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장 수련회 저녁 집회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사도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든지 즐거운 것은 좋은 것이고 괴로운 것은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사도는 그 괴로움을 기뻐하고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 눈뜨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지요. 한 사람의 인격안에는 기쁨과 괴로움이 동시에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슬픔이 찾아오면 기쁨은 사라지고 기쁨이 가득하면 슬픔이 물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격안에는 이 기쁨과 슬픔이 함께 공존할 수 있어요. 이것이 바로 경건의 비밀입니다. 오늘 사도가 그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했는데 그 괴로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한 괴로움이 아니라 교회의 지체들을 위한 괴로움이었습니다. 교회의 지체들을 위한 괴로움이란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의 유익,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성도로 부름을 받은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위해서 당하는 고통 그것이 바로 바울이 당하는 괴로움의 정체였습니다.
그러면 이 괴로움은 무엇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일까요? 너희를 위해서 받는 괴로움이라고 했는데 너희의 무엇을 위해서 당하는 괴로움일까요? 옛날에 노인들이 이제 젊은 부부가 애기를 낳아놓으면은 그러면 그걸 보면서 그럽니다. ‘야~ 이게 언제나 사람이 될까’ 사실 젊은 부부둘이서 강아지를 낳거나 토끼를 낳은 건 아니거든요. 분명히 낳긴 낳는데 그 아이도 분명히 사람이예요. 태어나자마자 아니 심지어는 태내에서도 이미 태아일적에도 어느 정도 인권을 가지고 있단 말이예요. 완전히 독립된 인권을 갖는 거예요. 사람이지요.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니고 니가 사람될라면 니 엄마 눈물꾀나 빼겠구나. 우리가 나이 많이든 성인도 정신 못차리면은 ‘야 너 언제나 사람이 될래?’ 그러잖아요?
사실 요즘은 제가 은혜를 나이가 들면서 하나님이 은혜를 더 많이 주셔서 그런지 우리교회 설교시간에 사라진 단어가 하나 있어요. 그게 머죠? 짐승이예요. 짐승. 그게 왜그려냐면 믿음 생활을 해 보니까 내가 짐승갔애. 짐승이 남들보고, 난 예전에 내가 사람인줄 알았거든? 살아보니까 나도 짐승이야. 이 짐승이 저 짐승보고 뭘 얘기를 하겠어요? 그러니까 교회에 많은 지체들이 있을 때 그 지체 하나하나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는 이제 완전히 예수의 한 지체이고 구원받은 한 아름다운 영혼이예요. 그렇치만 그게 언제나 사람이 될까? 그게 언제나 사람이 될까? 어렸을 때 사람이 안 된 애들은 희망이 있어여. 왜 ? 애들은 다 그러니까 그러면서 아이들이 아직까지도 부모에게 야단맞고 학교 선생님에게 혼나고 또 잘 타이름을 받고 하면서 사람이 되어가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난 다 잊어먹은 일이지 교회가 밤중이 되면은 교회 누가 사람이 있으면은 불을 켜야 되고 환하게 낮이 밝았으면은 불을 꺼야 되잖아요. 전기세가 장난이 아니예요. 하루에 한 15만원씩 전기세가 나와요. 안 믿어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봉사하던 어느 청년이 일을 하다가 말고 내가 차를 한 잔 사주니까 먹으면서 자기 생애에서 아찔했던 순간을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어느날 경비를 섰데요. 야간경비를. 아침에 늦게까지 퍼 잔거야. 온 교회에 불이 환하게 켜진 거야. 그런데 내가 문을 두드리드래는거야. ‘얘야 불꺼라’ 그러더래. 그런데 자기가 스위치가 어디있는지 몰랐데. 그러더니 난 다 잊어버렸지. 내가 자기가 이렇게 부스스하게 나오니까, 자기 어깨를 탁 감싸더래. 그러면서 난 다 잊어버린 얘기예요. 그러더니 마당을 두루 거닐면서 ‘얘야, 이 불은 스위치가 여기 달렸고 이 불을 이렇게 켜면은 전기세가 많이 나오고 교회를 섬길 때는.’ 그러면서 내가 한 참. 자기 어깨를 아마 내가 새벽교회 시간에 은혜를 받은 모양이야. 그렇치 않았으면, ‘저 짐승 그랬을 텐데’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 ‘교회의 재산을 아껴야지 된다’ 그렇게 얘기를 하더래요. 그렇게 내가 얘기를 해줬는데 정신이 혼돈되고 아주 생각이 하얗게 지워지더래. 너무 부끄럽고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자라면서 그렇게 야단도 맞고 타이름도 받고 해서 하면되. 그런데 문제는 머냐면은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는 안 고쳐지는 거예요. 그래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오늘 김기수 형제가 내 차를 운전하고 쭉 오는데 밤중이잖아여. 갑자기 도로에 말이지. 이렇게 그 과속방지턱이 이렇게 되 있잖아요? 그 차가 굉장이 많이 다니는 한 가운데 큰 개가 안방처럼 떡 앉아가지고 조용히 저게 개념이 없는거다. 개 생각이예요. 개념. 개 생각이예요. 지금 이 밤중에 차가 쏜살같이 달리는데, 오늘 저녁에 저 친구 어디로 가던지 그랬을거야. 어른이 그렇게 개념이 없으면 어린아이적엔 가르키는데, 나이가 들면 못 가리치는 거죠. 그래서 말이죠.
사실은 우리 교회에서도 이렇게 보면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누구냐하면은 우리가 전도해서 우리교회가 처음 예수 믿은 교회고 다행이 멀리 이사를 안가서 꾸준히 교회에 나오고 그러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교회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주 안정적이고 그게 신앙생활을 원래 그렇게 하는 건줄 알아요. 막 다니면서 신앙 생활이 잘못 굳어진 사람들에게는 제 2의 회심과 같은 강력한 은혜의 계기가 필요해요. 모든 사람들이 필요하지만 하여튼 그렇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도가 오늘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 그게 머냐하면 그 짐승같은 골로새 교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까지 그러면서 당해야 되는 많은 괴로움 그것을 기뻐하는 그 이유는 머냐하면 자기의 희생을 통해서 골로새 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때 그리스도 예수의 몸 전체가 어리고 연약하고 철없다가 이제 철이 들고 성숙하고 장성한 어른스러운 그런 사람으로 쭉 자라나게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이예요. 교회의 영광은 절대로 물리적인 크기가 아니예요. 그건 절대로 교회의 영광이 아니예요. 절대로 교회의 영광이 아니예요. 교회의 영광은 사람의 영광과 아주 유사해요. 어떤 사람이 체구만 아주 크고 살이 쪘다고 해서 키가 크다고 해서 그 자체로서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체구가 마르고 몸짓이 작아도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건전하고 영적으로 주님의 생명으로 충만해 있으면 그가 무슨 직업에 종사하던지 그는 훌륭한 사람이예요.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된다고 하는거죠.
그러면은 한번 생각해 보십쇼. 이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한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을 위해서 많이 참았는데, 그 참는 이유는 머냐하면은 그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성숙하고 성장하게 되도록 그것을 위해서 참은 것이예요. 세상에서의 교육은 매질도 하고 부끄러움도 주고 수치를 주어서 그리고 때로는 경쟁심을 유발시켜서 그렇게 해서 목표를 이루거나 그 사람을 교정해요. 그러나 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사람의 교정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그렇게 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예요. 진정한 강함은 제도와 강요된 질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께 깊이 붙잡혀 있을 때 무엇인가 통제가 안되는 것 같이 그렇게 보이면서도 한 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에게 깊이 붙들리는 인격적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을 때 그 교회의 힘은 굉장한 거예요. 왜냐하면은 그렇게 한 사람 한사람이 주님께 붙들리면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도 주님께 깊이 붙들리고 매달렸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굴복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요. 그래서 공동체 전체를 향해서 주님이 하시는 음성과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 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큰 영광은 절대로 교회의 규모, 교회의 세력이 아니예요. 물론 목회자로서 제 마음은 아직까지도 방황하고 고통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은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변화됐으면 좋겠어요. 이정도의 숫자는 우리 안양, 우리 나라, 세계, 웨슬리는 세계의 교구라 그랬는데 나는 그런거는 그만두고라도 여기 평촌 지역만이라도 방황하는 수많은 불행한 사람들의 숫자에 비하면은 열린교회에 모이는 숫자에 비하면 조족지열에 불과해요. 더 많은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고 새로워진다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그 가정에 일어나겠어요? 우리는 그런 것에 간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내가 변화받았을 때, 절망적인 내가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미움과 갈등에 가득 찬 우리의 가정에도 변화가 오게 되고 그리고 그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간증이잖아요 자기를 막 지겹도록 그러니까 올케와 시누이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경우 많찮아요. 시누이가 올케를 아주 죽어라 하고 미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누이가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회개를 하고 그 사람을 전도를 하는데 믿어주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 몇 달동안 그렇게 봉사하고 진심으로 눈물로 자기 올케를 위해서 기도하니까 그 사람이 와서 예수를 믿고 변화되는 것을 봤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갈등으로 가득차서 미워할 그 관계들이 그렇게 놀랍게 치유되는 놀라운 힘들이 신앙안에 있잖아요. 밖깥에는 없습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면 변화된 삶을 살 사람들이 우리의 주위에 너무너무 많은 거예요. 우리가 손을 뻗치면 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그런 복음을 필요로 하고 그 복음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거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적은 숫자가 모이는 것이죠. 이 큰 시설을 가지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될 수 있을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를 진심으로 바래요. 그거는 내년에도 간절히 비는 바예요. 내 몸이 고단하지만은 쪼개지고 설교를 하다가 쓰러져도 교인들이 너무 많이 와서 5번 설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고 하고, 6번 설교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고 하고 의자를 다 뜯어버리고 방석을 깔고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원하는 바이고 또 원하는 바이잖아요? 정말 그래요.
그렇치만 그것은 모인 사람들이 주님을 닮아간다는 전제 하에서만 그게 의미가 있는 것이죠. 바로 사도바울이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자신이 당하는 그 모든 괴로움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교회에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완전하고 아름다우신 분이신데 그 밑에 있는 지체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예수그리스도가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그의 몸으로 행동으로 구현하지도 못하는 미숙한 상태였는데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면서 새로워져 가는 것을 보는 거예요. 물론 우리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에는 절대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도구로 삼아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보내셔서 그래서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경건의 비밀을 터득하게 하시고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눈뜨게 하시는 놀라운 변화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수 백개의 프로그램을 돌리고 진에 빠지도록 우리가 수고할지라도 그것은 도구일뿐이고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아무도 주님을 만날 수 없어요.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구역장된 순장된 여러분 가운데 왕년에 주님깊이 만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열린교회에서.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언제나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을 정도로 강건했습니까? 아닙니다. 강건한 사람들은 자신의 강건함을 의지할 수 없는 가시를 주셔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안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교만할라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 실망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시고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절망적인 확신을 갖게 만드셔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처음 십자가 앞에서 부르짖던 ‘나는 아무 도울 힘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고백이 그 처음 고백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예요. 그러면 이렇게 영혼이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당하는 그 괴로움을 사도 바울에게 주셨는데 이거를 보면서 ‘아 그렇구나. 이것은 목회자용 고통이구나.’ 물론 목회자는 그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앞서야 될 사람이고 모든 지체들의 모본이 되야 할 사람이고, 또 정상적이라 하면 모든 교인들중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가장 깊이 경험하고 그 영혼을 돌보는 일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장 큰 고통을 느낄지도 모르죠. 그러나 교회에는 목회자용 고통, 평신도용 괴로움 그런거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와 온 몸이 매달려 있는데 만약에 손끝이 칼에 비어서 피가 뚝뚝 흘린다면 온몸이 고통받는 것이지 손끝만 고통받는 것은 아니죠. 만약에 온 피가 떨어져서 뚝뚝뚝뚝 살이 찢어져서 피가 뚝뚝 흐르고 손톱이 빠지는데도 피가 흐를 뿐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체에 중대한 이상이 생기고 신경계통에 마비가 온거죠. 그렇치 않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용 고통이 아니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신 안에 있는 고통을 그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나눠주는 거죠.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았단 말하면서 기쁨밖에는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의 은혜의 깊이를 우리는 신뢰하지 않아요? 그럴리가 없는 거죠. 왜냐하면 진정한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전달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것이 전해지는 것이죠.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찢어지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고통을 당하면서 오래도록 참았지만 그 고통에 동참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도 자신의 그런 괴로움에 동참했던 동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했고 로마서를 쓰면서는 약 16명 이상의 동역자들의 이름을 거론했어요. 대부분이 모두 평신도들이었어요. 평신도들이었어요. 제가 너무 마음아파하는 것은 무엇이냐면은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 에게 바로 이 마음이 현저하게 부족해서 가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예요.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온 몸에 함께 나누어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평신도와 목회자와 구분이 없이 은혜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 마음이 흘러들어가는 거죠. 자기가 목회자요, 장로로써 영혼들을 돌보고 가르친 사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은혜가 식은 그 사람들보다는 오늘 은혜를 받고 주님의 사랑을 받고 깊이를 깨닫고 감격하는 사람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더 많이 울고 눈물을 흘리는 거죠.
우리가 머 늘 있는 일입니다만은, 새가족 성경공부해서 새가족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뼈저리게 깨닫게 될 때에 그들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 아니예요? 주님의 마음이 이런 마음인데도 나는 주님의 마음과 상관없는 인생을 너무나 긴 세월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회개의 눈물이고 나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발견했는데 아직까지도 교회다니면서 아직까지도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복음의 참된 축복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눈물 아니예요? 6,7년전에 우리 교회에 새로 등록한 사람들 모두를 조사해 보니까 63%가 새가족들이 전도한 사람들이예요. 지금도 그 상황이 별로 바뀌지 않았을 거라고 난 생각을 해요. 그게 바로 영혼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고 안타까운 눈물이라고 하는 것이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고백을 바울이 오늘 하고 있어요. 그것이 머냐하면은 ‘그리스도의 남은 권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노라.’ 알 수 없는 많은 질문들을 하게 하는 묘사들이 여러 개 겹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충분히 고난을 지불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형벌을 받고 충분히 속죄하셨기 때문에 그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인데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도 남았다면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그 고난은 충분하지 않는 고난인가? 하는 의문이 의문에 꼬리를 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이제 그리스도예수께서 성육신하셨을 때 당하신 고난 그 자체와 그 다음 그런 고난을 토대로 공로로 세워진 교회와의 성례전적인 연합을 통해서 당하게 되는 그 고난 사이를 구별해야 되는 것이예요. 전자의 고난은 충분히 이루어졌고 예수그리스도는 이제 더 이상 천상에서 고통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예요. 어리신 그리스도 예수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으시지만, 충분히 우리를 위해 고통을 지불하시고 완전한 공로를 이루셨지만, 거기에 매달려 있는 이 몸은 아직 완전한 사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완전한 사랑이 되지 않은 채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기 때문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사랑이 당신의 몸인 교회에 충분히 전달되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 모든 교회들이 완벽하게 움직여지질 않는 거예요. 그러한 불합치한 상태, 그 불합치한 상태가 그 불합치한 상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서서히 서서히 서서히 거룩해져 가면서 그리스도와 완전한 합치를 이루는 상태에 까지 가게 되는데, 그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인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의 남은 고난은 예수 자신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라고 하는 것이죠. 그것이예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성공하게 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 세속적인 사람들은 예수믿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진정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는 거룩해지고 싶어하는 것이죠. 아직까지 세속적인 사람은 예수를 수단으로 삼아 자기의 꿈을 이루려고 하지만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비전속에 자신이 녹아 없어져서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인생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지는 액체와 같은 인생이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사도바울이 오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희생을 하게 되면 그 희생과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점점 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사셨을 삶을 구현해 감으로써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예요.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우월한 전망을 갖게 하는 부정적인 이 시대의 물결들이 가득하게 되고 아마도 여러분들이 내일 아침에 나의 강의를 듣고 나면은 사실 이 시대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절망 가까운 탄식을 하게 될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이 시대는 언제든지 그렇게 어두웠어요. 그러니까 중요한거는 교회안에 끌어들여서 그렇게 교회에 등록된 신자로 만드느냐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진리와 성령 안에서 참신앙을 가지고 예수믿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변해져 간다면 이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그들의 존재는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예요.
제가 아우구스티누스를 깊이 <참착>하게 되었을 때 이 기도원을 매주 올라왔어요. 매주 산에서 내려오면서 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정말 그 아름다움에 매주 밤마다 금요일 밤마다 사로잡혔어요. 어두운 밤하늘은 빛나는 별들에게는 기회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만약에 정말 제대로 예수를 믿는 어린아이들을 만들어 낸다면 그 아이들을 통해서 다수가 교회가 다니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 제대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아이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예요. 새로운 삶의 방식 앞으로 보십시오. 이제 한편으로 신앙을 버리면서도 끊임없이 공허에 시달리고 그리고 허무감에 시달려서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이 많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희어져 추수할 곡식들이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다운 예수 믿는 사람이 가득찬 교회가 되기 위해서 헌신해야되요. 그런데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거의 없을 때 고난도 없지만은 교회가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무늬만 교회일 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전혀 다름없는 양산되는 것이고,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현저히 더럽히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을 위해서 모든 교인들이 헌신하는 것이 아니예요. 역사상 그런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항상 주님이 은혜를 주신 소수의 사람들이 영혼을 위해서 성과도 측정할 수 없는 그 일을 위해서 수 십년 동안 바뀌지 않은 사람이 변화될거라고 무모하게 기도하면서 눈물로 기도하고 참고 견디면서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예요.
사실 저는 목회에 필요한 가장 그 기본적인 학습을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거의 다 배웠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때가 25~26 그 때쯤 됐을텐데, 주일날 열심히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도 아이들이 변화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오후에 우리 집에 올려면 교회에서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그 개천에 다리를 건너면서 울었어요. ‘왜 아이들은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 왜, 내가 내가 만난 주님을 이 아이들에게 전하는 데 이 아이들은 내가 믿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런 좋으신 분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까’ 그 마음이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한 후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득차서 브리지 아래를 걸어가며 눈물을 흘리는 지금에 와서야 나의 마음과 동질의 마음이예요. 어떤 의미에서는 더 순수했다고 말할 수 있죠. 이것이 어떻게 목회자용 고난일수 있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은 머냐하면 영혼을 향한 뼈저린 아픔을 가슴에 싶어주시는 거예요.
중국에 가보면은 진주가 무지하게 많아요. 진주가 얼마나 많은지, 아예 어디를 가니까 진주를 같다가 고추 빠는 기계에다가 갈아가지고 대빡으로 팔아요. 그걸로 머하느냐니까 그걸로 세수를 하면 얼굴이 그렇게 진주가 되어진데. 그래가지고 진주 목걸이를 중국에서 오는데 버스안에서 누가 팔아요. 한 개에 만원이라고 하는데 조금있다가 5개에 만원, 마지막에 15개에 만원이래요. 그래가지고 그거를 15개를 사가지고 와서 우리 교회 권사님들 하나씩 나눠드렸잖아요. 지금도 메고 다니실거예요. 그렇게 진주가 싸요. 그런데 그 진주를 어떻게 만드냐면은 그냥 무조건 하는 게 아니라, 이 조개 속에다가 흠집을 내요. 그래가지고 그 조개가 말하자면은 그것이 들어오면은 그것을 막기 위해서 호르몬 같은 거를 배출해가지고 자기몸을 보호하는 거야. 그러니까 진주를 품은 조개는 속에 먹을 게 없이 배짝 마르는 거야. 그 진주를 낳기 위해서 품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만 하는게 아니라 7개도 나오고 8개도 나오고 3개도 나오고 많은 건 10개도 나오고 그래요. 그 속에서 진주를 품는 단 말이야. 그게 막 타래미로 매달려 있는 거야. 그러면은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영혼을 위해서 그 아픈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깊이예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은사의 문제가 아니예요. 누구든지 주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면은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아주 절박한 마음이 됩니다. 그게 숙명처럼 자기의 가슴에 박혀서 그래서 그것이 아픔이 되는 거죠. 그 아픔을 견디고 고통을 받으면서 사실은 그 진주를 품은 조개가 빼짱 말라가듯이 자신은 그 괴로움 속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지만 그 고통이 바로 뭐냐하면, 2000년 전에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현재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오는 거예요. 그 죽음을 통해서 사실은 그 죽음과 같은 고통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 죽음의 기운이 지나간 후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현재적인 십자가의 부활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나 개인적으로 경험하지만,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이것이 공동체 적으로 봉헌이 되어서 한사람 한사람이 은밀하게 그렇게 자기 꺽어짐과 죽음을 경험하면서 예수를 닮아가게 될때 교회 전체가 그렇게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면서 그렇게 변화되어 간 개개인의 변화만큼 교회는 예수를 닮은 그리스도의 지체의 모습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은 그 말씀에 반응할 수 있는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생겨지게 도는 것이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말할 때 그 속에서 정동이 일어나고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눈물이 솟아나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위해 당했던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마치 해산한 어미가 그 낳은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그 영혼을 위해서 봉사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란 말이죠. 이게 진정한 교회예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야 말로 여러분들이야 말로 나의 동역자예요. 그리고 여러분들이야 말로 나를 지나쳐서 교회에서 머리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잡혀 있는 거룩한 동역자들이예요. 사도바울이 머라고 했어요. 이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느니라 그랬어요. 그래서 이것을 지극한 영광으로 알아야 되요. 가고 오는 날 동안 잠시 지나는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속에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고 손에 붙잡은 부귀와 기쁨가운데 지속되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어요?
주님 앞에 갔을 때 아무것도 한 것은 없지만 이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고 힘 닿는대로 이 교회에서 주님이 붙여주시는 영혼들을 위해서 능력은 없었지만 눈물로 기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나를 끊임없이 희생하고 누구처럼 말에 능해서 입을 열면 수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그런 말의 능력은 없었지만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없었지만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사랑도 없었지만은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품고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시는 영혼을 힘 닿는데까지 돌보며 매순간 매순간 내가 영혼을 섬길 수 없다는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주님을 의존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그 인생은 하나님 앞에 절대로 작은 인생이 아니예요. 그래서 그만두지 마세요. 이번에도 구역장들 거의 다 새로 하셨고 새로 들어오신 분들도 얼굴도 눈에 띄는데 이게 일년짜리가 아니예요. 이거는 그냥 운명처럼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내게 힘이 있는 동안 이것은 나의 운명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서......
<찬양 : 고난과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냥 좋고 기쁘기만 한 일이면 우리 같은 사람에게 차례가 왔겠습니까? 고난이 올 때마다 영혼을 위해 지는 부담이 너무 크다고 느낄때마다 그 때마다 나혼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이 나에게 깨닫게 해주시니 이게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맡은 목양지는 내 영혼의 성적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목양지를 보면서 병든 영혼을 보면서 우리는 병든 내 영혼의 한 부분을 봅니다. 그래서 구역장인 여러분의 눈에 눈물이 마르지 말아야 해요. 그러면서 하나님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속에 채워야 해야 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고난만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영혼을 섬기는 아픔이 있을 때 하나님은 아무도 할 수 없는 남들이 넘볼 수 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들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난해 부끄러우면서도 올해는 나아지려나.’ 하고 감당하고 또 감당하고 회개하며 감당하고 감사하며 감당하고 하면서 이 섬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예요.
어미의 마음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의 구역의 순에 사랑하는 지체들을 사랑으로 깊이 품어 안고 그리고 아픔속에서도 그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꼴을 먹이는 이 일에 헌신합시다. 우리이미 고백했잖아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나는 내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마음을 쏟읍시다. 마음을 쏟읍시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 양떼와 소떼에 마음을 두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양떼에게 마음을 둡시다. 이 영혼들의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도록 기도할 수 없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대신 회개해 주고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겨 주님께 칭찬받는 사랑하는 목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기도할 때에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 부름받아 영혼을 맡았사오니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이 그들을 품으셨더라면 헌신하셨을 그 마음으로 주님의 귀한 형상을 이루기까지 애미의 마음으로 애비의 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 다같이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