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C 간사 수련회 특강1
녹취자: 김경애
그러면 이제 오늘 여러분들에게 렉치오 디비나에 대해서 강의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여러분들이 학문과 기독교, 현대인들은 왜 이렇게 캠퍼스에서 죽어도 복음을 안 받아들일까? 이런 것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면 오늘 강의가 훨씬 더 흥미롭게 빨려들어 갈 것이고 여러분들이 만일에 그런 고민을 별로 안했다면 오늘 강의가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여러분들은 모두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또 그렇게 지적인 도야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사람들이니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안 하면 누군가가 와서 한번쯤은 해주고가야지 되겠다고 해서 그래서 오늘 모두 열심히 부흥회를 하면 우리 모두 울면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한번 눈물이 씻기고 말라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결론을 오늘 안고 돌아가면 그러면 오늘밤에 펑펑 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할 것입니다. 둘 다 할 수 있겠다면 너무 좋겠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강의를 듣는 것처럼 하시기 바랍니다. 상태가 좋으면 끝까지 논스톱으로 가고 상태가 별로 안 좋으면 중간에 쉬든지 아니면 일찍 주섬주섬 끝내든지 하겠습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 설교는 아니고 렉치오 디비나라는 뜻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강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렉치오 디비나는 라틴어입니다. 렉치오는 ‘읽다’ 는 뜻이고 디비나는 영어로 Divine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읽기’입니다. 혹은 ‘신적인 읽기’ 혹은 ‘신성한 읽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적당한 번역이 없기는 한데 나는 이것을 성독이라고 번역합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독은 읽는다는 것이고 성은 무엇이냐 하면 역사적으로 이 성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사용되는데 넓게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기독교적인 모든 학문의 자료를 읽는 것을 성독이라고 그랬고 아주 좁게는 성경 Text를 읽는 것을 말하자면 렉치오 디비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따 상태를 보아서 상태가 좋으면 성독의 역사적인 배경까지 쭉 이야기하면서 끌고 오고 별로 안 좋으면 그냥 뚝 끊어버리고 종교개혁부터 시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Ⅰ. 들어가는 말
그러면 오늘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쉽게 이야기하면 성경읽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안 읽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러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성경 자체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신학공부, 더 멀리 나아가서는 신학공부라고 할 때 여러분들은 자꾸만 제도권에서 신대원에 가서 공부하는 것 그런 것만을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오늘 내 강의를 듣는 것도 신학공부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아,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로구나!’ 라고 말씀을 깨닫거나 혹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무릎을 치게 되는 것도 모두 신학공부입니다. 삶 전체가 다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의미에서의 신학공부에 있어서 이 성경읽기의 중심성, 그러니까 신학공부라는 말을 오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있어서 중심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학문인 인문학과 자연과학, 그 다음에 모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학문의 모든 분과들이 어떻게 이 성경을 읽는 것과 연관을 이루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보임으로써 그래서 이제 이 신학, 아까 말씀드린 신학 할 때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해가는 이 신학공부가 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일평생의 의무가 되어야 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Ⅱ. 신학의 문제점
1. 신학지식의 파편화
우선 오늘날의 신학공부 여기에서의 신학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그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학공부는 상당히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니까 여러분들이 대부분 신학공부를 안하신 분들이라고 하는데 이 신학공부에 있어서 여러 가지 많은 문제점들이 있는데 그 문제점을 먼저 이야기하면서 그런 것들이 어떻게 오늘 이야기하는 렉치오 디비나와 연관이 될 수 있는지를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날의 신학공부의 문제점은 신학지식이 지나치게 파편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계몽주의 이후로 근대의 학문은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17세기에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출현하게 됩니다. 그리고 18세기부터 계몽주의가 열리게 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계몽주의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인간의 이성을 깊이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을 더 신뢰해야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지금 구라파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동양하고는 또 다른 카테고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이 있고 그 은총아래 인간의 이성이 복종할 때 그때 조화로운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데카르트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꼭 목사님들과 같이 공부하셔야합니다. 나는 어느 정도로 이야기하느냐하면 데카르트를 알면 현대인들이 모두 보이고 데카르트를 모르면 여러분들 자신이 현대 속에서 살면서도 현대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현대인은 여러분이 만난 사람이 아니라 그대들의 안에 있는 현대인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현대인을 이해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항상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스투데오 에루구숨’ =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해야 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공부해야합니까?’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나는 태어났고 인간은 다시 두 부류로 나눠지는데 보편적 존재로서의 일반적인 인간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인 나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장 잘 계시되었으므로 결론을 내리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나는 태어났습니다.’ ‘당신의 제일 큰 의무는 무엇입니까?’ ‘그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간사로 부름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너무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안수 받지 않은 목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이 캠퍼스 사역을 하면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있어서 열심을 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이 현대사상들을 공부하고 그것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해석, 성경적인 해석들을 토대로 여러분들의 사역의 장을 통일성 있게 펼쳐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면 설명을 하면 너무나 긴데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그전까지는 모든 것이 존재론이 중심이었습니다. 존재론이 중심이니까 존재중의 존재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시니까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그 다음에 자연의 많은 사물들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도덕적 가치까지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도 그 돌아가는 그 많은 패러다임 가운데 하나로써 내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가는데 이상합니다. 데카르트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깊은 꿈을 꾸다가 이 사람이 깨어나서 현실을 맞이합니다. 그런 의문을 품는 것입니다. ‘자, 내가 꿈을 꾼 것이 현실이고 이렇게 현실이 꿈인지 그 꿈이 꿈이고 현실이 현실인지 그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느냐?’ 마치 매트릭스에서 보는 그 장면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영화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넋을 놓고 보면 경건에 아무 도움이 안 되지만 그런데 영화관에 가서 정확하게 보고나서 그들이 왜 그렇게 아바타 같은 영화를 보면서 현대인들은 자지러지게 좋아하느냐? 그런 코드를 찾아낼 수 있어야합니다. 그 코드가 사람들에게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이 사람이 여태까지의 모든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인식하는 자기를 중심에 놓고 그리고 신도 그 돌아가는 수많은 범주 중에 하나로 갖다놓는 것입니다. 그게 경험주의의 시작입니다. 그런 사유의 놀라운 천재적인 발상의 전환이 데카르트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적으로 중세 말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까지를 중심으로 하는 스콜라 체계들이 위협을 받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근간 자체가 심각하게 흔들리는 말하자면 정신사적인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역사시간에 배웠습니다. 그래서 유명론, 실재론, 관념론 논쟁이 일어나면서 이미 그런 와해되는 춘추전국시대 같은 것들이 오고 거기에서 이 사람이 따와서 자기의 사유를 발전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다음부터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은총에 매일 필요가 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나는 이 데카르트가 그런 것을 믿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데 어쨌든 이제껏 까지 논증이 되고 위협을 받았던 종교적인 영역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그 범주 밖에 있다고 보고 그리고 그 다음에 신학을 저 멀리 보내 버린 것입니다. 예전에는 신학이 전체적인 것을 지배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계몽주의가 싹트게 됩니다. 계몽주의에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방법서설이라는 책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명석하고 판명한 법칙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그래서 그게 뭐냐 하면 ‘꼬깃도 에루구숨’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라고 배웠습니까?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배웠습니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의심하는 것입니다. ‘나는 의심한다.’ 혹은 회의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끝까지 할 수 있는데 까지 모두 의심해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의심하는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의심하면 의심하는 것 자체가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라는 존재는 의심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말하자면 존재가 입증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계몽주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계몽주의가 생겨나게 되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하면 인간의 이성에 따라서 수많은 자연적인 사실들과 그 다음에 수많은 사실들이 발견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종교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들이 이제 힘겨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학문은 무지하게 발전하는데 그 학문의 발전이 인간의 삶 전체를 훌륭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의미에서의 발전이 아니라 기형적으로 물질문명만을 발달시키기에 적합한 학문의 체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목회를 하다가 어떤 교인이 로마서를 가지고 와서 물어보았습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우리 목회자는 그런 어려운 것은 모르고 신학자를 찾아가야 한다고 해서 이 사람이 신학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를 붙들고 로마서를 물어보았더니 신학자가 하는 이야기가 ‘미안합니다. 나는 조직신학자이기 때문에 성경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 신학을 하는 사람을 찾아갔더니 ‘죄송합니다. 저는 구약신학자라서 신약을 모릅니다.’ ‘아 신약 학자를 찾아가면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신약 학자를 찾아갔더니 ‘죄송합니다. 저는 누가복음을 전공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바울서신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그래서 바울서신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죄송합니다. 저는 바울신학을 전공했지 바울이 쓴 성경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를 찾아가야하느냐고 하니까 바울의 서신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찾아갔더니 ‘죄송합니다. 저는 데살로니가서 전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랬더니 로마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아! 이제 알았다.’ 드디어 로마서를 전공한 학자를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이 학자가 ‘무엇을 물어보시려고 그럽니까?’ ‘이것입니다.’ ‘아 미안합니다. 그것은 9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제가 전공한 것은 8장입니다.’ 이러면서 학문이 다 쪼개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신학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의 모든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서 생겨나게 된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여러분들이 신학공부를 안 해서 잘 모르는데 생각보다 너무너무 심각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전체적인 것을 묶어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살지를 보여주는 일에 성과를 못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1996년에 아엘소칼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쓴 책이 Passion Of Nonsense 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은 뉴욕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듀크 대학에서 발행하는 유명한 인문학 저널가운데 쇼설테스트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진짜 유명한 사람들이 기고하는 잡지인데 거기에다가 말도 되지 않는 논문을 한 편 쓴 것입니다. 논문의 제목이 뭐냐 하면 Trans ‘경계를 넘어서 양자 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위하여’ 라는 소위 이야기하는 SSK라는 분야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과학지식을 사회학화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런 것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2=mc² 을 가지고 처음 논문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써서 거기 실렸다는 것은 많은 심사위원들이 인정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외국잡지에 실리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심사를 해서 Quality가 되지 않으면 안 실어줍니다. 그렇게 해서 실었습니다. 그것이 출판되어서 나오는 날 이 사람이 바로 같은 날 발표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똑같은 날 다른 잡지에 발표를 하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먼저 내가 쓴 것은 다 뻥이었다. 아무내용도 없는 것이고 말장난을 계속해서 용어들을 계속 꼬고 이렇게 했다.’ ‘그리고 좌파들이 좋아하는 표현, 그리고 장황한 인용, 명백한 난센스, 그 다음에 비밀을 맞춰주는 참고문헌 이런 것들을 다 짬뽕해서 이것을 너희들이 어떻게 보는지 시험을 해본 것이다.’ 라고 폭로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발칵 뒤집힙니다.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특정분야에만 적용할 수 있는 과학적인 개념들을 무분별하게 끌어와서 막 자기분야에서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데 자기도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들을 꼽았는데 유명한 사람들을 다 꼽았습니다. 라깜, 들레쥬, 크리스테바, 보들리아르, 이런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까? 라깜을 모릅니까? 사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오늘 강의를 다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해체주의자입니다. 특히 들레쥬 같은 사람은 해체주의자입니다. 오늘 성과가 있으면 내일 연장해볼까 생각하는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구가하는 사람들은 미쉘쿠퍼라든지 들레쥬나 데리다 같은 사람들은 해체주의자들입니다. 계열 상으로 이 사람들이 실존주의를 뒤잇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누굽니까? 사르트르 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평생 과업은 진리를 허무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편타당한 도덕원칙이 있다는 사실을 다 철저하게 부숴버리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해체주의입니다. 그래서 그런 해체주의로 가니까 그런 개념들을 자기가 막 쌓는 것입니다. 그런 파편주의가 지금 신학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 속에서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옛날에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식이 깊은 사람들이 인품이 높고 학식과 인품이 높은 사람들이 훨씬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간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동양에서는 특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다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수많은 지식들이 공업적인 생산을 하는 데에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삶 전체를 이끌어 가는데 일에 있어서는 결국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 삶의 지혜의 상실
이제 그러는 가운데 그러니까 결국은 삶의 지혜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신학이라는 것은 신학의 목적이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과 목적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배워가는 것이 결국은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17세기의 화란의 신학자 마스트리히트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독트리나 에스투루 디벤디 페루 크리스툼.’ 독트리나 즉 교리라는 것은, 신학지식이라는 것은 디벤디 즉 살기위한 것이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기위한 것이다. 산다고할 때 우리가 계시록에서 보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로다.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세상에서 동물학적으로 보면 밥을 먹고 배설하며 그냥 매일매일 그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이지만 그러나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느냐하면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이야기는 잘 산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복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행복하게 그리고 불행할만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런 것인데 이런 것이 결국은 지식이라는 것은 결국은 마지막으로 삶에 이런 지혜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가르쳐야할 지식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심각하게 상실되어 있어서 여러분들에게도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신학을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많이 가진 사람의 설교가 항상 은혜롭습니까? 오히려 반비례한다는 경험을 강하게 갖지 않습니까? 아니 내가 학위가 없어서 위로를 받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것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들이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이런 현상이 실제로 말하자면 모든 신학분야에서 공통된 현상이 되고 있습니다.
칼빈은 자기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식의 근원이다.’ 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든지, 자기에 대한 지식이든지, 자기와 하나님이 아닌 나머지에 대한 지식이든지 셋 중의 하나입니다.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고 생각하는 자기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창조물들은 원래 하나님 안에 있는 생각들을 시간과 공간속에서 투영해서 실제로 부피와 크기와 형체를 가진 것들로 창조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모든 그것들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생각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고 근원이 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어떤 면을 갖느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더듬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하나님을 올바로 알면 다시 신기하게 알고 있던 것들을 더듬어 내려오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게 되는 그것이 바로 지식의 체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의 그리스에서는 인간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에 이런 식이었습니다. 자유 피지카가 있고 로이카가 있고 에티카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자연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깨닫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논리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동양철학에서도 근본입니다. 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순리와 역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이 이런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있었습니다.
(찬양)
온 세상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누구의 노래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작사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잘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 만물이 그림책 같기 때문에 그 고운 그림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라는 내용입니다. ‘어여쁜 화초밭 비오다 개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논리로 연결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것이야.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아야지.’ 이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처음 기독교 신앙이 생겨났을 때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이 충분히 해서 온전한 윤리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을 읽어보아도 마지막에 보면 결국은 자연과 논리와 윤리를 잇는 가장 결정적인 것인 누가 자연을 만들었고 왜 그 논리는 필연적이고 그리고 인간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마지막 답을 못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답을 주어도 그것에 대한 확신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나면서 이것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사람들이 학문을 이런 식으로 안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서울대 다니는 학생이 이야기했는데 자기 학교에 규범윤리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있는데 가장 규범이 없답니다. 옛날에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법학을 하는 사람들이 법을 제일 안 지키고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는 이상하다고 생각을 안 하는데 원래의 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이상한 것입니다.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당시의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기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철학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비난했던 것은 참된 철학이 아니라 거짓된 철학이었습니다. 거짓된 철학은 인간을 이렇게 굽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조심해야할 점이 있는데 누군가의 철학을 너무 좋아해서 거기에 푹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경을 훼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에칼레티즘 즉 절충주의적인 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가까이 대하면서 거기에서 확고하게 성령의 은혜로 기독교의 진리를 성경을 통해 붙들고 그것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는 철학들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통째로 어느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훼손하게 되는 역할을 반드시 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렇게 해서 결국은 근대에 들어와서 발생한 지식의 모든 파편화 현상들은 결국 절대 기준을 거부하는 현대 정신으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렇게 ‘선이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인정을 안 하고 강력하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이 무엇이냐고 오히려 묻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개인의 행복문제와 아주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벌써 한 십년 전의 일인데 책이 한권 나왔는데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여자가 시집을 갔는데 애들을 다 키우고 사랑에 눈을 떠서 외도를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카피가 굉장히 도발적인 것이었습니다. ‘딸의 운동화를 빤다. 그러면서 울어버렸다. 내 남편은 바다를 보여 달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말하지만 그 남자는 나를 데려다준다. 그러면서 도대체 내 평생 도덕이 나를 위해서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도 그 도덕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 그리고 내가 그 도덕이라는 형체 모를 가치를 위해서 죽도록 희생한 것에 대해서 도덕은 나에게 보상해주는가?’ 지금 다 외우지는 못했는데 내가 성경도 다 못 외웠는데 그것을 다 외우겠습니까? 내가 그때 목사였는데도 읽으면서 아 현대인이 한칼에 가겠구나! 그것을 저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선명한 필치로 썼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고 허물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모더니즘 이후입니다. 자꾸 후기 현대주의라고 그러는데 그것이 아니라 후기 근대주의입니다. 현대주의라는 것은 없고 근대주의입니다. 근대주의가 무엇이냐 하면 중세까지는 은총이 있고 이성이 그 아래에서 지배를 받았는데 근대주의에서는 이성이 은총 위로 등극하는데 후기 근대주의에서는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성이 끌어내려지고 그 위에 감정이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카피는 뭐냐 하면 카스맥주를 선전할 때 까칠한 여자아이가 하나 나옵니다. 못생기면 까칠해도 멋이 없습니다. 예쁘게 생긴 여자가 나오는데 까칠한 애가 나옵니다. 뭐가 수틀렸는지 깡통을 발로 뻥 차면서 뭐라고 뭐라고 그러는데 욕하는 입의 움직임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네 맘대로 해보는 거야.’ 그러면서 그 다음에는 ‘생각대로 해.’ 그런 것들이 막 현대인들에게 파고드는 이유가 그런 코드 때문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인간 그 자체를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결국은 절대적인 기준들을 다 거부하면서 그러면서 인간 자신을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으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학문을 해도 그 학문이 삶을 행복하고 보람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가치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요즘은 소위 이야기하는 레타담론 이라고 그럽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느 때 인간은 행복해지는가? 우리의 보편적인 선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메타담론이라고 그럽니다. 그런 담론 자체를 금기시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느냐하면 순간순간 자신의 삶속에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고 레슬러라는 심리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인간의 욕구의 최고의 단계를 무엇이라고 그럽니까? 자아실현이라고 그럽니다. 그 자아실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슬러의 자아실현의 단계까지 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자아실현을 충실하게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던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옛날의 황제와 임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 자아실현이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끊어놓고 나니까 그 다음에 인간 자체가 모든 것들이 파편화되어서 근거 자체를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오늘날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1900년대 중엽에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사르트르라는 사람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할 때에 남는 존재라고 그랬습니다. 꼭 있어야할 존재가 아니라 쓸데없이 존재하는 존재라고 그랬습니다. 하이데거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누군가에 의해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던져져버린 존재라고 그랬습니다. 완전히 우연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나는 태어나야할 필연성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사상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던져진 상황 속에서 무슨 절대적인 가치가 있고 창조 이전의 섭리가 있고 계획이 있고 그것을 따라서 사는 것 이것은 모두 다 미신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산산이 다 찢어지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해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에 인간의 이성이 제일 위에 있었는데 인간의 이성을 끌어내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라가야합니까? 인간이 이성을 끌어내리고 나면 나머지는 의지밖에 없는데 의지의 정체는 욕망입니다. 그 욕망이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상한 것이 이성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또 누굽니까? 이성입니다. 그러니까 자가당착입니다. 그것은 믿을 만한가?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욕망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욕망들이 한없이 팽창하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물질사회가 되면 사회가 각박해지고 물질이 굉장히 많아지는데 사람들은 아주 전투적이며 호전적이 됩니다.
그래서 요새 여러분들 마이클 샐던이라는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강의하는데 4000명이 모여서 강의를 들었다고 합니다. 저렇게 미친 듯이 책이 시장을 휩쓸고 있다고 그럽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사람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너희들끼리 모여서 정의가 무엇인가를 정하고 거기에 충실해라. 십년 뒤에는 그것이 바뀔지라도.’ 그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열렬히 환영하는 아십니까? 기준이 없는 사회를 살다보니까 사람들이 너무 피곤하고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안정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레비나스 같은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이론 같은 것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영향을 받으면서 그런 식으로 코드가 계속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릅니다. 공부안하면 잘 모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교회에서만 묻혀서 생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현대코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꾸 마주앉아서 캠퍼스의 대학생들과 대화를 하면 대화가 안 됩니다. 이야기하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야기가 안 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냥 여러분들이 느끼는 갑갑함을 쟤네들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쟤네들 중에서 머리가 트인 애들은 그게 왜 이야기가 안 되는지를 압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을 마음속에서 자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식하다고 자르는 것입니다. 말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학생이 나에게 와서 그럽니다. ‘목사님 우리학교에서 진짜 똑똑한 학생들은 절대 기독교모임에 안갑니다.’ 철학과 학생들이 예수를 안 믿는 것을 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안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기가 왜 간사하고 말이 안 되는지를 자기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훨씬 더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속에서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하면 사실 제대로 되려면 그 다음을 보십시오. 성경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이 구심력이 되고 일반학문이 원심력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마치 이렇게 붙들고 돌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학문의 구조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를 신뢰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무슨 학문을 하든지 여러분들이 성경을 중심자리에 놓고 성경에서 영향을 받고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고 내 인생에 힘을 주는 것들을 경험하면서 거기서 회개하고 자기 자신이 변화되는 경험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주변에 있는 학문들을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가까이 있는 학문이 있고 좀 멀리 있는 학문이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학문은 신학이 가장 가까이 있는 학문입니다. 성서학, 성서해석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교회사, 성경 언어학, 이런 것들은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면서 그 다음에 점점 멀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 지적능력이 동일하지 않으니까 똑똑하고 지적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이 줄을 점점 멀리 띄울 수 있습니다. 멀리 띄워도 항상 성경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멀리 띄울 수 있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주관까지 전부 포괄하면서 에베소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능력이 안 되면 성경주변만 돌아도 폭은 좁지만 어쨌든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중심성을 놓아버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막 돌아다니게 됩니다. 제가 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 벌써 한 22년 전이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 같은 이 단체는 아니고 선교단체의 간사가 하나 있었는데 내 조교였습니다. 조교하면서 간사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교수님 저 이번에 간사수련회를 갔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앙케트조사를 했는데 거기에 여자간사들이었는데 굉장히 열심히 헌신하고 여러분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네 대학에 가서 후배들을 가르치는데 이성교제와 결혼에 대해서 앙케트를 냈는데 그게 22년 전이었는데도 자기가 너무 사랑하면 가정을 가지고 있는 남자도 상관없다는 비중이 충격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경건한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으면 정보의 왜곡이 일어납니다.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끼리만 우리라고 그러면 너무 교만한 말일까요? 어쨌든 이렇게 그 범주만 아는 사람들은 밖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마치 에스라가 백성들에게서는 막 부도덕한 악들이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 듣는 것처럼 충격을 받는 것처럼 그런 단절현상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올바른 영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잘 알아야합니다. 그 결과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 것들도 자기의 시대 속에 흐르고 있는 사상에 감염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그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훨씬 더 심화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 무엇 때문이냐 하면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자기 자신이 오늘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경건한 삶이 어떻게 연결될지에 대한 이해들이 너무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하나의 구심점이 되어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연을 띄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연을 높이 띄웠습니다. 바람이 불면 연이 새까맣게 하늘높이 올라가서 팽팽하게 이 줄을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이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바람까지 불면 정말 힘듭니다. 연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빨리 줄을 풀어 이 바보야. 너 때문에 내가 날지를 못하잖아!’ 그런데 이 사람은 안 풀어주고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툭 끊어주면 연이 높이 나를 것 같아도 떨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일반학문을 이렇게 붙들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자기의 학문과 성경을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배우고 거기에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의 대한 연계관계를 찾아내는 학문의 통시성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사상이 올바로 서게 되면 마치 개울이 있는 것처럼 개울이 파져있으면 물이 흐릅니다. 물이 없으면 어차피 못 흐르지만 물이 있으면 그 물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사상이 없으면 물이 부어지면 홍수가 나버리는 것입니다. 아무 곳으로나 막 흘러갑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선 정확히 기독교 사상이라도 가르쳐서 우선 너의 문제가 무엇이고 현대가 어떤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사상적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삶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적인 학문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림을 보시면 이렇게 여기서 성경과 신앙으로 출발해서 그래서 지적인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이것들은 확장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능력은 틀립니다. 저것이 아주 폭넓게 확장되어서 돌 수 있다면 그러면 이제 이 세계와 그 안에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해서 아주 종합적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말하자면 방황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하는 일들은 훨씬 더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3. 신학의 목회적인 적실성의 상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신학교육의 현실이 목회적인 적실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3년하고 7년을 공부하고 나오면서 하는 이야기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모두 쓸데없다 우리는 다시 배워야한다.’ 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배운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가 성공을 하고 커지고 그런 비결들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자본주의에 의해서 이런 목회의 정신들이 많이 잠식되어버린 것입니다. 영적인 것들을 계량화하고 숫자화하고 하는 그런 것, 세를 자랑하는 그런 것, 기독교인들이 참된 진리가 아니라 인간관계 중심으로 뭉쳐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렇게 패거리처럼 몰려다니면서 자기 분야에서 세를 과시하는 이런 것들은 복음의 정신과는 상관없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4. 공부과정의 기능화
공부과정 자체도 굉장히 기능화 되어서 공부하는 것 자체가 신학지식을 배워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공부하는 과정 자체가 중세시대의 길드에서 거기에 가입하고 회원이 되어서 자격증을 얻어서 장사하고 그렇게 되듯이 과정을 밟는 것 그 자체가 목사가 되기 위한 그런 필수적인 과정정도로만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뭐냐 하면 이 모든 중심에는 무엇이 있느냐하면
5. 성경의 중심성의 상실
성경의 중심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모든 혼란스런 문제의 한복판에는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너무 흐려져 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 신학이 무엇인가를 확고하게 우리에게 정리해주지 못하는 그 문제는 성경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더 현실적인 것은 성경을 통해서 신앙생활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솔직히 얘기해서 우리끼리 모여서 이야기지만 성경을 매일 읽으시겠지만 왜냐하면 학생들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만들어주고 안 해 가지고 오면 벌도 주고 그럽니까? 그리고 또 수련회에 가서 아침도 안주고 그러니까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 말고 진짜 여러분들이 그렇게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그런 태도 말고 진짜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성품을 경험했기 때문에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고 가지가 깨뜨려지고 하는 그런 영적인 경험들이 얼마나 자주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꼭 성경 읽기만이 아니라 성경과 관련된 것, 즉 설교를 들으면서 사실 우리 복음주의 역사에 있어서는 설교를 올바로 듣고 깊은 감동을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욕망이 생겨나는 설교가 그게 올바른 설교입니다. 설교를 잔뜩 들었는데 다음 설교시간이 기다려진다. 아니면 그 설교자의 천재성 때문에 그런 그것은 올바른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를 다 듣고 나면 자기가 정말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느낌이 들고 오늘 설교한 성경 본문을 펴면서 어떻게 여기서 그런 진리가 있다는 것이 발견될 수 있을까? 그런데 왜 나는 발견하지 못할까? 나는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런 욕망이 생겨나게 하는 설교가 진짜 성경에 기반을 둔 설교입니다. 요즘 들어 막 좋은 설교를 어디서 한다고 그러면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마치 팬클럽 회원들이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러 다니는 것처럼 그래서 Sermon을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잘못된 태도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있고 그 다음에 성경을 읽는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영향들, 그것이 설교든 성경 자체든 혹은 성경을 잘 해설한 경건서적이든 그것을 읽으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불타오르고 정말 이 안에 보화가 있고 이것이 나에게 기쁨을 주고 있구나 하는 것을 그런 기쁜 감격과 도전 그런 것을 받는 것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제 잘 생각해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이 인간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생각해보면 20대 때에 읽을 때에는 은혜를 전혀 못 받던 책인데 30대 때에 읽으면서 깊은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10대나 0대 때에 은혜를 못 받았던 찬송이 40대나 50대가 되어서 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찬양)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쉴 곳 전혀 없네. 근심과 고통이 어딘들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7살짜리가 이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면 얘는 정신 감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40이 넘어갔는데도 이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이 사람도 정신과 검진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읽어야할 대상으로써의 성경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나 사이에 놀라운 순환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전에 어떤 지식을 얼마만큼 그리고 어떻게 정리하여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내게는 읽힌 성경의 진리가 저 사람에게는 안 읽힐 수도 있고 저 사람에는 안 읽히는 진리가 나에게는 읽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무엇을 발견하게 되느냐 하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의 빛 아래서 보아야지만 그 정확한 의미가 이해되고 그 계시에 담겨져 있는 풍성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결혼할 때가 되어서 보석상에 갔다고 칩시다. 기분 좋은 비유입니다. 보석상에 갔습니다. 신랑하고 보석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보석을 다이아몬드를 내놓을 때 주인이 어떻게 내놓습니까? 유리 위에다가 쏟아놓는 것이 아니라 까만 비로드를 깔고 그 위에 보석을 쏟습니다. 위에는 찬란한 조명이 내리쬡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반짝반짝 합니다. 물론 그 보석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비로드를 깔지만 그것보다는 까만 것에 그 보석 알을 깔아야지만 빛을 받았을 때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경 계시를 일반학문의 비로도 위에 놓고 볼 때 참으로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자, 이렇게 보면 그냥 여기에 많은 학문들이 있는데 다는 거론을 못해도 몇 개를 걸어놓았습니다. 자 죽음이 있다고 칩시다. 죽음이라는 것이 정의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면 죽음이 소위 법학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법의학이라는 것도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법의 죽음이 있고 그 다음에 또 문학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또 의학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 미술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학문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문학에서는 그냥 문학적으로만 죽음을 이해하면 됩니다. 법학에서는 법학을 하는 사람들은 법학을 하는 범위 내에서 법이 이야기하는 죽음의 의미만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철학에서는 이 모든 지평들을 통합해서 그 죽음이라는 의미를 정의하고 그것을 모든 학문에 적용시킬 때에 통용될 수 있는 Excite를 꺼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에 건축물이 있습니다. 그러면 전기를 다는 사람은 이 천장을 만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분야가 다릅니다. 천정을 만든 사람이 카펫을 깔았을 리가 없습니다. 카펫을 깐 사람이 저것을 색칠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것을 학문이라고 생각하면 철학은 이 건물 전체를 드로잉하면서 설계제도를 그리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러니까 학문들 사이를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중요한 건축학적인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요? 그런데 신학은 아까 이야기한 그것이 이렇게 된 이것을 밑변에 깔았다고 보고 사선을 그었습니다. 사선이 밑으로 지나가면서 철학의 이런 것들을 종합했는데 신학은 그 위에 삼각뿔처럼 있는 것이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모든 학문들 위에 가장 뛰어난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런 분야에 대해서 지식들을 잘 가지고 있을 때 성경 진리들을 발견하게 되면 이 성경진리의 의미가 아주 새롭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런 지식들이 성경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성경의 중심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인간들을 구원해내시는 그 모든 과정이 성경의 역사입니다. 그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과 그리고 당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것을 우리들이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을 알게 되는 지식이 쌓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지식을 가지고 이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시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이렇게 해서 통일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어떤 지식이 어떤 지식 때문에 올바르지 않은 쪽으로 가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런 지식의 지평들을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생각을 해야하느냐하면 성경이 모든 학문의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교육은 성경교육과 신학교육 그 다음에 목회와 신학공부 그 다음에 목회와 성경 이런 것들이 분리되면서 성공주의와 번영주의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Ⅲ. 렉치오 디비나
1. 렉치오 디비나의 의미와 역사
이렇게 해서 오늘의 혼란상들을 여러분들이 보게 되는데 이것을 통해서 하나의 대안으로써 렉치오 디비나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이 렉치오 디비나라는 것은 그 역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사도 교부들 그리고 초대교회의 교부들인 크리소스톰,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이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끌레르보의 베르나르, 귀고와 같은 이런 중세의 교부나 수도사들도 이런 성독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예 구약성경에서도 이런 성독들이 발견됩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경전을 읽으면서 그 경전이 자기가 아는 많은 잡다한 지식의 중심에 오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영적인 경험, 이것이 영적인 경험이 지적인 경험과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경험이 지적인 경험과 함께 전체적인 내포와 외연의 관계를 이루면서 그러면서 삶의 체계 자체를 수립해가고 가치체계를 자체를 수립하는데 이바지하도록 그렇게 성경을 읽는 정신을 우리들이 성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성독은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렉치오=읽기, 메디타치오=묵상, 그 다음에 오라치오=기도, 마지막에 콘템플라치오=관상 이렇게 됩니다. 이제 그러다가 이런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굉장히 넓게 퍼집니다.
2. 렉치오 디비나의 쇠퇴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성독의 건전한 습관들이 12,13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때는 중세시대의 후기인데 신비주의 영향 때문입니다. 두 개의 극단적인 영향 때문인데 하나는 신비주의 영향입니다. 신비주의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기록된 성경계시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밝고 올라가는 계단과 같은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관상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관상이야기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신학적으로 건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토마스 러튼 이런 사람들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인 것을 아셔야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잘못된 사상들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관상과 신비주의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굉장히 많이 빠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러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내가 어떤 광명들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았는가? 하는 그런 것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받은바 느낌 이런 것에 충실한 것이 신비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성경을 그렇게 정성껏 읽어야 된다는 개념이 없어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정 반대로 12세기에 와서 스콜라주의가 생겨나면서 전성기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에 이것이 일어나면서 너무 지적인 전통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성경은 뒤로 미뤄지고 철학서적과 책들이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을 받아서 성경을 한 번도 안 읽고 박사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신학적인 책이나 그런 철학적인 서적들을 읽고 성경은 부교재의 역할을 하게 되니까 그런 성독들의 전통이 무너져가다가 획기적인 계기가 옵니다.
3. 신학적 성경읽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 이 성독의 전통이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에 이것이 부활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중요한 슬로건이 있었습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써만!’입니다. 예전에는 이 사람들이 정경뿐만 아니라 외경, 교회의 전통, 교황청의 무슨 지시까지 전부 포괄해서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서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의 수많은 폐해를 주는 그릇된 교리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는 명제를 가지고 도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66권 성경 이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라고 줄을 확실하게 긋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굉장히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더욱이 이 사람들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원어로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성경의 놀라운 진리들을 터득하고 발견하고 영적인 경험을 하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받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성경과 관련하여 이룬 업적이 있다면 두 가지인데 정경, 즉 66권 성경을 확인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놀라운 속도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해서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게 한 것입니다. 그전에는 교회에서 설교도 라틴어로 하니까 무식한 사람은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자국어로 설교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이 성경에 대한 것들이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종교개혁자들의 성독의 전통이 영국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도로 자청을 하면서 그 관계에 충실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녀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성경신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Ⅳ. 성경, 모든 지식의 중심
자, 그런 이야기들을 우리들이 정리하고 나서 결국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그러면 이 렉치오 디비나와 관련해서 무엇을 회복해야 될 것이냐 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우리들이 해독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지식에 있어서 신앙의 중요성을 회복해야하는 것입니다. 다음 도표를 보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이렇게 밑변이 있고 원뿔입니다. 이 밑변에는 일반학문, 일반계시, 창조, 삶 이런 것들이 있다면 위의 꼭짓점은 신학, 특별계시, 지혜, 예배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소위 이야기하는 일원론, 이원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지나치게 성과 속을 구분하고 절대화하면 그것은 이원론적인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시는 부분은 교회와 예배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까지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그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을 지나치게 분리시키면 외식적인 사람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다음을 넘기십시오. 이것은 이 사람이 변태같이 나왔는데 그렇지 않고 그림을 잘못 그렸고 이렇게 동그란 평면이 있는데 거기에 울타리를 친 개토 같은 지역입니다. 이것이 이원론입니다. 그래서 특별은총이 여기에 갇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이 들어있다고 치고 그러면 자기는 예배를 드릴 때에 경건하게 드리고 예배의 모본을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면 자신은 충분히 자신의 할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밖에 나와서는 밖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이익을 얻고 현실을 적용할 수 있는 방면으로 처세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원론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디서 오느냐하면 이것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평면으로 놓고 설명을 하면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구분 없이 확 터진 것이 성경적인 일반은총과 특별은총과의 관계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터져버리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주일날 교회를 안 나오고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느냐고 그랬더니 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11시에 교회에서 모여서 1장 찬송을 부르고 시작하는 것만이 예배냐 나는 다른 사람을 지금 돕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이런 원뿔을 봐서 이렇게 신학과 일반학문은 같은 면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내려다보면 여기에 점 하나 찍혀있습니다. 그러면 중심이 있는데 그것은 평면적인 중심일 뿐만 아니라 입체적으로 중심이 되어서 일반학문이 어디까지 올라오고 끊어지고 그 다음에 신학이 어디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두 개가 같은 기울기 속에 있으면서 두 학문은 놀랍게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일반학문을 하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을 알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학문을 올바르게 하면 일반학문 속에서 놀라운 빛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으로부터 시작을 해야지 이성으로부터 시작을 해서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꼭짓점은 중심인 동시에 중심이면서도 담장이 쌓여서 구분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뉠 수 없도록 하나의 기울기로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반학문의 빛 아래에서 신학을 보고, 일반계시의 빛 아래서 특별계시를 보고, 창조의 빛 아래서 구속을 보고, 그리고 삶의 빛 아래서 제의와 예배를 발견하게 될 때에 그때에 이런 구조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여기에 대한 앎이 없으면 이것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위한 지식인지 알 수 없을 것이고 이것에 대한 앎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에 대한 앎이 없으면 내가 지금 발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하는데 이바지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청년들이 은혜를 계속 받고나면 성적이 계속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와서 기타를 치고 복음송을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는 것입니다. 자매들과 모여서 과자도 먹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삶에 대한 몰이해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청년들이 평일에 모여서 막 무엇을 하는 것을 나는 싫어합니다. 좀 특이하죠? 나는 싫어합니다. ‘언제 그럴 시간이 있느냐? 빨리 돌아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생활을 하려면 열심히 해라.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와야지 쓸데없이 기타 통을 메고 돌아다니면서 베짱이처럼 앉아서 기타를 치고 노래나 부르면 안 된다. 나중에 전부 다 후회한다.’ 그럽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느냐하면 성경이 모든 학문의 중심이라는 것들을 발견하고 그러면서 이 신학을 중심으로, 성경을 중심으로 일반학문들을 공부하면서 외연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학문이 성경이 그 모든 학문의 주입니다. 그래서 발견되는 모든 학문들에 있어서 올바른 발견들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그 진리들을 부분적으로 발견하는 것들이고 그들은 발견은 했는데 어디에 써야할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복음을 전해서 그 사람의 생각들을 깨우쳐서 그 지식들의 아름다운 것이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를 가르쳐주고 그 지식들을 어떻게 합치해서 아름다운 결과물들을 이루어서 어떻게 우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를 가르쳐주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해서 해야 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렇게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 다음에 관상은 종교 개혁자들이 안 받아들여서 없어집니다. 세 가지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묵상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 이것 세 가지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모든 경건과 종교생활에 중심이 될 때 그러한 중심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또 전문적으로 학문을 연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살아가는 삶의 과정 그 자체가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태도로 삶에 체계들을 세워갈 때 그것들이 올바른 신학의 체계가 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고 건전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만약에 그냥 간단하게 비나 피하려고 한다면 구조고 뭐고 필요 없고 그냥 볼대 몇 개를 세우고 나뭇가지를 세우고 거기다가 비닐이라도 얹어놓으면 하룻밤은 노숙을 할 수 있습니다. 산에서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3층, 4층이 아니라 10층, 20층, 30층짜리 건물을 올리려고 한다면 아주 엄격한 수학적인 계산을 가지고 구조공학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이 올라가면 그 건물이 33층 정도로 올라가면 바람이 불면 약 30㎝정도가 흔들려야합니다. 이게 만약에 100층, 150층 버즈두바이처럼 180층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구조들에 대한 정확한 계산들이 나와야하는 것입니다. 그럼 똑같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생각 없이 그냥 임기웅변으로 대항하면서 인생을 살고 그냥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려면 우리는 모두 체계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프다고 그러면 가서 약을 사다 주고 괴롭다고 그러면 같이 주저앉아서 하소연하는 이야기 들어주고 그리고 기도해주고 그리고 괴롭다고 그러면 같이 좀 놀아주고 외롭다고 그러면 같이 어울려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다양한 사역들을 펼치셨지만 주님은 항상 이 모든 자기의 백성들을 끌고 데려가시려고 하는 한 방향이 있었고 그리고 진리의 푯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도자로서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사역을 우리들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공부를 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그런 일들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해가는 데에 있어서 우리들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지식을 아무리 많이 발견해도 그 자체가 우리들을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신학을 공부해나가고, 성경을 공부해나가고, 학문들을 공부해나가면서 항상 중심에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알고, 경험하고 내가 거기에 반응할 수 있는 경건의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인 칼빈이 ‘띠에따스 스캔띠아’ = 경건과 학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실제 주님을 사랑하는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경건과 그 다음에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섬기고 바로 아는 많은 지식들을 체계화해놓은 이 학문 두 가지가 마치 우리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에 200㎞정도로 빨리 달리는 차가 어느 한쪽 바퀴가 빠졌다고 생각해보면 엄청난 전복사고가 일어날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기독교 사상을 역사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배우려고 하지 않을 때에 마지막의 그 피해는 아주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극을 원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서도 보면 굉장히 신실하고 신앙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단에 빠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습받듯이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만나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데 자기의 신앙적인 생각들이 체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급속하게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것을 들어도 하나를 정확하게 무엇을 경험해서 거기에 감동을 받게 된다면 그러면 머리로 아는 99개를 지금 가슴으로 경험한 하나가 이깁니다. 꼭 이깁니다. 더군다나 현대인들은 어떤 식으로 학습을 받고 있습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느끼는 것이 중요해. 그것은 네 마음속으로 믿어보는 것이야.’ 이런 식으로 암시를 받고 교육을 받습니다. 여러 해 전에 어느 자매를 보니까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철길 아래에서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을 데려다놓고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지고 막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얘가 나중에 돌아와서 거기에서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를 맺어서 상황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왜 그랬니?’ 나중에 물었더니 그 오빠들이 밤중에 철길 밑에서 자기 옷을 벗기고 온 몸을 만졌는데 ‘그렇게 따뜻하게 내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없었어!’ 그러한 하나의 감정 하나에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묻혀버리고 이겨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쳐서 사상으로 무장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사상이 올바르게 되어있으면 상태가 좀 나빠도 버틸 수 있는데 사상이 없고 상태가 나쁘면 가슴에 꽂히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러분들의 세대는 이미 벌써 한국교회는 사실은 70년대에 교리교육을 버렸습니다. 60년대도 제대로 교리교육을 시켰다고 생각을 하지는 않는데 어쨌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젊은이들은 그런 데에 굉장히 취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감정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부도 요즘도 잘되려면 바람 잡는 사람들이 있을 때 잘됩니다. 무엇인가 왔을 때 사람들을 잡는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앙케트를 냈는데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80% 가까운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싶다고 그랬답니다. 감동을 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참된 하나님 사랑으로 말미암는 이 감정적인 채워짐이 얼마나 놀랍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안 사람들은 쓰레기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이 채워지는 것에 만족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건의 이런 것들이 사라지게 될 때 신비한 것에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더인 여러분들이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성경을 가르칠 때 그러면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지식적으로도 사람들이 모였을 때 ‘쿵’하는 충격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내용자체가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런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우리들이 전수받을 때 실제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야합니다. 그러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훌륭한 성경교육입니다. 신앙교육입니다. 그런데 전자는 우리들이 부지런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학문을 하고 이렇게 해아지만 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아주 명백하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가 아닌 인간의 방법에 의해서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움직이려고 할 때 수많은 폐해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수련회에 갔더니 사회자가 나오더니 전부 다 청년들을 마주보게 하고 눈을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눈을 한참 쳐다보더니 전부 다 우는 것입니다. 그게 소위 이야기하는 그룹의 Dynamics 기법들을 교회에 가져오는 것인데 다 쓰레기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있고 거기에 감동이 있을 때 사람들은 변화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읽고 배워나가면서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변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결국은 우리들이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습득하고 그 다음에 공부를 하고나면 모든 학문들이 함께 연계를 이루면서 이제 이런 어떤 성경의 구조들을 우리들이 보게끔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사람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과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중생과 함께 두 가지 변화를 도입하십니다. 존재론적인 변화와 인식론적인 변화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어떻게 변하느냐하면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 속에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 생활을 잘하게 되면 이러한 성향들이 아주 활발해지고 기도도 안하고 까불면 이런 성향들이 쭈그러들면서 ‘내가 도대체 이게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의심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변화는 무엇이냐 하면 인식인데 예전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신미’라고 그러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쁜 옷, 맛있는 음식, 멋있는 남자 청년, 예쁜 자매 그것이 전부였는데 그런데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아! 정말 하나님은 아름다우시구나!’ 누가 아름다워 보이느냐하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결혼할 때에 절대 외모를 보고 하지 말고 결혼한 사람은 아멘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끝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외모를 보지 말고 그냥 신앙과 지성을 보고 결혼하십시오. 어제도 내가 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면서 그랬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형제들은 이미 자신이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지성적으로 뛰어난 여성과 결혼을 하지 않으면 갑갑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공부를 또 못하면 더더욱 공부를 잘하는 자매와 결혼을 해야 합니다. 유전적 이론입니다. 자신의 불행을 대를 물려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얼굴의 아름다움은 유효기간이 6개월입니다. 6개월이 지나면 다 그냥 그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우리교회의 어떤 자매가 ‘목사님!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제가 결혼해보니까 유효기간은 4박 5일이에요.’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아무 상관이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남자가 내 남자니까 산다는 것이지 얼굴이 예뻐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들의 모든 삶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흔적을 이 모든 창조세계 속에, 학문 안에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안에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서 홀로 영광 받으시는 이름
하나님의 그 탁월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동이 감정만이 아니라 지성의 빛과 감정의 열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주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올바르게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추구하는 이상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열애하는 지성, 그래서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졌으면서도 이 지성 속에서는 내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생생한 앎이 축척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해를 통해서 사랑이 더 뜨거워지고 사랑을 통해서 이해가 올바르게 이해되어지는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너무 늦게야 당신을 알았나이다.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너무나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별로 감동이 안 됩니까? ‘진리시여 빛이시여 영원한 사랑이시여!’ 이런 노래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예배드릴 때만이 아니라 일반의 모든 학문을 하고 세상에 펼쳐진 인간의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하고 아주 개인적인 나의 사생활 속에서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연애편지의 편지지란 말입니다. 그래서 써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발견하면서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발견하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도 이미 계셨고 이 모든 세계의 창조물이 생기기 전에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으로 계셨던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너무나 오래된 그런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내가 매일매일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우신 분이신지를 배워가는 데도 아침마다 발견하는 그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성품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Ⅴ. 결론
제가 일반학문과 신학이 어떻게 연결이 되었는지 간증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신학과 교수를 할 때는 사실은 공부를 못했습니다. 하도 바빠서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개척을 해서 17년간 목회를 하는데 지금도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쁩니다. 그래서 정말 바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소원이 3일만 실컷 잤으면 좋겠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고 창문이 큰 언덕위에 있는 집에서 하얀 이불을 덮고 BYC 내복바람으로 3일만 잤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바람을 참 좋아합니다. 하얀 커튼이 펄럭이면서 말입니다. 옛날 몇 년 전에 한 7,8년 된 것 같습니다. 교회도 짓고 굉장히 힘들 때였는데 그 선전이 나오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BYC 광고였습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바람이 잘 부는 언덕위에 있는 집에서 자는데 하얀 커튼이 바람에 확 날리는데 전부다 하얀 이불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실컷 자는데 가슴이 막 뭉클했습니다. 이것도 후기 근대주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쁩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적으로 안식년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여태까지 월요일 휴무도 안했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들을 쉬게 한지도 얼마 안 됩니다. 한 8년밖에 안됩니다. 왜 우리가 월요일에 쉬어야하느냐? 그것은 신학적으로나 무엇으로나 볼 때 옳지 않다. 성도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섬기고 월요일에 출근합니다. 끝까지 고수했는데 교역자들이 자꾸 병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쉬게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쉬지 않습니다. 나는 월요일에 항상 바쁠 때는 아침7시부터 밤 11시까지 여러 학년들을 가르쳤습니다. 아침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학을 계속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분야들을 공부했는데 굉장히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공부를 하니까 좋아서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다가 옛날의 신학자들이 놀랍게 거의 필수과목처럼 공부하던 과목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천문학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천문학을 공부할까? 그러다가 이제 나도 한번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1년 동안 천문학을 과외공부를 했습니다. 선생님을 불러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 반씩 공부를 했는데 신학을 배우면서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정말 탁월하고 놀라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물학, 그 다음에 심리학, 법학, 하나씩 하나씩 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아주 아름답게 선들이 연결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밤하늘을 보면 별들이 있습니다. 그 별들이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6,000개쯤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는 별의 숫자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말하는 이 순간에도 수없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충 쳐보면 우주에 대해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150억 광년쯤 된다고 보고 끝없이 팽창을 하고 있는 중이고, 그리고 하나의 은하계의 크기는 우리 은하계는 약 십만 광년쯤 되는 그런 큰 빛이 달려가는 거리이고, 그런 은하계 안에는 일억 개 내지는 이억 개의 별이 있고 그런 은하계가 일천 억 개쯤 있는 곳이 우주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최근에도 신문에 보니까 이천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은하단들이 발견되는데 요만한 하얀 별무리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별무리 하나의 크기가 이 손톱만 하게 나왔지만 그것이 빛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달려갈 때 그것이 이십만 년 정도 달려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북두칠성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이의 거리가 빛이 900만년을 달려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것들이 지구 주위를 도는데 참 명왕성은 잘렸습니다. 그러면 해왕성까지인데 그것이 500원짜리 동전에 들어간다면 이것은 전부다 위성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근처에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떠있는 우리 눈에 띠는 것은 모두 항성입니다. 그래서 별나라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펄펄 불타는 기체덩어리입니다. 그 항성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그 항성이 지구로부터 4광년이 떨어졌는데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500원짜리 동전에 들어간다면 가장 가까운데 있는 별이 서울에서 대구쯤에 있는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 별이 하늘에 흙을 뿌려놓은 것처럼 저렇게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별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느냐하면 놀랍게도 별들이 죽으면서 별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최근에 그것도 몇 십만 광년이 떨어진 곳에서 소위 Star the Star라고 그러는데 그 별 먼지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별 먼지들이 모여 있는 그 집단의 길이가 약 2광년쯤 된답니다. 빛이 2년 정도 달려야 될 정도의 거리에 별의 먼지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의 먼지들이 모여서 원래 우주에는 H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구 같은 이런 곳에서 아주 다양한 원소들이 발견되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이고 원인은 불입니다. 열에 의해서 그렇게 됩니다. 어쨌든 그렇게 모여 있는데 거기서 별이 죽습니다. 별이 마지막 죽을 때는 엄청난 폭발을 하면서 죽습니다. 꽝하고 폭발하면 그것이 에너지가 되어서 이 별 먼지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면서 중력에 의해서 뭉치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면서 이것들이 돌면서 속에서 핵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더 뭉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폭발을 하면서 별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의 구름이 잔뜩 끼어있으면 가장자리에 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랫동안 뭉치다가 나중에 팡하고 폭발을 하면서 별이 생겨나고 그 구멍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의 일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별마다 다른데 약 40억 년쯤 지나다가 나중에 이것이 40억년에서 100억 년쯤 지나다가 이것이 폭발하면서 자기는 가스로 사라지고 죽는 것입니다. 그 에너지를 받아서 그 다음 별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 선생이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무엇이 충격이었느냐 하면 하나의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별들이 태어납니다. 그것은 우주입니다. 그것을 우리로 가져들어오게 되면 이것은 그 사람이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천문학전공이니까 그 사실만을 가르쳐주는데 의학을 하는 사람한데 이야기를 들으니까 우리 몸에 세포가 있는데 3개월이면 우리 몸이 전부 다 모든 다른 세포로 바뀐답니다. 뇌는 예외입니다. 뇌세포는 한번 죽으면 안 생기는데 그런데 싹없어지고 새로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몸이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포가 죽을 때에 우리가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60조개 정도가 된답니다. 1경개가 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고 그러는데 보통 60조개의 세포가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세포들이 1초에도 수없이 죽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 전체를 아주 작은 꼬마전구 60조개를 켜놓고 그것들이 반짝반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세포들이 죽는데 그 세포의 죽음이 두 가지입니다. 네크로시스라는 죽음이 있는데 그것은 희랍어로 죽음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괴사당하는 것입니다. 수명이 다해서 죽든지 타격을 입어서 파괴되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아는 것인데 과학으로 설명이 안 되는 죽음이 있는데 아토포시스의 죽음입니다. 세포가 무슨 원인에 의해서든지 자살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자살할 때 화학 에너지를 옆에 있는 세포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세포는 그것을 에너지 삼아서 공장을 돌리면서 세포분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계속 그러면서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 그런 작용이 깨지면서 절대로 안 죽겠다는 일단의 세포들이 뭉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안 죽는 것입니다. 서로 안 죽는 것입니다. 안 죽는 것이 뭉치면서 덩어리가 되니까 안 죽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온몸의 양분을 막 빨아들이면서 안 죽으니까 이 세포는 더 빨리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암입니다. 암의 정의는 그래서 과잉 생명력입니다. 이것을 성경 쪽으로 가면 빌립보서 1장을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데 그런데 내가 죽으니까 예수가 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가정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에 상처가 있기 때문에 인생이 계속 꼬입니다. 그런데 계속 그 생각만 하면 여러분들의 자녀들까지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해결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하면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가족들이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고 주님을 알도록 자신을 희생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행하는 원리가 아니라 교회에서도 그 원리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그 수치스러운 대부분의 분쟁들에 들어가 보면 아무도 안 죽겠다고 할 때 그런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게 저 우주부터 시작해서 사람의 몸, 교회,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내면까지 똑같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죽겠다고 하면서 고통스러운 싸움을 하면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을 썼습니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내게 있나니 그러나 또 다른 욕망이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나는 보는 도다.’ ‘내가 이렇게 사망에 이르도록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렇게 탄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들이 쭉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 같은 초보가 발견한 것이니까 이 학문들이 연결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될 때 이 아름다움의 빛깔들이 얼마나 놀랍도록 아름다운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제가 음악을 참 좋아합니다. -음악소리- 소리가 예쁘죠? 이것은 바흐의 평균율입니다. 이 사람이 450개 정도의 평균율을 썼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평균율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아름답게 들리는지 사람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아주 엄격한 수열을 따랐습니다. 수열의 법칙을 따라서 지은 것인데 그게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아름답게 보일 때 그 아름다움을 캐 들어가 보면 거기서 아름다움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디자인의 황금 비율이 나오고 피보나치의 수열이 나오는 것입니다. 대기 중에 기름을 뿌려도 기름방울이 떨어질 때 수열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조개를 잡아서 조개껍데기를 비춰보아도 엄격한 질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모두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수열로 장난을 치신 것이라고 어느 과학자가 이야기했습니다. 신이 수열로 장난을 친 것이다. 그럴 정도로 아주 놀랍습니다. 비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자연에만 있겠습니까? 정신에도 있고 도덕에도 있고 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학문으로 수없이 찢어져서 일부만을 발견해낸 것입니다. 이것을 연결할 때에 정말 아름다운 것이지 연결되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보석 같은 것 알갱이들이 너무 많은데 그것을 쓰레받기로 쓸어서 모아놓으면 뭐가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빛깔과 조화를 이루면서 금실로 연결할 때에 그때에 아름다운 여성의 목에 걸려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아! 예쁘구나!’ 감탄하게 됩니다. 그것을 찾아주는 그 학문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끊임없이 배우고 그것을 전체를 이렇게 신학과 특별계시와 하나님과의 만남, 예배 이것들을 통해서 이것들이 모두 엮여지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언젠가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굉장히 오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치과의사를 하던 자매 하나가 있었는데 옛날에는 예배를 드려야 겨우 하나님이 아름답게 느껴졌는데 요새는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잡초를 보아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지성 전체를 주님의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고난도 있고 시련도 있고 복음을 전해도 잘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안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이길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며 살아야 된다는 명제는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틀림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까? 왜 사랑하게 됩니까? 사랑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원인은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이 사랑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을 놓고도 두 사람의 평가가 완전히 대조적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사람은 저 사람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입니다. 착각으로 발견했든지 진실로 발견했든지 착각으로 발견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콩깍지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발견했을 때 그것을 우리들이 정말 발견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전부 다 뭉쳐져서 엑기스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입니다. 그 엑기스의 가장 중심에 있는 앙꼬와 같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성경에만 두시고 다른 데는 아무것도 안 두신 게 아니라 성경이 엑기스가 되어서 이것을 여기다가 흩어 뿌려주신 것입니다. 흩어서 뿌려놓으신 것인데 그것이 학문 속에 깃들여있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학문은 나무가 무엇이고 돌이 무엇이고 별이 무엇인지만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신앙은, 성경은 우리에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되고 마지막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까지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물의 크기와 넓이 그리고 길이를 모두 헤아리고 그것을 계산할 줄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내신 하나님을 경배할 줄 모른다면 차라리 그 크기와 길이와 높이 이런 것을 헤아릴 줄 몰라도 그것을 내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훨씬 복된 사람들이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학문은 그것을 가르쳐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열심히 전해서 그 학문의 아름다움의 원주인이 누구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그 삶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고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그 학문이 쓸데없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잘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이 간간히 흩어져 뿌려진 것도 그렇게 아름답다니 엑기스처럼 몰려있는 성경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부지런히 학문을 공부하고 노력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그 순간에 오셔서 우리들이 가르치는 그 가르침에 역사할 때 확 불이 붙으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들을 공부해나가고 또 한쪽으로는 부지런히 내 영혼 날마다 주님을 만나 이 세상의 아무리 학문을 많이 하는 사람도 볼 수 없는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다 설명할 수 없어도 날마다 이끌리며 만나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거룩하심 때문에 심취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우리의 인격과 삶 전체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침체에 빠져서 막 고민하고 그러면 그것은 복음전파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행복해야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배워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찬송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찬송을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찬양)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기뻐하라 내 영혼아 기뻐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기뻐하라
감사하라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감사하라
기도하라 내 영혼아 기도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내 기도하라
가슴에 새기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돈을 많이 벌고 예쁜 자매와 결혼을 하고 멋있는 남성과 혼인하고 혹은 자식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혹은 독신으로 살고 이 모든 것은 삶의 양태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어떤 양태로 사느냐는 것이 인생을 참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를 치우고 그리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아도 언제나 그 높고 온 땅과 만물위에 탁월하게 뛰어나신 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면서 사는 그것이 우리의 삶의 양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외도라는 것은 이 양태를 본질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서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그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너무 인상이 좋고 끌리던 사람이 이야기를 몇 번하면 싫증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정신의 아름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별로인 것 같습니다. 고집도 세고 말도 잘 안 듣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신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진리를 함께 나누면서 행복합니다. 저는 취미도 없고 특기도 별로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인데 바쁘니까 많이도 못 읽습니다. 내가 항상 이야기합니다. 공부란 읽어야하는 책을 읽는 것이고, 휴식이란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옛날에는 돈이 없어서 책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책을 많이 삽니다. 일 년에 일억 원어치를 삽니다. 그런데 이제는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안전한 행복이 무엇이냐 하면 진리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한 취미가 있다면 이렇게 경치가 좋은 곳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하나님과 영혼과 진리와 불멸과 행복과 선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유들이 막 밀려왔을 때 한참 때에는 금요일마다 기도원에 올라갔는데 기도원에 올라가면 별이 막 쏟아질듯 합니다. 그러면 가슴이 북받쳐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아 지금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삶을 버려두고 저 별이 있는 하늘 끝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의 그 아름다움을 우주 안에서 발견하면서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에 모든 곳에 주님의 아름다움이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은혜를 받을 때면 옛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정말 나는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너무 많이 입었어!’ 우리 서로 받은 그 사랑은 알 사람이 없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자기 일생의 발자취에만 묻어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과 모든 지식 속에 아주 눈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합니다. 눈이 어두워서 못 보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습니다. 침체에 빠져서 그것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 눈을 감게 될 때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에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릇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 그 영혼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답고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천사도 부러워하는 인간의 가장 탁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우리가 가는 이 영혼을 돌보는 일이 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 위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너무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의 마지막은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영혼을 위해서 일한다는 이것은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추한 영혼이 어떻게 남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이바지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영혼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Happy 하라고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전 존재가 영혼들에게 교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저것이구나!’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