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 3주차 - 2부 신론
녹취자: 최원정
오늘은 이제 신론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됩니다. 신론이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말하는 논의입니다. 목차를 한 번 보면 구성이 재미있습니다. 서론은 종교, 계시, 성경으로 끝나고, 신론을 보면 신론, 그 다음에 기독론, 교회론, 이 세 가지가 아주 비슷합니다. 어떻게 되어 있냐하면 4장, 5장, 6장, 7장 여기까지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8장, 9장, 10장은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 그 다음 기독론으로 가면 14장, 15장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16장, 17장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 그 다음에 교회론으로 들어가면 23장, 24장은 교회란 무엇인가, 그 다음에 25장, 26장, 27장은 교회는 무엇을 하는가. 이렇게 1부 2부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신론을 들어가 보면, 4, 5, 6, 7까지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일 어렵고 그러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 7장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는 사실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학기를 배우려고 합니다. 제가 지금 삼위일체를 교과서를 쓰다가 2년 전에 스톱이 되었거든요. 너무 바쁘고 다른 책을 쓰느라고, 555p이지를 썼어요. 700p지를 써야지 완성이 되는 책입니다. 근데 다행히 이미 다섯 시간짜리 특강 한 것이 있어요. 산상에서 한 두시간반 했고요 교회 와서 아마 두 번 더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2시간 정도했을 테니까 6시간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되요. 교재는 서점에 있어요. 얇은 책인데, 펼쳐놓고 정신 바짝 차려서 들어야 되요. 철학 이야기도 나오고 해서 굉장히 어려워요. 삼위일체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기독교 교리 중에 제일 이해하기 어려워서 이단이 제일 많이 생겨난 것이 거기거든요. 얼마나 어렵겠어요? 그래도 그거를 담임 목사가 그렇게 장시간 동안 7시간씩 걸쳐서 설교해주는 교회는 한국에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라고 하는 책 사서 읽어보면 50p도 못 읽어요, 그래도 그것은 여러분 이해할 수 있게끔 눈높이에 맞춰서 해준 것입니다. 읽고 다 이해하면 100프로 이해하면 할렐루야이고, 90프로 정도만 이해를 해도 좋겠어요. 그러면 적어도 그렇게 공부하고 나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구나. 저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구나.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냐 는 정확하게 말 못해도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구나라는 거라도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그 숙제를 꼼꼼하게 잘 하셔야 되요. 마치 언제 무슨 공부처럼 하냐하면 수능 3일 전에 사회 공부하는 것처럼. 운전면허 시험 보기 1시간 전에 대기실에서 문제집 읽는 마음으로 가슴을 태우며 공부를 하면 되요. 그러면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정말 어려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왜 하나님의 존재가 어려우냐면 말입니다. 우리들이 존재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되게 존재를 이렇게 눈에 보이는 장소와 공간과 크기와 색깔과 모양을 가진 것들을 통해서 존재를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디 있나. 어떻게 하나님이 존재하나 라고 생각하니까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있다’라는 계사 있잖아요. 말을 쓸 때 이 의미는 앞에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있다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 연필이 있다와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다 라고 할 때는 있는 의미가 달라진다. 양심이 있어요, 없어요? 양심이 존재하는 것은 창자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뱃속을 갈라도 해부학적으로 양심이 없다. 그래서 이제 이런 혼란을 일시에 불식 해 줄 수 있는 개념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대학 다닐 때 철학을 흥미 있게 공부한 사람들은 법학, 좋아했던 사람들은 교리공부가 너무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런 거 모르는 사람도 재미있게 해 줄 수 있어요. 저와 함께 교리반을 하고 나면 철학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설명하면 한 시간 내내 해야 하는데 여러분들은 말하자면 초등학교 과정이니까 간단하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 라고 할 때, 스피노자 같은 사람은 자연에 모든 것과 하나님이 하나라고 본 것입니다. 요즘 그런 식의 소위 얘기하는 범신론적인 접근이 많아요. 그런 책들을 조심해서 읽어야 해요. 어떤 사물이 있는 방식, 시간과 공간 속에 있다 라는 말을 ‘실존’이라고 표현을 해요. 실존은 existence에요, (실존주의)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라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지금 여기 이 시간에 이 모습으로 이 사태에 있는 이것은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어떤 사물이 실제로 있는 것, 있는 방식을 한정적으로 있는 것, 이거는 조금 어려운 말인데요. cercom(둘레) scrip tibly 어려운 단어에요, 두 번째로 이런 사물은 뭐냐 하면 연필,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사물이 한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 크기, 모양, 색깔, 부피, 높이, 넓이, 길이, 중량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테두리까지는 연필이고 그 밖은 연필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한정적으로 있는 사물이다. 라고 해요. 한정적으로 있는 사물. 두 번째는 제한적으로 있는 사물, 이것을 definitively하게 있는 사물. 이것은 뭐냐 하면, 이런 게 아니라 영혼이에요 영혼. 저의 영혼이 어디에 있을 까요? 다른 영화에서 보면 다른 데 갔다가 왔다가 하는 시크릿 가든이 나오잖아요. 거짓말이고 내 영혼은 내 안에 있잖아요. 나 어디에 있어요? 발끝에 있어요? 머리 위에 있어요? 마음에? 그거는 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마음이 눈에 보이지는 않고 물건처럼 감각되지 않지만 일정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는 것, 제한적으로 있는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혼 천사 이런 것들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 세 번째, 충만적으로 하게 있는 것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는. 안 계신 곳이 없고 안 계신 시간도 없고 어디 있든지 다 계신데 그런데, 그러면 여기 이렇게 연필이 있다고 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는데, 이 안에 하나님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기 있는 온갖 많은 것들에 하나님이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만물 중에서 어떤 만물보다 그것에 가까이 계시지만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분, 무슨 뜻이냐 하면 충만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어디든지 계시고 모든 사물이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는데 한정적인 방식이나 제한적인 방식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아무데도 안 계신다. 양심은 있지만 해부학적으로 양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머리 속에 철저히 외워둬야 되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대부분의 오해와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요. 동양철학이나 도교 이런 책을 읽으면서 좋은 것은 찾아내고 바보같이 풍덩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않는다. 한정적으로 제한적으로 충만적으로 있는 것. 하나님만이 충만적으로 있다. 이 존재방식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잘 모른다. 퀴즈 하나 낼게요. 1차원이 선이고 2차원이 면입니다. 3차원이 입체이고 4차원이 시간이잖아요. 그 다음 차원은 우리가 몰라요. 그러나 학자들은 20차원까지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oxford에 가서 23살짜리가 박사논문을 쓰는 사람을 만났어요. 대학을 1학년에서 4학년으로 바로 점프했다고 하더라고요. superstain에 대해서 1시간 반을 이야기 했어요. 이야기를 하다가 차원이야기가 나왔어요. 20차원까지 학자들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수식으로 나온다. 계산으로는 나오지만 무엇인지 모른다. 2차원 밖에 모르는 어떤 존재가 있어요. 이것과 저것이 동일한 크기의 사각형이다. 두 개가 같이 포개어 질 수 있어요, 없어요? 수학의 공리상 이 선은 크기와 넓이와 부피가 없어요. 얹으면 두 개가 하나가 되어버려요. 2차원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두 개가 합쳐질 수 있다고 해도 아무리해도 이야기할 수 없죠. 3차원에서는 이게 가능하잖아요. 이게 네모난 책이라면 겹쳐놓을 수 있지만 면에서는 불가능하잖아요. 5, 6차원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은 무한차원의 하나님이신데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가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충만적으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1. 하나님에 관한 지식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는 선천적 지식과 후천적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능성은 부인되어 왔다.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단지 부분적으로 알 수 있으니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에만 맡겨두면 인간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1) 선천적 지식
인간은 선천적 지식을 갖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만한 자연적인 능력, 본성적인 능력을 소유했다는 말은 아니다. 또한 인간이 나면서부터 하나님에 관헌 어떤 지식을 세상에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단지 정상적인 상태 하에서 인간에게 하나님에 관한 일정한 지식이 자연히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 지식은 일반적 성질의 지식인 것이다.
이런 것입니다. 인간이 성경이 없어도 인간이 두 가지는 자연스럽게 커다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알게 돼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선과 악이 있다는 사실은 이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주 강력한 편견이 어려서부터 주입이 되면 사실 그 두 가지도 방해받을 수 있죠. 예를 들어서 진화론에 확 물이 들어버린다던가 도덕 상대주의에 깊이 물들어서 모든 도덕을 부정해버리는 상황에 들어가게 된다든가. 그럴 경우에 선악에 대한 기준들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의 교육이 그래서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분인데 대학 교수에요. 한번 신문에 글을 썼는데 신선했어요. 학생들이 사회 계통의 과목시간이었는데 서로 토론을 하면서 혼전 순결에 대해 토론을 했어요. 지방대생은 동거하는 문란한 학생이 많잖아요. 다들 손을 들면서 이런 점에서 혼전에 동거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막 이야기를 하는데 몇 사람이 발표를 해서 학생하나가 손을 들더니 딱 나와서 내가 동거를 해보니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러고 동거의 유익성에 대해서 쭉 설명을 하는데 앞에 얘기한 사람들 말한 것은 권위가 없고 직접 자기가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 그 과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여학생이래요. 그것은 뭐죠? 도덕 관념 같은 것들이 분별할 수 있는 것들이 사회의 설득, 혹은 개인적인 신념에 의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워져버릴 때는 선악에 대한 기본적인 관념들이 현저하게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 하는 상대주의의 출현입니다. 글로벌 사회에서 진리의 전달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보면 서양사를 볼 수 있는 눈이 확 열리는 경험을 했다고 그래요. 2시간 40분짜리 연속강의에요. 여러분들이 책 10권 읽어도 감을 못 잡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무식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요. 끊임없이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너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얼굴 예쁜 자매만 찾지 말고 책 많이 읽고 생각 많이 하는 자매를 찾아야지 더 나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쨌든 선천적 지식, 두 가지를 가르쳐준다했어요.
(2) 후천적 지식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선천적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하여 배움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획득한다. 이 지식은 인간편의 노력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닐, 하나님 지식에 대한 인간의 의식적이고 계속적인 추구의 결과인 것이다. 이 후천적인 지식은 다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지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관한 선천적 지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발전적 지식을 갖게 해준다.
2. 특별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지식
하나님의 어려움은 무엇이냐 하면 존재, 본질, 실재가 전부 하나에요 근데 다르잖아요. 예를 들자면 하얀 분필이 있다하면 본질은 석회에요 실존은 하얀 분필이고 근데 하나님은 그런 것이 없이 그냥 순수한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유가 되지 않아서 어떤 분인지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봤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죠. 완전히 거짓말일까, 일리가 있는 얘기 일까? 하나님을 봤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어떤 매개체를 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봤다라고 이야기하면 안돼요. 그래서 후천적인 지식은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가능한 것이다. 모든 불행의 궁극적 원인은 죄, 질병, 교육 받지 못하는 것, 물질의 부족들은 표면적 증상이고 그 밑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죄가 있고 그 죄를 깊이 내려가면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가 있는 것입니다. 무지는 almost evil거나 the very evil 무지 한 것은 죄와 거의 똑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몰랐다는 것을 권력처럼 내세우는데, 모르는 것은 알지 아니하기로 한 선택입니다. 그러니까 더욱이 아직까지도 젊고 팽팽한 사람들은 매너도 공부를 해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워가는 것입니다. 교리반을 들어오면 주일 예배 드리는 눈빛이 달라져요.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보고같이 쏟아져 내리는 시간이 예배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공부하는 자세도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함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확하게 하나님에 관해서 정확하게 무엇을 알려주는지를 이해하려는 이해의 의지를 가지고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는 이해를 통해서 온다. 죽을 때 까지 외워야 해요. 교회가 넣어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가톨릭입니다. 이해되었다고 은혜가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 없이 은혜라고 하는 것은 없고 있다면 이상한 것이다. 감정적이 된다.
하나님을 정의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왜. 정의하기 위해서는 비교가 되는 사물들이 어깨를 같이하고 있어야지 정의, definition이 가능해진다. 여자는 무엇인가. 남자와는 다른 존재로서 ..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야지 개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또, 휴가란 무엇인가 정의를 하려면 일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해서 휴가는 일이 아님을 이야기가 된다. 하나님과 어깨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definition이 불가능해요. 정의할 수 없다면 어려운 말로 서술적인 존재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다.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 오래 참으시는 분이다 자비로우신 분이다 이런 식으로 서술적 설명만 가능하다. 이런 서술방법을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성경은 순수한 영이시다. 성경은 정의를 내리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다에서 정의에 가까운 표현을 찾을 수 있다.
(1) 하나님은 순수한 영(靈)이시다.
이 말은 성경은 하나님에 관해 정의를 내리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대한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은 영이시다"에서 하나님에 관한 정의에 가장 가까운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영이시며 영의 완전한 관념에 속하는 모든 특질들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순수한 영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육체를 가지셨거나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는 개념을 부인한다.
노자 같은 경우 노장사상이 매우 유행인데 공자 같은 경우 신이라 이야기하지 않고 자연이라 이야기할 때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는데 그 도가 선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성격, 선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에서는 돈은 그런 게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선이 없다. 그거는 모두 그렇게 되면 선과 반대되는 것과 맞서서 '도' 속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도에서 배제되는 것이 있어서 도가 포함하지 못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재미있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엄청나게 인기를 모으는 것입니다. 사실은 삼위일체 교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
근데 이 하나님은 비인격인 힘이나 세력이 아니라 인격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들과 교제하실 수 있고 인간들이 의지할 수 있고 인간들의 생활 속에
(3)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하시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들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우주를 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무한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달팽이 두 개가 담장을 걸어가다가 부딪쳤다고 합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경찰이 와서 어떻게 사고가 났냐 했더니 굼벵이가 목격자이었는데 순식간에 일어나서 미쳐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 입니다. 인간이 너무 왜소하니까 산하나 보고 무한한 산맥이여 요만한 밭보고 무한한 대지여 라고 하는 것 입니다. 우주에서 보면 콩가루만도 안 되는 거잖아요. 무한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고전적인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과정철학 스피노자 책들이 각광받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이단이라고 판명 받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런 종류의 책들이 굉장히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마지막에 아바타에서 아바타가 쓰러지니까 에와라는 신한테 비니까 하얀 명주실 같은 게 내려와서 온 나무를 휘감고 사람들 속을 휘감는 것을 보셨죠. 이러한 사상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상대주의 인간과 신은 하나다 읽어내는 코드입니다. 교리반을 하면 문화 같은 것을 볼 때 어떤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비판하고 볼 수 있는 역량을 길러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올바로 잡아 주는 것이 교리입니다.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철학이고 기독교가 믿는 진리의 핵심입니다. 안 읽고 성경 10번 읽은 것보다 이걸 보고 성경 반쪽 읽는 것이 훨씬 더 그 사람을 유식하게 만들고 지혜롭게 만들어요. 교리교육을 받으면 상담 받을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이 해답을 다 알게 되니까. 미신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
(4) 하나님과 그의 완전성은 동일하시다
단순성(simplicity)이란 하나님의 근본적 특성 중 하나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질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시며, 그의 존재하심과 속성이 동일하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속성이란 속성은 부분이긴 하지만 그것 없이는 그 사물이 되지 못하는 성질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시며,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사랑이시며, 의로우신 분이심을 성경이 증거해주기 때문이다.
참 어려워요. 마지막 문단이. 하나님의 단순성에 관한 교리거든요. 아주 쉬운 예로 지난 번 공과가 빛으로 산다는 것이었죠. 빛이 굉장히 물리적인 사물이 아니라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사물이라고 얘기했죠. 왜냐하면 빛은 빛 자체를 우리가 볼 수 없어요. 빛이 안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빛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빛이 무엇엔가 비추어야지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빛이 비추어지는 매질이 없으면 빛을 볼 수가 없다. 그러면 이렇게 눈부시게 햇빛이 비추는데 식물도 자라나고 세균도 죽고 빨래가 마르고 햇빛이기 때문에 많은 여러 가지 현상들이 생겨나잖아요. 이것들이 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단순성이라고 하는데 설명할 수 없고 여기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비슷한 것을 이 속에서 갖다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 할 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어쩌고 저쩌고 케익을 만들어요. 근데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구성요소를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공의이신 동시에 자비이신 동시에 긍휼이신 동시에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A, B, C 처럼 이렇게, 시계처럼 구성요소가 가지고 있다면 각 부품들은 서로를 의존함으로써 하나의 완전함을 이루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선 당신 안에 있는 구성요소를 의지해야 해요. 그러면 완전한 하나님이라 말할 수가 없어요. 구성요소를 가지신 분이 아니시다. 그러면 외우세요 특별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인격적이시다, 무한히 완전하시다, 단순하시다.
5장 하나님의 명칭
그 다음에 하나님의 명칭입니다. 번역이 웃기죠. 하나님의 존함. 이름이라고 그래야 되겠죠. 하나님께서는 그 명칭들은 의미를 가지며, 사람과 사물의 본성을 밝혀주는 명칭들이다. 이런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붙이신 명칭에도 적용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명칭을 단수로 가끔 말하는데, 그런 경우에 그 명칭은 일반적으로 특별히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표명하는 칭호이며, 또는 단순히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하나의 일반적인 이름은 다면적 존재성을 표현해 주는 여러 개의 특수한 이름들로 나누인다. 이러한 이름들은 인간이 조작해낸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 주어진 명칭이다.
1. 구약에 나타난 명칭
그러면서 구약에 나타난 명칭, 엘, 엘로힘, 엘은 단수고 엘로힘은 복수에요. 엘과 엘로힘은 하나님이 강하고 능력이 있으신 분으로 마땅히 경외의 대상임을 지적해 주며, 엘욘은 숭고한 자 즉 숭배와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지고성을 지시해 주고, 아도나이는 항상 모든 인간의 소유주와 지배자인 주를 뜻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신학적으로 이렇게 있다.
샤다이는 전능하신, 엘 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이는 그 능력을 자기의 백성의 위안과 축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강조하신 명칭이다. 이 명칭은 하나님이 자연력을 지배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적에 이바지 하도록 역사하심을 말해준다. 유대인들에 의해 신성시되던 하나님의 가장 존엄한 명칭은 '야훼' 인데, 이 명칭은 하나님이 항상 동일하시며 특별히 그의 언약 관계에서 불변하시며 그의 약속 성취에 있어서 신실하심을 말해준다. 가끔 만군의 여호와라는 강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천군천사에 의해 둘러싸인 영광의 왕 되신 여호와를 묘사한 것이다.
2. 신약에 나타난 명칭
하나님(데오스)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가장 보편적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즉 개개인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개인적인 형태는 구약의 보편적인 명칭인 퀴리오스 이 명칭은 하나님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말하는 주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구약에서 주님 그러면 하나님을 뜻하는 거거든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는 것인데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지배하시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세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때부터 예수님은 주라고 불리신다.
그 다음 아버지, 이 명칭은 신약에서 새로운 명칭으로 소개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파테르 주기도문에 나오는 파테르에요. 아버지인데, 가족관계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아빠하고 아버지의 중간. 명칭 역시 이스라엘을 대하는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구약에서 사용되었다. 신약의 이 명칭은 모든 신자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지칭하므로 보다 개인적인 명칭이다. 어떤 때는 만물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지칭하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삼위의 제 일위를 지칭하기도 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 그 아버지는 본질로서의 아버지를 이야기할 때는 삼위일체 전체를 가리키고 위격으로서의 아버지를 가리킬 때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성부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나오는 아버지, 신약에서 나오는 아버지라는 말도 모두 똑같은 의미에서 사용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6장. 하나님의 속성
자,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할 때 속성은 하나님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특성 혹은 특질을 이야기 하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처럼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시는 어떤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시지 않기 때문에 존재의 양상이 특수해요. 항상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 인간을 생각하는 방식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자꾸 혼란에 빠지게 되요. 혹은 더 나은 사람들은 영, 영혼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데 헷갈리게 해요. 하나님은 제한이 없으시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계실 때 인간이나 영혼 모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과는 완전히 다른 초월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속성은 비공유적, 이 공유적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나누어 갖는 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도 있는 하나님의 특성은 공유적 속성이고 인간에게는 없고 하나님에게만 있는 인간은 안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공유적 속성, 절대적 속성, 혹은 독립적 속성이라고 불러요. 공유적 혹은 보편적 속성으로 구별되는데 이 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에게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나 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무한하시다. 이런 것은 인간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인간의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수준의 차이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닮은 부분이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속성을 나눠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1. 절대적 속성
(1) 하나님의 독립성, 자존성.
어렸을 때 맨날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이 집 누가 만들었어. 사람이 만들었지. 사람은 누가 만들었어. 하나님이 만드셨지. 하나님은 누가 만드셨어. 하나님은 누가 만드신 게 아니다. 질문의 끝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안계신 적이 없고 사라지시는 적이 없이 언제나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이 나오고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지탱되고 마지막에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에게 돌아가 버리는 것이 모든 피조물들의 운명이다. 특정한 공간과 시간 속에 태어나서 살다가 소멸하고 사라져요. 그것이 모든 하나님 이외에 피조물들의 운명이에요; 인간의 나이는 백세밖에 안되지만 별들의 나이는 70억 년쯤 되요. 인간의 나이는 7,80밖에 안되지만 거북이 같은 것은 1300년 정도 사는 것까지 있다고 하니까 기이한 것입니다. 나무는 3200년씩까지 살아있을 수도 있으니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죠. 열린교회 맨 처음에 할 때 야리야리 하던 자매들이 지금 권사님이 되었어요. 그때는 나도 30대였으니까 청년 같았죠. 세월이 흘러가면서 모두 흘러가요. 그때에 그 유치원 다니던 다음주에 결혼하는 것을 보면 세월이 얼마나 흘러갔는 지를 보죠. 여러분들도 금방 가요. 조금 있으면 권사님, 흰머리가 나셨네요. 아들은 어떻게 대학 들어가셨어요. 아직 나 시집도 못갔어. 그럴 수도 있죠. 바람 같이 지나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고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아가는 기쁨 속에 살다가 진짜 주님의 품 안에서 죽는 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하고 그러는데 그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에 몰두하니까 좋은지 나쁜지를 몰라. 어떻게 생각해보면 죽어도 이루어져야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 아는 것 이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몰라요. 무엇인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 올바른 것인가. 깊이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해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 첫째는 하나님의 독립성, 자존성. 줄치세요. 이 속성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가지시며 인간과는 달리 자신 외에 어느 곳에도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 독립적이시며 모든 덕과 행위에 있어 독립적이시므로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신다. 이 개념은 여호와라는 명칭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다음 성구에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 여호와라는 말이 사실 미스테리입니다. 여호와라는 것은 확실히 틀린 명칭입니다. 잘못 되었구요. 그냥 굳어져 버렸는데. 여호와.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이다. 이렇게 썼을 때 이스라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이 단어였어요. 이것은 후움이 아닐 경우 ,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된 이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감히 읽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성함을 함부로 못 부르듯이. 너희들이 이것을 읽을 때마다 이 단어를 생각하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이라 부르지 못하고 주님 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원래의 발음은 무엇이냐 이스라엘 사람이 하도 부르지 않아서 미스테리이다. 딱 일녀에 한번 불러준대요. 자녀들을 위해서. 그러고 나서 부모가 회개를 한 대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 우리는 망령되이에 강세를 두는데 그들은 일컫지 말라에 강세를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범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학자들이 추정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3인칭 남성 단수, 기본형입니다.
누구에게도 존재를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독립하는 아름다움이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하나님이시다.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아름다움. 의존미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것이 뭐라고 했어요?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 내가 결정하고 내 맘대로 하고 내가 싫으면 관두고 하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독립성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 하든 하나님을 따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의 잘못 모방하는 데서 와요. 근데 거기에서 오는 만족이 너무 커. 잘 들어보세요. 자 씩씩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셔. 하나님 혼자 가지셔야 할 독립성이야.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해야 해. 강단도 세고 아무도 무서운 사람이 없어. 짐승 같은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잖아요. 은혜를 받으면 의존적이 되는 거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내 맘대로 결정해도 되나? 하나님 나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 할 수 없습니다. 능력을 주세요. 힘을 주세요. 눈물까지 흘리면서 기도를 하는 거야. 의존적이 되는 거야.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거야. 또 사치를 생각해봐요. 사치란 것은 자기 능력으로는 안 되는 그 이상의 영화를 꿈꾸는 사치잖아요. 돈이 있으면 200만원 백을 들고 다닐 수 있겠지. 그 대신 한 달 수입이 1500만원이 되야 할 거 아냐. 15만원 버는 사람이 300만 원짜리 백을 사겠다고 할부를 끊고 도망다니는 거야. 그게 사치잖아요. 사치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것을 흉내내 보려는 거야. 하나님처럼 흉내내는 것. 또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사람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높으신 하나님을 잘못된 방식으로 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방탕이 뭐에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게 방탕이잖아요. 누구만이 그러실 수 있으세요? 올바로 본받으면 그런 식으로 본받는 게 아닌데,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잘못된 방식으로 따라하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른 방식으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행복과 불행이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책을 소개해주고 싶은 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입니다. 고백록에 보면 제 1장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2) 하나님의 불변성
그다음, 하나님의 불변성. 줄치세요. 성경은 불변하신분임을 가르쳐주신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무 활동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뜻하는 것인 아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오고가시며 숨기기도 하시며 나타내기도 하시는 분이다. 후회하시기도 하지만 이 말은 단지 하나님에 대해 인간적 화법으로 표현한 것뿐임으로 실제로는 인간 편에서의 변화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것을 뭐라 하냐고 하면 '아코모 다치오' 라고 해요. 영어로 accommodation이라고 해요. 영국에서는 여인숙이라는 뜻도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적응'입니다. 아이에게 무엇을 설명해줘요. 우리가 쓰는 어려운 말로 하면 못 알아들어. 친구 사이에 좋게 지내는 것이 무엇이냐면 아이에게 설명해줄 때 아이의 눈높이에서 설명해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편에서의 설명과 인간 편에서의 설명이 서로 교차하면서 쓰인 책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셔요 안하셔요? 시험을 안 하신다. 그러면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시험하사, 내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교차하는 것. 우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죠. 예를 들면 제가 여러분에게 돈을 500만원을 맡겼어요. 근데 1시간 만에 와서 달라 하면 시험이 안돼요. 근데 연락도 없이 안와. 꽤 많은 돈인데 기다렸는데도 안와요. 그것을 가지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조금씩 썼어요. 어느 날 와서 돈을 달라고 해요. 시험이 돼요 안돼요? 원래 그러면 안돼는 거잖아요. 이삭을 누가 주셨어요.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자기가 애 낳을 생각도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달라고 했을 때 줘야하는데, 시험이 된 것은 사람의 편에서 아브라함 편에서 시험이 되니까. 해가 어디로 떠서 어디로 져요? 그런데도 우리는 두 가지 표현을 다 쓰잖아요. 하나는 본질적인 관점이고 하나는 현상적인 관점입니다. 두 가지가 서로 교차하면서 사물들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들이 성경에서 교차하기 때문에 하나를 해석할 때 또 다른 관점에서 쓰인 다른 성경들을 고려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해요. 이것이 바로 교리를 배우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3) 하나님의 무한성
그 다음에 하나님의 무한성 첫째, 이 무한성이라고 하는 것은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다.
a. 절대적 완전성
우선 절대적 완전성, 이것은 존재와 관련시켜 하나님의 무오성을 생각할 때 절대적 완전성이라고 한다. 지식과 지혜 선과 사랑 의 거룩하심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b. 영원성
하나님의 무한성을 시간과 관련시켜 말할 때, 하나님의 영원성이라 부른다. 영원이라는 성경에서 항상 끝없는 기간으로 표현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심으로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과거 미래는 없고 영원히 현재만 있을 뿐이다. 여러분, 그 운동한 사람과 운동안한 사람은 틀리거든요. 정신에도 근육이 있어서 쉬운 책만 읽은 사람들은 운동안한 사람과 같이 퍼진 사람이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것입니다. 지성에 근육이 안 된 것입니다. 주기도문 정도의 책은 조금만 집중하면 볼 수 잇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때 100퍼센트 이해되는 책만 읽으면 안되고 머리가 아파서 이해가 잘 안 되서 자신에게 실망이 되는 책들을 읽어야 해요. 30프로도 이해 안 되는 칸트나 헤겔 같은 책이 아니라 80프로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읽어야 한다. 정신의 근육이 생겨나게 된다. 어쨌든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을 길게 연장시키신 분이 아니라 뛰어나신 분입니다. 지금은 다 없어져 버렸지만 옛날에 태백산맥이 있었잖아요. 99굽이라고 하잖아요. 거기를 가면서 진짜 몇 개의 커브인지 세어봤더니 77개 더라구요.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에 계신 분입니다. 대개 타임(=0)에서 어떤 사건이 생겼어요. 그러면 시간이 좀 흐른 t=1에서 이런 사건이 생기고 t=2에서, t=-1에서, t=-2에서 생긴 사건들을 연결해서 인간의 기억에 들어올 때는, 원인과 결과이 관계만 남는 것입니다. 하루 전에 기억한 것은 금방 기억이 나고 10년 전에 일어난 것은 컴퓨터 작동하듯이 30분 있어야 겨우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제 일어난 일도 잊어버렸는데 10년 전에 일어난 일이 너무 자신에게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 때의 기분과 발표장의 풍경이 그대로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억 속에 들어오면 시간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a의 방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b의 방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도 뭔가 미래에 대한 무지가 있는 방식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안다고 설명하면 안 된다. 결정된 것을 알고 계신 것밖에 없다고 하면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 은혜 받아서 열심히 주님 사랑해, 하나님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우리를 아시기도 하시고 그렇지만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기 때문에 시간의 과정을 통해 알지만 하나님은 모르는 것 없이 우리를 시간 안에서 아시는 것처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에 대한 계획이 모두 세워져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근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느끼셨다는 건데 하나님일 수가 없잖아요. 모자라서 하나님일 수 없고 추가적으로 느꼈다면 있어야 되는 건데 원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일 수가 없잖아요. 시간을 초월한 방식으로 기억 속에 무슨 사건들의 상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그렇게 알고 계신다. 어떤 사람들은 다 하나님이 작정하셔서 인형극할 때 움직이는 것 아니냐. 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해놓으셨음에도 인간을 완전히 자유로운데 결국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이 인간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간단하게 답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신학자들이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공부했겠어요? 인간의 이성으로 뻔히 다 알 수 있는 것을 가르친다면 기독교라면 무슨 신비한 종교이겠어요. 하나의 사상, 철학 강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쉬운 교리를 통해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어려운 교리를 통해서 우리의 지성을 연단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유명한 일화로 어거스틴이 삼위일체를 막 쓰는데, 바닷가에 갔는데 요만한 소녀가 웅덩이를 파놓고 조개껍질을 붓더래요. 이 바닷물을 웅덩이 담기게 하려고 했다고. 인간의 이성이 열심히 사용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모두 발견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하다. 그 믿음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믿음이다.
(4) 단일성(단순성)
그 다음에 하나님의 단일성, 단순성. 하나님의 단순성이란 하나님께서 영과 육으로 형성된 것처럼 여러 부분의 성질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므로 나누어지시지 않는 분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삼위란 말이 하나님의 본체가 여러 본질로 구성된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존재는 위에 종속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속성이 하나요, 생명 빛 사랑 의로우시며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인격이 몇 개일까요? 3이다. 하나님의 인격은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일체를 몸이 하나이고 세 개가 머리처럼 나온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체는 하나님의 본질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신적본질.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하시지만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인격을 가지고 계시다 할 때 우리처럼 서로 독립된 인격이 아니라 인격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독립자로서의 인격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교통하실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인격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관계적인 인격이다.
2. 보편적 속성 혹은 공유적 속성, 혹은 의존적 속성
보편적 속성은 인간에게도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 속성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는 속성은 유한하며 하나님의 무한하고 완전한 속성에 비할 때 불완전한 속성이라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을 아시며 가능성이 있는 일과 현재 있는 일을 다 아시는 완전성이라 정의할 수 있다. 가능성이 있는 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고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알고 계시고 현재 있는 일을 아는 것. 하나님은 이 지식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외부로부터 이 지식을 얻어 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학습하는 분이 아니다. 성경에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 아코모다치오. 인간으로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겨우 아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학습의 문제가 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 알려드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처럼 우리가 아룀으로써 그 과정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에 헌신하게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하며 그 지성 안에 현존하신다. 포괄적이며 전지라고 칭한다. 과거, 현재, 미래에 모든 것을 아시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 뿐아니라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신다.
(2)지혜
하나님의 지혜는 지식의 독특한 한 국면이다. 지혜는 최고의 가치 있는 목적을 설정하시고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 최선의 방법을 택하시므로 자신의 지식을 나타내시는 그의 덕행이다. 하나님이 다 이용하셔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다. 지식을 구슬이라면 지혜는 구슬을 꿰는 실과 같아요. 원리와 같다. 지식이 많아도 지혜가 없는 사람이 잇고 지혜가 있어도 지식이 좀 부족한 사람이 있어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 중에 몰지혜한 사람이 그런 경우다.
(3) 선
하나님은 그 자신이 선이시다. 완전히 거룩한 선이시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하려는 것은 선이 아니다. 여기서 생각하려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선, 곧 타자에 대한 선행에서 나타내는 선을 언급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이란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을 친절하고 관대하게 취급하도록 자극시키시는 신적인 완전성을 말한다. 그래ㅓ 하나님의 선, 그것은 하나님이 선이셔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적이신 것은 인간의 행복입니다. 왜? 그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존재하시는 목적과 모든 피조물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이 일치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만을 위해 일하면 일할수록 인간은 더 하나님 자신의 행복으로 돌아가게 되죠. 그런 점에서 인간은 사랑에 관한 새로운 교훈을 받게 되죠. 어거스틴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이기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거야. 인간이 이기적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맞짱을 서야 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이기기 때문에 인간이 불행하게 되요. 드라마에서 나오는 모든 불행한 결과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은 것으로 들어난 것 아니에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갈 때 그 안에서 하나님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랑을 받음으로써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애라고 가르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자. 자기에게 주는 선물 자신에게 주는 휴가 자신에게 바치는 서프라이즈. 모두 잘못 된 것입니다.
(4)하나님의 사랑
이 속성은 하나님의 가장 중심적인 속성이라 불리는데, 과연 다른 완전성보다 더 중심적인 속성으로 간주해야 할지 의문이다. 하나님은 이 사랑의 속성에 의해 완전성과 자기 형상의 반영체인 인간을 즐거워하신다. 이 속성은 몇 가지 관점에서 고찰된다. 사랑은 이제 우리 교회에서 많이 배우는데 형이상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지속하거나 돈독히 하려는 성향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이 먼저 줄을 긋는 거야. 한번 안면을 까면 절대 안보는 사람이야 라고 자랑하는 사람은 용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은 관계를 맺는 속성이에요 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관계를 맺는 영혼의 힘이야. 사랑이 많은 사람들은 항상 주변에 사람들이 많고 한번 슬쩍 맺은 인연이 점점 굵어져요. 아주 든든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 사랑은 몇 가지 관점이 고찰되는데
a. 은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 나타내는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른다.
b. 자비 긍휼은 죄의 결과를 짊어진 자들의 비참을 제거하시려는 은혜
c.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교훈과 경고에 무관심한 죄인들을 용서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관용이라고 한다.
(5) 거룩하심
하나님의 거룩성이란 모든 피조물과 절대적으로 구별되시며 무한한 존엄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초월하시는 신적완전성이라 할 수 있다. 거룩성은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위에 비교될 수 없는 존재로서 온 땅과 만물위에 탁월하게 높고 뛰어나신 분이시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거룩성입니다. 거룩성이란 한 국면입니다. 그런 거룩성을 느낄 때는 그 하나님의 높으심을 생각할 때 아주 티끌같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도덕적 완전성은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무한히 완전하셔요. 하나님에게도 사랑이 있고 내게도 사랑이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는 내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지.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고 보면 자기 사랑은 너무 추하고 더러워서 차마 하나님 앞에 내가 사랑하과 있음을 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도덕적 완전성을 의식하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요. 존재에 있어 티끌만하고 아주 비천한 존재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생각 될 때 하나님께 도움을 처할 수밖에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한 결과는 두 가지인데 하나님께 대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묶어서 삐에따스 경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경건해지는 비결이다.
(6) 의
의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성에 위배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보전하시는 신적 완전성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 의에 의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시고 법을 인간에게 부과시키고 순종하는 자에게 보상하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벌하신다. 상주시는 의는 사랑의 표현이고 벌주시는 의는 진노의 표현이다.
(7)하나님의 진실성
진실성이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있어 참되시며 계시에 있어 참되시며 관계에 있어 참되시는 신적 완전성이다. 우상과는 다른 참신이며 존재하는 사물의 실상을 그대ㅗㄹ 아시며 약속을 이행하심에 있어 신실하시다. 이런 속성을 하나님의 신실성이라 한다. 하나님의 진실성이 약속과 관련 되어서 언급될 때 신실성이라 한다. 그런 것을 알면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진실성과 관련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8)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은 두 가지에서 고찰된다. 의지는 만물의 궁극적 원인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그렇게 하게 하시거나 되도록 허락하시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을 다 선한 것으로 해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보건소로 데려가서 주사 바늘로 찌르는데, 볼귀를 때리며 맞으라고 하는데 왜 이런 악한 일을 하는지 아이는 모르는 것입니다. 질병에 걸리지 않고 보호될 수 있으니까. 이것을 맞으면 바이러스가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하나님의 의지는 두 가지 견지(주권적 의지와 주권적 능력)에서 고찰되어 질 수 있다. 첫째로 주권적 의지는 감추어진 의지와 계시된 의지로 되어있다. 먼저 감추어진 의지란 하나님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섭리의 의지이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가야 알 수 있다. 다른 교회 갈 때도 많은 데 이상하게 이리로 보내셨다. 왜 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몇 년 있다가 좋은 형제 만나 자매 만나 결혼하면 저 형제 만나려고 여기 보내셨구나. 다음으로 계시된 의지란 율법과 복음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다. 피조물과 관계된 하나님의 의지는 절대적으로 자율적이다. 하나님에게는 필연이라는 것을 누군가가 하나님에게 강요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유로우신 분이다. 인간의 죄 된 행위까지도 주권적인 의지에 달려 있다. 죄를 만든 것은 아니다. 은혜가 모자라서 인간이 죄를 지은 거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다. 40년 전만 해도 살다가 괴로우면 먹고 죽는 독약이 있었는데 간수라는 액체가 있는데. 농축된 소금물이다. 이 간수가 없으면 두부가 안 돼. 우황청심환은 극약이 들어간다. 독과 약은 뒤에서 만난다. 독을 잘 다스리면 약이 된다. 영양을 잘못 다스리면 독이 된다.
둘째, 전능(주권적 능력)이란 하나님의 의지를 집행하시는 능력을 말한다. 전능하시다 함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가르쳐 준다. 거짓말 할 수 없고 죄지을 수 없다. 성취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고 무엇에든지 그의 뜻을 따라 수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원하시면 못한다는 것이 능력이 모자라서 모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 술 많이 마실 수 있어. 그런데 난 안 마셔. 오래 전에 끊어서 못 먹어. 누가 더 완성도가 높아요? 전자가 그래요. 왜요? 나 세상에 너무 나가고 싶은데 하나님 봐서 참는 거야. 주일만 되면 아무데도 가고 싶은 데가 없어. 갈 수가 없어. 하나님의 집이 제일 좋아. 전자, 후자 중에 누가 더 높은 덕에 도달한 사람이에요? 하나님 못하신 게 잇다하면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이 세모난 동그라미를 만드실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 그거는 하얀 까만색을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랑 같다. 못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만약 만들었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겠어요? 칼빈은 다 쓸데없는 질문이라 한다. 자 그러면 오늘 많이 했습니다. 삼위일체는 공부 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