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새교회 저녁집회 1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2)
녹취자: 김혜진
그러면서 2절부터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이실 수 있었는지를 근거를 5절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인 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라고 말입니다, 우선 이 짧은 한 구절은 세 가지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양식, 두 번째는 안식, 그리고 세 번째는 인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이 풀밭은 그저 아름다운 잔디이지만, 양떼들에게는 이것은 양식입니다. 그런 푸른 풀밭에 하나님이 이 시인을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의 일생동안에 그가 곤고하지 않도록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한때 너무 배가 고파서 도망을 다니다가 진설병까지 먹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고 난 그 다음에는 그는 정말 시련과 연단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고, 자신의 생계뿐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무리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가난을 배웠고 없는 사람들의 눈물 그리고 고통을 함께 채득하면서, 그야말로 밑바닥의 있는 인생들의 목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자 하였을 때에 그에게 모인 사람은 고관대작이나 훌륭한 귀족들이 아니라, 병들고 가난하고 원한에 맺히고 이런 사람들이 다윗의 품으로 모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도자 다윗의 품에서 자기같이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안으시고 도우시는 하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기꺼이 그들을 위한 선한 목자가 되었으니, 이 전에 양을 치던 자가 이제는 이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상처받고 병들고 원한 맺힌 자들을 품에 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그 길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도자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다. 더욱이 다윗은 그 긴 세월동안 사울의 집요한 추격을 받으며 자객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체험한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그런 사연이 많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먹는 문제에 관한한 언제나 마음에서 근심이 떠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 이 시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먹을 것들을, 쓸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면서 그 분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이심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소명이 있다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소명 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을 위하여 거기에 이바지 하면서 사는 것이 구원받은 신자의 최고의 소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명을 가로 막는 것 무엇이라고 생각하니까? 환란, 핍박, 고난 아닙니다. 놀랍게도 아주 하찮은 것이 신자로 하여금 이 거룩한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근심과 염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는 다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쓸 것을 아시는 느니라, 그러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염려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이 염려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실존주의자 철학자 하이데거 같은 사람은 인간에게서 이 불안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수단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불안한 것을 통해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안과 염려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차고 하나님의 말씀이 의해 장악되고, 높으신 우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분을 앙망하고 살지 않는다면, 일부러 근심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 마음은 깊은 염려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염려와 근심은 결국 소외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와 매우 함께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 가장 가까이 계셔서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인격적인 친밀함의 확신이 있다면 염려와 근심은 없습니다. 어떤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여 우리의 마음을 태우고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기까지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권사님이 꿈을 꾸셨대요. 늘 근심 걱정이 많으신 권사님인데, 어느 날 꿈에 보니까 커다란 망태, 여러분은 아마 망태에 대해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가 6.25가 끝나고 가난할 때에는 자원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원을 거의 재활용 했습니다. 그래서 대나무나 혹은 싸리나무 같은 것으로 커다란 바구니를 만들어요. 그 크기가 사람을 한 대여섯 명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커요. 그 대신 가볍죠, 그것을 어께에다 짊어지면 그 둥그렇게 된 바구니 아구리가 거의 머리위로 올라오고, 그리고 맨 마지막의 꽁무니는 이 발에 끌린 정도로 굉장히 커다란 바구니를 메고 다니고, 기다란 집게를 가지고 인제 휴지 같은 것을 주워서 계속 집어넣는 거죠. 휴지도 집어넣고 뭐 양철조각 같은 것도 집어넣고 지나가다가 냄비 같은 거 있으면 쓰는 건데도 슬쩍 집어넣어 가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집에 가서 그걸 쏟아서 종이는 종이대로 고철은 고철대로 분류해서 고물상에다 팔면 그게 밥벌이가 됐단 말입니다. 그런 망태를 이 권사님이 자기가 꿈에 쥐고 있더라는 거죠. 그런데 앞에 이렇게 보니까 시커먼 녀석이 계속 넝마 같은 것을 던지면서 가는데, 까만 헝겊같이 생긴 넝마를 계속 던지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열심히 자기 바구니에 담으니까, 담아도 끝이 없이 계속 던지더래요. 그래서 그것을 계속 담았더니 아구리까지 올라와서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짊어질 수 없게 됐어요.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깔려서 엎어져 버렸어요.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헥헥 거리면서 고통을 받는데도 자기 손으로 그 까만 걸 계속해서 자기 뒤 바구니에다 집어넣더라는 거죠. 이게 바로 염려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염려는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화) 미군이 6.25때에 많은 고아들을 미국으로 보내었습니다. 벤플리트장군 같은 사람이 구제해서 미국으로 보낸 고아만 약 3만 명이 된다고 하니까 참 고마운 일을 한 겁니다. 그래서 전쟁 통에 부모를 잃어버린 많은 고아들을 미군들이 데리고 부대에 데려가서 깨끗이 씻기고 그리고 구호물자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잘 먹이고 자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잠을 못 이루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병이 너희들 왜 못자니? 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저씨 우리는 내일은 무얼 먹어요?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 끼는 잘 먹었는데 전쟁에서 늘 내일은 무얼 먹을 지에 대한 염려가 있었고, 실제로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또 자기들도 그런 굶주림에 시달렸기 때문에 내일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염려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병사가 말해주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일도 오늘처럼 맛난 것을 많이 먹여주고, 세 밤만 자면 미국에서 큰 비행기가 오는데 너희들은 그 비행기를 타고 이제는 전쟁도 없고 배고픔도 없는 미국으로 가게 된다고 가르쳐 준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이들이 잠을 못 이뤄요. 그래서 이 지혜로운 병사가 취사반에 연락을 해서 아이들 하나마다 내일 먹을 커다란 빵을 한 덩어리씩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것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아이들에게 자, 이건 너희가 내일 먹을 빵인데 미리 준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그 빵을 품에 안고서야 새근새근 잠이 들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도대체 우리의 인생의 날 중 하나님을 위해 사는 날이 얼마나 될까요? 젊은 날에 힘도 있고 건강도 있었던 때에는 주님을 몰라서 주님을 위해 못살았고,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 했는데, 그렇게 결심한 날들 중 이제까지 살아오는 기간 생각해 보십시오. 그중 많은 날들을 염려와 근심으로 보내어 주님을 섬기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찢어지지 않았습니까?
희랍어로 ‘염려하다’는 마음이 ‘분열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근심과 염려로 찢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먹고 입을 모든 것을 전부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염려와 근심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내일은 무얼 먹을까 그렇게 염려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집에 먹을 것이 있고, 가게에 가면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염려는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먹고 입는 문제만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이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신앙 속에서 갖게 되는 필연적인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나와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께 나의 인생을 온전히 의탁해서 그래서 생사간에 나의 인생이 그분의 섭리의 손안에 있다고 믿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며 그 길을 걸어갈 때에 그것이 바로 높으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며 가족 관계처럼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염려와 근심을 인간이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 염려와 근심이 가슴에 깊이 들어와, 모든 마음을 녹이고 불태우고 병들게 하여, 마음 중 단 한 부분도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하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들을 발전시켜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편안한 삶이 주어졌어도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현저히 멀어졌을 때에는 마음은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의 은혜 속에 있을 때에는, 잠깐 근심이 스쳐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썩이기까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한 깊은 신뢰,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찌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말입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이런 깊은 신뢰를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두운 그림자가 없어야 합니다.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에 추호의 허물이나 죄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알면서 짓는 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양심의 커다란 가책을 느끼게 하는, 나의 과실을 정확하게 알게 하는, 그런 마음의 그늘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염려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막아주실 것이고, 또 아주 매우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를 믿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멀리 떠난 근심이 있다면 이 근심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승복과 사랑이 있는 영적인 생활을 버렸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라고 깊이 생각하며 회개하고 그리고 어떤 삶의 상황 속에서라도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마음을 열고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이제까지 먹고 입고 쓰며 살아온 모든 것이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물론 우리는 힘써 노동했고 애써서 돈을 벌었지만, 그렇게 힘쓰고 애쓴 모든 사람들이 풍족하게 누리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시시때때로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 주셨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의 길을 걸어갈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먹고 입고 마실 것들을 그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공급해 주셨고,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먹고 마시면서 힘을 내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망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매일 조상들도 먹어본 적이 없는 만나를 내리시고, 그래서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사십년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주심으로 하나님 은혜로 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 빵 한 덩어리 물 한 모금으로 한 끼를 때울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 양식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곤고하고 우리의 심령이 병들었을 때 오래도록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어루만지고 타이르시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때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양식을 먹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마치 목자가 어린 양을 이끌고 풀밭을 찾아 그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는 것처럼, 한 풀밭에서 모든 먹을 것이 떨어지고 나면 목자는 이미 준비해 둔 또 다른 풀밭으로 양 떼를 인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에게 시시때때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너무 곤궁해서 이제는 아무 힘도 없고 하나님 앞에 살 능력을 잃어버렸을 그 때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당신의 교회에 불러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열고 우리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양식을 우리들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 아니면 줄 수 없는 양식,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양식을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고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짐승 같아서 깨닫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강퍅한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발라 녹게 하셨고, 그리하여 그 말씀으로 우리의 갈한 영혼을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맘이 빈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여기사 주여 주여 먹이여주소서
정말 영혼이 곤고할 때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한 끼의 말씀의 식탁은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렸고, 엎드려 일어날 수 없는 영혼을 살렸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은총을 받을 만한 좋은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하고 불순종하여 주님을 멀리 떠나 곤고한 인생을 살 때에 조차도 하나님은 당신의 양식을 우리의 영혼에 내려 주셔서 핍절함을 면하며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보면 고난에 넘치고 시련에 가득차서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인생의 벼랑 끝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늘의 만나를 지친 우리의 입에 떠먹이는 어머니와 같은 사랑 때문에 거기에서 다시 일어서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 하나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고단한 인생길을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하나님의 이러한 보호하심과 그리고 도우심이 없었더라면 이미 우리 순례자 인생길 어디에선가 엎드러져 마귀에게 짓밟힌바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우리 입에 떠 넣어진 하늘의 양식인 만나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었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련의 길, 사면을 에워싼 원수들의 함성 속에서도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랄 수 있는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지금도 영혼이 배고파 곤고할 땐 주님께 나와 보십시오. 나의 영혼은 굶주렸고 나의 심령은 목마릅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목마름을 채울 수 없는 것으로 우리를 가득 채웠지만, 해갈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하늘의 만나를, 생명의 물을 내게 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주님 앞에 다시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오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안식입니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셨던 경험에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예화)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일학년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다음 주에 올 때에는 우리 아빠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 오너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애들이 알록달록한 크레용으로 혹은 물감으로 아빠를 그려 왔습니다. 한 아이가 연필로 아빠를 그렸는데 직사각형의 커다란 네모를 그리고 그 밑에다가 발을 두 개 그렸어요. 그리고 이게 아빠래요. 그래서 선생님이 그 그림을 보고 하도 이상해서 야 어떻게 너네 아빠가 상자곽같이 생겼냐 너네 아빠는 아빠를 그리려면 얼굴도 있고 손도 있고 눈코입도 있어야 되잖아 그랬더니, 아닙니다! 선생님 우리 아빠 맞아요! 이게 어떻게 너네 아빠냐! 그러니까 엄마는 일요일만 되면 우리 아빠보고 우리 식구들 좀 데리고 어디 좀 놀러 가자고 아침부터 계속 졸라요, 그런데 아빠는 큰 이불 뒤집어쓰고 발만 내놓고 잠만 자요.
잠을 자는 모습이 참 예쁜 나이가 있습니다. 갓난아이들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이런 아이들이 잠잘 때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평화예요 완전한 평화. 얘들이 유치원 초등학교 1학년만 들어가도 잠자는 모습이 예쁘지 않습니다. 잠자면서 찡그리고 무슨 기억이 나는지 잠꼬대도 하는데 더 나이가 들어서 여러분 나이쯤 되면 별로 안 예쁜 모습이 잠자는 모습입니다. 저녁에 집에 가서 한번 남편이 잠자는 모습을 위에서 조용히 내려다 보십시오. 얼굴은 근심과 걱정에 푹 절고, 늙기는 언제 저렇게 푹 늙었는지 잠을 자면 곱게 자지 무슨 원한이 많은지 이빨을 드륵드륵 갈고 때로는 잠꼬대도 하고 침도 흘리고 코도 골고 평화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고단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진정한 안식이 없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고백록 첫 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쉼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품 밖에서는 어떤 쉼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도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지위가 높아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된 영혼의 안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시인을 안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참된 안식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 그분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시며 나는 그분의 어린 양이기 때문에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지킬 것이라는 깊은 어린아이 같은 신뢰 속에서 이 시인은 안식과 평안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이런 쉼이 있습니까? 아! 하나님, 나는 당신의 품이 좋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는 종종 고난도 만나고 시련도 당하지만 그럴 때 마다 우리는 당신의 품에 피합니다. 그 안에서 쉼과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마다 그분의 품에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완벽한 쉼의 자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안식으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는데 이거는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히브리말로 ‘메누호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움직이지 않는 물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이끄시는 도다 이렇게 번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성경에서 이것을 스틸 워터(still water)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움직이지 않는 물이라는 ‘메누호트’ 혹은 스틸 워터라고 하는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아시다시피 양은 털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 양이 물에 빠지면 그 양털 속에 물이 모두 스며들어서 그 물 때문에 양들이 물속에 가라앉게 만듭니다.
(예화) 대부분의 모든 동물들이 헤엄을 잘 칩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광경을 많이 봤습니다. 여러분 소 헤엄 잘 칩니다. 떠내려가는 것 봤습니다. 그 엄청난 크기의 소가 발을 막 저으면 어깨까지 올라오면서 헤엄을 쳐요. 물론 떠내려가다가 기운이 없어서 물에 빠지겠지만 그렇게 떠내려가는 것도 보았고, 돼지도 헤엄을 잘 칩니다. 몸이 비대해서 그런지 물에 잘 뜹니다. 오리야 뭐 본래 물에서 놀지만, 닭도 꽤 헤엄을 잘 칩니다. 신기하게 안 가라앉고 오리처럼 상당히 오래 동안 물속에서 다닙니다. 개! 개헤엄이란 말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개도 헤엄을 잘 칩니다. 그런데 이 양은 못 칩니다. 꾸르륵 하고 깊이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이 양에게는 본능적으로 물을 무서워하는 공수증이 있습니다. 특별히 목이 말라서 물을 먹을 때도 물이 아무리 얕아도 움직이면서 흘러가면 공포심 때문에 그 물을 못 먹습니다. 이때에 양을 아는 목자들은 어떻게 하냐 하면 그 흘러가는 물을 저 쪽에서 돌멩이나 혹은 풀뿌리 같은 것을 캐다가 댐을 만듭니다. 그러면 물이 흘러가다가 흐름이 멈춥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쉴 만한 물가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가 가르치는 바입니다. 그러면 그 양떼들을 이끌고 와서 거기서 물을 먹여서 해갈을 하게 만듭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을 물 먹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세상의 사람들은 우리를 획일적으로 다룹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다루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약점을 아시면서 인도하십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목자가 말을 위해서는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소를 위해서도 이런 수고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의 성질을 잘 아는 목자는 댐을 쌓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흐르는 물을 움직이지 않는 물로 만들어 양 떼의 목을 축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가 모두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껏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무능력 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때로는 우리가 유별난 습관이나 혹은 유별난 개성을 가졌을 때에도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면서 우리를 인도해 주셨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친절하며 사랑은 배려합니다. 이 배려는 사랑 없이는 생겨 날 수 없는 감정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오셨고, 또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제껏 이끌어 하나님 앞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을 때에는 그럴 수 없지만, 신앙의 눈을 가지고 바라볼 때에는 우리의 살아온 인생의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우리의 살아온 인생의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눈물 없이는 우리의 인생을 회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 걸음걸음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고, 굶주릴 때 먹이시고 헐벗을 때 입히시고, 우리의 영혼이 곤고할 때 하나님이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를 채워, 우리가 넘어졌을 때에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손을 붙들어 다시 일으켜 세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길을 걷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살아온 우리의 인생의 날들 중 나쁜 것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악했기 때문에 온 것들이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모든 것들은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의지하면서 일생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가 만약 자랑할 것이 있다면 약한 것을 자랑할 뿐이라고 말했으니, 자기의 약함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먼 타국에 와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살고 있는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우리 주님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어머니처럼 우리를 세밀하게 돌보시고,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이끌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껏도 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등지고 얻는 행복이 여러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 없이 누리는 형통한 삶이 어찌 여러분을 진정한 기쁨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찾아오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분 앞에 와서 깊이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힘입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죽었던 영혼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넉넉히 공급해 주셔서, 하나님 한 분 만이 여러분의 친 아버지이심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런 좋으신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