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는 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녹취자: 백지영/원수연
시편 23편은 다윗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 시를 언제 썼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시편 23편은 우리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 다닐 때부터 많이 노래 부르던 찬송가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시편 23편이 다윗이 목동 시절에 지은 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 시는 다윗의 말년에 모든 시련과 고난의 계곡을 통과하고 난 후에 인생을 달관한 경지에서 쓴 시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입니다. 시편 23편은 크게 3토막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째 토막은 1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라고 하는 총론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목자가 되시는지를 차례대로 설명한 것이 2, 3, 4, 5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6절은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사람의 결심과 그리고 미래의 삶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23편을 다 설교하기 위해서는 17시간 정도가 필요한데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6시간 정도 주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압축해서 오늘 저녁에 1절, 내일 저녁에 3절, 모래 저녁에 5절, 내일 새벽에 2절, 모래 새벽에 4절, 이렇게 하고 6절은 다음 기회로 남겨놓고 이번 사경회를 끝내려고 합니다.
우선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함이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이 여호와가 누구실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이름을 여러 개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성함이 ‘하나님’이라는 성함과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하는 성함입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으면 야훼()라고 읽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또 주님이라는 이름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조금씩 의미가 다릅니다. 먼저 ‘주님’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에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서 ‘엘로힘’()이라고 하는 단어는 아마도 ‘울’(‘ul)이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왔을 텐데, 이 ‘울’은 도토리나무를 의미합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폭풍이 불 때에 많은 나무들이 쓰러져도 끝까지 뿌리를 견고히 내리고 강하게 서 있는 나무가 울, 상수리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들 위에 가장 강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로 하나님, 히브리말로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의 모든 민족들에게도 계시해 주신 이름입니다. 이에 비해서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해 주신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성함은 하나님에게 가장 고유한 성함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글자를 히브리어로 네 글자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써놓고 감히 그것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성함 중에 가장 존귀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일컬으면 그 자체가 계명을 어겨서 하나님 앞에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가장 거룩하고 존귀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나 하나님을 계시하였으되 여호와로는 계시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러면서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계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 6장 이전에 나오는 여호와의 이름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학자들은 그 이름은 출애굽기 6장에서 계시된 것이 앞으로 삽입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은 모든 하나님의 존함 중 가장 높고 거룩한 이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뒷집 아저씨처럼 여기고 그리고 농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각에서 보면 씻을 수 없는 커다란 형벌의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시작은 먼저 하나님이 자신과는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그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시고 나는 정말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깨닫고 두려움 속에서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으로 신앙은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은 모양과 색깔, 크기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물에 빗대어서 하나님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설명할 때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처럼 설명할 수가 없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고 다루셨는지를 보면서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나는 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여러분들에게 존재론적인 것으로 보여드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주입니다. 학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우주는 지금으로부터 약 160억 년 전쯤 창조되었을 것으로 보고 우주 이 끝서부터 저 끝까지의 거리는 약 150억 광년 정도 될 것이라고 봅니다. 1년에 빛이 약 30조 km를 달려가니까 그것을 150억년으로 계산할 때 그 숫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숫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150억년 빛이 달려가야 하는 거리라고 하지만 지구에서 달까지는 1.2초면 가고 태양까지는 8분이면 빛이 도착하는데 그게 빛이 150억년을 달려가야 하는 거리니까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매초마다 우주는 폭발을 거듭하면서 2000km씩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확장된다면 그 우주 바깥에 위, 야래, 옆에는 뭐가 있을까? 그것은 우리들이 생각할 수 없는, 우리의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계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과학자들은 이런 우주는 하나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우주가 서로 무한하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와 다른 차원에서 우주를 보면 이 우주도 좁쌀만 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알아들을듯하고 또 알아들을 수도 없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 여러분들이 밤중에 나가서 하늘을 보면 망원경 같은 것으로 해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의 수가 9000개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모든 별은 그중의 몇 개를 빼고는 모두 항성입니다. 항성이란 모든 별들에 둘러 싸여서 가운데 있고 항상 이글거리며 불이 타는 태양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온도로 가스 덩어리가 타오르고 있고 그 불의 온도에 따라서 별들은 푸른 별들로도 보이고 붉은 별로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하늘을 보면 어떤 때는 유난히 왕별이 나타납니다. 그 왕별이 큰 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보니 그게 별이 아니라 은하입니다. 그러니까 수천 억 개의 별들이 한꺼번에 뭉쳐있는 별들의 덩어리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 우주는 약 1000억 개 내지 2000억 개의 은하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의 하나가 우리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입니다. 우리 은하계는 약 2000억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고 바람개비같이 둥그런 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 태양은 그 중간에서 좌측으로 약간 떨어진 거리에 중심으로부터 약 2만 6천 광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옆에서부터 옆에까지는 약20만 년 정도 되는 광년의 거리이고 옆으로 놓으면 접시처럼 되어 있어서 이렇게 얇은 부분이 800광년 이상 빛이 달려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거기에 별과 항성이 약 2000억 개 정도가 있는데 태양 같은 별 하나에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이렇게 여덟 개의 별들이 돌고 있고, 그 별들 주위에 또 별들이 돌고 그 별들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 주위를 돌고 있는 별들이 약 60개에서 250개 정도의 별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코스모스(cosmos)’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쓴 미국의 칼 세이건(Carl Sagan)이라는 학자는 우리 은하계 안에 항성과 위성을 포함해서 모두 약 4조개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넓은 공간이냐 하면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을 서울에서 5백 원짜리 동전 안에 들어간다고 보면 그것 말고 가장 태양에서 가까이 있는 별이 대구쯤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은하계의 거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 시간에 어느 한 학생이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 우주가 얼마나 넓어요?”, “야 그걸 내가 알면 여기서 너를 가르치고 있겠니? 그렇지만 가정을 해보자.” “너희 집이 어디냐?” “우리 집은 서울의 어디 아파트입니다.” “그래? 온 지구가 아파트로 뒤덮여있다고 치고 너희 집 아파트가 한 채가 있고, 거기에 화장실에 빨간 전구가 켜져 있고 거기에 여덟 마리의 날파리가 돌고 있고 그 중에서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이고 너는 그 날파리에게 붙어 사는 수많은 세균가운데 한 마리이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이 도시를 흐르고 있는 태화강이 언제부터 흘렀을까요? 산에 올라가면 부딪치는 발끝에 부딪치는 바위 한 덩어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흙이 뭉쳐 바위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바위가 흙이 되고 흙이 다시 바위가 되기까지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요? 하루살이 하고 파리하고 놀다가 파리가 헤어지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는 집에 돌아가면서 생각을 합니다. “내일이 무엇이F까?” 매미하고 파리하고 놀다가 파리가 말했습니다. “우리 다음 달에 만나자.” 매미가 돌아가면서 생각합니다. “다음 달이 무엇일까?” 매미는 십년동안을 애벌레로 있다가 부화해서 한 달을 살고 죽습니다. 초순경에 태어나면 그달 죽지만 중순에 태어나면 두 달을 삽니다. 매미하고 강아지하고 놀다가 강아지가 인사를 했습니다. "내년에 만나자." 매미는 내년이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강아지는 길어야 15년입니다. 인간은 그것보다 좀 더 길어서 제명대로 살았다고 해보아야 70년이나 80년입니다. 아주 예외적이라고 하면 90년에서 100년을 살다가 죽습니다. 거북이하고 사람이 놀다가 헤어지면서 거북이가 말했습니다. “우리 다음 세기에 만나.” 거북이는 수백 년 심지어는 천년을 넘게 산 거북이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성되었다가 수십억 년을 있다가 폭발하고 사라지는 하늘의 천문학적인 연대에서 본다면 인간 하나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80년 혹은 90년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후’하고 스쳐지나가는 코끝의 바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바람처럼 짧은 기간 동안 살면서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가 무엇일까?"라고 묻습니다. 죄는 가장 기본적으로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최고의 존재이고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의 형이상학적인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기독교신앙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 하면, 그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한 분이신지를 깨달으면서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존재의 격차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존재의 격차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고 그리고 나는 정말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앞에 두려워하며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으로서 신앙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높고,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혹은 하나님의 손짓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사라질 수도 있고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세계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천문학자들은 20억년 후에는 안드로메다은하와 우리 은하계가 합해지면서 춤을 추듯이 두 은하의 융합이 이루어져서 ‘밀코메다’라고 하는 새로운 은하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워낙 거리가 멀기 때문에 별들이 부딪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세월을 앞에 보면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구가 생겨난 것도 40억 년에서 50억 년 전이라고 봅니다. 언젠가 태양은 자기 수명을 다하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둘러싸고 있는 행성과 함께 공중에 먼지처럼 분해되어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내일이나 오늘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장구한 세월 앞에서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39살의 꽃다운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지하실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교인들을 혼내고 야단치면서 목회를 해왔습니다. 어제의 일과 같습니다. 그런데 벌서 23년, 24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거짓말 같습니다. 그러니 그 무한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높으심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제가 36세에 이사야서 40장을 읽다가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요 모든 육체의 영광은 그 풀의 꽃과 같도다.”라는 말씀을 보고 6개월 동안을 울었습니다. “하나님,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이렇게 허무하게 창조하셨습니까?” 무한한 우주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인간, 내가 그렇게 나를 우상처럼 섬겨도 이슬처럼 사라져갈 그러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요즘은 하나님 이름을 가지고 장난치고 까불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신앙처럼 여겨지는 세태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의 기본은 그런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절대자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하나만 있으면 신앙생활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두렵고 떨리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고 그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고 싶은 것입니다.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목회자이며 부흥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시대의 미국 뉴잉글랜드의 백성들을 향해서 이 사람들이 짓고 있는 가장 커다란 죄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두루 살펴보면 경건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옷깃을 여미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여호와, 그렇게 높고 위대하신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한히 높으신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을 합니다. “나의”라는 소유격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그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위대하셔서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로 이 모든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창조된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해도 그를 창조한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나의 목자’시니, ‘my shepherd’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이 정말 개인적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앙은 공동체와 함께 커가지만 그 신앙의 시작은 한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하신 분이시고 동시에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이신지를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그 위대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비참한 인간이며, 그래서 자신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그 구원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고백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그렇게 두려워해 본 적도 없고 나의 죄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회개해 본 적도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것이 회심입니다. 자기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써 회심이 이루어지고,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특히 성인들은 그런 회심의 경험 없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다.” 누구든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분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육신의 아버지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 때문에 하나님의 손자로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이 시인은 개인적으로 그분의 위대한 성품과 그분의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마치 자기의 친구인 것처럼, 자기만을 아는 것처럼 그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그분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가정평화를 위해서 할 수 없이 여기에 나와 주는 남편들도 있고 반대로 가정 평화를 위해서 여기에 나와 주는 아내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엄마, 아빠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그냥 나와 주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또 연세 드신 분들 중에는 며느리 아들에게 얹혀살면서 자신이 교회에 나오면 그들이 제일 좋아하니까 그냥 생활비 대는 셈치고 교회에 나와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내 영혼이 찬양하네.
신앙의 모든 기쁨과 행복은 내 남편이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우리 아내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직접 만남으로써 신앙의 큰 기쁨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그분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그렇게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은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는 것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그런데 아무리 2절부터 6절까지 다 찾아보아도 양이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양을 치는 사람도 목자고, 말을 치는 사람도 목자고, 혹은 돼지를 치는 사람도 목자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 산에다 울타리를 쳐놓고 수천마리의 개를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신탕집에 파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 키우는 사람도 목자입니다. 그런데 목자라는 단어를 들을 때 자기가 돼지라고 생각을 하거나 개새끼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양도 늙어서 치매 걸린 그런 양이 아니라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늙은 사람도 자기가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그 양도 보통 양이 아니라 하얗게 샴푸로 목욕하고 드라이기로 말린 아주 백옥의 순결한 양이 파란 풀밭 그리고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가는 벌판을 슬로우 비디오로 막 뛰어다니는 모습을 그리면서 그게 자기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살기는 돼지처럼, 늑대처럼, 개처럼 살면서 곧 죽어도 자신은 그런 순결한 어린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 23편은 한국의 맥락(context)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맥락(context)에서 쓰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짐승을 분류할 때 긍정적인 짐승과 부정적인 짐승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짐승으로 예를 들자면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짐승이겠지만) 돼지가 부정적인 짐승일까요? 또 뱀은 부정적인 짐승입니까? 긍정적인 짐승입니까? 비단뱀은 어떻습니까? 그럼 꽃뱀? 무엇을 갖다 붙여도 뱀은 부정적인 짐승입니다. 까마귀는 긍정적입니까 부정적입니까? 원래는 까마귀가 고구려의 상징이었습니다. 너무 힘드니까 중국 사람들이 거기에다가 덧칠을 해 가지고 까마귀가 아주 재수 없는 짐승인 것처럼 해서 고구려의 정신을 문질러버린 것입니다. 어쨌든 까마귀는 우리에게 부정적인 짐승으로 새겨졌습니다. 까치는 어떻습니까? 저는 부정적입니다. 우리의 잔디밭을 이놈이 와가지고 다 파먹어 버렸기 때문에 세상에서 보기 싫은 새가 까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문맥에서는 양은 긍정적인 짐승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양이라고 표현하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순한 사람, 누구를 해코지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동에서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중동에서는 이라크나 이쪽지방 사람들 중에서 사람들이 제일 듣기를 싫어하고 들으면 참지 못하는 욕이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머리도 없고 깨끗하지도 않고 고집만 센, 제멋대로 하는 멍청이, 우리로 말하면 닭대가리 정도 되는 표현과 같은 것이 양입니다.
성경에 보면 양이라는 짐승은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같이 나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는 양의 일부분의 특성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제사에 쓰이던 어린양입니다. “그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아서” 이처럼 성경에서 우둔하고 순하고 그래서 자기가 죽음으로 끌려갈 것을 알면서도 거칠게 항의하고 뭔가 대들지 못하는 그런 모습으로 묘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드리셨다고 했을 때 예수를 어린양으로 부르고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양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을 보면 고난 받을 메시아에 대한 그림이 나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양은 판단력이 없기 때문에 자기 고집대로 막 흩어져서 가고 돌아오지 못합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입니다. 그래서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자기 스스로 대열을 찾아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길 잃은 양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스스로 돌아온 양의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돌아온 탕양? 탕자이지 탕양이 아닙니다. 못 돌아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우리를 양으로 묘사하셨을까요? 여기는 아주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짐승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짐승은 날카로운 이빨과 강한 발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랑이, 사자 같은 짐승입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상상도 못하는데 제가 중국에 갔을 때, 하루에 한 번씩 호랑이가 어떻게 소를 잡아먹는지를 실연을 봤습니다. 그런데 짐승들한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 한 마리가 끌려나오고 문을 딱 열어주니까 며칠 동안 굶은 호랑이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소가 가다가 저기서 호랑이가 오는 것을 낌새를 채고 두려움에 막 달립니다. 호랑이는 서둘지도 않습니다. 막 달려갑니다. 그리고 공중으로 붕 점프를 한 다음에 네 발로 어깨를 발로 차면서 달려가는 소를 쓰러트립니다. 거의 공식입니다. 쓰러트린 다음에는 이빨로 꽉 목을 뭅니다. 그러면 한 400키로 정도 되는 소가 미친 듯이 앞뒤로 구릅니다. 그러면 이빨을 꽉 문채 자기도 같이 구릅니다. 그리고 한참 물고 있으면 결국은 숨이 딱 끊어집니다. 그리고 나면 여러분 생각하기에 어디부터 먹을 것 같습니까? 제일 먼저 꼬리부터 먹습니다. 그게 제일 맛있는 부위입니다. 그 다음에 말랑말랑한 뱃살을 먹습니다. 그리고 해체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많은 짐승들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동물의 왕국이라고 하는데 저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끔찍합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염소같이 생긴 동물이 -크지도 않고 조그마하고 뿔이 한 60, 70cm 정도 나와 있는 초식동물- 풀을 먹는데 배가 고픈 사자가 낮은 포복으로 살살 기어옵니다. 일정거리까지, 여기서부터는 달리기를 하면 내가 잡을 수 있겠다 하는 데까지는 뛰지를 않고 포복으로 가서 풀 사이에 숨어 있다가 이제는 저 놈을 따라 잡을 수 있겠다고 하는 곳에서 스퍼트를 내면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립니다. 그것을 한 200m 안에 결판을 내야지 그 이상은 사자가 달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염소같이 생긴 동물은 미친 듯이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워낙 사자가 빠르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자한테 쫓겨 가던 이 작은 짐승이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거꾸로 확 유턴을 했습니다. 그리고 충돌을 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뿔이 사자의 배로 들어갔습니다. 배로 들어가서 사자의 등 뒤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자가 쓰러지니까 그 작은 짐승이 뿔을 뽑아내고 도망을 갔습니다. 촬영하던 사람들이 마취 총을 쏴 가지고 그 사자를 치료하고 거기다가 팩을 붙였는데 결국은 한두 달 동안 앓다가 사자는 죽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짐승들이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자주 동네에서 아이들과 함께 데리고 놀던 짐승 중 하나가 고슴도치였습니다. 신기합니다. 그런 고슴도치가 가끔 동네에서 발견이 됐습니다. 막대기로 툭 치면 동그랗게 탁 맙니다. 그러면 누구도 건들 수가 없습니다. 밤송이 같아서.
모든 것들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있는데 양은 없습니다. 눈은 지독한 근시이고 빨리 달리 수 있는 다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빨은 껌처럼 풀을 씹기에 적합하게 어금니만 발달돼 있습니다. 뿔이 있는데 만두 비슷하게 말려서 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디자인상으로 있는 것이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양은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과 함께 인간의 보호를 받으면서 인간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동물이 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양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는 죄가 있습니다.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옛날에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14살 2개월 되던 해 주일 날 교회를 가고 있었습니다.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져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교회 안 다니셨지만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고모들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에 다녔습니다. 엎드려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왜 14살 2개월 된 아이가 그렇게 통곡을 하면서 울었을까? 가난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했지만 가난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세상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그리고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그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서웠습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제가 제 인생 최초로 자신에 대한 자각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생각하며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날 처음 떠오른 질문이 아니라 늘 떠오르던 질문이었습니다. 난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에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씻고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일생을 무신론자로 살다 죽겠다. 하나님은 없다. 또 있다고 한들 그분이 나에게 무슨 권리가 있는가? 나를 태어나게 한 것 말고 해준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없겠지만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없다고 치고 인생을 살 것이다. 교회는 오늘로 끝이다.” 딱 접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교회의 집사님, 권사님들이 "목사님이야 어려서부터 워낙 영특하셨으니까 열네 살 2개월 되었을 때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을 했지만, 우리 애들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마트폰이나 들고 만날 게임이나 하고 이러고 삽니다." 그래서 제가 꾸짖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저하고 똑같이 어느 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엄마, 나는 누구야?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야?” 이렇게 말은 못하지만 그런 질문에 매일매일 직면하면서 무섭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교육이라는 말을 영어로 하면 에듀케이션(education)이라고 하는데 라틴어 에듀카레(educare)에서 나옵니다.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아이가 질문은 있지만 그 질문이 자신 안에 명확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것을 부모와 교사들이 이끌어내서 “사실은 네 마음속에 있는 고민은 이런 거란다.” 라는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 교육입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혼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가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허위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첫 시간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스마트폰을 콘크리트바닥에 놓고 높이 뛰어서 발로 밟아버려라. 그러면 네 인생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를 치워버려라." 그 넘쳐나는 정보, 그중에 99%는 쓰레기입니다. 몰라도 되는 지식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을 읽고 주체가 되어서 자기의 인생을 고민해야 됩니다. 여러분, 주일날 와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런 스마트폰, 그런 문화 속에서 일주일 내내 삽니다. 말씀의 씨는 뿌려졌는데 그게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텔레비전에 넋 놓고 살고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엄마, 아빠, 형, 삼촌, 누나를 보면서 자라게 됩니다. 친구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모르면 자기가 소외될까봐 너무 무서운 겁니다. 그러니까 살아도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게 아닙니다. 남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인생의 가장 진정한 가치는 자기가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주체적으로 사는 그것이 뭐냐면 우리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얘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게 바로 자기가 진정으로 주체가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양이라고 하는 이 짐승에 비유한 것은 뭐냐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대부분, 회심하지 않으신 분들을 빼놓고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은 언젠가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죄가 무엇을 떼어먹고 누구를 때리고 미워하고 그런 죄가 아닙니다. “나는 이제껏 내 인생의 주인을 나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탕자처럼 인생을 방황했고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찬양) 눈물 흘리며 참회하였었네 나의 마음이 뜨거웠었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2주 전에 디스크 수술을 했습니다. 척추 수술을 했는데, 구멍을 뚫고 깎아내는 수술이었습니다. 제가 잘 때 항상 옆으로 누워서 잡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3일 내지 4일 동안 천장만 보고 누워있으라고 했습니다. 일어나지도 말고. 그래서 시키는 대로 그대로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꼬리뼈 있는 곳에 살갗이 벗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아프고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아파서 수술 받고 누워있기 전까지는 내 힘으로 걸어 다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매순간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호흡하게 하시고, 걸어 다니게 하시고, 신앙으로 살게 하시고,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 때문에 우리들이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있을 때는 그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루를 끝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형언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기적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두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납니다. 주님의 인격에 대한 아름다운 경험이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독립성이 강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을 때는 기도를 하라고 막 야단을 쳐서가 아니라 기도를 안 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며칠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못 받아도 견딜 수가 없이 괴로운 심정이 됩니다. 그러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진짜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진짜 살아있는 예배는 수많은 악기와 조명, 기가 막힌 음향시설, 그런 것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막 살아서 움직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어린 아이처럼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의 시간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시간이 됩니다.
1998년 9월 30일이 주일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로마서 8장 12절을 가지고 30번 정도 설교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11시에 예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개척교회 때 교인들이 그저 230명 정도 모일 때였습니다.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정말 잘 됐습니다. 교인들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작은 교회지만. 한 시간쯤 설교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르고 주기도문을 하고 축도를 하고 마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1시 40분이었습니다. 설교만 2시간 24분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사람 누구도 2시간 24분 동안 설교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이 눈치가 있으니까 자꾸 꿈지럭 거리고 일어나고 그러면 ‘저 사람들이 지루해하는구나.’ 알 것 아닙니까? 아무도. 왜 그럴까요?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 ‘내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두운 밤길에 양떼와 목자는 어디로 가버리고 나 혼자 들판에 버려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한 마리의 양이 그 어둠속에 떨어져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겠습니까? 목자가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함께 무리를 지어 다니던 동료 양떼들이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그 가족들이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는 화려한 악기, 빵빵한 음향, 그런 거 아무것도 없어도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환상의 경배가 됩니다.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예배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대부분 비슷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나 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높고 위대하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쏟아본 적이 있습니까? 예배가 끝났는데도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도저히 자리를 뜰 수 없을 정도로 그 은혜의 감격에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멀리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살았던 죄를 뉘우치는 그런 처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린 사람들이 있습니까? 극장 구경을 가도 15분 전에 도착을 해서 팝콘도 사고 콜라도 사는 사람들이 예배당은 항상 5분 전에 옵니다. 그것도 5분 전에만 오면 다행입니다. 도떼기시장처럼 우르르 몰려 들어오고 무슨 이유인지 아예 15분, 20분이 돼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고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하기를 “주일날 왜 사람들이 교회로 올까요? 예배가 끝나고 집에 가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한 시간 하고 나면 입맛을 다시는 사람들이 예배시간은 지겹고 긴 겁니다. 그중에서 가장 지루한 시간이 설교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견딥니다. 견디는 모양도 가지가지입니다. 앉아서 주보를 펼쳐놓고 빨간 펜으로 오자를 고칩니다. 토요일에 해야지. 이미 나온 걸. 고치면 뭐합니까? 헌금이 얼마 들어왔나. 낸 사람은 가로로 몇 명, 세로로 몇 명인가. 나눠보고 곱해보고. 한 사람 앞에 얼마씩 했을까. 광고란을 읽습니다. 누가 시집가는구나. 결혼했구나. 죽었구나. 그래도 예배는 계속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하나님보다 더 높은 누가 전화를 했는지 벨이 울리면 바깥으로 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자 밑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졸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떨어트립니다. 옆에 사람하고 필담을 나눕니다.
저는 말합니다. 거기 하나님 없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오신다고 하면 제가 말리겠습니다. 하나님 가실 데도 많은데 그런 불한당이 있는 곳에 왜 오셔야합니까. 여러분, 진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의 최고의 모독이 뭔지 아세요? “이 새끼, 너 나쁜 놈, 못된 자식.” 이게 욕이 아니라 “당신 누구야? 나 모르겠는데.” 그게 최고의 모욕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곳에 오시겠습니까? 자기네들끼리 괜히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하나님 거기 없습니다.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하나님 거기 안 계시다고 확신합니다.
다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그것을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렇게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그 사랑과 은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런 인간을 주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부르시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손을 들고,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주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나는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자, 그러한 우리의 마음의 상태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총체적으로 복종하면서 살겠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 상태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서 굴복하는 삶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 많은 짐승 중에서 유독 양에다가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맨날 주일날 오면 잡아먹을 듯이 회개하라고 그러시는데 뭐 우리가 그렇게 큰 죄를 졌습니까? 신문에 나온 적도 없고, 법원에 끌려간 적도 없고, 경찰서에 간 적도 없습니다.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죄를 짓지 않고 그런 마음으로 살 바에야 차라리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나는 주님의 은혜와 용서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더 빨리 만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짓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이외에 사랑하는 것이 없을 때입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의 영혼은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던 죄에 대해서 자기가 깨트려지면서 회개할 때입니다. 그 때에 그 영혼은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됩니다. “나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분만이 나의 모든 것이다.” 그렇게 일생을 산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 삽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에 관한 교훈을 많이 가르쳐주었던 사랑의 사도 요한이 뭐라고 말합니까? “누구든지”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얘기합니다. 자기를 포함해서 누구든지. 왜? 자기도 한 때는 죽는 게 무서워서 자기 목숨을 예수님보다 사랑해서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예수님을 버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해결책을 무엇입니까?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쁜 그리스도인은 누구냐. 주일을 안 지키고 죄를 짓고 이런 사람이 나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회개가 뭔지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늘 회개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통렬하게 회개할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없이 내가 살 수 없습니다.”
12세기에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교회 야사에 의하면 아퀴나스가 주님을 깊이 만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금식하고 고행을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답니다. “나의 사랑하는 종 아퀴나스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무엇을 원하길래 그렇게 나에게 부르짖느냐?” 이 하나님의 사람이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느냐?” “하나님, 나에게 무엇인가를 주시려거든 당신 자신을 주시옵소서. 주님은 나의 것이고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기도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말씀을 탐구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행복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힘겨운 봉사가 아니라 내 존재의 의미를 찾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라고 하는 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목자라는 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또 한 가지는 인격적인 인도입니다. 말이나 소 같은 것들은 목장에서 길러집니다. 서부영화에 목장들이 나옵니다. 저녁때가 되면 카우보이들이 채찍을 휘두르고 총을 쏘면서 말들을 한곳으로 몹니다. 말들이 두려움 속에서 막 뛰어가면 사람들이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말들을 우리로 데리고 가서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은 그렇게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여행을 갔다 왔던 어떤 여행가가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는데 양들 수백 마리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다가 목동이 오줌이 마려워 어디로 내뛰었습니다. 그러니까 양들이 움직이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운전자들이 클랙슨을 막 누르고 라이트를 깜박깜박 비추면서 양들을 좀 비켜보려고 했지만 움직이지를 않더랍니다. 목동이 다시 돌아와서 “얘들아, 가자.” 하니까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양떼들이 움직이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을 우리가 느끼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심정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고 우리의 마음의 심정과 생각이 주님께로 흘러들어가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과 생각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조국교회 교인들은 공부를 너무 안합니다. 그냥 부지런히 성경을 들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합니다. 물론 대영교회에서는 열심히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목사님이 깊이 있는 설교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많은 교회에서 사람들이 일 년이 지나가도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거나 책 한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책을 통해 설교를 통해 배워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죽고 코에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렇게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교회에 교리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라틴어로 가르쳐주는 것이 있습니다. “스튜데오 에르고 숨”(studeo, ergo sum)” “나는 공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예전에는 공부하고 담쌓고 살던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이제는 성경을 탐구하고, 책을 읽고,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심지어는 신학교육을 받고 그러면서 그런 열네 살 2개월 된 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진정한 인생을 사는 것인지, 자신의 삶에 자신이 진정한 주체가 되어서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수 있는 지혜자가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타이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형식을 획일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연애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계시는 것이 내 맘에 기쁨이 되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신앙생활이 뭐냐면 하나님과 연애하는 지성입니다. 하나님과 뜨거운 사랑에 빠진 지성.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최소한 네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성경을 어디를 읽으십니까?”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지금 무슨 봉사를 하고 계십니까?” “지금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이 네 가지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인격적으로 깨닫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 사는 내가 얼마나 잘못되었나!’ 하고 뉘우치면서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해내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찍어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이 우리의 모든 심성과 마음의 구조를 아시면서 우리를 다루십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생활을 할 때 교사들이 있었는데 모두 그렇게 한결같이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유학하며 공부하고 있는 학생가운데 한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대 교수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저 뒤에서 그 교사분이 어느 학부형하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 선생,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에이, 전도사님, 뭐긴 뭐겠어요.” 아무개가 하도 공부를 안 하니까 집사님이 너무 속상해서 자기 아들 공부 안한다고 선생인 자기한테 하소연하는 이야기랍니다. 그러더니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전도사님, 애들이 왜 공부를 못할까요?” 그러고 물어 봅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떨어진 시험이 없답니다. 운전면허까지 한 번에 붙었답니다. 그리고 군대도 다른 사람들은 가서 3년 동안 고생하는데 무슨 시험을 보니까 6개월 만에 장교를 달고 제대를 하더라고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자기는 고3때도 8시간씩 자고 학원에는 근처에도 안 갔답니다. 서울대 한 번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떨어진 적도 많고 떨어지는 게 잘 이해가 되는데 그게 차이구나 그랬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랬더니 “아니 전도사님, 어떻게 그럴 수가 없습니까? 학교 가면 책에 다 나오고, 선생님이 가르쳐주고, 그래도 모르면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는데 왜 공부를 못합니까?” 그래서 제가 속으로 ‘으이그, 잘났다.’ 몇 달 흘렀습니다. 두 달쯤 흘렀는데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교회에 왔습니다. “최 선생,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러니까 “전도사님, 저 인생 살맛이 안나요.”“왜?” 너무 공부만 하니까 몸이 약해져서, 그때 테니스가 유행이었는데, 테니스를 배우러 학교 근처 테니스코트에 갔답니다. 한 일주일을 배웠는데 하루는 그 코치가 신경질을 내면서 자기한테 오더라는 겁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못하냐고. 이게 안 되냐고. 내가 여기서 7년 동안 가르쳤지만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 처음 봤다고. 아니 어떻게 못할 수가 있냐고. 여기 교본에 다 나오고 내가 다 가르쳐주는데. 그런데 꼭 될 거 같은데 공이 안 맞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 공부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예화) 제가 34살에 신학대학교 교수가 됐습니다. 만 32살이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애들이 가관입니다. 그때는 대학 들어가기가 되게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쉽지 않지만 서울에서 대학을 들어가기란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때 내가 다니던 학교가 안양에 있었는데 안양만 해도 아이들이 서울에서 통학을 할 수 있으니까, 게다다 딸들을 지방대에 안 보내려고 하다보니 어떤 학과는 33대 1이고 신학과도 4대 1, 5대 1 되는 겁니다. 아이들이 들어옵니다. 아이들이 목사가 되겠다고 온 아이들인데 내가 보기에는 얘는 예수를 안 믿는 거 같은 겁니다. 면접시간이 됐는데 한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 풀어서 “담배 피는 놈들 전부 수험표에 이름 적어라.” 그래서 면접관에 놓고 면접을 봅니다. “왜 왔냐?” 그랬더니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왜 신학을 하냐?” 그랬더니 “열심히 공부해서 정말 진실한 주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정말이냐?” 그러니까 정말이랍니다. “그런데 너 왜 조금아까 담배 피고 돌아다녔냐?” 얼굴이 새빨개집니다. 확 떨어트려버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횟수로 5년을 사역을 했는데, 하다보니까 그렇게 뒤흔드는 것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제가 교수로 있을 때 별명이 검찰 총장이었습니다. 제가 눈뜨고 못 보는 것이 커닝이었습니다. 걸리면 전부 다 0점 처리 해버렸습니다. 그 다음서부터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겁니다. 나를 학생들이 굉장히 어려워했습니다. 리포트를 써서 냈는데 수백 명의 리포트를 봐도 교수에게는 이게 본적이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어디서 본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옵니다. 나중에 조교하고 바닥에 다 깔아놓고 찾아보니까 한 놈이 리포트를 써서 인쇄체, 샘물체, 필기체 이렇게 따로 뽑아서 낸 겁니다. 불렀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불렀습니다. 잘 알죠. 지도교수니까. 저 친구가 어떤 친구인지 잘 알죠. 문을 탁 열고 들어옵니다. 껄렁껄렁 대며 “아, 교수님, 제가 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덜렁덜렁 들어옵니다. “너 거기 앉아.” 앉습니다. 그때 일부러 화를 내야 되는 겁니다. 기선을 제압을 해야 됩니다. 리포트 뭉치 이만큼을 얼굴에다 확 집어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너 같은 놈을 신학교 가서 목사 되라고 도장 찍어준 목사님이 누구냐? 너는 상대할 가치도 없고 그 목사님 하고 내가 통화를 좀 하자. 전화번호를 대라. 내가 직접 통화를 해서 목사님이 너를 어떻게 보고 주의 종이 될 수 있다고 도장을 찍어줬는지 내가 좀 따지고 싶다. 전화연결해라.” 전화기를 줍니다. 이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리고 변명을 합니다. 그럼 또 퍼붓는 겁니다. “너, 내가 당회에다가 편지를 보내겠다. 너처럼 커닝하다가 걸린 이런 사람들이 목사가 되면 미래의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으니까 교회에서 학교 좀 안 나오게 해주십시오, 하고 편지를 쓸 거다.” 난리가 난 겁니다. 그렇게 박살이 나고 나가는 겁니다. 밖에서 서 있던 애들이 “어떻게 됐냐? 어떻게 됐냐?” “말도 하지 마.” 그 다음 아이가 들어옵니다. “그 따위로 하려면 당장 학교 집어 쳐!” 그러고 내보냈는데 그 다음 애가 들어오는데 앉습니다. 밖에서 다 들었으니까 ‘이제 난 죽었구나.’ “커피, 녹차, 생수, 주스, 네 가지가 있는데 뭘 먹을래?” “아, 괜찮습니다.” “그래도 말해라.” “아닙니다.” “따뜻한 녹차 한 잔 마실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커피 한 잔 따라주면서 “차 한 잔 마셔라.” 마십니다. “요즘도 권사님 새벽기도 다니시냐?” 걔네 엄마 묻는 겁니다. “네.” “너 외아들이라고 그랬지?” “네.” “권사님이 기도 많이 하시니?” “네.” “네 아내는 아직도 인쇄소 다니냐?” “네.” “얘기 들으니까 너 학교 끝나고 세차장에서 알바한다며?” “네.” “너의 아내가 그렇게 인쇄소에서 고생하고 어머니 권사님이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실 때 소원이 뭐겠니? 네가 진짜 좋은 주의 종이 되는 거 아니겠니?” 눈물을 확 쏟습니다. 그런 애보고 “너 그러려면 때려 쳐!” 그러면 1층에 내려가서 바로 자퇴원서 쓸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봐도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할 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이 사람마다 다루시는 방법은 다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발자취를 돌아보십시오. 살아온 인생의 내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공포 속에서 벌벌 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이 저렇게 나를 책망하시지만 사실은 그 마음속에 나를 향한 불타는 사랑이 있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자기 아들을 못 박기까지 사랑하는 핏빛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주님은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길을 걸어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서 죄밖에 없는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런 인격적인 사랑으로 불러달라고 그분께 매달리는 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인격적인 인도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마리 양을 찾아갑니다. 시간은 어스름한 저녁시간입니다. 걸어가다가 발목이 다친다든지, 짐승을 만난다든지, 강도를 만난다든지 하면 양 한 마리보다 더 큰 손해를 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한 마리를 찾아가는 겁니다. 왜? ‘양 한 마리에 얼마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참 목자가 아닙니다. 참 목자는 그 양이 얼마가 되든지, 언젠가는 그 양을 잡아서 가죽도 벗기고 팔고 양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참 목자는 지금 그 양이 어디엔가 떨고 있을 그것이 너무 가엾어서 견딜 수 없어서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참 목자는 그 양을 찾아가지고 어깨에 얹고 동네에 돌아옵니다. 하지만 황당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마 그 참 목자는 연립주택 같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물어봅니다. “여러분!” 동네 사람들이 다 창문을 열고 “왜 그래?” “저녁 먹었어?” “아니 아직.” “다들 모여! 내가 오늘 잔치를 할게!” “왜 좋은 일 있어?” “잃어버린 양을 내가 찾았거든. 너무 기뻐. 내가 잔치를 열어줄 테니까 모두 나와서 우리 같이 밥 먹자.” 그 양을 잡아서 바비큐를 해준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잔치를 위해 그 많은 사람을 불러 먹이려면 소를 잡아야 될지도 모릅니다. 양을 찾았다고 소를 잡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게 가능한 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입니다.
언젠가 어느 청년이 나보고 그럽니다. “목사님, 저는 요즘 하나님이 너무 불쌍해요.” “에이,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정말이에요.” “왜?” 라고 물으니까 “하나님은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덕을 본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면 하나님이 너무 불쌍해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대차대조표 써보셨죠? 한쪽 란에 ‘자기 아들을 주고 샀음’ 비용처리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준 것을 옆에다가 적어봅시다. ‘교회 가서 일주일에 한번 씩 청소했음.’, ‘지금은 다 어디론가 없어져버렸지만 한 몇 명 전도했었음.’, ‘예배도 모두 드렸음.’ 더 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비용입니다. 그럼 투자가치가 있었을까요? 만약 그것을 하나님이 계산했더라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하나님 당신의 형상을 받아 창조된 여러분 하나하나가 목자 잃은 양처럼 유리하고 방황하는 것이 너무 가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고귀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까지 여러분들을 사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일평생 그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받은 헤아릴 수 없는 그 무한대의 사랑 앞에서 나는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나의 인생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주님께 순종하고, 그 사랑 때문에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랑 때문에 불순종과 죄에서 돌이키고, 그 사랑 때문에 목표가 없었던 내 인생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그 섬김 속에서 찾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오늘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가슴을 저미는 하나님의 피어린 사랑을 전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또다시 이전처럼 똑같이 자기를 주인 삼으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오늘 우리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실하게 회개하고 이런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살을 찢고 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향하여 살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보십시오. 다윗을 위대한 사람이고 영웅이라고 묘사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다윗과 같은 삶을 살아보겠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거절하겠습니다. 왜? 이 사람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한 나라의 위대한 왕이었고, 부자였고,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었고, 위대한 시인이었고,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의 깊이는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궁창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진리를 본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누구였습니까? 어머니 얘기는 거의 안 나오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때 그는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한다는 여인과 함께 결혼했지만 그는 자기의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자녀들도 있었지만 자기 뱃속으로 낳은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을 때 그것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놈이 한 짓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놈은 자기가 거느리고 잠자리를 같이 하던 자기 어머니뻘이 되는 여자들을 범하면서 자기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바라볼 곳이 없이 외롭게 살다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너무너무 싫어하시는 불륜이었습니다. 그리고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영혼의 긴 어두움 속에서 헤맸고,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릴 것 같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을 거두실 것 같은 두려움을 느껴야 될 정도로 인생의 심한 어둠 속을 헤맸던 사람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사람의 인생은 부족한 것투성이의 인생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훨씬 행복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뭐라고 그럽니까? “I shall not want. 나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왜? 모자라는 것이 너무 많고 상처투성이의 인생이었는데 왜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까? 온 땅과 하늘 위에 탁월한 하나님의 사랑, 자신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 때문에 그는 그렇게 시련으로 가득 찬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지만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왜? 인생의 상처,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더 위대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덮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렇게 외로웠기 때문에 주님을 찾고, 상처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위로가 넘쳤고, 고난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무엇인지를 배워가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목자가 계십니까? 세상의 성공을 찾고 그것을 여러분의 자원으로 삼아서 여러분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려고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진정한 인생의 행복에 내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도달할 수 없고 그리고 이제껏 까지 나를 사랑해주시고 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붙잡혀 사는 것 이외에 내 인생에 진정한 기쁨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확실하게 예수를 믿으셔야 됩니다. 노예와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을 믿지 말고, 살기 싫은 부부가 애들 때문에 못 헤어져서 그냥 그냥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믿지 말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 앞에 막힌 것이 있다면 진실한 회개를 통해 털어내고,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새롭게 하며 강물처럼 넘쳐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사는 불꽃같은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