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 9주차
녹취자: 백지영
19장 부르심과 중생
1. 부르심
일반적으로 부르심이란 (혹은 소명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시는 것)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된 구원을 받도록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르심은 외적인 부르심과 외적인 부르심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외적인 부르심은 우리들이 복음에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내적인 부르심은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마음에 믿어지도록 부르시는 것, 이것을 감화를 동반한 소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외적 부르심
외적 부르심이란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하는 열망적인 권고로서, 죄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시하고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정의로 보아 외적인 부르심은 3가지 요소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복음적 사실과 복음적 개념의 제시.
둘째,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초청.
셋째, 용서와 구원의 약속
(그러니까 전도는 결국은 외적인 부르심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교회갑시다. 예수 믿으시지요.” 이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가 외적 부르심으로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사실이 반드시 제시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적 사실과 복음적 개념, "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인간은 타락했고, 왜 구원 받아야 하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고,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되고, 영원한 세계에 대한 어떤 관계를 갖는가?" 이런 것들이 제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초청,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초청, 이것이 따라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조건적이며 그 약속의 성취는 진정한 믿음과 회개의 방법에서만 기대될 수 있다.
a. 우주적 부르심
(여기에는 다시 둘로 나뉘는데 우주적 부르심과 진정한 부르심입니다.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인데, 어떤 측면이냐 하면) 외적 부름은 그 부름이 복음을 듣는 모든 자에게 온다는 의미로 볼 때 우주적, 혹은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부름은 어떤 시대나 어떤 백성이나 어떤 계급이나 어떤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택한 자 뿐만 아니라 유기된 자에게도 온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전도를 받는다고 해서 모두 예수 믿는 게 아니니까 멸망당할 사람도 외적 부르심은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b. 진정한 부르심
자연적으로 이 부름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써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좋은 믿음 가운데로 부르시며, 그들이 그 부르심의 초청을 받아들이기를 열망하시며,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는(이것을 회심, 회개와 믿음을 합쳐서 회심이라고 합니다.) 신실하게 영생을 약속하신다. 외적 부르심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향한 요구를 계속하신다. 만일 인간이 그 부름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를 멸시하는 것이므로 그의 죄가 증가된다.
또 외적 부르심이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국민들로부터 택한 자를 모으시기 위하여 정하신 방법인데, 비록 죄인들이 이 부름을 욕되게 하더라도 하여간 죄인을 위한 하나의 축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아주 나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에게 영원을 향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는 점에서는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 부르심은 또한 죄인을 정죄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공의로우시다고 한다. 만일 죄인들이 구원의 제공을 멸시한다면 그들의 죄는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2) 내적 부르심
이 내적인 부르심이란 성령의 역사로 외적 부르심을 효과 있게 만드는 것이다. 내적 부르심은 항상 성령의 역사에 의해 구원에 이르도록 적용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이른다. 외적 부르심과는 달리, 이 내적 부르심은 구원을 유효케 하는 능력 있는 부르심이다. 이뿐 아니라 이 부르심은 후회 없는 부르심이며 결코 변경되지 않으며 취소되지 않는 부르심이다. 이 내적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분명히 구원될 것이다. (그 대신 외적 부름이 없이 내적 부름이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알아야지만 믿을 테니까. 그래서 외적 부르심이 항상 내적 부르심을 동반하는 것은 아닌데 외적 부르심이 없이는 내적 부르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그 말씀의 권위를 유효케 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계몽된 지력에 호소하므로 인간은 그것을 의식한다. 그리고 내적 부르심은 항상 일정한 목적에로 인도되며, 그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이룩하게 하는 부르심이며, 축복을 누리게 함이며, 자유를 위함이며, 화평하기 위함이며, 거룩함을 위함이며, 소망을 위함이며, 영생을 위함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부르심이다.
2. 중생(Regeneration)
하나님의 소명과 중생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중생은, ‘다시 태어난다.’ 희랍어로는 ‘아노덴’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도 되고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도 됩니다.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합니다. 거듭 중(重)자를 써서 ‘다시 태어난다.’, 뭐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까? 육체로 한번 태어나고 그 다음에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체의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없는데서 태어나는 것이지만, 영혼이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는 없는 데서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었던 데서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를 주의 깊게 들은 사람들은 교리반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아무 것도 새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다 설교시간에 한 이야기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죽는다’라고 할 때에 ‘영혼이 죽는다.’ 혹은 ‘육체가 죽는다.’라고 할 때에 주체가 다르면 죽음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본적인 두 개의 필수불가결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가 신진대사입니다. 메타볼리즘(metabolism)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자기가 심장이 뛰고, 혈액이 돌고,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산소를 빨아들이고 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메타볼리즘,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산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외부의 상황에 대해서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추우면 몸이 추운 것을 느껴서 따뜻하게 하고 싶고, 배고프면 먹고 싶고, 적의 공격이 있으면 피하거나 싸워야 되겠다는 욕구를 느끼고, 이것이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신진대사 그 다음에 외부에 대한 반응, 이 둘입니다. 이게 생명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이것을 못할 때 그때 그 육체는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처음서부터 불사(不死)의 존재입니다. 죽지 않기로 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셨다.”, 그러니까 성경은 분명이 우리가 ‘죽었던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영혼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하고는 의미가 달라서 소멸이나 파멸 혹은 없어지는 사라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다라고 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영혼이 죽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는 죽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얘 좀 봐, 죽은 사람처럼 자네.’ 죽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그것은 진짜 죽었다는 육체의 의미가 아니라 영혼을 영혼답게 하는 생명과 사랑이 없어서 영혼이 하나님이 주신 영혼의 목적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때 우리들이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영혼을 가지고 육체를 지도하고 그래서 영혼이 그 육체를 지도하면서 위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아래로 인간들을 알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한데, 그래서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육체의 생명이 바로 영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올바로 작용하지 못하게 될 때 그래서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고 쇠약해 질 때 우리는 많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실들을 열매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에서 “데드 웍스”(dead works), “죽은 행실”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행실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영혼이 맺히는 많은 열매 죽은 영혼의 일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서 영적인 생명이 충만하면 거기서 맺히는 삶의 열매와 인격의 열매 그것과 은혜가 많이 떨어지면 그러면 아무 열매도 안 맺느냐 하면 아주 활발하게 맺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거짓과 방탕과 미움과 시기와 정욕과 이런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활발하게 맺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영적인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 영혼이 죽어 있다 그러면 그 죽었다는 것은 아무 작동도 안 한다는 뜻이 아니고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열매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영적인 죽음의 상태입니다.
거기에서 영혼을 다시 하나님이 살리셔야지만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아무리 하나님이 부르셔도, 아무리 외적인 부르심이 있어도 그것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는 안 되고 살아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먼저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그 살아난 영혼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를 받고 하는 그런 일들이 이루어진다고 봐야지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순서 혹은 차서(次序), 구원의 서정(緖正)이라고도 말하는데, 이 순서는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순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 중생의 본질
중생이란 말은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신앙고백서는 여기에다 회심을 포함시켜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오늘날에는 보다 협의의 의미를 갖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17세기에 구원에 있어서의 신인(神人)협력을 주장하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등장해서 도르트회의라고 하는 유명한 총회가 열립니다. 거기에서 화란교회에서 그런 알미니우스 주장들을 정죄하고 개혁교리를 올바로 세우게 된 것이 큘립이라는 교리입니다. 이것은 토탈 디프레비티(total depravity), 전적 타락, 그리고 언컨디셔널 리뎀션(unconditional redemption) 무조건적인 구원, 구속을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 리미티드 어톤먼트(limited Atonement), 제한적인 속죄,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해서 예수님이 속죄하신 것이다. 그 다음에 이레지스터블 그레이스(irresistible grace),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막 짓밟는다는 의미에서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면 우리는 저항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펄저버런스 세인트(perseverance saint), 성도의 견인. 그래서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구속,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이것이 개혁주의의 기본적인 교리입니다. 칼빈주의의 기본적인 교리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중생 그러면 그것을 아주 넓은 의미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마지막에 하늘나라에 가는 모든 것을 전부 다 다 하나로 묶어서 중생 혹은 신생, 뉴 벌스(new birth)라고 얘기했습니다. 17세기 이후에는 이런 논쟁들이 들어오면서 이것을 정교화 하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우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혁교리들이 방어가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세하게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중생이 아주 좁은 의미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 좁은 의미의 중생을 오늘날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의미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엄밀한 의미로 중생이란 새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뿌리시고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앞의 정의에 덧붙여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의미로 말하면, 중생이란 생명의 원리(하나님이 거듭난 사람에게 주시는 생명의 원리)와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에 있어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이므로, 그 인간 전인격에 영향을 미친다.
(영혼의 변화니까 마음, 인격, 느끼고, 알고, 사랑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주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세계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또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고. 그래서 중생과 함께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인간의 마음에 이르게 되는데 하나는 인식론적인 변화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두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을 방향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하나님이 심어주십니다. 그것들은 그런 인식능력이 있기 때문에 거듭나고 회심한 다음에 성경이 그렇게 달콤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기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고.
그 다음에 존재론적인 변화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을 하나님이 위로부터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하나님과 원수 됐던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성향이 생겨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 많이 하고 성경 읽고 은혜를 많이 받으면 계속 발전하고 그러지 않으며 이게 퇴보를 해서 예전에 은혜 받았던 말씀을 지금은 그렇게 못하고 예전에는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을 지금은 못하게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중생은 순간적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성화와 같이 점진적인 과정이 아닌 것이다. 우리 중생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다. 그러므로 중생은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는 파악되지 않으나 그 결과에 따라 알려질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된 사역인 것이다.
(2) 중생케 하시는 분
하나님이 중생의 주체자가 되신다. 성경은 중생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해준다. 우리는 알미니우스 주의자와는 반대로 중생이 전혀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독자적인 역사라고 본다. 중생의 사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작용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태어난 아이가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나는 데 보탠 것 있습니까? 엄마가 낳으니까 아기가 막 헤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엄마가 아기 낳을 때가 되면 힘이 들어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래서 아기를 뱃속에서 밀어내서 아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는 그 점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단단한 엄마 뱃속에서 자기가 노력을 해서 나오거나 아니면 자기 스스로 생명을 획득해야 되겠다고 몸부림을 쳐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태어난 다음에 살아갈 때에야 태어날 때에야 자기가 똑똑하니까 공부도 잘 하고 열심히 했으니까 밥도 먹고 그러지만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나는 것은 자신이 보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똑같은 원리가 여기 신앙생활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은 새생명을 심는 것으로서,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중생은 복음의 사역이 도구로서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 보므로, 하나의 독창적인 사역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복음이 전해져야지만 중생도 회심도 일어난다고 보지만 그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게 예를 들자면 아주 어린 아이 때 태어났다가 죽은 아이들 그것을 침례교 같은 데서는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라면 아이가 죽을 때도 하나님이 그를 중생시켜서 데려가셨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아이가 태어나다가 죽었는데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선택한 아이들은 천국으로 데려가신다고 봅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이의 이해여부, 능력여부와는 상관없이 성령님이 감동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교인이 유치원을 하는데 아이들이 많이 모입니다. 그런데 유치원 원장님이 예수님을 열심히 믿으시는 분이니까 대놓고 기독교 교육을 시켰습니다. 부모님들이 항의도 하지만 그러면 데리고 가라고, 워낙 잘해주니까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줄 섰습니다.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것 말고는 너무 잘해주니까 부모들이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하늘나라에 대해서 하루 종일 가르쳐 주었는데, 아이들이 점심시간에 모여서 한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가 그렇게 좋아? 그러면 할 수 없다 우리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해야지." 얘는 불신자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아이가 말했습니다. "하늘나라 갈려면 착한 일을 많이 해야 된대." 얘는 알미니우스주의자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다닌 것입니다. 성결교나 그런 교파들. 그러니까 또 옆에 있는 아이가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나는 아직 너무 어려서 천국 갈 수 없데." 얘는 침례교 교파입니다. 그 중에 다른 아이 하나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네 다 틀렸어. 너는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그런다고 엄마가 너를 천국 보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착한 일 한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니야. 어려도 우리는 천국 갈 수 있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야 돼." 얘는 칼빈주의자입니다. 열린교회 유치부어린이입니다. 실화입니다. 여러분 우리 유치부 아이들 무시하면 안 됩니다.
브릿지에서 4살 먹은 아이 두 아이가 싸우며 한 이야기입니다. "너 우리가 왜 싸우는지 알아?", "네가 나한테 나쁘게 했잖아? 네가 나 괴롭혔잖아?", "아니야, 너와 나의 마음속에 까만 게 많아서 싸우는 거야" 토탈 디프라비티, 얘는 전적 타락의 교리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너 오늘 회심집회 있었다는데 교회 가서 회개했어?", "그럼, 엄마", "무슨 죄 회개했어?", "원죄와 자범죄"
어느 가정에 한 아이는 유치부 다니고 한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인데 교리를 열심히 배우니까 신났습니다. "누나, 이런 교리 알아?" 그러니까 3학년짜리가 들은 척도 하지 않다가 두 번 세 번 물어보니까 말했습니다. "너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의 필연성에 대해 말해 봐."
그러니까 교리반을 못 마치면 교사로 절대 영입이 안 됩니다. 그런 아이들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가서 이상한 소리하면 당장 우리 선생님 신천지 같다고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교육이 안 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알면 가르칠 수 있고 안 게 재미있으면 가르치고야 맙니다. 여러분도 가르치는 대가를 받기는커녕 내가 밥 사주고라도 가르쳐주고 싶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컨텐츠가 있어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자식들을 신앙교육을 안 시키느냐고 교회에서 손가락질 해 보아야 소용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용이 있어야지 가르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무릎에다가 놓고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컨텐츠가 들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엄마 아빠가 교리 교육을 안 받으면 아이가 세례를 못 받습니다. 막 떨어뜨립니다. 장로님하고 목사님하고 앉아서 독방에서 물어보는데 어떤 사람은 청심환을 먹고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졌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시험 치십시오." 통보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가 점점 커도 세례를 못 받는 상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부모로서 정말 낙제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배우는 것입니다. 첫 아이 낳으면 하고 삼년 있다 둘째 낳으면 다시 교육받고 다시 외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사람이 쌍둥이 낳은 사람입니다. 한 번에 두 아이를 한꺼번에 해 버리니까. 그리고 집사 될 때 또 외워야 하고, 그러니까 지금 부지런히 공부해 두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2) 중생케 하시는 분
중생은 복음의 사역이 도구로서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 보므로, 하나의 독창적인 사역인 것이다. 야고보서 1장 18절, 베드로전서 1장 23절은 설교의 말씀이 중생에 있어 도구로서 사용되어진다고 증거하시만, 이 구절들은 신생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서의 중생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다. 중생은 보다 총괄적 의미로 볼 때 확실히 말씀의 방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좀 어렵습니다. 씨를 심습니다. 씨를 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중생입니다. 중생이 씨입니다. 씨가 심겨졌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와 가지고 의식 속에 활짝 펴서 이것들이 싹이 나야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회심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회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플러스 인간의 노력도 여기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동적인데 이게 뭐냐 하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자 하는 것과 믿고자 하는 것”, 이것이 회심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 중생이 회심을 통해서 의식 세계 속으로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회개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회심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회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생이 있고, 이 중생이 의식 세계 속에서 발휘되어서 진정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회심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사역이고,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이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중생도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고 회심도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화는 순간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중생의 필요성과 구원 차서에 있어서의 그 위치
성경은 분명히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해 명확히 말해준다.
중생의 필요성은, 인간은 본래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기뻐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기기 위하여 새로운 영적 생명을 부여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소명과 중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는 성인의 경우에는 외적 부르심이 항상 선행하지만, 엄밀한 의미로는 중생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부르심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심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중생은 내적 부르심보다는 앞서며 외적 부르심은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 또는 신생보다 앞선다.
우리는 이순서의 지시를 루디아의 회심에서 찾아 볼 수 있다.(행16:140).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외적 부르심),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엄밀한 의미에서의 중생)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한지라(내적 부르심,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 회심과 믿음
(여기서 ‘회’(回)는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중생에서 이룩된 변화가 의식적인(여기서 의식은 리츄얼(ritual), 그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있다 없다 하는 인간의 의식(意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생활 가운데서 나타나기 시작할 때, 이를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른다.
1. 회심에 대한 일반적 고찰
성경은 회심에 대해 항상 동일한 의미로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회심을 넓은 의미에서의 회심과 좁은 의미에서의 회심으로 이야기합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회심은 구원에 이르는 딱 한 번의 회심입니다. 첫 번째 회심. 그리고 넓은 의미의 회심은 그 회심의 경험이 반복되어 새롭게 되는 것, 그것을 모두 회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은혜 받았다가 미끄러졌던 사람이 다시 은혜 받는 것을 좁은 의미에서는 회심이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회심, 회심의 반복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회심이란 중생 받은 자로 하여금 그들이 의식적 생활 가운데서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를 통해 보면 하나님이 회심의 창시자이심을 알 수 있고(그러니까 우리가 협력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명백히 증거해 주고 있다. 중생은 새 생활의 의식적인 변화를 통하여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통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에 있어서는 하나님만 역사하시고 인간은 피동적인데 반하여 회심에 있어서는 인간은 협동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인간은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행하는 것뿐이다. 회심은 중생과 같이 순간적인 변화이지, 성화와 같은 점차적인 과정이 아니다.(회심 중생 모두 순간적인 변화입니다. 성화는 점차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나 중생과는 달리 회심은 인간의 무의식적 생활에서 일어난다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화인 것이다. (그러니까 중생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것은 인간이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회심과 중생이 같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중생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회심에 대한 기억이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중생과 회심이 따로따로 일어날 수도 있고 어렸을 때 중생했는데 철들고 나서 회심할 수가 있고 또 성인의 경우에는 이 두 개가 같이 일어납니다. 중생 먼저 하고 오랜 세월 있다 회심하고 이런 경우는 없고 중생과 함께 회심이 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중생이 기억나는 게 아니라 회심한 것이 기억에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심은 의식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 내가 무슨 말씀을 들었고 어떻게 마음이 아파서 회개했고 하는 것들이 기억에 남기 때문에 회심을 기억하는 것이지 중생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입니다.) 회심은 모든 성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회심이 반드시 각 사람의 생활에서 현저한 전한점으로 나타나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그러니까 회심을 하면 사람이 바뀌는 것은 사실인데 바뀌는 양상이 모두 다 한결같지 않고 어떤 사람은 아주 높은 수준으로 변화되고 어떤 사람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 같고 하는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반드시 회심은 삶의 방향의 전환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국민적인 회심, 마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일시적인 회심, 반복적인 회심을 말한다. 회심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반복을 인정치 않는데, 이 반복이란 말은 회심의 반복이 아니라 흐려졌던 새 생명의 회복적인 활동을 말한다.
회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소극적인 요소인 회개와 적극적인 요소인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2. 회심의 소극적 요소인 회개
회개란 과거를 돌아보는 것으로서, 죄인의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죄를 쫓아버림으로 일어나는 변화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1) 회개의 요소
회개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데,
a. 지적요소, 이것은 과거의 생활이 자신의 비행과 추행과 무력함을 수반하는 죄의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b. 감정적 요소, 이것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항하여 범한 죄를 슬퍼함이다.
c. 의지적 요소, 목적의 변화에서 일어나는 요소인데, 죄로부터의 내적인 전환과 죄를 용서받고 씻어 버리고자 하는 성향을 말함이다. 회개는 본래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죄를 지을 때하고 똑같은 과정을 통해서 회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지갑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았습니다. "아, 지갑이구나", 이것은 지식입니다. 그 다음에 "야, 저것을 가지고 가서 쓰면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참 좋겠다.", 이것은 감정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누가 있는지 살핀 다음에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면 범죄가 성립이 된 것입니다. 집에 가서 생각합니다. "아, 목사님 지갑이네.", 지식입니다. "이것을 내가 왜 가지고 왔지?", 너무 슬픈 것입니다. 감정적 요소입니다. "돌려드려야지." 그리고 가지고 와서 다시 놓고 가면 이게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2) 로마교회의 개념
로마 카톨릭은 회개에 대해 외적 관념을 가지므로, 그들에 따르면 회개는 선천적 죄에 대하여 슬퍼함이 아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죄를 짓게 되고 그것에 대해서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의 과정을 거칩니다. 율법적인 회개는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아, 내가 벌 받겠구나. 두렵다.’ 그래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격렬한 회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면 복음적인 회개의 개념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내가 죄를 지었구나.’ 그런데서 오는 마음 아파하는 회개가 복음적인 회개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좀 다릅니다. 그러니까 자기 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지은 죄는 동기가 되었을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그 뿌리가 자기가 죄악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으며, 모친이 나를 죄 중에서 잉태하였습니다.”라는 고백은 다윗의 엄마가 무슨 큰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뼛속깊이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여기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 고백인 것입니다.
그때에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고 나 자신의 힘으로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적인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기도를 안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때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때고, 기도도 많이 하는 때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그러는 때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외적 형벌에 대한 공포로부터 일어나는 것에 불과한 개인적 범죄에 대하여 슬퍼함이며,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신부에게 말하는 고백이며 금식, 고행과 성지순례 등과 같은 고해성사의 외부적 행위에 의한 배상의 표준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이러이러한 죄를 졌습니다.’하고 고해성사를 하면 우리 같으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주기도문을 백번을 외우시오.’ 옛날 같으면 너무나 커다란 죄는 ‘성지순례를 갔다 오시오.’, 그러니까 소위 보속(補贖)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자기 잘못에 대해서 보상을 지불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니, 대표적인 것이 면죄부판매입니다. ‘돈으로 갚으면 된다.’ 그러면 그게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3. 회심의 적극적 요소인 믿음
(1) 믿음의 종류
성경은 믿음에 대하여 항상 동일한 의미로 말하지 않는다.
a. 역사적 믿음, 이 신앙은 아무런 실제적인 아무런 도덕적, 영적 반응 없이 성경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믿음은 진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당연히 이 믿음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b. 일시적 믿음, 중생한 자의 마음에 뿌리박지 못하는 것으로서, 양심의 어떤 자극과 감정의 흥분으로 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일시적이라 칭하는 이유는 영속적 성질이 없으므로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것은 구원받은 믿음이 아닙니다.)
c. 이적적 믿음, 이 믿음은 이적이 자기에 의하여 또는 자신을 위하여 행해질 수 있다는 개인적 확신이다. 이 믿음은 구원적 믿음을 수반할 수도 있고 수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d. 구원적 믿음 혹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 이 신앙은 인간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중생한 생명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믿음의 씨는 중생의 밭에 뿌리어지고, 점차적으로 능동적 믿음으로 되어진다. 그러므로 구원적 믿음이란 성령에 의해 마음속에 일어나는 복음진리에 대한 개인적 확신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진실한 신뢰하고 정의할 수 있다.
(2) 믿음의 요소
우리는 진정한 구원적 믿음의 요소를 3가지로 구분한다.
a. 지적 요소(지식),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된 진리에 대해 적극적인 인식 즉 죄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진리에 대한 영적 통찰력이 있다. 이 요소는 절대적으로 하나의 확실한 지식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이 지식은 신자에게 복음의 기본적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개념을 제공하기에 충분해야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은 타락하고,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오시고" 이렇게 복음의 외적 부르심의 요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b. 감정적 요소(찬동)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은 이런 요소에 대해 구분해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동반되지 않으면 참된 지적요소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요소가 그 대상의 중요성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게 해 주는 것은 구원받는 지식의 특성인데, 이것을 찬동이라고 한다.
c. 의지적 요소
이 요소는 구원받는 믿음의 으뜸가는 요소가 된다. 그것은 사죄와 영적 생명의 근원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 신뢰인데, 이 신뢰는 그리스도에게 범죄한 영혼의 항복을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서 항복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어 맡김.)
마지막 분석에 의하면 구원받는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 믿음은 인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 믿음의 수행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복적으로 실천해야 될 인간의 활동인 것이다.
(3) 믿음의 확신
감리교에서는 믿는 자는 곧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그가 궁극적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은혜에서 떨어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올바른 견해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포함하는 진정한 믿음이란 자연히 안전과 보호의 의미를 수반하는 것이다. 이 확신은 신자의 영구한 의식적 소유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충실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므로, 항상 영적 부함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회의와 불안정에 의해 동요될는지도 모르므로, 확신을 얻도록 권고를 받는다. 이 확신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명상함으로써, 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진전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확신이라는 용어를 두 가지로 쓰는데, 첫째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야기할 때 이 확신은 죄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때는 영어가 ‘컨빅션’(conviction)입니다. 그 다음에 구원받은 다음에 "내가 구원받은 확실한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 이것을 의식하는 것을 ‘어슈어런스’(assurance)라고 이야기합니다. 둘 다 번역은 확신입니다. 죄에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런데 이 ‘어슈러런스’, 구원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성화 생활을 잘하면 충만해 지고 미끄러져서 성화생활을 잘 안하면 확신도 약해져서 나중에는 자기가 구원받았는데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안 들고 죽으면 지옥 갈지도 모른다고 하는 정도에까지 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확신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충만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구원의 확신 있습니까?”하고 물어볼 때 “저는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 못 받았다고 생각하고 “예, 아멘.” 그러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확신을 하는데 사실이 아닌 것을 확신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잘못 생각하면서 확신하고 있는 경우 많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슈어런스’ 그 자체가 구원의 확실한 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저런 확신이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있으면 우리가 담대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것입니다.)
21장 칭의
(칭(稱), 이것은 ‘무엇 무엇으로 칭한다.’라는 뜻입니다. 칭의(稱義), “의롭다고 칭한다.”, 영어로는 ‘져스티시피케이션’(justification)입니다. 이 단어 하나 번역하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개 '정당화'라고 번역되는데, 기독교권으로 들어오게 되면 '칭의'라고 불리는 전문적인 신학용어입니다. ‘져스티시피케이션’, 예를 들어서 당연히 의로운 사람인데 의롭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칭의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자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법조문에 이런 것 있습니다. “저 사람을 여자로 간주한다.” 그러면 굉장히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간주한다는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는 사람을 그렇다고 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전환 수술한 사람은 여자로 간주한다.’는 경우입니다. 우리나라는 외국하고는 좀 다른데, 예를 들자면 남자가 성전환을 해서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그 여자를 성추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고발을 했습니다. ‘이 남자가 나를 성추행했다.’ 그러면 성추행한 그 사람을 성추행범으로 법원에서 판단했을까요? 아니라고 판단했을까요? 외국 같으면 성추행이 성립을 합니다. 벌을 줄 때에 여자하고 똑같은 벌을 줄까에 대해서는 외국의 판례를 잘 몰라서 모르겠는데 확실히 성립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판례가 나왔는데 성 추행범으로 처벌을 안 했습니다. 단순 치한정도로 처리를 했습니다. 지나가는데 툭툭 건드리는 것하고 성추행한 것 하고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런데 성추행으로 처벌을 안 했습니다. 그 판례를 제가 한번 보았습니다. 정확하게. 그런데 장기적으로는 그런 것들이 강화가 되어서 성전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쨌든 간에 간주한다고 할 경우에는 “안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쳐준다.”는 뜻입니다. 칭의는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쳐준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당시에 예수님 시대 때.)
1. 칭의의 성질과 요소
(1) 칭의의 성질
칭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제일 먼저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 두 번째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게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법적인 행위입니다.) 칭의는 중생이나 회심이나 성화와 같이 갱신의 행위나 갱신의 과정이 아니다.
(그래서 중생, 회심, 성화, 칭의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뚜렷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중생은 하나님이 홀로 우리를 살리시는 데 순간적으로 하시는 것, 회심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협력해서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도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화는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죄의 불결과 비참으로부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로운 행위인데 인간도 협력한다는 것, 이것은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에 걸쳐서 일어납니다. 칭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중생, 성화, 회심 모두 자기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 반면 칭의는 바깥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언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운전하다가 도망도 가고 사고도 내고 해서 빨간 줄이 몇 개 갔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취임을 하면서 살인죄와 같은 커다란 죄를 제외하고 대통령된 기념으로 사면을 내립니다. 그러면 동사무소 직원들이 다 꺼내서 빨간 줄 간 것에다 다 사면이라고 도장을 찍어야 됩니다. 그러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이미 벌금도 내고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사면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네가 옛날에 이런 죄를 지었어도 새출발을 해라. 없는 것으로 쳐 주겠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백화점에 가 보면 물건에 다가 줄을 그어놓고 ‘얼마’라고 써 놓은 것이 있습니다. 줄을 ‘좍’ 긋는 것, 이것이 칭의입니다.)
칭의는 죄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신분에 영향을 준다. 칭의는 몇 가지 특별한 점에서 성화와 차이점이 있다. 칭의는 죄인 밖에서 즉 하나님의 법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죄책을 제거해 주며(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죄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죽였으면 사형을 당해야 한다고 할 때 그의 죄책은 사형입니다. 그것을 죄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단번에 영원히 완성되는 행위인데 반하여, 성화는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죄의 오염을 제거해 주며 계속적으로 일생을 걸쳐 행해지는 과정이다.
(2) 칭의의 요소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 두 가지 요소를 구별한다.
a. 소극적 요소(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죄의 용서)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가 있어야지만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절하게 회개를 하고 성령께 순종을 했더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고 이루신 의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기초해서 그런 행위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자랑할 것이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칭의에서 허락된 바 그 용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반복을 인정치 않는다. (칭의는 잃어버렸다 얻었다 그러는 게 아니라 한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죄의 용서를 위해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책의 인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용서받지 못했다는 감정(분리된 감정)을 조장시키므로, 사죄의 확신에 대한 위안을 반복적으로 요청할 필요가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을 때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이유는 그 죄 때문에 네가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해야지만 영적으로 다시 충만한 생명과 은혜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이야기하는 하늘의 풍성한 자원을 우리가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함으로써 다시 하나님이 그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개의 시리즈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은혜와 부패라는 시리즈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의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어떻게 부패하는가, 거기에서 무슨 답을 주느냐 하면 우리들이 매일 첫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데 돌아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를 거기서 신학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다섯 개로 되어 있고 서점에 가면 ‘은혜와 부패’라고 하는 청취가이드가 있습니다. 그것을 놓고 다섯 개를 모두 들으면 그 모든 의문들이 다 풀릴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시리즈입니다. 교인들이 크게 변화 받았던 시리즈입니다. 두 번째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시리즈인데,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길’이라는 시편130편 시리즈가 있습니다. 다섯 개로 되어 있는데 내용이 꽤 많습니다. 이것은 아마 청취가이드는 제작이 안 되었고 혹시 요약지가 되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없으면 달라고 요청을 하면 제가 줄 용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두 시리즈를 들어보십시오. 집중해서 들으면 반드시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b. 적극적 요소(하나님의 자녀로서 양자됨)
칭의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가녀의 위치에 두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상속권은 물론 자녀의 모든 권세를 부여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신자들의 이러한 법적 아들됨은(칭의를 통해서 법적인 아들 됨) 중생과 성화를 통한 도덕적 아들됨(도덕적인 아들 됨은 아들다워지는 것입니다. 변화가 되어서.)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청교도들에게 있던 중요한 격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다.” 무슨 뜻입니까? 부모가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저절로 구원을 받는 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더더욱 성인의 경우에. 그러니까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적인 일대일 사이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 칭의의 시간
칭의란 용어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사중적(四重的) 칭의 즉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칭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마지막 심판에서의 공적 칭의를 말한다.
(1)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관념적인 의미로 이 칭의를 설명해 보면, 그리스도의 의(義)는 구속의 뜻으로 신자들에게 이미 설명된 것이므로 영원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르나, 이 설명은 죄인의 칭의에 대한 성경적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 가운데서 작정된 것과 역사의 과정에서 실현되는 결과를 구별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셔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원할 사람들을 위해 속죄를 이루게 하신다면 역사 속에서는 전개될 것이지만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면 삼위일체를 들어야 합니다. 거기 보면 현견지와 단순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입니다. T, T0, T1, T2, T3, T4, T5 시간입니다. 요 시점에서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런 일이 발생했고 여기서는 이런 일이, 여기서는 이런 일이, 여기서는 이런 일이, 여기서는 이런 일이 이런 일이 발생을 했습니다. 그러면 T0에서는 이 사건만 발생한 것입니다. E1(Event1). 그 다음에 시간이 이만큼 흘러야지만 E2, 또 시간이 흐르면 E3가 되고 이런 논리에 의해서 전개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 일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고 예측은 할 수는 있겠지만 실지로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30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여러분 알겠습니까? 내가 강의를 길게 하면 수업이 안 끝난 것이고. 그런데 이것은 이렇게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되는 것인데, 그런데 만약에 시간이라는 것을 사상해 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이것은 이렇게 들어올 것 아니겠습니까? 그 다음에 이것은 이렇게 들어오고. 이것은 당연히 E1, 이것은 E2가 되고, 이것은 E3가 되고 똑같은 것에 의해서 여기는 E4가 되고 그 다음에 이것은 이렇게 들어와서 여기는 E5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있었고, 이것 때문에 이것이 생겼고, 이것 때문에 이것이 생겼고, 이렇게 논리가 된다면 시간을 싹 빼놓고 나면 이것은 이것 때문에, 이것은 이것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싹 빼버리고 나면 그냥 시간은 상관없이 이런 논리만 남는 것입니다. 1 때문에 2가, 2 때문에 3이, 3 때문에 4가, 4 때문에 5가 생겼다는 것, 원인과 결과 관계만 남습니다. 이것이 단순지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전개됨에 따라서 마치 두루마리가 펼쳐지는 것처럼, 이렇게 시간을 따라서 보는 것을 현견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둘 다로 보실 수 있고 엄격하게 말하면 인간에게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해서 보시는 분이지만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보시는 것 같은 효과가 인간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교리반도 하고 열심히 공부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론에서 이야기하는 칭의의 고유한 의미는 아니다 생각해 볼 수는 있지요.) 1.20
(2) 부활로 인한 칭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칭의에 대한 말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칭의였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칭의는 보 편적이고 순수한 객관적인 처사이므로, 이것이 죄인에 대한 개인적 칭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칭의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그게 우리 개개인의 구원과 직접 연관되는 칭의라고 이렇게 생각해서는 그것은 개념이 좀 다른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그래서 이것을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의 칭의에 대해 말할 때,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관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전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일상적으로 표현한다.
이 말은 이신칭의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칭의의 도구요, 칭의가 전용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에게 적용하는데, 이 그리스도의 의(義)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믿음은 그 믿음이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한 의로 여겨진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 의나 자신의 믿음에 근거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우스파의 잘못을 경계해야 한다. 인간 자신의 의나 믿음은 인간의 칭의에 근거해서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인간 자신의 의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원에 있어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3.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반대
a. 어떤 학자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인간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희생을 했다면 그게 어떻게 은혜냐? 그런데 논리가 안 맞는 게 다른 사람이 대신 내주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칭의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선물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심과,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칭하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은혜인 것이다.
b. 또 어떤 학자는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들이 자신들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시지 않으시고, 죄인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었다고 선언하신다.
c. 마지막으로 어떤 학자들은 칭의 교리가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이 도덕적 생활을 무관심하게 만들기 쉽다고 주장한다. 만일 죄인들이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왜 죄인들이 개인적 경건에 마음을 써야만 하는가? 그러나 칭의는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기초하므로 이것은 진정한 경건 생활을 위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 그리스도와 실제로 생명력 있는 연합을 이룩한 자는 도덕적인 면에서 무관심할 리가 없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의롭다 함을 칭함을 받는다고 할 때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 당신이 믿기만 하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이 말이 희망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 사도 시대 때 수많은 아무 희망이 없는 세리와 죄인들 비참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이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기에 이게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믿는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가 받은 구원이 자기가 잘 믿어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잘 안 믿는 사람들에 비해서 자기 자신은 저 사람보다 잘 믿은 내 공로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지갑에 돈이 있는데 내가 이 돈을 저 형제한테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형제가 나와서 돈을 받았습니다. 그때 ‘내가 일곱 발자국을 걸어서 나간 공로로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목사님이 우리에게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5만 원짜리를 들었는데 나보고 나오라고 그러셨어. 목사님이 진짜 이렇게 마음이 좋으신 분이신 줄은 설교시간에는 미처 몰랐어.’ 누구든지 그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내민 손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칭의를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내가 받은 구원이 너무 감격스럽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감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구원의 교리를 올바로 공부하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올바른 구원의 교리를 공부할 때 받는 유익인 것입니다.)
(질문) 목사님께서는 중생 이후에 회심 사이에 시간의 격차가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중생 후에 회심을 통한 가시적인 회개가 없는 상태에서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1.28)
(답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경우를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일반적인 성인, 이해력이 있는 성인의 경우에는 회심과 중생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봅니다. 신학적으로. 그런데 예외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아이들, 그 다음에 또 어떤 경우냐 하면 지적 장애가 있어서 도저히 이해를 근원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도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으면 당연히 그 영혼도 구원받아야 될 영혼입니다. 그럼 만약에 지적 장애가 있는 모든 사람은 다 구원받았다 그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중생하게 하신 사람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구원받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경우 지체 장애가 있는, 정서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데, 그것은 미국이나 이런 나라에서 개발된 방법으로 그 아이들이 신앙을 가졌어도 자기가 충분히 하나님을 만났어도 만났다는 것을 간증을 하거나 증언을 해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하게 결핍 돼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다른 방법으로 검증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그것을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신앙고백으로 하고 세례를 주는 것이지요. 세례가 구원의 여부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성인의 경우 의식이 구원의 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 시차가 그런 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거듭난 사람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경우는 아까 얘기한 것 같은 그런 경우 그래서 어렸을 적에, 왜 그런 경우 있습니다 급격하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이런 경험은 없는데 그런데 구원받은 것이 확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격렬한 회개와 뉘우침 이런 게 아니라, 그 결과인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런 격렬한 회개의 경험이 없는데도 사랑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중생하고 그리고 그 중생한 속에서 어느 한 순간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믿기는 했지만 그것이 격렬한 체험을 동반하면 훌륭한 믿음이고 그것이 격렬한 체험을 동반하지 않으면 아주 낮은 수준의 믿음이라고 하는 그런 식의 논리는 우리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믿고 회개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감정적인 변화나 인식의 변화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를 가져도 안 되는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18세기의 영국에 있었던 센디먼파라고 하는 이단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머리로만 이해를 하면 그것은 믿는 것과 동의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실은 머리로만 믿으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인이 중생은 했는데 회심을 한참 있다가 하거나 회심을 못한 채 죽는 경우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서 세례요한 경우에는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많은 신학자들이 중생으로 봅니다. 그러면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중생을 했는데 태어나서 며칠 살다가 죽었다 그 경우에는 당연히 그 중생이 회심으로 발견이 못 된 가운데 죽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구원에는 문제가 없다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