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의 골짜기에 함께 하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녹취자 : 오희열
어제는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의 침체된 영혼을 소생시켜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목자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네 번째는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지켜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목자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생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고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다시 우리 영혼을 살아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의로운 길을 걸어가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떠한 어려움도 없이 평탄한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감격적으로 고백한 바로 그 다음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경험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 시편 23편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다윗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헌신했던 양을 치는 습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뉴질랜드나 혹은 호주처럼 끝없이 풀밭이 펼쳐진 곳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짐승을 풀어놓고 몇날 며칠을 먹인 후에는 그 양떼들을 이끌고 또 다른 목초지를 찾아서 떠나야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떼들이 풀을 뜯을 때 한가하게 그늘에서 잠이나 자면서 쉬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산에 올라가 사면을 두루 살피며 이 목초지를 다 먹고 나면 어디로 이동해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들은 염려하지 않고 그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어디엔가 또 풍성한 꼴들을 만나게 됩니다. 양들은 높은 산을 오르거나 먼 길을 걸어갈 정도 튼튼하고 강인한 짐승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아주 좁은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깎아지른듯한 협곡을 지나며 위에서는 바위나 흙이 쏟아질지도 모르고 혹은 강도의 위험이나 맹수들의 공격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을 양떼를 이끌고 지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골짜기, 양떼들이 그런 골짜기에 들어갈 때, (양들은) 매우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지만 목자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 양떼를 능히 지킬 수 있는 지식과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은 인생을 살아보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의 많은 어려움이 우리의 죄 때문에 생겨납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고 자신의 그러한 선택을 후회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 태도가 올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이렇게 커다란 시련을 만나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갈 정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이런 시련과 고난을 당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획일적으로 하나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명백한 죄와 고난을 당하게 되지만 때로는 나에게는 그런 고난을 징계로 당할만한 허물이 없는데도 이 세상이 불완전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지은 죄 때문에 그런 시련과 고난을 당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지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하나님이 바람을 보내셔서 그 배를 커다란 풍랑에 휩싸이게 하셨고 죽을 고생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소중한 물건과 화물을 다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 배에 요나가 타지 않았더라면 그 배는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환란과 시련은 종종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또 다른 사람들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마귀가 우리를 시험해서 넘어뜨리려고 그런 시험과 어려움을 당하는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시련과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얼마나 두려움과 고통이 컸으면 자기가 걸어온 인생의 골짜기를 회상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다고 회상했습니다. 그가 언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까? 왕이 되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며 살았을 착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고난 후부터 자기를 시기하는 사울의 집요한 추격으로 그는 끊임없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심지어는 침을 수염에 묻히고 미친 척 하면서 그 죽음의 자리에서 피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울을 사랑했고 진심으로 사울을 섬기려고 했으나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진 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끊임없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이 광야 저 광야를 헤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말하기를 “그런 골짜기를 다녔다”, “그런데 내가 그런 골짜기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재앙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생을 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많은 시련을 겪지만 재앙을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 매일매일 눈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펼쳐지고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칼로 자기를 에워싸고 있었으나 재앙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는 깊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린 양떼들을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않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끌어안고 보호하듯이 또한 하나님은 자기를 그렇게 보호하고 지켜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섭리 속에서 나를 평탄한 길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게 하고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게 하고 그들에게 미움을 받게 하고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내 인생에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나를 파멸로 데려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불붙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위험한 골짜기를 양들이 지날 때에 목자인 자기를 의지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안전하게 이 골짜기를 통과하듯이 또한 자신도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자신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통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좀 담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양심에,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어떠한 죄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 거리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이, 나를 사랑하고 지켜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인생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주님께 바쳐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아멘.” 하면서 자기를 바쳐야 합니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가장 어려운 일이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하나님은 존귀하게 쓰실 사람들을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큰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돌이켜 회개하고 정결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이 시련의 계곡을 통과하게 하시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의 더 큰, 우리를 쓰시고자 하는 더 큰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큰 시련의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도저히 어디로 도망칠 수 없을 정도로 사면이 막히고 그 속에서 시련을 당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런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서 하나님만이 나를 돌보시는 목자이시고 하나님만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보호자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였습니다. 정말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서 서울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늘 할머니와 살았습니다. 그래서 살아온 인생의 날들 중 아내 다음으로 함께 오래 산 사람이 할머니였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참 좋아했습니다. 너무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얼마나 건강하셨는지 일흔여섯에 돌아가셨는데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쯤 내려왔는데도 “이게 왜 이렇게 금방 오냐? 이만큼 더 가면 참 좋겠다.” 앉은 자리에서 고기 한 근을 뚝딱 드시고 손주들이, 자녀들이 호두를 먹고 싶어 하면 당신 이빨로 호두를 까서 나눠주실 정도로 건강하셨습니다. 제가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꾸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갔더니 대장암 말기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그 건강하시던 할머니가 서서히 죽어가셨습니다. 그런데다가 우리가 결혼하고 7년 만에 겨우 아들을 하나 가졌는데 그때가 민주화투쟁 때였습니다. 학교 앞에 있으니까 얼마나 최루탄을 쏘는지 결국을 폐렴에 걸려서 고통을 받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섬기던 교회를 잠시 접고 공부에 전념하려고 학교 옆으로 이사를 왔으니까 몇 달 동안 수입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병원에 데려갔는데 의료보험증도 없으니까 그 가난한 살림에 한 번 병원에 가면 1만5천 원에서 2만 원을 내야 했습니다. 감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전세를 살았는데 주인이 집을 빚에 넘기고 잠적해서 빚쟁이들이 매일 와서 빨리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 극심한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휴교 중인 학교 채플실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고 어쨌든 하나님이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라고 하셔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공부를 하고 공부하다가 몇 번을 쓰러졌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영양실조였습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아침부터 바로 와서 기숙사에서 아침을 먹고 한 네 시까지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채플실로 걸어 올라가면 사람들도 없습니다. 앞자리에 조용히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저는 원래 “주여! 주여!”하며 소리 지르고 기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조용히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안타까우니까 그렇게 조용조용히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길게 하면 한 두 시간 반, 짧게 하면 한 시간 반을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기도하고 나면 티셔츠와 런닝, 바지가 땀에 흠뻑 젖어서 짜보면 땀이 한 컵씩 나올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처음에는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기도하면서 결국은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죄인이구나! 모든 일이 잘 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교만했구나.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그것을 사람의 도움으로 해결해보려고 했구나.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며 수많은 불순종과 죄악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통렬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는 주님의 도움이 아니면 아무 곳에서도 도움을 입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나를 구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반을 기도하고 나면 그 자리에 쓰러질 정도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기도가 아마 내 생각에는 5월, 6월, 7월쯤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하고 5층에서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옵니다. 그러면 찬송이 나옵니다. 마음에, ‘우리 하나님 이외에 나를 이 시련의 골짜기에서 건지실 분이 없습니다. 나는 외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찬양)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다가 다시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통곡을 하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 이 시련의 계곡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나를 버렸으나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을 줄을 굳게 믿습니다. 아멘.’ 하면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그리고 집에 가보면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를 타일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만나게 하셨고 인생의 골짜기의 수많은 시련을 이기고 여기에 오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버리실 리가 없다. 믿음으로 살자.” 그러던 7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올라가서 아주 더운 날에 아무도 없는 채플실에서 다시 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많은 신비한 경험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런 경험들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 기도하는 날 오후에 저는 일생에 몇 번 경험하지 못한 매우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지 않고 일평생 비밀로 간직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너무 확실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인도하리라.”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처음 논둑에 엎드러져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한 때부터 시작해서 주의 길을 가겠노라고 신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인생의 골짜기, 골짜기 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시련이, 때로는 풍랑이, 때로는 고난이, 때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저의 인생에 함께 해 오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모든 의심의 그림자가 지나갔고 이 시련의 계곡이 이제 끝나는구나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 집사람과 아기를 데리고 기차를 타고 처갓집에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왜?”, “이제 걱정 하지 마.”, “왜? 무슨 좋은 일 있어?”, “이제 우리의 시련이 끝난대.”, “누가?”, “우리 주님이, 그리고 우리를 인도해 주신대.”, “어디로?”, “나도 몰라. 그런데 인도해 주신대. 걱정 하지 마.” 그리고는 불과 한 달 정도 후에 제가 아주 존경하는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에 부교역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말도 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논문을 정리하고 있는데 저를 대학에서 교수로 불러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수 생활을 하면서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정말 거짓말처럼, 우리의 상식으로 아무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인도해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왜 이렇게 사망의 골짜기에 들어가는 것 같은 커다란 어려움을 한두 번 겪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평안하게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느냐’ 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우리의 대적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어차피 그 모든 것들은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인가,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가 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후로도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때에 나를 보호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들을 생각하면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시련의 골짜기에서 주님이 예비하신 은혜는 우리가 당한 시련보다 훨씬 큽니다. 이것을 시인이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다윗이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할 죄가 없었을 때조차도 그런 치열한 고난 속에서 계곡을 통과함으로써 이스라엘 온 백성을 이끌고 나아갈 수 있는 제왕이 되도록 그의 심령을 사로잡으시고 붙드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시인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함께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시인이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 그것들이 나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라고 나옵니다.
이 ‘지팡이’와 ‘막대기’는 서로 다른 물건입니다. ‘지팡이’는 그 당시 이스라엘 목자들이 쓰던 지팡이는 똑바로 올라가다가 꺾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이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면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그 휘어진 곳에 양의 목이 딱 걸립니다. “이쪽으로 와라.” 하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가 의미하는 것은 “인도”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가지 못할 때 하나님은 인도해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어떻게 할지 모를 때, 기도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이 인도해 주십니다. “이렇게 가라. 이렇게 살아라.”하며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가하면 ‘막대기’는 무기입니다. 끝이 뾰족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양떼를 해치려고 하는 짐승과 싸우는 것입니다. 다윗은 선한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해치려는 짐승들과 용감히 싸웠고 또 사자에게 물려가는 양떼들도 그 사자와 싸워서 건져낼 정도로 용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에 사용하는 무기가 막대기였습니다. 그래서 양떼들은 지팡이로 인도하여 자신의 돌봄 아래에 있도록 만들고 맹수와 원수들을 향해서는 막대기로 그들을 찌르고 죽여서, 혹은 내쫓아서 양떼들을 보호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깊이 경험한 곳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시련의 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살고 보면 막상 우리가 시련을 당하고 믿음이 없을 때에는 나 혼자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겪는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때 하나님이 나에게 깨닫게 해 주신 것이 많았고 그때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베푸신 큰 사랑이 얼마나 놀라웠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거기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면서 이 시인은 ‘아! 우리 주님을 나를 버리시지 않는구나. 마치 내가 짐승에게 물려가는 양 한 마리도 사랑하고 버리지 않아서 그들을 구출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내 인생에 가장 곤고한 시련의 계절에 그 골짜기에서도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고 은혜 많이 받고 헌금 많이 해서 하나님을 잘 섬길 때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시련을 만나서 살아갈 용기가 없고 믿음조차 식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흐느끼고 있을 때에도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여전히 붙들고 계십니다. 신앙이 없어서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지 그 시련의 때에 주님은 더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붙들고 이 폭풍과 흑암을 헤치고 주님 앞에서 빛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셨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간절히 시련의 골짜기에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련의 계곡에 들어온 것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