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혼을 소생시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녹취자: 백지영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왜 시인에게 하나님이 목자이신지를 2절서부터 차례대로 논증해 가고 있습니다. 건너뛰었습니다만 2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기본적으로 이 2절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 즉 움직이지 않는 물이 나옵니다. 이것은 다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양떼들에게 이 푸른 풀밭은 그냥 간단히 뛰어놀고 놀이하는 곳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식당입니다. 그 자체가 양식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가장 낮은 차원에서부터 차례대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곤궁할 때에 자신에게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은총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깊이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3절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러 가지 많은 묘사가 나오지만 3절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고 고백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소생'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야'라는 단어인데 그냥 '살아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심에, 혹은 살아있게 하시며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매우 중요한 단어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영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영혼이 무엇일까요? 영혼이라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들어보았고 영혼에 형용사가 되면 영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냥 감으로 대개 그런 것이려니 합니다. 영혼에 대한 공부를 하자면 오늘 밤을 새도 다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최소한 이 정도는 이해해야 되겠다고 하는 지식을 짧은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정리해서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인간존재의 구성 요건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사실은 성경과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고 플라톤주의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상들이고 기독교에서 일부 많은 종파들이 그러한 철학적인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영이라는 말도 나오고 혼이라는 말도 나오지만 그것은 서로 교호적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사람이라고도 말하고 인간이라고도 이야기하듯이 영과 혼은 그런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물건을 볼 때 이게 부품이 무엇으로 되어있는지 혹은 몇 개로 되어 있는지를 아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것을 분해해 보거나 아니면 맨 처음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에 가서 몇 개의 부품으로 만들었는지를 확인하면 이론의 여지없이 명쾌하게 이 물건은 몇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졌다라고 판결이 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간을 뒤로 돌려서 그래서 맨 처음 사람이 창조될 때 하나님이 어떤 부품을 사하용해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하늘과 이 땅에 있는 이 모든 우주와 세계를 창조하실 때 언제나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거기에 있을지어다' 히브리어 성경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거기에 그것이 있기를 원하노라'하니까 모든 것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끝없는 우주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그렇게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셔서 땅은 짐승을 내라, 물에는 물고기가 가득하거라, 그리고 땅은 씨 맺는 과일과 채소들을 나게 하라 그러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흙으로 사람을 빚으십니다. '흙'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파르'인데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티끌.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인간을 당신이 창조하신 많은 물건 가운데 티끌을 사용해서 창조하셨을까? 성경에서 티끌이라고 하는 것은 무가치함을 의미합니다. 가장 무가치한 사물을 모아서 그것으로서 빚어 사람의 형체를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지상에 있는 자원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육체를 만드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인간에 '후'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과거의 어떤 신학자들 이게 바로 하나님 자신이 마치 풍선에 있는 바람을 넣는 것처럼 자신을 인간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차별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후'하고 숨을 부시는 것은 당신 자신을 나누어 주시는 과정이 아니라 창조의 행동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에게 영혼이 창조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지상의 자원을 사용해서 창조되고, 인간의 영혼은 지상에 있는 자원 없이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셔서 그 인간 속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도 하나님이 하나씩 하나씩 그 영혼을 창조하셔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만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사람과 만나게 하셔서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살아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는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였고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주입하신 영혼입니다. 그러면 처음 인간이 생산될 때 두 요소로 생산이 되었으니 인간은 결국 영혼과 육체로 지은 바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비록 흙으로 사람이 창조되었지만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늙음과 소멸이 없이 최고의 완전한 인간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그렇게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필멸의 몸이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필멸할 몸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맨 처음에 태어나고 태어난 사람이 점점 완성이 되어가지만 어느 정도 완성의 정점에 올라간 다음서부터는 그 다음에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그게 남자들은 25세, 여자들은 23세가 정점입니다. 거기서부터 이제 소멸로 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멸이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 결국 죽음입니다. 죽음이 인간 안에 들어옵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생명이 빠져나가고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면서 그러면서 인간은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흙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육체 그 자체가 다시 그 흙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회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 아무리 늙지 않겠다고 안티 에이징의 과학을 동원해서 가산을 기울여서 젊게 하려고 해도 성공해봐야 요기입니다. 요기만 성공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어느 시점이 지나가면 그 모든 노력이 마치 흐르는 강물을 모래 가마니로 막으려는 것처럼 무위로 돌아가고 어마어마한 늙음의 힘이 밀려오면서 와르르 허물어지면서 이제 인간의 일생이 끝나게 됩니다. 죽으면 인간은 조용히 시체가 됩니다. 내버려두면 한 7년 정도 되면 모두 분해되어서 다시 그 티끌로 돌아가고 그 티끌로 돌아간 것들은 다시 원소로 변합니다. 지금 이 공간 안에도 예전에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원소가 여기 떠돌아다니고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 존재입니다.
이에 비해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영혼은 우리들이 가시적으로 크기, 모양, 부피, 색깔, 딱딱하고 무름, 길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잴 수 있는 그런 사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혼은 그런 식으로 측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부피와 크기와 넓이가 있는 것이 이게 진짜 있는 것이고 이렇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각도에서 보면 영혼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물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측정하는 척도를 각기 달리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꽃이 있습니다. "꽃이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아, 꽃이 있구나. 이런 약간 하얀 색의 꽃이 지금 설교자의 손에 들려져 있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어를 바꿉니다. "내 안에 너를 향한 사랑이 있다" 그럴 때에는 "있다"는 의미가 이런 하얀색으로 이렇게 직경 한 6센티 7센티 정도의 꽃잎으로 있다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영혼이 있다"라고 할 때에도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어디에나 다 있지는 않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영혼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영혼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날 때 2.5키로밖에 안됐는데 지금은 예를 들어 80.8키로다 이렇게 커졌습니다. 그러면 요만큼에는 영혼이 있고 여기는 영혼이 없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영혼이 팽창하는 것인가? 또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내 영혼이 너한테 출장갈 수는 없습니다. 내 영혼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소적인 한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혼은 따라서 직접 영혼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았다는 말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인간 안에 있으면서 자신이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그의 인격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내 보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게 영혼의 특징입니다.
영혼에는 하등한 기능과 고등한 기능이 있습니다. 하등한 기능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느끼고, 추우면 춥다고 느끼고, 배설하고 이런 기능들이 하등의 기능입니다. 그에 비해서 영혼의 고등한 기능은 세 가지인데 인식하고, 그 다음에 감정을 느끼고,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고 결정하는 그러한 기능을 인간의 영혼이 가진 고등한 기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등한 기능으로는 그냥 간단간단한 일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추위와 더위를 느끼는 일들을 하지만 고등한 기능으로는 도덕적인 것들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정말 좋은 것인가? 이게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 그리고 그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을 받고 자기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고 하는 것들이 영혼의 고등한 기능입니다.
자, 이렇게 되다 보니까 혼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육체는 필멸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죽음이라고 그럴 때 간단합니다. 숨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은 죽음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일은 지금도 불가능합니다. 의학적으로는 심장의 맥박이 끊어지고 뇌의 활동이 끊어지고 등등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충격기를 갖다 대면 또 살아납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디부터가 죽음이라는 것을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인간의 육체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이런 게 죽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압니다. 결국은 죽으면 소멸이 됩니다. 그런데 영혼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지만, 영혼은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죽은 영혼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해해야 될 게 무엇이냐 하면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식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혼은 죽음을 맞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에 가는 영혼들도 죽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의미상으로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혼이 죽었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몇 가지 의미를 갖는데, 우선 첫 번째 의미는 영혼이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기능을 하지 않을 때 그때 영혼은 죽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기능을 하는데 그 힘이 매우 약할 때 그때에도 우리는 영혼을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온갖 죄들이 열거되면서 그것을 영혼의 죽은 행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육체는 죽으면 아무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죽으면 더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온갖 악과 죄를 만들어냅니다. 영혼이 살아있으면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고 진리를 밝히는 수많은 효과들을 생산해 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 이렇게 모여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죽어있는 것 같은 영혼의 상태를 살아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영혼의 상태에 더 생명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의도대로 영혼이 작용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육체를 움직여서 우리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창조된 그 본분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육체가 아무리 활발하게 살아있어도 영혼이 죽은 상태가 되면 그 활발한 힘을 가지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에 종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 기독교 사상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육체의 생명은 영혼이며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시니라." 영혼이 올바른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육체를 장악하면서 어떤 삶이 덕스러운 삶인지, 인간으로서 무슨 도리를 다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우리의 몸을 지도해 가면서 우리의 삶 전체가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늙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도 안 늙었다고 하는 것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장로님 오늘 식사하시면서 "목사님, 15년 20년 전하고 그대로입니다." 그러시는데 내가 밥을 산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좋은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죽음의 기운이 파고 들어옵니다. 우리는 완전성으로부터 점점 점점 멀어집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요? 어차피 우리 인생은 태어나고 흘러가고 소멸하고 그리고 사라집니다. 태어나고 흘러가고 늙고 소멸합니다. 그게 인간의 존재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이 전부라고 보면 여자는 스물세 살부터 흐느껴 울기 시작해야 하고 남자는 스물다섯 살부터 통곡을 해서 우리 나이 때쯤 되면 울다가 기운이 빠져서 쓰러져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흘러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이 육체가 모두인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늙음이 너무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기운이 사라져 버린다고 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50세, 목사님 연세쯤 될 때 그때까지 평생소원이 병원에 한번 입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래서 하얀 침대에 누워서 링거를 꽂은 연약한 팔로 사람들의 손을 잡아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 얘기는 제가 그렇게 튼튼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강철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저의 평생소원이었는데 그 다음서부터 소원이 성취되기 시작하는데 너무 자주 성취됐습니다. 그래서 계산을 해 보니까 10년 동안에 열한 번을 입원하고 아홉 번을 수술을 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데 어떤 때 생각을 하면 너무 비감합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열정과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욕구는 전혀 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그때 오는 비감함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극복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인간이 성숙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병들고 아프고 늙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간을 사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그러니까 아무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 늙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이 더 온전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그런 의미들이 그 영혼이라고 하는 지도 위에서 그려지는 내용들입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리고 재미있습니다. 영혼에 대한 공부는.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 3절을 다 못하니까.
그래서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안 하는데 이 시인이 그렇게 절실한 고백을 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확 살아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언젠가 시인의 영혼도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아닙니까? 실제로 다윗이 쓴 이 시편을 보면 곳곳에서 영혼이 환희의 송가를 부르는 때도 있지만 죽은 것처럼 생기를 잃어버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소리도 이 시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한 때 살아 있던 영혼이 왜 죽은 것처럼 되었을까? 그래서 영혼의 고등한 기능이 심각하게 저해를 받고 그리고 인간이 육체가 영혼에게서 통제되지 않는 그러한 죄의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그런 힘든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상세하게 설명을 하면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것을 딱 한 가지를 지적하라고 하면 살아있는 영혼이 죽음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근본적으로. 그게 뭐냐 하면 죄 때문입니다. 죄가 아니면 어떤 것도 영혼을 죽음의 상태로 데려갈 수가 없습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 죄, 고난, 무지 이런 것들이 시편에서 인간의 영혼을 죽은 상태로 데려가는데 사실은 뒤에 있는 두 가지도 첫 번째인 죄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무지는 그 자체가 사실은 죄입니다. 모르는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무지를 이그노어런스(ignorance)라고 하는데, 그래서 청교도들은 맘씨가 좋은 사람은 "이그노어런스 이스 올모스트 이블"(Ignorance is almost evil.) "무지는 거의 악이다" 이렇게 표현했고, 아주 엄격한 사람은 "이그노어런스 이즈 더 베리 이블"(Ignorance is the very evil.) "무지는 그 자체 그게 바로 악이다"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잘 몰랐어요.' 그러면 좀 봐주지만,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몰랐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큰 면책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논리적으로 말하면, 무지라고 하는 것은 지식의 혜택을 내가 못 받았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되고 내가 적극적으로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한 것이 무지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몰랐어요.' 할 때는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말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무지는 알지 아니하기로 자기가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지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왜 누가 안 깨우쳐주었느냐?" 물어보았습니까? 물어봐야 깨우쳐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 하면 무지한 교회입니다. 무지한 사람, 무지한 성도. 무지하면서 열심이 뛰어난 사람은 굉장히 이용하기가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제일 미워해야 될 것은 무지입니다. 인간에게는 무지를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어쨌든 끊임없이 배워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무지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은 뿌리를 딛고 내려가 보면 마지막에 만나는 것은 결국은 죄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내가 신문에 나올만한 죄를 지은 적도 없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는 죄와는 상관이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날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리로 만든 비커 위에 찬물을 넣고 개구리 한 마리를 올려놓았습니다. 개구기가 깡충 뛰어나오면 얼마든지 뛰어나올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접시같이 생긴 비커였습니다. 밑에다가 불을 붙였습니다. 1초에 0.02도씩 온도가 상승하도록 조정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물이 점점 뜨거워지는데 개구리는 가만히 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20분 후에 푹 삶아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만약에 약간 따뜻한 물에 큰 개구리를 집어넣었으면 그 개구리가 우리 사우나 하는 것처럼 뜨거운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시원하다 그랬겠습니까? 이 주인이 미쳤나하고 뛰어나왔을 것입니다. 주부들은 잘 이해합니다. 애들이 비오는 날 바깥에서 진흙을 묻혀가지고 마루에다가 난장판을 해 놓은 것은 걸레질 한번 하면 끝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오래간만에 싱크대 밑이 어떻게 되었나 하고 판자를 뜯어서 보니까 온갖 기름부터 시작해 가지고 때가 잔뜩 묻었는데 큰 쓰레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청소기를 돌리고 빗자루로 쓸어도 안 닦아집니다. 그것은 특수세제를 가지고 닦아내지 않으면 안 되고, 심지어는 다 닦아내도 결국은 장판 색깔이 변색되어 버립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때가 껴서 세월에 흘러가서 절어버린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화) 어느 군인들이 개울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병사 셋을 모아놓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부대를 하나씩 주면서 "너희들을 지금부터 이 부대에다가 50키로 그람씩 돌멩이를 담아온다. 실시." 그랬습니다. 세 병사가 갔는데 한 사람은 굉장히 미련하고 우직했습니다. 50키로 짜리 돌멩이를 찾았습니다. 하나를 찾아서 부대에다가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20키로 짜리 하나 30키로 짜리 하나를 담았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자잘한 공기 돌을 천개쯤 담아가지고 50킬로를 만들어가지고 왔습니다. 저울에 달아보니까 정확하게 50킬로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명령이 아주 황당했습니다. "모두 돌멩이를 원위치 시킨다. 실시." 한 개를 가지고 온 사람은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두 개를 가지고 온 사람은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천개를 가지고 온 사람은 그 중에 단 하나도 제자리에 못 갔다 두는 것입니다.
요즘은 굉장히 좋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건물을 지으면 구청에다가 신고를 하면 여기에 5배수 배출을 허가를 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 건물에서 변을 보면 별도의 관을 통해서 좍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게 안 되어 있고 통을 파야 했습니다. 엄청나게 큰 통을 파야 합니다. 우리 맨 처음에 교회 지을 때 그렇게 팠습니다. 파 가지고 700인분용이라고 팠는데 성도들이 한 이천 명쯤 모이니까 일 년에 한번이 아니라 한 4개월 6개월에 한 번씩 퍼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청에 신청을 하면 용역업체에서 옵니다. 그런데 용역업체가 냄새가 하도 나니까 낮에는 안 푸고 새벽에 옵니다. 새벽 기도할 때쯤 되면 오는데 그 차가 올 때는 꼭 벨소리를 울리면서 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입니다. 베토벤이 그걸 보고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거 거기다 달으라고 그 음악을 작곡한 게 아닌데 ‘띠리리리 리리리리 리’ 그러면서 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와서 아저씨들이 내려서 큰 파이프를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나서 빨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게이지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죽죽죽죽 올라갑니다. "이제 다 됐습니다." 그리고 탁하고 계산을 "몇리터입니다. 그리고 돈이 25만원입니다. 내십시오." 그리고 고지서를 끊어주고 간단 말입니다. 그게 그 뒤에 보면 약간 유리로 되어 있어서 출렁거리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침마다 푹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저 똥차를 내가 여기서 만났다고. 그런데 그 운동선수들은 새벽에 똥차 만나는 걸 그렇게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날 꼭 이긴다고 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러고 지나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상상해 봐도 굉장히 기분 나쁠 것입니다. "아, 왜 저런 이야기를 할까?" 그런데 이제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것을 더러운 것을 그대로 두지 말고 잘 섞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씩 걸러서 노란 액체만 남았습니다. 불순물이 하나도 없이 순전한 똥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아주 반짝 거리는 스테인리스 분무기에 넣었습니다. 카펫이 깔리고 인테리어가 잘 된 집에서 햇살을 받으면서 공중에다가 칙 뿌렸습니다. 약간 노란 빛깔의 작은 물방울들이 확 퍼지는데 너무 멋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분무기에서 나오는 물안개 같은 그 성분과 건더기가 출렁거리면서 달리는 똥차의 성분이 동일 성분입니까? 서로 다른 성분입니까? 동일성분입니다. 그게 죄의 특성입니다. 죄가 큰 죄가 있고 작은 죄는 있습니다. 그런데 성분 그 자체는 동일한 성분입니다. 그러면 그 죄의 성분이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것입니다. 반감, 어떤 사람이 싫다고 생각하면 그러면 그 사람 목소리만 들어도 싫습니다. 내가 라디오를 탁 키면 어느 여자 아나운서가 나오는데 난 그 사람 본 적도 없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소리하고 화법이 너무 싫습니다. 그래서 탁 켜서 그 사람 목소리면 얼른 꺼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싫으면 목소리도 싫고, 옷 입은 것도 싫고, 자는 것도 싫고, 깨어있는 것도 싫고, 밥 먹는 것도 싫고, 안 먹는 것도 싫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것입니다. 그게 죄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렇지만 질은 똑같은 질입니다. 작은 것들이 계속해서 쌓여갑니다. 그러면 어마어마한 폭발적인 힘은 나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 영혼은 계속 죽은 상태가 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문에 나올 정도로 큰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굉장히 양심적으로 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의 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없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리분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여튼 뭔가 봐도 아니야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문에 날 만한 커다란, 경찰서에 전화하면 와서 잡아갈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죄의 영향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러한 영혼의 죽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시인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도다”라고 고백을 했을까? 그것은 두 가지 방법도 있는 게 아니라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죄의 크기와 모양은 다양해도 본질이 하나이듯이 죄에 대한 해결책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회개입니다. 회개.
시인은 사무엘하 11장까지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1장부터 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가 지은 가장 심각한 죄가 세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입니다.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은 행정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괘씸하게 보셨던 이유는 동기가 행정적인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굉장히 싫어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인구조사는 사람만 헤아리는 게 아니라 군대에 나아갈 수 있는 전투병의 숫자를 헤아리는 인구조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마필도 조사를 해서 수효를 헤아립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왕국이 어느 정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측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조사해서 한번 왕국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매우 거스르는 죄였고 성경은 사단이 다윗을 충동해서 그 죄를 짓게 했다고 합니다. 그 일로 인해서 온역이 일어나면서 수만 명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로 죽습니다.
두 번째로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그것도 일반적인 고대 국가의 맥락에서 보면 사실 문제가 될 것도 없습니다. 옛날에는 가산제 국가라고 해서 나라 자체가 왕가의 재산입니다. 그러면 왕이 원하면, "네 마누라가 괜찮다. 나한테 헌납해라." 왕에게는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 있었고 거기에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산제 국가가 아닙니다. 나라가 왕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면 왕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를 구현하는 것이 왕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것을 거스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십니다. 더군다나 그 죄가 임신을 통해서 알려질 것 같으니까 이 우리아를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징계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시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 이야기는 어떤 뜻이냐 하면 구원의 기쁨을 거의 잃어버렸고, 죽은 것처럼 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성령을, 기름 부은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일시적으로 그와 함께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신이 임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렇게 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영을, 기름부음 받은 자의 영을, 성령을 거두어 가시는 것을 자기의 전임자 사울에게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성령을 거두어 가신게 아니라 거두어 가시자마자 여호와의 악신이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치광이로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것을 다윗은 누구보다도 옆에서 그 시작부터 마지막까지를 다 지켜본 사람입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 상태에 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냐 하면 자기의 온 몸이 수척하게 마르고 그리고 눈물이 침상을 띄울 정도로까지 회개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그 죄와 씨름하는 치열한 과정을 통해서 그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아니하였더라면 절대 몰랐을 인간의 본성의 악함과 영혼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는 위대한 다윗으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어쨌든 그런 놀라운 상황이 전개되는데 회개합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이라고 하는 2세기의 교부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회개 속에서, 왜냐하면 신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죄와 완전히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매일매일 회개하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경험했던 바이고, 사도들이 경험했던 바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만히 보면 죄가 많은 사람들은 절대로 눈물 흘리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순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합니다. 아이러니하지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미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큰 죄가 자기를 덮쳐도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정결하게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흥회를 해도 안 와도 될 사람이 늘 모입니다. 진짜 와야 될 사람들은 안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오늘 간절히 기도해서 내일 한 사람씩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데리고 나와서 옆에 앉혀서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 영적인 자선행위입니다. 그렇게 시인은 그런 깊은 회개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절실하게 경험했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하용조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부부가 손잡고 제자훈련 나오는데도 이혼하는 부부 많이 보았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에 둘이 손잡고 나오는 부부는 이혼하는 부부를 못 보았답니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쌓고 공부를 해도 그것이 죄를 이기는데 도움은 되지만 결정적으로 죄를 이기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정결한 마음속에 신령한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 사들고 가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손잡고 공부하러 왔다가 헤어져도, 둘이 손잡고 와서 서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용조 목사님한테 직접 들은 것입니다. 본인이. 일평생 제자훈련하신 분이 그 이야기를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그런 훈련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도 새벽마다 나와서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앞에 있는 저 최 집사보다 나를 의롭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경건하게 사나이다.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눈을 떠서 누가 보는 사람이 없나 그렇게 기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새벽에 나온다고 해서 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자기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 회개 속에서 죽고, 죽으면 죽은 것만큼 자기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얘기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고 했던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회개에 대한 심각한 설교를 듣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그런 시대입니다. 그런데 아주 확실한 것 하나는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그냥 일 년 내내 마치 죄수 취조하듯이 그렇게 설교하면 안 되겠지만 그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설교를 통해서 선명하게 빛을 볼 수 있어야지만 회개가 나오고 그래야지 그 속에서 영혼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막 예배시간에 사람들이 육적으로 열렬해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떠한 인공적인 그런 것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성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조용히 흐느껴 웁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러면서 그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살고 싶어 하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매 주일을 맞이하면서 영혼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소생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있는 영혼으로 사는 것과 죽은 영혼으로 사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놀라운 차이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인생의 의미는 인생의 길이가 아닙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혼으로 그렇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영혼을 살아나게 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은 것 같은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그렇게 죽은 것 같은 영혼의 상태로 사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게 오늘 성경에 나오는데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시인의 영혼을 죽은 상태에서 회개하고 영혼을 확 살아나게 하신 이유는 그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매우 어려운 단어 하나를 여기서 만나게 됩니다. "의"가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인데 의의 길이라고 묘사하는 것일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굉장히 어려운 단어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 의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히브리어로 '쩨덱크' 혹은 '쩨닥카'라고 불리는 이 '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의롭다'라고 것은 '올바르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올바르다'라고 말하려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기준이 필요할 것입니다. 기준. 무엇을 기준으로 볼 때에 올바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올바름의 기준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그냥 각기 시대마다 각기 조금씩 다른데, 그것이 양심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면 그럼 그것이 올바른 것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에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너무 끔찍한 죄를 저지르면서도 양심에 거의 추호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관적인 양심의 작동 하나만을 가지고 작동이 안 한다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나오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같은 사람들의 범죄는 그 자체가 양심의 기능이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올바르다는 개념을 맡겨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입장에서는 올바르다는 것을 어떻게 놓고 잴 수 있느냐? 특히 구약성경으로 돌아가서 보면 이것은 기준이 율법입니다. 그 율법이 기준선이 되고 율법에 합치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고 이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이 의입니다. 그 ‘의’가 두 단어로 사용이 되는데 히브리어에서 '째덱'()이라는 명사로 사용되면 ‘그런 의로운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의 내면의 품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성명사가 되면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행하는 많은 의로운 행동들’, 그것을 또 ‘의’라고 부릅니다. '쩨덱카'()라고 여성형용으로 부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설명이 되느냐 하면, 결국 한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느냐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람됨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의가 있는 사람은 결국은 그 사람도 불의할 적이 있겠지만, 불의한 행동을 할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의 전체적인 삶은 일관성 있게끔 의로운 행동을 하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엊그제 뉴스를 보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우리는 고속도로 다니면서 통행료 떼어먹은 적 있습니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게 가능하다고도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일 년에 떼먹히는 돈이 350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0번 이상 고속도로에서 통행료를 안 내고 도망친 사람만 팔만육천명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기술도 묘하다 어떻게 하느냐 그랬더니 번호판 앞에다가 커튼을 단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위치를 누르면 까만 커튼이 좍 잠시 내려온다고 합니다. 지나가고 지나가면 딱 누르면 커튼이 다시 위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인터넷에서 스티커를 타서 붙이면 반짝하고 카메라가 터지면 유리처럼 반사가 되어가지고 번호가 안 보인답니다. 그리고 빨리 달리면 번호판이 저절로 딱 꺾어지면서 글자가 안 보이게끔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할 시간에 돈을 벌어서 내지. 이런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름의 기준을 인간의 주관적인 양심 하나에 맡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율법이라고 봅니다. 딱 부합한 상태. 그런데 이제 성경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의인과 악인이 대조가 되어서 많이 나오는데 그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하고 다른 것입니다. 의인은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른 일만 하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고 죄도 짓고 이러지만 근본적인 이 마음속의 질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게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의인입니다. 악인은 안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올바르게 살라고,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으라고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살라고 주신 이 계명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래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참으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이 아닙니까? 예,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이라고 부르실 때에는 그냥 몰골이 사람인 사람만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 가면 갈수록 참다운 인간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 길이 바로 의의 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길을 걸어가면서 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것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두 가지 종류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흙이라는 물질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지상의 자원을 소비하면서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이 한 2주일만 굶겨놓으면 이렇게 웃으면서 여유 있게 설교를 못 듣습니다. 금식을 결단하지 않는 한. 힘이 없어서. 뭐가 필요합니까? 인간은 이 세상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눈 떠서 세수할 때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드는 순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세상의 자원을 소비하면서 삽니다. 왜? 원래 육체는 이 지상의 자원을 소비하면서 생명을 지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밖에 모릅니다.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우리의 육체는 그렇지 않습니까? 며칠을 굶으면 힘이 없지만 한 끼를 잘 먹으면 힘이 솟습니다. 그리고 싸구려를 먹으면 기분이 별로 안 좋은데 좋은 것을 좋은 곳에서 대접받으면서 먹으면 기분이 훨씬 좋습니다. 걸어가면 별로 기분이 안 좋은데 좋은 차를 타면 기분이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우리에게 효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 육체는 흙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자원 천상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 영혼의 양식이 바로 진리입니다. 끊임없이 영혼은 진리라고 하는 양식을 먹음으로써 영혼 자신을 살리는 생명의 떡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그 진리를 우리의 영혼에 생명 떡처럼 먹여주심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그 양식을 얻어서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렇게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한없이 어렵게 느껴지던 진리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의 교훈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복잡한 철학적인 지혜가 없어도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떻게 이 세상에 사셨는지를 보면 그 안에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 되는 생명의 진리가 확 들어오게 됩니다. 놀라운 진리의 힘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의 말하자면 영혼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죄와 악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의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알리는 위대한 선교를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말로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도 선교를 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셔서 이 세상 한복판을 지나가게 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면서 저들이 무엇 때문에 우리와는 다른 사람일까를 묻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지금은 이렇게 교회에 집회를 많이 안 다닙니다.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그런데 예전에는 많이 다녔습니다. 전국으로 불려 다녔습니다. 오죽했으면 차를 일 년에 5만 킬로씩 탔습니다. 그때는 운전해 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제가 몰고 다니면서 그렇게 집회를 다녔습니다. 그때는 아직 교수생활을 하고 있을 때인데 충청도에서 저를 강사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 것입니다. 차들이 꽉 막혔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많이 남겨놓고 출발을 했는데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니까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그래서 시골길에 보니까 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좀 밟았습니다. 붕 그러고 밟았더니 저기서 파란 옷 입은 경찰이 손을 딱 들더니 세우는 것입니다. 저기 보이기에 속도를 줄이고 한 70킬로 정도해서 갔습니다. 차를 딱 세우는 것입니다. 인사를 하더니 "면허증을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왜 그러시느냐고, 속도위반을 하셨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난 속도위반 안 했는데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안 하셨는데 저기 산 너머에서 속도위반을 하셨습니다." "아니 내가 산 너머에서 속도위반한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랬더니 거기 우리 동료 경찰관이 스피드 번으로 탁 쏴서 자기한테 무전을 쳐주었다는 것입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았다고 내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 대학에 가는데 얼른 끊어달라고 그러니까 뭐하시는 분이시냐고 그럽니다. "대학의 교수인데 여기서 강연요청이 와서 내가 가는 길입니다." 그랬더니 "아, 교수님이시군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러면서 끊어서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경도 안 쓰고 접어서 햇빛가리개에 놓고 간신히 도착해서 끝났습니다.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됐는데 어제 끊은 딱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 교회에서 일하는 직원을 시킬까 하다가 내가 갖다 내자 그리고 은행에서 내려고 펴보니까 과태료가 그래도 한 2만원은 나와야 되는데 너무 싼 것입니다. 6천원입니다. 아니 이게 왜 이렇게 싸지 그리고 보니까 진짜 6천원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쳐다보니까 범칙사항이라고 나오는데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다 걸렸음', 그때 탁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교수님, 걱정 마세요. 벌점 없는 싼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 그것을 만약에 교회 직원을 줬으면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우리 목사님이 어디 가서 담배를 피다가 걸려서 이것을 끊어가지고 왔을까?"
그것을 들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까지 이렇게 살면 참 안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건데 원칙을 딱 정했습니다. 법규를 최대한 지키자. 그런데 못 지킬 때도 있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걸리면 합당한 처벌을 해 달라고 하자.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봐 주세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한번은 심방을 가는데 이렇게 유턴을 해야 되는데 직진할 차들이 유턴 차선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노란 선을 밟고 유턴을 했더니 경찰이 지하철 지하도에서 뛰어올라 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경례를 하더니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도로교통법에 의해서 유턴 위반하셔서 딱지를 끊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도로교통법 1조에 보십시오. 이 법은 교통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법이라 그랬다. 여기 이게 내 유턴 차선인데 내 차선을 이 차들이 막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 이 차들이 잘못한 것 아니냐?" 그러니까 "내가 신입니까? 어떻게 모든 사람을 잡아냅니까? 선생님이 위반한 것은 틀림없으니까 내십시오." 그래서 알았다고 하니까 좀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싼 것으로 끊어 드릴게요." 그래서 내가 불렀습니다. "안 된다. 너에게는 싸게 끊을 권한이 없다. 합당한 딱지를 끊어라." 이 사람이 너무 화가 난 것입니다. "알았어요. 끊으면 될 것 아니에요?" 벌점 15점에 6만원을 그것도 벌써 20년 전에. 확 뜯어서 던져주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냥 셋방만 전전하면서 살다가 어떻게 어떻게 학교에서 칠천만원이나 되는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살다가 집을 사게 됐습니다. 살 생각도 못했는데 방배동에서 빌라에 사는데 어떤 분이 우리 집사람을 찾아오더니 그러는 것입니다. "사모님, 기도를 제가 많이 했는데 하나님이 이 집을 사모님한테 팔라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도 참 이상하다 왜 살 사람에게는 얘기를 안 하시고 팔 사람한테만 말을 하시나? 그래서 결국은 뜻하지 않게 그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집다운 집은 처음 사보는 거였는데 세금이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습니다. 조그만 빌라 하나 사는데 금액은 생각이 안 나는데 하여튼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장관들 다운계약서 오르내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 좀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가책도 없이 열 명이면 아홉 명은 다 다운계약서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이 세금이 얼마냐고 물으니까 아가씨가 얼마를 내시라고 그러는데 우리 집사람이 너무 놀래가지고 무슨 그 조그만 집이 그렇게 비싸냐고 그러니까 여직원이 "아줌마 비싸요? 그러면 반만 내세요." 그러는 것입니다. 아니 무슨 세금이 그 아가씨 한마디에 반으로 떨어집니까? 이 아가씨가 친절하게 계약서를 두 개를 쓰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짜 계약서를 쓰셔서 장롱에 넣어두시고, 주인하고 합의해서 다운계약서를 쓰세요. 그러면 절반만 내시면 되요." 그리고 와 가지고 "여보, 이렇게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돼?"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게 말이 되느냐? 집을 사는 사람은 목사고 파는 사람은 집사인데 둘이 가짜 계약서를 쓰면 성령님이 정말 좋아하시겠다. 로마서 13장에 봐라.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하지 않았느냐? 내야지." 그래가지고 거짓말 하나 안 보태서 우리 아들 저금통까지 뜯어가지고 돈을 맞춰서 가지고 갔습니다. "어떻게 아줌마. 계약서 써왔어요?" "아니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냥 세금 다 내려고요." 그때 그 여직원의 표정이 어땠을까요? "아니 어쩜 저렇게 존경스러운 분들이 계실까? 내가 그렇게 다운계약서를 쓰라는 게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어."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아니면 이랬겠습니까? "병신. 가르쳐줘도 몰라."
이것은 사실은 개인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조금 희생하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더 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교인이 지하실에서 있다가 지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교회당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부수고 빌딩을 지려고 하다가 IMF를 맞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업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월세를 내 놓은 것을 우리가 얻었습니다. 들어갔더니 엄청나게 컸습니다. 예배당만 한 9백 명이 앉을 데인데 그때 우리 교인이 250명밖에 안됐습니다. 한 달 동안 헌금을 모두 모아도 월세가 약간 안됐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무슨 배짱인지 하여튼 갔습니다. 갔는데 한 3년 되니까 이제 도저히 그 예배당에서 예배를 못 드릴 정도로 천명이 모였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여기도 목사님 교회 짓는 고생 이야기를 했는데, 나도 천오백만원밖에 교회 통장에 없는데 60억짜리 교회를 했습니다.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말려들어가서 결국은 마지막에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어디로 이사를 가려고 하는데 갈 데가 없습니다. 땅을 사야 하는데, 그 땅 주인이 땅을 가지고 있는데 그 땅을 좀 사서 교회 지으려고 하는데 땅 살도 돈도 없고 교회 지을 돈도 없습니다. 이쪽에서는 안 나가면 소송하겠다고 하니까 할 수없이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갔더니 교회 땅을 보여줍니다. 한 천 평짜리 땅인데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거두절미하고 어쨌든 땅을 빌려주는데 땅 주인도 장로님입니다. 오랫동안 사업을 하시다가 이제 사업을 마지막 정리하시는 입장에서 그 땅을 팔 생각이 없습니다. 땅이 계속 오르니까. 그런데 그 땅을 사겠다고 했더니 복덕방에서 그 할아버지가 내놓았다가 도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안 팔 것이라고, 그래도 집을 좀 가르쳐주시라고 그래서 찾아갔더니 안 판다는데 왜 와서 귀찮게 하느냐고 "안 팔아요. 가세요" 그럽니다. 그래도 좀 다시 생각해 봐 주십시오 그러면서 자꾸 조르니까 이 할아버지가 "내가 땅을 팔면 당신네들 거기다 뭐 할 겁니까?" 그래서 "교회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깜짝 놀라면서 "뭐요?" "교회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래요? 일주일만 생각해 봅시다." 그러니까 우리는 "야, 희망이 보이는구나." 그리고 열심히 물불을 안 가리고 기도 했습니다. 계약금은 물론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일주일 후에 갔더니 가지고 가라고 그래서 얼마냐고 하니까 36억을 내라고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천만 원도 교회에 없는데 "계약합시다." 그러는데 이제 큰일 난 것입니다.
계약금을 달라고 막 기도를 했더니 어느 교인이 고맙게 3억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3억을 가지고 가서 계약을 하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지 보십시오. 우리는 3억을 냈으니까 32억을 내야 됩니다. 그런데 아무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잔금을 주어야지 이것을 넘겨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보십시오. 할아버지가 금고를 열더니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는 것입니다. 서류를 여기다 놓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내 평생소원이 이 사업 끝나면 여기 교회가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셨군요. 교회가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러더니 3억을 받고 등기서류와 자기 인감도장을 우리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다 갖고 가라고, 설마 교회가 떼어먹겠느냐고, 빨리 명의 옮겨가고 그 다음에 대출받아서 돈을 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런데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36억을 달라고 합니다. 이 할아버지가. 좋다고 그리고 계약을 하려고 했더니 이 할아버지가 30억으로 쓰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워낙 처음에 땅을 싼 값으로 사서 그때 초토세라고 있었는데 초토세가 나오면 가만 내버려두면 계속 오르는 땅인데 은행 빚을 청산을 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서 자기가 2억을 보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도 듣고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와서 다른데도 다 그렇게 하니까 목사님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 학습이 됐잖습니까? 몇 년 전에. 순간적으로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까 의견이 갈립니다. "문제없습니다. 대그룹에서도 다 그렇게 합니다. 대그룹 몇 개 빼놓고는 대부분 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하라는 것입니다. 딴 쪽에서는 "글쎄요." 그럽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양심적인 회계사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목사님, 할 수 있습니다. 해도 됩니다. 그런데 목사님, 회계 장부는 두 개를 쓰셔야 됩니다." 똑같은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건 아니지,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떻게 회계장부를 두 개를 쓰느냐고. 그래서 안 된다, 그 세금이 얼마인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3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36억을 달라는 땅을 우리가 자진해서 39억을 주겠다고 그러고 샀습니다.
그런데 나는 설교를 할 때는 정말 쉬웠습니다. "똑바로 살아라. 손해를 보더라도 옳은 길을 가라." 그런데 계약금을 낼 돈이 없어서 남한테 빌려서 내고 그것도 빨리 갚아야 되는 돈이고, 이런 상황에서 그 3억 원을 있어서 준 게 아니라 있어서 주면 내가 돈을 좀 덜 쓰고 주면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 빚을 내서 주는데 그때는 25% 이자를 일 년에 준다고 해도 돈을 안 빌려주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 가지고 그것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정직하게 했습니다. 엄청난 교육이 됐습니다.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입술로 "참되게 살자."라고 말하는 것은 입술에다가 침만 바르면 누구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떤 때는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그때 비로소 언행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한동안 교회 안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정직하게 세금 내겠다는 말하자면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얼마나 거지같은 세상인지 보십시오. 병원을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그 사건에 은혜를 깊이 받고 법이 정하는 대로 세금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회계사가 당신 미쳤냐고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동종업체보다 5천만 원을 세금을 더 냈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세무서장이 표창장을 하나 보낼 것 같지요? 그게 아니라 감사 반을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2년 치 서류를 다 뒤진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나오겠습니까? 그렇게 정직하게 세금 내려는 사람이.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20만원이 착오가 난다고, "문제가 됩니까?" 하니까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 자식은 괜히 잘난 척 해." 그러는 것입니다. 딱 이 지방에서 한의사를 불러놓고 "금년에 이 동네에서 한의사 30군데, 15억 세금 걷어서 내시오." 이렇게 떨어집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아니야. 우리 더 벌었어." 그리고 5천만 원 낼 사람이 1억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위에서 보면 "뭐야, 더 조그만 병원에서 1억을 냈는데 얘네는 왜 5천만 원밖에 안 되는데?" 그러니까 보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놀라운 영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모욕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욕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죽은 것과 같은 영혼을 그렇게 살려내시는 이유는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가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 어두운 세상에 불꽃으로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이 너무 타락했고 현실이 그렇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난 항상 묻습니다. 현실이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을 준 적이 과연 역사적으로 있었을까? 언제쯤 되면 현실이 아주 아름다운 현실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대접을 받고, 죄를 짓는 사람들 악을 행하고 부정축재를 하고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갑질하는 사람들은 탄핵을 받는 세상이 될까? 그런 세상 좀처럼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세상이 온다면 우리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우리 손으로 만들어버리는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낮에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똥들이 떨어집니다. 낮에는 별 볼일이 없습니다. 별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캄캄한 밤하늘이 되었을 때 그것은 한줄기 찬란한 별빛이 떨어지는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혼자서 저 섬에 들어가서 한 두 달 동안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오는데 중간까지 왔는데 폭풍주의보가 내렸습니다. 내 생각에는 바로 인천으로 가면 될 텐데 배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장가도 못가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배가 다 뒤집어질 것처럼 요동을 치면서 모두 구명정을 입고 아래층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위에는 물보라가 쳐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때 섬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섬으로 돌아갈 때 거의 10시 가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열시쯤 되면 그 섬에서는 자가 발전기를 돌리는데 불을 다 끕니다. 그러니까 캄캄합니다. 그런데 많은 배들이 피항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캄캄한 밤바다에 오직 불빛이라고는 딱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등대의 불빛, 그것도 무인등대의 불빛입니다. 그런데 충분합니다. 뭐냐 하면 어두운 밤바다에서 길을 잃은 배가 풍랑을 만나서 항구로 피하기 위해서는 수백 개의 조명탄을 쏴서 온 바다를 환하게 밝힐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의 불빛만 있어도 그것을 보면서 그 배들은 안전하게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불의한 세상이다, 타협한다. 진리가 없다, 악하다, 말씀대로 살기가 너무 힘들다, 모든 선조들이 그런 모든 시련을 겪으면서 이제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의의 길을 걷도록 소명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현실이 어둡고 암담하면 암담할수록 우리가 걷는 그 의의 길은 더욱 더 찬란하게 빛납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 불빛을 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완전한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왜 은혜를 받기를 원하느냐고 하면 "은혜를 받으면 너무 좋아요." 그러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최종적인 소비처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 은혜를 받아서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한줄기 빛처럼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내 안에서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가지고 전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의한 속에서 의의 길을 보이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길을 보이고, 오류로 가득 찬 세상에서 진리대로 사는 것이 무엇이고, 거짓과 위선이 가득 찬 세상에서 진실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입니다.
문제는 누구도 소생한 영혼 없이는 그 많은 희생을 무릅쓰면서 그 의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소명을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 그 은혜를 간직한 채 불신자들이 사는 사회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동네에서 이렇게 살아가면서, "저 사람을 붙들고 있는 그 은혜의 힘의 비밀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궁금하게 여기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영적으로 깊이 소생되고 은혜를 받아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새롭게 만나 변화된 영혼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 의의 길을 걸어가, 여러분 때문에 하나남이 영광 받으시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