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영광교회 집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녹취자: 백지영
시편23편은 아시다시피 다윗의 시입니다. 23편 전체는 세 토막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토막은 1절이고 여기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신다는 총론적인 고백을 합니다. 둘째 토막은 2절부터 5절까지인데 왜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목자가 되실 수밖에 없는지를 2절부터 차례대로 5절까지 서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5절에서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가슴 벅찬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섬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고백입니다. 6절은 마지막 세 번째 토막이고,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5절은 시편23편 가운데 백미에 해당되는 구절입니다. 즉, 하늘로 불꽃을 폭죽을 쏘아 올렸을 때에 실 같은 빛줄기를 그리며 하늘로 올라가던 폭죽은 정상 끝에 다 달아서 팍하고 폭발을 일으키면서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 불빛들을 찬란하게 밤하늘에 토해놓는 것 같은 바로 그 지점이 시편 23편 5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딱 한번밖에 없기 때문에 그 중에서 가장 백미가 되는 이 5절을 오늘 주님이 인도해 주시는 것만큼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는 먼저 말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잔치집의 문맥입니다. 잔치 집에서 신랑 신부의 친구들과 친지들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좋은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주인이 가득 가득 따라줄 때에 그 풍성함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 속에서 잔을 맞부딪치는 그런 장면이란 말씀 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말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이 시편 23편은 문학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탁월한 작품입니다. 특별히 이 23편을 우리말 성경이 아니라 원래 쓰여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으면 그 감동이 배가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그 자체가 산문을 쓰기에 적합한 언어가 아니라 시와 노래를 쓰기에 적합한 언어이기 때문에 그림같이 풍부한 일러스트레이션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시인에게 채워주신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유열과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구약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시편 23편의 저작연대에 대한 논란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작품이 비교적 초기에 쓰여 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이 시편 23편의 저작연대를 훨씬 후로 봅니다. 저는 거의 인생의 말년에 쓰여 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에서 단지 목가적인 분위기에서 양을 치는 목동의 시야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고난의 계곡을 넘나들었던 그 인생에 대한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나오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라는 것은 두 개의 원형과 아날로지(analogy)가 겹치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어렸을 때에 양을 치면서 죽음의 위협이 있는 계곡을 양떼를 몰고 여행했던 경험을 자기의 인생의 말년에 수많은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서 고난을 겪은 그 실제적인 삶의 경험을 투사시켜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특별히 ‘원수의 목전에서’라고 하는 이런 표현은 히브리어로 보면 매우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생에서 모든 괴로움을 맛본 말년에 그 피를 말리는 것 같은 그 시련을 다 겪은 후에 마지막 이제 인생의 석양빛을 받으면서 쓴 시라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잔’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일차적으로는 잔치 집에서 맞부딪치는 포도주가 잔뜩 부어진 그러한 잔이겠지만 결국 이것은 인간의 심령 안에 있는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그러한 빈 잔과 같은 영혼의 목마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우리들이 우울하고 불행한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때에 행복하기를 원했던 같은 방식으로 행복을 얻기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예전에는 나 혼자 그것을 찾았는데 요즘은 주님을 의지해서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이 협조를 안 해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행복하기를 원한다고 했어요. 그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행복이 무엇을 위한, 어떻게 얻어지는 행복이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나는 이 세상에서 나를 기쁘게 함으로 행복해 지기를 원했던 사람이라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믿은 다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그 안에서 나를 행복하게 하려는 그런 사람으로 인생관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 믿기 전에 나는 행복이 생애 최고의 가치였지만,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는 거룩해 지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실제에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은 예수 믿기 전과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 예수 믿기 전에는 내 방법대로 살고 하나님 원망하면서 살고 해도 그래도 내 갈 길로 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손에 꽉 붙들려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곤고하고 괴로워져서 도저히 옛날의 삶을 반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찾는데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할 때 그 기쁨과 행복은 아무리 누리고 누려도 다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다 사용을 해도 그것은 고갈되지 않는 원천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결국은 공정하게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누구이든지 찬란한 진리의 빛에서 떠나기만 하면 그는 부당하게도 자기 자신의 존재를 공정하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가 누구든지 눈부신 진리의 빛에서 떠나면 그는 자기의 영혼은 제외하고 육신만을 편벽되이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육신에 흐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성공주의적이고 번영주의적인 복음은 복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최근에 짐 베커라고 하는 미국의 목회자가 책을 냈어요. 책 이름이 'I was wrong.'이라는 책입니다. '나는 틀렸었다.' 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에 미국에서 잘 나가는 텔레벤젤리스트였어요. 텔레비전에 나와서 설교하면서 복음 전도하는 사람을 미국에서는 텔레벤젤리스트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잘 나갔고요, 그리고 얼마나 설교를 잘했는지 설교 끝나면 사람들이 펑펑 울고 양복장에 가서 헌금으로 수표를 긁고 잠이 들었대요. 이 사람이 외친 복음이 성공주의 복음이었어요. 너희들이 가난하고 못 사는 것은 예수를 똑바로 안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잘 믿으면 라디오 사이클을 맞추는 것같이 딱 맞추면 복이 확 쏟아진다고 하는 그러한 복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건강한 사역을 하지 못했어요. 결국은 그는 도덕적인 추문에 휘말리면서 하차를 했고, 한순간에 모든 명예와 존경을 상실했는데 그것은 그가 잃어버린 것 중 가장 작은 것에 불과했어요. 그 후에 자녀들은 마약 중독자가 되고, 그는 자기의 소송을 감당하기 위해서 2천만 불이나 되는 천문학적인 소송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모든 재산을 날리고 그리고 감옥 속에 들어가서 25년 선고를 받았어요. 후에 횡령부분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어서 4년 9개월 동안을 감옥에서 살았어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는 감옥 속에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대요. 그리고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이 돈과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것으로 말씀하신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거기서 발견한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 책 이름이 ‘I was wrong.’ 나는 틀렸었다. 복음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잘 살고 못 사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한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여러분 모두 뛰어나게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든지,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성공한 사람의 간증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의 관심은 여러분이 어떤 양상의 삶을 살든지 간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끔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경이 여러분에게 가지고 있는 관심사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라는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열렬히 갈망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없이 몸부림치며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인간인데도, 그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 아니면 도저히 채워질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마음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도 그 잔은 이 세상에 있는 지상의 자원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잔입니다. 그 잔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의 하늘 자원으로서만 채워질 수 있도록 만들어 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잠시 마취 상태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잠깐일 뿐이고 결코 그것이 목마름에 대한 해답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이나 20년 전의 일입니다. 강북에 가면 수유동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습니다. 옛날에 수유리였습니다. 거기에 의사가 당직을 서고 있는데 갑자기 택시에 실려서 사람들이 환자를 하나 데리고 온 것입니다. 갑자기 쓰러졌는데 심장마비 같으니까 봐 달라고 그래가지고 데리고 가서 눕혀 놓고 보니까 이미 벌써 소생 가능성이 없어요.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을 냉장실에다가 넣고 가족들을 부르라고 했어요. 먼 데 사는 가족들인지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헐레벌떡 가족들이 와서 펑펑 울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의사는 가족들은 울어도 죽은 시체를 들여 다 보는 데 의사생활을 그렇게 오래 하면서 살았는데 이렇게 죽은 시체는 처음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 손을 오므리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손을 피고 죽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하지 않습니까? 손을 피고 아무 것도 없이 죽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한 손은 쥐고 한 손을 피고 죽었어요. 자기가 의사생활을 그렇게 오래했는데 이런 시체는 처음 본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우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이 손에 뭐가 들어있을까 너무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하나씩 폈어요. 투두둑 하고 화투 2장이 떨어졌는데 보니까 화투를 뒤집어 보는 데 의사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삼팔광땡입니다. 그래서 사연이 뭔가 하고 들어보았더니 장사 집에 가서 밤새도록 화투를 친 것입니다. 저는 사실은 화투를 못합니다. 민화투를 했었는데 기억이 날려는지 나겠지요. 쳐본 기억이 없어요. 이 사람이 화투를 쳐서 돈 내기를 한 것입니다. 순진해서 화투쳐본 지체들한테 삼팔광땡이 그것이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화투를 5장이나 2장씩 나누어 갖고 패를 쓴데요. 그것을 랭킹을 위서부터 정해 놓는데요. 그래서 처음에 화투를 나누어 주면서 배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세 번까지 할 수 있데요. 그러면 나는 안 할래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배팅을 하고 끝까지 하는 사람이 세 사람이고 마지막에 자기 패를 다 펼쳐서 가장 높은 랭킹을 가진 사람이 그 돈을 다 가지고 가는 것인데, 똑같은 것이 2개가 나오면 땡인데 이때는 자기 낸 배팅한 액수의 정하기 따라 틀린데 한 배를 더 내야 된데요. 그럼 삼팔광땡이면 세배, 정하기 따라서는 다섯 배까지 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배팅을 내가 2만원을 했다고 하면 2만원을 해서 판돈이 20만원이 됐다고 그러면 만약에 삼팔광땡이 되면 60만원이나 100만원을 한꺼번에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화투를 쳐서 돈을 잃었어요. 그러다 나중에 마지막에 딱 붙잡았는데 사람들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화투를 들여다 보다가 벌벌 떨다가 탁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얘기를 들으면 웃지만 화투 2장을 들고 벌벌 떨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나 그것 보다 좀 더 큰 화투 집문서, 땅문서, 박사학위 이런 것 하나 들고 덜덜 떨다가 죽은 사람하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동양화이고 하나는 글씨라는 차이지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데서 행복을 찾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아무튼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2절서부터 5절까지 상세하게 고백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살아온 인생의 길에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격으로 지금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찼기 때문에, 더 이상 부을 데가 없을 정도로 충만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충일해진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참된 행복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때문에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든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어야 해요. 하나님이 아닌 곳에서 만약에 기쁨을 맛보고 있다면 영혼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이 하나님에게서 말미암아야지 그것이 참된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조카가 하나 있는데 대학을 다녀요. 신앙이 별로 없었는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렇게 은혜를 받고 아이가 회심을 했어요. 하루는 집에 와서 그러더래요. “아빠 아빠, 나는 요즘 너무 행복해. 어떤 때는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은지 정말 죄송할 때가 있어요.” 그 행복이 어디서 오는 것이겠어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참된 행복,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즐거운 삶의 분깃입니다. 우리들이 늘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이 우리의 행복의 원천이 될 때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 주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 주고, 그리고 자기를 온전히 버림으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그런 이타적인 삶을 살아서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과연 이러한 눈부신 기쁨, 가슴 시려울 정도의 감동, 아무리 많이 행복을 느껴도 후회하거나 하나님께 죄송스럽지 않은 그 완전한 기쁨 이런 것들을 여러분이 맛보고 있습니까? 이미 우리 신앙에 있어서 희열, 환희, 그리고 가슴 시려운 감동 이런 것들은 성경에나 기록되어 있고 실제의 삶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고전적인 단어처럼 느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가 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시인이 이렇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어떻게 보면 극한 표현을 쓰면서 터질 것 같은 자신의 행복한 감정을 토로하였다면, 분명히 그 앞에는 자신이 그렇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유열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는 이 찬란한 기쁨의 이유와 근거는 저 멀리 2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가까이는 5절속에 결정적으로 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찬란한 기쁨 속에서 살게 하는 최종적인 원인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주 논리적인 책입니다. 시인은 아무렇게나 횡설수설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가장 찬란한 기쁨의 궁극적인 근본적인 원인을 제일 뒤에다 두면서 그는 감동적으로 이 일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상’이 무엇일까요? 의외로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상’을 학교에서 주는 졸업식 때 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주께서 내게 상장을 주시고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상’이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슐한이라고 하는데 이 슐한은 상 중에서도 밥 먹는 식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식탁은 전통적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서 먹는 높은 식탁이 아니라 소파에 티 탁자같이 그렇게 야트막한 그리고 넓은 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옆에서 비스듬하게 기대어서 그래서 식탁의 음식을 집어 먹는 그러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습관이었어요. 그래서 이 말을 번역하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한 밥상을 베푸시고” 그런 뜻입니다. 밥상을 하나님이 베풀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구약성경 그리고 신약성경에까지 나오는 식사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관계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이 식사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함께 형제가 되고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연세 드신 분은 아마 기억을 할 것입니다. 양반이 길을 가다가 상황이 도저히 어쩔 수 없으면 상민들과 같은 주막집에서 잠은 잘 수 있어요. 그런데 밥은 같이 먹는 법이 없어요. 연세 드신 분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옛날에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집안에서는 한 20명씩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저희 할아버지 때에도 보면 많이 있을 때 38명이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하니까 엄청나지요. 그러면 모든 식구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둘러앉아서 밥을 먹느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밥을 함께 먹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냐? 아니지요. 대청마루 같은 데 상 펴놓으면 모두 둘러앉아서 먹을 수 있고 또 집을 지을 때 집을 그렇게 지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상이 최소한 네 군데 차려집니다. 제일 첫 번째 차려지는 상은 안방에 차려지는 상입니다. 거기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들어가요. 어머니도 거기 못 들어가요.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정도 들어가요. 그리고 거기 깍두기로 손자는 들어갈 수 있어요. 거기는 상의 크기도 틀리고 반찬 자체가 격이 달라요. 그리고 그 다음에 건넌방으로 건너와서 우리 엄마, 나, 고모, 그리고 삼촌 하고 해서 밥을 먹어요. 그리고 여기에 내 아내도 못 들어와요. 내 아내는 부엌이나 또 다른 방에서 동서들과 함께 밥을 먹어요. 그리고 그 집안에서 일하는 노비들은 마당에다 멍석을 깔고 거기서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머니가 들어가시고 우리 집사람을 남겨 놓고 내가 그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가도 똑같이 엄격하게 그 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집안의 위계의 질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식사 신앙도 이러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어요.
선교 역사를 연구하던 어느 교수님하고 나누던 이야기입니다. 초창기 중국선교를 나갔던 사람들은 문화를 잘 몰라서 순교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예를 드는데, 지금도 중국에는 말이 굉장히 많아요. 민족이 56개 민족이니까 중국어로 어느 정도 통일되어 있지만 사투리도 심하고 굉장하지요. 선교사가 선교를 갑니다. 지금은 세계화가 되었기 때문에 각 족속들에 대한 정보들이 많고 교통이 발달하고 통신이 발전했기 때문에 정보들이 다 공유가 되잖아요? 옛날에는 그렇지 않고 가보지도 못하고 선교지 말만 듣고 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선교지를 가요. 그럼 말이 안 통하니까 손짓 발짓하면서 의사소통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고 그 동네에 살면서 5년 내지 6년 정도를 살면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아도 그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언어가 습득이 된데요. 그러면 언어가 습득이 되면 글자를 만들어 주고 철자를 만들어서 말하자면 그 나라 글씨를 만들어 주고 해서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있어요. 그런데 이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손짓 발짓을 하면서 먼 나라에서 왔는데 우린 여기 장사를 하고 그러려고 온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좋아서 여기에 왔으니까 당신들과 살고 싶다. 우리를 한 식구로 받아 달라. 그래서 의사소통이 되었어요.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몇 사람이 모이더니 한참 시간이 지나니까 말하자면 여기저기서 수염이 긴 노인네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촌장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 회당에 모여서 장시간의 토론이 끝나고 그리고 누군가가 밖에 나와서 활짝 웃으면서 맞이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 우리가 너를 여기에 살아도 괜찮다고 받아주었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쁘게 환영을 한 다음에 뒤따르는 순서가 있는데 항상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형제 됨의 서약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의 문화는 서양의 문화가 아니라 동양의 문화거든요. 그래서 가서 같이 밥을 먹는데 알다시피 중국은 날아다니는 것 중에는 비행기 빼고, 그리고 다리 달린 것 중에서는 책상 빼고, 물속에 있는 것 중에서는 잠수함을 제외하고 모두 먹어요. 그러니까 올라오는 메뉴의 소재가 서구사회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몬도가네 식품입니다. 전갈, 뱀, 지금도 만주에 가면 잔치 때 꼭 먹어야 되는 요리가 있는데 뱀 국이래요. 그래서 우리는 처자들이 나이가 들고 아직 시집을 못가면 넌 언제나 국수를 먹냐 그리고 이야기하지만 거기서는 저 녀석들 뱀국을 먹어야 되는데 그러는 것입니다. 뱀도 작은 뱀이 아니라 큰 구렁이를 동태처럼 토막을 내서 무를 집어넣고 야채를 넣고 가마솥에다가 푹 끓여서 그것을 한 그릇씩 넉넉하게 떠서 먹으면서 결혼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것을 어떻게 먹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보는 그 순간 왁 하고 토할 것 같으니까, 또 서양 사람들은 솔직 담백하지 않습니까? 자기의견이 분명하잖아요? “저는 이런 것 먹지 않습니다.” 하고 딱 잘라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갑자기 화기애애하던 분위가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지기 시작하면서 안색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고함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끌려가서 처단을 당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왜냐하면, 너는 여기 와서 살고 싶다고 그런다 이거야. 그래서 우리가 고민하다가 그러면 우리 같이 형제로서 우애를 누리면서 피부 색깔은 다르지만 같이 살자. 그래서 너희들이 좋다고 해서 그러면 이제 우리는 형제된 거다 그래서 음식을 내 왔다 이거야 그런데 이것은 싫다고 밀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난 여기서 살고는 싶지만 형제가 되고는 싶지는 않다, 너희와 한 동아리일 수는 없다 그 뜻입니다. 그러면 스파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잖아요? 스파이이지. 그러니까 그렇게 식탁을 함께 나누지 않으면서도 이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겠다고 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도전으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집에서 식사를 정중하게 초대했을 때 거절하는 것은 관계에 대한 중대한 위협입니다. 얕잡아 보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밥을 사 주는 정도가 아니라 집에서 차릴 것인데 “오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 원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할 때 나 바빠서 그런데 못 간다 하는 것은 얕잡아 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를 성경이 그대로 반영을 합니다. 밤새도록 해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증거가 많은데 몇 개만 해 보겠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죽도록 고생해서 사기를 당하지요. 그러다 쪽박이나 차고 빌어먹을 처지였는데 하나님이 놀랍게 지혜를 주셔서 그래서 그가 거부가 되어서 도망을 나옵니다. 그때 라반이 자식들을 보내서 추격을 해서 결국은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지요? 죽여 버리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하나님이 하지 말라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딱 만난 다음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태도를 바꾸면서 내가 네가 간다고 하면 열렬히 환송식을 해줄 텐데 왜 이렇게 도망하듯이 가냐 하면서 서로 우의를 돈독히 하고 거기에다가 ‘여갈사하두다’라고 하는 돌무더기를 쌓으면서 이제 이것을 넘어서서 너희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하고 그들이 마지막에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거기서 음식을 나누는 일이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묶으시는 놀라운 방법이 만나였어요. 그리고 또 화목제를 함께 나누는 것이었어요. 제물을 나누는 것이었어요. 이런 사상은 신약으로도 넘어와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비난을 당하셨던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너희 선생님은 왜 그렇게 죄인들과 세리들과 더불어서 먹고 마시시느냐 그것이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의 랍비나 종교지도자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처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말종 같은 사람들 하고 함께 식탁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된다고 하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셨던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잡수시는 것이었어요. 마지막에는 부활하신 후에도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거기서도 식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십자가라는 무거운 사명을 앞두고도 마지막 하신 일은 제자들과 함께 잡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벳세다의 광야에서도 또 잡수셨어요. 먹는 것들을 나누어 주셨어요. 그래서 이 밀, 식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종교지도자, 최소한 랍비이면서 너희 선생은 어떻게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실 수가 있느냐 비난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전혀 엉뚱한 대답이었어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나니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것이 답이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죄인을 회개시키는데 당신은 하늘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면서 시궁창 같은 데 있는 죄인들 보고 “야, 이 자식아 똑바로 해 거기서 나와. 계속 안 그러면 죽여 버릴 거야.” 이런 식으로 지적을 해서 죄인을 거기서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죄를 짓지는 않으셨지만 친히 죄인처럼 생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죄인들이 시궁창처럼 구루고 사는 그 삶의 현장에 성육신 하셔서 그래서 그들의 그 순결하신 예수 그리스도, 더러운 죄인인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존재적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과 식사를 나누심으로 당신 자신이 그들 안에 한 형제요, 가족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다? 왜 그러면 그렇게 뛰어나시고 거룩하시고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그런 인간 말종 같은 사람들에게 한 가족인 것처럼 내려 오셔서 먹고 마시시기까지 하시며 일체를 이루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하셨을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당신을 멀리 떠났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돌아올 수 없는 인간들을 당신의 품에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사랑이었어요. 그 이외에는 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던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그 새벽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회초리를 들고 찾아오신 것도 아니고 떡을 들고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숯불에 구우시면서 기다리셨어요.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이 물음을 물으시기 전에 먼저 떡과 생선을 구어서 친히 먹여주시면서 관계를 가지셨어요. 그것이 무슨 뜻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부인했지? 너희들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갔고 미리 돌아온 요한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를 버렸지? 특별히 시몬 너는 나를 저주하기까지 맹세하면서 나를 부인했었지? 그러나 너의 그러한 죄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버렸으나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았다. 떡을 떼어주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족이란다 그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물으신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러면서 베드로가 거기에서 깊이 무릎을 꿇으면서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어요?
(찬양)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겨줄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나의 양떼를 부탁한다.
양을 사랑하느냐? 목회의 소명을 사랑하느냐? 교회를 네 몸처럼 사랑할래? 사명을 네 몸처럼 사랑할래? 물어보시지 않았어요. 오직 하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이었어요. 그것이 음식을 나누는 가족관계 안에서 확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시록까지 달려갑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세상 즐거움에 빠져서 복음의 원래의 축복을 잃어버린 그런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라오디기아 교회, 그 교회에 주님은 없었어요. 교회의 주인이신 그분이 교회 바깥에서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문밖으로 보내버리고 영적으로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그 교회가 어느 한 순간에 눈이 확 밝아지고 결단을 하면서 문을 열고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오셔서 좌정하시옵소서” 하는 것이 쉽겠어요? 굉장히 커다란 결단이잖아요?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주님 없이 혼자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주님이 나에게 오셔야 됩니다. 주님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내가 그 마음을 엽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워요? 아직도 교회에 나오면서 그것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럼 그렇게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이 들어오시라고 그렇게 자기를 포기했으면 주님이 뭔가 그럴싸한 것을 주셔야 되잖아요? 부자가 되게 해 주시겠다든지, 좋은데 시집을 가게 해주시겠다든지, 아니면 그림 같은 자매한테 장가를 보내주겠다든지 그런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기껏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또 먹는 얘기입니다. 밥 못 먹고 죽은 귀신 있어요? 왜 자꾸 밥을 먹자고 그러세요?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근본적으로 그렇게 “너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너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는 이것은 결국은 가족관계를 표상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우리 주님과 신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생명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할 때 그 상은 그런 이미지를 모두 끌고 들어온 시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다윗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혁혁한 증거들이 얼마나 많았어요? 수많은 전쟁터에서 적군을 찔러죽이고 승리했잖아요? 그렇지요? 그리고 감격스러운 축복의 경험들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어느 할 일 없는 목사님이 다윗이 낸 헌금이 얼마인지를 조사 했어요. 그랬더니 금이 2.5톤 트럭으로 60대분이래요. 그것을 시가로 환산하면 30조원쯤 된다고 그래요. 은은 300트럭 그 이외에 동, 철, 백향목 이런 것은 치지도 않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으면 다윗이 양이나 치던 사람이 어디서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감격하는 것이 아니입니다. 그리고 감격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나에게 한 밥상을 베푸셨기 때문이옵나이다. 그런데 내 잔은 넘칩니다. 더 이상 나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왜 그렇게 감격을 하느냐 이것입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 상이 어떤 상이냐 하면 ‘슐한’입니다. ‘밥상’입니다. 한 15년인가 전에 이 23편을 히브리어로 읽다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한참 동안을 감격을 해서 며칠 동안을 구름에 떠가는 것 같았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베푸시고’입니다. ‘베푸시고’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아라크’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말로 ‘아라크’라고 하는 단어는 원래 군대에서 많이 쓰던 용어입니다. 군대에서 좌로 우로 사람들이 열병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줄을 세우는 것을 가리켜서 ‘아라크’라고 불렀어요. 이 ‘아라크’의 원래의 뜻은 무엇이냐 하면, ‘죽 배열하다’ 그 다음에 ‘늘어놓다, 설치하다’ 이런 뜻입니다. 자, 주께서 상을 베푸셨는데 그 상을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셨어요.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복수로 나와요. “나의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게 한 밥상을 늘어놓으시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괴롭힌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 원래 원수라는 말이 원수가 아니라 ‘괴롭히는 자’입니다. ‘쭈레라이’라는 단어인데 ‘짜라르’, 압박하다 심하게 괴롭히다 이런 동사에서 온 분사형 복수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인생에서 자기를 죽일 듯이 그렇게 괴롭히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 구름처럼 많은 거야. 그들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과 이 시인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똑바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래서 이 시인이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영광과 존엄을 느끼게끔 만들어 주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영광입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그것이 영광이 아니고, 큰 교회를 한다고 해서 영광이 아니고,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다고 영광이 아니고 신자의 최고의 영광은 위대하신 하나님이 낮고 천한 나와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밥상이라고 했지만 밥상이 다 똑같은 밥상입니까? 예를 들어보십시다.
(예화) 여러분이 시집을 갔다쳐요. “엄마, 박서방하고 같이 집에 놀러가려고.” 같은 말을 해도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요 하면 좋잖아요? “우리 밥 안 먹고 가려구요. 삼일 뒤에 가요.” 그런데 삼일 후에 사위가 온다는데 집안이 조용해. 이틀 전에도 고요해. 하루 전에도 잠잠해. 당일이 되었는데도 아침에도 조용해. 그리고 마침내 딸하고 사위하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상을 차려오는데 나무로 만든 밥상인데 귀퉁이가 떨어져나갔어요. 아침에 먹다 남은 주발에 담긴 밥을 폼푸 물에 헹구어서 두 개를 갖다놓고 그리고 아무 반찬도 없고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아서 흠집이 수없이 나 있는 고추장하고 숟가락하고 탕하고 갖다 놓아요. 그런 밥상을 받았어요.
그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슐한입니다. 그런데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밥상이. 밥상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은 관계가 별 볼일 없다는 것입니다. 딸 달라고 하더니 고생만 실컷 시키고, 딸년이라는 것도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고 해서 비행기 태워주나 했더니 비행기는커녕 구루마도 안태워주고 맨 날 와서 돈 없다고 지지궁상이나 하고 하니까, 에이 자식아 하고 탕하고 갖다 놓는 것입니다. 밥상을 보면 그 밥상을 받은 사람과 밥상을 차려준 사람의 관계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참 잊혀지지가 않아요. 이 설교할 때마다 생각이 나는데, 나는 심방을 가는데 집에서 밥하는 것 못하게 하거든요. 제가 지금은 안하지만 옛날에는 부엌일을 좀 거들어주었거든요. 제가 요리도 좋아하고 잘합니다. 요즘은 안하지요. 할 새가 없어요. 교회 요리하느라고 집에서 요리할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제가 알거든요. 그러니까 절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갈비탕이라도 좋으니까 한 그릇 먹든지, 아니면 짜장면이나 먹든지, 아니면 안 먹고 식사시간 피해서 차라도 한잔 마시면 되지 않느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도가 자기는 꼭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지 말아라 그랬더니 그래도 하겠답니다. 두 번이나 말렸는데도 하겠다니 할 수 없지 그러면서 심방을 갔어요. 들어가서 앉았는데 만반의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을 아예 가자마자 차려가지고 상채로 들고 오는데 셋이서 들고 오는 것입니다. 상을 갖다 놓았는데 범상치 않은 식탁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무랐어요. 왜 이렇게 하냐? 난 그저 이렇게 정성을 바칠게 있으면 이 시간에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어라 그랬더니 정색을 하고 자매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으면서 했습니다. 할 말이 없더라고요 정색을 하고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일주일 동안 기도하고 그 다음에 삼일 전부터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젓갈이 사정거리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옆에 딱 무릎을 꿇고 앉아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먹으면서도 마음속에 굉장히 슬프더라고요. 왜냐하면 나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대접을 받을 정도로 가치 있는 인간인가 눈물이 나더라고요. 십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그 식탁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렇다고 무슨 보도 듣도 못한 요리를 한 것이 아니라 집에서 먹는 평범한 요리인데 하나하나를 만든 과정을 잠깐 잠깐 설명을 해 주는데, 예를 들면 도라지를 한 봉지 사다가 한 것이 아니라 뿌리달린 그것을 사다가 불구어서 벗겨서 그 다음에 쓴 물을 빼서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수작업으로 한 것입니다. 북어나 고기나 모든 것을.
제가 요즘은 하도 바빠서 못 다니는데 옛날에는, 박순영 목사님도 많이 다니지만, 저도 집회를 많이 다녔어요. 그런데 전라도 쪽으로 가면 먹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대단합니다. 점심시간에 집회가 끝났는데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장로님이 기다려요. 빨리 먹고 가서 좀 쉬어야지 저녁집회를 할 텐데 한없이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정식집입니다. 여덟 명이 앉아서 밥을 먹는데, 저는 한 3분의 1정도 코스가 나왔는데 벌써 배가 불러요. 절반 먹으니까 도저히 못 먹겠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약간 물러앉아서 도대체 그릇이 몇 개가 나오나 세었습니다. 200개입니다. 물론 국그릇 밥그릇까지 다 합쳐서.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들어오고 계속입니다.
그 큰 밥상에 넷이서 양쪽 귀퉁이를 들고 시인 앞에 딱 갖다 놓았을 때 시인은 사람들 보기에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마어마한 영광의 관을 쓴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이것이 꼭 자기가 왕 된 다음에 이 이야기만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살아오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를 선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목동으로 살아갈 때에는 목동이었을 때 그대로, 장군으로 전쟁에 임하기 전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을 다닐 때에는 그때는 그때대로, 그리고 왕이 된 이후에도 전쟁을 치룰 때는 그때대로, 고난을 당하서 악한 원수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망명길에 오를 때는 그때대로, 결국은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시인 앞에 여러 종들이 바쳐 들어야지 겨우 들 수 있는 성대한 식탁을, 다윗을 저주하고 “하나님은 저 사람을 버렸을 거야. 바울의 집에 행한 그대로 하나님이 공의로 저 인간을 갚아서 저주하실 거야. 너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았어. 너는 희망이 없는 인간이야. 이제는 인생 끝난 것이야. 이 인생 말종아.” 수없는 이야기가 들려서 그래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박해를 받고 삶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그때에 주님께서 시인에게 누구도 받아본 적이 없는 큰 식탁을 차려 시인 앞에 두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수많은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이 시인이 하나님과 그렇게 밀접한 사랑하는 가족의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시인이 무섭지는 않은데 그를 선대해 주시는 하나님이 두려워 부끄러움 속에서 물러가는 경험을 시인이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그 많은 원수들 앞에 받았다고 하는 이 큰 ‘슐한’의 ‘아라크’의 밥상, 그러니까 수많은 반찬을 늘어놓은 잔치를 위해 배설한 것 같은 그런 종류의 특별한 식탁이었던 것입니다. 특별한 식탁은 특별한 관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아무리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어도 이 설교를 할 때에 하늘에서 네 귀퉁이에 줄이 매달리고 거기에 갈비부터 시작을 해서 온갖 반찬들이 올라가 있는 상이 진짜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아니에요? 이것은 또 하나의 이중적인 은유를 물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다? 무엇일까요?
(찬양)
하늘의 양식을 생명의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여기사 주여 주여 먹이어주소서
이것은 영혼의 식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베풀어 주신 적이 없는 그 아주 화려한 말씀의 식탁을 시인에게 영적으로 차려주셨을 때, 그 식탁을 접하면서 시인은 수많은 인간들이 자기를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말해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님께 긍휼을 입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정죄해도 심지어는 자기의 아내 자기의 가족들까지 자기를 버려도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것을 확 밀려오는 것을 경험했어요. 사람에게는 오해를 받고, 박해를 받고, 그리고 버림을 받고, 어제 친구였던 사람들이 발뒤꿈치를 들고 배반하여 자기를 무는 개처럼 되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변함없이 이 시인을 향해 언약 안에서 한번 베푸신 사랑을 거두시지 않고 수많은 원수들에게 에워 쌓일 때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말씀의 진수성찬을 그에게 차려주셔서 그래서 그 고난을 말씀으로 이기며 시련을 그 진리의 말씀으로 이기며 살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후일 무엇이라고 고백을 했습니까? “나의 나그네된 집에서 주의 노래는 나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노래하였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는 이 세상에서 눈 뜨기 싫은 때가 있습니다. 그때 새벽기도가 끝나고 마당에 앉아서 성경을 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갑니다. 그때에 이 세상에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누구도 나에게 베풀어 줄 수 없는 위로와 어루만지시는 사랑을 하나님은 진리의 식탁을 차리심으로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고난의 계곡과 시련의 가시밭길 돌팔매를 드는 원수 밖에 없는 것 같은 때에도 주께서 그 말씀의 성찬을 차리시고 말씀하십니다. “고단하지? 너무 지쳤지? 먹거라. 한끼라도 잘 먹으면 힘이 난단다. 어서 먹어라.” 그 옛날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밥숟갈로 밥을 하나 가득 떠서 그 위에 찬을 얹어서 입을 벌리며 우리에게 먹여 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선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그 손으로 덮으시네
그러면서 성경에 얼굴을 묻고 나 같은 죄인을 버리시지 않고 선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날 때, 미워했던 사람을 향해 들었던 마음의 칼을 놓고 끌어안을 수 있게 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섬길 수 없는 일을 위해서 자기를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에 바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감격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일반섭리의 복이 있고, spiritual blessing, 영적인 복이 있어요. 일반섭리의 복은 간접적인 복입니다. 우리를 잘 살게 한다든지,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든지, 건강을 주신다든지, 물질을 주신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이 기쁨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고 영혼에 큰 흔적을 남기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셔서 어떤 변화를 주는 복입니다. 그 복이 신자에게 있어서 훨씬 더 항구적이고 본질적인 복입니다. 여러분이 곤고하시겠지요? 아마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어서 괴로우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살까 죽을까 망설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십시오.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주님께 승복하고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러나 은혜를 받고 집에 가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상황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에 직접 복을 주시면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 상황을 감당해 나가는 여러분에게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하고 불평과 불만 속에 감당하던 것들을 감사함으로 감당해 나가면서 십자가 삼아서 여러분이 예수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렇게 가슴을 녹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최대의 철학자가 다윗입니다. 그는 우주에까지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궁창에까지 미치는 여호와의 진리를 보았던 사람입니다. 아직 성경에 이러한 우주적인 관점을 가지고 온 세계 안에 가득 찬 그 하나님의 영광, 그러면서도 언약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드러나는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노래했던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한 탁월하고 놀라운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이 얼마나 풍성하였으면 그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것을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는 도구로 삼을 수가 있었던 정신과 영혼의 크기를 지닌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처럼 되고 싶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려서는 부모의 사랑을 거의 못 받고 자란 사람이었지요? 커서는 형들과의 끊임없는 편애 속에서 살았던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자기는 형들을 사랑했지만 형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던 여자와 결혼했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영적인 세계를 이해 못 하는 인물이었어요. 그러다가 뼈저리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죽도록 싫어하시는 불륜이었어요. 아들들에게서도 위로를 받아보고 싶었지만 자기 뱃속으로 낳은 딸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사내놈에게 강간을 당하고, 왕자들끼리 서로 죽이고 난을 일으켜 뱃속으로 낳은 그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키는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어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망명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 열거한 것 중에 단 하나만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도 누구도 그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을 텐데 그 모든 것을 다 겪은 사람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던 이유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으면서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이어서 마지막 한 가지의 이유를 더 고백을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 기름은 보통 기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한 직임에로 부르시는 기름부음을 뜻해요. 이스라엘에 세 솥발과 같은 하나님이 세우신 중요한 기관이 있었어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질서를 따라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일이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여 그 뜻에 부합하며 살게 하는 인물이었고, 제사장은 그렇게 살 수 없는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빌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일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많이 훈련받아도 그 훈련으로 그 일을 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소명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는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기름을 그들에게 부을 때 하나님은 기름만 붓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그에게 주셔서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영적 교통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한 것이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구약의 성령의 역사와 신약의 성령의 역사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신약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모두 이루어진 공로적 사역을 토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으면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교통이 이루어지고 이것은 결코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약시대에는 그렇지가 않고,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큼 성령을 보내셔서 특별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게 하시고 일이 끝나면 그것을 다시 거두시는데, 당신의 주권으로 거두실 수도 있고 거두시는 그것이 어떤 징계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었지요. 그것이 바로 기름부음의 의미였습니다.
다윗은 일생에 세 번의 기름부음을 경험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생애에 잊혀지지 않는 기름부음은 첫 번째, 불세출의 선지자 사무엘에게 사울을 이을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는 증거로서 기름부음을 받을 때였습니다. 그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성경은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신이 그에게 충만하게 임하자 그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영적인 특권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성령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니까 그에게 놀라운 지혜가 생겨나서 나라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다스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선지자의 역할까지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그의 성품을 그 거룩한 일에 적합하도록 만드셔서 원수와 같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나라를 세우고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놀랍게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성신의 충만한 체험을 경험한 것을 회상하면서 어쩌면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충만함을 경험할 수도 있었겠구요, 그렇게 되자 그는 가슴 깊이 차오르는 그 탁월하고 놀라운 희열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고백을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배우고 또 나름대로 교회에서 착한 신자로 살아가고 목회자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복종하고 착하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여러분이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어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의 충만한 부으시는 은혜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 21살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특별히 전도하는 사람 없이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갓난아이적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회심하지 못하고 있다가 교회에서 부도덕한 일들을 보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수없이 방황하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저는 사춘기가 남보다 빨리 왔는데, 중학교 2학년 때서부터 인생은 왜 살아야 하나?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그러니까 공부를 잘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 문제로 고민을 하니, 가르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침이면 인간으로서 눈을 뜨는 것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어요. 그때 나의 구원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책을 읽는 것이었어요. 특별히 문학과 그리고 사상들 안에서 해결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읽었어요. 그 고등학교 때 지금 같으면 결코 읽지 않았을 니체전집부터 시작을 해서 버트란트 러셀, 이러한 책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그 속에서 구원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아주 노력을 했어요. 읽고 나면 가슴이 떵 뚫리면서 박수를 칠 수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행복하지를 않아요. 그러면서 인생의 온갖 방황을 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곤 한 1년이 넘는 세월동안 망설이다가 마지막에 뜻을 세우고 교회에 가게 되었어요. 지금도 저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수요일 날 혼자 조그만 예배당, 교인 30명 정도가 톱밥 난로를 때면서 예배를 드리는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깔고 앉아서 삐그덕 거리는 풍금소리에 맞춰서 예배를 드리는 어느 할아버지 목사님이 목회를 하는 교회에 들어갔어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그 추운 하꼬방 같은 교회당에 모였는데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찬양)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밑도 끝도 없이 눈물이 막 쏟아졌어요. 그러면서 하나님 제가 왔습니다. 인생 살면서 철들고 나서는 최초로 맞본 평안이었어요. 그리고 몇 달 교회 다니니까, 교인 30명도 안 모이는데 멀끔한 청년이 거기 나왔으니 목사님이 얼마나 예쁘겠어요? 새벽기도, 저녁기도회, 금요철야기도 다 나오고 그러니까 목사님이 “이보게 청년, 자네 어렸을 때부터 교회 다녔다고 했지? 세례를 받거라.” “학습도 안 받았는데요.” “그냥 세례 받거라.” 문답을 하고 세례를 받는데 그 전날 토요일 날 밤에 교회에 가서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는데 아무래도 목사님이 결정을 잘못 하신 것 같아요. “나 같은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 어떻게 주님의 집에 등록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주님과 결혼할 수 있을까? 또 결혼하면 그 약속은 내가 지킬 수 있을까?” 드디어 주일이 되었고 세례를 받는 날이 되었어요. 그리고 가난했지만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그리고 가서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기를 기다리는데 드디어 목사님이 몇 사람을 거친 후에 제게 오셨어요. 물로 찍으면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런데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하던 것이었어요. 따뜻한 기운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쏴악 퍼지면서 온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형언할 수 없는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요. 예전처럼 인생사는 길이 고달파서 우는 쥐어짜는 아픔의 눈물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와서 단단하던 내 마음을 녹여 물같이 흐르게 만들어주는 데서 비롯되는 눈물이었어요. 그러면서 한없이 울었어요. 주일 낮에 햇살이 성애가 잔뜩 낀, 11월이었으니까, 그 창문사이로 빛이 들어오는데 하나님의 그런 충만한 사랑을 느낄 때 한없이 눈물이 흐르면서 이제껏 내가 가졌던 인생의 모든 꿈은 다 사라지고 오직 소원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정말 하나님만 사랑하고 추호도 그분의 사랑을 배반하지 않고 그 뜻대로 살고만 싶은 소원이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확 밀려왔어요. 인생 살면서 이런 경험을 참 많이 했어요. 그런데도 이것이 초창기이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극적인 경험은, 그 후에 결혼을 했어요. 결혼을 하자마자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급한 기도제목이 생겼어요. 직장을 다닐 때인데 새벽마다 교회당에 가서 기도를 했어요. 옆에 있는 교회에 가서.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날짜는 다가오는데 응답이 없어요. 그래서 어느 날 갔는데 얼마를 기도했는지 목사님도 가시고 성도들도 다 없어지고 쬐그만 콘크리트 바닥의 개척교회였는데 돈이 없어서 유리를 못 끼우고 비닐로 압침을 꽂아놓은 그런 교회였는데, 기도하다 보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어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여기 의자에 앉아서 이렇게 기도하니까 너무 편하게 기도해서 안 들어 주시나. 내가 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엎드려서 기도하면 혹시 하나님이 불쌍해서 좀 나를 돌아보시지 않을까?”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콘크리트 바닥에 내려 왔어요. 그리고 무릎을 꿇고 얼굴을 바닥에 댔는데 그때가 11월 말쯤 되었어요. 엄청나게 차가운 기운이 가난해서 옷도 제대로 못 입었는데 확하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결심이 생겼어요. “아무리 추워도 하나님 응답해 주시기 전에 여기 이 자세에서 내가 바꾸나 봐라.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얼마를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내가 이런 얘기 잘 안하는데 또 너무 과하게 상상하지 마세요, 분명히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내가 또렷이 보이는 것입니다. 강대를 향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눈을 감았는데 저쪽에 있는 강대에서 핸드볼 공만한 불덩어리가 하나 딱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천천히 천천히 날아와요.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저게 계속 날아오면 나한테 맞는데 그러면서 엎드려서 계속 기도하는데 아주 천천히 날아오더니 정확하게 내 머리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개 쾅 하는 느낌이 들텐데 그게 아니라 그 불이 내 속에 확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이것은 지난 번 느낌과는 전혀 틀리게 엄청나게 뜨거운 것입니다. 뜨거운데 불쾌하고 기분 나쁘게 뜨거운 것이 아니라 아주 달콤하면서도 땀이 뻘뻘 날 정도로 뜨거운 것입니다. 탁 들어오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그리고 내가 이전에 얼마나 주님을 배반했고 주님의 그 큰 사랑에 얼마나 어긋나게 살았는지가 그림처럼 확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어요.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때 아주 선명하게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아, 그런 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무릎이 차갑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얼마를 땀을 흘리며 기도했는지 먼동이 환하게 터오면서 아침 붉은 노을빛이 성애가 낀 비닐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그 기도가 모두 끝났을 때 경험은 달랐지만 결론은 똑같아요.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오직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고, 티 하나 없이 내가 아주 정결하게 되어서 주님 한 분의 신부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것뿐이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성령의 충만한 부으심입니다. 이것이 놀랍게도 식탁의 경험과 짝을 이루면서 시인에게 다가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런 놀라운 성령의 충만한 경험들이 우리의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깊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우리들이 이러한 성령의 충만한 경험없이 학습했던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관한 많은 지식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도하려고 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많은 문제가 있어도 문제 자체를 붙들고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신앙은 그것을 해결하는 근원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문제는 오늘 해결되어도 내일이면 또 다른 형태의 문제들이 생겨나요. 그러니까 근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에게 이런 하나님의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그래서 내가 그 주님의 충만한 사랑 속에서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땅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리석게도 물 아닌 웅덩이에서 먹을 수 없는 것을 찾고 그리고 가두어도 보관할 수 없는 곳에 그 물을 보관하려고 해요. 그래서 결국은 이름으로는 주님을 믿는 자녀이지만 영혼은 버림받은 자처럼 곤고하게 살아가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내게 베풀어달라고 나의 영혼을 간접적으로 말고 직접적으로 만지셔서 주님 앞에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을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억지로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기꺼이 승복하며 주님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강압과 그리고 율법적인 두려움 때문에 하던 신앙생활을 접고 오히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응답하실 차례입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인격적으로 승복하며 돌아가서 이러한 신자의 복을 누리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