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회 개회설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레24:2)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만들고 그 성막에 등불을 켜는 규례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아시다시피 성막은 가죽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그 속은 캄캄하였습니다. 제사장은 거기서 주님께 경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교통을 누리게 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실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캄캄한 성막 안에 등잔불이 밝혀질 때에 찬란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서 또 신학자로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백성들과 교회를 이끄시는 지를 보여줍니다. 찬란한 불빛이 비추자 어두운 성막의 공간이 환하게 밝혀졌던 것처럼 또한 신학자들의 신학 작업을 통해 밝혀지는 진리의 빛은 어두운 교회를 깨웁니다. 암흑과 같은 영혼에 지성의 밝은 빛은 개시의 빛의 의미를 깨닫게 함으로써 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흐려져 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놓치고 있는 중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당신의 의사를 소통하신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지성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계시의 빛을 비추신다고 할 때에 이 조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성의 기능에 지식을 더하는 것이죠. 계시는 존재와 인식 사이에 다리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우리들이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성의 빛뿐만 아니라 이성의 진지한 천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개혁 신학을 부르짖으면서 형편없는 지성의 얄팍함 속에서 신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혁사상의 위대한 힘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사상의 위대한 힘입니다. 무엇에 쉽게 굴복할 수 없는 총체적인 사상의 위대한 힘이 개혁신앙의 힘이고 역사를 움직여 온 개신교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장중한 사상의 힘들이 작금에 쓰러져가고 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우리들이 이 신학을 철저히 탐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에도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16,7 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그 케케묵은 작품들을 여러점 입수했습니다. 그분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오늘날 우리의 신학이 과연 발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하게 신학을 연구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 계시 토대 위에 특별 계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우리들이 올바른 기독교 개혁 사상을 세울 수 없고 발전시킬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세상에서 많은 학문들은 각기 자기 분야에서 자기의 주제만을 연구하면 됩니다. 문학은 문학으로써의 죽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고 또 의학은 의학으로써의 죽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학은 법학으로써의 죽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겠죠? 미학은 미학대로 죽음의 개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이 모든 지평의 죽음을 함께 통합하여 그것을 하나로 그려내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죠. 신학을 바로 그 철학을 지배하고 그 철학을 하녀로 삼아서 자기의 세계를 전 우주적으로 구축하는 총체적인 학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초적인 학문에 대한 공부가 없이 우리들이 신학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이 목회와의 적실성 문제를 깊이 고민하면서 이론 신학과목을 과감하게 버리고 실천 신학과목으로 바꾸는 것은 분명히 이것은 매우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고 다음 세대의 한국 교회의 개혁 신앙의 위대한 힘들을 심히 약화시키는 그러한 길이라고 나는 굳게 확신합니다. 학교에서 실천 신학과목들의 수를 늘인다고 해서 실천이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목과 별개로 추구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아우르는 그런 것이어야 됩니다. 히스베르투스 보이티우스의 연극과 같이 경건과 학문은 함께 가는 것이고 그리고 그 경건은 사람의 영혼과 정신, 마음뿐만 아니라 그의 외적인 모든 삶과 인격까지 통괄하는 전 포괄적인 것입니다. 학과목에 의해서 그것들이 함양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학자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이것들을 올바로 밝혀서 당신의 교회의 어두운 구석들을 밝히기 위해 부름 받은 교회의 선생들입니다. 이 사명은 매우 중차대한 사명이고 무엇에 의해서도 폐기될 수 없는 중차대한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자가 연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직무 유기이고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계속해서 밝혀내지 않는 것은 중대한 직무 유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두 팔꿈치가 닳도록 책상에 매달려서 계시와 씨름하고 일반 학문과 씨름하면서 이 시대에 맞설 수 있는 기독교 신학의 위대한 그 얼개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구체화하여 다음 세대와 그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밝은 빛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캄캄한 성소에 밝혀진 이 등잔의 불빛이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 준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미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하지 말고 지나온 세기를 거울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경을 이 시대에 우리 세상에 주신 이후로 한 번도 그 성경이 사라지거나 무시되는 적이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이제 백년 후에는 이 성서가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지만 백년 후에는 자신의 집이 프랑스 성서공회가 되는 묘한 아이러니를 낳았던 것입니다. 한 시대도 하나님은 당신의 성서의 불을 끄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그 성경 계시의 빛이 밝게 타올랐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대에는 충만하고 찬란한 빛으로 타올랐고 어떤 시대에는 겨우 그 불빛을 유지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신학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이 연구와 탐구를 통해서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계시의 아름다운 빛들을 충만하게 드러내고 그리고 그것으로써 목회자들이 거두어 그것으로써 성도들에게 아름다운 꼴들을 먹일 때 성경의 해석은 풍성해졌고, 진리는 온 땅에 두루 넘쳤고, 교회의 미신과 어리석은 맹종들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게으르고 목회자들이 신학자들에게서 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판단될 때 교회는 급격한 어두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인본주의가 판치고 그리고 성경이 무시당하는 그런 시대정신이 오히려 우상처럼 떠받듦을 당하는 그런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공부해야 됩니다. 너무 가혹한 말일지 모르지만 나는 신학교 선생님들 중에 공부하다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너무 학문에 심오하게 심취하고 거기에 자신을 모두 쏟아 부은 나머지 생명에 위기가 왔다는 소식을 나는 듣고 싶습니다. 그런 충성스러운 신학자들이 당신의 교회를 어두움에서 구하고 미신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렇게 등불을 밝히는 그 빛에 사용된 재료입니다. 그것은 바로 감람유였습니다. 그 감람유의 순결한 기름 히브리 성경에 “세맨자이트”라고 되어 있는 이 감람유를 순결한 것을 가져오라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저는 여러해 전 이 부분을 히브리 성경으로 읽다가 한동안 그 충격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단어가 바로 “찧어냄”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까띠뜨”라는 분사로 되어있습니다. 이 분사는 “까따뜨”라는 동사에서 왔고 이 “까따뜨”는 영어로 “to bit” “때리다”입니다. 혹은 “crush” “깨뜨리다”입니다. “찧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bit or crush” 그런 뜻입니다. 여기는 상당히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죠? 우선 올리브를 수확하고 그 올리브를 말립니다. 거기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것이죠. 기름을 추출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까띠뜨”라는 방법으로 기름을 추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리브에서 오일을 얻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인 방법은 그것을 그야말로 절구로 두드린 다음에 압착기에 집어넣어서 강한 압력으로 눌러버립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기름이 흘러내려오죠. 그러면 그 오일을 받아서 바르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또 등불을 켜는데 쓰기도 하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이 “찧어냄” 이라고 하는 분사 “까띠뜨”는 전혀 다른 방식의 기름 제조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감람열매를 그냥 때리는 거예요 “crush”하는 거죠. 그러면 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기름이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것을 아주 정성껏 따로 모으는 거죠.
자, 그럼 두 기름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한 쪽의 기름은 빻아서 press에다 집어넣고 강력하게 pressing해서 거기에서 오일을 짜 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같은 양의 감람유로부터 많은 기름이 나오겠지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불순물이 섞이게 되는 거죠. 그러면 거기에 불을 붙이게 되면 그름이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성소에 밝혔던 감람유는 신학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이 등잔불의 찬란한 빛이 지성을 예표한 것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이 기름은 두말할 여지없이 성령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성경적인 경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인상이 사람들 속에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나니까 온갖 신비주의와 이단과 사상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이 설교시간이지만 쓴 소리를 한 번 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저는 미국에 가서 웨스트민스턴 교수로 계신 마이클 호튼 교수를 만났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주제가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야기 하는 가운데 우리 서로 조엘 오스틴의 신학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최근에 미국에서는 조엘 오스틴의 신학을 후기 영지주의와 번영주의의 합성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조엘 오스틴이라는 인물이 영지주의와 펠라기안 주의를 재현할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거는 유식한 신학자들을 해석을 해서 거기에다 덧입혀준 것이죠. 자연스럽게 호튼 교수와 이야기를 하면서 조엘 오스틴이 어떤 사람이냐? 그래서 내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사람이 나보고 “조엘 오스틴의 신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래서 “조엘 오스틴에게 신학이 있느냐”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해서 나는 한 마디로 그 모든 답을 대신하겠다. “If he is christian, I am not christian. If I'm christian, He is non-christian. show it."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진 그 곳에 그곳에 바로 인본주의와 그리고 온갖 세속적인 이교 사상과 불건전한 신비주의 같은 것들이 일어나게 되지 않습니까? 180만부 가까운 책이 팔려서 전국 교회를 휩쓸고 있는데 아무도 그 사람에 대해서 참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학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논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하기를 “나는 논증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논증의 중요성을 압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총신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교수님들에 대한 소송이 결국은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았고 상당한 금액의 부채를 소송비용으로 지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마음으로 눈물이 나왔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 속에서 소수의 교수들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렇게 논쟁에 휘말리는 가운데 교회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후원하기로, 지난번에도 후원했지만 이번에도 또 후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모두 다 성령의 순수한 역사가 찬란한 진리의 빛과 함께 사라질 때 이런 혼란스러움들이 교회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자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피터판 마스트리어트는 자기의 책 속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경건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입니다. 자기의 책 속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신학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학이 신학자를 만드는 것 같지만 많은 신학을 한국에서, 외국에서 배우고 신학지식이 쌓이므로 신학자가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학자가 자신의 신학을 만듭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그가 하는 신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같이 사랑의 신학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이 미학적 신학을 펼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에 칼뱅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칼빈주의 신학을 펼치겠지요. 그래서 신학자와 신학함은 설교자와 설교의 관계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성경에서 왜 하나님이 성소의 어두움을 밝히는 그 곳의 기름을 굳이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름을 짜 내는 방법이 아니라 “까띠뜨” 한, 그렇게 해서 채집한 그런 순수한 기름으로만 성막을 밝히도록 분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많은 양의 신학 저술들을 토해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수한 것을 토해 놓는 것은 양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감람이 절구에 맞아 깨뜨려지고 crush 될 때 거기에서 오일이 흘러나왔습니다. 오늘날 신학이 위험할 정도로 인본주의에 치우치고 그리고 신학교들마다 학생들이 개혁신앙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안해서 그랬다고 말할 수 있지만 더 커다란 이유는 신학을 하는 사람 자신이 신학의 내용에 의해서만 다루어지고 성령에 의해서 다루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자로서 복음 앞에 깨뜨려지고 성령 안에서 자아가 깨어지는 이런 순수한 신앙의 경험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학은 경건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19세기에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당시에 최근에 나온 유명한 학자의 요한복음 주석을 읽으면서 그에 대해서 서평을 해 달라는 부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주석 속엔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지만 그러나 어쩜 이렇게 생기가 없습니까?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할 뿐이지 아무 생기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보다 전 시대에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말했습니다. “만약에 지식으로만 알고 그치는 것이라면 사단은 여러분들이 칼빈주의자가 되든 알마니안주의자 되든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붙은 칼빈주의, 열정에 넘치는 칼빈주의, 주권사상을 외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주권에 굴복하며 사는 생명이 있는 칼빈주의는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단순히 칼빈의 지식을 배운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작품을 공부하고 그 진리의 빛을 받으면서 자기가 깨뜨려지는 경험이 너무나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신학자들이 이런 순간들이 얼마나 적은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하고 명상을 함으로써 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진리를 향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는 비로소 신학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신학을 위해서 논문을 발표하고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한 학술의 축척과 발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면하는 성경 그 자체 때문에 그 앞에서 자기가 깨뜨려지고 자아가 부서지고 그리고 위대한 신학자이지만 성경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고 통회하는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 신학의 경험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개혁신학을 이끌어 온 위대한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성령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그 동안에는 이 개혁신학의 본래의 사상의 힘과 크기가 잘 유지되는 가운데 학문적으로 발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성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특별히 이 성령에 의한 자기 깨어짐의 경험들이 사라질 때 고린도후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이 경고한 바와 같이 모든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을 비롯한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신학 그 자체가 아니라 doing theology를 함께 배워야 합니다. 신학을 하는 것, 그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어린 아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말씀의 위대함 앞에서 자기가 하찮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깨뜨려지는 은혜의 경험들을 통해서 그가 신학을 할 때 그의 신학은 성경 계시에 붙잡힌 신학이 될 것이고 그것에 불을 비춰 환한 빛을 타오르게 할 때 그름 한 점 없는 환한 빛이 되어서 그 빛이 없었더라면 어둠 속에 있었을 수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의 마음을 깨우게 될 것입니다. 개혁신학자 존 오웬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계시의 창구를 세 개를 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계시의 책인 성경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목회 사역이고, 또 하나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신학 활동을 열심히 해서 이 계시의 책속에 아름다운 진리의 빛들을 목회 사역 속에 충만하게 드러내고 이것을 성도의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아 어디에 가든지 그 진리대로 살고 진리대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자의 영광입니다. 그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의 학문 때문에 박수갈채를 받는 데 있지 않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영광은 자신의 온 몸을 성령 안에서 태우면서 그러면서 진리의 빛을 비추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것, 후대가 그 진리의 빛을 기억하여 그 빛을 따라서 남은 교회의 시대를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 사람은 그의 이름을 잊을지라도 그 신학자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