게 금지하였습니다. 만약에 하게 되면 교회에서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왕에게 직접 탄원을 낸 것입니다. 오전에 예배를 드릴테니 오후에는 우리 마음대로 스포츠도 하고 오락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제임스 1세와 청교도들은 서로 정치적으로 대치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왕은 탄원을 한 백성들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포고령으로 선포된 스포츠 선언은 교회에서 청교도들에게 반감을 품은 사람에게 합법적으로 주일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실제로 저녁 때 청교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 때 많은 사람이 와서 북과 꽹과리를 두들기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지금은 노는 시간이니까 청교도들은 다 밖으로 나와서 예배드리지 말고 놀라고 방해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것을 주일을 느슨하게 지켜도 된다는 청교도들이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곧 영국의 제임스 1세에 대한 신앙적인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임스 1세는 그렇게 오후에 스포츠를 즐김으로써 영국 국민들이 신체적으로 단련을 해야지 전쟁이 일어나면 이길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교도들은 더욱 엄격하게 주일을 지켜야 될 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청교도 종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영국 국민과 세계 인류의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엄격주의적인 주일 성수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세시대부터 주일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사상들이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책자 중에서 일요일에 대한 서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천지가 창조된 것 예수께서 잉태되신 것 탄생한 것 부활한 것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난 게 모두 일요일이란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은 신적 기원을 갖는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더욱 엄격주의적인 주일 성수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란 책에서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이 주일에 단 한 번 신발을 수선하는 것은 천명의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큰 죄다." 무슨 뜻일까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람과 관계된 것이지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라고 구별해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해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해석을 거부하고 교부들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주의 해석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엄격주의적인 주일 성수의 내용은 핵심적인 것으로 이런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주일 성수의 개념을 안식을 엄수주의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가 특별은총 뿐만 아니라 일반은총 빛 아래서도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III. 청교도들의 전통에 대한 평가
그러면 이제 청교도들의 전통에 대해서 평가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종교개혁자들과의 차이점입니다. 신학적인 미세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기본적으로 주일을 지키는 상세한 규정들을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라고 봤습니다. 아디아포라란 말은 ‘아’라고 하는 것은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디아포’라는 차이점 혹은 불일치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아디아포’란 차이점이 없다. 불일치가 없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사 ‘디아페로’에서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디아포라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성경이 규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도덕적인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사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나은 아이를 교육시킴에 있어서 국립학교를 보낼 것인가 사립학교를 보낼 것인가. 아디아포라입니다. 주일날 모이는 주된 예배를 11시에 드릴 것인가 2시에 드릴 것인가 하는 것은 아디아포라입니다. 주일날 교회 올 때 정장을 하고 올 것인가 간단한 복장을 하고 올 것인가. 아디아포라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와 칼빈은 주일에 대한 의무들을 말하기는 했지만 청교도들보다 훨씬 간략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날이라고 했습니다. 청교도들은 구약의 안식일이 한주간의 마지막 날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주일은 한주간의 첫 번째 날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계기적인 날, 무슨 뜻이냐면 월화수목금토 그 다음에 끝나고 주일, 혹은 주일부터 시작해서 월화수목금토. 주일이 어떤 날 다음에 오는 것인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마르틴 루터와 칼빈 같은 사람은 날의 계기적인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지구가 둥그렇습니다. 한쪽이 낮이면 반대쪽은 밤입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 북극으로 올라가면 여름에는 밤이 거의 없고 겨울에는 낮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럴 경우에 토요일 주일 경계를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요?
(예화) 그래서 실제로 이슬람에서 그런 회의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라마단 시기에는 금식을 합니다. 금식이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종교회에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백야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아이슬란드에 갔었습니다. 7월이었는데 어두워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새벽 3시쯤 되면 약간 어두워지는 것 같다가 4시에 다시 환해집니다. 24시간 중에 한번도 어두워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언제부터 금식을 시작해야 하나? 해가 계속 있는데 언제부터 금식을 해야 하고 언제 끝내야 하나. 해가지지 않는데. 그래서 그 사람들이 생전 처음 듣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결론은 그것은 적당히 시간을 다른 데에서의 시간에 맞춰서 정할 것이다. 그렇지만 더 좋은 것은 우리 이슬람은 그런 데에서 살지 않는 것이 좋다. 라고 말입니다. 어렵습니다. 왜 제가 이 말씀을 드릴까요? 그런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10월에 카타르라는 나라에 말씀을 전하러 갑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금요일을 주일로 삼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슬림 사회에서 금요일이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일요일에는 사람들이 모두 일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그날을 주일로 삼는다고 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어느 한 날을 일주일 중에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노동으로부터 쉬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번 주에 매우 바쁘니까 월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끝내자. 이것은 안됩니다. 이것은 교회전체의 공교회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청교도들이 주일날 쉬어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10분만 쉬고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사바티스무스’(sabbatismos)와 ‘카타파우시스’(katapausis)의 균형의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3장 11절, 18절 4장 1절, 3절, 5절, 10절에서 보면 안식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똑같이 번역된 말이 희랍어 성경에는 다른 단어로 나옵니다. 사바티스무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사바티조’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고 이 단어는 놀랍게도 히브리어에서 따옵니다. 히브리어에 ‘샤바트’()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시매” 할 때에 바로 샤바트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사바트 데이(Sabbath day)’가 나오는데 이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희랍에서 ‘사바티스무스’라는 단어는 안식을 의미하는데 특히 육체적 안식을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카타파우시스’는 ‘파우시스’라는 단어는 일하는 것을 ‘멈추다.’ 라는 뜻입니다. 근데 이 ‘카타’라고 하는 단어는 ‘~을 따라,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의 의미)와 합해지며 안식일이라는 뜻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카타파우시스는 사바티스무스와 다르게 안식은 안식인데 영적이고 정신적인 안식을 강조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육체적으로만 안식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도 고통 없이 안식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주일을 지킴에 있어서 주일은 안식일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늦게까지 자고 예배를 한번 드리고 난 다음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봉사도 안합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목사도 안식일에 설교하지 말고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은 육체적인 사바티스무스의 안식만을 생각한 것이지 영적인 안식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주일은 이렇게 육체적으로 쉴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쉬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쉼이 가능해질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어야 그것이 진정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쉼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는 이 둘을 모두 강조했지만 강조점이 카타파우시스에 있었고 청교도들도 둘 다 강조했지만 강조점이 사바티스무스에 있었다는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에 역사적인 배경을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보면 1600년대와 1650년대의 그림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잉글랜드는 영국에서 중부와 남부지방 웨일즈를 제외한 중남부 지방을 가리킵니다. 브리튼은 잉글랜드에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까지 모두 합친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 때의 인구가 잉글랜드에서 410만~600만 정도였는데 50년이 지나면서 770만으로 인구가 증가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옛날에는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정 토지에서 곡물을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규모의 농지를 새로 개발하는 일들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곡물의 생산량에 비해 인구가 너무 빨리 증가하니까 사람들이 양식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0명이서 농사를 짓는데 실제로 거기서 생산된 곡식을 가지고 8명밖에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농사만을 바라보며 살 수가 없게 되니까 나머지 2사람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노동력을 제공할 어떤 일터를 찾게 될 것 아닙니까? 17세기는 이미 벌써 유럽의 열강들이 지리상의 새로운 발견을 통해 국제적인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대였습니다. 여러분이 역사에서 배운대로 영국은 18세기에 산업혁명을 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증기기관이 발견되고 그러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공장재 공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바로 17세기는 그 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농업사회에서 공장재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사이에 공장재 가내 수공업 시대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커다란 공장을 차리고 거기에서 수공으로 어떤 직물을 직조해서 생산해서 그것을 다른 나라에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리게 되었고 이렇게 도시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사람은 많고 일자리는 적으니까 임금이 계속 떨어졌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노동자들이 매우 불리한 조건 속에서 생산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16시간씩 이상 일을 하면서 혹사당하는 가운데 쉬는 날 없이 일하게 됩니다. 그래도 노동자들을 약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만두면 그 자리에 와서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계속 줄을 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17세기에 키더민스터에서 목회했던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같은 사람의 경우를 보면 이런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키더민스터는 영국의 중부에 있는 강을 끼고 있는 내륙의 도시입니다. 일찍부터 이런 공업이 발달했고 큰 배들이 강가까지 들어와서 물건을 구입하고 가고 여러 나라로 수출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이 어떻게 강력하게 했냐면 “교인들은 주일에 시장을 통과하면 안된다.” 그러니까 물건을 사고 안 사고가 아니라 시장을 지나다니면 안 된다고 교회에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은 완전히 노동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그 당시에 청교도들이 모두 힘을 합해서 시장 자체를 방문하지 않음으로써 가게 문을 열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손님이 없어서 장사를 포기하게 해서 주일에 일을 안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게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청교도 교인입니다. 근데 목사님이 주일에 절대 일하지 말라고 엄청 강조하고 어기면 교회에서 처벌을 합니다. 근데 내가 신앙이 있습니다. 내가 수천명의 노동자를 데리고 있는 공장의 주인입니다. 그럼 내가 만약에 결정을 해서 우리 공장은 주일날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수천명이 그날을 휴일로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쉬고 하고 월급을 주고 안 주고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고 한 사람이 결정하면 노동자들을 일주일의 하루를 휴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다가 그 노동자들 중에 상당수는 교인일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이런 것들을 굉장히 고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스포츠 같은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또 한편으로 노동을 금지시키고 이렇게 해서 주일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끔 유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주일에 대한 엄격한 안식일적인 태도를 고수하였는가를 우리들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찰스 1세와 제임스 1세의 이어지는 스포츠 선언들은 청교도들로 하여금 더욱더 엄격한 주일 성수의 개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도록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렇게 압박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IV. 주일성수에 대한 현실적 제언
이처럼 어떤 일들이 결정될 때에 역사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제 우리가 이런 속에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주일이 뭐 별 날이냐 우리 좋은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아간다는 방종주의와 마음은 어떻든지 간에 외적으로 그것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바리새주의 둘 다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청교도들이 자기 시대의 표현으로 해석했던 4계명의 적용을 엄격하게 부과한다면 율법주의를 늘리고 영속시킬 뿐이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 상황에 잘 적용하려고 한다면 청교도들의 해석에서 아주 풍부한 유산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자기 시대에서 고민하면서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 것을 말한 것처럼, 또 청교도들이 그들과는 다른 또 자신들의 독특한 시대 상황 속에서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시대에서 주일을 지켜야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지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주일은 모든 노동으로부터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회를 섬기고 자신의 영혼에 은혜와 말씀을 충만하게 채우도록 집중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이제 유의하면서 다음 다섯 가지 사항을 우리들이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시대에 신앙고백을 작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종교개혁자들을 청교도들의 유산들을 계승하면서 우리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우리 시대의 주일 성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작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또 시대가 많이 흘러가면 그 신앙고백이 그 시대에 맞게끔 바뀌어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주 어린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주일이 어떤 날이고 왜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주일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상세하게 가르쳐서 모든 사람들이 주일을 잘 이해하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이런 교육을 거의 안받고 어른이 된 다음에 주일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런 주일의 신학적 의미를 잘 배우면 성인이 되어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거나 할 때에 주일을 분명하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획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주일을 생각할 때 죄의 문제와 관련시키려고 합니다. 주일날 이런 일을 하는게 죄입니까 저런 일을 하는게 죄입니까? 하며 질문을 갖습니다.
(예화) 최근에 우리 교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강의를 어느 의사가 들었습니다. 이 의사는 월급을 받는 의사로서 큰 병원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전통에서는 주일날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소방서의 대원, 간호사, 약사와 같은 사람들이 주일날 일하는 것이 꼭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주일이라고 모든 의사들이 교회를 가고 병원에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죄가 되느냐 말고의 문제 말고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죄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계속 주일을 못 지킵니다. 영적으로 침체가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주일에 일할 수밖에 없으니까 -매주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달에 한 두 번 일을 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원장을 찾아 가서 사표를 냈습니다. 자기가 월급을 받더라도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일터를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원장이 사표를 받더니 왜 사표를 내려고 하냐, 우리 병원이 대우를 잘 못해주냐, 맘에 안드는 것이 있냐.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던 이 사람이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주일에 교회를 가야 합니다. 그 원장님이 사표를 내지 말고 매주 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에게 큰 간증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일은 안 지키면 죄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일을 지키지 않고 살 때에 그 사람의 영혼이 안식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들을 공급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교인들에게 잘 가르쳐서 인격적인 감화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 교육이 잘 되면 성인이 되었을 때에 아무리 좋은 조건으로 그 사람을 직장에 부른다고 할지라도 주일을 지킬 수 없을 때에 그러한 조건에 응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율법적 바리새주의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제 한편으로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었는데 주일을 지키는 것, 안 지키는 것은 우리와 상관없고 모든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방종주의에 정반대되는 바리새적인 율법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누가 이렇게 했다더라. 라고 하면서 자기도 똑같이 따라하면서 태도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 100여명 정도의 교인이 있는 교회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매우 엄격한 주일 성수를 강조했습니다. 주일날은 절대로 물건을 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교인 중의 어떤 사람은 버스도 안타고 걸어서 교회에 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주일날인데 이렇게 의자가 필요해서 의자를 사놓으라고 저한테 지시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이니까 당연히 의자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왜 의자를 안 가져 오냐고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일이니까 의자를 살 수 없고 월요일에 사놓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냐. 오늘은 의자를 가져오고 돈은 내일 주면 되지 않냐? 이런게 바로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입니다. 자신은 10년, 20년 동안 주일을 빠지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일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풍부한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자유적인 방종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새벽에 간단하게 예배를 드리고 온 종일 돌아다니며 쇼핑하고 놀고먹고 마시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주일날 쇼핑하러 가는 것이 죄일까요, 아닐까요? 오전 오후에 교회 일을 다 끝나고 영화 구경을 가는 것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오전에 점심까지 푹 자고 오후까지 쉬고 저녁예배만 드리는 것은 죄일까요? 주일날 지인을 불러서 집에서 파티를 하는 것은 나쁜 것일까요, 좋은 것일까요? 주일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많은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주일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예배하고 그분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이 가장 중심에 오는 날이 초점이 되는 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살 수는 있지만 그 쇼핑하는 것이 그 주일의 중심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파티를 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마음을 밀어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론가 갈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은혜와 사랑보다 거기 가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영국에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유대인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선교 여행을 하다가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사막 한 가운데서 여행을 멈추고 텐트를 쳤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여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그는 말했습니다. “가고 싶은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그러나 나는 이 주일에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누구도 나에게서 이것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와 방종주의를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신자들의 영적인 변화를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을 강조한다고 해서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의 각성케 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날 주님을 깊이 만나서 성령의 커다란 감화를 받으면 주일이 얼마나 복된 날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놀라운 회심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에 피비 바틀렛이라고 하는 4살 된 어린 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4살 된 아이가 월요일부터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주일이 언제야?” “왜? 어제 교회 갔다 왔으니까 여섯 밤을 더 자야 한단다.” 아이가 맨날 물어 봅니다. “너 왜 그렇게 주일을 기다리니?”라고 엄마가 물었더니 4살 된 어린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요.”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이 여기도 번역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영어로 된 책이라도 보십시오. 그의 설교는 보통 최소한 2-3시간 동안 이어지는 엄청난 길이의 설교였습니다. 그 어린 아이가 그 설교를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나오는 어른들이 쓰는 표현들은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어린 아이의 마음을 깨웠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집안에서 사라졌습니다. 집안에서 어디론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엄마가 보니까 (아이가) 헛간에 들어가서 일정한 시간에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세요. 하나님 내가 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엄마가 들으니까 (아이의) 엄청난 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가 뛰어가 보니까 헛간에서 이 아이가 혼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큰 역사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예화) 저희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불과 4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아이가 깊이 회심하는 광경을 우리는 봤습니다. 또 그 중에 한 아이는 나이가 12살 정도 된 여자 아이였습니다. 11살 아니면 12살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수요일마다 엄마를 따라 교회를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무랐습니다. “너는 다 큰애가 집에 있지 엄마를 따라 다니니?” 이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에요. 엄마를 따라 오는 것이 아니에요. 저도 예배를 드리러 오는 거예요. 요즘 충성에 대한 설교가 은혜로워요.” 그 아이가 맨 앞에 앉습니다. 움직이지도 않고 그림같이 앉아서 저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 설교는 8시 15분쯤 시작하면 거의 10시가 돼서 끝났습니다. 100분 정도 계속되는 설교를 똑바로 듣고 있습니다. 우스운 얘기를 하면 막 웃습니다. 그리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성령께서 그에게 각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화) 이런 경험들을 저는 아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일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교수생활을 하면서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고등학생들에게 설교를 했었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냉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커다란 회심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루에 설교를 180분씩 했습니다. 9시에 예배가 시작되면 12시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설교시간이었습니다. 한 편 설교를 하고 5분 쉬었다가 한 편 설교를 했습니다. 근데 아이들이 움직이지도 않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석고상을 깎아 놓은 것처럼 앉아서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 끝나고 나면 커다란 기도의 함성이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앞자리에 앉기 위해서 9시에 예배시작인데 7시부터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령이 각성케 하시는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교회에서 주일이 거룩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령의 큰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교리교육을 잘 시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런 참된 부흥이 우리의 교회에 일어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V. 결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주일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무를 가진 날일뿐만 아니라 특권을 가진 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날에 임하게 될 큰 기쁨의 하늘나라를 앞당겨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편의적인 자유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또 율법적 바리새주의도 경계해야 합니다. 방종주의도 우리들이 멀리해야 합니다. 마치 주일을 지키는 것이 공로인 것처럼 하나님이 놀라운 댓가를 주실 것이라는 어리석은 기대도 버려야 합니다. 그날이 바로 천국을 앞당겨 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그 말씀의 은혜를 받는 기쁜 날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올바른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주일을 잘 지키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교회 지도자들로서 주일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잘못된 신앙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게 해주시옵소서. 성도들을 올바로 이끌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