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신학생 세미나
(99.10.16-17)
1. 자네, 정말 노가다 목회 하려나① ................................................ 2
2. 자네, 정말 노가다 목회 하려나② .................................................. 16
3. 자네, 정말 노가다 목회 하려나③ ................................................. 34
1.자네, 정말 노가다 목회 하려나①
오늘날 우리들이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저희들이 바르게 잘 깨달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너무나 큰 혼란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에, 그 혼란이 너무나 커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좋은 학교에서 훌륭한 신학을 공부하고, 그리고 많이 지식을 습득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목회 현장에 들어가 보면,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에는 도저히 눈에 띄지 않았던 수많은 대적들이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대적들이 있어서 한편으로는 우리들을 공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들을 심각하게 유혹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학식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목회자들 가운데서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외국에 가서 학위를 받고, 공부에 있어서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일관성 없이 목회를 하는가를 보면, 이 목회의 세계는 단순한 지식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오늘날의 시대를 보면, 우리가 막상 목회 사역을 한다고 할 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어떤 것이냐는 것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여기에서는 목회라는 말로 뭉뚱그려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목회라는 것은 “한 교회를 여러분들이 담임하고 교회의 최종적인 책임자가 된 그런 목회 상황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부목사나, 전도사 같은 위치에서 섬기면서 살아 갈 때에도 나름대로 그 시대의 영향을 받고, 그 시대가 주는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한 교회를 전체적으로 담당을 하고 그리고 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 교회를 유지하는 것, 모든 것들이 여러분들의 책임 하에 있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들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그런 사역의 현장이 다 드러내 보여주는 상황 속으로 여러분들을 데려간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번에 영국에 갔을 때에,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설교하시던 웨스터민스터 채플에 갔었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가서 예배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자 했더니 쌀쌀맞은 사무원이 거절하여 할 수 없이 밖에 창문을 통해서 실내를 이렇게 들여다보고만 왔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후임으로 닥터 켄달이라는 사람이 왔습니다. 저는 그 분을 만난 적은 없지만, 설교를 몇 편 읽어보면서 ‘아, 이분은 아니구나.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구나.’ 그런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래도 이제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이 분이 웨스터민스터 채플 목회자로 지명이 되었을 때, 그 분이 청교도에 대해서 연구한 분이었고, 로이스존스 목사님을 무척 존경한 분이었기에 가능성을 보고 교회의 운영위원들이 담임목사님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로마서 강해를 할 때에 약 1200명씩 모였는데, 지금은 한 300명쯤 모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언젠가 강도 높이 잡지와 강의를 통해서 비판했던 빈야드팀들을 불러들여서 집회를 하는 상황에까지 가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소위 얘기하는 “나는 어느 설교역사 속에 있었던 어느 설교가를 좋아하고, 그리고 나는 그 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 분이 차라리 전도사로 있었다면 안 그러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담임목회를 하기에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일관된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아주 확고한 사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어떤 사상이 있어야지만 일관성 있는 목회를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어떤 성경의 정신이 깊은 사상화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한 가지는 성경의 진리를 깊이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리고 아주 체계적인 성경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철저하게 삶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앞에 켄달의 경우에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무척 좋아하고, 그의 설교를 경청하고 그렇게 했지만, 정말 그러한 사상이 전수되기 위해서는 그가 그렇게 그 분의 설교를 좋아하고 그 분을 추종하는 것으로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만났던 하나님을 동일하게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인격의 표피만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자신의 삶을 파고들어서 그 말씀에 의해서 전적으로 인간 전체가 새롭게 되는 변화를 경험해야지만 된다는 것입니다.
호 1:2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맨 처음에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 호세아에게이지요.” 그런데 그 앞에 전치사가 붙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전치사는 ‘into'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전치사 하나를 가지고 교리를 세운다는 것이 조금 무모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이렇게 되어있는데, 다시 정확하게 말하자면 “호세아 속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호세아가 있는데, 호세아에게 그냥 말씀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호세아의 내면의 세계를 관통하고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이 호세아에게 임하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호세아의 지적인 활동을 건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서 이 호세아의 내면의 세계를 파헤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신 세계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가치관과 이런 것들을 모두 다 쓸어내고, 새로운 내면의 세계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선지자들은 다 사상가였다고 볼 때에, 오늘날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방법론은 있고 열심은 있는데, 사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한 열심이나 사랑, 그 이상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 속에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이 있을 때, 그 사상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사상이라는 것이 들어 있으면, 그 모든 지각하는 활동들이 전부 다 그 사상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한 가지 사상을 통해서 봤기 때문에, A라는 사물을 보고, B라는 역사를 보고, C라는 현상을 보고, D라는 사실을 본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각각 해석이 나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A에서 해석이 나오고, B에서 해석이 나오고, C에서 해석이 나오고, D에서 해석이 나올 때에, 하나의 일관된 사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해석들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고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진리의 말씀을 깊이 체험하는 선지자적인, 영적인 경험 없이는(선지자들의 경험을 저는 진리의 경험이라고 봅니다만), 진리에 대한 깊은 경험을 할 때에 하나님에 성품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그 핵심부에는 거룩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의 결과가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완전성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이 없고, 분명한 어떤 소명의 체험들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어떤 분명한 뼈대가 없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가게 되고 상황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이러한 이야기들을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여러분들이 깊이 숙독하시기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설교자가 어떻게 태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내면적인 기원들을 여러분들이 깊이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 당시의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꼭 같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태어나서 특별히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렇게 이 시대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별일이 일어나지 않고 그냥 그렇게 훈련받고, 신학교를 졸업하면 여러분들이 무엇이 될 지, 저는 다 압니다. 눈에 훤히 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되지 않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에 대해서 저는 아주 심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은혜를 받는 정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될 지 제가 이야기해 볼까요? 뻔합니다. 뭐 공부 조금 하면, 영어공부해서 미국에 가서 학위라도 하나 받아 한국에 와서 지방신학교라도 하나 꿰차고 있을 생각을 하겠지요. 그렇지 않고, 목회 길에 들어섰다고 하면 웬만한 교단에서 안수를 받고 담임목회를 한다면 담임 목회하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뻔합니다. 모아놓고 제자훈련 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모아놓고 찬양집회나 한다거나, 모아놓고 열린 예배가 어쩐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양로원 짓는다고 땅보고 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오늘날의 그림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가지고 안 된다고 하면, 이것저것 섞어서 나물 무치듯이 비빔밥 만들어서 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겠습니까? 다 사람이 보는대로 사는 것이지 무엇을 하겠습니까?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지자들도 그 시대에 태어날 때에는 모두 오늘날 우리들처럼 그렇게 살아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결정적인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그냥 일반적인 어떤 신앙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체험하면서 선지자들이 확 눈을 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의식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역사 속의 한 사람인 내가 예수를 믿고 변화된 이것이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거룩을 체험하고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지를 깨달은 다음에 그 지평이 쫙 확산되면서, 민족적인 죄들을 보면서 ‘역사와 이 죄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런 하잘 것 없는 존재인데, 거룩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런 전망으로 나아가고 이런 삶에 있어서 열정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에게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면 누가 무어라 해도 흔들리지 않을 꿋꿋함이 있었고, 그리고 이 자신들의 어떤 사역에 있어서 성공이라고 하는 것을 세상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어지는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성공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그들의 삶을 좌우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헛된 꿈하고는 관계가 없이 자기 나름대로의 진정한 인생의 가치가 무엇이고, 사역의 진정한 보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생각과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이 처한 세상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고, 앞서서 이미 사역의 세계에 들어선 사람들은 뭘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널리 퍼져 있는 흐름인 ‘교회성장의 열기’입니다. 교회성장의 열기라는 것은 무엇인가하면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라고 하는 열망”입니다. 사실, 그 자체가 나쁜 것일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는 그런 목회자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하면 그렇지만, 교회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돈 있고 교회 있으면, 교회는 문닫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교회가 문을 닫으면 그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입니다. 교회를 하다가 문을 닫았는데, 뭐 할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몇 번 해보면 이골이 나서 괜찮겠지만 처음 간판 내리고 문닫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게하다가 문닫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돈 있고, 사람 있으면 문닫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혹자는 사람은 없어도 돈만 있으면 문을 안 닫는다고 합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이는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장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성장에 대한 생각이 조금 건전하지 못한 면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장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일차적으로는 수적인 성장입니다. 사람들이 일단 많이 모이는 것을 성장으로 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이게 되면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원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는 목회자들은 항상 교회 규모보다는 하고 싶은 일이 앞서가게 마련입니다. 교회의 규모는 커졌는데, 뭐 하고 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지, 살아있다면 뭐 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살아있는 사람은 욕망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나 일반적으로 항상 목회자의 하고 싶은 것은 대개 교회의 규모보다도 더 앞서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게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그에 비해 교회의 규모가 잘 안 따릅니다. 그럴 때에 그 긴장이 팽팽해지게 되면 빨리 이 교회가 성장해야지만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만큼 성장하고 나면 그 다음 욕심이 생겨 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그런 교회 성장의 열기가 막 이렇게 일어나다 보니, 목회자들은 어떤 혼란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면 일에 대한 열심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열심을 혼동하는 면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문에 보니 “개척교회 당신도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입니다. 당신도 성공 못합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개척교회는 믿음으로 하면 되다고 하기에 “주여!!”하고 문의 확 열고 개척하러 나갔더니 낭떠러지 절벽이였다고 합니다. 간판을 올리고 개척하는 교회들 중에 상당수가 불과 한 3년 내에 문을 닫고 이사를 갑니다. 그리고 건실하게 교회로 쭉쭉 커 가는 교회는 제 생각에는 100개중에 1~2개가 될까 말까합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 1980년대 들어서 한국 교회가 굉장히 소형화되어 가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80년대 초만 해도 대형화에 대해서 굉장히 염려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교회 대형화에 대해서 염려하는 목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형교회도 자꾸 사람이 줄고있고, 교회를 해도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대형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걱정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전과 같은 시대는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만 세워놓으면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던 시절이 지나갔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성장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러나보니 어떤 쪽으로 가는가 하면 사람들을 많이 불러들이는 것과 나갈 사람을 못 나가게 하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 성장의 열기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정말 정직하게 돌아보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인가, 그리고 얼마나 잃어버린 어떤 영혼들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별로 없고, 교회를 성장시켜야 된다는 강한 강박관념이 굉장히 많이 작용하고 있는 때를 맞이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은 학교에서 같이 공부를 하니, 우열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우열이 있다고 해 봐야 공부 조금 잘하는 사람들이 공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월감을 느낄까..... 그러나 딱 졸업하고 깃발 들고 나가서 목회하면 교회 큰 사람이 왕입니다. 다 소용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맨날 장학금 받고, 교수 꽁무니 졸졸 쫓아 다녔는데, 교회라고 한 것이 얼마 사람도 안 모이고(사람이 없으면 대게 동창회를 해도 잘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창피하니까 잘 안 나타나고, 그런 스트레스를 참 많이 받습니다. 그나마 저는 조금 자유로웠습니다. 개척할 때에 학교에 있었으니, 그저 한 교회의 목회자보다는 교수로 알려진 상황이었고, 학교를 그만 둔 다음에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부흥회를 다니는 사람으로, 집회를 다니는 사람으로 알려졌기에 스트레스가 적었는데, 요 하나만 바라보고 하는 사람들은 말입니다.(저도 마음은 교회 하나만 바라봤지요.) 그래도 생계까지 여기에 걸고 있는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성장이 되지 않으면, 실제 자기 생활이 안 되는 것입니다. 30명, 40명 모여서 어떻게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생활이 안 되지요. 그러니 밥 먹으러 같이 모여도 돈을 내는 사람은 교인 많은 교회 목사가 돈을 딱 냅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인 조금 밖에 안 모이는 교회 목사가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예화) 교회 개척하기 전에 호텔 커피숍에서 동창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한참 글을 쓰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설교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이야기 를 하다가 그 중에 동창 목회자 한 사람이 약 한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듣더니 충격을 받아서 한 열 명 정도 모인 사람들에게 뷔페에서 식사를 대접하며 더 깊 이 이야기하자고 했는데 약 20만원이상 점심 값이 나왔는데, 그 분이 다 냈다는 이야기.
가난한 목회자들이 일주일 이상 살아갈 생계비에 해당하는 돈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양반은 교회가 한 500명정도 모이는 큰 교회였습니다. 우리 동창 중에는 개척을 해서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야 아무 것도 아니지요. 자신이 내겠다고... 그 상황에 실제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지.. 더군다나 그 옆에 부인이라도 있어서 “여보, 당신은 왜 그래? 학교 다닐 때는 공부도 잘 했다며... 교회는 왜 이래? 아무개 좀 봐.”하면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 씨. 나도 교회를 좀 성장 시켜야 되겠구나.”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정말 사실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별 것 아닙니다. 목사라고 해서 별 겁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시골로 내려가면 조금 덜 합니다. 경쟁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열을 내봐야 모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열을 안 내봐야 떠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쩌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여 계시지 않습니까? 뭐 설교준비를 해 간다고 해 봐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요, 설교 준비를 안 해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경쟁이 없음으로 평화롭습니다. 그대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것이 전적으로 드러납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 한 사람이 제가 지방에 내려갔을 때, 책을 읽은 독자인데 책을 읽으면서 회개를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5년 전 젊은 목사로서 시골교회에 내려올 때 도시 생활에 너무 찌들리니(여러분이 이제 부목사나, 전임전도사가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고단합니다. 8시 반이나 9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 퇴근합니다. 그리고 매일 심방 다니고, 교회일 하고, 밥 먹고 씻고 하다가 퍼져 자고, 또 다시 새벽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나오고, 또 빨리 끝내고 씻고 나와서 출근해야 하고... 그리고는 사람들보고는 거룩하라고 하지만 자신이 거룩이 무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맨날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그렇게 도시생활을 하다가 너무 지쳐서) 시골로 내려가 이제 시간도 많이 나고 하니 이 좋은 숲에서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탐구하고, 그리고 책 많이 읽고 해서 5년쯤 지나면 그래도 조금 갖춰진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몇 년이 지나서 어떻게 되었냐고 했더니, 그냥 월요일이면 교역자들끼리 모여서 족대들고 고기잡으러 다니고, 그리고 채소밭이나 하고, 닭이나 좀 기르고, 그래서 가끔 잡아서 삼계탕 해 먹고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5년쯤 지나니, 이제 나를 도시에서 불러 주면 내가 목회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절하게 자기를 부인하면서, 자기와의 마찰이 없이는 결코 목회 생활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시골은 성장을 위한 처절한 경쟁은 없는 대신에 그런 자기 태만에 빠질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어떻습니까?
저는 그래도 다행히 목회를 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서 어느 정도 그런 콤플렉스가 없었습니다만, 미친다고 합니다. 했는데, 네가 나보다 잘 났다는 것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는데, 저 친구 교회는 되고, 내 교회는 안 되다는 것입니다. 내 교회 교인이 저 교회로 가는 것입니다. 공부도 못했지, 가문도 훌륭하지 않지, 무엇으로 보나 자기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하여튼 되고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비참함이라는 것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저는 이러한 목회자 개인의 고뇌가 교회 성장의 열기의 중심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들이 한 가지 요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과 함께 혼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정직하게 칼로 잘라낸 듯이 말할 수 없다 뿐이지 그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세미나 같은데서 많이 만나지 않습니까? 가보면 이미 교회가 한 200명 정도 모이고, 왠만한 승용차라도 하나 타고 다니면,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잘 안 듣습니다. 안 듣는데 왜 그런 세미나에 오느냐 하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보충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지, 자신이 근본적으로 바뀌려고 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목사가 되어서 40대를 넘어 50대에 들어선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절대 안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바뀐 사람을 제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책을 읽거나, 어떤 누구의 강연을 들으면서 깊이 감동을 받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극히 적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험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이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무엇인가 분명한 사상을 여러분들이 갖고 여러분들이 변하지 않으면, 여러분들도 그러한 압력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명백하게 죄라고 말을 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데, 나도 하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 그 방법을 사용을 안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목회 현장을 이렇게 보면은 “야, 저렇게 인격적이고,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를 갔더니 그 목사님은 제가 정말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참 신앙도 깊으시고, 연단도 많이 받으신 목사님이시고, 교인들도 참 순수합니다. 굉장한 인격자이시고요. 진짜 제가 깊이 마음에 머리가 숙여지는 몇 명 안 되는 목회자 중에 한 분입니다. 그러나 설교하러 올라가서 딱 놀랐습니다. 우리처럼 중 2층이 되었는데, 올림픽게임보드 같은 것이 딱 붙어 있습니다. “금일 현재 2,715명” 매일 그 숫자를 갈아 끼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하는 모든 교역자들이 그것을 보면서, ‘아 오늘은 줄었구나.’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진실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정말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풍조들이 굉장히 많고, 이제 1960년대 특히 미국에 실용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에 공부하던 사람들이 그러한 실용주의 정신, 다시 말하자면 “유익한 것은 모든 좋은 것이다.”라는 사고방식을 교회에 굉장히 많이 도입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70년대에 “잘 살아보자.”는 슬로건 아래 우리 한국 사회 전체가 효율적인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라는 사고 방식이 사회 전 분야에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까? 특히 군사정치에서 안 되는 것은 되게 하라는 식으로....
(예화) 미국 사람에게 “안되면 되게 하라”는 말이 있다고 했더니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듣더라는 이야기.
그런 것들이 함께 작용을 하면서 70,80년대 성장의 문화를 꽃피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90년대 들어서 실험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10년 동안에 온갖 실험들이 다 행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많은 실험들이 행해진 그 중심부를 꿰뚫고 지나가 보면은 그 동기 자체가 선교나 그런 것들이 아니라, 교회 성장입니다. 그것이 심장부에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든지 무언가 프로그램을 도입할 때에는 “이것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겠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시작된 제자훈련이, 어떻든지 간에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왜 수많은 교회들이 제자훈련의 열기를 뒤따라갔느냐 하면은, 80년대 이후에 급격하게 멈췄던 교회 성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제 생각으로 만약 이 제자훈련이 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에 터졌다고 하면은 이렇게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집회만 하면 사람들이 모이는데 말입니다. 부흥회 간판만 붙이면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황에서 그러한 것들이 매력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벌써 80년대부터는 심각한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안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교회에서 빠져나가고, 젊은이들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한참 이러한 진공상태를 느끼고 있을 때에, 이것이 딱 터지니까 사람들이 이거라도 하면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까 하면서 굉장히 많은 반응을 일으킨 것입니다. 물론 이제 처음 이것들을 만든 원 진원지에서는 그러한 교회 성장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안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적용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교회의 성장의 열기들이 굉장히 많고, 그리고 이 성장을 위한 열망들이 어떤 신학적인 일괄성을 모두 다 포기하게 만들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배 드리는 것이나, 모든 것이 성장에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야기하는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구령에 대한 열정으로 이해하기보다, 처음 그것을 제창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그것을 적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근본적으로 깔려있는 생각은 구령에 대한 열정이라기 보다는 교회 성장을 위한 한 방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배의 어떤 타당성 같은 것들을 입증하는 것도 대부분의 자료는 성장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편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죠. 교회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가상공간에 떠 있는 사이버 모임이 아니라 실제 이 장소가 있고, 유지를 해야 하고,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보다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받고 싶어하지만, 투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성장 없이는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독지가가 있어서 매달 어마어마한 돈을 선교적인 차원에서 교회에다 쏟아 붓는 그러한 이상한 체제가 아니라면 이 성장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살고 죽어야 되겠다라고 하는 어떤 분명한 성경적인 사상이 없으면 이러한 치달아 가는 성장의 열기 속에서 여러분들이 초연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뭐라도 해서 사람이 모이고 그리고 영혼들이 변화되면, “웃기고 있네. 그런다고 교회가 되냐?” 그러면서 가지만, 사람들이 안 모이고 교회가 성장을 안 한다고 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성장해서 성공을 본 어떤 케이스나 어떤 사례, 그리고 그러한 방법론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시선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가장 커다랗게 흐르고 있는 하나의 물줄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여기로부터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하고는 다릅니다. 부교역자 생활은(우리교회 전도사님들도 이 자리에 오셨지만) 자기 맡은 부서를 잘 하려고 무지하게 애를 쓰지요. 그러나 그 자체가 사역의 진퇴와 관련되어 있고, 교회가 문을 닫느냐는 문제와 관련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담임목회를 할 때에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큰 흐름이 굉장히 인본주의적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사이에 미국 가운데 일고 있는 운동 가운데 NCD운동이라는 것이 있는데, “Natural Church Development”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는데, 성장을 못하게 하는 요인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딱 제거를 하고 나면 교회는 저절로 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인지 보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에게 대한 것”인데, 전도할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이 세상 신이 그들의 마음에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교회를 하나의 영적인 조직체라기 보다는 사회 속에 있는 조직체로 보는 측면이 굉장히 강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교회 성장주의의 열기는 실용주의와 인본주의와 굉장히 많이 손을 맞잡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결국은 목회자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목회자라는 말 자체를 참 싫어합니다. 이것이 너무나 애매모호합니다. 교회 경영가, 뭔가 교회의 지도자, 또 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업에 경영가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예화) 실제로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가면 결제 받으러 오는 사람이 줄줄이 서 있는 것 을 보며 자기가 회장이 된 건지, 목사가 된 건지 잘 모르겠다며 푸념을 늘어놓은 이야기.
그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목회자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선지자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생각했던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물론 한 교회를 이렇게 목회해 나가는 목회자들과 선지자들을 완전히 일치해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은 문제가 좀 있을 수 있겠지만(선지자들은 한 곳에서 담임목회를 하던 사람들이 아니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사실 우리들이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은 비록 교회가 목회자에게 경영가적인 자질과 그러한 지도력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고 목회자의 일차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옳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정신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본다고 하면은 ‘저 선지자들이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가 무엇이었겠는가’ 적어도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할 때에는 준비를 해 가지고 가야하고, 가난한 시골교회에 가서 몇 사람 모아놓고 할 때에는 그냥 덜렁 덜렁 가도 된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왕 앞에서 설교하는 것은 존귀하고 영화로운 것이지만 천민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라고 생각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치는 도시에서 설교를 하든지, 아니면 시골에서 설교를 하든지, 아니면 한 두 사람을 놓고 하든지 그러한 것과는 상관이 없이 선지자가 가지고 있었던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오류 없이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결단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서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 생겨나고 열렬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택된 민족으로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생각을 조금 바꿔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헌신적이고 정직한 말씀사역의 결과이지 그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정직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기 때문에 사람이 모이질 않고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들의 역사가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체가 무엇이 되어야 하면, 그냥 목회를 한다 교회를 경영한다 하는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가치가 목회, 모이는 회중, 이 모든 것들은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를 통한 결과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커다랗게 흐르고 있는 이 성장의 물결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들 중에는 이러한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떤 교회의 성장 드리이브, 물질적이고, 이러한 배금적인 사상들에 대해서 강한 반발을 가지고 있는데, 반발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대안이 없으면 결국 안 모이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이래서 안 좋고, 저 방법은 이래서 인본주의적이고, 이런 것은 사람이 좋아하지만 비성경적이고, 그래서 이것도 안 하고 저것도 안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나마도 안 모이고, 다 가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러한 교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한 교회들은 어떠한 차가운 바리새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빠지기 쉬운 측면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대안을 제시하면서 문제를 타개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안이 무엇이냐? 교회에 이런 성장 드라이브 속에서 나타나는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은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의 말대로 오늘날의 기독교는 ‘천박한 즐거움을 찾다가 타락한 기독교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 자체가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영광스러운 주님을 뵈옵고, 그분께 경배를 드리고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즐겁게 하기 위한 열심에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운영되어 가는 것들이 그런 식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의 열기 속에서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성장은 결국 꿈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즘 나오는 것이 “꿈”, “비전”입니다. “비전”은 어디를 가나 묻습니다. 하다못해서 지하실에 있는 손바닥만한 교회에서도 꿈을 가지고 2000년도를 준비해야 겠다는 것입니다. 뭘 준비합니까? 다가오는 밀레니엄을 대비해야 한다는데, 뭘 대비한다는 것입니까? 이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니까 자신들도 쫓아가는 그런 모습입니다. 오늘날 저는 참 염려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 비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전”이라고 얘기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보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얘기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공산당이 자기 인민들을 노력동원할 때 쓰는 상징조작과 상당히 비슷해 보입니다. 오늘날 꿈을 이야기하는데, 그 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꿈입니까? 그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 중에서 ‘2000년도에는 내가 더 거룩해 지고, 더 진실해 지고, 정말 주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야지!’ 그런 꿈 제시하는 것은 못 보았습니다.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세계를 향해서.... 그러나 자기 안에도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여러분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더욱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 쏟아져 나오는 책은 매일 꿈 잔치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것이 모두 다 미국에서 들어온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조금 신앙의 불이 붙으면,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된다라고 하는 것을 터득하게 되면 그것을 토대로 해서 진정으로 착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정립들이 주어져야 하는데, 딱 은혜만 받으면 단번에 바람을 잔뜩 넣어서 무슨 어마어마한 일들을 자신들이 할 수 있을 것처럼 바람을 넣습니다. 그러면 속은 허하고, 자신은 무언가 굉장한 일을 위해서 기여하도록 매우 특별한 사람들인 것 같은 특권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꿈이라고 하면 열광합니다. 그것이 다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짜 그러한 비전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꾸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토대들이 무시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 칭의에 의해서 구원에 이르고 나면은 그 다음에 우리에게 최고의 커다란 숙제는 성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딱 두 층, 상층부와 하층부만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순교의 정신으로)” 그리고는 중간이 없습니다. 제일 심각하지 않습니까?
성화에 대한 설교. 윤리적인 설교는 많이 듣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다 성화에 대한 설교이냐고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구원설교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상합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사고 속에서 온통 혼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자신들이 구원을 받고 나면, 그 다음에는 목표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저 구원의 기쁨만 막 넘쳐서 말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함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어찌하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하는 그런 고백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런 고백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제 한 건 해야 하지 않느냐?”하고 한껏 사람을 부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턱도 없고 터무니도 없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크리스챤 꿈 팬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땅을 파고 일을 하자니 힘이 들고, 빈둥빈둥 놀면서 꿈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 이제 내가 뭔가 좀 하나님의 나라를 거들어야 되겠구나.”하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은 잘못된 꿈 팬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쓸데없이 기타나 둥둥치면서 앉아가지고 새우깡이나 갔다놓고 맨날 수다나 떠는 젊은이들을 썩었다고 봅니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캠퍼스 심방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 저는 그런 젊은이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결국은 그렇게 꿈이 어떻고, 세상을 뒤집어 놓을 것처럼 까불다가 결국은 시집장가 가면은 골목에서 전도하다가 만납니다. 제발 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다리 타는 삶이 아닙니다. 구름 타는 삶이 아닙니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고 성실하고 착실해져야 합니다. 기초가 무엇인지를 보고, 자기 분수를 알고,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내가 이렇게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와서 저희 교회의 비전이 무엇이냐고 하는데, 제가 비전이 있다고 해서 뭐하겠습니까? 있지요. 있는데, 그것은 열린교회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비전이기보다는, 특히 오늘날의 사람들이 말하는 그러한 성장을 통해 이루고 싶은 비전은 아닙니다. 물론 단기적인, 중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내 가슴에 사무치는 꿈은 아닙니다. 저는 우선 교회가 조금 커지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외국에 있는 좋은 설교자들이 아주 손쉽게 열린교회에 와서 언제든지 설교해서 여러분들이 이제, 김목사의 설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설교를 듣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개인 통역 시설을 갖춘 교회를 갖추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쯤에는 시도를 하려고 합니다. 외국에서 좋은 목사님을 모셔다가 언제든지 그렇게 말씀에 깊이 들어간 사람들이 언어의 장벽 없이 아주 최상급의 통역사에 의해서 동시 통역된 설교를 들으면서 깊은 진리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교회에도 신학생들이 언제든지 들어와서 공부할 수 있는 도서관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면 와서 여러 가지 신학적인 공부를 거들어 줄 수 있는 교사들도 있어서 개인적으로 각 부분별로 교회사, 조직신학별로 와서 개인적인 조언도 줄 수 있고, 연구하고픈 테마에 대해서 자료도 줄 수 있고 하는 일들을 하고도 싶습니다. 이러한 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복합빌딩을 지어서 교회 자체 안에 예배, 문화, 선교, 사회, 출판, 심지어 사우나 시설까지 다 되어 있는 그러한 교회를 지어서 거기에 와서 휴식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그러한 곳을 가장 번화가에 짓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슴을 불붙게 하는 꿈을 아닙니다. 지금 단기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것도, 제가 강의한 것, 책 같은 것들을 빨리 번역해서 world인터넷에다 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특강 같은 것은 더빙을 해서 목소리나 동영상으로 띄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native speaker에 가까운 전임영어사역자를 초청해서 그렇게 하고, 조금 더 교회가 커지면, 불어권사역자, 중국어권사역자 같은 식으로 사역을 확장하면서 사역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되면 되는 것이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서 여력이 있으면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어떤 것들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것들이 정말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꿈이 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꿈은 하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어디 성경 속에 사람들이 어떤 꿈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미친 듯이 쫓아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저는 정직하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이나, 신약성경으로 이렇게 넘어갈 때, 무슨 꿈을 그렇게 가지고 살았습니까? 무슨 꿈에 그렇게 열렬하게 불탔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꿈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였다고 하지만, 어디 그것이 로마에 관광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까?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서라도 복음을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소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꿈에 대한 이런 주제를 가지고 목회를 하는 것을 저는 굉장히 인본주의적으로 보며, 굉장히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알지 않습니까? 자신이 꿈을 찾아가면서 진짜 열렬하게 살아도 교회에서 예배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날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공허함 같은 것을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의 마취제 비슷한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교회 성장연구소에서 저에게 사람을 보내서 인터뷰를 시켰습니다.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찾아와서 “목사님 교회성장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교회가 꼭 성장을 해야합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들끼리 쳐다보고는 말이 안 되는지 “목사님의 목회 철학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가훈도 없습니다. 저희 교회는 표어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는 교회들 뒤에 깔려 있는 것은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들이 언제든지 성경 위에서 나름대로 성경 자체를 내려다보고 그것 중에서 어떤 것들을 잡아내서 자신들의 모토로 삼으려는 자신들의 견해는 회사의 경영 방식이지 교회의 경영방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학은 무슨 철학입니까? 그런 것들은 성경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정직하게 이끌어 가면 되는 것이지, 무슨 특별할 구호 아래서(올해는 전도하는 해, 그럼 내년에는 안 하는 것입니까?) 이루어지는 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꿈 되게 하는 내용을 한번 보세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굉장히 물량적인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비전 몇이다 해서는, 교회당을 짓고, 선교센터를 짓고 하는 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러한 식으로 되어 가면서, 항상 우리들의 어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심적으로 추구하면서 살아야할 것들은 잊어버리고, 그러한 가치들에 집착하면서 정말 바르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런 꿈 잔치에 의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그런 꿈을 따라서 사람들을 몰아 가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정직한 마음으로 신약성경을 통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꿈을 그렇게 열렬히 가지고 살아갔느냐를 보십시오. 선교에 대한 꿈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다양한 꿈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어떤 추구의 결과물들이었지 그 자체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사람들을 몰아가는 것은 매우 인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당 지을 생각이 있으면 그것을 너무 조작을 하고 해서 사람들에게 그 계획이 엄청난 것처럼 할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교회가 돈이 없으면 돈이 없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교회당이 필요한데 열심히 헌금을 모아서 교회당을 짓자고 하면 될 것을 그것을 거창하게 포장을 해서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커다란 비전이 되도록 하는 것을 저는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노력들을 더 많이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해 지고, 자신 속에 있는 깊은 죄성들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은 내가 정말 그리스도와 더 합일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면에서, 자신의 거룩한 삶을 위한 기초를 보게 만들고 말씀에 대한 깊이 사모함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어서 어떻게 하든지 내 평생에 인생을 다 살고 났을 때에 내가 얼마나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알고 그리고 그 분과 합일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서 예수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일. 그 일에 더 큰 비전을 걸어야지 그것을 그런 식의 일 중심으로 사람들을 만들어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교회 성장을 위한 목회자의 욕구와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구는 쉬지를 않으며, 멈추지 않는데, 그런 것들의 희생물로서 교회를 사용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성도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성도의 큰 슬픔은 자신의 삶과 인격이 주님의 성품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이 될 때, 그리고 자신이 주님을 훌륭히 섬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에 자신을 추스려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의 상황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그렇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의연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마지 꿈도 없는 것처럼...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을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이렇게 말하면 이러한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신비주의적이고, 내면주의적인 것이 아니냐? 이렇게 치열하게 불신세계 속에 있는 이 속에서 그렇게 자기 하나 주님 닮아야 되겠다 하고 사는 것이, 이 문제에 둘러싸인 세상을 건져내는데 유용하겠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사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훌륭하게 살다간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 이유는 열심히 부족하거나 지혜롭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그런 기본적인 역량이 미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이 고생한 이야기를 쭉 쓸 때에 초인적인 고생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초인적인 고생을 하고, 거의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전부다 던지다시피 하면서도 자신이 넘어지지 않고 거룩한 사람으로 일생을 마칠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하면, 근본적으로 그의 진정한 꿈의 기초가 바깥으로 드러나는 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섬김을 가능하게 하는 주님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동참함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던 것이 사도바울이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고자 했던 가장 커다란 비전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피비린내 나는 분투하는 삶을 살수록 더 알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실까? 정말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당신을 죽음에서 살려냈던 그 위대한 부활의 권능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당신과 더불어 늘 죽고 다시 살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깊이 동참해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그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이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관심의 대명사였습니다. 오히려 빌립보서 1장에서는 그렇게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비하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이 헌신적인 사역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 나를 생각하면 그것이 제일 좋은데 너희들을 생각하면 내가 너희와 조금 더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것들이 이런 말로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로버트 멕체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큰 행복은 유능한 사람이 되고,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는 것입니다.” 노가다목회의 뒷부분에 나오겠지만, 저는 얼마 안 되는 목회 생활이었지만,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잘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퇴했을 때, 제가 아는 몇 분 목사님들을 딱 은퇴를 하고 나니 우울증이 오고 어찌할 줄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없습니다. 은퇴한 후에 혹 실력이 있어서 여기저기 강의라도 오라고 하거나 영력이 있어서 부흥회라도 해 달라고 하거나 글을 쓰는 일이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한 현상이 왜 나타나는 지 아십니까? 그것은 아까 얘기한 것과 같은 그러한 토대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일에서 다 놓이고 나면 이제는 주님과 단 둘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텐데, 기본적으로 그러한 베이스가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이 사라지고 나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인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하면 우울증이 오고, 또 사람들을 향해서 소외감을 느끼고 하는 것을 여러 사람들에게서 보면서 심각함을 느꼈습니다. 굉장히 불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꿈이 무엇이냐? 내 생애에 성경적으로 볼 때, 우리들이 가져야 할 꿈을 딱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로, 주님을 닮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완전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어느 하나를 양보하고 떨어뜨려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닮은 사람이 주님을 더욱 닮으면 닮을수록 주님처럼 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닮으면 닮을수록 주님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토대를 굳건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잘 안 되느냐 하면, 안 되는 이유는 꿈을 찾아가는 것은 쉬운데 자신의 그 어떤 주님을 닮아 가는 성화의 토대를 놓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단히 자신을 살피면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 안에 있는 무한한 죄성들을 발견하고, 자신의 그 패역을 고치면서 싸우는 그 내면적인 투쟁들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 쉬운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은 공부하는 것보다 땅 파는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2. 자네, 정말 노가다 목회 하려나②
이제 또 하나의 일고 있는 물결은 윤리운동입니다. 이것도 걱정스럽습니다. 그것도 결국은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회심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이상한 운동들이 고개를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운동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러한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는 영혼의 부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윤리운동이 많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아, 교회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매우 심각할 정도로 무능해져 있구나.” 그리고 교회의 고유한 사명, 즉 복음에 의해서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변화시켜서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이 능력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이 모아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난 거룩의 경험에서 흘러나오는 도덕이지만, 윤리운동에서는 그러한 것은 차후에 두고 어떻게든 바르게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윤리운동 방향에 매력을 느끼면서 뛰어들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 의’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사는데,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 그러고도 그리스도인이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거룩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어떤 도덕적인 삶의 개선을 보이는 사람은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으로부터 비롯된 삶이기 때문에 자신이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부도덕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완전히 거룩하고 도덕적이신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거룩하게 살면서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처절한 자기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의 삶이지 이런 식으로 기독교 윤리운동에 의한 세상변화가 희망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정선거가 사라지고, 뇌물도 사라지고 그런 세상이 된다.... 노력하면은 그런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 않습니까? 외국에 가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나라보다 훨씬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선진국가, 영국이나 미국의 사람들을 보면은 상식이 통합니다. 상식이 통함으로 우리 나라에서처럼 그렇게 황당무개한 일은 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쇼핑하는데 건물이 와르르 무너졌다든지,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길이 내려앉았다든지 그런 일 말입니다.
얼마 전에 DC-9기 하나가 이륙을 하면서 불과 몇 십 초만에 공중에서 완전히 폭발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보니 산소 과다공급이었습니다. 산소가 빠져나가면서 이 장치에 열이 생겨서 산소가 옮겨 붙으면서 한번에 폭발해 버린 것인데, 그 점검을 잘못한 사람을 기소를 했는데 ‘업무상과실치사’로 기소한 것이 아니라 ‘살인죄’로 기소를 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최소한 무기징역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런 정도로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처럼 건물이 와르르 무너진 것에 대해서 이유를 물을 때 “그냥 무너졌다.”는 식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사회 감시가 철저하고 제도나 기능 자체가 완벽하게 되어 가면 갈수록 사회는 점점 완전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싱가폴 같은 곳을 가 보십시오. 얼마나 도덕적입니까? 여자들이 다 노출을 하고 다녀도 완전히 안전한 곳이 싱가폴입니다. 가서 저질스럽게 까불었다가는 반 죽습니다. 그냥 벌금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갔다놓고 바지를 벗겨 곤장으로 칩니다. 그래서 예전에 미국아이 하나가 스프레이를 갖고 자동차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 곳에서는 그러한 행동, 벽에다가 낙서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굉장히 큰 범죄에 속합니다. (껌을 못 씹게 하는 나라니 오죽 하겠습니까? 껌 씹다가 걸리면 10만원 정도의 벌금을 무는 나라입니다.) 차 정차선에서 살짝 넘어가서 서기만 해도 벌금이 이십 몇 만원 벌금입니다. 여성들을 희롱하거나 하면 갔다놓고 때리는데 퍽 터집니다. 의사가 와서 진찰해서 더 맞아도 된다고 하면은 또 때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안 되겠다고 하면은 의사가 다 꿰매주고 치료한 후에 다 나았으니 또 오라고 해서 칩니다. 그러니 괜히 한번 희롱했다가 엉덩이 터지면 절대로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덕적인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꿈꾸는 나라입니까? 그러면 여성들이 쩔쩔매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닙니다. 결국 거리가 상당히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꿈꾸는 선진국가들의 서로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정확하게 살아가고, 예의바르게 살아가고, 항상 우호적이고, 웃으면서 인사하고 살아가는 평화로움은 그냥 편안하게 늙어서 죽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잘사는 나라들의 공원에 가 보면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면서 풍족한 연금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저게 인생의 마지막인가?’하는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평화로울지라도 사실 우리가 꿈꾸는 것,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정말 사람들이 도덕적으로만 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렬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그러한 나라가 진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꿈꾸는 나라, 꿈꾸는 세상이 아닙니까? 윤리운동이 그러한 것들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수원에 있는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그 분은 윤리운동에 깊이 개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상을 했습니다. ‘교회가 제대로 될까?’ 아니나 다를까 한 40명이 모였는데, 완전히 냉장고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설교자는 불꽃처럼…’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이 상당히 비껴 갔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로서는 굉장히 불행한 일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그러한 일들은 목회자들이 깊이 관여할 운동이 못 된다.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는데 무슨 윤리가 나오겠으며, 또 나온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될 수 있겠느냐?”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들이 퍼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특별히 자신의 나름대로의 신앙적인 사상이 안 생기면 그 중에 하나를 잡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오늘날에 흐르고 있는 풍조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꿈과 관련해서 리더십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리더십’하고 말은 많이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많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책들이 정확하게 진단을 하고 있든 있지 않든 상관없이 교회에 그런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경우를 못 보셨습니까? 회사를 다니거나, 군대에 있으면서 조직 사회에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둘이 앉아 있을 때는 더 없이 훌륭한 사람인데, 하여튼 그 사람이 내 상사가 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온 조직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그 조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쓴맛을 보여주는 사람.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를 목회 하면서도 저희 전도사님들에게 꼭 이런 말을 합니다. “설교는 아홉 번을 못 하다가도 열 번에 불꽃처럼 튀면은 아홉 번 못한 것이 다 용서가 된다. 죽 쑨 것을 다 용서해 주고, 항상 기억에 남는 것은 불꽃처럼 터진 그 설교만 기억에 남는다.” ‘에이. 오늘 터졌으면 뭐해? 여태까지 죽 쒔는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지막에 팍 터진 설교를 보면서 이번 주, 내일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리더십은 반대입니다. 아홉 번 잘 하다가 한 번 망치면, 아홉 번 잘 한 것은 생각도 안 나고 ‘저거 믿을 수가 있으려나? 따라오라고 하는데 또 어디다가 꼬라박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리더십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리더십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진리와 사랑입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행동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완전히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정확하게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고 할 때에 무릎 꿇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리더십이 타격을 안 받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했다는 말을 매일 하면 그것도 곤란하겠지요? 그것은 신빙성의 문제이겠지만, 간혹 자신이 판단을 잘못 했을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에는 자신이 정직하게 말씀에 비춰서 아닐 때에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 리더십의 신용도를 높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동기가 된 리더십은 자체가 포악해지지 않습니다. 항상 교회를 이끌어 갈 때에 긴장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개인에 대한 사랑과 효율성의 문제입니다. 몇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효율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속을 썩이고 갈구는 교인들을 조용히 잘라내고, 손을 보면 교회가 조용히 잘 되어질 것 같습니다. 또 그러한 것이 세상에서는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36살 먹은 어느 젊은이가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12년 동안 외국계 은행에서 가정도 등한시 한 채 헌신적으로 일했는데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회의를 느끼면서 한강에 뛰어들어서 죽어버렸습니다. 세상은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목회자가 되면 다 이러는 것입니다. “야, 그렇게 살아서 되겠니?” 어떤 교인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목사님께 용서를 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니가 뭔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도 데리고 있어야지... 어느 교회에서는 그러더랍니다. “야. 아무개 집사 까부는데 재 손 좀 봐.”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 잖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리더십이 기독교적인 리더십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리더십의 문제에 있어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일관성입니다. 사람들이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일관성이 없을 때에는 사람들이 신뢰를 안 하는 것입니다. 제가 주례 안서는 결혼식을 안 갑니다.(그것은 여러분들이 섭섭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이야기해도 다 이해하지만, 30명밖에 안 되던 시절에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매일 밥 먹고 이렇게 빤히 보는데, 그리고 목사님이 시간 있는 것을 다 아는데, 또 그 때는 목사도 아니었으니 주례를 설 수도 없었을 때였는데, 결혼을 한다고 알려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 오시지요.”라고 합니다. 그 때는 대답을 얼버무리지만 결국에는 안 갑니다. 왜냐하면 다 그렇게 좇아다닐 수는 없는데, 이 사람은 가고 저 사람은 안 가게 되면 언젠가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한 것을 자신 속에 아주 심사숙고해서 처신을 잘 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말‘, 말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극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한쪽으로는 조직체의 보스 같은 리더십. 그래서 카리스마, 그 카리스마도 진짜 영적인 카리스마가 있고, 깡패 같은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그래도 영적인 카리스마는 성경의 뭔가를 체험했기 때문에 오는 것인데, 순 깡패 같은 카리스마는 깡다구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리더십들이 오늘날 하나의 커다란 덕목으로서 이렇게 칭송받고 있는 장면들은 정상적인 교회 구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정반대로 가서 ‘니나 내나 우리 다 만인 제사장인데, 네가 목사라고 그럴 게 뭐 있냐?’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전부 성경적인 리더십은 아닙니다. 그러니 목회자들이 어디에 더 매력을 느끼겠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크게 끌고 가면서 “당신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말처럼 자신의 생긴 그릇대로 그렇게 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교인들이 막 왁자지껄하고 나갈 때에 옛날의 이천성목사 같이 욕도 잘하는 양반이 “까불지 마.”하면 꼼작도 못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빌빌하던 사람이 어디서 특강 한번 듣고 그렇게 똑같이 따라하다가는 사람들이 더 까붑니다.
근본적으로 오늘날에 논의되고 있는 리더십도 극단으로 치우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이라고 하는 것은 경건한 성도들이 그 목회자가 정말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구나라고 생각되면서 그 분을 통해서 선포되는 진리 앞에 무릎을 꿇어서 목양의 관계가 생겨남으로서 그 리더십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는 것이지 그러한 식으로 외부적으로 인식되어진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이 정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섬기는 리더십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굉장히 많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분명한 사상이 없으면 그런데서도 현혹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나오는 ‘멘토링’ 같은 것들도 그러한 것입니다. ‘멘토’라는 것이 자신이 스스로 ‘멘토(스승)’라고 느껴야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멘토는 단순히 가르치기만 하는 스승이 아니라, 삶 자체가 자신에게 흘러들어 오기를 원하는 이러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 그러한 멘토라고 하는 것은 책을 읽다가도 감동이 되어 막 탐독하면서 그 분의 모습을 닮아간다면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살았는데도 멘토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멘토라고 하는 것은 그 자신이 영적인 거목이 되어야지 멘토링이 되는 것입니다. 뭐 도토리 키 재기식이고, 차이가 난다면 성경공부 몇 권 더 한 것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네가 내 멘토가 되냐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멘토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들이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해서 근본적으로 그 말씀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거룩의 욕망 속에서 거목과 같은 어떤 사람들 밑에서 다시 영향을 받고 자라는 정상적인 이 교회의 축복된 목양의 구조 자체가 사라진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은 교회를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 아이디어 속에서 수많은 방법론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고치는 곳입니다. 로이드 존스가 일관되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기 보다는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스럽게 바뀌지 않아도 아주 베스트 크리스챤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할 때 혹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도 할 때마다 어떠한 동일한 죄에 대해서 지적하셔서 괴로워 해본 적이 있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하나님이 이러한 것들을 고치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얽혀 있는 문제일 때에는 너무나 많이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이 받아야할 출혈이 너무나 큰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해야 할 출혈이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자기를 고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한 번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방향을 전환해서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반드시 기도하려는 방향으로 바꿔보려고 애를 써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는지 알지 않습니까?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거룩한 삶을 위해서 자신이 바뀌도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에 그런 삶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그러한 삶 말고 다른 길을 찾는 것입니다. 최근에 말씀이 계속 비껴가던 어떤 지체 하나가 열린교회를 떠나가면서 “목사님. 제가 요즘에 성경을 새로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우물 안에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며 꿈 찾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해 지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교회를 하면 제발 쪽박을 차고,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각오를 하고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그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빨리 그만 두는 것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한쪽에서 인간이 변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폭탄을 퍼붓는데, 하나도 안 바뀌고도 베스트 크리스챤이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현혹하면 얼마나 혹하겠습니까? 나비처럼 날아갑니다. 그러나 그 곳에 진정한 생명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어린아이들을 가르쳐도 근본적으로 한 번 보십시오. 그 아이들을 밖에 데리고 나가서 공과공부 시간에 햄버거 사 주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진리 하나를 가르쳐서 이 영혼이 왜 변화되지 않을까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이 쉽겠는가를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한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사람들이 목회를 하겠다고 덤벼들면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교회가 얼마나 큰가, 그리고 얼마나 작은가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항상 목회자들은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의 교회가 크면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에 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교회가 작으면 자신이 바르게 하기 때문에 안 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이것도 교만입니다). 진짜 변화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어떤 식의 리더십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이외에도 오늘날에 어떤 프로그램에다 목숨을 걸고 하는 수많은 목회 풍토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도 반성을 많이 합니다. 열린교회의 한 해 행사가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듯이 제가 꿈꾸는 교회는 부흥회나 사경회가 필요 없는 교회입니다. 주일날 하나님을 충분히 만나고 정말 분투하면서 살고 그렇게 살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프로그램으로 막 붐비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지상최대의 프로그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즐거움, 그리고 그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 그리고 진짜 본편은 일주일동안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주일동안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즐거움. 보이지 않는 도시 한 구석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주님의 진리를 새롭게 알아가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즐거움. 이러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점점 자신도 거룩해져 가야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목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서 그렇지 않은 풍조들이 만연함을 보게 됩니다.
며칠 전에 제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굉장히 유명해 진 이였습니다. 그런데 스승인 제가 얘기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수없이 자신의 아는 것을 얘기합니다. 저는 속으로 ‘너는 신학교 다닐 때 그 때가 참 좋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적당한 두려움이 있고, 겸손하던 신학교 다닐 그 때가 훨씬 더 좋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사람이 목회를 하면 참 포악해 집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도 열린교회 이사오고 나서 많이 포악해 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갑니다. 교회가 작았을 때는 잘 못 돌아가면은 다시 하면 되지요. 그러나 교회가 커지면은 수백명이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보기에 목회자가 부족해 보일 것이 아닙니까? 혼자 조그만 차를 몰고 갈 때에는 자기 혼자 흔들리는데, 큰 버스를 타고 간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브레이크를 꽉 밟으면 몇 사람이 쓰러졌느니, 부러졌느니 난리를 칩니다. 그러니 그러한 것들이 갑갑하기 때문에 포악해 지는 것입니다. 강포해져 갑니다. 그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의 성화가 없는 목회의 마지막 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또한 영성운동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가 하도 침체되어 있느니 영성운동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운동이라는 말과 만날 수도 없는 말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또 옛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에서는 반지성주의적 분위기를 띕니다. 그러나 또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하는 것도 반대합니다. 그렇다고 진짜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영(0)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유명해도 절대 안 부르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은 자기들끼리, 불 받은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성운동이 일어나면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문을 열려는 시도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 사이에 불건전한 은사운동들이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냥 말씀 중심이던 교회 한 구석에서 이상한 은사운동하는 사람이 일어나고, 그런 은사운동을 많이 하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른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목회자들은 교회 성장을 위해서 들여오는 것입니다. 최근에 상당히 무리를 일으키던 빈야드 운동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들어오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면서 체험을 불러 일으켜서 열심을 북돋우려고 하는 것은 모두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부흥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바뀌어 집니다. 전에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생각하시던 부흥에 대해서 거의 맹목적으로 추종을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많이 생각이 바뀝니다. 영국에를 가보면 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마음이 열렸는지가 이해됩니다. 만약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그대로 재현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굉장한 혼란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존스 목사님이 서 있는 자리는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이번에도 굉장히 실감을 했습니다. 그것은 심각할 정도로 성령에 대해서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완전히 닫혀 있다 보니 교회 안에 사랑 같은 것들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출석한 지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작은 교회가 말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만 와도 얼마나 반갑다고 합니까? 더구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뭔가 그 말씀 자체가 성령의 역사로 깊이 사람들에게 들어가서 내면의 세계를 본질적으로 바꿔 놓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교리를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적이고, 교리적으로 올바른 설교를 듣는다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이드존스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내일 일어날 일도 예언할 수 있도, 병든 자도 일어나고, 환상도 보고, 아이들도 뒤집어져서 예언도 한다는 그 이야기를 왜 그렇게 피를 토하듯이 외칠 수밖에 없었는지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점점 이 부흥이라는 측면에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말씀하셨던 그 부분을 충분히 수긍하면서도 그 청교도들이 가졌던 좁은 의미에서의 부흥,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 의해서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회심하게 되는 그런 쪽의 부흥이 사실 오늘날의 우리 한국교회에서 정말로 추구해야 할 그러한 부흥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많이 바뀌어 갑니다.
그래서 제가 부흥이라고 말할 때에는, 심지어 제임스 패커 같은 사람의 글을 보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영적인 현상들을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악마적인 것이라고도 보았습니다. 물론 청교도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인 청교도 계열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이 성령의 역사와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 반드시 ‘진리와 함께’라고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확신을 철저하게 붙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제가 꿈꾸고 있는 부흥을 이야기 할 때에, 그러한 청교도적인 관점의 부흥에 많이 다가가 있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마음은 열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씀과 함께 역사하지 않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 한국의 맥락은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처했던 영국의 문맥과는 조금 반대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 아닐 지도 모른다고 자꾸 말을 해야지만 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와 있습니다. 결국 강조를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그러한 불건전한 성령 운동과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적인 탐심 같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많이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현상들이 강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와 그 진리에 의해서 자신이 본질적으로 바뀌는 그러한 체험들이 있으면 절대 말씀의 역사와 동떨어진 어떠한 성령의 체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맛을 알고 말씀이 자신을 어떻게 고쳐놓는 지를 아는 사람들은 말씀과 동떨어진 체험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남겨주는 것이 없는가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젊은 시절에 방황도 체험하고, 소위 얘기하는 입신이나 방언을 체험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가져다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이 가치관이나 생각, 근본적으로 자신 속에 있는 내면의 세계들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것들이 정말 그러한 변화를 가져다주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운동들이 굉장히 깊이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이 안 될 때에 그러한 방법들 중에 한 가지를 택해서 자기 나름대로 교회를 일구어 가려는 시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간적으로 이러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역사상 어느 설교가에 심취해 있고, 청교도에게 심취해 있고, 많이 은혜 받고 하는 것이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진짜 단독목회를 해 보면 압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자신이 이 설교 사역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사람을 바꾸어 놓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신의 이 사고와는 상관없이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은 풍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자체가 존립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안 모여서 간판을 내리게 되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느 한 쪽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강원도에 집회를 내려갔더니 거기는 기장측 교회들이 많은데,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기장측 교회가 조금 리버럴하고, 차갑지 않습니까? 사회 개혁적인 설교를 해도 다 되고, 모두 다 되는데 문제는 전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지금 기장측에서 그래도 교회가 잘 된다고 하는 곳이 한신교회입니다. 그 목사님도 사실은 예장측 목사님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장측에서 다 자라서 신학교만 그 곳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신학교만 다녔지 기본적인 이 골격 자체는 예장분위기 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그냥 설교하고, 인격적인 감화를 끼치는 그런 정신을 예장에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몇 월 며칠까지 한 사람씩 전도해 오라고 하는데 교회의 기본적인 역량이 없이 그것이 되냐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단상에 올라가서 하도 열 받아서 손바닥을 확 찢으면서, “피를 봐야지 맛을 알겠냐?”고 하는데도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올바르게 하려고 해도 자신이 무엇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한 기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누구를 좋아해도, 목회 현장이 여러분들을 그대로 놔두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윗필드를 좋아했어도 목회 현장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윗필드처럼 목회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여러분들이 이러한 세상적인 방법을 쫓아가지 않아도 말씀 하나로 승부해서 사람들이 열명이 오면 단 한 명이라도 고쳐져서 하나님 만나 변화 받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야지만 여러분들이 그러한 세상 풍조와는 상관없이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을 자기고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이제 가장 커다란 문제는 목회자들이 우선 순위가 바뀐 것이 문제입니다. 그 우선 순위라는 것이 너무나 일과 성취 중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목회자가 얼마나 경건하고 진실하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보다는 그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업적중심적인 평가가 유행하는 사회분위기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계속해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나름대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어장치를 갖지 안으면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어장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실 여러분들이 처음에는 교회를 세우지만 그러나 교회가 점점 커지고 나면은 여러분들이 교회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여러분들을 끌고 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피나는 노력이 없으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크고 나면, 이제는 교회도 자기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우선순위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삶이 먼저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먼저인가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먼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먼저라고 할 때, 그것은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도록 성경에 의해서 요구받고 있는가를 보면은 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서 새 사람이 되고 난 후에 그 사람이 구원받고 나서 주님을 더 많이 닮아가고 그리고 주님께서 하시고 싶었던 일을 주님을 닮아가는 그 사람을 통해서 성취해 가고 싶어 하신다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들이 쟀을 때, 그 때에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선 든든하고 탄탄한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이 기반이 되지 않고는 그 위에 쌓아 올려지는 모든 것들은 전부다 모래 위에 세워지는 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러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일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지 말고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그러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영적인 생활이 견고하게 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언제든지 우리들이 강조하고, 이것들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까 말한 방법론을 말한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정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사느냐 안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실 신학교를 다니면서의 여러분들의 삶을 한 번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만족하고 계십니까? 기도생활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신학을 모두 마치고 나서 담임목회를 하는 상황으로 밀려들어가게 되면, 지금의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은 폭우 속에서 기도하는 것이고, 담임목회를 하면은 폭풍 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힘든 것입니다. 내 삶이 내 삶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교인도 안 모이고, 교회도 조그맣고, 재능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면 조금 한가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하면은 한국 교회에서는 몇 명 있으면 새카맣게 달려들어서 빨대를 딱 꽂고서 다 빨아먹습니다. 기도시간이고 뭐고 다 빨아먹고 비면은 그 때는 딱 발로 차는 것입니다. 얼마나 냉혹하고 야박한 곳인지 여러분들은 모르실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것을 잘 몰랐습니다. “주께서 오라 하시면…”하고, 오죽 했으면 1년에 5만5천㎞씩 타고 다녔습니다. 카센타 사장이 “아저씨, 영업해요?”하더군요. 그러한 것들을 깨닫고 나서는 아무리 필요해서 오라고 청해도, 제가 아니면 안 갑니다. 제가 얼마나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지 여러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한 30군데에서 오라고 하면, 한군데 정도 선택해서 갔습니다. 하도 안 가니까 요즘에는 오라고 하는데도 많이 줄었더군요. 그런데도 자신을 지키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잡지사, 방송국, 무슨 이름도 없는 곳에서까지 다 오고, 무슨 단체나 도와달라는 곳은 그렇게 많고, 무슨 사연은 그렇게 많은지……(제가 일부러 컴퓨터를 안 배우는 사람입니다. 인터넷에는 책 읽고나서 보내는 편지도 많은데 왜 답장을 안 하냐고 하지만, 그것까지 언제 하겠습니까? 열어보면 부담 생기기 때문에 일부러 안 열어보는 것입니다.)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커지면 그렇습니까? 교회가 작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멍가게나, 큰 슈퍼나 물건 해 오는 것 똑같고, 포장하는 것 마찬가지이듯이 말입니다.
최근에 저희 박순용목사가 한 20명 모이는 교회를 개척했다는데, 만나면 맨날 바빠서 죽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다 바쁜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현장입니다. 하루, 이틀 그렇게 가다보면... 지금 기도를 못하면 그 때도 못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3시간씩 기도를 안 하려면은 신학교 다니는 것이 다 가짜입니다. 그렇게 뺀질거리면서 기도를 안 하면 앞으로 뭐가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 하나님을 만나시겠습니까? 매일 다른 사람이 하나님 만난 얘기만 들으면 무엇합니까? 자신이 만나야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전체로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노가다 목회를 안 하는 비결입니다. 겨우 일하면서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고, 뭐가 큰 프로그램이 떨어져야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말로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제일 커다란 비중을 두어야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경건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것들을 확보하지 않으면 결코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교재를 잠시 보십시오. 3p 아래)
하나님이 빽빽한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굉장히 겁을 먹게 되었습니다. “1.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은 죽을 것 같은 하나님 면전에 모세를 보내는가?” 자신들은 곧 죽을 것 같은 자리에 모세를 보내도 모세는 살아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직접 나갔다가는 죽을 것 같기 때문에 나가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죽을 것 같은데, 모세는 안 죽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거룩의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3.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거룩에의 추구를 가로막는 잘못된 가르침 중의 하나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모두 마찬가지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절대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경건한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의인도 없으며, 따라서 거룩한 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인간들을 획일적으로 보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진실하고 거룩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쓰시고, 한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말씀을 하시고, 한 사람에게는 침묵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성령을 주시고, 한 사람에게는 성령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사람을 고치고 근본적으로 고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한 사람은 아무 것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역사를 움직이는 전환점에서 당신이 쓰고자 하시는 인물을 준비하셨지 아무나 쓰신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하고, 온전하고, 의로운 인격과 삶으로 나아간 사람들을 예비하셨습니다. 에녹, 노아, 모세, 요한... 이러한 영적인 인물들의 특징은 거룩이었고, 그 거룩의 기초는 경건이었습니다. 그 이들의 인격과 삶의 특징이었으며, 이는 단순한 경건함을 넘어선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그저 학교나 다니고, 어디가서 학위나 하나 받을까, 어느 스폰서 하나 물어서 유학이나 가 볼까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공부를 한다고 이러한 것들이 생겨나겠느냐는 것입니다. 생겨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 기본적으로 경건하게 살아가려는 그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죄인인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렇지, 죄 가운데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과 오랜 세월을 기도 속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엄청나게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도 절대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한 사람은 쓸모 없는 쓰레기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4. 목회자는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은 거룩에 비례한다. 이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의 목회는 자신과 양떼들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목회사역을 마친 후 심리적인 동공화 현상을 맞이하는 목회자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교회 일을 하는 동안에만 자신이 누군가를 확인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우리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가장 커다란 행복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신자의 거룩은 바로 그런 신자가 되기 위한 투쟁의 결과로 얻어지는 결과이다. 목회자는 자신에게 목양을 받는 사람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기도와 경건의 세계를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목회 사역은 단지 교회의 운영을 위한 기능일 뿐이다. 목회자의 직업화 현상은 목회자의 거룩의 결핍이 빚어내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일찍 신학하는 것을 후회해야 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신학교를 간다고 하면 일단 말리고 봅니다. 총신대 이제 5년이라고, 수세 후 5년이라고 하는데, 5년은 짧고 한 7년 해야 합니다. 세례 받은 후에 7년이 지나지 않으면 신학교 못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젊은 시절에 빨리 열심히 공부해야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그거야 신학자 될 사람들이야 외국가서 공부하면 되는 것이고 목회자될 사람들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 다니면서 전도사 생활하던 것 다 집어치우고 여기에 와서 교회생활 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성하십시오. 그렇게 살아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던 것까지 집어치우고 왔으면 그러면 이제 무엇에 열심을 내야겠습니까? 자신의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에 열심을 내고 성실한 교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단지 일하기 싫어서 잠시 쉬고 있는 교회 실업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 새벽기도를 안 나오십니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집이 어마어마하게 멀어서 시간적으로 안 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학에 들어섰는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을 하면 백번 전도사 하던 것을 그만 두어도, 단지 전도사 생활하던 것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새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추구해야 되지 않습니까? 정말 전심으로 기도생활 열심히 하고,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 예전에 사역하던 시간들을 개인적인 경건과 지성적인 성숙을 위해서 쏟아붓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얼마 되지 않는 생활비이지만, 사례금까지 모두 거절하고 열린교회에 와서 말뚝을 박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 이제는 여기가 내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세월만 낭비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한푼이라도 버는 것이 낫지....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찾는 그런 성실한 경건생활이 없이 그냥 덜컥 교회의 사역만 그만 두면 모든 것이 저절로 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성실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기초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사역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게으르고 부패한 본성도 많이 작용을 했는데, 그것을 그냥 환경탓으로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만 두고 나니 본색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기도생활도 못하고, 교회 가까이 와야 되겠다.”고 하며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교회 가까이 이사도 왔습니다. 여태까지 새벽기도 못 나오는 것은 집이 멀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 나와보니 자신 속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희생하면서 기도하고 싶지 않은 본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정신차려야 합니다.
(5p로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목회자의 마지막 열매는 거룩한 인격이다.” 대부분이 사역 말년에 기록된 글들입니다.
․앤드류 머레이에 대한 월터 바로우의 회상입니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방에 들어서자 왜소한 체구의 영적 거인이 무릎 위에 손을 포개고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저는 이 앤드류 머레이를 참 좋아합니다. 화란사람이면서, 그 당시 부흥이 일어났을 때 영국에서도 공부하였기에 화란의 탄탄한 신학과 영국 부흥시대의 끝물을 먹으면서, 또 사역은 남아프리카로 내려가서 선교사 사역을 하였으니.. 정말 이상적인 결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분의 설교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냥 성령 받은 영력있는 설교만이 아니라 아주 탄탄한 신학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분이 더 조직적으로 글을 쓰셨더라면 아마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지금 나온 글만 해도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구라파의 신학의 큰 틀과 부흥의 영성과 선교 사역에서 오는 영혼에 대한 열망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그러한 글들입니다.) 얼굴에 거룩한 광채를 띄고 우리 모두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그는 우리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묵상의 분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만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다 모였을 때,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그의 기도가 끝나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존 길리스의 글입니다.
“그 분은 마음이 산란할 때(어글리 박사가 회고하는 것입니다. 글라스고에 있는 Free Church에서 목회를 하시던 분이신데..), 고생할 때, 철야할 때, 금식할 때 순수와 친절과 꾸미지 않은 사랑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입증하셨습니다. 그의 생의 말년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성찬식 때에 교회에 나타나 한 상에서 권고하시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무관심한 구경꾼일지라도 대부분 그의 교인들의 얼굴에 빛났던 자신의 목자를 향한 연민과 사랑을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엄숙히 그의 이름으로 그들을 축복하고, 겸손함과 침착함과 기쁨에 가득 찬 눈물로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억제할 수 없이 흐르는 교인들의 눈물을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그날 밤 그분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찬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길선주가 아니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는 나를 보지 못했으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망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으신 것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쳐 버릴 수 있을까?」하며 나는 몹시 번민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보다 더욱 조심스러운 얼굴과 죽음에 떠는 열망을 가지고 예배당으로 들어와 「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유혹에 깊이 빠져 있었고, 영적 기근에 허덕이고 있었음으로 그의 말이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 알고 통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좋아하는 사보나롤라입니다. 세바스티노라고 하는 수도사가 회상한 것입니다.“ 어떤 때에 그는 기도하고 나서 말씀을 강론하기 위해 단상에 오를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발하여 회중들이 그 어떤 빛을 뚜렷이 의식할 정도였습니다. 때로는 깊은 산 속에서 자아를 잃을 정도로 깊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경험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때에는 며칠 씩 세속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물러서서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멕체인입니다. “나는 내가 아직까지도 그의 천사같은 얼굴을 보며 그의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넋을 잃었으며, 한동안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이것이 불과 로버트 맥체인이 29살 때 일입니다.)”
“자신의 건강 때문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구실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제네바의 개혁에 동참하자는 요구를 거절하는 칼빈에게 파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뭍겠는데, 당신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려는 사람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당신이 무시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휴식을 저주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휴식에 하나님의 저주가 있기를... 」 파렐의 이 추상같은 발언 앞에 칼빈은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오는 것을 경험하였다. 의심할 수 없는 어떤 명료함이 어두운 그의 마음에 빛으로 다가왔다. 그는 지금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파렐에게서 보이지 않는 지존자의 임재를 느꼈고 하나님의 손이 그의 말을 통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칼빈 자신의 머리 위에 머무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파렐을 통해 뿜어지는 거룩한 권세의 불 아래서 칼빈은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다.」 이 젊은 신학자의 회개는 지성에 있어서 자신보다 결코 뛰어나지 못했던 파렐의 협박이 아니라, 그의 말 위에 함께 하시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칼빈의 부인인 이델렛트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영혼이 저 하늘나라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별안간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 영화로운 부활이여. 오! 아브라함과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 오! 이 시대의 신자들이 당신을 신뢰하였고, 아무에게도 당신을 바라본 것이 헛되지 아니합니다. 나는 이제 나의 소망을 당신께 두나이다.」 이 짤막한 문장은 크게 외친 것입니다. 그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고, 정신은 혼미해 졌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녀는 혼수상태에 있었으나 얼굴빛은 그녀의 정신이 또렷하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내 아내에게 그리스도의 은혜, 영생의 소망, 결혼, 임박한 하늘나라로의 여정에 관해 몇 마디 더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얼굴을 돌린 채 그녀를 향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잠시 후 그녀는 미끄러지듯이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갔습니다.」”
결국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가 하면, 아까 이야기한 오늘날의 세상 속에 흐르고 있는 어떤 목회의 방법론들이나 그런 것들을 쫓아가면 마지막에 저런 식으로 죽을 수 없다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들의 이런 죽음을 통해서 일평생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입증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오, 주님!” 하고 죽고싶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산 것 만큼 죽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마지막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 기도도 예수님의 삶 전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떤 사고 속에서 무엇을 추구하면서 사느냐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다양하게 수고한 사람들이었지만, 일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추구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벗겨지는 순간에 해방과 함께, 이제는 주님과 더욱 합일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오랜 세월 동안에 철저하고 순전한 경건생활이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태까지 우리가 이야기 해온 주제들을 한데 모아 결론을 내리자면, 결국은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서 오늘의 이런 성공을 지향하는 이 세상의 분위기를 따라가서는 결코 마지막에 거룩을 유지한 목회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여러 가지 과부아가 걸리게 되면은 심리적인 탈진현상이 굉장히 자주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외롭다는 생각들...
어느 자매가 자기 하소연을 다 하고 제가 일러주는 이야기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참, 목사님.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목사님께 와서 다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는데, 목사님이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하세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가라.” 사실 그것이 숙제입니다. 누구에게 이야기하겠습니까? 붙잡고 “여보게, 나 지금 곤고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결국 해결은 없습니다. 목회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푸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선지자가 너무 낙심되고 이 인간들이 도저히 하나님 말씀도 안 듣고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아, 나는 진짜 외롭구나. 내 고민 들어줄 사람도 없고...”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투정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합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다 내가 싫데요.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도 않아요.”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해결을 하는 그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경건의 분량을 가지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지금 시절에서 양보하지 말고 가장 중시해야 하는 것은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목회의 현장에 들어서서는 공부를 하는데, 공부를 따로 하고 목회현장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은 목회도 안 되고 공부도 안 됩니다. 공부를 할 때에 항상 목회하고 같이 맞아떨어지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흥”에 대해서 시리즈로 설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때부터 부흥에 대한 자료들을 쭉 찾으면서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조직신학 쪽에서 보고, 교회사에서 일어난 부흥의 증거들이 있을 수도 있고, 오늘날 부흥에 대해서 얼마나 그릇된 개념들이 유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찾아 볼 수도 있고, 한국에서 부흥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볼 수 있고, 부흥이 일어난 선교의 역사와 부흥이 일어나지 않은 선교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선교적인 자료를 찾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방대한 공부이지만, 항상 설교로 feedback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시리즈를 쫙 설교하고 나면, 자신이 뿌듯하게 채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학들, 학자이면서 목회자였던 청교도의 후예들이 해 나가던 방식이었습니다. 회심에 대해서 설교하고 싶다면,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하지 말고, 정말 그 회심에 대한 생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 회심은 어떤 때에 일어나는가? 회심한 자와 회심하지 못한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고 회심에 대해서 교파별로 얼마나 생각이 다른가? 왜 오늘날 교회에 회심이 사라져가고 있는가? 그리고 회심이 사라져 가는 이 현실에 대해서 오늘날 신학자들이나, 교회는 어떻게 진단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회심이 일어나고 있는 선교의 현장들이 어디인가? 거기의 회심은 어떤 것들인가? 하는 것들을 자세히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쭉 섭렵해 가면서 그러면서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로마서를 강해한다고 할 때, 로마서를 그렇게 탐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독서하고, 무엇을 공부해 나가든지, 공부의 창고에 따로 쌓여 있고, 목회의 창고에 따로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항상 한 창고 안에 서로 유통되게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한참 세월이 지나면서 터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한 시리즈를 설교하고 나면은 그 주제에 대해서 자신 있게 성숙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 다음에 한 시리즈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쓰고 나면은 자신이 굉장히 정리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 지식이 지식대로 따로 돌지 않고, 같이 병행되어 가게 됩니다. 내가 읽고 독서하는 것이 내 설교의 아주 중요한 주제이고, 설교하는 것이 교인들이 그러한 설교를 필요로 하는 영적인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탐구를 계속해서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하는 공부도 열심해 해야 하겠지만, 그냥 강의 열심히 듣고, 읽으라는 중요한 책 읽고 하되 모든 교수들은 이거 깊이 안 하면 안 된다고 하니까 그냥 거기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승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다음에 기도가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특히 기도생활은 말씀생활보다 더욱 힘듭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얼마나 약한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만 뜨면은 수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저희 교회 전도사님들 1시에 출근하라고 하는 이유가 그런 식으로 딱 정해놓지 않으면, 그 시간이고 뭐고 다 잡아먹히고 맙니다. 그러므로 절대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고, 새벽기도 정도는 숙명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내가 떠날 수 없고, 이거 하기 싫으면 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5시도 아니고 6시15분 기도회인데... 나와서 기도하고 예외를 생각지 않으면서 이 기도 속에서 여러분들이 진짜 깊어져 가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설교자가 되는 비결은 훌륭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항상 그것을 뛰어 넘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영국에 가서도 후배들은 어떻게 길러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가장 훌륭하게 기여하는 것은 저는 두 가지라고 봅니다. 살아있는 예배에 참여하게 하는 것과 내 자신이 먼저 그들에게 요구하는 삶 이상을 살아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자꾸 주고, 선교할 기회를 자꾸 주고, 교회에서 이 일 저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들을 길러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것은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비결을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을 탄탄히 쌓고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빠른 시일 내에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하거나 안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잘 준비된 사람이면 절대로 하나님께서 한쪽 구석에 꿈쳐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드러내서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에게 이익이기 때문에... 그런데 자기는 모세처럼 다 준비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왜 자꾸 잘 못보시냐고 하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다 된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을 인내함으로 잘 받아들이면서, 기다림의 미학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때에는 여러분들을 향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낍니다. 한 가지는 생계의 지장이 될 정도로 몇 푼씩 받는 사례금도 바 마다하고 교회에 왔기 때문에 빚을 진듯한 미안하다는 감정이고, 또 한 가지는 섭섭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배수진을 치고 교회에 왔는데, 저렇게 뺀질거리면서 살면서 무슨 도움이 되겠나? 차라리 한푼이라도 벌지?’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신학생이기 때문에 부담을 주는 것은 제가 절대 못하게 합니다. 항상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전도학교에 들어와서도, 어디서 강도사를 하고 왔어도 새가족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적인 베이스를 탄탄하게 가지라는 의미에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놓아주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생인데 교사도 안하냐고 하면 여러분들은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신학생인데 전도도 안 나오냐고 한다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고 놔두는 이유는 여러분 자신이 성실하게 경건생활을 이어가고, 여러분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라도 왔으니 정말 더 많이 기도하고, 말씀에 깊이 들어가서 자신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이 뭔가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사상이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어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 사상을 가지고 모든 사회 현상과 교회 문제,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문제를 진단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여러분들 속에 들어있는 말씀의 양이 굉장히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뭔가 번쩍 하는 것은 있었는데, 내용 자체는 없는 것입니다. 이 쪽 분위기가 좋다는 것은 파악을 했는데, ‘왜, 어떻게, 무엇을’ 이런 생각들이 정리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들을 많이 읽고, 책을 읽을 때 중구난방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한 사람 것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스펄전이면 스펄전을 쫙 읽는 것입니다. 특히 스펄전은 책을 많이 썼고, 번역 된 것도 많습니다. 스펄전 정도면 양이 충분합니다. 아니면 로이드 존스를 읽는다는지, 앤드류 머레이를 읽는다든지 그렇게 해서 책이 많은 사람들 것을 읽으면서 쭉 파고 들어서 한 사람 속에 깊이 빠져서 한 사람을 흠모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깊이 젖어서, 그 속에서 아닌 것들을 골라내고 자신이 그것을 뼈대로 삼고 뼈대를 가지고... 스펄젼으로 뼈대를 삼았으면, 로이드존스로 보충을 하고, 머레이로 보충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것들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독서량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테잎을 듣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열린교회에서 나온 시리즈들이 많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잘 이해를 못하는데, 이것은 아주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여러분들 같으면 학교를 한 일년 휴학을 할 기회가 있다면, 일 년동안 테잎을 듣겠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큰 유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일년동안 하루에 1개씩 듣는다고 해도 365일이니 700~800개 정도밖에는 안 됩니다.(그것도 양도 별로 안 됩니다.) 그리고 들을 때에 시리즈 별로 듣는 것입니다. 시리즈별로 듣되 스터디를 하는 기분으로 필기를 해 가면서 한 시리즈를 일주일정도에 듣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쪽에서 다루는 한 시리즈 전체를 꿰뚫으면서 이 한 테마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을 굳히는 것입니다. 외식이면, 외식에 대한 문제, 신앙과 은혜체험이면, 신앙과 은혜체험의 문제를 하면서 자신이 여태껏 가졌던 신앙적인, 신학적인 사고방식과 성경을 풀어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면서 다를 경우에는 정말 어떤 것이 진실인지를 진지하게 캐물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야기되는 필요성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관련된 책들을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도권 안에서 공부하는 식으로 리포트 쓰고, 중구난방으로 교회봉사도 좀 하다가 보니 정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뭔가 많이 차 있기는 한데 정리가 안 되면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교회를 성장시켜야 될 압력을 확 받는 현장 속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러한 잡다한 개념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청교도의 사상에 심취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의 사상화 되어지지 않으면 자기 삶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작업들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잘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진전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쌓여가면서 기본적인 정보량의 양이 들어가야지만 그 다음에 소화되는 것도 있고, 그 소화되는 속에서 자신 안에 기본적인 자신의 관점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을 세우고 그렇게 하는 분들이 오히려 평신도들 가운데서 보기 쉬운데.... 최근에 저희 교회에 등록한 분이 있는데, 굉장히 많이 테잎을 듣고 읽는 가운데 굉장히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신학공부를 하는 가운데서 주워 들은 것이 많기 때문에 들으면은, 조각조각 흘러 다니던 것들이 쭉 줄기가 되고, 정리가 될 것입니다.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한참 그쪽 방면에서 설교를 듣고 깨닫다 보면 “전적타락”이라는 얘기를 그렇게 피를 토하듯이 말했던 것과 성경의 진리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관심이 자꾸 관심이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돌아갈 것은 기독교강요 설교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책 달랑 들고 설교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모든 것들이, 신학적인 모든 관심사와 고민들이 성경으로 집약이 되어야 하고, 성경으로 집약된 것이 다시 풀어져서 헤쳐져 나온 것이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작업을 해 나가십시오. 더군다나 교회 안에는 대여용 테잎까지 있어서 다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전략을 바꿨습니다. 외부에 선교헌금 많이 보낼 때, 선교헌금하고, 1년이나 2년치 정기구독 테잎권하고 같이 보냅니다. 장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장학금도 돈으로 다 주는 것이 아니라 30만원은 돈으로 주고 10만원은 테잎교환권으로 줍니다. 그것도 본인이 가야지만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안 하고 돈으로 주면 급한데 다 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돈을 써서 1,500원 하는 테잎을 안 사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속에 심어주고 싶은 것이 저와 교회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고를 가지고, 그러한 모든 정보들을 취합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그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너무나 부패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많은 정보를 들어도 순간 마음이 움직여도 실천하지 않으면은 그것들이 자신 속에서 사상으로만 남았다가 휙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뼛속 깊이 들어가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때까지, 자신 속에 어떤 확고한 신앙의 사상이 생겨날 때까지, 이런 것들이 깊어져서 어느 정도 원숙하게 되면 성경을 딱 펼치면 성경을 흘러가는 그러한 물줄기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쪽에서 설교하고, 저쪽에서 설교해도 여기서는 이 얘기하고, 저쪽에서는 저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이것에 충실히 설명을 하고, 저기서는 저것에 충실해서 설교를 했는데도 나중에 보면 서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본문 하나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이 물을 타고 흘러가는 성경의 맥들이 보이기 때문에 이 쪽에서 부지런히 이것만 가지고 성경을 팠는데도, 나중에 이쪽에서 설교를 한 것과 맞췄을 때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절묘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가방 들고 그냥 신학교나 왔다갔다하고, 그냥 가끔 위인들의 전기나 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말씀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사고들이 깊이 배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목회하면서 설교 현장으로 들어가서 말씀사역을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몇 편이나 설교를 할 것 같습니까? 정신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경을 딱 펼 때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 쫙 열어주시는 빛이 있어도 쉬운 것이 아닌데, 아무 것도 모르고 논문 쓰듯이 자료를 펼쳐 놔야지만 겨우 메시지가 나온다고 하면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자신이 곯아서 죽든지, 교인들이 곯아서 죽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칼빈이 설교에 있어서 한가지 강조했던 것이 중에 한 가지가 “친밀성”입니다. 똑같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면 진짜 그런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면 잘난 척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학교 다닐 때에도 어느 교수님일 올라가서 막 소리지르고 설교를 하면 열정이 있다고 하는데, 또 어떤 분은 소리만 지른다고 느껴집니다. 진리의 내용도 문제이지만, 설교에 있어서 더욱 결정적인 것은 그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뭐든지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처럼 어느 정도 인생을 산 사람이 “인생이 참 뜻대로 되는게 아니지.”하는 것과 국민학교 6학년짜리가 “그래. 인생은 뜻대로 안 돼.”하는 것은 어감이 다르지 않습니까? 말하고자하는 어떠한 한 진리가 한 사람의 인격 속에 얼마나 깊이 용해되었는가에 따라서 설교의 파워가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의 파워를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쾅 때리는 예외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사람들을 파고 들어가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파워만 뚫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동떨어지지 않고 하나로 묻어서 흘러들어 갈 때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 깊이 파고 들어가서 심성을 녹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어느 부분을 설교하더라도, 성경과 자신 사이의 완전한 “친밀성”이 느껴져서 성경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증거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고난의 이야기를 말할 때에는 자신이 고난을 받은 사람처럼, 구령의 열정을 이야기 할 때에는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사람으로서, 불의한 사회를 보면서 분노하는 성경본문을 볼 때는 그 사람 속에서 선지자의 분노를 보고 그렇게 타락한 백성들을 향해서 눈물 흘리시는 본문을 볼 때에는 진짜 설교자의 마음속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 있기 위해서는 연기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결국은 성경을 읽고, 경건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수시로 느끼는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깊은 기도생활과 말씀 생활이 없이는 얘기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천박한 사람들이 뭐 좀 배워볼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래도록 쌓이면서 말씀 자체가 자신의 인격 속에 깊이 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한 날 보다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말씀을 대면하고, 그 말씀에 감화를 받고 기도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내적인 강렬한 투쟁의 역사들이 하나 하나 살과 피가 되어서 설교자 속에 쌓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헬모트 딜리케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3.자네, 정말 노가다 목회 하려나③
불붙는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일주일동안 그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을 때에만 그것이 참된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딱 삼십분이고 한시간이고 설교하는 것만 보이지만은 일주일동안 그 진리대로 살고자 처절하게 투쟁하는 그것은 교인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유리상자에 담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보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게 살아가지 않고 처절하도록 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진리와 더불어서 씨름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그 세계, 그 그라운드 자체가 경건생활입니다.
기도생활, 하나님 말씀 생활 그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일하면서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단선적이고 임시적이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거룩한 목회자로서 변화되어가는 과정 그 자체가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의 영향이 자신에게 미치도록 자신을 하나님을 향해서 개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깊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깊은 하나님의 영의 비췸이 있고, 깊은 말씀생활을 통해서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사람이 말씀 사역을 하기에 얼마나 적합한가 하는 것은 성경을 읽혀보면 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같은 것은 20분 동안 읽어보라고 하면 그 사람의 영적인 깊이들이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루아침에 쌓여 있는 것들이 아니기에, 그래서 깊이 쌓여서 언제든지 성경을 딱 펴서 올라갈 때, 그 때 그 성경 속에서 하나님 메시지를 딱 쏟아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항상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준비가 중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오래된 경건 생활 속에서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는 이 견고한 경건 생활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역량이 쌓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량 자체가 없는 사람이 준비만 많이 한다고 해서 되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사람이 쓸 수 있는 설교문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을 더 많이 들이면서 더 꼼꼼하게 다듬고 매끄럽게 쓸 수는 있겠지만, 그 깊이나 수준 자체는 시간을 많이 주고 노력을 많이 들인다고 해서는 그 깊이를 더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가수가 아무리 시간을 많이 가지고 연습을 많이 해도 그가 부를 수 있는 노래의 수준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특히 CCM같은 것을 보면 저는 거의 가려 낼 수 있습니다. 노래부르는 것을 보면은 앵무새 처럼 줏어 들은 것을 가지고 저렇게 한다, 또는 저 사람은 정말 이 말씀 속에서 정말 하나님을 만나서 뭔가 이 가사의 내용들이 가슴에 깊이 사무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들이 노래 속에서도 묻어 나오는데, 설교 속에서는 얼마나 잘 묻어 나오겠습니까?
한 사람의 설교자가 단상에 섰을 때에 정말 저 입에서 나오는 설교를 듣고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배울 수 있겠느냐 라고 하는 것은 한 편의 설교가 다 끝나기 전에 이미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결과물들만을 생각하지 말고 처절하게 자신과의 싸움에서 선지자들이 잠깐 동안의 사역을 위해서 장구한 세월동안 자신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투쟁했던 그러한 과정 자체를 여러분들의 몫으로 깊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고통스러운 작업만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고통도 있지만 그러나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서는 기도의 기쁨도 있습니다. 말씀을 대면하여 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터득하면서 그 말씀 속에서 새로운 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새 우리 교회에 자매한 사람이 나오는데 굉장히 말씀에 열심을 냅니다. 처음 교회 나온지 얼마 안 되서 “예배가 길고 힘들지 않느냐?”고 했더니 하나도 안 힘들고 자신은 설교듣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앉았다가 이렇게 설교를 듣는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 정말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에 흘러가는 것 같다는 겁니다. 이렇게 깊이 설교에 빨려 들어가면 사람들에게는 설교를 듣는 것이 인내를 요하는 고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깨달음이 있고, 자신이 변해가는 변화가 오면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추구 그 자체가 자신에게 미래의 보상뿐만 아니라 현재적인 기쁨과 보상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을 교제의 기쁨 속에서 사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커다란 업적을 이루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신학생들 중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하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작년에도 한 사람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목회 한 번 해서 깃발 한 번 날려볼려고, 지금은 준비하는 기간이고 그 때 하나님 섬겨야지 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암 걸려서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미래의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현재를 단지 준비 과정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하나님이 데려 가시면은 그 사람 뭘 보고 평가하시겠습니까? 이 다음에 얼마나 큰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의해서 평가를 한다고 하면은 뻥쟁이들이 하나님 앞에 최고로 인정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신학교를 다녔고, 레포트는 베껴서 썼느냐 안 베껴 썼냐, 대출했냐 안 했냐, 사례금 얼마 받는 전도사 때려 치고 열린교회 가더니 그래 성실하게 신앙생활 했냐 하는 이런 것 가지고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안 살았는데...
그러니 항상 미래를 위한 준비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목표를 따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이것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인 경우 이것이 내겐 가장 큰 행복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제발 여기서 훈련을 받는다 이런 말은 하지도 마십시오. 저는 훈련받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말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다 살고 나 보니까 ‘아, 그 때 그 기간이 훈련의 기간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짜피 가치가 적은 일은 하지 마십시오. 아예 하지 아십시오. 그러나 어차피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면 이 순간에 이 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그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경건의 생활과 말씀 생활 속에서 하나님 자신 앞에 홀로 서 있는 기쁨 자체를 터득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위대한 설교자들, 앞에서 살펴본 영적인 거물들의 심장부에 있었던 것입니다. 일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즐거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열적으로 자신을 바쳐서 섬기고 일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경건의 세계를 점점 깊게 만들고 그렇게 철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영국에 갔을 때 같이 공부한 목사인데, 새벽기도에 나오는 교인들이 없고 한 명도 나오고, 어떠한 때에는 안 나오기도 하고, 두 명도 나오고 하는데도 새벽기도를 합니다. 그래도 새벽기도를 하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기를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새벽기도를 안 나오십니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너무 멀어서라면 가까운 데라도 나가십시오. 꼭 열린교회에만 나오라는 것이 아니고, 그 근처의 가까운 데라도 가라는 것입니다. 그 부근 교회에 나갈 곳이 없으면,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해가 동창에 올 때까지 퍼질러 자는데 어떻게 거기에 영성이 깃들겠습니까? 하품이나 깃들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삶 전체가 하나님이 보실 때 당신을 향한 추구가 되도록 그렇게 살면은 저절로 거룩은 맺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 속에서 자라가고, 어느 날 하나님의 사역의 현장에 딱 들어가면 나도 내가 그 정도 됐는지 몰랐는데, 말씀을 대하면 사람들이 그 말씀 속에서 변화받는 사람들이 막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누구에게 심취되었고, 어떤 사상에 깊이 심취되었든지 현실은 여러분들이 심취한 사상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여태까지 모든 선배들이 내몰렸던 그 현장으로 내몰리고 그 중에서 어느 하나를 붙잡고 성공을 향해서 줄달음질하는 사람으로 결국은 만들어 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가 그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지금 주님이 우리를 오라고 부르셨고, 참 감사하며 우리가 가야지 않습니까? 너무 많은 꿈 갖지 마십시오. 실망합니다. 언제까지 살다가 죽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꿈 얘기하지 말고 오늘 얘기하십시오. “오늘 아침에 주님 만났어요.” 아침에 말씀 통해서 만난 하나님, 그리고 다시 한번 오늘 아침에 주님을 뵈오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 밖에는 인생에 진정한 기쁨이 없는 것 같고 인생을 회고해 보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살아온 날 밖에는 다른 날들은 바람처럼 다 날아가버린 날들이었다는 고백이 나와서 그 고백을 하고 나니까 오늘 주님이 너무 사랑스럽고, 그래서 정말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보람이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크게 쓰임 받아야 되겠다는 그런 꿈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크게 쓰임 받아야 골치 아프기만 하지 뭐 그렇게 큰 꿈을 가지려고 애쓰십니까? 큰 계획? 모세를 모십시오.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남전도회원만 60만명이었는데... 주일학교하고 여전도회까지 합쳐 보십시오.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것도 노년부와 유아부는 다 뺀 것입니다. 장애인부까지 다 빼고. 그 얼마나 생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쓸데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저는 아직 큰 교회 목회자도 아니고 그리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부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침마다 제 마음을 녹이는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요즘 새벽마다 가슴 아픈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정말 내가 주님의 사랑 속에서 사는가? 예전에 깊이 들어갔던 그런 사랑의 세계 속에서 내가 정말 살고 있는가?’ 말도 안 되는 기도지만, 그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큰 교회 목회자도 아니지만 더 작은 교회에 가도 좋고, 돈도 없지만 더 빈털털이가 되도 좋고, 유명하지도 않지만 아무도 안 알아주는 사람이 되어도 좋은데 정말 더 깊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세계 속에서 그리고 더 지고한 행복과 그 기쁨을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세계 속으로 나를 데려다 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섭섭한 이야기지만 저는 열린교회를 언제든지 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열린교회 만큼 사랑한 대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제 사역을 사랑합니다. 얼마나 사랑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책을 쓰는 일도 사랑하고, 설교하는 일도 사랑하고 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에게 비하면, 그러한 것들을 지푸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정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주님과 비교한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고, 모욕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것들과 비교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 지나갑니다. 그저 평생 소원은 열린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이게 처음 세운 교회고, 이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이 열린교회가 조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종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한 간절한 소원이 있고, 책을 써내는 일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깊은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좀더 깊이 있는 책들을 써내서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이것이 하나의 책으로서가 아니라 한국 교회의 한 신앙으로 남아서 교회를 윤택하게 하고자 하는 서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 자신께로부터 받는 사랑, 그리고 주님 자신에게 비교하면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자체는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일생을 장수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열렬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단 일년을 살다가 죽는 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사는 것! 그래서 단지 우리가 일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의 목표 자체는 주님 자신이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 전체의 목표인데 오늘 이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나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구해서 여기 이렇게 세우게 하셨는데, 오늘 하루 이 시간을 주셨습니다. 뭘 하면서 살 것입니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목사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땅을 파겠습니까? 흙을 나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성심을 다해서 성도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세워 주실 때 누구와의 타협도 거부하고 진리를 진리대로 들려 주어서 주님이 여기 계시면은 주님이 여기서 하시고 싶었던 그 음성이 되게끔 하는 것! 나의 훈련받지 못한 무지나 혹은 편견이나 혹은 나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전파되지 못하는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그렇게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언제 주님이 불러 가실 지 모르지만 그렇게 열렬하게 살다가 주님이 딱 불러주시는 그 날에 무거운 짐을 확 벗어버리고 늘 기도 속에서, 말씀의 세계 속에서 만났던 그 친밀한 하나님을 이제는 인생의 멍에를 모두 벗어버리고 그 하나님을 뵈옵는 그것 말고 우리에게 어떤 인생의 비전이 있는지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 지푸라기와 같은 것들 아닙니까?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어야 할 사람. 그 사람이 목회자이기에 자신이 먼저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목회자는 삶은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그 자체가 설교가 되고 선포”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그러한 사람이 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날 목사 가운을 입는 그 순간에 그 사람으로 확 변화 될 것이라는 그런 환상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처절하게 소쩍새 우는 사연처럼 자신이 아무 것도 없는 시절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님을 알아가는데 보람을 느끼고 그리고 그 눈보라가 휘몰아 치는 벌판에서 서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시련의 때에도 여러분들이 주님 한 분 바라보고 견디고 인내하고, 사역하나를 해도 항상 사역에 성공에 성패를 걸지 말고 사역을 하는 그 자세 자체에 성패를 걸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늘 점검하고, 그러면서 처절하도록 매일매일 그 순간이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순간인 것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최선을 다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목사 될 지 안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내일이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그 삶의 현장에서 불러가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오늘로 딱 끝낸 그 삶의 현장에서 그 시점에서 진짜 주님을 섬기면서 산 사람이라고 인정받으면 그 사람은 훌륭한 비전 없이 그냥 살다가 죽어 갔어도 훌륭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사람입니다.
쓸데 없는 욕망에 너무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그리고 잠시 머무는 이 세상은 헛된 것입니다. 요한이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말했던 것처럼 잠시의 즐거움은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잠시 사람으로부터 받는 칭찬과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소인배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항상 묵묵히 하늘에 홀로 계셔서 나를 지켜보시는 그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나? 어떻게 인정하시는가에 우리의 온 마음을 빼앗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하나님 앞에 진짜 큰 삶이고, 훌륭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쳐 지고 있다는 것이지, “ 학의 도상에 있다”, “훈련받고 있는 중이다”하는 생각은 다 집어치우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다 집어치우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나라에 살아가고 있다. 지금 하나님이 나를 다 보시고 있고 오늘 이 날이 내 인생에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뭘 하나를 해도 성실하게, 주일학교 하나를 맡아도 거기다 생명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살면 나는 산다. 그러나 너희들이 죽으면 내 생명도 없다.”는 생각에 매달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에 대한 헌신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겠습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것은 일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헌신인 것입니다. 영혼을 붙들고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너희들이 살지 않으면 내 생명도 없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 혼동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매일 같이 여러분들이 주일학교고, 중고등부고, 청년부 리더도 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저는 세밀하게 봅니다. “이 사람이 정말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을 위해서 진력하고 있는가?” 수시로 물어보고 또 수시로 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교회 부흥에 여러분들을 써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이 나중에 정말 진실된 목회자가 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진리의 종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데 그렇게 안 사니까 마음이 슬프고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야, 저렇게 살면서 맨날 청교도 얘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사역까지 그만 두어야겠다고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적인 기도생활이나, 말씀생활이나, 예배나 섬김이나, 모든 생활에 있어서 노출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책을 열심히 읽으나, 공부를 하나, 교회 봉사를 뼈빠지게 하나, 기도를 하나, 그렇다고 해서 또 어학을 열심히 하나... 히브리어, 헬라어 알파벳은 추억만 남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또 자신의 인격의 수련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나,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적인 사람들처럼 방법론이라도 배우려고 열심히 뛰어다니거나 아니면 부흥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방법론도 아니고 얼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방법론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웃기는 것입니다. “지가 뭘 하는 게 있냐?”는 것입니다. “지가 미쳐 봤느냐? 나는 목표에 대해서 미쳐봤다. 그래서 이렇게 일궈냈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피곤해서... 뭐가 그렇게 피곤하십니까? 그런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도 때로도 울기도 하셨는데, 뭐가 그렇게 피곤합니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요. 한창 젊은 나이에 말입니다. 진력을 다해야 될 때 아닙니까? 신학생들이면 밤에 안타까운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밤에 오늘도 교회에서 섬기면서 이러한 한계를 봤는데, 이렇게 막돼먹은 인격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슬프고 괴로운 때도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한나가 성소를 찾았던 것처럼 밤중에라도 교회에 올 수 있지 않습니까? 여기 저기서 밤을 새면서 훌쩍거리면서 주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영혼들을 맡겼는데 잘 안 되는 것 같으면은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고 금식도 하고 그 영혼들을 하나님 좀 어떻게 해 달라고 막 몸부림치는 그런 모습들이 보여야 하는데, 그냥 설교만 열심히 듣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전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주께 하듯이 처절한 마음을 가지고 열렬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에, 그런 처절한 각오를 가지고 살 때에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도 자기의 가슴 속에 강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왠지 요즘 말씀이 다가오지 않는다.” 개떡같이 사는데 무슨 말씀이 다가오겠습니까? 진짜 뼈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러한 애정을 가지고 영혼들을 보고 그리고 내가 교회 사역도 그만두고 와서 이 어린 영혼들을 맡았는데, 이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숙제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목양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 자체가 흐릿한 것입니다. 진심으로 가슴을 파고드는 어떤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 그렇게 가슴이 사무치는 소원이 뭐냐?”할 때에 아무 것도 없이 '유학이나 한 번 가볼까... 뭐 후원자나 찾아볼까?' 하겠습니까? 그것은 가슴에 사무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 영혼이 녹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러한 능력 없는 모습으로 어떻게 영혼을 돌보는 사역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내가 저 깊은 주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는 정말 너무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빛 가운데서 살고 싶습니다.”한다든지 “하나님 아무도 모르는 나의 끔찍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고 한다든지 뭐 그렇게 가슴에 사무치는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가슴에 깊이 사무치는 것이 있는지 말입니다. 그런 것이 있는 사람들은 벌써 눈빛이 다릅니다. 임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모든 것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라고 한 것은 그 일락이라는 말이 즐거움에 빠지는 것인데 그것이 오락이나 혹은 쾌락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고정된 열망이 없는 모든 삶이 일락에 빠진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입니다. 그것을 느껴야 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이 나에게 영혼을 맡겨 주셨는데, 안 변할까? 내가 열심히 가르쳤는데 왜 안 변할까? 거기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처절하도록 붙들고 매달려야지요!
언젠가 한 번 은혜를 많이 받고 교사들하고 같이 매달려서 밤마다 영혼들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막 울면서들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내가 네 마음을 안다(Don't cry! Don't cry! I know your heart!).” 그런 주님의 응답이 들릴 때까지 주님이 보실 때 애처로울 때까지, 그래 네가 교회의 참된 부흥을 위해서 그렇게 애절하게 매달리다니 울지 마라고 하실 때까지... 요한계시록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두루마리가 봉인되어서 펼 자가 없다고 하실 때에 막 울지 않습니까? “울지 마라. 다윗의 자손 중에서 그것을 풀 자가 있다.” 어린양 예수께서 그것을 풀어 주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한 하나님 앞에 고정된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이러한 목표가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니고, 여러분들이 일반적인 경건 생활을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하나님 만나고 거룩해 진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핏빛 갈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한 뼈저린 갈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개인의 성화든지 사역이든지 무엇이든지 그런 것들이 깊은 갈망의 체험 속으로 들어가면은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엮어져 있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영혼을 보면서 결국은 마지막으로 깨닫는 결론이 “내가 안 변하니까 결국은 너희들도 안 변하는구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를 깨뜨려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처절한 갈망들이 없으면 그것은 병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일락에 빠져 있는 삶입니다. 그러면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삶을 재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책도 있고, 테잎도 있고 많이 있는데, 진짜 사명이 무엇인가? 진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서 부흥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부흥을 통해서 정말 우리의 시대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를 주실 것이라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