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잔이 넘침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녹취자 : 오희열
시인은 이제 마지막 제 5절에서 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하게 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불꽃놀이를 할 때 폭죽을 쏘아 올리면 쭉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그때는 그렇게 빛이 별로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맨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에 작렬하며 터집니다. 펑! 하고 커다란 불꽃으로 터지고 그 다음엔 희미한 빛줄기를 그리면서 떨어집니다. 시편23편에서 이 5절은 바로 그 하늘 높이 솟아서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터지는 그 작렬하는 불꽃과 같은 지점입니다. 이처럼 시인은 2절에서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해 주시기 때문에, 그렇다면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먼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4절은 갑자기 잔칫집 문맥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결혼을 할 때 주인은 제일 좋은 포도주, 혼인 예식에 쓰기 위해서 오래 전에 담궈 놓은 아주 좋은 술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손님들에게 대접합니다. 대접할 때는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하며 벌벌 떨며 따르는 것이 아니라 쫙 부어서 잔이 넘치도록 채워줍니다. 그 날 만큼은 아까운 것이 하나도 없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가족과 모든 친척과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은혜의 날입니다. 그렇게 술잔과 술잔이 맞부딪치면서 말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에 넘치는 시간이 바로 결혼식의 피로연입니다. 그 문맥으로 지금 들어가려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정말 기뻐했던 날이 언제인가 생각을 해보니까, “아! 누구네 누구네 잔칫집에 갔을 때!” 그때에 아낌없이 포도주가 나오고 잔과 잔이 부딪히면서 우울하거나 슬픈 사람이 하나도 없이 행복으로 가득 찬 그 연회장을 생각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행복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일평생 모시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이 이렇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이유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한 나라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면 왕이 된 다음에는 이 시인이 “나는 궁핍하고 가난하오니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겠습니까?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았고, 사실 솔로몬이 화려한 성전을 지었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그것을 준비해 놓은 사람은 아버지인 다윗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다 모아 놓은 금과 은과 동, 그리고 그 좋은 물건들을 아들이 하나님 앞에 바쳐서 지었을 뿐입니다. 저는 계산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가한 목사님이 다윗이 성전을 지을 때 내 놓은 황금이 얼마나 될지를 계산했더니 2.5톤 트럭으로 80대 분량이라고 했습니다. 금이 한 돈에 5만원 할 때 이 목사님이 계산을 했는데, 32조원이었답니다. 지금은 한 돈에 20만원 가까이 육박을 하니까 약 120조 정도 되는 헌금을 한 것입니다. 금만 그렇습니다. 은, 동, 이런 것 말고 말입니다. 그 정도로 건축헌금 하신 분은 여기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120조 정도 말입니다. 그렇게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아버지가 모아 놓은 것입니다. 다윗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내가 그렇게 전쟁을 해서 많은 보물들을 빼앗고 금은이 나에게 가득 쌓였으므로 내 가슴이 벅찹니다!”라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잔”이라는 것은 문학적인 하나의 은유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어떤 갈망을 말합니다.
첫날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다시피 다윗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윗을 자기 자식이라고도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와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이새의 아들 중에 있다고 하고 그 집 아들들을 보는데 첫째를 보니까 사람이 너무 준수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부으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아니다.”, 둘째도 “그 사람이 아니다.”, 셋째도 “그 아이도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이 집에 있다고 하는데 아무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수없이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있는 아들이 다 입니까? 혹시 또 없습니까?” 이새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관심에도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또 다윗의 엄마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지은 시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그게 사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에) 가슴 절절히 어떤 상처 같은 것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여자를 만납니다. 사울의 딸 미갈입니다. 처음에는 사랑했던 것 같아서 결혼을 합니다. 문제는 소통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법궤가 들어오는 날 다윗은 너무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남편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그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은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아버지처럼 생각했지만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자객을 풀고 자기가 스스로 죽이려고 찾아 나서기까지 합니다. (다윗에게)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신앙을 닮은 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은 지독하게 싸웁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다툼이 일어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강간을 당하고 왔는데 그 강간범이 자기가 낳은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절을 자기와 동고동락 하면서 나라를 세우고 국가를 이룩했던 그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놀랍게도 그 반란을 일으킨 괴수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입니다. 이 중에 하나만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나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다윗에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없을 때에는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 가난한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라도 하고 사니까 말입니다. 착각이라도 하고 사니까, 껄떡껄떡 하면서 살아갈 의욕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모든 것을 가지면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의 사랑이나 돈, 명예, 영토, 지식, 이런 것들로 채워질 수 있는 행복의 잔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무슨 잔입니까?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잔입니다. 여러분도 그럴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식이 많이 없지만 왠지 마음이 너무 허전하고 비참합니다. 그런데 뭔가를 다 해봐도 즐겁지 않고 기쁘지도 않고 아무것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이것이 채워질까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은 쾌락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쾌락을 위해서는 돈을 아낌없이 씁니다. 이런 쾌락 산업들이 엄청나게 폭발적으로 성장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속에서 짜릿짜릿한 즐거움을 맛보면서 인생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무리 그런 것을 집어넣어도 우리 영혼의 빈 잔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워진 것처럼 마취, 환각의 효과를 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약을 해 보진 않았지만, 여러분 중에서 마약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지난 번에 연예인들이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맞아서 문제를 일으킨 졸피뎀(Zolpidem) 같은 것이 있는데 저는 맞아 봤습니다. 병원에 가면 내시경 할 때 그것을 놓습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야, 이거 그건데?’ 하고 어떤가 맛을 보자하고 있는데 (졸피뎀을) 목에 넣으면 토 할 것 같기도 한데 조용히 음미해보면 진짜 좋습니다. 우리 나이가 되면 잠이 잘 오질 않습니다. 젊어서는 잠이 잘 오는데 잠과 싸웠습니다. 자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저는 젊었을 때도 다섯 시간이상 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여섯 시간이상 자면 죄라고 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느냐, 다 자면서 뭘 하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잠이 오질 않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옵니다. 저는 마취를 할 때 반항을 합니다. ‘내가 마취를 당하지 않으리라!’하고 말입니다. 간호원들이 얘기하기를 저는 의외로 오래 버틴다고 합니다. 수술할 때도 제가 마흔 다섯까지 셌습니다. 그때까지 마취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마취제를 막 넣는데도 ‘내가 마취 되나 봐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졸피뎀을 놓는데 미끄러지듯이 스르륵 잠 속으로 들어갑니다. 잠자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들어갈 때는 무거운 갑옷을 다 벗고 기름칠한 미끄럼틀을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깨어서 눈을 뜨고 나니까 현실입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이 현실을 감당하려고 하니까, 생명과 사랑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뭐가 그리워지겠습니까? 기름칠한 미끄럼틀을 타고 사르륵 미끄러지듯 잠드는 것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이 병원에서 맞고 깨어나서 저 병원 가서 맞고, 그러면서 돌아다닙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은) 너무 가엾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졸피뎀을 몇 번씩 맞아 봤습니다. 그런데 그게 해결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깨고 나면 또 현실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가 낮에 극장에 들어갔다가 밤에 나오는 것입니다. 차라리 밤에 들어갔다가 밤에 나오거나 해 있을 때 들어갔다가 해 있을 때 나오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낮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어두워지면 뭔가 내 인생을 낭비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이 (우리들의) 눈앞에 다가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현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마약, 성적인 쾌락, 방탕에 막 흘러가게 됩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에 매혹을 느끼면서 몰입해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외국의 예술의 장르에 보면 'Snuff Movie' 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섹스와 잔인한 살인이 결합된 영화입니다. 그런 영화가 옛날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8 mm” 같은 영화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영화를)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를 알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사람을) 쳐 죽이면서 내장이 쏟아지고 허연 해골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봅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쾌감을 느낍니다. 거기에 섹스를 가미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잔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그것이 채워지겠습니까? (사람은) 막 술을 먹고 미친 듯이 취해서 만취상태가 되면 현실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깨고 나면 또 다른 현실이 눈에 부딪히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25년 전에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서울에 가면 미아리를 지나서 수유동이라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경기도 미아리, 수유리라고 했는데 지금은 서울로 들어와 있습니다. 거기의 한 의사가 신문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당직을 서고 있는데 택시가 오더랍니다. 내리자마자 검은 신사복을 입을 사람들이 환자를 하나 매고 오더니 “선생님, 이 사람 좀 살려주십시오! 방금 쓰러졌습니다!” 뛰어나가서 눕혀놓고 보니까 벌써 죽었습니다. 인공호흡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죽은 사람도 까만 양복을 입고 죽었습니다. 저쪽에 보자기를 덮어 두고 한 시간 반쯤 지나니까 새벽에 택시를 타고 가족들이 울면서 뛰어 들어 옵니다. 의사는 죽은 사람이 자기 친척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니까 애정이 없는데 그 죽은 사람을 보니까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주먹을 쥐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펴고 죽는 게 보통인데 이 사람은 한 쪽은 쥐고 한 쪽은 펴고 죽은 것입니다. (그 의사는) 의사 생활을 그렇게 오랫동안 했지만 이런 시체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상하네. 왜 저렇게 하고 죽었을까? 저렇게 죽는 경우도 있을까?’ 생각하고 아무도 없을 때 쥐고 있는 손가락을 펴 보았습니다. 화투 두 장이 투툭 떨어졌습니다. 화투를 뒤집어 보니까 의사가 자기도 모르게 “어? 삼팔 광땡이네?” 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했더니 이 사람이 상갓집에 갔습니다. 요즘은 잘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가서 밤을 새워주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슬퍼서 밤을 새워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료한 밤을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상갓집에서 화투와 담요를 준비해 놓습니다. 그걸 왜 거기서 치는지 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걸 펴 놓고 밤새도록 화투를 칩니다. (그 사람도) ‘섰다’를 했습니다. 저도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그걸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화투 잘 치는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두 장씩 나눠주는데 족보, 랭킹이 있답니다. 그리고 판돈을 건답니다. 각자 1만원씩 걸든지 하고 세 번까지 걸 수 있답니다. 어떤 사람이 죽는다고 하면 죽고 걸면 다른 사람도 따라서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 번까지 하는데 그 다음에 모두 펴서 순위를 따집니다. 그때 삼팔광땡이 나오면 거기 걸어 놓은 것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규칙에 따라서는 그것의 세 배나 네 배를 가져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밤새도록 쳤는데 돈을 다 잃었습니다. 한참 열 받고 있는데 두 장이 들어왔습니다. 삼팔광땡 입니다. 돈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너는 뭐냐?” 하니까 너무 감동을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러니 그 집에서 자녀들이 나중에라도 “엄마, 아빠는 왜 돌아가셨어?” 하고 물으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태어나는 것은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다리 밑에서 태어나도 그것은 흉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에 진짜 좋은 자리에서 죽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제가 이야기한 실화를 듣고 막 웃었습니다. 그런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웃을 자격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화투, 요만한 동양화 두 개를 가지고 막 이러다가 심장마비에 걸려서 죽었지만 우리는 그 사람보다 약간 큰 것, 땅 문서, 집 문서, 증권, 학위, 그런 것 가지고 막 이러다가 죽는 것 아닙니까? 이것들로는 결코 (우리의 잔을) 채워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채워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우리 인간 모두에게 주신 그런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이 있습니다. 그 갈망이 가득 채워질 때 그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너무 사는 것이 힘들고 앞을 보고 뒤를 보아도 살 수가 없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나는 예수만 믿으면 살 길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은 은혜 받으면 무슨 일이 갑자기 일어날 것처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경험해 보니까 내가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집에 가 보면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남편은 그대로, 빚은 빚 그대로, 자녀들이 속 썩이는 것은 그대로,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는 그런 것들 때문에 살기가 싫었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까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집회하러 갔던 교회의 목사님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거기 교인 한 사람이 살다가 너무 힘드니까 자살을 해버리려고 강의 다리 위 중간쯤 갔다고 합니다. 가다가 돌멩이를 밟았는지 다리를 다쳤습니다. 너무 아파서 죽지를 못하고 죽을까 말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 아닌가, 죽더라도 목사님께 오늘 저녁에 기도라도 받고 내일 죽자. 무슨 차이가 있겠냐?’ 하고 밤10시가 넘어서 목사님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별일 아니라고 합니다. 응접실에서 차를 한 잔 마시더니 무릎을 꿇고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하더랍니다. 교인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 어려운 사정을 다 알기 때문에 목사님이 눈물로 간절히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내일 다시 여기 와서 죽을 생각을 하면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주머니에 넣은 손에 뭐가 잡히더랍니다. 복권이었습니다. 집에 가서 이거라도 맞춰보고 죽어야지 했는데 그 다음날 발표였습니다. 12억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님께 기도해 달라고 하십시오. 저에게는 그런 은사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십일조를 내고 또 십분의 일을 목사님께 선한 일을 위해서 쓰시라고 드리고 새 출발을 하면서 하는 말이 “세상에,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살게 하시고 싶으셨으면 이 말도 되지 않는 기적을 일으키시면서 까지 나를 살려주셨습니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오늘 인생 살기에 굉장히 힘든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오늘 좋은 목사님께 기도 받고 가면 내일 10억이 통장에 들어오는 거야?’ 하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수천만 명 가운데 한 명 나올까 말까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조금 전의 그 자매처럼 내 잔이 넘치기 전까지는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그래서 인생의 종지부를 찍고 싶었는데 그 은혜를 받고 보니까, “아, 살아야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런 시련과 환란 속에서도 나를 이제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붙들고 오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밤에 잘 때에는 사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눈물로 베갯잇을 흥건히 적시면서 잠이 듭니다. 고통 속에 잠들고 나면 그래도 아침이 환하게 밝습니다. ‘아! 하나님이 오늘도 이 시련 속에서 나를 살려주셨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 영혼의 빈 잔에 가득 넘치는 것을 경험합니다.
미국에 가서 어느 서점에 들어갔는데 시가 쓰여 있었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것은 어두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참동안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 맞아.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것은 하늘이 어둡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폭풍 같은 시련, 고난, 외로움, 상처, 그리고 하필이면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이 모든 가족들이 고통을 받고 시련을 당하고 괴롭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입니다. 거기서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면 그 불행과 고통과 상처가 어두운 밤하늘이 되어서 찬란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 별빛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아! 저게 바로 인간이 사는 도리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저 불행과 상처 속에서도 별빛 같은 인생을 사는구나! 그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아멘.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은혜의 잔이 여러분의 마음속의 잔에 넘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 시인의 마음이 그렇게 영혼의 빈 잔이 가득차서 넘치는 그런 환희, 희열, 기쁨, 가슴 벅차는 감격(이 있었을까요?) (이와 같은 단어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단어입니다. “희열”, 최근에 이런 단어 써 본적 있습니까? “희열”, “환희”, 써 본적 있습니까? “감격”, 사용해 본적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단어를 거의 잊어버리고 사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상처뿐인 인생길이었지만 그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환희, 기쁨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이제 충분합니다! 환희, 가슴 벅찬 은혜, 기쁨, 희열, 이제 너무 넘쳐서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아멘, 아멘,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아버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시인이 이렇게 감격을 했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두 번째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시인은) 가슴 벅찬 환희를 경험하였습니다. 첫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기 때문에,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에 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탐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상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성경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여러분처럼 개역성경을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는 아직도 이 “상”을 학교에서 졸업할 때 공부 잘 하면 받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상”은 히브리어로 “슐함”()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밥 먹을 때 상사용하는 식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정자세로 앉아서 먹는 것이 아니라 소파 같은 것에 비스듬히 기대어 밥을 먹었기 때문에 지금의 티 탁자 같은 높이의 큰 테이블입니다. 거기에 음식을 놓으면 비스듬히 기대어서 편안한 자세로 밥을 먹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 습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있었다는 뜻이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기대어 계시니까 자기도 예수님께 기대어 본 것입니다. 그것이 식사습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진짜로 번역을 하면 “당신이”, 여기에 “주”라는 말이 없고 “You”라고 되어 있는데 “아타”()라는 단어입니다. “당신이 내 원수”, 원수는 히브리어에 “쪼레라이”()라고 나오는데 “괴롭히다”라는 말에서 온 분사복수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에게 한 밥상을 베푸시고”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밥상을 베푸셨다는데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과 식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에 대한 개념은, 우리 동양 사람들과 아주 유사합니다. 저희 할머니가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한창 많은 식구들과 살 때는 그 집안에 식구가 42명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대단합니다. 옛날 가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 사대부 집안을 생각해보면 식구가 많이 있으면 그 식구들이 식당 같은 곳에 모두 모여서 함께 밥을 먹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공간도 없지만 그런 공간을 만들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의 모든 식솔들이 한 테이블 안에서 밥을 먹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방에 상이 차려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앉으시고 어머니는 못 들어가고 아버지 정도만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건넌방에 상이 차려지면 엄마, 고모, 삼촌들이 모여서 밥을 먹습니다. 그 다음에 마루에 차려지고 마당에 머슴들의 밥상이 차려집니다. 그 상은 상차림 자체가 다릅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머니가 들어가서 상석에 앉으시고 저는 우리 집사람을 남겨두고 제가 들어갑니다. 이것이 묵약처럼 움직입니다. 조선 시대에 양반과 상민이 있었는데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으면 상민이 양반과 같은 방에서 잘 수는 있습니다. 물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잘 것입니다. 그러나 양반과 상민이 한 상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먹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밥을 먹는 것 자체가 형제가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교수로 있을 때 선교학을 가르치던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열려있어서 웬만하면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선교를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될 사람이 중국의 내지 같은 곳으로 무조건 갑니다. 그렇게 방문을 하고 나서 문화인류학적으로 세 시간 동안만 그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의사소통이 된다고 합니다. 몸으로, 바디 랭귀지로 말입니다. 그러면 지도를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나는 이렇게 먼 나라에서 너희 나라에 왔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나는 너희들과 같이 살고 싶으니까 나를 받아다오.” 그 의사가 소통되고 나면 그들이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수염이 긴 촌장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모여서 장시간의 회의를 거쳐서 그 안건을 통과시키고 자기들과 생김새가 전혀 다른 곱슬머리에 파란 눈의 사람들을 받아들입니다. 선교사 부부를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고 그들을 데리고 마을 회관으로 갑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이 사람들을 축하하기 위해서 식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문명사회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식사가 나옵니다. 특히 중국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것은 비행기, 땅에 있는 것은 의자 다리, 바다에 있는 것은 잠수함 빼고는 다 먹는 것이라고 가르치는데, 실제로 어떤 사람이 홍콩에 갔는데 뚜껑에 덥혀서 주전자처럼 따라서 먹는 스프가 나왔다고 합니다.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서 다 먹고 나서 너무 궁금하여 그 뚜껑을 열어보니까 바퀴벌레와 거북이를 넣고 푹 고은 것이었더랍니다. 지금도 만주 지방에 가면 시골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꼭 나오는 음식이 있는데 뱀국입니다. 뱀도 작은 뱀이 아니라 팔뚝만큼 큰 뱀을 동태국 끓이듯이 잘라서 푹 끓여서 그것을 먹어야만 결혼식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은유법으로 말하기를 “저 처자랑 국수를 먹을 때가 되었다.”라고 하면 다들 결혼식이라고 알아듣습니다. 거기서는 “저 사람도 뱀국을 먹을 때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음식이 나옵니다. 우리 동양에는 체면 문화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싫어도 (그 음식을) 먹어줍니다. 그런데 그 (서양)사람들은 싫은 것은 정직하게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못 먹겠습니다.” 하고 손을 젓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으면서 웃음이 사라지고 이내 고함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끌고 가서 죽여 버립니다. 죽으면서도 그 사람들은 왜 죽는지를 모릅니다.
이것이 식사에 대한 문화의 차이입니다. 그 선교사들이 함께 살겠다고 하니까 그들을 받아주었습니다. 비록 생김새는 달라도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 받아들이고 그 식사를 베풀어서 형제의 맹약을 맺는 것입니다. 식사의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싫다고 하는 것은 “나는 여기서 살기는 하겠지만 너희들과 형제는 될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스파이로 생각하고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아주 중대한 모독이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창세기에 보면 라반의 집에서 야곱이 죽도록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가나안 집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 엄마, 형제들 통틀어서 자기가 가장 현란한 사기꾼이었습니다. 자기 지능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 밧단아람에 갔더니 자기는 저 밑에 있는 하수였습니다. 엄청난 고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한테 사기를 치는데 껍데기까지 벗겨 먹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외삼촌 라반에게 딸 둘이 있었는데 그중 라헬이 너무 예뻐 보였습니다. 너무 사랑하고 있었는데 외삼촌이 하는 말이 “7년을 봉사해라. 그럼 그 딸을 주마.” 하고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사랑하니까 그 7년을 며칠처럼 생각했습니다. 7년 동안 자기가 늙는 것도 모르고 너무 예쁘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결혼식을 하고 첫날밤을 치렀습니다. 불을 다 끄고 치루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라헬이 아니라 별로라고 생각했던 레아였습니다. 그러니까 간밤에 황홀했던 기분이 다 깨면서 삼촌에게 가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니까 외삼촌은, “우리 지방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경우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진작 얘기할 것이지, 그러면 차라리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고는 타협안을 내 놓는데 선불로 라헬을 줄 테니까 할부로 7년 동안 갚으라고 합니다. 한 여자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사은품으로 와서 7년의 노동력을 더 착취당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끊임없이 어기면서 품삯을 바꾸어서 결국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야곱을 복 주시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려고 마음먹으신 사람,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작정하신 사람입니다.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얘기를 다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은) 거부가 되어서 도망을 쳤습니다. 결국 발각이 되었습니다. 라반이 아들과 와서 싹 쓸어버리고 빼앗으려고 쫓아가 달렸습니다. 드디어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건드리지 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라반도 하나님이 두려웠기 때문에 야곱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서로 해하지 말자고 다짐을 하고 돌무덤을 쌓아서 일종의 보증으로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것이 “여갈사하두다”, “증거의 돌무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의식을 할 때 같이 한 예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많이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신약시대로 넘어가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일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너희 선생은 창기와 세리, 그 당시로서는 인간 말종이라고 불리던 세리와 창기 같은 사람들과 밥을 먹느냐? 말되 안 된다. 선지자처럼 멀쩡하게 생기시고 말씀도 그럴듯하게 하시는 분이 어떻게 창기와 세리들과 밥을 먹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과 형제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의원이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자에게 필요한 것처럼, 인자가 온 것은 의인, 자칭 의롭다고 하는 사람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예수님은) 회개하면 너를 사랑해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셔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시면서 마음이 녹으시면서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한 가족으로서 말입니다. 마치 자신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인 것처럼 사랑하시면서, 그랬기 때문에 그들을 당신의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한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난 같은 자식인 것처럼 받아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쭉 가서 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또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생명적인 연합, 사랑으로 하나 된 가족, 한 핏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한 상을 베푸시고” 라고 했을 때,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이 배가 너무 고픈데 하나님이 낚싯줄 같은 것에 커다란 교자상을 양쪽에 매달아서 거기에 온갖 음식을 차려서 구름을 뚫고 이 땅에 내려 보내주셔서 다윗이 점심을 배터지게 먹었더라.’ 고 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문학적인 상상력이 빈곤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큰 상을 누구 앞에서 베풀었습니까? ‘원수 앞에서’ 입니다. “저 놈은 하나님께도 버림받은 인간이다. 우리가 가서 저 놈을 다 파멸시켜버려도 저 인간을 보호할 자는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눈을 뜨고 보는 앞에서 큰 상을 베풀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가정주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압니다. 여기 남성분들이 나오셨는데 자기는 직장에 가서 돈을 버니까 고생을 많이 하고 자기 부인은 집에서 그냥 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요즘 같은 시대에 감히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한 번 바꿔서 해 보십시오. 아마 (남편들은) 일주일도 못 할 것입니다. 주부들의 가사 노동에 대한 헌신은 끝이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밥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손님이 와서 여집사님들이 봉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밥 한 번 살 테니 모이라고 해서 8명 정도 모였습니다. “그대들은 무슨 식사가 맛있습니까?” 물었더니, “목사님, 대충 아무거나 사주세요. 우리가 하지 않은 밥은 다 맛있어요.” 하는 것입니다. 요즘 그런 시대입니다. 저는 심방을 많이 다니지는 못합니다. 요새는 일도 워낙 많기도 하고 말입니다. 옛날에 교인이 1100명이 모일 때까지는 빼놓지 않고 제가 모두 등록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1100명이 넘고 나니까 일주일 내내 따라다녀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심방을 가면 제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집에서 밥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합니까? 가까운 곳에 가서 갈비탕이나 하나 먹고 조금 여유가 있으면 초밥이라도 하나 먹고 들어가면 되지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준비를 합니까? 항상 타이릅니다. 집에 가서 차 마시고 대화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방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목사님, 아무개 성도가 우리 교회에서 은혜를 정말 많이 받았는데 목사님께 꼭 심방을 와 달라고 합니다.”, “어디입니까?”, “부천이라고 합니다.” 한 40km 가야하지만, “그렇게 사모한다니 가보자.”, “그런데 밥을 하겠답니다.”, “하지 말라고 하세요.” 그런데 그 다음 주에 또 보고를 합니다. “목사님, 밥을 꼭 한다고 합니다.”, “그거 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래도 한다고 합니다.”, “맘대로 하라고 하십시오.” 하고 갔습니다. 가서 정말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50대 초반쯤 되는 부인이었는데 정말 방황을 많이 하다가 교회에 와서 은혜를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를 하는 자매였습니다. 11시 30분 쯤 도착해서 예배를 드렸더니 12시,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상을 가지고 들어오는데 셋이서 상을 들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큰 교자상에 음식을 다 차려서 들어오는데 아마 반찬을 다 만들어 놓고 상 위에 탁탁탁 놓고 상을 셋이서 들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을 제 앞에 갖다 놓는데 마음이 확 상했습니다. “아니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십니까? 나는 와서 한 끼 먹고 가면 되는데 그냥 간단하게 하면 되지 이 많은 반찬을 했습니까?” 너무 반찬이 많아서 젓가락으로 집으려고 해도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것을 만들어서 두 세트로 차려 놓으면 반상이라서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데 중복되는 반찬 없이 쫙 깔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그 반찬들을 산 게 아니라 다 집에서 만든 음식이었습니다. 너무 안쓰러워서 “왜 이런 것을 집에서 하십니까? 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기도하고 성경을 읽지 왜 이렇게 했습니까?” 했더니, 자매님이 화가 나서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드세요!” 알았다고 했습니다. 자매가 상 앞에 앉아서 사정거리 밖에 있는 것을 떠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지금 그 식탁을 받은 지가 15년 전 일인데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핑 돕니다. 한 달 전에 계획서를 짰답니다. 한 끼 식사 계획을 말입니다. 그리고 열흘 전부터 본격적으로 장을 보기 시작하고, 거기에 제공된 모든 종류의 여러 김치를 다 담궜습니다. 그리고 밑반찬을 일주일 전부터 만들기 시작하고 3일전, 이틀 전, 그리고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바로 직전과 그 날은 자기 언니 두 사람까지 동원해서 새벽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당일 아침에 완성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을 딱 맞춰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 상을 말입니다.
누구 집에 손님이 왔다고 할 때, 그 손님을 맞을 상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 그 손님이 그 집안에 의미가 있는 손님인지 의미가 없는 손님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딸이 있었습니다. 시집을 가겠다고 웬 녀석을 데리고 왔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웬만하면 좋게 봐주려고 했는데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배가 나온 것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딸에게, “웬만하면 (결혼) 안 하면 안 되겠니?” 그랬더니 딸이 뒤로 넘어갑니다. “엄마,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세상에 그런 사람 없어!” 하며 그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밀고 당기기를 하다가 포기하고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신혼여행을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친정집에 인사를 오는 날입니다. 아침에 남편이 일어나서 “자기야, 나 아침밥 줘. 어제 술을 너무 먹었더니 속 쓰리다. 해장국이라도 먹고 싶다.”, “참아, 오늘 우리 집에 가면 엄마가 한 상 차려 놓았을거야.” 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합니다. “여보세요!”, “네” 하는데 엄마 목소리에 힘이 없습니다. “엄마, 우리 신혼여행 다녀왔어요.”, “그랬니? 잘했다.”, “엄마, 우리 인사 갈게요.”, “그래 와라.”, “우리 점심때 갈 테니까 밥 주세요.”, “그래.” 하시는데 왠지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선물 하나를 들고 친정에 가서 벨을 누르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 보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가 혼자 계속 낮잠을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들어가면 전을 부치고 고기를 굽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모든 준비를 끝내 놓았는지 조용합니다. “엄마, 우리 왔어.”, “응, 왔니?” 하며 부스스하게 일어납니다. “아빠는 어디 가셨어?”, “응, 볼일 있다고 나가셨어.”, “우리 인사해야 하는데…”, “그냥 나한테 하면 되지.”, “장모님 절 받으십시오.”, “절은 무슨… 그래 해봐.” 하고 어머니는 흘린 침을 닦으면서 앉아서 절을 받았습니다. “엄마, 우리 배고파. 우리 점심 줘.”, “응,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하더니 2분 만에 상을 차려서 가져왔습니다. 보니까 귀퉁이가 다 떨어진 소반에 젓가락 숟가락 두 개 놓고 밥 두 그릇이 있는데 한 그릇은 누군가 먹다가만 밥 같았습니다. 거기에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찬 물을 부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반찬이라고는 딱 하나,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져와서, “배고픈데 좀 들게.” 하며 그 상을 탁 놓았는데 얼마나 세게 놨는지 그 물이 옆으로 찍하고 쏟아졌습니다. 그 밥상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엄마는 아무 말도 안하고 배고픈데 먹으라고 놓았지만 그 밥상은, “난 네가 싫어. 내 딸이 너를 만나고 내 사위가 된 것은 내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야. 제발 사라져주겠니? 우리 가족의 인생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많은 말들이 그 밥상에 담겨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받은 밥상은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주 안에서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인생에 큰 기쁨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당신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은 기쁨이고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 한 권의 책에 옮겨 써도 다 쓸 수 없는 수많은 언어를 거기에 담고 있습니다.
한 20여전 전에 이것(시편 23편)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딱 꽂혔던 것이 “베푸시고”라는 단어였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아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아라크”는 싸움할 때 군대의 항오를 벌이거나 어떤 물건을 줄 세워서 쭉 늘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밥상도 밥상 나름입니다. 고추장 하나 달랑 올라와 있는, 먹다가 김칫국물 흘린 찬밥에다가 수돗물 붓고 숟가락 꽂아놓은 그 밥상이 아니라,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반찬으로 가득 채워진 밥상입니다. 그 밥상입니다. 왕의 식탁입니다. 그 식탁을 시인이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것도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폭풍과 흑암을 지나고 죽을 것 같은 고난의 시기를 통과했는데, 그래서 실제로 굶주린 적도 있었고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할 때도 있었는데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최고의 핏줄로, 가족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제가 직장에 다닐 때 곤고하게 사는 부인 한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은혜를 받으니까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 같이 모여서 예수 믿고 변화된 것이 무엇인지 간증을 하는데 이 부인이 하는 얘기가, “예수 믿기 전에는 지갑에 돈이 두둑히 들기 전에는 늘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 나니까 버스 토큰 하나만 가져도 너무 마음이 푸근합니다.”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런 모든 것을 가지신 위대한 하나님이 인생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의 식탁을 차려주시고 화려한 왕의 만찬을 차려주셔서 그것을 먹게 하십니다.
제가 아프고 약해져 보니까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맛이 있거나, 혹은 맛은 없지만 모인 자리가 너무 즐거워서 웃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끼 식사를 맛있게 먹고 나면 그 다음날 아침에 몸이 달라집니다. 힘이 나는 것이 느껴집니다. 물론 그 힘이 몇 달씩 가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나는 것이 느껴집니다. 시인이 그렇게 시련과 폭풍의 바다와 같은 인생길을 지나면서 그런 하나님이 차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식탁을 경험하면서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러면서 말할 수 없는 희열과 행복에 넘치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멘. 아멘.
그래서 (우리는) 그 시련의 계곡도 고난의 바다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풍성한 말씀의 식탁 앞에서 누리고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는 환희의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자, 그럼 마지막 두 번째가 남았습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에 내 영혼의 빈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다스리시지만 세 가지 중요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셨습니다. 그것을 “삼직”이라고 불렀는데 왕, 선지자, 제사장 이었습니다. 왕의 임무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여 권한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법과 질서로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대행자였습니다. 이에 비해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시려는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해서, 만약에 지금 시대에 모세가 살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면서 율법에 맞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임무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지금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선지자의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신데 매일매일 죄를 짓는 이 더럽고 불결한 우리가 어떻게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에게 오는 사람이라면 제사장은 백성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이 사람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 사랑해주시도록 그 죄를 씻게 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직분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직분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자격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직분으로 사람들을 세우실 때에는 기름을 부어서 세우셨습니다. 그때 사용되는 기름은 올리브유입니다. 그 올리브유를 머리에 넘치도록 붓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는데 그것은 성령과 지혜를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지혜와 능력을 충만하게 주셔서 자기는 부족하지만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 때문에 그 세 가지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와는 성령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경륜이 다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고 우리와 영원히 교통하시면서 계십니다. 그것을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한 번 오신 성령은 떠나질 않으십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 일에 적합한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거나 범죄 하거나 혹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 성령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때였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기름을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 한 것은 성령을 경험한 것입니다. 다윗은 일평생동안 약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그는 왕으로 뽑혔기 때문에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 기름부음 중에서도 가장 다윗의 마음에 일평생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인상을 남긴 것은 첫 번째 기름부음 받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왕으로 지명하면서 하나님의 명을 따라 기름을 부을 때, 그 다윗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이 임했다고 되어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 다스릴 수 있는 탁월한 지혜와 그것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하나님이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렇게 거룩한 나라를 통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에게 이 시인이 그렇게 가슴이 벅찰 정도의 환희와 희열을 경험하게 된 이유가 성령에 충만한 경험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자신도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왠지 삶이 매우 팍팍 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특별히 죄를 지은 것은 없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격 속에서 기뻐한다든지 즐거워하는 것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 하는 질문에 대한 가장 탁월한 답은 아직 그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저는 스물한 살때 회심을 했습니다. 그 전까지 6년 동안을 그렇게 방황하다가 스스로 교회에 나가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9월인가 10월쯤에 교회를 나갔는데 목사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너는 이번 추수 감사절에 세례를 받아라.”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 교회 다시 나온 지 몇 달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세례를 받습니까?”, “지금은 나온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너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있다. 받아라.” 그때는 목사님이 하늘처럼 보였기 때문에 거기에 토를 달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부터 고민이 되었습니다. 내가 교회에 가는 것까지는 어떻게 했는데 내가 그렇게 모질게 우리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말을 하면서 예수 잘 믿는 사람들도 교회 못 다니게 만들며 살았는데, 나하고 두 시간만 이야기하면 교회 다니던 사람들이 교회 다니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요즘 신천지 비슷한 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밤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밤마다 나와서 교회 전깃불도 아까워서 촛불을 켜 놓고 강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을 믿을 수는 있지만 어떻게 제가 주님께 시집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문답을 하고 그 다음 11월 셋째 주쯤 되었는데 꽤 추웠습니다. 벌써 겨울이 시작되는 추위였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나에게 물을 떠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세례를 주시더니,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시는데 일생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위로부터 아래로 쭉 내려왔습니다. 마지막에는 내 몸의 무게를 느낄 수가 없이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 느껴졌습니다. 구름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나니 떠오르는 생각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었는데 나 같은 이 더러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구나!
(찬양) 머리에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 때에) 그렇게 논둑에 엎드려서 울다가 일어나서 무신론자가 되기로 다짐하던 때부터 주님께 다시 돌아올 때까지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지었던 많은 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자체가 하나님께 너무 죄송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그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옛날에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 필요 없고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그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 수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보니까 사람들이 모두 갔습니다. 거의 다 흩어져서 점심 차려 먹는 분위기였습니다. 눈을 떠 보니까 유리창에 약간 서리 같은 것이 끼고 햇볕이 들어왔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얘야,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시면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없습니다. 영원히 이런 상태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것이 생각해보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후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도) 그런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항상 그 효과는 똑같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흘리신 십자가에 감격하고 이 못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하고 마지막에 소원이 있다면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우리 주님만을 전심으로 순전하게 사랑하는 이외에 아무것도 소원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수를 먹고 갈증을 이겨본 모든 사람들은 구정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면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이렇게 나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하나님의 은혜, 모든 죄와 불순종을 떨쳐버리고 성령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감격과 환희와 희열로 나아가는 이 기쁨을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면서 시련과 폭풍으로 가득 찬 괴로운 인생을 살면서도 내 안에 주시는 기쁨이 그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들고 여전히 주님이 나를 이 땅에 살려두시는 동안 밤하늘에 빛나는 반짝이는 별들이 있는 것은 하늘이 어둡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힘과 생명의 능력으로 그 어두움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기쁨이 솟아납니다. 어디서 그런 기쁨이 왔습니까? 어디서 그런 능력이 왔습니까? 어디서 그런 환희가 왔습니까?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습니까? 예전에는 없었고 예전에는 결코 경험해 본적이 없는 그런 힘들이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헤치며 이기며 살면서 전날의 두려움이 변하여 나의 기도가 되고 예전의 한숨이 변하여 나의 찬송이 되게 하는 이 놀라운 비결은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그냥 착한 삶이 아니라 예배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의 지식 속에서 부어지는 그 찬란한 성령의 은혜, 그리고 가슴 벅차는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때, 그때 내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져서 그 모든 것을 헤치며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이런 환희를 경험하면서 이 시인은 “내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찼습니다, 차고 넘치나이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양떼인 것과 주님이 나의 목자인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항상 인생에 문제가 있으면 리모컨처럼 하나님을 움직여서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상황만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23편을 통해서 시인이 토해놓고 있는 이 고백은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나쁜 일도 결국은 좋게 될 것이기 때문이고 좋은 것은 좋아서 좋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 안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좋은 것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그것 때문에 나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것은 그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나쁜 것은 그냥 나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져서 환희의 삶을 사는,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