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자이신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 김세나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언제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그의 젊은 시절이 아니라 노년에 이 시를 썼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얼핏 보면 어려서부터 익숙해 온 시편 23편을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속에는 보석과 같은 복음들이 많이 담겨 있어서 마치 시편 23편은 원시림과 같은 성경의 장입니다. 시에 보면 “원수들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이러한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 그의 어린 시절 목동 때가 아니라 산전수전을 다 겪고 시련의 골짜기를 모두 통과한, 인생의 노년에 이 시를 썼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시편 23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는 1절이 한 토막입니다. 제목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자기에게 목자가 되실 수 있는지 그 근거를 하나씩 하나씩 제시합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감격스러운 은혜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세 번째 토막은 6절인데,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꿈꿔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세 번 설교를 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부득불 저는 1절과 3절, 그리고 5절을 3일에 걸쳐서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시편 23편을 열자마자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입니다. 왜 이 위대한 시 시편 23편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시작하지 않고 여호와라는 단어로 시작하였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매우 심각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세 성함이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 ‘여호와’ 그리고 ‘주’라는 세 단어입니다. 이 세 단어는 각각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는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라는 단어인데, 학자들은 이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 합니다. 아직 일치된 의견은 없지만 신이라는 것의 복수형이라는 것은 모두 인정을 하는데, 그 복수의 의미가 무엇이고 신을 의미하는 그 ‘엘’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의미가 사람들마다 갈립니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은 ‘울’이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뜻밖에 이 단어는 도토리나무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이름이 도토리나무에서 왔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비바람이 막 몰아치는 태풍의 시기에도 많은 나무들이 쓰러지고 뿌리가 뽑혀도 끝까지 버티고 있는 강한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토리나무입니다. 그래서 엘로힘이라는 말 자체가 강한 하나님, 강한 신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가장 강한 능력을 가진 그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성함은 그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의 백성들에게까지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인데,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즉,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인간도 하나님에 의해 지은 바 되었으니 하나님은 당신 이외에 모든 만물의 소유권을 당신이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세 들어 사는 처지이고, 그래서 그 ‘주’라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과 내가 무슨 관계에 있는가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여호와’라는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로 ‘야훼’일 것이라 추측합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계시된 이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우리로 말하자면 호적에 올라 있는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호적에 올라 있는 이름과 같은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그래서 ‘주’라는 하나님 성함도 존귀하지만, ‘여호와’ ‘야훼’라는 성함은 너무 존숭하기 때문에 감히 그 분의 이름을 소리를 내어서 부르는 것 자체가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거룩한 이름이 바로 ‘야훼’입니다. 이 ‘야훼’라고 하는 이름은 언약 백성들에게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들에게만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하나님에 관한 존함, 성함이 ‘야훼’라고 고백하였을 때 이 시인은 즉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보여줍니다. 그것은 아주 높고 위대하고 온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친히 그분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셔서 언약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나를 특별한 사람의 관계 속으로 불러들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두면서 이 ‘야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처음 볼 때,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제껏 어떤 일을 하였는지 살펴보면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소개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대충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게 됩니다.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능력이 많은 사람인가, 하찮은 사람인가, 등등 평가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라고 불리는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만났다고는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두 눈으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래서 가장 쉬운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대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별을 볼일이 없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밤하늘을 5초 이상 쳐다본지 몇 달이나 지났겠습니까? 볼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골에 살 때는 밤하늘을 볼일이 많습니다. 왜 입니까? 하늘밖에 볼일이 없습니다. 어두워지면 불빛도 없고 도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캄캄한 하늘에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가득합니다. 이 하늘에 떠 있는 밤하늘의 별들이 우리의 육안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게 약 6천 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그 수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무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 아이가 과학 시간에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우주가 얼마나 큽니까?” 선생님은 대답하였습니다. “이 녀석아 내가 그것을 알면 내가 널 가르치고 있겠니? 그렇지만 설명해 줄 수는 있지. 너희 집이 어디니?” “저희 집은 목동입니다.” “그래? 아파트에 네가 산다고 치고 온 세계가 모두 아파트로 뒤덮였다고 치고 거기에 너희 집이 있는데 거기 화장실에 빨간 전구가 있다. 거기에 8개의 날 파리가 돌고 있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 날 파리가 지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너는 그 날 파리 등에 붙어있는 세균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실제로 이 우주가 얼마나 클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충 추측하기에 우주 이 끝에서 맨 끝까지 빛이 150억년 즈음 달려가면 끝에 도달할 것이라 생각하고 아주 더 우주를 크게 보는 사람은 960억년 즈음 달려가야 우주 끝까지 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끝에 가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우주는 초속 2천 킬로미터의 크기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 공간에 우리 태양이 있는 은하계를 우리의 은하계라고 합니다. 그 태양이 속해 있는 은하는 항성, 그러니까 태양처럼 항상 누구 주위를 돌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밝은 빛을 내고 있는 별들의 수만 약 2천억 개 정도 됩니다. 그리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가 20만 광년 정도 됩니다. 부채모양 타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그 2천억 개의 별 중에서 중심부로부터 2만 6천 광년 즈음 떨어진 8시 방향에 태양이 있고, 태양 그 주위를 8개의 행성이 돌고 있고, 행성 주위를 약 260개의 위성들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 세이건이라는 미국의 천문학자가 계산하기를 우리 은하계 안에 있는 모든 별들의 수가 약 4조 개 즈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주는 그러한 은하계가 몇 개나 있겠습니까. 관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생각할 때, 약 1천억 개 정도의 은하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은하계가 4조 개 정도 모인 별들이 부딪히지 않고 질서 있게 움직이면서 은하계 전체가 그 4조 개의 별이 초속 260킬로미터로 우주 공간을 비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밤하늘에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별빛 하나는 보통 몇 천 년 전에 출발하였고, 어떤 것은 몇 천 년 혹은 몇 백만 년 전에 출발한 별빛입니다. 그렇게 드넓은 우주의 별 가운데 인간은 태양에도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기껏 가본 곳이 달인데 그것도 다녀온 지가 50년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지구도 한 바퀴 돌지 못한 채 인생을 끝냅니다. 그것이 바로 우주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격차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며 두려워 떠는 것에서 신앙이 시작합니다. 두려워 떠는 공포밖에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와는 비교될 수 없는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격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데서 신앙이 출발합니다.
매미는 10년 동안 땅에 있다가 부화해서 한 달을 살고 죽습니다. 매미와 참새가 놀다가 저녁 때 헤어지면서 참새가 말했습니다. “우리 다음 달에 만나자.” 매미는 무슨 소리인 줄을 모릅니다. 매미가 파리와 놀다가 파리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다음 주에 볼까?” 파리는 겨우 일주일 밖에 살지 못합니다. 다음 주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파리가 하루살이와 놀다가 헤어지면서 말합니다. “내일 보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전 세계에 가장 오래되었다고 믿는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일본에 있습니다. 7천 5백년 묵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앞에서 서서 한번 넉넉잡고 100세를 살고 간다고 생각하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75대 할머니 때에 그 나무가 태어났고, 그리고 75대까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사라집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 드넓은, 어마어마한 우주를 하나님께서 몇 년에 걸쳐 창조하셨습니까. “거기 있을지어다.”라는 말씀 한 마디로 이 온 세계로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류를 만들었고 이제껏 이 세상에 살다간 인류의 수가 일천억 명 즈음 된다고 하는데, 아무하고도 똑같지 않은 나를 만드신 목적이 있다고 믿는데서 신앙은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왜 나는 태어났고, 이 세계는 있고, 그리고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신앙입니다.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그 주님이 온 우주 모든 것을 지으신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후 하고 불면 날아갈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모여서 투표를 합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치자. 있다고 하더라도 내 인생에는 상관하지 마라. 심지어 하나님은 죽었다. 심지어 하나님은 지구를 떠나라, 이러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겠습니까.
그 높고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그 높고 높으신 하나님을 오늘 이 시인이 “나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인은 실제로 목동 생활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일생 동안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보니까 목자인 자기가 양 떼를 돌보며 산 것과 매우 비슷하게 하나님은 나를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속에는 이중의 유비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하면서 소유격을 사용합니다. 그 소유격 앞에 있는 사람은 아주 티끌 같은 인간일 뿐이고, 그 뒤에 나오는 목자라고 묘사되는 하나님은 자신과 비교될 수 없는 온 땅과 우주를 창조하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일 수밖에 없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게 만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그렇게 자기와 비교될 수 없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과 직접 관련을 맺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시인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른다면, 자기는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목자로 불렀으면 자기는 누구라는 것입니까. 사실은 시편 23편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양’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축업을 할 때 양만을 길렀습니까. 아닙니다. 소도 기르고 낙타도 기르고 염소도 길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편 23편을 읽을 때 자기가 낙타라거나 소라거나 염소라거나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돼지는 치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돼지도 치는데 돼지라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생각합니까.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모두가 자신을 가리켜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누구도 나는 하나님의 늙은 양이라고 말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그립니다. 파란 뉴질랜드 수준의 풀밭이 있고, 하얗게 샴푸까지 한 깨끗한 양이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 아래서, 파란 풀밭에서 하얀 양이 슬로우 비디오로 뛰어가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개떡같이 살아도 상상할 때에는 자신이 그렇게 순결한 어린 양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염소라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의 문맥에서 보면 양은 긍정적인 짐승입니까, 부정적인 짐승입니까? 뱀? 부정적입니다. 어떤 남자들에게는 그것이 긍정적인 동물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정적인 짐승입니다. 뱀이라는 단어 앞에는 무슨 좋은 말을 붙여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방울 뱀, 비단 뱀, 하얀 뱀, 아무리 붙여봐야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보면 양이 반드시 긍정적인 면만을 가지고 있는 짐승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는 어린 양이 순응하면서 재물로 바쳐지는 장면이 나오면서 오실 메시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하는 성경의 언급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서는 양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실제로 지금도 이라크와 같은 중동지방에서 사용하는 욕 가운데 가장 현지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양 같은 놈”입니다. 이 이야기를 했는데 선교사들도 몰랐답니다. 제 설교를 듣고 하도 이상하여 현지에 가서 원주민들에게 물어보니까 제 말이 맞는 것이라고 증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양 같은 놈이라는 것에는 우리말 욕의 ‘개 같은 사람’ 혹은 ‘닭 머리를 갖은 사람’ ‘돼지 같은 인간’과 같은 이러한 의미가 모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모자라고 고집만 세고 아주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뜻이 ‘양 같은 놈’이라는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현지인들이 못 참는 욕입니다. 최악의 모욕입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을 양으로 많이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 떼라고 부르시고 양이라고 부르시고 예수님도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실 때,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로 가라”고 하실 정도로 ‘양’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들에게 익숙하게 들어온 표현이지만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좁은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신약의 의미에서 보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더 넓게 보면 인류 전체를 하나님이 왜 ‘양’이라 부르셨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그러셨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은 각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한두 가지 정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자와 같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곰과 같이 힘이 있든지, 아니면 엄청난 발톱이나 힘을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기린처럼 목이 길어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든지, 아니면 개처럼 코가 엄청나게 발달하여 후각으로 그것을 감지하든지, 아니면 야수들처럼 눈동자가 길쭉해서 숲속에서도 정확하게 자신이 공격할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든지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예화) 한번은 동물의 왕국을 보니까, 재미있는 동물의 왕국이라고 하는데 사실 재미없습니다. 맨 죽이고 죽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나옵니다. 크지도 않습니다. 길이가 한 1m 정도 넘을까, 1m 20cm정도 되겠습니다. 염소같이 생긴 짐승입니다.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데 배고픈 수사자가 딱 노리고 있다가 사정거리에 다가오자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늦게 발견한 사슴은 도망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리 도망가도 사이가 점점 접혀 옵니다. 한 잎에 물릴 것 같은데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가던 길을 확 돌아서 사자와 충돌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슴 머리에는 약 60cm 정도의 뿔이 있었습니다. 사자가 워낙 빨리 달려왔는데 확 터닝해서 맞닥뜨리니까 뿔이 사자의 어꺠 쪽으로 들어가서 등 뒤로 관통하였습니다. 그것을 기자가 찍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자는 쓰러졌습니다. 그 사이에 사슴은 뿔을 빼고 사자의 피를 묻힌 채 도망가 살았습니다. 사자는 그 후에 치료를 하였는데도 정확히 두 달 있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스컹크는 가스를 뿜어서 짐승들을 질식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양은 지독한 근시입니다. 성경에 보면 잃은 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실제로 양은 몇 미터만 떨어지면 그 다음에, 여러분 가운데서도 마이너스 10, 20 내려가는 사람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양은 보이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돌아온 양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양은 달려도 그렇게 빠르지 않습니다. 맹수의 추격을 피할 정도로 빠르지 않습니다. 양에게 뿔이 있는데 그 뿔은 완전히 디자인이지 쓸모가 없습니다. 만두처럼 말려서 딱 붙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동물을 만드실 때에 양이라고 하는 사물은 아예 만들어질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과 공생하면서 인간의 돌봄을 받으면서 인간에게 유익을 주고 살도록 그렇게 창조된 짐승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 말이 안 됩니다. 야생 양들이 있지 않습니까?” 전 세계에서 야생 양이 멸종 위기 동물입니다. 없습니다. 그 산양이 많은 짐승들의 도시락입니다. 산양이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갑니다. 높은 데로 올라가면 먹을 것이 별로 없고 안전하기는 한데 매우 위험합니다. 발을 헛디뎌서 수많은 산양들이 그 비탈길에 떨어져 절벽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내면 하나님이 그 많은 동물 중에 왜 우리 인간을 ‘양’에 비유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찾은 양, 잃어버린 양, 우리 바깥에 있는 양이라고 표현하였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독립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유명한 책, 고백록에서 첫 장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기까지 나에게는 안식이 없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정확하게 14살 2개월 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예수를 안 믿으셨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말입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주일이었는데 교회를 가야 하는 날이었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그때 우리 집은 서울 변두리, 시골 같은 곳이었습니다. 교회까지 30분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철길 옆의 둑길을 걸어가다가 14살 2개월 된 어린아이가 논둑위에 엎드러져 펑펑 울었습니다. 물론 가난했지만 가난 때문에 울었던 것도 아니었고, 무슨 상처가 있어서 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그렇게 목 놓아서 들판에서 울게 만들었던 것은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정말 있는가?” 14살 밖에 안 되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너무 무서웠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는 게 무서웠습니다. 내가 오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내게 다가오는 맣은 시련과 고통은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교회 목사님 설교를 수없이 들었지만 털끝만큼도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수많은 선생님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단연코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나라고 하는 존재는 별로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말썽을 많이 피우는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얌전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습니다. 사색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렇게 목 놓아 들판에서 한참을 울고 눈물을 씻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4살 되던 아이가 결심하였습니다. ‘일평생 무신론자로 살자. 하나님은 없다. 있다고 한들 나는 그분과 상관없다.’ 그리고 칠흑 같은 무신론자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나의 구원은 책읽기였습니다. 사람들과 얘기해봐야 얘기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어보니까, 문학책을 읽었는데 저는 그런 고민을 나만 하는 줄 알았더니, 유명한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많이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주인공들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년 읽다보니까 맨날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였습니다. 문학은 인생에 대한 질문은 수없이 제기하지만, 문학이 답을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풍부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교육을 시킬 때 제일 좋은 것은 한권 읽는데 만원 씩 주더라도 책을 읽혀야 합니다. 스마트폰 밟아 버리고 책을 읽혀야 합니다. 그 후에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답이 너무 궁금하였습니다. 철학과 사상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답을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이 여기 있구나!’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 그렇게 읽고 보니까 답을 찾았던 사람들 중 행복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지 않으면 어디 가서 이야기를 못 하던 때였습니다. 무척 어려웠는데 줄을 치면서 수없이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그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보니까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는 쓸쓸히 죽었습니다. 그렇게 무신론자로 방황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1살 때에 새벽마다 종소리를 들으면서 종소리에 이끌려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도대체 14년 2개월 된 아이가 그렇게 처절하도록 목 놓아 울게 만들었던 그 두려움이 무엇일까, 그 정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이 나이에 들면서 그 두려움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의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호소력을 얻고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사상들에 의해서 이 모든 문화나 이러한 것들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것에 눈을 뜨지 못하였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날 현대인의 삶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 뒤에서 현대 사상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있는지, 그러한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시편 23편 1절을 풀면서 왜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자, 누가 그 14살 된 아이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느 권사님이 그랬습니다. “목사님이야 어려서부터 워낙 영특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셨지, 우리 아이들은 게임 밖에 몰라요.”라고 이야기 하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은 틀렸습니다.” ‘교육’은 ‘education’입니다. 라틴어 ‘에듀카레’에서 나옵니다. 뜻은 ‘이끌어내다.’입니다. 그 아이가 나와 똑같이 14년 2개월 되었을 때 교회를 가다가 골목에 주저앉아 통곡하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때 나를 통곡하게 만들었던 그 질문을 아이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꾸 무서워서 얘들이 나쁜 짓도 하고 쾌락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가 해야 할 것이고, 학교가 해야 하고 교회가 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이 금방 답이 나오는 질문입니까? 인류 역사에서 먹고 살만한 시기마다 그 천재적인 철학자들이 대를 물려가면서 연구해도 아직까지도 답을 찾지 못 찾고 있습니다. 찾았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결국 나중에는 정답이 아니었다고 하는 자기 부정 속에서 철학의 역사가 이어져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거기에 대해서 답을 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같은 질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지, 근원을 알고 그 다음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아야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세계는 무엇인가?’ 아니,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순간에 보면 내 엄마, 내 아빠, 내 남편이고 아내고 모든 인간들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집니다. ‘신은 살아있는가?’ 이것은 네 질문 중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그 아이를 새파랗게 질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왜 그러했습니까. 그런 질문을 여러분 중에도 답을 못 낸 사람이 많습니다. 웃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은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주면서 인생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그 대답이 기독교신앙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도 너무나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우선 성경을 읽고 공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만 읽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지식의 대상도 없고 그것을 생각할 지식을 갖는 주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었습니다. 그 지식을 따라서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자기도 창조되었습니다. 결국 무슨 뜻인가 하면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 사물들에 대한 모든 지식은 하나님 한분으로 수렴이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사물들에 대한 모든 지식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될 때 그 지식의 빛을 가지고 비춰 보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하나님을 모를 때에는 산에 가면 삼겹살 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 보면 록키산맥 발아래 4천 미터 영봉들이 줄지어 있는 그 속에 서 있을 때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것입니다. 사물에 대한 의미가 떠오르게 됩니다. 네 개의 질문은 결국 하나의 질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는 미궁에 빠집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고 자기를 지으셨는가에 대해 생각 없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싶은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람으로 만드신 이유는 공부하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공부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인간의 도리는 세 가지 대상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인간은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류와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존재의 의미를 터득하고 내가 이 세계 속에서 사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잘 드는 비유 중 하나입니다. GPS 시스템이 무척이나 발단해 있습니다. 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핸드폰을 켭니다. 구글 맵을 딱 누릅니다. 내가 깜박깜박한 점으로 보입니다. 그 위에 경도와 위도가 쫙 나타납니다. 내가 아시아 한복판에 있구나, 쭉쭉 펼치면 서울이구나, 더 펼치면 이곳이 응암동이구나, 감자탕골목 옆이구나, 딱 나옵니다. 그렇게 설정해 주는 지도가 바로 지식입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이 지식들을 습득하면서 그 어린아이가 흐느껴 울었던 네 가지 질문,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세계는 무엇이고,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하여 배우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곳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큰 건물이나 인간이 만들어놓은 위대한 업적에 의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마음 안에서 받으십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라고 하는 18세기 미국의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일을 쳐야지만 정신을 차립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를 돌아보면 여러분들이 은혜가 없을 때, 다 떨어졌을 때는 기도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이 일어나든지 이 속에서 생각하고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번 넘어집니다. 된통 깨집니다.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마음이 생겨납니까. 자꾸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어제 밤에 했는데도 오늘 또 다시 기도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새벽에 했는데도 점심 때 기도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습니다. 점심 때 기도했는데도 밤에 또 다시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그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그 고백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하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래서 코끼리 같은 것은 5톤씩이나 되는데 인간이 자기 물건처럼 데리고 놉니다. 중국에 가보니까 호랑이 공원이 있는데 사육사 한 사람이 호루라기 불며 지휘봉을 움직이니까 황소만한 호랑이들이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앞으로 기어, 다 합니다. 그것 벌떡 일어나 한번 물어버리면 한 잎에 아작 날 텐데, 요만한 사람이 지휘봉 하나 들고 20마리의 호랑이를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야단도 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만물의 영장입니다. 뛰어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자꾸만 뭘 시키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 너무 싫습니다. 자기도 한번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일인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임금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갈 길을 정하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하고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주위 사람들이 받쳐 줘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권력을 얻어서 사람들을 짓누르면서 때로는 먹을 것을 주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게 해야 합니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 그렇습니다. 재벌가들, 돈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자기 질서대로 움직이게 하고 필요한 사람이 정치인이면 돈을 줘서라도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이상을 잘 이루었던 사람들이 황제입니다. 황제는 반항하면 9족을 멸할 정도의 권세를 가지고 자기가 스스로 법을 창조하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의 죄를 회개한다고 할 때 그 죄는 무엇입니까. 도둑질하고 이러한 것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다 회개해봐야 빠진 것이 있습니다. 결국 그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그리고 내가 이 모든 사물들의 가치를 자기 스스로 매길 수 있는 최종적인 판단자인 것처럼 살았던 삶의 철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이제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은 내가 나의 인생의 임금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무한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 의지하는 마음의 크기가 바로 사랑의 크기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마음으로 항상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이때 이 고백은 자신이 목동인 시절에 양 떼들은 자기를 지킬 힘이 없습니다. 사자에게 먹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쫓아가서 사자를 때려눕히고 이빨 사이에서 양들을 찾아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뒤에 숨게 하고 자신은 막대기로 맹수들과 더불어 싸우는 용사의 역할을 자처하였습니다. 그렇게 양 떼들이 목자인 자신을 의존했던 것처럼 자신은 그 많은 인생을 살고 보니까 결국 “나는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정치가이고 왕이고, 장군이었던 사람이 그 빛나는 영화로운 인생을 모두 살고난 후에 마지막 고백은 뭐냐 하면 “나는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아주 연약한 갈대와 같은 인간에 불과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그 온 땅과 하늘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인간이고, 자기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악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이신가, 그리고 그 분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친히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것을 생각하면서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니 내가 당신을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인생의 모든 불행은 목자가 없는 데서 시작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어린 시절에 부모님께 버림받거나 상처 받았던 사람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주일날 가족에 대해서 설교하고 비서실에 있는데 어떤 노신사 한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여니까 비서가 어떤 일로 찾아오셨는지 물으니까, 비서를 확 밀치면서 들어왔습니다. 65세 된 남성이었습니다. 자기소개도 하지 않고 제 앞에 소파에 탁 앉았습니다. 앉더니 두 손을 얼굴에 대고 통곡을 하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셔요?” “목사님, 목사님 오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그러셨어요?” “그런데 목사님, 65년 전에 난지 일주일 밖에 안 되는 나를 우리 엄마가 버렸어요.” 그게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목자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자신은 살았습니다. 그런데 65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상처가 안 씻겨 집니다. 저는 100% 이해합니다. 마음으로 같이 울어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갓난아기 적에 잠깐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들이 자꾸 인간으로 태어나서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 철없어서 집을 나갔습니다. 나이가 들고 어디에서 여자 하나 얻어 살면서 자식들을 낳고 살다보니까 인생이 그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본바탕이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근원이 어디인가 말입니다. 그리고 철이 들어서 고향집으로 돌아가서 홀로계신 어머니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빌면서 비로소 인간의 삶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안 해도 되는 어떤 일을 더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는 이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게 신앙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그 품 안에서 온 인류가 서로를 ‘너는 내 뼈 중의 뼈라. 살 중의 살이라.’ 서로 고백을 하면서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맛보게 하신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그렇게 놓고 보면 이 시인이 왜 이렇게 감격하고 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를 언약관계로 불러 주셨고, 선택하셨고, 그런데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으신 목자입니다. 나는 당신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한 마리의 연약한 어린 양입니다.” 그 고백 앞에서 왕이라는 의식, 수많은 전쟁터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장들의 목을 베운 용맹스러운 군인이었다는 의식, 어마어마한 건축헌금을 해서 성전을 지을 준비를 마쳤다는 자부심, 이러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주 하찮은 주님 앞에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하찮은 인간입니다.”라는 고백만이 있습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가 되십니까? 외국 사람들을 만나니까 하는 말이 한국에 와서 제일 놀라는 것이 세계 어디에도 볼 수 없는 미녀들이 무여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그게 화장발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외국인이 와서 가는 곳이 기껏해야 명동, 이태원, 강남입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종류가 다릅니다. 다 화장하고 아침에 민낯으로 강남 가는 사람 있겠습니까? 응암동에 가만히 있다가도 강남에 갈 때에는 뭘 좀 바르고 가지 않습니까. 그래도 여기는 서울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경기도입니다. 외국인이 보았을 때 너무 예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화장에 정성을 기울이는 인류가 전 지구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산을 탕진하면서 노화와 싸우는 나라도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발라도 안 되면 사진 가지고 가서 이것처럼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아름다움은 그러한 외모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나 이러한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그래서 요약을 하자면,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며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가진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제일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두 번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 뼈저리게 회개할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죄입니다. 그 자립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의지하시지 않기 때문에 온 땅과 만물 위에 빼어나게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면 독립할수록 추한 인간이 되고 어린아이처럼 그 하나님을 의존할수록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독립 미, 인간의 의존 미라고 부릅니다. 의존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의존함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처럼 시인을 돌보셨습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을 어떻게 돌봅니까? 사랑으로 돌봅니다. 그래서 잃은 양의 비유를 보면 목자가 집에 돌아와 양을 헤아립니다. 그런데 한 마리가 없습니다. 그 양은 늘 그런 약점을 가진 양이었기 때문에 주인은 금방 압니다. 시간이 언제쯤 되었겠습니까. 우리로 말하자면 한 4시 반이나 5시 쯤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다시 길을 떠납니다. 가다가 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넘어져 다칠 수도 있게 되면 자기가 받을 손해가 양 한 마리보다 비쌀 텐데 그런데도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한 마리에 얼마인가, 달아보면 몇 근인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그 양을 죽여서 가죽도 벗기고 그럴지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 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양이 어디엔가 고통 받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찾아 나섭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양이 같이 있기 때문에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목자 자신이 사랑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찾아 나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언젠가 구원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대차대조표를 써 봅시다. 교회 봉사했다 1점 합시다. 식당에서 밥을 5개월 하였습니다. 15점 기록합니다. 그런데 죄 짓고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감점을 한다고 치면 그럴 때 ‘아, 날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께 진짜 남는 장사였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어느 교회에서는 몇 사람이 졸다가 손을 들었습니다. 없습니다.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그 양을 발견하였습니다. 너무 좋아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희랍어 성경에 보면 ‘두 어깨’로 나옵니다. 왜 입니까. 양이 힘이 들까 봐 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것 보세요.” 동네 사람들이 문을 엽니다. “왜요?” “저녁 먹었어요?” “아니!” “조금 있다가 우리 집 뒷마당으로 다 내려오세요.” “왜?” “잔치를 하려고 해요.” “왜?”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너무 좋아서!” 그런데 그날 저녁에 그 양을 바비큐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양 한 마리에 얼마나 된다고 온 동네 사람들 불러다가 잔치를 하겠습니까. 그러면 동네 사람들 먹이려면 소를 한 마리 잡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양 한 마리를 찾았는데 너무 기뻐서 소 값을 지불하고 조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시련을 만나도 두 가지만 잊어버리면 헤쳐 나올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 나쁜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나를 말씀으로 설복하셔서 나를 건져내십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 어떠한 시련에서 헤쳐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모든 시련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약점을 아시면서 인도하십니다. 2절에 보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정확한 번역은 이것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고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이끄시는도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양은 기본적으로 많은 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헤엄을 못 칩니다. 저는 어려서 시골에서 홍수가 날 때 모든 짐승이 물에 빠진 것을 보았습니다. 소는 헤엄을 잘 칩니다. 돼지도 헤엄을 잘 칩니다. 닭은 물에 안 빠져 죽습니다. 개, 개헤엄 있습니다. 고양이도 헤엄을 잘 칩니다. 그런데 물론 한참 가다가 힘이 빠져서 죽습니다. 그러나 양은 들어가면 곧바로 잠수해서 못 나옵니다. 그래서 물에 대한 무지무지한 공포가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에게 물을 먹일 때에는 흙덩어리로 잘게 으르는 물줄기에 댐을 쌓습니다. 그러면 물이 댐처럼 고입니다. 그게 바로 움직이지 않는 물입니다. 그것을 쉴만한 물가로 번역한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물입니다. 양은 흐르는 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물을 보면서 양 떼들이 와서 그것을 마십니다.
제가 여기에서 멀지 않은 교회에서 교수하면서 전도사 생활을 하였습니다. 제가 그때 중등부를 하였는데 거기 선생님들 중에 진짜 똑똑한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좋은 대학에 다니는 청년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중등부실 뒤에서 선생 한 사람과 학부형이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전도사님, 말도 마세요. 자기 아들 공부 안 한다고 속상해서 저에게 상담하는 거예요.” 그러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똑똑한 친구였습니다. 지금은 서울대 교수로 있습니다. 자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모든 시험에서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답니다. 운전면허까지도 한 번에 붙었고 군대도 다른 사람은 고민하는데 시험에 한 번에 붙어서 6개월 하고 중위 달고 제대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그 시험에도 붙었습니다. 굉장히 순박한 청년이었습니다. “전도사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애들이 왜 공부를 못 할까요? 이해가 안 돼요.” 그러는 것입니다. “나는 이해가 잘 되는데….” “전도사님, 왜 애들이 공부를 못 할 수가 있을까요? 책에 다 나오고 저는 고3 때도 학원에 다닌 적이 없어요….” 책에 다 나오고 모르는 것은 선생님에게 다 물으면 되는데 왜 공부를 못할까 묻습니다. 속으로 ‘잘났다.’ 생각했습니다. 그러고서 두 달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굉장히 우울한 표정으로 다닙니다. “아무개 선생,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 있어?” “아, 전도사님. 세상 살기 싫어요.” “왜 그러는데?” 너무 공부만 해서 체력이 떨어져 테니스를 하는데, 그 당시 테니스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코치가 가르쳐 주는데 일주일 즈음 지나 성질을 확 부리더니 어떻게 그렇게 못 하냐고, 자신이 7년 동안 가르쳤지만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 처음 봤다고, 책에 다 나오고 자신이 잘 가르쳐 주는데 꼭 될 것 같은데 안 되더랍니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 못 하는 사람도 이렇겠구나. 꼭 될 것 같은데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우리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합니다. 여러분 집에 가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옆 집 이야기입니다. 옆 집 엄마는 그 집 아이들과 비교합니다. “야, 옆집 아무개들 좀 봐라.” 아이는 생각합니다. ‘그 집 엄마가 훨씬 낫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이야기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교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 하였을 때 ‘너, 그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 ‘똑같은 때에 등록했는데 얘 봐라, 얘 얼마나 잘 하니? 넌 어떻게 그 모양이니?’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있는 모습 그대로 보십니다.
우리 목사님, 사모님 계셨는데 아들들이 다 잘 되었습니다. 한 아들이 말을 못하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아들만 사랑합니다. 그 아들에게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게 바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누구만 못하다, 누구만큼 신앙생활을 못 한다, 누구만큼 교회 헌신을 못한다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사람은 이런 방법으로 이 사람은 이런 방법으로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엄마처럼, 우리의 약점을 알고 결점을 알기 때문에 그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흐느끼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주님을 구하며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편 23편 1절이 강조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겁나서, 그래서 이렇게 계속 살아서는 반쯤 죽을 것 같아서,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신앙밖에 되지 않습니다. 정말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내가 철이 들고 보니 ‘주님의 품이 제일 좋구나. 내 인생에 모든 비극은 내가 의지할 목자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었구나.’ 그것을 깨달으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이와 같은 충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에게는 결핍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제일 감격하는 대목이 여기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다윗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이스라엘 역사를 바꿔 놓은 사람, 이스라엘 모든 열 왕들의 기준이 되었던 사람,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 솔로몬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한 사람, 이스라엘 최고의 영토를 지녔던 사람, 아름다운 시를 수없이 남겨서 이 시간에도 누군가가 그의 시를 읽으며 3천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눈물을 흘리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문필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을 모두 거두어 내고 한 인간 다윗을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중에 누구도 다윗 같은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야기는 나오는데 어머니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안에 많은 아들들이 있었고 다윗도 그들 중 하나였고, 용모가 빼어나고 준수하다고 했는데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의 피해자였습니다.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왔습니다. 이새의 집에 기름 부을 이스라엘의 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새는 큰 아들부터 데리고 왔습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으려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상하다, 너희 집 아들이 다 입니까?” 분명히 있다고 하는데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새가 생각하다고 “하나 또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면서 데리고 온 아이가 다윗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티끌만큼도 다윗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어떤 여자가 다윗과 사랑에 빠집니다.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사울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신앙의 세계를 별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법궤가 들어올 때 다윗이 춤을 추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빠의 사랑은 딸입니다. 딸이 예쁘지 않습니까. 우리 아들은 저에게 여러 번 맞았습니다. 그런데 딸은 지금 26살인데 꿀밤 한번 때린 적 없습니다. 눈물 나게 야단친 적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랬습니다. 딸은 그렇게 때리고 삿대질하며 키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서 야단쳐도 그렇게 혈기부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 어느 날 강간을 당하고 왔습니다. 아버지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게다가 그 강간범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저히 인생이 외로움 속에서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어둠속에서 보내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은 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해졌습니다.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것 중에 하나만 일어나도 인생의 대폭발입니다. 그런데 그 소설 같은 엄청난 고난을 모두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상처와 아픔, 원한과 복수, 이러한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을 텐데, 어떻게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여러분, 엄마에게 받은 상처는 아빠가 메워줍니까, 못 메워줍니까? 못 메워줍니다. 남편을 만나도 그 상처는 자기 일평생 지고 살아야 합니다. 남편으로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심각합니다. 남편이 자신을 버렸습니다. 엄마가 많이 사랑해 준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 통로가 다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채워줄 사랑, 형제가 채워줄 사랑, 남편이 채워줄 사랑, 아내가 채워줄 사랑, 친구가 채워줄 사랑, 이것이 각자 채워짐으로 인간은 행복해 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느 사람들이 와서 그렇게 나만 떠 받들며 채워주겠습니까. 자신은 그렇게 누구에게 채워줘 봤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태어난 것 자체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하면서 그 상처가 변하여 영광이 되도록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소명입니다. 그런 집안에 태어났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물릴 수 없는데 말입니다. 다시 태어나면 그 엄마 만나지 않겠지 생각하지만 다시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일어난 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렇게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원망 속에 살아간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그렇게 자기를 어린 양처럼 보호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매일 매일 부어주시는 은혜 속에 살면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모든 시련을 이기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에게는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I shall not want.” 나에게는 결핍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돈을 모으면 염려가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돈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잃은 사람들은 건강만 회복하면 걱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사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모든 인생의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고,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 우리에게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인격적인 항복,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는 사실이 이렇게 위대한 것이구나, 그래서 나는 주님이 어디로 나를 이끌어 가던지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나는 주님을 전심으로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며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한 고백을 우리에게서 받아내십니다. 결국 환경을 바꿔서 그 환경이 너무 좋아져서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황제들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한 고백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넘치는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 고백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부흥회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이 고백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