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상반기 교리반
(201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강 2010.3.27 1
2강 2010.4.3 9
3강 2010.4.10 23
4강 2010.4.17 43
5강 2010.4.24 62
6강 2010.5.15 88
7강 2010.5.22 112
8강 2010.5.29 130
9강 2010.6.5 153
10강 2010.6.19 182
11강 2010.7.10 189
1 강
I. 서론
여기서 여러분들이 저와 한 학기를 공부하고 나면, 열린교회 뜰을 지나드는 사람들이 우습게 보일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아마 교리반 공부 역사 중에서 가장 많이 모인 클래스 일겁니다. 원래 첫 날은 제가 등장을 안 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이 많이 오셨다고 해서 등장을 했고, 왜 교리 교육이 필요한지 바람같이 설명을 하고 시간이 되면 1,2,3과까지 나갈까 생각중입니다.
여러분들이 교리반을 마치게 되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칠 자격을 줍니다. 여기까지 해야 정상적인 교사로서의 교육을 마치는 것입니다. 이 후에 구역장, 교사들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리공부를 열심히 잘하고 나면 뚜렷하게 놀라운 변화가 찾아오는데, 첫 번째로 설교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로 이상하게 감동을 받는데 남는게 없다는 신앙을 갖은 사람들과 세 번째는 이해는 되는데 감동은 없다 라는 사람들이 전부 치유가 됩니다.
II. 지,정,의의 균형과 기초의 중요성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지식에만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감정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주 위험하면서도 사단의 유혹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휘둘리게 쉽습니다. 또 의지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도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된 생명으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살수록 자기의가 강해지기 때문에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세가지, 지,정,의로 구별되어 나타나지만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영혼에 기원을 둔 각각 다른 정신의 작용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없이도 지식으로 신앙을 찾을 수 있고, 감정으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영혼의 변화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의지 역시 동일합니다) 지,정,의가 분리되어 파편화된 형태로 작용하는 것은 영혼에 직접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통일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처음 신앙을 배울 때 올바로 배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처음에 어떻게 배우는가가 평생을 좌우한다).
제가 타이핑을 친지가 76년도부터 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타이핑을 치고 있습니다만, 처음 배울 때 독수리 타법으로 시작을 해서 지금도 오류가 많습니다. 지금은 아예 포기하고 꼭 쳐야 될 것만 치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똑바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똑바로 배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일에 충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교회를 가는 곳 마다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서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사람을 보고 기특해서 생각하기를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아무도 안하려고 하는 더러운 화장실 청소를 매번 잘하는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 그 사람은 신앙심이 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물었더니, 옛날에 부흥사가 그 사람에게 화장실 청소하면 건강을 주신다고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화장실 청소를 했고 건강도 찾았다고 했습니다. 말씀도 있고, 순종도 있고, 확증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최고의 신념은 화장실 청소였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있을 때 교회는 불편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의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대머리, 배나온 사람, 허리 아프다고 빌빌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세 부류의 사람의 특징이 이제 모두 저에게 다 있습니다. 영화에서 흔들의자를 보고 멋있어서 하나 샀습니다. 거기에 앉아서 8시간 동안 책을 썼습니다. 긴장이 다 풀리고 일어서려는 순간 몸이 말을 듣질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의 불행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허리에 이상이 오기 시작해서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느 의사에게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말하기를, “선생님, 갑자기라는 것은 우리 몸에 없습니다. 오래전부터 잘못된 습관이 누적이 되었다가 어느 날 한 순간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초를 단단히 세우고, 쌓을 때는 하나씩 정교하게 세워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리를 쌓을 때 올바르게 교리를 하나씩 쌓으며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이 진정한 기쁨을 갖게 됩니다.
Ⅲ. 기독교 사상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종교이기도 하지만 또한 사상입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철학자 박종옹씨의 말에 의하면 “그것에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서 그것을 따라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자기화된 신념의 체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사상입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직관이나 느낌에 의한것을 사상이라고 하지 않고,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보의 양이 있고 그것을 체계화해서 그래서 자기가 살아가는 신념과 함께 어울어져서 이론을 갖추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여기 서 있다고 할 때, 인간은 세 가지 정도의 사물에 둘러쌓여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물이라고 해서 이상하지만 라틴어에서는 하나님을 “렉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계십니다. 그 다음에 내 주위에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자연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대상을 마주하는 즉자적 존재인 나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세 존재, 마지막 나까지 네 존재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올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신학이 제공을 해줍니다. 인간에 대한 지식은 인문학이 제공 해줍니다. 문사철의 전통적인 삼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학, 역사, 철학 이런 것들이 제공해줍니다. 자연에 대한 것은 자연 과학이 제공해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 있는데,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은 이 세계를 아는 만큼만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체 깨달은 자기 자신은 진정으로 자기를 안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도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식의 체계가 하나님이 어떤분인가를 잘 안다고 칩시다. 그것이 있어야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과 자연을 정확하게 알게 되는데, 하나님을 모르고 자연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 기가 막히게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상들에 대해서는 설명을 잘 하지만 왜 그것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의학을 예로 들자면, 의학은 우리의 몸에 있는 원인과 결과를 다루는 것입니다.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원인과 결과를 종합하는 것인데, 즉 달라보여도 같은 것들은 종합을 하고 같아 보여도 다른 것은 분석을 해서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입니다. 몸에 대해서 그런 것을 의학이라 하고 생명 현상에 대해서는 생물학이라고 하고 공학에 대해서라면 공학이라고 하고, 경제현상에 대해서는 경제학, 정치에 대해서는 정치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원래 있는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설명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48년 동안 치과를 가지 않았습니다. 요즘에 치과를 가고 있는데, 치과를 가고 깜짝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치과질환이 있으면 심근경색, 뇌경색, 췌장암등 온갖 질병들에 노출된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잇몸을 통해서 염증이 생기고 균이 들어가고 등등의 작용으로 인해 온 몸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에 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보이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다해도 결국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것은 의학에서 설명을 못합니다. “심장이 왜 뛰는가“ ”왜 사람이 호흡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살기 싫으면 숨을 안쉬는가“ 이런 것들은 설명이 안됩니다. 모든 학문들이 모든 것을 기가 막히게 설명을 한다고 주장을 해도 그 학문의 토대가 되고 마지막 결과가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을 신학 지식이 주게 됩니다.
Ⅳ. 신학의 의미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즉 신학 공부(교리공부 혹은 신앙을 통한 앎)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교리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의 목표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즉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목표로 하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음을 믿고, 창조된 것들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들을 믿으며 이해하고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권의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2천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2천권 갖고 있는 사람은 분류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만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트럭에다 싣고 와서 쏟아부었습니다. 누가 진정한 의미에서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이천권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열린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거나 강의를 듣거나 할 때, 태어나서 생전 못 들어 본 이야기는 별로 없습니다. 결론은 사랑하라, 기도하라, 순종하라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자기의 신앙 속에 체계화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여러 가지 지식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 속에서 물어볼 것이 너무 많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교리를 올바로 배우고 신앙적으로 정리가 되어 가면 점점 물어 볼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설교 듣고,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이 어울어지면서 신앙 생활을 해나아가니까 물어볼 것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 매일 성경을 읽으실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데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십니까,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통계적으로 30%정도 뿐입니다. 나머지는 그냥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물론 안 읽는 것 보다는 낫습니다. 왜냐면 적어도 최소한 의무를 다 했다는 뿌듯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물어보면 성경을 매일매일 읽는 사람들도 성경읽기가 나의 신앙생활에 강력한 추동적인 영향을 나에게 주냐고 물을 때 아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아는 만큼만 보입니다. 자기가 성경을 읽으면서 질문이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이 떠오르고 성경을 향하여 질문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아는 것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아는 것이 없을 때 우리는 질문도 없게 됩니다.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인생을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지식도 성경 읽는데 도움이 됩니다. 초등학교 1학년의 아이가 “괴로운 인생길“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특별한 것 없어도 인생 짬밥이 많아지면 ”인생은 나그네 길이요 수고와 슬픔뿐이요“ 어느 날 술김에 성경을 읽어도 울컥하면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도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인간의 감정이 영혼의 변화 없이도 얼마든지 움직여질 수 있습니다. 굉장히 은혜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삶은 변화되지 않는 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요점을 짧은 시간 안에 빨리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가지를 같이 병행해 나갑니다. 그것은 골격이 무엇인가에 대한 상세한 공부와 성경 자체를 읽는 것을 같이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총체적인 사상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연역적인 방법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납적인 방법으로 다시 한번 공부합니다.
공부 중에서 단연 우선 되는 것은 전체 흐름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오자마자 세례 교육을 시키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신약과 구약 개관 학교에서 공부하며 성경을 교리 공부하는 중에도 계속 읽어나가면 교리가 성경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이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맥을 찾아내는 것 같은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설교가 점점 보이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의 신비를 체험하며 감격하게 된다.
여러분들은 루이스 벌코프의 기독교 교리요약을 모두 구입 하셨을 것입니다. 이 책 전체를 여러분들 머리에 그대로 넣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자다가 일어나서 과를 외워보라 하면 종교, 계시, 성경, 하나님등 정리가 완벽히 될 수 있도록, 그리고 메모를 노트에 따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책 페이지 남는 공간에 아주 깨알 같이 메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교리 공부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출발일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기독교 신학 개론』이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기독교 교리 요약이 확장된 것이 기독교 신학 개론이고 기독교 신학 개론이 확장 된 것이 7권으로 된 책입니다. 7권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기독교 교리 요약과 기독교 신학 개론 두 권만 여러분들이 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기독교 교리 요약 책 전체를 외우다시피 공부하게 될 것이고, 기독교 신학 개론을 통해서는 비교 신학으로서 교파들 간의 교리가 왜 다른가를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왜 기독교를 믿을 수밖에 없는가를 확고히 하며, 이것이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지식, 성경적인 지식, 교리적인 지식, 실천적인 지식을 쌓아 나가게 될 것입니다.
열린 교회에 와서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났어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교리반에 와서 깊이 은혜를 받고 확신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확률적으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매우 적은 것을 보게 됩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를 펼쳐놓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교회 400명 정도 됩니다. 그런 실력을 교리반에서 쌓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 맡에 성경과 두 권의 책을 주는데, (두 권은 기독교 교리 요약과 기독교 신학 개론) 이것을 항상 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화반 들어가서는 기독교 강요를 놓고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가엾어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유능하게 상담을 해줄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방식은 호기심을 갖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삶 전체가 어울어지면서 같이 하나님을 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받은 경건 카드는 평소에 여러분들이 하든 말든 하는 것들인데 교리반은 공부뿐만 아니라 생활에서의 실천까지도 함께 공부해 나갑니다. 제가 아는 지인을 만났는데 휴식이 무엇인지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해야 하는 것은 읽어야 될 책을 읽는 것이고 휴식이라고 하는 것은 평소에 읽고 싶은 것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반 끝날 때까지 6월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과 같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기왕에 할 거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노력하지 않는 천재가 노력하는 사람을 못 당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못 당하듯이 즐기는 마음으로 공부합시다.
제 바램은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이 과정은 열린 교회 4학년정도에서 모두 소화하는 것과 성인들을 위한 것은 구원과 하나님의...같은 책 7권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Ⅴ. 교리의 7가지 기본 체계
기독교 교리 전체의 체계는 7가지로 나눕니다. 서론이 있고 하나님(신론),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론, 인간이 타락함으로 기독론(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론,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론, 교회에서 기다리는 종말론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① 서론은 3가지로 나눕니다. 종교, 계시, 성경으로 다룹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믿고 있는 종교,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아는 계시. 그 계시가 모여 하나의 책을 이룬 성경입니다.
② 신론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하나님의 속성), 무슨 일을 하시는가(하나님의 하시는 일)로 나눕니다. 창조, 섭리, 보존 등으로 나옵니다.
③ 인간론은 시기에 따라서 타락 전과 타락 후, 구원받은 후의 상태로 나눕니다.
④ 기독론은 1부가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무슨 일을 하시는가,로 나누고, 성자는 누구이고, 어떻게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가를 나눕니다. 2부에서는 그분의 구원 사역을 다룹니다. 속죄, 제사상직, 왕직을 다룹니다.
⑤ 구원론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구원하시는가를 다룹니다. 중생, 회심, 성화가 구원론에서 나옵니다. 신앙이 미끄러졌을 때 어떻게 해야합니까 기도를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설교들이 구원론 속에서 나옵니다.
⑥ 교회론은 1부는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슨 일을 하는가, 성례, 말씀 선포, 권징,등을 다룹니다. 얼마전에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라는 교제로 구역공부했죠? 그것이 결국은 교회론 속에 나오는 일부입니다. 그런 내용이 우리가 배우는 교리속에 모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리 교리책이 두꺼워도 그것은 기본에 불과합니다. 한없이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⑦ 종말론은 종말의 재앙, 천년왕국, 부활, 심판, 재림, 영광 등을 다룹니다.
그래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은 창조로부터 시작을 했기 때문에 신론, 종말론, 기독론은 조금 다르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구원론의 고유한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2 강
1부 서론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전체적으로 교리의 체계전체를 외웠습니다. 제일 먼저 서론이 나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니까 신론,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론, 인간이 죄를 범죄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기독론, 그래서 구원하신 구원론,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론, 교회에서 종말론이라는 것으로 외웠습니다.
1장 종교
1) 하나님의 형상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형상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물들의 조각과 같은 형상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형상에서 핵심적인 부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인간론에 들어가서 좀 더 상세하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을 만드셨는데, 만드신 인간과 하나님은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한 인격적인 사귐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셔야 했고, 하나님의 형상은 이러한 인간의 영혼의 작용과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 속에서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사물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 닮은 것이 인간이고, 영혼과 육체로 인간이 이루어지는데 인간 중에서도 특별히 인간의 영혼과 영혼의 작용이야 말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장 잘 닮은 피조물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영혼을 아는 지식과 매우 일치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 인간은 자신을 알고 자신을 올바로 아는 분량과 크기 만큼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 “인간을 연구하라”라고 가르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을 알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면 후행적으로 저절로 따라오는 지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과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2) 인간의 오관적 판단의 제한성
지난 시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4중의 지식,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 자연 세계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 자기에 대한 지식 중 가장 근원적인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아는데, 그것을 아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아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이성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우리들이 말하는 “있다, 없다,”는 부정확한 말입니다. 우리들이 만약 과학을 공부해서 시간이 흐르면 물이 증발한다는 사실을 배우지 않았다면, 여기에 물이 놓여있고, 몇 일 동안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방을 잠가두고, 몇 일 후에 들어왔을 때, 이 물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본다면 얼마나 신비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있다, 없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시각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원래 처음부터 수소 두 분자와 산소 한 분자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소와 산소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 하는 양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냉동실에 넣으면 얼음이 되고, 끓이면 김이 되고, 김이 수증기가 되고, 더 단계를 지나면 아예 수소와 산소로 흩어져도, 우리가 이 물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없어졌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각은 대게 빛의 파장을 통해서 보게 되는데, 빛의 파장 중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파장은 지극히 제한된 파장입니다. 그 파장을 넘어서거나 미치지 못하면 볼 수 없습니다. 수많은 소리가 들려도 그 소리 중 우리들이 청취 가능한 대역은 지극히 제한적인 대역입니다. 음의 파장이 워낙 긴 장파나 짧은 초단파는 우리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로서는 폭발하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소리도 우리는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피부에는 통점과 압점이 있습니다. 통점은 고통을 느끼는 지점이고 압점은 누르는 힘을 느끼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만약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지점에 고통을 주면 아프지 않습니다. 우리의 혓바닥은 위에서부터 쓴맛, 양쪽에 신맛, 혀 끝에 단맛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단것을 쓴맛을 맛보는 혀에 발라버리면 “단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있다, 없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더듬이와 같은 오관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냄새 맡아지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눈을 감고 아무것도 없다 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지성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를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지성이라고 합니다. 지성은 다시 둘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판단 능력인 오성과 추론 능력인 이성으로 나뉘어 집니다. 우리의 많은 학문적인 지식의 체계는 추론 기능인 이성을 통해서 습득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오관을 통해서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는 것들은 오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인데, 믿음은 바로 이 오성의 행사입니다.
[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시리즈 - 인간의 이성과 오성에 대한 설교 참조 ]
문제는 올바로 하나님을 아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는 희미한 가능성을 주셨는데, 올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의 통로를 따라서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데, 그릇된 자료들을 사용해서 그릇된 세계관에 붙잡히게 되면 하나님을 잘못 해석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한 사상의 지적들이 바로 이방종교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에 관해서 알기는 알았는데, 그것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을 때 생겨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인간을 창조 하셨을 때 두 가지 인식능력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신앙이고 둘째는 이성입니다. 이런 신앙과 이성의 도움을 함께 받아야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올바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를 릴리젼(religion)이라고 하는데 라틴어 릴리게레(relegere)에서 옵니다. 이것은 “반복하다“라는 뜻입니다.
4) 구약과 신약적 의미로서의 종교
종교를 구약적인 용어로는 “경외”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공경의 정신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의 정신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아는 것이 훨씬 더 강하게 부각되어집니다. 좀 더 설명을 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느끼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자신의 질적인 차이입니다. 무한한 질적 차이입니다. 거기에서 커다란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더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을 숭배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을 구약에서 경외사상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 볼 때, 두려움과 숭경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음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멀리 떠나서 죽을 인간들이지만 그러나 너희가 구원받을 길이 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를 위해 준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응이 생겨나는 데 그것이 신앙입니다.
5)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
구약의 숭경과 신약의 신앙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꼭 같은 신앙의 본질을 하나님께서 동일한 것을 다른 면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약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결국 구약에서는 경외 사상을 말하고 신약에서는 믿음 사상을 말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계시적인 발전과정에서 전개되어져 오는 것이지만 핵심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핵심은 첫 째로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으신 분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미천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아주 겸비해지게 됩니다. 거룩하심의 두 번째 요소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이것은 성질에 있어서 무한한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인간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도 사랑, 정의 등이 있습니다.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같은 것들은 인간에게 없지만, 이런 사랑, 정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비슷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것이고 인간의 사랑은 불안전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사랑이 대단히 크게 느껴지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자기의 사랑은 아주 더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때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심의 본질이며,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존재적 초월성“이며 ”도덕적 완전성“이라고 합니다. 존재적 초월성의 효과는 겸비함이고, 도덕적 완전성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자신이 죄인이며 미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본질입니다.
6) 경건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떻게 수렴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께 대해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구약에서는 경외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이시고 신약에서는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이십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전달해주는 가장 확실한 통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배우며 인간은 여기에서 떨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가운데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달려 죽어야 할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떨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대속은 우리 인간들을 버리지 않고 다시 구원받아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느끼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으면서도 거기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신비하게 이끌리는 사랑을 함께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경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경건은 숭경 사상을 통해서 자기 사상으로, 신약 시대에는 복음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으로 나가면서 신약이나 구약이나 경건의 일치성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것을 복음적 경건이라고 말할 때에는 복음에 계시된 대로 제시된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면서 그 하나님을 숭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경건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이 자신의 마음과 언어와 삶이라고 하는 세 방면에 골고루 적용되어서 나타날 때 이것이 바로 성도의 거룩한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과 삶을 움직이는 핵심에는 항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정당한 지식이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머리를 주신 것은 인간의 좌우측을 균형 잡으라고 하나님이 역학적 디자인으로 얹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머리를 우리의 몸 가장 위에 두신 것입니다.
7) 인간의 의무
모든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죄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을 두고 피해자라고 여기면 안됩니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악입니다. 무지하게 사는 것은 악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머리를 주신 것은 열심히 배워서 밥벌어먹고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제일 첫 째 용도가 하나님을 알라고 지성과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주를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종교가 인간의 운명을 현저하게 바꾸는 이유는 하나님 혹은 신에 대한 앎을 전달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것이 잘못된 통로가 주어질 때에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갖게 하는 통로를 붙들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올바르지 않는 종교를 갖는 것은 차라리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에 더 어려운 방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알 수 있도록 세 가지 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책(만물) 인간 마음의 책,(인간) 계시의 책(성경)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성경이고 나머지는 보조적인 자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액기스가 성경입니다. 성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면 거기에서 참된 종교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 때에 사람이 이성과 오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을 통해서 습득하고 이것을 초월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습득하게 되는데 그것이 성경책입니다.
좋은 믿음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더 많은 앎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입니다. 이성이 발달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는 이성이 덜 발달해도 신앙이 훌륭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 때에 아는 것의 목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 지식,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목표입니다.
신학 지식을 얻는 목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위해서입니다. 습득하는 수단은 믿음과 이성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아멘 하고 깨닫는 것은 믿음입니다. 아멘 하고 믿은 다음에는 그것이 왜 나에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그 속에서 믿음을 기초로 이성적으로 하나하나씩 “나는 왜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가”를 탐구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림 없게 됩니다.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절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공부하러 태어났다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 공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하나님을 공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중심이 되어 걸어가야 한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나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생기게 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이들이 엄마 젖을 먹고 부쩍부쩍 자라듯이, 주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유익은 논리입니다. 논리는 갖추면 믿음이 조금 식어도 자신의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는 것은 떠날 수 없습니다. 뜨거운 신앙은 있는데 논리가 없는 사람은 신앙이 꺼졌을 때 옛날에 받아들인 것도 의심하고 아무것도 안남게 됩니다. 하지만 논리가 있는 사람은 신앙이 식어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거룩하시고 존재론적으로 초월하시고 도덕적으로 완전하시고 나는 거기에 지음받은 인간일 뿐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떠나지 못합니다. 둘 다 있을 때 최상의 삶입니다. 논리에 불이 붙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강한 확신이 듭니다. 참된 종교를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참된 학문을 통해서 이성으로 논리를 터득하여 자기가 그것을 왜 믿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을 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거기에서 참된 회심과 참된 변화가 일어납니다.
B. 종교의 자리
이곳에서는 종교의 자리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종교의 자리가 지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감정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의지에 생각하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지성 - 종교의 자리를 지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교로 볼 수 있습니다. 불교 철학은 굉장합니다. 아마 인류 역사에 인간들이 세운 철학 가운데 가장 현란한 철학이 불교 철학일 것입니다. 하나의 커다란 철학 체계이며 그 깊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감정 - 종교의 자리를 감정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의 신비종교들이 그러합니다. 체험하고 느껴질 때 이것이 종교구나 생각합니다. 미신이 대표적입니다.
의지 - 종교의 자리를 의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교가 대표적입니다. 감정은 필요 없이 올바른 이성에 기초해서 행동을 하는 것을 종교의 본질로 봅니다. 그래서 유교는 겉치레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김경애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유림에서 발칵 뒤집혔는데, 뒤집힌 것 자체가 성숙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종교의 자리를 인간의 마음이라고 봅니다. 성서심리학에 의하면 마음은 영원의 중심적 기관입니다.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인간의 모든 생활 사상, 감정, 의지의 모든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는 한 인간의 지혜, 지성, 감정, 도덕생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이 종교의 본질에 대한 바른 견해입니다. (영원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 “선한 의지“시리즈 참조)
C. 종교의 기원
종교의 기원에 대한 여러 학자간의 잘못된 학설들이 존재하는데, 종교를 인간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학설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인간이 자연에게 경배하다가 발전한 것이 종교라고 주장하는 학설,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자기가 이루지기를 원하는 것을 종교 속에 투영했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학설들로 종교의 본질을 왜곡시켜왔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포이에르 바하입니다. 포이에르가 이 논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사상이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포이에르 바하,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앵겔스 이런 사람들이 나오면서 공산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놓고, 그 다음에 스탈린, 레닌, 마오쩌둥(모택동) 이런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실천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은 20세기의 공산주의의 실험운동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종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11p 마지막 단락을 보면, 성경만이 종교의 기원에 관한 믿을만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종교적인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한 대상자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경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특히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음을 확실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봉사를 요구하고 계시며 어떤 예배와 봉사를 기뻐받으시는지를 하나님이 스스로 결정하신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되 자기 형상따라 지으셔서 이 계시를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고 영화롭게 하고픈 마음이 나도록 인간속에 충동을 심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실 때에 그것이 진리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첫 장 종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장 계시
D.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계시는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여기서 어려운 것은 인간은 하나님이 당신을 알도록 창조하셨는데 인간에게 희미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가능성은 너무 작아서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알려고 몰두하다가 보면 이방종교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먼저 당신 자신이 우리가 죄인이어서 눈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잘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계시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의지적으로 인간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보여 준다고 그럴 때 물질을 보고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에게 보여주신다고 할 때 그것은 사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계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방식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나뉘어 집니다.
먼저 일반 계시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간은 알 수 가 없습니다. 마치 햇빛을 직접 보고 태양을 알 수 없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들여다 볼 때에는 나타나는 유일한 반응은 “모르겠다”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보는 관점에서 하나님은 만물 즉, 자연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신 것들을 통해 올바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일반계시의 불충분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충분한 만물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비로서 알게 됩니다. 일반 계시라는 것은 접근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이다“ 인간이 결국 둘로 나뉘게 되면 신앙을 가진 사람, 즉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참 신앙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됩니다. 누구든지 간에 일반적으로 계시에 대해서 접근이 가능합니다. 특별계시는 참 신앙을 가진 자만 접근할 수 있는 제한된 계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전달해주시려고 할 때 반드시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일반계시는 자연적인 것을 매개체로 합니다. 그래서 자연 만물, 인간의 경험, 역사, 일반적인 인간의 마음이 구조들로 매개로 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반 계시는 모든 인간이 접근이 가능하므로 하나님의 계시와 접촉은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A라고 알려 주셨을 때,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선입견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A’가 아니라 ‘B’로 해석해 버리게 됩니다. 이방의 종교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의 만물들은 창조되었을 때에는 (인간이 범죄하기 이전) 땅이 저주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타락하면서 땅이 저주를 받으면서 그 자체가 빛을 잃어버립니다. 빛을 잃어버린 것을 바라보는 인간에게는 더 큰 어려움이 생기는데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타락한 인간은 어두워지게 된 눈으로 만물을 바라보게 됨으로 수많은 오해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계시의 불충분성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특별 계시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일반 계시는 매개체가 만물이었다면, 특별 계시는 매개체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접근을 할 수 없고, 오직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현현
하나님의 불과 연기, 구름 속에서 나타나시고, 천사의 모습으로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모두 매개체일뿐이고 하나님 자신은 그런 분이 아니고 누구도 “하나님을 봤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직접적 전달
하나님은 인간이 들을 수 있도록 분명하게 사람의 말로 인간에게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기록과 함께 끝났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하나님이 권위 있게 말씀하시며 그 들은 말씀이 권위를 갖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적
이적은 하나님이 기적을 배푸시는 것인데, 이 놀라운 기적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필연적인 한 방편입니다. 이적은 능력의 표현이며 특별한 인재의 증표며 영적 진리를 상징하며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능력의 징조입니다. 이적 중에 최대 이적은 성육신 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최대의 이적입니다. 바로 그런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 세계 전체가 회복되어가며 본래의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 종교의 이단적 해석에 의해 파생된 사상들
펠라기우스주의 (도덕주의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율적인 의지를 하나님의 은혜보다 훨씬 더 강조하는 오히려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2차 대각성 운동 이후 찰스 피니에 의해 부각되는데, 원죄를 부인하며 죄를 짓기로 선택하는 순간에만 죄인으로 떨어지고 타락한다고 주장합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우리의 빚을 청산 할 수 없고, 단지 회개를 권유하는 도덕적 모범과 영향력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속죄는 미덕을 권장 하기 위한 자극제일 뿐이고, 속죄가 빚의 실제적인 청산이라는 견해를 거부하기 때문에 피니는 “속죄 그 자체가 누구의 구원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라고 결론 짓습니다.
합리주의 (실용주의)
합리주의자들은 일반적인 통칭인데, 초이성적인 것들을 믿지 않습니다.
자연신론주의
자연신론자들은 "deism"이라고 합니다. 자연신론자들은 이성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접목시킨 혼합사상인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법칙도 만드신 후 하나님은 법칙대로 움직이게 하시고 당신은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가리킵니다. 도덕 세계 속에도 그런 것들이 있다고 보는 혼합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주의는 하나님이 이 세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법칙만이 존재하며 그 법칙을 돌리는 원인은 신이라고 해석합니다.
일반 계시는 불충분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십자가로 돌아가게 해서 구원을 얻게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일반 계시는 가치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 계시는 이교의 진정한 확립요소를 설명해줍니다. 이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하나님의 후손임을 넓은 의미에서 깨닫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올바르게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고 두려워하여 악을 행하지 않게 되고 본성으로는 율법의 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와 무지와 암흑 속에서 생활하며 진리를 곡해하지만 말씀의 조명과 성령의 일반적 작용에는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혀 없다고 믿는 사람들도 큰일을 만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신의 존재, 영원한 도덕 기준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악을 행하면 양심적으로 고통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 뿌듯해 합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성령의 일반적 작용입니다.
성령의 작용은 신자, 불신자 모두에게 작용한다. X
성령의 구원하시는 작용은 꼭 신자에게만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불신자에게도 있다. X
그래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 계시는 특별 계시의 배경을 형성해줌으로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 없이 완전히 이해 될 수 없습니다. 과학과 역사는 성경 기록에 대해 빛을 던져줍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는데 이것이 일반 계시이고,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구속주로 계시하시는데 이것은 특별 계시입니다. 인간이 창조 만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나는 죄인이며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나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순서는 창조주가 먼저이고 창조에서 구속이 오지만 알 때에는 거꾸로 반대가 되어서 복음을 통해서 구속주를 먼저 알고 그 다음에 창조주를 알아가게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먼저 구속주를 알고, 다음에 창조주를 알고 일반 계시를 통해서 만물들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배움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너무 아름답다는 사실을 감탄하게 되며 또 다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즉, 구속주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창조주를 통해 창조주를 알고 창조 만물들을 배움으로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순서입니다. 창조주와 구속주를 알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켜 이중 지식이라고 합니다. 신에 대한 이중적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19p
“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구원의 계시인데. 죄인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 실현 방법을 보여준다. 특별 계시야 말로 인간의 마음을 조명하여 그의 뜻을 선한 데로 이끌어 주며,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주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집을 준비케 하는 계시인 것이다. 특별 계시는 우리에게 구속의 메시지를 전해 줄 뿐 아니라, 구속 사건을 알게 해준다. 우리를 지식으로 부하게 하며 죄인을 성도로 변하게 하며 우리 생활을 변화 시켜 준다. 이 계시는 진보적이다. 속죄의 위대한 진리가 처음에는 희미하게 나타나고 점진적으로 분명해지고 마침내 신약에 와서 이 진리의 충족함과 아름다움이 현저해진다.”
3 강
3과
A. 성경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계시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감추어져 있던 것을 펼쳐보여주는 것을 계시라고 배웠습니다. 계시에는 일반과 특별이 있으며, 일반 계시는 접근하는 면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접근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특별 계시는 국한 된 사람들에 의해서 접근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일반 계시는 일반적인 인간의 경험, 즉 역사,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구조, 자연 만물들을 매개체로 해서 우리에게 전해지지만, 특별 계시는 아주 특별한 것들, 즉 이적, 신현, 기적이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 전달등으로 특별 계시가 주어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성서(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이런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일반 계시 혹은 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 혹은 초자연 계시가 있는데 일반 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인간의 선악의 기준등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려주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까지는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특별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더욱이 사랑의 하나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되는 구원의 비밀 같은 것은 더더욱 알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일반 계시는 어떤 종류의 효용과 가치가 있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배운 바와 같이 선악의 기준을 알게 하고 양심 같은 것들을 작동시켜서 사회의 일반적인 질서들을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효용성의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다고, 선악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분명해서 핑계할 수 없으리만치 명료하고, 그러나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다는 것 등은 너무나 희미한 것이 일반 계시입니다.
특별 계시는 결국 인간이 타락한 다음에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의 구별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주관적으로 하나님을 자연세계를 통해 올바로 알 수 없으리만치 부패하게 되었고, 자연의 모든 사물들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원래의 풍부한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전해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제약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특별 계시의 필요성입니다. 특별 계시라고 할 때에는 반드시 구원 문제와 관련된다는 것을 먼저 염두해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적, 신현, 하나님의 말씀 전달, 이런 모든 것들은 시간과 특정한 공간 속에서 펼쳐졌다가 그 시간이 끝나거나 공간이 바뀌고 나면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기록으로 남기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록은 문서적 기록일 수 있고, 구전을 통한 기록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똑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주어져야지만 구원의 길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특별 계시의 기록입니다. 특별 계시의 분량이 많다면 그 중에 기록된 것은 지극히 적은 부분입니다. “성경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성경은 기록된 특별 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라진 많은 것들 역시 특별 계시이기는 한데, 지금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지금은 성경 곧 특별 계시,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틀림없습니다. 이런 특별계시는 사도시대의 종결과 함께 끝났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책이 완결 되었다는 증언이 나옵니다. 계시록에는 그 말씀에 보태거나 감하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으로 된 특별 계시는 끝나고 기록으로 되었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서부터는 사람이 특별 계시를 공부해야 합니다. 연구하는 추론을 통해서 또는 인간의 추론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비추어주시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 이것은 이성으로 이것은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계시의 중심은 구원이기 때문에, 특별 계시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아가는 지식이 증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은 우리의 신앙에 중심이 되니까 오늘날에는 특별한 다른 계시들은 다 사라지고 성경만 남게 된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어떤 뜻인지를 믿고(신앙), 배우고(이성), 이것을 통해서 말씀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하고 깨닫게 될 때, 모든 과정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들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은혜와 지식이 합쳐짐으로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지니라”(벧후 3:18) 라고 말했습니다.
B. 은혜와 진리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지식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관련됩니다. 이것은 또 성령과 관련되고, 다시 또 진리와 관련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 와서 성장반을 통해 예배를 배울 때 ‘영과 진리 안에서’ 그리고 목양을 하는데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처럼, 교회에 와서 밝은 진리의 빛을 깨닫고 그 진리를 따라 살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주어질 때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전달해 주는 것이 목양의 원리입니다. 십자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올바른 도리인 복음을 알아야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우리에 필요합니다. 이것을 가져 오는 것은 성령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두 개의 기둥들이 함께 서 가는 것 입니다. 이것이 열린 교회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화두이고, 교회가 선택한 특징이 아니라, 성경 전 편에 흐르고 있는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키엔티아”(Scientia - ‘지식’을 뜻하는 라틴어)로서 종교개혁자들이 이야기 했던 학문이고, “피에타스”(Pietas - ‘경건’을 뜻하는 라틴어) 경건입니다. 그래서 경건이 먼저 오고 그 뒤에 학문이 오는 것입니다. 최고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은 “Verus philosophus est amator Dei”(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신국론)라고 말했고, 마틴 루터 역시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이미 철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교리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진리와 은혜를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진리와 은혜는 성경을 통해서만 나옵니다.
C. 영감과 성경의 무오성
오늘은 영감이라는 교리입니다. 영감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이고, 라틴어로는 “데오프뉴스티에”(theopneustie), 즉 ‘데오’(theo) 하나님을 의미라고 ‘프뉴’(pneu)는 불어넣다 혹은 성령, 바람을 의미하는 명사로서 하나님이 후~하고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감의 교리는 어떻게 사람이 기록한 문학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이 연필을 사용해서 작품을 기록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기록이라는 것이 있고, 또 기록하기 이전의 사상이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자 에게 생각이나 사상을 주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록이 될 때는 언어의 형태로 기록이 되고, 사상과 기록 행위를 거쳐 언어를 통해서 저술의 형태로 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완전한 계속성을 이루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렇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상이라는 것은 무정형이고 형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확정적인 비정형의 형태입니다. 있기는 있지만 가상자리가 분명하지 않은 형태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이러한 비확정적이고 비정형적인 것들을 처내버리고 틀을 만들어버립니다. 다시 말해 사상이 언어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어를 채택하고 나면 사고가 언어에 의해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사상이 ‘A’이고 ‘B’가 저술이라고 할 때, 이 둘이 일치한다고 ( 본다 안본다 )
비텐슈타인과 같은 언어철학자들은 인간의 언어를 그릇으로 봅니다. 인간의 언어가 그릇인데 그 그릇에 하나님의 사상과 사고를 담고, 담기는 즉시 그릇 자체가 때가 묻었기 때문에 이 자체가 오염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A’와 ‘B’사이에는 계속성이 없는 것이 됩니다. 똑같은 논리를 적용시키면, 하나님이 올바른 사상을 인간에게 주었다 할지라도 성경 기록자가 갖고 있는 죄성, 즉 인간은 죄인이고 불안전하기 때문에 의도를 잘못 기록할 수도 있고, 두 번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불안전성 때문에 단어의 자음과 모음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의도된 또는 의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잘못 기록할 수 있다. 언어가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한 것이 과연 사상 A를 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인간의 일반적인 경험에 대해 우리는 회의적입니다. 여기서 회의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경험에 회의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있는데, 이 특별계시를 만나서 사상이 되어서 다시 사상이 기록으로 남겨져 오는데 인간에게 있는 일반적인 원칙을 따르면 이 기록은 결함 있는 기록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결함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조치가 없으면 인간의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 자유주의(liberalism) : 삶의 양식을 기준으로 하는 사상, 선악이나 진리의 기준이 없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입니다.
- 비평주의(criticism)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비평하는 사상. 이렇게 비평하는 사람들을 비평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비평주의는 성경론에 관련된 문제이고, 자유주의는 삶의 양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상적인 자유주의는 성서에 관한 비평적인 견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삶을 지향하므로 삶이 자유롭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할때에 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도된 죄성이나 의도되지 않았지만 불안전정, 즉 무능 때문에 오류의 기록이 나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성경을 기록하는 그 시점에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특별히 붙들어 주셔서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영향으로부터 막아주셔서, 하나님이 전달하시고자 하는 사상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사상과 일치하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사상이 기록과 일치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조명하시고 기억을 새롭게 하셔서 붙들어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감이라고 부릅니다.
영감의 결과는 모든 논리적인 고리를 깨고 하나님이 전해주시고자 하시는 사상이 언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표현된 사상으로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오류가 없는 책이 된 것이 영감의 결과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딤후 3:16上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감동이라고 하는 것이 영감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후 하고 불어 넣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으로써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下 ). 그리고 그 성과는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딤후 3:17). 16절이 회심이라면 17절은 성화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바지하는 것이 성경의 기능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영감의 양식을 범위에 따라서 영감의 방식에 따라서 각각 견해 차이가 나뉘어집니다.
D. 영감의 성질
1) 기계적 영감설 (Mechanical Inspiration)
이 학설은 성경의 저자인 인간으로 하여금 성서의 글 하나하나를 받아쓰게 하셨다는 학설입니다. 다른 말로 dictation theory 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즉 저자인 인간을 저술가의 손에 쥐어진 펜 처럼 하나님이 수동적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학설에 의하면, 저자들의 마음이 그들 저서의 내용과 형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각 저자의 독특한 특징들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누가에는 병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희랍의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기독교의 복음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요한의 마음속에 있었던 생각이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 사람들을 향하여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난히 구약의 윤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마태 자신이 정통적인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편지를 유대인들이 읽고 예수님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기계적 영감설로 볼 수 없습니다.
2) 동력적 영감성 (Dynamic Inspiration)
이것은 하나하나가 다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사람 자신에게 천재성을 주어서 역동적으로 위임을 받아서 천재적으로 구원의 비밀에 대해서 서술해 나간 책이 성경이라고 보는 학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적이라고 보지 않는 영감 이론입니다.
3) 유기적 영감설 (Organic Inspiration)
유기적 영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영감을 하시는데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결점과 단점 때문에 야기될 수 있는, 성경을 기록하는데 저해되는 것들만 막아주셨지 학식 높은 사람은 유려한 문장을 쓰도록 논리적인 사람은 논리적인 말로 성경을 기록하도록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는 이야기를. 고기 잡는 사람은 고기 잡는 이야기 많이 하도록 자신의 삶을 가지고 써내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 마다 각각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용어를 사용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셨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올바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세속 문학에서는 자기의 천재성이 발휘되거나 놀라운 생각을 가리켜서 영감이라고 사용합니다. 그래서 천재의 99%는 땀과 눈물이고 1%는 영감이라고 에디슨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영감과 신학에서 이야기 하는 영감은 틀린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세상에서 복지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이야기 하는 구원과 신학을 이야기 하는 구원이 다르듯이 그것은 각각 학문의 분야에 따라서 적시한 용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영감이라는 말은 성경을 기록하던 저자에만 한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 속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 같아도 사실은 인간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할 때는 성령의 조명이(illumination)라고 부릅니다. 라틴어로 illuminatio 라고 합니다. illumination은 ‘비추다’ 라는 의미인데 캄캄하게 어두운데 빛을 비추어 주어서 그 빛이 없었더라면 발견 할 수 없었을 원래 있는 어느 사물을 발견하게 만들어 주는 작용을 가리켜 조명 즉 illumination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용어를 신중하게 사용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E. 영감의 범위
1) 부분적 영감 (Partial Inspiration)
이것은 영감이 되었는데 성경의 기록이 전체적으로 영감되었다고 보지 않고, 부분적으로 어떤 사람은 신약만 영감 되었고 구약은 영감이 안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신약 중에서도 복음서만 영감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르게 산상수훈만 영감되었고 나머지는 다 인간적으로 해설한 것이기 때문에 권위가 떨어진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각자 자신의 주장이고, 우리는 구약 성경 39권 신약 성경 27권 전체 66권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의 의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두 가지 기능을 갖는데, 첫째 믿음과 두 번째 행위의 유일하고 완전한 기준이 됩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유일하고도 충분한 기준이 됩니다.
2) 완전 영감 (Plenary Inspiration)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감 되었다라고 보려면 언어와 사상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한글자 한글자까지 모두 영감되었다고 봐야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글자 한글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성경, 구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신약은 희랍어로 기록되었는데 기록된 것들 가운데 사본이 아니라, 맨 처음 성경 저자가 기록했던 원본(남아있지 않아요)은 글자 하나하나까지도 하나님께서 지도하셔서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서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이 정확하게 언어와 사상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떤 진리를 확정할 때 성경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게 됩니다.
F. 성경의 완전성
성경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개혁주의의 사상은 대조됩니다.
- 로마 가톨릭: 성경이 성경인 이유는 교회가 성경이라고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성경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처음에 성경이라고 나온 것이 아니라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 쓴 편지였고, 이사야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또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에게 쓴 편지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그것이 교회의 인정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섭리적인 경로였고, 이미 성경이 교회가 ‘이것은 성경 말씀이다’라고 인정하기 전에 교회 안에서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권위 있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성경의 정경화입니다. 성경 전체 즉 66권을 가리켜서 정경이라는 부릅니다. 이것을 영어로 ‘Canon‘이라고 합니다. Canon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네라는 말에서 옵니다. 카네는 갈대라는 의미입니다. 갈대를 가지고 자처럼 사용해서 기준으로 사용하며 유래된 말로 Canon 즉 정경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에 둔대 반해 개혁주의는 성경의 권위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교회가 성경을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된다고 본다. 개혁주의자들은 교회가 성서의 절대적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에 반대하며, 하나님 백성의 마음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내적 조명이나 성령의 말씀을 성경보다 높이는 개혁파 일부 종파들(재침례파, 내적 광신비주의, 경건주의의 후기의 종파들)의 견해에도 반대하여, 은혜의 신적 방편으로서의 성경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는데 성경을 통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성경을 풀어서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감동을 주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싶은 신앙심이 생겨나고 순종하고 싶은 의지가 생겨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유익입니다.
“또 그들은 로마 가톨릭과는 반대로 성경의 명백성을 옹호한다.” 이것은 성경이 쉽지 않은 책인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누구의 도움 없이 성경 자체만 마음을 다하여 읽어도 기본적인 구원의 도리는 깨달을 수 있는데 그것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명백성의 의미입니다.
“또 그들은 성경에는 인간이 이해하기에 너무 심오한 신비로운 진리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구원에 필요한 지식은 성경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분명하지 않지만 단순한 방법으로 전달 된 것이므로 구원의 열망하는 자라면 누구나 교회나 성직자의 해석에 의존치 않고 스스로 이 구원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훈련과 공부가 필요합니다.
“끝으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충족성을 옹호했으므로 로마 가톨릭의 유전(교회전통)의 필요성과 재침례파의 내적 광명의 필요성을 부인했다.”
2부 신론
- 신론의 구성
신론의 구성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4과는 하나님의 본질, 5과는 하나님의 명칭, 6과는 하나님의 속성, 7과는 삼위일체가 나옵니다. 여기까지가 1부입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가 나옵니다. 그 리고 8과부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옵니다. 8과는 작정, 9과는 창조, 10과는 섭리, 여기까지가 2부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교리가 끝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관한 교리는 2부로 나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설명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일(사역)에 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한 설명은 작정, 창조, 섭리로 나뉘고, 작정은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하신 것이고 시간 세계 속에서는 창조와 섭리가 이루어집니다. 더 앞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나오게 되는데 하나님의 본질, 즉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하나님의 존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계시 되었는가이고, 속성은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가로 되어있습니다. 정리하면, 1부에서는 하나님의 존재, 존함, 속성을 다루고, 2부에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들인 작정, 창조, 섭리를 다룹니다.
1. 하나님에 관한 지식 (선천적 지식과 후천적 지식)
하나님에 관해서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그것은 맞는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만한 지식(종교)의 씨를 주셨습니다. (칠판으로 설명하는 부분 어떻게 받아 적어야 할지 몰라 밑에 대충 요약함 - 수정필요)
예를 들어, 전에 진리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본 후 ‘아 이것이 진리구나’ 하면서 깜짝 놀랍니다. 진리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세를 부를 때에는 언젠가 이 진리를 봤다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또 다른 예로 어떤 아주머니가 있습니다. 어떤 상태가 됐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 이거구나’ 하면서 행복해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가 행복한 상태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민했고 플라톤도 고민했습니다. 결론은 이 사람이 창조되기 전이든지, 아니면 하나의 커다란 영혼 속에 집단적으로 있던 때든지 간에 뭔가 참된 것과 복된 것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이 사람 속에 넣어주시지 않았더라면 진리를 보았을 때 그것이 진리라고 감탄 할 수 없고, 행복한 상태에 도달 했을 때 그것이 인간이 도달하고자 했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속에 원래 주신 자기가 자각할 수 없는 종교의 씨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적절한 환경을 만나게 될 때 진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모든 사람들 속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욕망과 부패한 기질과 무지에 의해서 더 많이 묻혀있고 어떤 사람은 그런 것들이 덜 묻혀 있기 때문에 비록 올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나는 돈도 싫고 쾌락도 싫고, 참되게 살고 싶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가, 진리를 모르고 천년 동안 황제의 노릇을 하느니, 차라리 진리를 알고 노예처럼 하루를 살다가 행복하게 죽고 싶다’ 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생득적 지식, 혹은 선천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에는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후천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학습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제시에 의해서 깨달아가는 과정이 후천적 지식입니다. 이미 있는 생득적인 지식들을 교육과 환경을 통해서 끌어내어 풍부하게 만들어 내어 그 지식 안에 살게 하는 것이 교육의 사명입니다.
2. 특별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지식
1)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다
4과 자체가 하나님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영어로 ‘Whatness’이고, 라틴어로 ‘퀴디타스’ (Quidditas - 사물의 본성에의 자각)“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Whatness’ 무엇이냐 라는 질문과 ‘Whoness’ 라는 질문이 있는데, 하나님의 무엇이냐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로 나뉜다. ‘Whatness‘는 성품에 관한 문제이고 ’Whoness’는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물을 때에 성경이 몇 가지 답을 주신다. 첫 째는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라고 말씀하신다. “순수한 영이시다”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 4장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다“인데 순수한 영이신데 이것을 가리켜 단순성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Simplicity“라고 부르고 라틴어로는 ”Simplitytas“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제 손에 펜이 들려있습니다. 근데 이 펜은 몇 가지 요소로 되어있는데 구멍이 뚫어진 통과 뒤를 감사고 있는 시커먼 캡과 통속에 들어가는 연필심, 맨 앞에는 펜을 막는 뚜껑으로4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 4가지 요소를 조립하면 펜이 완성됩니다. 다시 말해 각 요소 중 하나의 요소가 없다면 펜이 완성될 수 없는데 네 요소는 서로를 의존합니다. 인간사회에서는 이런 구성 요소가 많을수록 제품이 값비싸고 정교해 보이는 것입니다. 예전의 비행기는 구성 요소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비행기를 보면 구성요소가 백만개로 이루어져있고, 자동차의 부속이 이만개정도로 구성되어있다고 합니다. 즉 서로 의존하며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존재에 있어서, 몇 가지 요소로 되어있다면, 각 요소는 서로 서로 의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하나님은 각 요소 자체만으로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이런 요소가 서로 의존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존재를 이 구성요소의 의존에 기대고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학설들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구성 요소가 없다고 말합니다. 나누고 서로 의존할 수 있는 구성요소를 가지고 계신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이어그램 설명) 하나님의 독립적 속성인데, 무한성, 완전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다음엔 사랑, 자비, 의, 정의, 공의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엉터리같은 설명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설명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비참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나옵니다. 또 불의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며 여기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나옵니다. 또 하나님이 악한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옵니다. 물론 선한 인간과 관계 맺으시면서 선함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을 선하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태양과 같습니다. 봄이 오면 얼음이 졸졸 녹아내리지만, 얼음이 태양과 만나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만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태양이 빛을 비추어서 얼음위에 떨어질 때 얼음이 물로 변하고 이것이 풀뿌리에 도달할 때 풀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균과 만날 때 살균이 되고, 여성들의 피부와 만날 때 선탠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속성의 다발이라고 합니다.
(찬양)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말 알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비로운 빛깔입니다. 내가 고난에 처할 때에도 하나님이 고난에 처한 나와 관계를 맺을 때, 내가 고난에 처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놀라운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악을 행하시는 자들을 징벌하시는 것을 보면서 엄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머리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부가 자연에도 묻어있으니 자연도 공부하고, 사회 속에서도 묻어있으니 사회도 공부하고, 인간에게도 묻어있으니 인간도 공부하고, 무엇보다 그리스도 십자가에 가장 많이 묻어있으니 복음도 공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찬양) 내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신학교 다니던 시절 전철에서 전도할 때 어떤 사람이 당신이 하나님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사람에게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쯤 있습니까, 배를 갈라놓고 아무리 뒤져도 양심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해부학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능적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눈으로 보았느냐고 물어보면 보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 보았느냐고 말하면 우리는 명백히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내 입에서 나가는 바람을 본 사람은 없지만 이 바람으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내 입에서 바람이 나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보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육신으로 보는 것은 봤는데 만약에 다른 것이 비추면 옛날 것을 의심하게 되는데, 그러나 정신으로 또렷하게 보는 것은 아주 놀랍게 우리의 오성을 파고 들어서 마음에 도장을 찍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합니다.
2)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
하나님은 지, 정, 의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에 서로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의지하는 것을 교류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3)하나님은 무한이 완전하시다
4) 하나님과 그의 완전성은 동일하시다
“단순성이란 하나님의 근본적 특성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질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분이 아니시며, 그의 존재하심과 속성이 동일하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p 35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것이고 둘째.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초월적인 것을 뛰어넘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들을 보면서 그 속성이 사람들과 사물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실행되는 방식에 대한 앎을 갖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두 가지가 신앙의 깊이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 안에서 실행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에 대해 감격하게 됩니다.
5장 하나님의 명칭
H. 하나님의 성함
1. 구약에 나타나는 명칭
- 엘로힘(Elohim) - '강하다'라는 뜻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 야웨(Yahweh)- 이스라엘에게만 계시된 이름이 야웨입니다. 혹은 성경에서 여호와라고 나오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성함이 다른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들이고 가장 고유한 하나님이 성함이 야웨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4글자로 됩니다. 구약 히브리어에서는 처음에 모음으로 안쓰고 자음으로만 씁니다. 하나님의 성함이 “Tetragrammaton”이라고 하는데 ‘Tetra’는 넷이고 ‘grammaton’은 글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자신명이라고 합니다. 사실 신명만이 아니고 인명도 사자로 되어있습니다. 이즈하크(Yitzhak) - 이삭(isaac), 아브라함(Abraham) - 아브람(Abram), 이스라엘(Israel) - 야곱(jacob), 이것들을 ‘Tetragrammaton‘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호와라는 발음은 그 이름의 네 자음문자 ’YHWH‘에 아도나이(Adonai)의 모음(ㅕ,ㅗ,ㅏ)을 붙여서 얻어진 것인데, 신성한 이름을 감히 발설 못하여 편의상 그렇게 불렀습니다. 16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그런 까다로운 행위를 인식하지 않고 여호와라는 혼성어를 사용하였으나 여전히 아도나이(’나의 주‘라는 뜻)로 읽는 유대인들로 인해 다른 언어의 성경에는 여호와 대신에 주(Lord)라는 용어가 이를 대체해 버렸다. 20세기 미국개정역본이 여호와(Jehovah)라는 말을 복구함으로써 전면에 다시 등장하였습니다.
6장 하나님의 속성
I. 하나님의 속성
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속한 성품이라 그러는데, 영어로 “Attribute“라고 합니다. 어떤 사물의 구성 요소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엘타, 제타...등등이 있습니다. 이 사물의 이름은 A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알파를 빼면 A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속성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사면에 유리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면 유리창만 있고 이외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차입니다. 그리고 자전거가 있는데, 두 바퀴로 굴러갑니다. 그런데 바퀴가 하나밖에 없다면 그래도 자전거라고 부릅니까? 외발 자전거입니다. 그래서 바퀴는 속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부분입니다. 다른 예로, 건물은 학교인데 공부를 안 가르치는 학교라고 할 때 이것은 학교입니까? 학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기능은 학교의 속성이 됩니다. 속성은 그걸 빼 버리면 절대로 그것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이 속성은 둘로 나뉘는데, 절대적 속성과 보편적 속성이 있습니다.
1. 절대적 속성과 보편적 속성
절대적 속성을 설명하면, 절대라는 말 자체가 대를 끊는 다는 말입니다. 서로 상응하는 것이 대칭이 되는데 그것을 끊어버리는 것인데, 그런 대칭이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 절대적 속성입니다. 이 절대적 속성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에게서 발견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발견되는 속성입니다.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모든 인간에게도 공통적으로 있는 것을 가리켜서 보편적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 절대적 속성의 세가지 요소
1) 하나님의 독립성 (자존성)
당신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독립성, 혹은 자존성이라고 부릅니다. 스스로 계신다. 예를 들어, 이 집은 사람이 만들었고 사람은 그럼 누가 만들었나?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드셨나? 이것은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으면 그분은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립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름다우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독립미, 혹은 하나님의 자존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독립하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추해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을 양떼라고 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기대고 의지하며 사는 것, 거기에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 미를 가리켜서 의존미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알면 이제 여러분들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 막힘 없이 쉽게 읽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읽어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책인지를 알게될 것입니다. 그 내용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논리의 아름다움은 굉장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려운 글 속에 있는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게 아니라서 더 신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인간은 회개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큰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보일 수 있는 아름다움이 두 가지 있습니다. 깊이 회개 할 때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입니다. 이런 독립성은 인간에게는 없는 성품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의존하면서 존재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불변성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 불변성이 아름다워서 인간들도 이것을 따라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한한 향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다못해 연예를 할 때에도 하나님을 흉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선도 하나님을 본 따는 것이고, 모든 인간의 악도 하나님을 본 따는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을 올바로 본뜨는 것이고 악은 하나님을 그릇된 방법으로 본뜨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람을 용서하려 하지 않고 판단하고 정죄하려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보면 재대로 된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칼을 휘두를때 신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을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고하노니 넌 인간이 아니노라. 아멘” 사치가 무엇입니까? 돈을 물 쓰듯 쓰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하지 않으면 사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퍼서 인간에게 나누어주고 소비해도 끝이 없는 분이 하나님이 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닮을 때 신이 나는 것입니다. 방탕이 무엇입니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방탕입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을 말릴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제한의 하나님입니다. 방탕은 그런 하나님처럼 자기도 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방탕이 됩니다.
그럼 반대로 다른 사람을 향한 너그러움을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넉넉함을 올바로 본뜨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본뜨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넉넉하게 해주고 싶은 것인데 그것은 그의 행복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인간이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온화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배우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피하겠사옵나이까”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본뜨는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때, 교회 안에 있는 성도가 삼위 하나님의 교통을 본뜨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르게 본 뜬 것입니다. 그 때 그 안에 인간의 행복이 있고 참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들에 핀 백합을 보면서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공중에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새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는 하나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올바르게 본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본받아야 할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찬양) 그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더 많이 생겨나고 사랑할수록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했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나는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해도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안한다. 만약에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마지막 한 사람만 남는 다면 그가 내가 되도록 나는 그렇게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선택이 아니라 원래의 인간의 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존재와 완전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며 목적과 약속에 있어서도 동일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활동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왕래하시며 자신을 숨기시기도 하시며, 나타나기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후회한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단지 하나님에 대해 인간적 화법으로 표현한 것뿐이므로 실제로는 인간 편에서의 변화를 지적하는 것이다.” p 44
무슨 뜻이냐면 성경을 기록할 때 본질적인 기록 방식과 현상적인 기록방식이 중복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듣는 자들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편에 서서 이해를 돕기위해 기록을 하기도 하고. 하나님 편에서 기록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다“는 말은 현상적인 표현이고,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표현입니다. 본질적으로 지구는 돌지만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 ”해가 떠서 졌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는 것은 진짜 후회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비추시기를 권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인간을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은 친히 시험하지도 않으시고 시험 받지도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고 나옵니다. 시험하신다고 하는 것은 현상적인 표현이고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본질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아브라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놓으라 하시면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져가서 죽이세요는 또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중적으로 묘사를 하는 것이지 모순이 아닙니다. 교리를 공부하게 되면, 모순들처럼 보이는 것들 속에서 모순이 되지 않는 것을 명쾌하게 구별할 수 있고 일관되게 보이는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어디가 모순인지를 지목해 낼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생기게 됩니다.
3) 하나님의 무한성
무한성이라는 것은 한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한정을 갖습니다. 그것을 한정자라고 합니다. 한정자여야지만 인간이 생각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고, 그리고 이름을 가지고 불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한정자입니다. 한정되어진 존재, 한정자만이 인간의 사유 속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한정되지 않는 것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런 한정이 없으면 무한이 뻗어나갑니다. 그것은 피조물로서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리켜 무한정자라고 합니다. “아페이론”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 안에 안 계신다고 말해도 안되고, 이 안에 계신다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계시고, 어떤 면에서는 안 계십니다. “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주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른 의미를 담습니다. “돌멩이가 있다”와 “공기가 있다”와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 라는 것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있습니다. 공기가 있다 하면서 바닥을 뒤지면서 물기를 찾으면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론 없습니다. 그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한정이 없으신 무한정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합니다.
a. 절대적 완전성(존재와 관련)
b. 영원성(시간과 관련) -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보면 시간에 대해서 나옵니다. 천천히 읽어보시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대한 설명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게 온 세계에 통하는 구나 하면서 알수 있습니다. 또한 그 책에 보면 인간이 알 수 없는 이 영원을 아는 방법에 대해 나옵니다. 생각의 사유를 통해서는 영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함으로 영혼을 알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름다움이여, 참된 사랑이여, 그리고 영원이여 ,제가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했나이다” 라며 노래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꼭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영원과 시간에 관하여』라는 열린 마당 세미나가 있습니다.
c. 공간과 관련해서는 무변성 (편재성) - 장소적인 변두리가 없다. 장소적인 한계가 없다.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시다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든지 거하시며 모든 공간을 채우시며, 결코 공간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어디에나 하나님이 안계신곳은 없고 하나님과 똑같은 피조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이성 하나에 의지하려 할때는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이성이라는 팔과 신앙이라는 팔입니다. 이성을 통해서는 추론이 오성을 통해서는 신앙이 들어오는데 이성과 오성을 합쳐서 지성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4) 단일성(단순성) - 단순성이란 하나님께서는 영과 육으로 형성된 것처럼 여러 부분의 성질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시므로, 나누이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삼위란 하나님의 본체가 여러 부분의 본질로 구성되어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존재는 각 위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속성이 하나이요, 또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사랑이시며, 의로우시며, 진리라고 할 수 있다.
4 강
1. 질문과 답
질문 :
아담과 하와는 완전하게 지어진 사람인데 하나님과 같이 명철해 지려는 이기심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로 인해 이기심을 갖게 된 건가요, 아니면 이기심의 속성이 불현듯 생기거나 자라나게 된 것인가요?
답 :
단순히 무엇을 아는데 있어서만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눈이 밝아지리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같이“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아는 것만 하나님처럼 알고 자기의 존재는 하나님 밑에 겸손이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보다 우위에 있게 되는데 그 때 특성이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이기심이라고 했는데, 이기심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최초의 죄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에 질서를 정해놓으시고, 도덕적 만물들의 질서도 정해놓으십니다. 자연적인 만물들은 영혼이 없는 것 곧 동물, 식물, 그리고 무생물들입니다. 무생물은 식물을 위해 이바지하고 식물은 동물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인간 존재에 이바지합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에 속하고 영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영혼적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과 천사, 마귀들을 도덕적 존재들이라고 합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무언인가 하나님 닮은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동물들의 사고는 인간과 다릅니다. 동물들의 행동은 본능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아담의 마음에 있었던 죄는 그러한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어서, 또는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싶은 존재가 되고 싶어한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이 우주의 가장 뛰어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죄들이 발견됩니다. 그래서 모든 죄의 뿌리를 교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가장 위고 그 다음에 인간과 천사들이고 피조물들이라고 존재의 질서를 정해주셨는데, 인간은 그것을 싫다고 저지른 죄가 인간의 첫째 죄입니다.
이기심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질서가 아니라 자기가 세운 잘못된 질서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악입니다. 예를 들자면 누구를 죽여서라도 돈을 소유해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목숨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럴 수 없습니다. 자기가 그런 질서를 세워놓고 집착하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게 창조한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범죄한 건인가, 그것이 자유의지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인가,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때, 만약에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이러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도록 결함 있는 존재로 창조했더라면, 하나님의 창조에 문제가 있는 것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했다면 인간이 어떻게 악을 행할 수 있었는가, 성경은 그것을 뱀이 유혹하는 장면에서 말씀하고 계신데, 그렇다면 결국 뱀의 책임이지 인간의 책임일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 문제는 이렇게 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이 선택 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했지만 그가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있었습니다. 악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창조가 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에게 부패성이 없습니다. 부패성이 없는 상태에서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이야기하자면,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어마어마한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힘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이런 부패성이 없는데도 어디서 그렇게 강한 힘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이 자유의지 선택 안에 있었고 그것이 욕망이었다고 봅니다. 이 욕망은 우리들의 경우에는 모두 부패한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패성 없는 상태에서의 악을 지향하는 욕망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경험해 본적이 없지만, 그러나 아담의 경우에 부패성이 없으면서도 자유의지의 선택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했던 강한 욕망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인간이 범죄한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지성으로는 하나님을 총명하게 볼 수 있는 비전을 주시고, 감정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충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변적으로 주시고, 의지적으로는 선하게 하나님을 쫒을 수 있는 의지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악한 욕망을 가지면서 흐려지기 시작하고 악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지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보고, 감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복하는 상태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인간이 욕망이 일어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그런 마음을 토설하고 은혜를 구했더라면 하나님이 은혜를 즉각적으로 주셔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은혜가 충만하게 지배하는 상태를 상실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결함인이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풀기 시작합니다. 이 문제는 2500년 철학사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최근에 와서 도전을 받지만, 신정론에 있어서 “옳으신 하나님이 왜 죄를 허락하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1600년동안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견뎌온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에서 이 문제를 풀어냅니다.
결함인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선행을 할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사람에게 능동적으로 작용하므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은혜가 이 사람을 능동적으로 움직이
기 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작용인이라고 부릅니다. 주어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죄를 짓지 않았을텐데, 그걸 상실했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상처는 몸의 변형이지 상처 그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을 바르고 치료를 하면 새살이 돋고 상처가 없어집니다. 상처가 어디로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어둠도 마찬가지입니다. 캄캄합니다. 어둠을 몰아낸 다음에 빛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빛을 비추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빛의 제거가 어둠입니다. 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선의 제거가 악입니다. 증거는 선한 행동을 하며 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은혜를 받아야 하지만 죄를 저지르기 위해서는 노력할 필요없이 생긴 대로 살면 죄를 짓게 됩니다. 싫증을 안 느끼면서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해야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근데 싫증을 느끼는 지름길은 은혜 안 받고 퍼질러 있으면 몇 일 안가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결함인이라고 말하고 작용인이라고 말합니다.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은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설교 시리즈에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지성을 사용해서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강조하심)
여러분 지성의 근육을 연마하십시오, 지성의 근육을 연마하는 것은 모든 그릇된 사상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보며 걸어가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선하게 판단하고 복잡한 사상 속에서도 참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언인지 알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2. 질문과 답
질문 :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하나요? 예수님께는 현재만 있으니까요.
답 :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영원히 현재만 있으시다고 말한바있습니다. 결국 과거는 지나갔기 때문에 모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모르고, 현재만 아는데 현재는 셀 수 없는 방막의 시간의 시점입니다. 현재라고 하는 것은 무한대 분의 일로 수령하는 시간의 길이입니다. 없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못박혀 죽으셨어도 하나님은 지금처럼 느끼실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을 때에도 예수님은 미래가 없으신 분이니까 이미 태초에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중적 보물을 갖고 계십니다. 첫 째는 시간을 초월해서도 보실 수 있고, 둘 째는 시간 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미 다 알고 계신데 왜 새삼스레 좋으신가? 이 말은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해서 보실 수 있고 시간 안에서도 보실 수 있는데, 시간안에 보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3. 질문과 답
질문 : 안들림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미리아심의 충돌에 관한 질문 같음)
답 :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고,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일어나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새롭게 느끼시는 것이 우리에게 전달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가다가 누군가는 죄를 지을 것이고 누군가는 착한 일을 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했는데 하나님이 만세전에 착한 일을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시들먹하시고,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만세전에 다 알고 있으시기 때문에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선을 행하겠으며 누가 악을 행하면서 경고를 받겠습니까, 그래서 도덕적 통치에 보면 각주에 안셀무스의 글이 라틴어로 인용되면서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 의해서 정동되는 분은 아니시지만 정동의 효과는 인간에게 느껴지시는 분이십니다”라는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4. 질문과 답
질문 : 안들림 (3번 질문과 동일한 질문인 것 같음 -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미리아심의 충돌에 관한 질문 같음)
답:
다시말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고, 이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지만 이것이 시간 속에서 전개가 될 때에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사용하셔서 정해놓은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어려운 것인데, 두 개의 문제가 양립할 수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합쳐지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보면 정해진 것이며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시간 안에서는 우연적인 것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꿈이 맞을때가 있잖아요. 반가울 사람을 만날꿈이야. 그래서 반가운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는거야. 그런데 어두운 밤길에 20년전에 알았던 친구를 만났어요. 꿈이 맞는거죠.
결정에 놓으셨다는 것과 인간이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니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책임이 면제가 되지 않고 하나님에게는 의외에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5. 질문에 대한 답변
질문 :
인간의 영혼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선한 의지를 들었습니다. 그 중에 단일성과 포괄성이 있는데, 포괄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 :
선한 의지라고 하는 것은 의지의 성향이 선을 쫒는 것입니다. '의지의 성향 자체가 선하다'라는 것인데, 그럴 때 우리가 그 사람에게 '선한 의지가 많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목적 자체가 이런 선한 의지를 불러 일으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입니다. 이런 선한 의지가 어떤 성향을 갖게 되는데 사건 하나하나, '내가 무슨 일을 해야 되겠다'고 할 때는 개별성이고 하나하나 개별적인 사건은 생기지 않았지만 무슨 사건이 생기면 항상 선한 쪽으로 결정하고자 하는 의지의 크기를 선한의지라고 말합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나누는데, “Will”이라는 단어와 “Volition”이라는 단어로 나눕니다. “Will"은 그냥 의지입니다. ”Volition“은 의지의 행사입니다. will이 단일성이고 Volition이 포괄성입니다.
사람이 선하면 생각하는 것도 선하고 느끼는 것도 선하고 의지하는 것도 선합니다. 생각은 선하고 의지는 박하고 감정은 중간일 수 없습니다.
단순성
“하나님의 단순성이란 하나님께서는 영과 육으로 형성된 것 처럼 여러부분의 성질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시므로, 나누이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p 45.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모든 사물은 단일성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모두 두 가지 이상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사물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여도 구성 요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구성 요소들은 A, B, C 라고 한다면 A, B, C 는 서로 의존합니다. 그러면 결국 A, B, C 는 서로를 의존하게 되니까 어느 하나도 스스로 독립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들은 서로를 의존하는 구조로 모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구성 요소를 가지고 계시다면 그 구성 요소는 다른 구성 요소를 의존하게 하고 다른 구성 요소는 그것 때문에 다른 요소를 의존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불안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구성 요소가 없으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단순성, 단일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일성이라고 한다면 그 단일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그것은 사실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돌멩이를 보면 여기 인간이 돌멩이를 보면서 이 속에서 생각을 많이 할거 아니에요. 이건 곤충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파일이 움직이면서 딱딱하고 던지면 피터치고 생각하면서 이것은 돌이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이것과 맘먹는 상태의 개념들이 떠오르는데 이런 거들은 전부 물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패러다임을 가지고 영이신 하나님을 재려고 할 때 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없다’라고 이야기해버립니다. 근데 “있다”라는 말도 웃깁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 돌이 있다” 그럴 때 있다는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그러나 “공기가 있다”라는 것은 설명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있다”라고 하면 또 달라집니다.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라고 하면 또 다른 양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성 요소로 나뉘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 성부, 성자, 성령은 어떻게 되는 건가? 피자 조각 내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역시 물질을 구성하는 형태로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본질 속에 삼위께서 구획된 형태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본질을 가진 삼위의 존재의 양태가 한 하나님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이 하나님이 있다, 없다하는 것들을 이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재려고 할 때, 그때에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게 만드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믿는 믿음, 성령의 조명,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초논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격이 단순성입니다.
“삼위란 하나님의 본체가 여러 부분의 본질로 구성되어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존재는 각 위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속성이 하나이요, 또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사랑이시며, 의로우시며, 진리라고 할 수 있다” p 45
속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속성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빼면 완전할 수 없는 것을 속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이것이 부분이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존재인데, 이 분 자신을 직접 보아서는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자연세계와 관계를 맺으십니다.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에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의 변화된 차이, 효과를 보면서 비로소 하나님은 알 수 없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죄인이 회개할 때 용서해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시는 성품이 보이고, 악한 자를 벌하시는 광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간이 안다”라고 할 때,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 두 가지를 합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알 수 없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실 때 어떤 효과가 일어나는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는 것이고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성경책입니다. 성경책을 보면서 자신의 실제적인 삶,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 세상의 역사를 보면서 공부하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2003년도 수련회 설교 “하나님을 아는 지식” 참조)
A. 보편적 속성 (공유적 속성)
보편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특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발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는 속성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있는 속성은 다만 유한하며, 하나님의 무한하고 완전한 속성에 비할 때 불안전한 속성이라는 것이다.” p 46.
하나님도 사랑이 있으시고,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방향이 잘못되고 조잡합니다. 결국 하나님 모를 때는 우리가 꽤 많은 사랑을 가진 줄 알다가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발견하고 나면, 우리의 사랑은 감히 있다고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는 불안전하고 누추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고백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눈을 뜨게 됩니다.
1)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아시며, 가능성 있는 일과 실재하고 있는 일을 다 아시는 그의 완전성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p 46.
하나님은 공부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고,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원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밖으로부터 지식을 섭취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데 창세기 22장의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으니”라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화법입니다. 하나님이 시험해보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시험하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이 지식은 총포괄적이므로 전지라고 칭한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아시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능적인 모든 것까지도 아신다.” p 46.
2) 하나님의 지혜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혜는 지식을 엮어서 사용하는 하나의 원리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지식이 구슬이라면 지혜는 구슬을 꾀어서 목걸이를 만드는 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식이 모자라도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지식의 독특한 한 국면이다. 하나남의 지혜는 최고의 가치 있는 목적을 설정하시고,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 최선의 방법을 택하시므로 자신의 지식을 나타내시는 그의 덕행이다.“ p 46.
3) 하나님의 선
“하나님은 그 자신이 선이시다....여기서 생각하려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곧 타자에 대한 선행에서 나타나는 신적인 선을 언급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이란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을 친절하고 관대하게 취급하도록 자극시키시는 신적 완전성을 말한다.” p 47.
하나님은 가장 이기적이실 때 가장 이타적이실 수 있고, 인간은 가장 이기적일 때 이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것이 그 속에 인간이 들어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됩니다. 고전 13장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에게 시작하여 온 우주와 인간을 휘돌아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자기 회귀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은 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피조 세계를 향한 사랑은 당신 자신을 향한 사랑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이기적일 때 인간에게 가장 이타적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였는데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거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이타적인 사랑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 -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목표는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서 그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지체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들의 행복과 그들의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가 나의 관심사가 됩니다. 그리고 세상 가득히 차오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4)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 자비와 긍휼, 오래 참으심등으로 나뉩니다.
(1) 은혜
죄를 용서함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을 말합니다.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2) 자비, 긍휼
죄의 결과를 짊어진 자들의 비참을 제거하려는 사랑을 하나남의 자비 또는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비와 긍휼은 죄 때문에 인간이 비참하게 되었어도 논리적인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도달해 있는 비참한 상태를 보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아파하시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예를들어, 담벼락에서 놀다가 떨어져서 피가납니다. “올라갈때부터 알아봤어. 그러게 왜 올라갔냐” 다른 사람은 “아니 저 피좀봐 어떻게” 그러면서 달려가 끌어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과정이 아닌 결과를 보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자비는 슬픔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너무 사랑하면 항상 슬픔이 동반됩니다. 눈부시도록 사랑이 느껴지는 날에는 눈물이 나게 됩니다. 그것을 장엄미, 비장미, 비장한 것 속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운 것 속에서 슬픔을 느낍니다.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설교 시간에 은혜를 받으면 왜 눈물이 납니까? 진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을 때, 눈부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3) 오래 참으심
이것은 사랑의 아주 으뜸가는 특성입니다. 왜 사랑이 오래 참음이라는 특성을 갖게 될까요? 가족이나 친구가 미운 행동을 하고 피해를 주어도 참게 되는 것은 그 관계를 끊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특성은 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맺은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싶어하고, 관계를 풍성하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맺은 관계를 소멸하고 싶어 하지 않는 성향이 바로 사랑입니다. 만약에 은혜를 못 받아 사랑이 없어 관계를 끊고자하면 부자간, 부부간, 형제간에도 의절이 가능해집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없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참으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놓고 싶지 않으셨으면,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면서 마지막에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겠습니까.
이런 걸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머 어머한 깊이로 밀려들어옵니다. 내가 죽고 나서도 연구할거라고 믿어지는 시리즈가 있다면 고전 13장입니다. 고전 13장을 진지하게 탐구해나가면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배우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운수대통하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찬양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 사랑이 밀려오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유통적, 즉 교통적 사랑입니다. 사적인 사랑, 개인적인 사랑은 단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오지랖이 넓어집니다. 누가 가난하든지 내버려두면 되는데 쌀 사들고 뛰어가고, 아프다 그러면 데리고 병원가고, 춥다 그러면 자기 겉옷을 벗어 덮어 주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사랑을 흘려보내면서 그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 되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이 교회 안에서 먼저 이루어지기를 하나님 바라십니다.
나 같은 인간이 감히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다니, 개미가 인간에 대해서 배우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지성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귀함은 지성의 근육을 올바르게 사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게으름만이 죄악이 아니라, 정신의 게으름은 더 커다란 죄악입니다. 평생 공부하는 자세로 살아가십시오, 고3과 같은 마음으로 살길 바랍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섭취하면서 공부해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을 절대로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그렇게 살기만 했는데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을 통해서 빛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니”라는 의미입니다.
5)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거룩성이란, 첫 째 모든 피조물들과 절대적으로 구별되시며, 무한한 존엄으로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신적 완전성이라 말할 수 있다..” p 48.
헤겔에 의하면, 미개한 시대일수록 인간을 떠받들게 됩니다. 인간에게 합당한 존중을 표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것은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마땅히 합당한 존경을 표함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엄의 질서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들을 근거로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아부도, 인간숭배도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것이 아닌, 단지 자신이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을 짓밟고 거기에 합당한 존경이상의 것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창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민정신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런 합당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 권위입니다.
“둘 째 하나님은 모든 도덕적 불순종이나 죄로부터 구별되시므로 도덕적으로 완전하심을 의미한다.” p 48.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우리말에 거룩이라는 말은 형용사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거룩을 이야기하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거룩함이라고 사용되어야합니다. “Holyness of God" 하나님의 거룩하심, 혹은 하나님의 거룩함, 거룩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둘로 이루어집니다. 첫 째는 존재적 초월성입니다(Ontological Transcendence) 두 번째는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무엇이냐 라고하면 존재적 초월성, 도덕적 완전성으로 외우시면 됩니다. 존재적 초월성이란, 다른 모든 존재와 관계를 맺으시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이것들과 하나일 수 없다라고 하는 모든 당신이 만든 존재에 대해서 초월적인 지위를 갖으시는 타자성(Otherness)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온 우주를 만드셨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일부 수도 없고, 인간이 하나님의 일부 일수도 없고, 만드신 이 세계가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든지 일체일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위대한 타자입니다. 인간은 그 앞에 아주 볼품없는 존재라는 존재의 차별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에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부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 완전성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공유적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인간도 사랑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격차가 너무 커서 인간의 사랑은 불결할 정도가 되는 것이고, 이런 도덕적인 격차를 가리켜서 도덕적 완전성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거룩함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비천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전함에 대해서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이 생활을 가리켜서 성화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6)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성에 위배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보존하시는 신적 완정성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에 의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해 가시며 적당한 법을 인간에게 부과시키시므로 순종하는 자를 보상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를 벌하신다.” p 48.
(1) 상주시는 공의
“보상을 줌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한다“
(2) 벌 주시는 공의
“벌을 내리심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한다”
“상 주시는 공의는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벌 주 시는 공의는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함이다.” p 48.
7) 하나님의 진실성
“하나님의 진실성이란 하나님이 그의 내적 존재하심에 있어서 참되시며, 그의 계시에 있어서 참되시며,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참되심을 나타내시는 신적 완전성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상들과는 다른 참 신이시며, 존재하는 사물의 실상 그대로를 아시며, 그의 약속을 이행하심에 있어서 신실하시다 이 속성을 약속 이행면에서 볼 때, 이를 하나님의 신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p 49.
신실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약속과 관련해서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신실성이라고 부릅니다.
8)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은 두 가지 견지에서 고찰되어 질 수 있다."
(1) 주권적 의지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궁극적 원인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지는 감추어진 의지와 계시된 의지, 둘로 구별 되어 있다. 감추어진 의지란 하나님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섭리의 의지이며, 결과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의지인데 반하여, 계시된 의지란 율법과 복음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이다. 피조물들에 관계된 하나님의 의지는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시다. 인간의 죄된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작용에 달려 있다." p 49.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결함인으로서 죄를 짓게 된다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데 일어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원한다고 할 때도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습니다. 만약 신자가 신앙 생활을 안하면 하나님은 미끄러지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그 신자가 미끄러졌을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영적인 손해를 보는가를 깨닫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는 유익을 얻도록 만들어주십니다. 복잡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모든 것이 엮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섭리하십니다.
(2) 전능
“전능이란 하나님의 의를 집행하시는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 함은 무엇이든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가르쳐 준다. 즉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시며, 죄를 지을 수 없으며, 자신을 부인하실 수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취하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의 뜻을 따라 수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가 원하시면 그 이상으로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p 50.
하나님이 이런 문제 푸실 수 있을까요? 각 없는 삼각형 만들기? 각이 없으면 삼각형이 안되는데...하나님은 못하시는 것도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십니다. 그것을 무능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내가 술을 먹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취하도록 먹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저는 그것을 안합니다. 안한다는 것이 하고 싶은데 억지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성품의 방향이 워낙 달라서 그것을 하여야할 욕구도 못느끼고 오히려 한다고 할 때 성향이 달라서 고통스럽게 느껴질때 우리는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술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합니다. 그걸 못하는 것이 오히려 나의 놀라운 덕을 표현하고 완전성을 표현하는 것이지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중세 시대 때에 그 문제를 아벨라르더스 같은 교부가 두 가지 용어를 가지고 풀어냅니다. "Potentia Absoluta“ ”Potentia Ordinata“ 영어로 "Ordered"입니다. ‘명령된’이 아니라 ‘질서 잡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규정된‘이라는 의미입니다. ”Absoluta“는 절대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하실려고만 하면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나의 경우에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왜 못하겠습니까, 예전에도 하던 가락이 있는데 말입니다. 술 먹고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이 가지신 탁월한 어떤 덕 때문에 그렇게 안하시는 것, 그것을 안하시고 나아가서는 못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은 부족하고 모자란 분이 아니라 탁월하고 두드러진 분이 되십니다.
우리 아들이 거의 거짓말을 안합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면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부부가 다 압니다. 그렇게 무언인가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무능하고 못하는 그것이 그 사람의 덕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질문 : 하나님의 뜻이 숨겨진 것과 나타난 것이 모순은 없는가?
- 답 : 모순은 없지만 모순된 것 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는 모순이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 모순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모두 지식의 부족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온전히 더 배우고 더 믿게 되면, 혹은 더 잘 추론하게 되면 그 모순은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질문 : 안들림
- 답 : 하나님이 인간과 관련 맺을 때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효과가 하나님이 태양이나 달, 별과 맺으시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효과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얼마전 신문을 보니, 허블 만원경이 수리를 끝냈다는 기사를 보았다. 막 수리를 마친 허블 만원경으로 찍은 사진은 굉장히 선명하며 티 없이 맑았다. 지구로부터 7천 5백광년 떨어진 곳에 카리온이라는 성운이 있는데 허블 만원경에 의해 선명하게 스타더스트(우주먼지)가 보인다. 우주에는 사실 에이치밖에 없다. 이 에이치들이 어떤 작용으로 폭발을 일으켜 핵융합을 하게 되면 거기서 다양한 원소들이 발생한다. 그런 것들이 어떤 이유로 인해 한 곳에 모여들게 된다. 한 곳에 모여서 그것들이 먼저처럼 형성된다. 다시 어떤 계기로 인해 중력으로 뭉쳐져 핵반응이 일어나 점점 불덩이가 되어 어느 한순간 폭발을 일으켜 가스덩어리에서 하나의 별이 떨어져나오는데, 이것이 별의 탄생이다. 그런데 이 거리가 지구에서 7천 5백 광년이다. 성운 끝에서 성운 끝까지의 거리가 3광년이다. 여기에 수많은 별들이 벌집처럼 생겨나게 된다. 너무 멋지다.
찬양 -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자랄 수 있어요
이 찬송가가 질문에 대한 답이다. 태양과 별들이 빛나는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을 발견하고 경배하게 된다. 그런 차원의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영혼과 관련이 될 때에는 훨씬 더 찬란한 아름다움을 해, 달, 별과 관계를 맺을 때 나타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뿜어내신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인간을 구원하신 역사들이 주제를 이루지, 해, 달, 별 돌리신 이야기가 주제를 이루지 않는다.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셔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백성들 만드시는지를 보면서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오게 된다.
5 강
A. 삼위일체의 교리 개관
"성경은 가르치기를 하나님이 본질상 한분이시나, 그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삼위는 보편적 의미로서의 삼위가 아니다. 즉, 그것은 세 개체가 아니라, 오히려 신적 본질이 그 안에 존재하는 세 가지 양상이고 형태이다. 동시에 서로 인격적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계시다. 삼위일체 교리의 오묘한 신비는 삼위 중 각 위가 신적 본질의 완전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삼위의 테두리를 벗어나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순서에 있어서나 그들의 사역에 반영된 순서에서 볼 때, 삼위 중 성부가 첫 번째, 성자가 두 번째, 성령이 세 번째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삼위는 본질상 어느 한위가 다른 위에 종속되는 일이 없다.“ 54 p
1) 삼위일체의 교리의 성격적 증명
a. 구약의 증거
“하나님에게 한 위 이상이 존재함을 지적해주는 구절이 있다. 자신을 복수로 나타내시기도 했으며 여호와의 ( ) 한 신적 위로 나타났으며, 여호와의 영도 또 다른 위로 표현 되었다. 이 외에 메시야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다른 두 인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54 p
b. 신약의 증거
"성부는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예수님의 명령, 사도의 축복 등에 잘 나타나 있다."
c. 삼위 일체 교리에 대한 그릇된 견해
(1) 소키누스
소키누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학파입니다. 소키누스주의자들은 종교 개혁 당시 아주 극단적인 이성주의자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2) 유니테리안파와 현대주의자들
유니테리안파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성부와 인간 예수와 하나님의 영이라 칭하는 신적영향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성부 하나님, 예수는 인간, 성령은 영, 그래서 인격이 없는 영향력이라고 봅니다.
B. 삼위의 개별적 적용
a. 성부 하나님
“아버지란 말은 만물의 창조자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성도의 아버지 되시는 삼위 하나님께 적용되는 말이다. 더 깊은 의미로 보면, 성부란 제 2위와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1위에 적용되는 용어다. 이것은 본래부터 아버지 격이므로 지상의 모든 아버지는 그것의 희미한 반영이다. 성부의 독특한 특성은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낳으신다는 것이다. 그의 구속사역은 구속사업을 개혁하시고 창조, 섭리, 그리고 삼위 일체를 구속계 안에서 나타내시는 것이다.“
b. 성자 하나님
“삼위 중 제 2위는 성자,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성자가 이러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성부의 독생자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메시야가 되기 때문이며,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그의 탄생에 의한 것이다. 삼위 중 제 2위인 성자의 특별한 특성은 그가 영원 전부터 성부에게서 출생하셨던 것이다. 영원한 출생에 의해 성부는 신적 존재에 있어서 성자의 인격적 존재의 원인이 되신다. 특별히 성자의 사역은 중재의 사역이므로, 그는 창조의 사역을 중재하셨고, 구속의 사역도 중재하신다.”
c. 성령 하나님
“소시니안파와 유니테리안파와 현대주의자들은 성령을 하나님 능력이나 영향력이라고 말하지만, 성령은 분명한 하나의 인격이라고 가르친다. 성령은 지식, 감정, 의지를 가진다.(인격의 3 요소) 성경은 말하기를, 성령이 말하시며, 탐구, 증거, 명령, 계시, 노력, 중재하시는 분으로 표현한다. 또 그는 분명히 자신의 능력과는 구별된다. 성령의 특별한 특성은 그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생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명은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삼위 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아마 가장 난해한 교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 일체에 대해서 <삼위일체론> 이라는 책을 쓰는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삼위 일체를 논하는데, 고전적으로는 삼위 일체론 자체가 아마 삼위 일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썻을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생각을 안하고, 그 자체가 성도들을 영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열린 교회 게시판에 목사님의 설교가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 답장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 몸은 사람 몸인데 손은 쥐의 손입니다. 그래서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이렇게 관리하는 것은 굉장히 나쁜 죄입니다. 자기가 생각의 능력이 없는 것을 담대히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낼 때만 그러해야 합니다. 나 같은 무지한 사람도 하나님이 깨우쳐주셔서 구원해주신다고 생각해야지, 무식하다고 자랑하는 것은 두 번 잘못하는 것입니다. 우선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나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데에 있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14p의 답장을 4시간에 걸쳐서 썼습니다. 삼위일체론 자체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성도의 영적 훈련을 위해서 썻다고 봅니다. 고등학교때 체력장을 했습니다. 밑으로 30cm를 내려가야 하는데, 이것도 연습을 하면 됩니다. 정신의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생각 없이 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 질문을 한 지체에게 당신은 내 책을 보면서 짜증을 내는데 나도 예전에 성경을 보면서 짜증이 났었다고 답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마태복음 읽다가 짜증이 나고, 구약 성경은 레위기 읽다가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나한테 잘못한 것입니까, 나중에 은혜를 받고 정신을 차리니까 마태복음 1장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처럼 징징대지 말고 정신 좀 차리라고 말했습니다.
C. 삼위 일체에 대한 그릇된 견해 2
a. 본질에서 분리되는 희랍의 삼 신
삼위 일체는 우리가 완벽하게 설명한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몇 가지만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부가 먼저 계셨고, 그 다음에 성자가 계셨고, 성령이 계셨다고 봅니다. 이것을 삼위일체 라고 할 때, 위는 자리입니다. 그리도 일체라고 할 때는 하나의 몸인데, 단순히 하나의 덩어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본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위는 셋인데, 그 본질은 같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비어있다면 그것은 셋이 되지만, 다시 말해 본질이 아무리 같아도 이 세 분이 떨어져 있다고 세 분이라고 불러버리면 그것은 삼신이 되어버립니다. 희랍 신화에서도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바다를 움직이는 신, 사랑을 움직이는 신, 농사를 잘되게 하는 신등이 있습니다. 이런 신은 여럿인데 본성은 다 같습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이 다 같고 이 셋은 완전히 떨어진 것으로 보면 삼신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b. 양태론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오류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는데, 이 큰 덩어리에서 이렇게 쪼가리로 나눠서 가면 사신이 됩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오류는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는 마치 한 사람이 회사 가서는 부장님으로, 집에서는 아버지로, 교회 와서는 장로로 불리우는 것과 같다는 오류입니다. 한 하나님인데 어디와 관계하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른 분으로 나타난다는 설명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화형당할 양태론입니다. 대개 이 이론에 빠져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냐면 성부, 성자, 성령은 전부 변형된 모습이고,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c. 삼위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의 무제한적 영원성
제일 먼저 발생에 관해서 성부가 먼저 계시고, 성부에게서 성자가 낳으시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낳으십니다. 성부가 제 1위시고, 제 2위가 성자이고, 제 3위가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삼위 하나님은 순서적으로 제 1위, 제 2위, 제 3위로 구분되기 때문에, 순서적인 구분으로 시간적인 면에서 제 1위인 성부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시고, 제 2위 성자 하나님이 두 번째로 나타나시며, 제 3위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나타나신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삼위의 구분성에 대한 설명은 잘못된 것입니다.(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설명함 불필요하시면 삭제요망) - (칠판 설명) 삼위 하나님의 각위가 위치하시는 시간적 해석에 대한 오류
시간은 창조되면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신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시간은 영원의 시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그 영원 속에서는 시간의 앞 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칠판 설명 - 정사각형의 선분)
사각형이 있습니다. 이것과 똑같은 사각형이 여기에 또 있습니다. 하나를 A라고 하고 또 하나는 B라고 합시다. B가 A위에 올라갈 수 있어요 없어요? B를 A위에 겹칠수 있어요? 있잖아요. 선분은 넓이와 두 깨가 없습니다. 무한대분의 일입니다. 그리고 선분은 점의 연속입니다. 점도 크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한대분의 일 위에 무한대분의 일이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겹쳐진다라는 개념이 성립합니까? 평면인데 겹쳐질 수가 있겠어요. 2차원밖에 이해를 못하는 사람에게 위에 올라가도 그거는 하나일 수 있다고 설명하면 그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개념은 성립이 안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틀립니다. 책이 있습니다. 박스 위에 책이 올라갑니다. 책이 박스 위에 올라가는 것은 2차원에서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책이 박스 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부피가 있는 3차원이니까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시간의 문제, 공간의 문제가 두고두고 교리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개입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부가 먼저고 성자, 성령이 나셨지만,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함께 영원하십니다. 시간이 사라져버린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물어보겠습니다. 어제 일어난 일과 십년 전에 일어난 기억 중 어느 것이 우리의 기억 가까이에 있습니까, 십년 전의 일도 워낙 또렷한 것은 어제 일어난 일이 잊혀져도 십년 전의 일이 기억의 맨 앞부분에 있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두 번째로 먹은 반찬이 무엇입니까, 기억이 안납니다. 십년 전에 헤어진 첫 사랑의 기억이 무엇입니까, 기억이 또렷히 납니다. 이것은 시간과 상관이 없이 기억이라는 평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의 초월입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기억의 맨 밑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또 금방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기억의 표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론은 성부에게서 성자가,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셨지만, 성자 없이 성부가, 성령 없이 성부와 성자가 계시던 때는 없다는 것입니다.
D. 삼위 하나님의 존재 양식의 독특성
성부
성부 성자 성령을 이야기 할 때, (칠판 설명 - 삼각형) 삼각형을 기억하면 좋습니다. / \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삼위는 세 인격입니다. 그래서 세 인격이지만 / ____ \ 그 자체가 따로 떨어지지 않는 하나인 존재입니다. 이런 것들이 유사한 존재가 이 세상엔 성자 성령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유비를 찾아내려고 했던 모든 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심리학적 모델이라고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이 하나님을 가장 닮았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작용, 예를 들면, 생각, 사랑하는 자, 사랑 받는 자, 사랑 자체, 이것을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다음에 지식, 사랑, 의지 이런 식으로 나뉘어 질 수 없으면서도 구별 되는 마음의 작용 같이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부, 성령 없이 성자 혼자 일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각 위와 인간은 개별적으로 교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 사역을 하신다고 할 때, 삼위가 다 같이 하시지만 우선적으로 성부가 관여하시고, 구속하신다고 하실 때는 성자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용하는 믿음 사역을 하십니다. 이럴 때에는 성령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관여하십니다. 어느 위도 참여하시지 않으신 적은 없지만 주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부의 특징을 사랑이라고 하는가 하면, 성자의 특징을 은혜로, 성령의 특징을 위로로 봅니다. 존 오웬(John Owen)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관여하셔서 인간과 교통하시는데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사랑을 경험할 때에는 성부와 교통하고, 은혜를 경험할 때에는 성자와, 위로를 경험할 때에는 성령이, 즉 나뉘어지지는 않지만 우선적으로 교제하고 있는 개별적 위와의 교통이라고 보았습니다.
결국은 성부, 성자, 성령 같은 독특한 존재의 양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본성이 삼위로 분리되었다고 보면 안되고, 하나님의 성령은 처음부터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존재의 양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도 그 안에서 삼위 사이에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E.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모든 일을 미리 계획하시는 그의 영원하신 계획, 혹은 영원하신 목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61p
이것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지가 창조되어서 시간이 도입되기 전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물들의 변화가 있어야지만 파악을 할 수 있고, 그 길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사물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시간의 길이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작정은 시간 세계 이전에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속에서 이루어진 작정입니다.
“이 하나님의 작정은 여러 가지 특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단일한 작정이지만, 가끔 이것을 복수형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포함하며 인간의 죄 된 행위를 제외한 모든 행위를 내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죄가 세상에 들어옴을 명백히 들어내주지만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범죄 행위의 책임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허용적인 작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61p
a. 작정의 특성
“그것은 항상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 전에 작정된 것이므로 영원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효과적이므로 작정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효력이 있다. 하나님의 작정은 불변적이다. 하나님은 신실하고 참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무조건적이다. 즉,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명백히 하신다. 하나님의 작용은 총 포괄적이다. 선악간의 행위, 일어날 사건, 생명의 기간, 장소등까지 포함된다. 하나님의 작정이 세상에 들어온 죄와 관련될 때 허용적이다.” 62p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적, 효과적, 불변적, 무조건적, 총포괄적으로 5가지로 구성된다.
b. 작정 교리에 대한 반대설
(1)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모순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작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 양면을 함께 조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본래부터 모순되었다고 증명하지는 않는다." 62p
하나님이 정하셨다면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모순되는 것 처럼 보이겠지만, 이것은 우리가 시간 안에서 정했다고 믿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순수하게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으려고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한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들의 구원여부를 결정하셨다면, 인간들은 인간들의 노력과 완전 무관한 것이라고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릇된 견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에 관해 어떻게 작정하셨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인간의최종적 운명을 결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실현되어져가는 방법까지 작정하신 것이다. 목적이란 지정된 방법의 결과로서 작정되어진 것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작정은 오히려 인간을 격려시켜준다." 63p
(3) "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로 만든다. 그러나 작정은 도덕적 존재자들의 창조로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죄가 작정 가운데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직접적 행위에 의해 죄를 산출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와 관련된 문제 역시 인간으로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없는 신비로 남아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63p
F. 예정
“예정이란 도덕적 피조물, 도덕적 피조물의 반대는 자연적 피조물이다. 그래서 도덕적 피조물은 지성적 능력이 있는 피조물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다. 도덕적 피조물은 모든 인류. 천사와 나비,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포함한다.“ 63p
a. 선택
"예정의 두 측면이 있는데, 선택과 유기가 있다. 선택은 몇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구약 이스라엘의 선택, 직무와 봉사를 위한 인물의 선택(왕, 제사장, 선지자), 구원받을 개개인의 선택이 있다. 선택이란 인류 중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64p
b. 유기
"선택 교리는 하나님이 인생 전부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자연히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인생 중 일부만을 구원하시기로 목적하셨다는 말은 나머지는 자연히 구원치 않기로 목적하셨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 유기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간과하시고, 그들의 죄를 따라 그들에게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기는 실제로 이중적 목적이 있으니, 첫 째 구원의 은총을 베푸심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건너뛰시고 그들의 죄를 따라서 벌하게 하려 하심이다." 64p
c. 예정론에 대한 반대설
“이 예정 교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불공평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릇된 견해다. 우리 인간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권리를 요청할 때나 인간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푸실 의무가 있다고 할 때만 불공평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전 인류가 하나님 축복을 상실해버린 마당에 상황은 다르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리셨느냐는 설명을 요청할 권리가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구원하지 않으셨다 해도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신 것이다.“ 64p
G. 자유의지와 필연
(칠판 설명) 인간이 살아갈 때 시간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한 인간의 인생 속에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며 인생 가운데 여러 일들이 또 일어납니다. 시간이 흘러가며 전개가 일어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고 난 후에 뒤돌아 보면 지나간 시간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결국 인생은 시간 세계 안에서 사물들과 관계 하면서 펼쳐지는 것인데, 또 다르게 보면 시간이라고 하는 세계가 있기 전의 영원의 세계에서 보면 이렇게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 마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고 하나님께서 마치 몰랐던 일이었던 것처럼 놀라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시는 것 없이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유를 주신 존재들에 대해서는 당신 자신도 잘모르고 계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안하시겠다고 하셔서 인간이 전개하면 마치 예상치 못했던 일을 알아가신다는즉, 하나님 자신도 인간을 통해 배워가시는 분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신으로서의 모습을 그려낼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마음에는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원래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칠판설명)또 하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 하나님이 아시는 것들이 얼마든지 변경 될 수 있는 주장인데, 그것 역시 인간이 변경할지 안할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시간 안에 있는 것들을 영원 속으로 끌어들이게 되면, 점으로 표현됩니다.
(칠판 그림설명) - 전체를 한번에 보시는 하나님의 영원적 시각과 지나간 순간과 작금의 시간만을 관망할 수 있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 의한 제한된 시각의 차이
하나님의 평면 위에 인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시간 속에서 펼쳐져 나간 모습이 이러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평면 속에 있는 것을 가리켜 신적 작정이라고 부르고, 시간 안에서 펼쳐지는 전개가 창조, 섭리, 보존, 통치 등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기는 영원이니까 시간을 빼버리게 되면 하나님에게는 미래의 일들도 현재, 현재에 일어나는 일도 미래가 되며 하나의 평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아셨고 정해셨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시간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셨으니까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필연입니다. 근데 문제는 시간 속에서 전개될 때에는 필연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의 의지를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의해서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다양한 선택들이 있게 되고, 결국 영향도 받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어서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되면 이것이 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원래 있었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우연이 되는데 여기서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필연이 되고, 한 쪽에서는 우연이 됩니다. 이것은 신비이며,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10대 난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유의지와 필연의 문제는 둘 다 문제가 됩니다. 인간이 워낙 자유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측을 못하신다고 해도 문제가 되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힘쓰고 노력을 해도 결국 정해진 운명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해버리면 그것도 인간의 자유를 박탈해버리니까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됩니다. 책임을 물으려면 도덕적 자율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조화가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데, 성경은 이것을 필연과 우연이라고 설명하며 인간의 책임이 면죄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ex - 자유의지와 필연에 대한 예 : 우리는 꿈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지만 무시하진 않습니다. 성경도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꿈에 보면 누군가를 꼭 만나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아침부터 그 사람을 만나야 될 사람이다라고 하면, 만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잊어버리고 살다가 저녁길 퇴근 길에서 만나는데, 몇 십년만에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젯밤 꿈이 그거였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어떤 것들이 정해져있어도 이 안에 살아가는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살다보면 그것이 결국 필연이 됩니다. 결국 자기의 책임도 면할 수 없고 하나님은 정해놓으셨으면서도 인간을 완전히 자유케한 것입니다. 보헤티우스라는 신학자는 이것을 라틴어로 인트라(intra - 안쪽) 엑스트라 (extra - 바깥쪽)로 설명하며, 인트라는 내심적 혹은 내부지향적, 엑스트라는 외재적, 혹은 외부지향적이라고 설명하며,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보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을 내심적으로는 필연이고, 외재적으로는 우연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물리학 칠판 설명) 강이 있고, 새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날아오다가 강물 속에 있는 고기를 보았습니다. 이것을 먹으려고 달려듭니다. 그럼 이 물고기가 잡힐까요? 안잡힙니다. 왜냐면 물 표면에서 물 안의 고기가 보이는 각도는 물에 의해서 굴절되어 물 안의 고기를 보게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물 밖에서 물 안의 고기까지의 거리는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는 그것까지 계산을 하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굴절되어서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쪼아 공격하게 됩니다. 만약에 계속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면 새는 굶어죽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는시간이라는 것을 초월했고, 시간과 공간이 꽉 차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이쪽에 비추어질때 다르게 비추어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예정과 작정의 차이는, 예정은 디크리(decree)라고 하고, 일반 용어에서는 ’명령‘이라고 해석하는데 즉, 신적 작정을 의미합니다. 신적 작정이라고 해서 디바인(divine)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작정은 하나님이 미리 당신의 뜻을 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속에는 자연적 피조물과 도덕적 피조물 모두 다 포함해서 작정이라고 하고, 특별히 도덕적 피조물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국한될 때 이것을 가리켜서 예정(destination)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고, 어떤 사람들은 유기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유기란 원래 버렸다는 의미인데, 버렸다기 보다도 타락하면서 모든 인간이 다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의 죄를 따라 살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유기는 선택의 결과입니다. 선택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모든 사람들을 선택하셔야 할 의무를 부과 받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공로도 없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마치 홍수가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떠내려갑니다. 구조대원이 사람들을 건져냈습니다. 그랬더니 따귀를 때리면서 다 죽여버리지 왜 나만 건졌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선택과 유기 교리 때문에 칼빈주의는 비난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지옥, 심판의 개념들을 무시하지만 우리들은 성경이 선택과 유기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모순처럼 보여도 역시 시간과 초시간의 영원속에서의 차이라고 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놀라운 조화와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도서관에 가면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거기를 읽어보시면 이런 모순 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들이 풀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인간의 이러한 도덕적인 잘못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역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드러내시도록 영광 받으십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을 통해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하실 때 하나님의 사랑이 찬란하게 드러납니까, 인간을 용서해주실 때 드러납니다. 인간의 죄가 없다면 용서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죄가 들어온 이후에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는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경험했을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정도의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데 기여했으니까 죄인들을 상주어야 합니까? 그럼 모순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가 이런 인간을 사용합니다.
여러분은 두부를 먹습니까? 콩으로 두부를 만드는데, 두부를 만들 때 꼭 들어가는 것이 간수입니다. 간수는 바닷물의 소금을 농축한 것입니다. 그것이 옛날에 여인네들이 살다가 살다가 시집살이 하다가 살기 싫어지면 마시는 독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넣야지만 두부가 됩니다. 두부로 유명한 마을은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강릉에 가면 학사평 두부가 유명한데 여지껏 먹은 두부는 두부가 아닙니다. 정말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부를 그렇게 만들었을 때, 간수를 넣으니까 두부에는 독이 들어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맞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간수를 농축했을 때는 독이 되지만 희석했을 때는 두부를 굳게 만들어주고 오히려 우리 몸을 유익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와 똑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그렇게 사용하십니다. 죄라고 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모든 우주적인 계획과 함께 전체적으로 놓고 죄에 대해서 평가 해야됩니다. 죄를 하나님의 모든 우주적인 계획과 전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놓고 죄를 평가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보게 되면, 커다란 오류와 잘못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구원받기로 예정해 놓은 사람들인데,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다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예정 안된 사람은 죽도록 믿어봐야 소용없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미안하게도 예정 안된 사람은 죽도록 노력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아주 중요한 팁을 주려고 합니다. 예정 사상이 어디에 나오냐 하면 특별히 사도행전을 비롯해서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예정설을 가장 많이 전개해 나간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읽으면서 “만세 전에”라는 구절을 보았을 것입니다.
“만세 전에”라는 의미는 수 많은 시대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썻던 것을 잘 돌아보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판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정을 말한 것이 아니라, 즉 전망적으로 예정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이 예정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을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인생 길을 걸어서 어느 정도까지 왔습니다. 자기가 구원을 받았고 난 후 자기 걸어온 길을 회고해 봅니다. 그랬더니 맨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꼬꾸라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때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 때 내가 회개를 했더니 겨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나를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삼으셨는가, 그게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이 나를 예수 믿게 만드시려고 계획을 하신 것이 연결이 되어서 결국 다메섹 도상에서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더 깊어진 다음에는 어머니 뱃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은 우연히 된 것이고, 어머니가 나를 가지니까 하나님이 그 때서야 나를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고, 그리고 끝까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교를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을 염두하셔서 다메섹 도상에서 나를 하나님을 믿게 만드신 것인가, 이건 아닌 것 같고, 마지막에 도달한 것은 영원까지 가게 됩니다. 영원 전에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와 만나는 계획도 있고, 그 사이에 내가 태어나는 계획도 있고, 이 계획은 어머니, 아버지와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한 번에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구나, 하나님의 영원의 뜻이 시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결국 오늘 날 나에게 까지 오게 되었구나, 결국 전망적으로가 아니라 회고적입니다. 이것은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는 경배가 목적입니다. 나의 구원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 전에, 심지어는 인간이라는 것이 있기도 전에 미리 마음을 먹으시고, 그것을 시간 속에서 전개하셔서 어머니 뱃속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나를 사도로 만드셔서 결국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지금 복음을 전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나를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회고할 때 이런 필연 속에서 전개되어 왔으니까 앞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이 있는데, 이것을 따라 간 나의 길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결국엔 하나님이 이 전에 작정하시고 시간 속에서 전개하신 것 처럼, 이루어 가신다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예정도 안된 인간들한테 괜히 수고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다가, 하나님이 미리 예정을 해 놓으신 사람이라면 내가 안간다고 구원을 못받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생각은 선교 역사에 나타납니다. 윌리엄 캘리라는 사람이 18세기에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인도 지방을 여행하고 와서 선교의 시급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을 섬겨야 됩니다” 라고 이야기 했더니, 당시 이런 교리에 빠진 사람들이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이 만약에 그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하나님이 직접하실 걸세, 나서지 말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정은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송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용도로 하나님이 예정을 사용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백이면 백, 예정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목적으로 회고적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강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정의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서 천치창조의 목적이라는 장을 꼭 읽어오십시오.
“천지창조의 목적” 설교 테잎을 듣고 난 후 깨달은 점.
빨간 옷 자매님 대답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해 들으며 내가 성도로서 비록 아담의 죄로 인해 범죄하게 되었지만 다시금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의 목적을 회복시켜 나가신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형제님
깊이 있게 깨달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히 부모님께서 나를 낳아주셔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많이 깔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면 저의 생각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 터무니 없는 것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인데, 그것과 나의 연관점에 있어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었다. 나는 모태신앙인이기 때문에 당연시 여기며 살아왔다.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있게 듣지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며 듣게 된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매님
저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인데, 그 영광을 위한 계획 속에 우리 자신이 포함 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만 행복하며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선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리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충격적이었습니다.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 정의되기가 어려운데, 그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근거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 즉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보편적인 선이라는 것이 발생하며,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인 기준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저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유기관계를 설명하시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속이 얼마만큼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이 ‘피조물 사이의 동창생’(모든 인간과 창조 속에서 하나로 묶여가는 것), 그리스도 구속을 통한 재창조 사역으로 인해서 다시금 우리가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창조시 의도하셨던 피조물 사이의 아름다운 연합을 회복해 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요즘에 강조하시는 교회관과 연관되면서 상당히 감명 깊게 다가왔습니다.
형제님
세상에서 ‘그냥’이라고 답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냥 남들이 하니까라는 것들의 추상적 대답들)설교 들으면서 하나님의 영광 관련해서 뭐든지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위해서 살고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해서 굳이 창조를 하지 않으셔도 되고, 인간들을 안만드셔도 되셨을 텐데, 하나님의 사랑의 개연성이라는 것은 숨어있고 감추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시고 드러나시는 하나님의 경향성이시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영혼 상태도 건강 할때는 나누어주고 섬겨주는데, 안 좋을 때는 감추려고 하고 소외되려 하는 것에 대해서 깨달았습니다.
목사님 대답
우리 교회에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는데, 고등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서 예배시간에 왔습니다. 그 날이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한 두 번째 설교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것을 들으며 그 아이가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목적하게 느껴졌던 삶이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향하여 살아야 하는 것들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시리즈가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전부 다 듣기가 부담스러우면 2번은 꼭 듣고, 홈피에서 세미나란에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세미나에 이 문제 설교가 있고, 도덕적 통치 중에서 천지창조의 목적 부분을 꼭 들으십시오, 이것이 바탕이 되어있으면 교회와 구원까지도 이해가 갈 것입니다.
H. 창조
1. 창조에 관한 일반적 고찰
“창조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먼저 있었던 물질을 사용치 않고 창조하시고, 한편으로는 불충분한 물질로부터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산출해내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창조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나타난다. 성부가 주가 되시며 성자와 성령이 참여하시는 사역이다. 우리는 범신론과는 반대로 창조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행위임을 주장한다.” 68p
범신론에서는 물을 잔뜩 부으면 넘치는 것처럼 신의 충만함이 유출되어서 이 세계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플라톤 같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말합니다. 이것을 유출설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비의지적으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필요치 않으셨다” 69p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세계가 하나님께 필요한가, 필요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모자라신 분이 되시는 것이고, 필요 없었다고 하면 하나님이 쓸데없는 일을 하게 되십니다. 쓸데없는 일에서는 목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철학자들이 이 두 가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저는 천지창조의 목적에서 저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가합니다. 이 마음 속, 즉 창조의 정신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외상장부이외에는 글 한줄 안 쓰고 예술 작품 하나 안 만들고 시 한줄 안적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의 정신이 넘치는 사람은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술혼이 넘쳐서 모든 사람이 누구도 할 수 없는 조각, 미술, 음악 같은 것을 남겼다고 치면,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 같은 것은 일주일만에 완성이 되고 이사야 53장을 헨델이 읽으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고 신들린 듯이 작곡을 하게 됩니다. 헨델은 ‘할렐루야’를 작곡하고 나서 “오~하나님 정말 이 곡을 제가 작곡하였나이까”라고 고백합니다. 그런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음악을 쏟아내거나 조각을 만들 때,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모자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넘치고 있는 창조의 정신과 예술 혼, 넘치는 미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독립심도 없는 의존적인 인간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그런 예술혼이 부족한 신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넘치는 사랑이 인간을 창조하게 하셨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를 맺고자 하는 특성이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밖의 인간과 사물들을 창조하시는 것이 관계를 맺으시는 방법이었는데, 그 관계는 하나님이 우리 없이는 못사는 모자라는 존재여서 우리와의 관계를 필요로하신게 아니라, 그 분 자신 안에 넘치는 사랑이 그것을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은혜 안받았을때는 자기 혼자 잘 살면 그만이지만, 은혜를 많이 받으면 오지랖이 넓어집니다.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병든 부모를 가진 형제나 굶주린 자매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없는 사랑의 성향이 넘치니까 오지랖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아주 초월적인 완전
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관계를 맺으시고 이 세계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런 변화 없이 세월 떠밀려서 살게 되는 것은 정신과 영혼이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자연신론에 반대하여” 69p 자연신론이라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18세기에 계몽주의적인 과학적 사고와 신학을 절충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법칙을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손 때셨고, 법칙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마치 시계공이 시계를 만든 다음에 계속 시계를 붙들고 바늘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태엽감아놓고 던져놓으면 그 시계가 저절로 돌아가듯이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 섭리 이런 것들은 필요 없게 되고 법칙에 의해서만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의존하므로 존속한다는 것을 주장해야만 한다” 69p 자연신론은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세상 밖으로 쫒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안보고 항상 하나님을 의존하므로 그 법칙들이 작용한다고 봅니다. 나날이 유지해 가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고 봅니다.
1) 창조의 시기
아우구스티누스가 창조의 시기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창조론을 우리가 말할 때 이렇게 반론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혼자 계셨을 때는 무엇을 하셨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때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요, 그 시간은 피조물과 함께 도입되었으니 창조가 있기 전까지는 때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는 너무 늦은 때도 아니고 너무 빠른 때도 아니고 그저 창조는 하나님이 정하신 시점일 뿐입니다“
늦다 빠르다 하는 것은 시간의 연속 길이가 있어야 하는데, 창조와 함께 시간이 시작이 되니까 하나님 혼자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물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태초 전에는 끝없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본다. 창조 사역의 첫 부분은 엄밀히 무에서의 창조이며, 기존 재료를 사용치 않은 창조이었다. 무에서의 창조한 표현은 성경에서는 직접 찾아 볼 수 없고, 외경 중의 한 책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다음의 성구에 분명히 잘 나타나 있다.” 69p
여러분, 학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학문은 화학입니다. 제가 1년 정도 천체물리학을 공부했는데, 성경을 이해하는데 생애에 잊혀 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도움을 받았습니다. 굉장히 나의 눈을 뜨게 해준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많습니다. 이 물건들은 하나의 겉으로 드러난 모양일 뿐이고, 이 속에 더 이상 나뉘어질 수 없는 원소라는 것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똑같은 원소가 결합을 해도 그것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자면 ‘F2’라고 하면 철입니다. 철은 철인데 산소하고 결합되면 산화철이 되어서 녹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다양한 원소들과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H는 수소이고 O는 산소인데, 두 분자와 한 분자가 만나면 물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원소들이 합쳐지고 분열하면서 여러 가지 다른 물질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 천년 되면서 완전히 썩어서 아무 물건이 없다고 하더라도 질량 불변의 법칙에 의해서 원소로 환원되어 에너지를 어딘가에 남기고 사라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덩어리진 것들이 흩어질 때에는 열과 에너지를 내고 흩어진 것들이 모일 때에는 주위의 있는 에너지와 힘을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 같은 것이 얼음이 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다시 녹을 때에는 어떤 에너지를 내게 됩니다. 음식물이 속에 들어가서 분해되면서 거기서 열과 에너지들이 나와서 우리가 살아가는 운동의 자원으로 삼습니다.
신기한 것은 우주 밖으로 나가보면, 이런 것들은 우주 공간 안에서 매우 독특한 특성입니다. 우리가 원소를 배울 때 160여가지를 배우는데, 어떤 사람들은 지구에 있는 160 몇 가지의 원소는 우주 어디에 가든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많은 원소들이 모여 있는 우주의 공간은 아주 독특한 공간입니다. 우주의 공간에 나가보면 H 수소밖에 없습니다. 원소라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크기입니다. 그러므로 없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습니다. 그런데 이 수소가 3개가 합쳐지면 헬륨이 되는데, 이 떨어져 있는 3개가 합체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열입니다. 역사적으로 금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을 연금술이라고 하는데, 결국 못만들었습니다. 못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현대과학이 밝혀냈습니다. 만들 수 있는데 50억도의 열이 필요합니다. 아직까지는 50억도의 열을 만들 수 없습니다. 만들어 낸다면 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H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열로 만들어지면서 지구상의 160 몇 가지의 수 많은 원소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열이라고 하는 조건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런 결과들이 생겨난 것이지, 원래의 형태가 아닙니다. 우주 공간에 가면 ‘H’만 있는데, 이 ‘H’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무언가 없는 것을 나오지 않겠습니까, 무에서 창조 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명쾌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생각해보면 ‘H’라고 하는 것이 현대 과학으로 생각을 하니까 상정이 되는 것이지, 옛날 고대인이 ‘H’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이런 것들로부터 만들어 졌을때 우리는 무로부터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무로부터 만들어졌다고 해야 합리적인 것이지, 유로부터 만들어졌다고 하면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물질 자체가 스스로 존재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우니까 원해물질은 신과 함께 영원히 존재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물질을 의존하든지 물질이 하나님을 의존하든지 둘 중 하나이지, 둘 다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둘 다 공존한다면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에서 ‘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무한한 잠재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놀랍게 사상적으로 통하는 것을 봅니다. 교리라고 하는 것 자체가 결국은 논리의 틀을 담는 것입니다. 논리의 전개를 하다보면, 마지막에는 공간, 시간, 삶의 목적, 도덕의 근원등의 문제들에 접하게 됩니다.
선악의 문제를 놓고 보면, 전 세계가 테러 때문에 골치를 앍고 있는데, 테러를 자행하는 나라에서는 자기네는 이런 식으로 테러를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다른 방법으로 했을 뿐이지 더 많은 고통을 안겨주는 테러를 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테러리스트 한 사람이 자유국가에 테러를 일으키고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을 가서 자기네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도망을 갔는데 지명수배가 내리게 됩니다. 자기네 나라가 결국은 친미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지명 수배가 됩니다. 그래서 정부는 추적을 하고 테러리스트는 산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산 속에서 옛 날에 알던 같은 민족을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 사람이 테러리스트를 숨겨주게 됩니다. 그래서 숨어 은신하게 되고, 숨겨준 사람에게 돈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이 숨겨준 사람을 신고합니다. 그래서 정부가 와서 테러리스트를 체포하고 호송이 되는데 테러리스트와 같이 있는 동료들이 와서 자기를 구원해주게 되었습니다.
다시 풀어서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이 테러리스트가 자유국가에서 테러를 저질렀습니다. 선입니까, 악입니까, 그 다음에 테러리스트의 국가인 그 나라의 정부가 볼 때에 그 테러리스트가 다른 나라에 가서 테러를 저질러서 국가가 위태롭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국가가 볼 때는 그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까, 악한 사람입니까, 그리고 산 속에서 만난 테러리스트를 숨겨준 같은 민족에게 그 테러리스트는 악입니까, 선입니까, 또 정부를 지지하는 동네 주민이 테러리스트를 신고했습니다. 그것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신고가 되어서 정부로부터 호송되어가는데 그 테러리스트 동료들이 구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악을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악은 자유민주국가 사람들이 볼 때 악입니다. 정부로 볼 때도 악입니다. 그런데 같은 민족이 볼 때 이 사람은 선입니다. 동네 사람이 볼 때는 악한 사람입니다. 또 테러리스트 동료들에게는 선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까, 선한 사람입니까, 선과 악이 그 때 그 때마다 다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두 개의 관점이잖아요. 이것을 통일 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테러리스트의 관점에 서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테러를 저지르면 선이 됩니다. 그리고 정부가 나를 잡으려 하는 것은 악입니다. 나를 숨겨준 같은 민족은 선입니다. 나를 신고한 동네 주민은 악입니다. 내가 테러리스트가 되면 정부와 동네주민이 악으로 규정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과연 절대적으로 판단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여러 해중에 베트남에 간적이 있습니다. 선교사 집회를 하는데 베트남 기독교연맹 대표단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인사를 하며 200불을 월남기독교 발전을 위해서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을 불러서 통역하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당신들 민족들이 싸우는 이 땅에 엄하게 한국 사람들이 와서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해서 한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용서를 빈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한 것은 생각을 안하고 우리를 죽일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초등학교 4학년 때 노래를 가르켜주었는데 그 노래를 부르면서 가슴이 벅찼었습니다. “조국 통일을 위해서 나라를 지키시다가 세계의 부름을 받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월남으로 간다“ 이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미군이 자기네가 싸우다 싸우다 지치니까 한국군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그것이 거절되니까 도와주면 무기와 북한에 대한 위협에서 보호해주며,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한국 경제발전을 도와주겠다는 말에 넘어가서 5천명의 젊은이들이 죽게 되었으며, 더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신자가 양심을 따라 살아도 선악에 대한 궁극적인 원천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지만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10월 유신이 일어났을 때 찬양한다고 깃발들고 그러던 사람들이 예수 믿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 합니까, 선악의 판단력이 없으니까 역사의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휘몰려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들어서면 주님이 세우신 종이라고 박수치고 사진 찍은 것처럼 역사의식이 없는 행동들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2년 전에 어느 교회에 집회를 하러 갔는데 장로님이 강사대접을 한다고 오셔서 명함을 내미는데 사법 연수원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법이야기나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장로님, 법이 무엇입니까” 모르는 척하며 물었습니다. “하나의 법이 그 법일 수 밖에 없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두 가지 학설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법 사상과 실정법 사상입니다. 자연법 사상은 천지 창조의 목적이 있고, 즉 하나님이 정해놓은 질서가 있고 그것에 따라서 정해져있는 것을 인간 본성과 자연 속에 묻어있는데 그것을 밝은 이성으로 찾아가서 거기에 맞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은 최소한 도덕이라고 그럽니다. 그게 바로 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보는 자연법 사상입니다. 실정법 사상은 사회가 좋다고 생각하고 만들면 그것이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계몽주의 이후로부터 자유주위가 발전을 하면서 확산됩니다. 그것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20세기에 와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히틀러가 통치할 때 93%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히틀러 혼자 그 법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이 바보짓을 해서 끔찍한 나치즘을 만들어내고 파시즘, 궁극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과연 인간이라는 집단이 합의만 하면 아무 법이나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법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동의가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것은 20세기에 와서 끔찍한 교훈을 통해 다시 자연법 사상으로 회귀한다는 그 장로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일은 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악의 판단이 그렇게 되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 절대적인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커다란 답이 바로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에 목적을 세워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걷게 하십니다. 우리가 참된 인간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참된 세계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완전한 교회라고 하는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우리들은 구속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공부하면 참 기쁨이 있습니다. 나 같은 인간에게 주님을 배워서 알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셨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이라는 것이 결국 지성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알게 되면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분수를 알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알고 그 품격에 맞게 생각하고 살아 가라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묻어 있는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며 살아가게 합니다.
찬양 -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예수님 말씀에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목숨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제일 뒤에 나옵니다. 죽도록 사랑할 때 죽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세계는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는 것 만큼만 보이는 것입니다. 시간은 무엇일까, 영원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세계를 왜 만드셨을까, 창조된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그를 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목적은 무엇인가, 세계 속에 그는 무엇인가, 생각을 해야합니다. 생각을 안하면 우울증에 빠집니다. 왜 우울증에 빠지냐면 자기의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고, 욕망대로 살아보아도 왜 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사는 사람들은 편할지모르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성으로 대화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허비하면 안됩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십시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정말 놀랍다 아멘! 할 때에 눈물이 쏟아지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면 볼수록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아는 것 없이 사랑하는 것은 극장 포스터보고 연예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과 똑같은 감정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적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먼저 회개하십시오, 공부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주님이 주신 머리를 중심 잡는데만 썼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제는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겠습니다. 나의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가서 내 마음이 돗단배와 같다면 나의 지성은 뱃머리입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의 지식을 섭취하면서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감격하며, 그렇게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옛날에 자기처럼 헤매는 사람에게 진리를 전해주어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에 돈을 다 모아서 건축헌금 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참답게 알면 영혼을 위해서 봉사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을 지나칠 수 없어서 그에게 참된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삶은 현장의 삶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보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길이신 그분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행복, 보혈의 삶을 살게 됩니다.
찬양 - 시시 때때로 주만 봅니다
여러분 살아 있는 날 동안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십시오, 그냥 교회 끌어오는 것만 하지말고 교회 안나와도 인생의 도리가 이렇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합니다. 그 때에 그 영혼이 쓰러질듯 여러분들 품에 안기면서 나를 좀 도와달라는 고백을 하게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서는 “사랑은 옳은대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들은 별과 같이 빛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리를 왜 배우냐고 누가 물어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6 강
A. 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에 살았던 대단한 인물입니다.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처음 만난 것은 1988년도 신학교 교수로 막 부임할 시기인데, 교회에서 교육 전도사 생활하며 중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당시 청교도 서적을 굉장히 많이 읽었는데, 그 때에 조나단 에드워즈를 알게 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실은 청교도 역사와는 거리가 좀 멉니다. 청교도 역사는 18세기에 이미 다 끝났었습니다. 더군다나 청교도는 영국이야기이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사람입니다.
1620년에 메이플라호를 타고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런데 영국 청교도들은 건너가다가 다 죽습니다. 그러다가 백년 후에 이민의 역사로 다시 세워지는데, 거기에서 청교도로 이야기하는게 무성의하지만 초창기에는 그런 전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부흥에 관해서 관심을 깊게 가지게 되었는데, 그 때 나의 생각이나 고민이나 이런 것들은 [거룩한 부흥]이라는 책 속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때의 더 원시적인 형태로 [창세기의 신앙성]이라는 책 속에도 나와 있는데, 연대를 따라서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의 인물이었는데, 미국의 역사상 1740년대에 있었던 미국의 제 1차 대각성이 있을 때, 주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주도적인 인물들이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찰스 웨슬리, 존 웨슬리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을 보게 되었는데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정상적인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글씨가 작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흥이라는 부분만 읽게 되었고 책 쓰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뜸해졌습니다. 목회 하다가 그 후에 다시 에드워즈를 읽게 되면서 그 사상의 심오한 깊이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미국 역사상 “The Great”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학자라고 말할 정도의 천재였습니다. 3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6살 때 최초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8살 때 유물론에 대핸 두 번째 논물을 발표하고, 13살에 예일 대학교에 들어갈 때 이미 청교도 책을 가지고 놀았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라틴어, 희랍어를 마스터하고 특별히 라틴어의 천재였습니다. 그래서 졸업할 때 대표로 연설할 때 라틴어로 연설을 합니다. 16살 때는 자연 철학에 관한 논문을 써서 유럽에 있는 학회지에 등재하게 됩니다. 그것이 [거미에 관하여]라는 논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계몽주의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계몽주의의 특징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없는 것 내지는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동정녀 탄생, 인성과 신성의 동일성, 천지창조, 부활, 심판등의 기독교의 객관적인 진리들이 위협을 받게 되며,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없다”라는 사상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 속에서 철저하게 개혁신학을 붙들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위대하시다는 것을 변증하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나는 논쟁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할 정도로 논쟁에 탁월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신학만 했던 것에 반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역사, 자연 과학, 철학 등에 대한 탁월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17살에 예일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2년 뒤에 대학원을 마칠 때 교수가 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영국의 고서방을 돌다가 우연히 먼지가 케케묵은 책을 발견하는데 그것이 바로 에드워즈의 저작전집이었습니다. 그것을 집에 가지고 와서 읽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당시 잘나가는 외과의사였고, 왕실 주치의의 조수로 일하던 전도 유망한 젊은이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타락과 죄 이런 것들이 환경 때문인 줄 알았는데, 거기 오는 사람들은 왕실 주치의니까 귀족 이런 사람들만 오는데 그 속에서 벌어지는 범죄와 더러운 삶이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하고 똑같이 되풀이 되는 것을 발견하면서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는 희망이 없다. 그래서 목사가 됩니다. 그는 에드워즈 목사의 읽으며 “나는 거대한 자연 앞에 서 있는 티끌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정말 어마어마한 인물입니다.
오늘 날의 프리스턴 대학교 전신인 뉴저지 대학의 초대 총장을 역임합니다. 53살의 나이에 (천연두 실험 접종하고 결국은 죽는다) 생을 마감합니다. 만약 살았으면 더 엄청난 작품이 나왔을 것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작품도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일 대학에서 다시 자료를 manuscripts를 카피해서 비평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현재 25권 나와 있습니다. 3권정도 더 나올것입니다. 몇 권 빼놓고 중요한 것은 다 나왔습니다. 굉장합니다. 철학적인 사유의 폭이 다른 신학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조와 싸우는 용감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당대의 뉴턴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뉴턴이 모든 물리학을 새로 쓰고 있었거든요. 이것을 목회자가 다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물리학과 신학과의 관계가 굉장히 밀접합니다. 아이슈타인이 나타나면서 뉴턴의 체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학문의 새로운 세계들이 펼쳐지게 됩니다. 상대성 원리도 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700페이지 책이 27권쯤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또 그는 메모의 천재였습니다. ‘내 기억력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한번도 믿은적이 없으니까’ 부인이 메모지와 펜을 마련해주면 말을 타고 가면서도 옷에다가 핀으로 메모를 꼽습니다. 집에서는 부인이 하나하나 다 떼어서 보관했고 아직까지도 남았습니다. 언제 한번 조나단 에드워즈의 밤 해서 우주와 인간과 역사, 자연세계 공부합시다. 저는 이분을 만나게 하셔서 7년정도 멘토링을 받았는데, 이 분 자료는 아마 거의 1000권정도 있고 모든 자료를 사려고 하고 있습니다. 박사학위논문은 60권정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어를 잘하면 에드워즈 저작전집 사서 읽어보세요. 300년 전 불신앙의 시대에 살았던 어둠에 맞서 거목과 같이 싸웠던 에드워즈를 본 받아, 자라나는 꿈나무 같은 성도들이 요즘 시대의 거목과 같이 자라서 주의 영광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어렵지만, 인내심을 갖고 사서 읽어보십시오. 양연식 목사 논문 중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향”에 나옵니다.
B. 창조
1부에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존재에 관한 것이었고, 2부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나옵니다. 창조, 섭리 두 가지로 나옵니다.
“작정의 시행은 창조 사업부터 시작된다. 이 창조 사업은 모든 계시의 시작이요, 기초이며 모든 종교 생활의 근원인 것이다.” 68p
여러분 성경 66권의 요절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이것이 요절입니다. 요절이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구절인데, 그것 말고 성경 66권을 다 모아서 딱 한절로 요약하라고 하면 뭐가 나오겠습니까? 창세기 1:1절입니다. 창세기 1:1절의 토대가 있고 그 위에 요한복음 3:16절이 놓이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창조가 있었는데 타락했기 때문에 구속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을 향한 놀라운 은혜가 찬란하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창조, 타락, 구속, 완성으로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3:16절이 요절이지만 그것도 창세기 1:1절 토대 위에 놓이지 않으면 허공에 뜬 말씀일 뿐입니다. 창세기 1:1절은 성경 전체의 요약이고, 그 요약 위에 있는 가장 중요한 요절은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창조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먼저 있었던 물질을 사용치 않고 창조하시고, 한편으로는 본질상 불충분한 물질로부터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산출해 내신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68p
1) 범신론과 자연신론
범신론은 판베이즘(pantheism) 이라고 하는데, “판”(pan)은 희랍어로 “모든”이라는 뜻입니다. 즉,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얼음 덩어리가 녹으면 물이 됩니다. 물을 끓이면 김이 되고 더 끓이면 수증기가 되고 더 끓이면 없어져버립니다. 없어져버린다는 것은 사실 김을 기준으로 없어진다는 것이지 없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각각 형태는 다르지만 원소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얼음, 출렁거리는 물, 거기다가 물감 탄 물,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 이런 현상에 속지 않고 본질을 본다면 H2O, 즉 산소와 수소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더 멀리 가면 나중 가면 무일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무의 상태에서부터 창조가 되었다고 보고, 모든 눈에 보이는 인간과 자연 사물들은 결국 진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환원되고 환원되어서 신과 한 덩어리가 되는 것, 범아일여사상이 대표적인 범신론입니다. 오늘날의 범신론이 아주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신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의 사상이 다시 오늘 날 환영을 받고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사고 방식이기도 합니다. 극단적으로 과학을 추구하면서도 한쪽으로는 아주 종교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교적인 것이 건전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범신론입니다. 범신론에서의 창조는 플라톤 같은 사람이 범신론자인데, 하나님 자신이 너무 차고 넘쳤기 때문에 그것이 흘러나온 것이 이 세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출설이라고 합니다.
자연신론은 계몽주의 시대 때 생긴 것인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법칙을 정해놓으셨는데 하나님이 이제는 모든 세계에 간섭하시지 않으시고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사상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게 됩니다.
2) 창조의 시기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다“ 태초는 언제인가, 태초는 모든 만물들이 생기기 시작한 그 때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나, 라는 질문은 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태초 전에는 끝없는 영원이 존재한다고 본다. 오늘 우리들이 생각 할 때, 세계라고 하는 것도 무한한 영원의 틈바구니 사이에 있는 신앙적인 존재입니다. 티끌같이 하찮은 것이 인간입니다.
“창조 사역의 첫 부분은 엄밀히 무에서의 창조이며, 기존 재료를 사용치 않은 창조였다” 69p
없어지는 것은 원래 없어지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큰 나무인데 불로 태우면 없어집니다. 어떻게 없어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원래 사물들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기합니다. 인간도 이런 창조를 많이 흉내냅니다. 화학제품들을 뽑아내는 것, 석탄에서 프라스틱, 나일론을 뽑아냅니다. 비슷하지도 않은데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3) 창조의 궁극적 목적
“어떤 학자들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을 인간의 행복에서 찾으려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충족함을 가지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의 찬양을 받기 위해 벌려놓은 하나의 허황한 구경거리로서 꾸며진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안녕을 촉진시키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창조주를 찬양하도록 이끌어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69p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영광이 모자라서 보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은 영광을 더 받으실수도 없고 덜 받으실 수도 없습니다. 태양 같은 것을 보면 구름이 끼면 해가 없다, 컴컴하다 그러지만 구름이 높아봐야 10km인데 그 위로는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신학적으로 본체적 영광, 발성적 영광, 효과적 영광으로 구분합니다. 본체적 영광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발성적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하신 특정한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효과적 영광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도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광입니다.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예를 들어 열린 교회에 오신 분들 중에 다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이미 하신 분들이 계실텐데, 그들이 열린 교회에서 보여주는 도덕적인 행위들은 그의 전에 신앙 생활을 하던 교회를 빛나게 하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해 주는 존재로 살아갈 때, 그 때 인간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리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곧 그 자체의 근원이 하나님 자신 밖에는 없습니다. 전정으로 행복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 속에서 살면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네잎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입니다. 근데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네잎클로버라고 찾아낸 것을 보면 사실 네잎클로버가 아니라 비슷하게 생긴 잡초들입니다. 행운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나폴레옹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전쟁에 나가면서도 마차에다가 책을 싣고 다녔다고 합니다. 3000권을 읽었대요. 전쟁을 하던 중 우연히 땅바닥에 네잎 짜리 클로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개를 숙여서 보는 순간 총알이 휙 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에서 모여서 나온겁니다. 클로버가 모여서 분집생활을 합니다. 세잎클로버를 막 밝으면서 네잎클로버를 찾는데, 세잎클로버의 상징은 행복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행복을 짚밟으면서 행운만 찾는 것입니다. 행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입니다. 오히려 행운을 밟으면서 난 그런 행운 필요 없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행운은 인생을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없어도 되는데 그것이 주어지면 위로 쑥 올라가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 모르고 행운이 와야 감사합니다.
어느 아들이 뺀질거리며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합니다. 그 날도 싫은 소리를 하며 집을 나서서 차를 몰고 나가는데 빙판에 미끌어지면서 죽을뻔했고 차가 폐차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를 만나서는 “아버지, 나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나봐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행복에 대해서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여러분 그런 기도가 잘 나옵니까? 따뜻한 가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지체가 있는 교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자라서 감사합니다. 남자라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 기도 할 때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안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인간의 행복은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행복을 포기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에 사심이 너무 많아서 그런 고민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갈등과 고민이 생깁니다. 그래서 교회도 필요하고 영혼을 돌보는 일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자리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온전히 주님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면서 살았던 때가 가장 행복했었을 것입니다.
4) 창조교리에 대한 이설
a. 이원론
“물질은 영원한 것인데, 이 물질로부터 세상이 우연히 또는 고도의 직접적인 힘에 의해 발생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두 영원자가 함께 존재할 수 없으므로, 두 개의 무한자가 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70p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만약에 궁극적인 존재가 둘이 있다면 서로 의존적인 존재가 되고, 그 중 어느 하나도 필수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만든이 없이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만든이가 없는 물질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b. 유출설
앞의 설명 참조.
c. 진화론
기독교에서는 진화론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진화론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인정하냐하면, 종에서 종으로 진화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종 속에서의 진화는 인정합니다. 예를 들면, 소히 이야기하는 “라마르크(Lamarck, Jean Baptiste 1744.8.1 ~ 1829.12.18)의 용불용설”(Theory of Use and Disuse, 用不用說) 즉, 사용하는 것들은 더 많이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들은 점점 더 퇴화되는, 그러한 기능들이 완전히 발달되고 퇴화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다른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고한 세월에 걸쳐서 변한다고 볼 때, 이 종에서 다른 종 사이의 오가는 길이가 확정된 기간보다 훨씬 더 길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많은 화석들이 종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런 것들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연속적인 증거가 없고 처음과 끝만 존재하는 것에 대한 비판)
이렇게 이야기 하면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 - 대표적인 무신론자이며 진화론자) 같은 사람들은 반박을 하겠지만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서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C. 영적 세계의 창조
1) 천사들의 존재에 대한 증명
“자유주의 신학은 영적 세계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성경은 천사들의 존재와 그들의 참 인격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 천사들은 우수한 영적 존재, 살과 뼈도 없으므로 볼 수 없는 존재이다. 천사 중에도 어떤 천사는 선하고 거룩하며, 선택받은 존재인데 반하여, 나머지 천사는 그들 본래의 위치에서 타락함으로 악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71p
2) 천사의 부류
a. 그룹
그룹이라고 하는 것은 ‘접근하다’ ‘가까이하다’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케롭”(kerub)에서 나옵니다. 아마 영어에서는 ‘케루빔’(cherubim)인데 원래 히브리어를 영어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빔”(bim)은 복수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존엄과 영광을 선포하며, 에덴 동산에서나 성막과 성전에서나 지상에서 임재하실 때에 하나님의 거룩성을 호위한다.” 71p
b. 스랍
“천사들 중에는 스랍이라 불리우는 천사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이사야 6:2-3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스랍들은 하늘의 보좌를 호위하여 시중들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또 그들은 화해의 목적을 수행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올바로 접근하도록 준비시킨다.” 72p
c. 가브리엘과 미가엘
천사장은 가브리엘과 미가엘, 루시퍼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왕명을 출납하는 천사이고, 미가엘은 전투하는 천사이고, 루시퍼는 타락해서 사탄이 되었습니다. 마귀는 복수를 쓰지 않고 단수로 씁니다. 마귀들이 아니라 마귀는 항상 하나입니다. 그것이 바로 satan(사탄), 루시퍼입니다.
“가브리엘의 특별한 업무는 신적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며, 그 계시를 해석해 주는 것이다. 미가엘은 천사장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을 대항하여 여호와의 전투를 대행하는 용감한 전사이다. 성경에는 이 천사들 외에도 정사와 권세와 보좌와 주관자라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기독되어 있다. 이러한 명칭들은 천사들 사이에도 등급과 위엄의 차이가 있을을 지적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찬양하고 있다고 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천사들은 구원 받은 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며 신자를 돌보며 소자를 보호하며 교회 안에 계시며 신자들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한다. 또 천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전달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며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기도 한다.“ 72p
가끔 수호천사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에 나옵니다. 수호천사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때 그 때 마다 창조하시는데 육체는 어머니의 태에서 빚어지고 적절한 시기에 하나님이 영원의 창조하셨을 때 결합시킵니다. 그러면 수호천사는 언제 만들어서 인간이 하나 태어날 때마다 인간에서 붙어있게 하시고, 또 만약에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죽는다면 그 수호천사는 할 일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그 할 일이 없어진 천사는 또 다른 사람을 지목받는 것인지 복잡합니다. 그래서 칼빈이 이런 논쟁을 그만하고 천사는 우리를 보호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므로 돕는다는 정도로 만족하자고 이야기합니다.
d. 악한 천사들
이것이 말하자면 귀신입니다. 세상의 개념은 인간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입니다. 구천을 떠돌면서 한이 많거나 충분히 공덕을 쌓지 못했던 사람들은 좋은 곳에 못가고 귀신노릇을 하며 때로 몰려다닙니다. 이런 귀신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패거리처럼 몰려다니면서 인간들이나 혼내주는데, 우리는 육체를 털어버리고 이렇게 구천을 헤매는데 너희들은 아니야 그러면서 귀신들이 몰려다니면서 인간을 괴롭힙니다. 건물 같은 것 지을 때, 고사를 지내는 것도 건축비 조금 들이고 기적적으로 건물을 짓는다거나 복을 내려달라고 하는 것 보다는 심술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뇌물을 먹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귀신이 원래는 천사들이었는데 그들이 타락하면서 귀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정상적으로 생활하면 겁 먹을게 없습니다. 빛 가운데 살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요즘 굉장히 조심해야 할 것은 마지막 때가 되면서 특별히 정신병 같은 것들이 많이 생겨나는데 그런 것들에서 건강하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람들 속에서 사랑하며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확인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그렇게 은혜를 받으면서 생활하면 정신병 같은 것들은 걸리지 않습니다. 최근에 최진실씨와 그의 동생이 죽는 것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사람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몇 년 동안 문 밖을 못나오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랑으로 2년씩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서 다시 예수 믿고 세상을 살아가게 만들어 준 간증들이 있습니다. 열린신문에 다 나와 있습니다.
D. 물질 세계의 창조
1) 창조의 기간 ( 24시간설과 시대설 )
창조의 기간에 대해서 중요한 것은 “날”이라는 것이 정말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인가‘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창세기 1장을 ‘날’이라고 놓고 보면, 인간의 역사와 물질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불과 5일정도 밖에 차이가 안납니다. 그리고 그 밑에 족보들의 역사가 나옵니다. 물론 인간과 물질의 역사 중간에 빠진 연대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이 아무리 오래살았다해봐야 천년정도이고, 열 대가 빠졌다고해도 만년이고, 백대가 빠졌다고 하면 십만년인데, 오늘 날 보편적으로 지구의 나이를 45억년 정도로 보니까 이것이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지구의 나이를 45억년 정도로 보는 것은 “날”이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측정해서 연대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연대 속에 인간의 오류로 빠진 연대가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과 물질의 역사가 45억년정도까지 나올 수 없는 측정연대의 오류에 대한 설명)
그래서 개혁주의 안에서도 창세기 1장의 “날”이라고 하는 것을 히브리어로 ‘욤’(yom)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24시간이라고 보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나는 오히려 시대론쪽에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영어로는 age theory(시대설) 또는 Day theory(날설)이라고도 하는데, 예를 들자면, ‘천지가 창조된 날의 때의 내력이 이러하니라“ 할 때, 그 ”때“가 ”욤“(yom)입니다. 천지가 창조된 날의 내력이라는 것은 날이 아니라 period(기간)입니다. 6일동안 창조됩니다. “누가 통치하던 날에“ 할 때의 날은 하루를 의미하지 않고 긴 시간을 의미하듯이 ”천지가 창조된 날”의 날은 6일을 의미합니다. 굉장히 많은 복잡한 이론들이 많습니다. (1시간 7초)
24시간설로도 볼 수 있고, 시대설로도 볼 수 있습니다. 24시간설로 보면, 긴 지질학적인 과학의 증거들에 의하면 많이 차이가 많고 또 거기에 대한 반론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무를 잘라 보면 나이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도 나이 관념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사람이 나이가 얼마나 들었는지 의학적으로 감정을 하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성숙한 세계 창조론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이 세계를 성숙한 상태에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무도 있고 다 있고 공중에는 새가 날고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냇가 데려가서 이것을 연령 감정해주세요 했는데 의사가 방금 태어났습니다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든 그 있는 그 상태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러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석유는 엄청난 세월이 흘러야 되는데 그것은 어떻하냐는 말들도 있는데, 다 인간이 필요할 줄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인데, 우리 입장에서는 시원하지가 않고 너무 우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시대설을 채택하게 되면 지질학적 연대가 들어오면서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약점도 있습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이 쉬셨다고 하는데 그것도 긴 시간을 하나님이 쉬신 것인가, 그러면 마지막 창조가 완성된 날을 기념하라고 하셨는데 그것도 긴시대였는가 안식일은 어떤 접촉점을 갖는가, 라는 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해도 그런 하나를 가지고 대항하고 싸울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2) 6일간의 사역
❶ 빛의 창조 | ❹ 빛을 가진 물체의 창조 |
❷ 궁창(공간)의 창조와 물의 분리 | ❺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창조 |
❸ 물과 마른 땅의 분리 : 인간과 짐승이 거처할 땅의 준비 | ❻ 땅의 짐승과 육축과 기는 것과 인간의 창조 |
(책 75p 도표참조)
6일간의 창조 사역은 유사성이 있습니다. ❶은 빛을 창조하시고, ❹는 빛을 가진 물체를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궁창은 좀 더 확실한 번역으로 히브리말 “라키아”(raqia)라는 단어인데, “라티아”(ratia)는 ‘때리다‘라는 뜻이고 “라키아“(raqia)는 ‘평평하게 펼처진‘ 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이라고 할 때, Sky이와 heaven하고 어떻게 다릅니까? Sky는 스카이다이버들이 뛰어내리고 새들이 날라다니는 것이 Sky이고 heaven은 그보다 더 먼 하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창공 그러면 공기가 있어서 파란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파란 하늘을 뭔가 두들겨서 넓게 펴놓은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우주관이었습니다. 별은 거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❷ 궁창의 분리와 ❺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창조, 그래서 ❶❷❸은 거할 장소의 창조이고, ❹❺❻일 날 내용의 컨탠츠를 짋어넣는 것입니다. 빛을 만들고 빛을 가진 물체, 공간과 물을 창조하고 공간을 나는 새와 물고기들을 집어넣으시고, 물과 마른 땅이 분리되고 짐승과 육축과 인간이 창조됩니다. 인간은 맨 마지막에 창조됩니다.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목적이 인간에게로 수렴되고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로 수렴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은 창조의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E. 섭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하신 세상을 유지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자연히 창조교리 다음에는 섭리교리를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며,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 속에서 활동하시며, 만물을 정해진 목적에 맞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섭리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데, 그 첫 번째는 존재에 관례된 것이며, 둘째는 활동에 관한 것이며, 셋째는 만물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78p
1) 하나님의 협력의 요소
a. 보존
“보존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역이다. 세상은 별개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한 부분이 아니지만, 계속적인 존재의 근거를 갖는다. 세상은 만물을 존재케 하시고 활동케 하시는 신적 권능의 계속적인 행사를 통하여 유지된다.” 79p
세상과 하나님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따로 존재하시지 않고, 모든 세상은 하나님 안에서 근거를 갖습니다.
b. 협력
“협력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과 협력하시며 피조물로 하여금 그들의 해야 할 일을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라 정의 할 수 있다. 이것은 세계 속에 자연력과 인간의 의지와 같은 실제적 제 2의 원인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원인들이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 속에서까지라도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행동하도록 자극시키며, 순간 순간마다 그들의 행동에 함께 해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한 원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제일 원인이요, 인간은 제 2원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 침을 이룬 말들이 각기 그 일에 한 부분을 담당한 것 처럼, 인간도 일의 한 부분을 각기 하고 있는 것 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과 인간이 행한 동일한 행위라도 전체적인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의 행동인 동시에 인간의 행동인 것이다. 또한 우리 인간 신인렵력교리가 인간의 죄악 행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라는 그릇된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 79p
이것이 무슨 뜻이냐하면, 인간이 하는데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또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기를 바라시지만 인간이 그렇게 하는 바람에 하나님이 당했다 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이 작정하셨다고 봅니다. 쉽게 생각하면, 인간은 타락한 다음으로는 선한 일을 하는데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안되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며, 선한 일을 했을 경우에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올바르고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일을 할 때에는 인간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 일을 행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하는 일들도 사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도덕적 통치에 들어가면 1차적 선, 2차적 선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잘 읽으면서 정리하면 좋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고 성령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셔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이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결국 그 분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반면에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너무 많습니다. 모든 악에 대해서 인간은 전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악에 대한 책임이 부여됩니다. 계시가 드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섭리란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아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순간 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 라는 마음을 갖고, 실제로 실현하는데에서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실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기도하지 않으면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을거다 라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어차피 주님께 주권이 있는데 내가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될일이 안될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그렇게 하시기로 마음을 먹으신 것입니다.
c. 통치
“통치란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들의 존재하는 목적에 맞도록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신구약에서 우주의 왕(다스리는 자)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스리시는 피조물의 성질에 맞도록 자신의 법칙을 적용시키셨다." 80p
2) 섭리교리에 대한 그릇된 견해
a. 자연신론적 관념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의 법칙을 확립하셨고, 세상을 움직이게 해 놓으시고는 세상에서 손을 때셨다고 주장한다.” 80p
디이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치하에서 사형당한 천재적인 학자였는데, 그 사람이 쓴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박사 논문이 있습니다. 예전에 보면서 눈물을 흘린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총을 들고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우다가 잡혀서 결국 사형당합니다. 이 사람의 주장은 버스에 승객을 태우고 미치광이가 운전을 하면, 그 운전대를 빼앗아야지 나머지 사람들이 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세계에 하나님이 간섭안하시나? 예전 미개한 시대나 간섭하셨지 요즘은 안하신다. 이것은 성숙한 세계와 사회라는 개념입니다. 결국 인간들끼리 자결정적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은 허락을 해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도덕적 의무에 대한 책임은 아주 높아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관여는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도 없는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자유주의적 신학사상입니다.
b. 범신론적 관념
“범신론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구별하지 않고, 이 둘을 동일시하므로 섭리교리를 인정치 않는다. 또 세상에 제 2원인이 없다고 보며, 하나님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직접적인 조정자라고 본다” 81p
하나님이 세계와 신 사이의 공의는 부정하고 제2원인은 없다. 하나님이 모두 하시는거다. 어떤 법칙도 많이 작용을 합니다.
3) 비상 섭리(이적)
“우리는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로 구별하는데, 이 특별 섭리 속에서 이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81p
요새 리모컨이 일반화 되어있습니다. 선풍기, 컴퓨터, 에어컨, TV, 온열기등 많은 곳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통합하는 방안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리모컨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기적같지 않겠어요? 이 쪽에서 누르면 다른 쪽에서 불이 들어옵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이해의 스펙트럼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법칙을 벗어나는 것 같아도 우리가 모르는 법칙이 많이 있습니다. 반대로 볼 때, 질병 같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질병을 불행의 신이 나를 저주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빨을 잘못 관리 하면 심근경색으로 죽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동의됩니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이 없어서 동의를 못합니다. 이빨을 관리 안하면 잇몸이 벌어지면서 거기에 균이 들어갑니다. 그 균이 심장까지 돌면 심근경색이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질병을 내버려두면 고름이 계속 들어가면서 콩팥으로 들어가서 콩팥을 망가뜨립니다. 이것을 알았을 때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이런 지식이 없이 질병에 걸렸으면 불행이 다가왔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기적이라는 것도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법칙을 초월한 것이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F. 인간론
인간론의 구조를 보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부터 시작해서 ‘무슨 일을 하나‘로 나뉘질 않고, 상태에 따라 나뉩니다. 첫 째는 원시 상태의 인간입니다. 원시 상태 인간은 유인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기 이전, 즉 타락 이전의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둘 째는 타락한 이후에 있는 인간, 셋 째는 은혜 계약 안에 있는 인간입니다. 즉, 구속 받을 사람으로서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3가지 상태로 구분합니다.
1) 원시 상태의 인간
“인간은 영혼과 육체, 두 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다는 것이 통상적인 견해이다....”86p
어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영과 육과 혼 등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은 혼과 영이라는 말은 교차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어떤 물건의 구성 요소를 보기 위해서는 공장으로 가보면 됩니다.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흙으로 육체를 만드시고, 거기에 생기, 즉 영혼을 불어 넣으십니다. 즉 영혼과 육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작용하는 하나의 기능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영과 혼과 골수와 관절등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의 영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라고 한다고 해서 인간을 네 구성요소로 나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구성 요소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영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을 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2) 개인 영혼의 기원
a. 선재설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기 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87p
이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영혼을 저수지 같은 데에다가 한꺼번에 창조하셨는데, 육체가 만들어 질때마다 하나씩 짝을 입힙니다. 아담의 타락은 그 영혼의 저수지 전체를 더럽히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 이것을 통해서 설명이 잘됩니다. 그런데 설명이 어려운 본문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그것은 원래 있던 데에서 하나를 불러 온 것인가, 아니면 새로 창조한 것인가, 물론 우리는 창조한 것을 봅니다. 선제설은 오늘 날에는 환영을 못받고 있습니다.
b. 유전설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그들의 부모에게서 유전받는다고 한다“ 87p 루터교의 견해
유전설의 강점은 “하와의 영혼 창조에 대해 성경에 기록이 없고 후손들이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동물들의 경우에는 육체와 혼이 가족적 특성의 유전과 죄의 타락성의 유전에 의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해진다는 사실에 근거를 갖는데, 그것은 육체에 관한 문제라기 보다는 혼에 관해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부모가 갖는 특성에 따라 아이들도 비슷한 특성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한 강점)
그런데 유전설의 어려운 점은 부모를 영혼의 창조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이면 그것이 개별적으로 된 것이지 찢어져서 다시 번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의 영혼이 아이들에게 물려지게 될까 하는 반론을 갖게 됩니다.
c. 창조설 (개혁파 견해)
“이 학설은 개인 영혼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인데, 그 시기는 명백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88p
그러나 창조설은 예수님의 무죄성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난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족적 특성의 유전에 대해 설명하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죄인에 불과한데 죄인의 몸에서 난 예수님의 무죄성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에 대한 가족적 특성의 유전에 대한 설명을 못하며, 하나님을 죄된 영혼의 창조자로 보이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마리아가 무죄했다고 말하지만, 그럼 마리아의 어머니는 죄성을 갖기 때문에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계속 올라가다보면 결국 하와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장본인이기 때문에 설명이 안됩니다.
3)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88p
a. 로마 카톨릭의 견해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영성, 의지의 자유, 불멸성과 같은 인간이 부여받은 몇 가지 자연적 은사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한다.“ 89p
b. 루터파 견해
“루터파 교회는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견해를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이 창조시에 인간에게 부여해준 영적 성질 곧 참 지식과 의와 거룩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89p
c. 개혁파 견해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을 구별한다.“ 89p
인간은 어떤 사물들을 파악할 때 그 배후를 보고 사물의 질서들을 파악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요즘은 수많은 정보의 량이 핸드폰 하나에 모두 들어갑니다. 어느 곳에서나 수많은 정보들을 저장해서 꺼내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세상입니다. 전 세계 정보의 양이 1조 기가바이트랍니다. 기술이 발달되면 한 컴퓨터 속에 세계의 모든 정보가 다 들어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인간은 또 하나님으로부터 도덕적 형상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보다 제한된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며, 참 지식과 의와 거룩 속에 존재하는 형상인데, 죄로 말미암아 상실되었으나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된 것이다.
4) 행위 계약 속에 있는 인간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계약을 맺으셨다. 이 본래의 계약을 행위 계약이라고 부른다.“ 90p
(1) 행위 계약의 성경적 증명
a.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였다. (롬 5:12 - 21)
b. 호세아 6 : 7절에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라고 기록되었으니, 아담의 죄는 계약의 이반이라고 부를 수 있다.
(2) 행위 계약의 요소
a. 계약의 당사자
“삼위 일체 하나님과 인류의 대표자 되는 아담” 90p
b. 계약의 약속
"계약의 약속은 가장 고귀한 의미로, 생명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죽음의 가능성을 초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신자들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 91p
c. 계약의 조건
“절대적 순종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말라는 엄한 명령은 순수한 순종에 대한 시험이었던 것이다.” 91p
d. 계약의 형벌
“총괄적 의미로 여기서 형벌이란, 육체적, 영적, 영원적인 죽음인 것이다.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를 말하는 것이다.” 91p
e. 계약의 상징
“생명나무가 하나의 상징이었다면, 이 계약의 유일한 상징이었을 것이다. 생명나무는 생명의 상징과 보증으로 지명된 듯하다.” 91p
생명나무는 영생의 상징이고, 지식의 나무는 판결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통해서 판결을 받는다는 의미도 있고 악이 들어옴으로서 선악의 대조가 생긴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3) 행위 계약의 유효성
이 행위 계약은 결국 첫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말라 정녕 죽으리라”는 언약관계의 개념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행위 계약이 완전 폐기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완전한 순종의 요구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존속한다. 이런 인간들은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못했지만 그 조건은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적 요구에 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이 타락한 후 무력하게 되었으므로 생명의 길이 되지 못한다.” 91p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더 이상 이 행위 계약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행위 계약이 유효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그 계약을 따라서 심판을 받고 육체의 죽음은 물론이거니와 영혼의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 언약을 어긴 결과입니다.
질문 : 시편에 나오는 “셀라“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답 : ‘셀라’의 뜻은 확실하진 않지만 대게 동의할 수 있는게 ‘음을 높여 부르시오’라는 정도의 뜻일 것으로 봅니다. 셀라가 높다, 올라가다 라는 뜻입니다. 조바꿈이나...이것은 음악적 기호이기 때문에 시편을 읽을 때 읽지 않습니다. 빼고 읽습니다.
7 강
지금 시간에는 인간의 상태에 의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인간의 상태는 세 가지 상태가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원시 상태, 죄 아래 있는 인간,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인간으로 분류합니다.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인간도 아직도 은혜 언약 안에 있지만 중생하지 못한 인간도 있고, 중생한 인간도 있고, 중생한 인간 중에서도 영생에 상태에 들어간 인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인간들은 구원론 ( )여기서는 인간에 대해서 세 상태에 대해서만 다루고, 그 뒤에 적용되는 것은 구원론 ( )
A. 죄의 기원
“성경은 가르쳐 주기를 최초의 죄는 낙원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 결과로 세상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 최초의 죄는 뱀의 형태로 가장한 사탄의 시험에 의해 발생된 것인데, 사탄은 인간의 마음속에 의혹과 불신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선악과를 먹음은 그 자체가 지적인 면에서는 불신앙과 자만심을, 의지면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을, 감정면에서는 금지된 실과를 먹으려는 호기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92p
뱀을 종교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뱀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뱀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뱀은 도구였을 뿐이고, 죄는 어디에서 왔는지는 명백하게 이미 하늘 나라에서 범죄가 이루어지고 그 죄가 이 지상에까지 유입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창조 그 자체가 예전에 메카프나나치오의 교리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두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사경회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적인 분이 시기 때문에 당연히 천상 세계는 지적인 세계입니다. 지성적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 가시적 세계가 아니라 가지적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 코, 귀등 감각기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없습니다. 지상 나라는 감각으로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계획이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눈에 보입니다. 똑같이 천상 세계는 보이지 않는 가지적 세계이고, 지상 세계는 가시적 세계입니다.
그런 감각들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이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듯이 뜻이 가지적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가시적 세계에서도 이루어지리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미션입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을 사단이 대적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연히 가지적 세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또 가지적 세계에서 하나님과 대항했다면 가시적 세계를 내버려 두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똑같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뜻이 이루어 지는 가지적 세계를 통해서, 그 뜻이 가시적 세계에서 구현되기를 바랬다면은 사단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상으로부터의 죄가 지상으로까지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고 인간을 유혹합니다. 이 유혹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동질이 형성 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너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말은 나는 지금 비록 취업전전하는 신세지만 개발하면 대통령 같이 될 수 있는 동질의 잠재력이 있다고 제시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셔서 하나님과 가장 닮은 존재로 만드셨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영원히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것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부단한 순종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한번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마음 먹는 ( ) 굉장히 강한 유혹의 끌림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이 죄를 짓게 내버려 두시는가, 그것은 하나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시기로 하신 것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신 자유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면 인형이 인사하는 것을 본적있으실 것입니다. 들어갈 때 인사하고 나올 때 또 인사하고, 깜빡하고 다시 들어가면 또 같은 인사를 합니다. 그것은 기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경배를 받으시는 것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타락을 하게 되는데, 최초의 죄는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은데에 있다. 이 실과의 먹음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죄된 것이다. 그 실과 자체는 존재론적인 특이성이 있다고 보면 안됩니다. 그냥 일반적인 것이고 하나님께서 실과에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실과를 먹음은 인간이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복종시키지 아니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몇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지적인 면에서는 불신앙과 자만심, 의지적인 면에서는 욕망을, 감정적인 면에서는 금지된 실과를 먹으려는 호기심, 인격 전체가 개입되어서 총괄적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특성입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전적으로 타락하여 죽음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듯이 자신의 육체 안에 무엇인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두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금하신 것들을 명령하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B. 죄의 본질
악과 죄라는 말을 혼동하는데, 죄는 뿌리이고, 악은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의 죄와 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Sin'일 것 같지만 사실 ‘Sin’이 아닙니다. ‘Sin’은 실존법상의 처벌 대상이 아닙니다. ‘Crime‘입니다. ‘Crime‘이 실존법적상의 법을 어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법 그러면 ’Criminal Law’입니다. 그렇다면 'Sin'과 ‘Crime‘‘은 무엇이 틀립니까, 'Sin'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도덕적인 죄입니다. 정신과 마음에 연결된 죄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양심의 자유가 있어서 마음속으로 수 없이 사람을 죽여도 처벌 받지 않습니다. 그것이 양심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털 끝 하나라도 건드려서 피를 흘리게 했다면 그것은 ‘Crime‘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벌은 "Sin Punishment"가 아니라, “Crime Punishment’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Crime’이라고 하는 것은 죄라기 보다는 악이라고 합니다. 악은 무엇이냐하면, 이러한 모든 실존법상의 죄들이 결국은 Sin이라는 뿌리로부터 나와서 그것들이 질서를 해치면서 영향을 행사하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봅니다. 악이라는 말도 어느 의미에서 쓰여지는가에 따라 정의가 달라집니다. 악은 정신적인 것과 정신적인 뿌리로부터 나오는 결과, 그 결과가 선을 방해하고 악으로 기울게 될 때, 우리들이 이것을 가르켜 ‘Evil’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아우구스투누스(Augustinus)는 ‘악이란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악이라는 말입니다. 그 마음의 악이 실무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들이 말하는 'Crime'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1) 죄는 특별 악이다
특별 악이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2) 죄는 절대적 성질을 가진다.
“죄의 본질은 악의 일종, 즉 인간이 책임져야할 도덕적 악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정죄하에 놓이게 된다.... 죄란 불법이며 율법에 대한 복종의 결여이며, 율법에 의해 요구되는 사랑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항상 죄를 율법과 관련해서 생각한다.” 95p
3) 죄는 하나님의 뜻에 관계된다.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없는 것입니다. 아노미아(Anomia)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규칙을 깔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복종의 결여, 아는데 온전히 복종을 안하는 것입니다. 신적 율법에 의해 결정되는 사랑과는 반대되는 것 잘못된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4) 죄는 죄책과 오염을 내포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죄는 죄책과 오염을 내포한다고 그랬는데 여기서 죄책이라는 것과 오염은 무엇입니까, 첫 째로 죄란 인간으로 하여금 형벌에 빠트리게 하는 죄책,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길트’(guilt) 라고 하는데, 유죄라고 하면 ‘길티’(guilty)라고 합니다. 길트(guilt)는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입니다. 그 다음에 오염은 부패성입니다.
예를 들어서 차를 몰고 가다가 딴 생각을 해서 남의 집 담벼락을 들이 받아 무너뜨렸습니다. 큰일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주인이 뛰어나오는데 같은 교회 교인입니다. 그래서 사정을 말하고 담장을 물어주겠다고 했는데, 집 주인은 괜찮다고 말합니다. 담벼락을 차로 박아서 벽이 무너지면 죄에 대한 책임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담장을 원래대로 원상복구해줘야 할 책임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집 주인이 그냥 보내줍니다. 죄책이 있었는데 죄책을 깨끗이 없애준 것입니다. 그것을 칭의입니다. 그런데 ( ) 오염입니다.
(칠판 설명) 성질상 부패성은 선천적입니다. 전적 타락, 전적 무능이 됩니다. 무능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인간의 요구에 맞도록 선을 행하기에 무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선을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선은 하나님 앞에 도달할 수 있는 구원의 전제조건으로의 선이 아닙니다. 그 선을 우리들이 2차적 선이라고 부릅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선이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선입니다. 이것을 일반 은총에서 일반 은총의 효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인간이 선을 행해서 하나님 앞에 이룰 수 있다고 보고, 또 통공사상이라고 해서 다른 성인들은 너무 공로가 많아서 자기를 구원하고도 남아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빌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면죄부가 그런 이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주 많이 남은 것이 마리아입니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얻어가도 아직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을 내고 사야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적 타락은 인간이 속속들이 다 부패했다고 하는 깊이와 정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범위의 문제와 더 깊이 관련 됩니다. 그러면이 완벽하게 부패해서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을 조건으로서 선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나름대로 2차적인 선을 행할 수 있는 여지가 남습니다. 이것은 범위와 훨씬 더 관련이 큽니다. 부패한 성질이 지성, 의지, 감성의 모든 영혼과 정신 기능 속에 심지어는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사람이 결국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영혼에는 어두움이 드리우고 그로말미암아 지성은 눈멀고 영혼은 어두움에 차고, 그래서 ‘다크니스’가 됩니다. 영혼의 어두움이 지성으로 적용되고 그 다음에 감정으로 의지로 적용됩니다. 여기에서 ‘눈 멀음’으로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 감정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의지는 허무한 것에 굴복하게 됩니다. (인터넷 - 총신에서 기독교 학문과 교양이라는 시리즈의 강의 참고)
죄는 육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영혼과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일원론적으로 소통을 하게 되어있어서 인간이 절망하면 육체도 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게 되면 육체에 그 고통의 흔적들이 남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적으로 어디든지 부패성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죄가 있으므로 부패한 성질을 갖고 태어난다“ 96p
제가 여러분들에게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공동체로 창조하시려고 하셨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세계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교리)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의 몸으로 창조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한 사람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이어지는 후손들 모두가 죄를 범하고 타락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5) 죄는 인간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신앙이 거하는 자리와 죄가 거하는 자리는 마음입니다. (마음 지킴이 책 참조) 그래서 신자의 마음은 전쟁터입니다. 은혜와 죄가 서로 점령지를 자치하려고 합니다. 불신앙은 어디에 자리잡습니까? 불신앙은 안믿겠다는 것입니다. 회의, 의심은 믿을려고 하는데 잘 안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앙이 더 나쁜 것입니다. 불신앙은 자신의 의지로 믿지 않기 위해 뜻을 세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중대한 의지적인 힘입니다. 안믿겠다는 강력한 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앙은 마음에 깃들고, 신앙도 마음에 깃들기 때문에 적군과 우군이 심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좁은 땅덩어리 하나를 두고 치열하게 전쟁을 벌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또 다른 이름은 마음지킴이입니다. (마음 지킴이라는 교리를 듣고 인터넷을 뒤져서 ‘죄의 속임을 이기는 길‘이라는 시리즈를 참조)
마음 지킴은 후발적인 것입니다. 마음 지킴보다 먼저 되는 것은 생각지킴입니다. 죄가 들어오게 되면 사람이 바이러스 먹은 것 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뒤엉키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침체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늘 즐겨하는 말이 “몰라요 골치아퍼 생각해본 적이 없어“라는 말을 합니다. (죄의 속임을 이기는 길 시리즈 강추, 은혜와 부패 라는 시리즈 참조 지성을 정복해 가는 방법) 죄는 인간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6) 죄는 외부적 행위만은 아니다.
죄 자체도 총체적인 것입니다.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적의입니다. 적의란 ‘enmity to god’ ‘하나님과 원수 되나니’라고 할 때, 엔노티(enmity) 입니다. 적의라는 것은 적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반감과 대적으로 구분됩니다. ‘어벌젼’(aversion)은 지성과 감정에 관한 것이고, ‘오퍼지션’(opposition)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반감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나보다 뛰어난 특징은 시비거리가 되고, 모든 것이 다 곡해되는 것입니다. 부모님 한테 반감을 느껴보면 아버지의 음성도 듣기 싫어집니다. 대적은 한 판 뜨자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가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은혜가 싫어서 죄가 융성하게 되면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싫은 것입니다. 교회도 싫고 내가 영적으로 죄가 꽉 차게 되면 은혜 받은 사람도 싫어집니다. 왜 싫으냐면 하나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침체에 빠졌을때 어울리는 친구와 은혜 받았을때의 친구가 다릅니다. 침체에 빠졋을때 친구는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사람입니다. 놀라운 것은 끼리끼리 만납니다. 한 사람이 시험에 들면 시험이 놀랍게 시험에 들도록 충분히 준비된 사람들을 찾아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부패하게 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적의이고, 그것은 반감과 대적입니다.
C. 인류 생활에 있어서의 죄
첫 째는 맹렬함입니다. 퍼벌씨입니다. (성화와 기도라는 책) 두 번째는 미친 기운 즉 광기입니다.(Madness) 미친 기운이란 이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미친 기운이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대담함입니다.(볼트네스)
1) 아담의 죄와 후손의 죄
a. 실제설
이것은 영혼의 선제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수지처럼 인간 본성이 함께 있었는데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더러운 먹물이 들어와 저수지 전체를 더럽힌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그 인간 본성이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결론적으로 모든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b. 대표설
개혁 신학의 대표적인 학설로서 이 견해에 의하면 아담은 후손과 이중적 계약의 관계를 갖는데, 언약의 머리로서의 관계와 자연적 출생으로서의 머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적 인생의 머리가 되었고, 언약의 머리로서 인생의 대표이었던 것입니다.
c. 간접 전가설
“이 이론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아담의 죄책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관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담의 부패는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며, 이 부패성은 인간들을 개인적으로 죄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유죄하기 때문에 부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부패하기 때문에 죄 된다는 것이다.” 97p
2) 원죄와 범죄
범죄는 자범죄 또는 실행죄라고 부릅니다. 죄책은 칭의를 통해서 해결하고 오염은 성화로 해결하다가 결국 완전 성화가 안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과 함께 성화를 완성하셔서 영화롭게 하셔서 영원히 당신과 교제를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이 구속 드라마의 완성입니다.
a. 원죄
“아담의 죄책은 우리에게 전가 되었다. 대표자로 범죄했기 때문에 우리가 죄된 인간이다.” 97p
영적 선이라는 것은 인간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만한 선을 행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며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인간이 거듭나고 거듭난 후에도 지속적인 주님의 중보를 통해서 은혜 안에서 살아갈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b. 본죄
“본죄란 말은 외부적 행위의 죄뿐 아니라, 원죄로 인해 일어나는 의식적인 죄된 생각, 욕망, 결심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개인이 그의 고유의 성질과 경향으로부터 구별하여 행동한 죄이다. 원죄는 하나이지만, 본죄는 여럿이다. 본죄는 교만, 질투, 증오, 감각적 육욕, 악한 욕망과 같은 내적 생활의 죄이며, 사기, 도적, 살인, 간음 등과 같은 외적 생활의 죄이기도 하다.“ 98p
D. 은혜 계약 안에 있는 인간
구속 언약은 성부와 성자, 성령 사이에 영원 전부터 맺어진 언약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언약이 맺어지고 그 맺어진 언약이 구체적으로 은혜언약이라는 형태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현됩니다. 다시 설명하면 삼위 하나님이 영원 전에 인간이 타락하실 것을 아시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언약이 삼위 사이에 맺어지고 이 맺어진 언약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체적인 구속의 계획으로 실행이 되는데 이것이 은혜 언약입니다.
1) 성령적 근거
“구속의 계획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그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그에게 맺으신 계약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또 성부로부터 받은 부탁에 대해 거듭 거듭 언급하셨다.“ 104p
2) 구속 계약에 있어서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구속 계약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보증이 되신다. 보증인은 타인의 법적 의무를 자신이 책임지는 인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짊어지셨고, 자기 백성을 위한 법적 요구에 응하셨다.“ 104p
3) 구속 계약의 요구와 약속
a. 요구
"성자 자신은 죄가 없지만 인간의 현재의 나약성을 책임지도록 성부께서 그에게 요구하셨다. 즉 성자는 선택자를 위해 형벌을 받으시고 영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법 아래 처하게 해야 하며, 또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자신의 공적을 자기 백성에게 적용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생활을 유지하게 해야 했다." 105p
b. 약속
이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만 맺어진 언약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고 삼위가 모두 구속 계약의 당사자가 되십니다.
4) 은혜의 계약
은혜 계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나서 은혜 계약이 실행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방법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토대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은혜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행위 언약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만드신 다음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말라는 것이 조건이고 그렇게 되면 영생할 것이라는 것이 결과입니다. 그것이 책임과 의무가 함께 주어지는 것이고 행위를 가지고 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열매를 보고 먹는 상상을 했어도 실제로 따먹지 않았다면 계약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에 많이 달려있다고 해서 행위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은혜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해서 은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1) 계약의 당사자들
a) 목적의 수단으로서의 계약
언약 계명을 잘 이해해야만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은혜 언약이있다라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스도를 중보로 해서 은혜 언약이 맺어집니다. 은헤 언약의 성립 자체가 구원의 축복을 하나님께서 누리게 해주시고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기로 한 은혜, 즉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은 믿음이 됩니다. 은혜언약은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보다 넓습니다. (칠판 설명 -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족보 그림을 참조하면 좋을 듯)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있고, 야곱과 에서도 있고, 이삭과 이스마엘도 있습니다. 이들은 조상인 아브라함의 시작으로 같은 씨에서 퍼져나온 자손들인데, 같은 씨에서 시작하지만 이삭과 이스마엘의 족보가 다르게 흘러 혈통들을 형성하고, 야곱과 에서의 족보 역시 같은 씨에서 나왔지만 그 이후의 다른 혈통을 형성합니다.
하나님이 외적으로 은혜 언약 안에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 언약 안에서 자손들은 많은 유익을 누립니다. 우선 이 안에 계시가 있습니다. 은혜 언약 안에서 이들이 진실하게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또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하면 은혜를 무한히 공급해주시는데, 문제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 책임에서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데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언약의 파기자가 되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혈통적 이스라엘로 보자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는데 이방인이었데 하나님의 은헤 언약의 혈통 속으로 구원을 받고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레아, 그는 햇 사람이었습니다. 히타이트 족속이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입니다. 갈렙은 그나스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혈통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으로 이 사람들이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오고 불신앙으로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 자체가 계속 신앙으로 들어오고 불신앙으로 빠져나가는 커다란 개방적인 구조를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서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겠다는 언약들이 성취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의 닫혀진 공동체를 생각하면 안됩니다.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그는 은혜 언약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죽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 아이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상당히 성인이 되었는데도 믿음을 안받아들이고 죽었다면 구원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자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해야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부모가 믿음이 있다고 해서 그 자녀가 부모의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각자가 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그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2) 은혜 계약의 약속과 요구
a. 은혜 계약의 약속
사실은 계약도 언약도 맞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말에 적절하게 표현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혼란이 생깁니다. 구약에서 제일 먼저 계약을 맺다는 단어가 나오는데 “카라트 베리트”(Karath Beriyth)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베리트”(Beriyth)는 언약입니다. 베리트(Beriyth)는 아마도 아카드어 '비르투'(birtu)에서 왔을 거라고 봅니다. 이것은 족쇄입니다. 다시 말해서 야유회 가서 두 사람 다리를 묶어서 뛰는 것 처럼 비르투(birtu)를 통해서 하나 이상의 사람이 공동운체가명 되는 것, 거기에서 비르투(birtu)라는 말이 왔을 거라도 보는 것입니다.
(칠판 설명) 고대 근동에 있는 “밧셀 트리티”(vassal treaty) 라고 해서 종주권 조약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왕이 있고, 모든 땅을 관리하기 어려워서 땅을 떼어내서 왕이 보기에 괜찮은 사람에게 그 떼어낸 땅의 영주로 삼습니다. 그것을 ‘밧셀’(vassal) 이라고 합니다. (suzerain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주가 되는 것을 봉신이라고 하고. 그 영주를 삼는 것을 종주라고 합니다. 종주가 봉신을 임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문서를 작성해서 언약을 맺습니다. 다시 말하면 왕이 작성해서 영주로 삼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약서를 3장을 작성합니다. 소를 두 동강이를 내서 벌려놓은 후, 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이 서서 신들을 부릅니다. 왜냐하면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미로 행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어길 시에는 신들의 저주가 있을지어다 라며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갑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둘 중 한 사람이 계약을 어기면 짐승이 쪼개진 것 처럼 우리도 심판을 받아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지나가서 계약서의 한 장은 갑과 을이 가져가고, 한 장은 신당에다 보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15세기에 있었던 고대 근동의 언약 체계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셔도 아브라함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났던 신들은 너절하고 신실성이 없던 신들이었습니다. 개 때같이 몰려다니면서 잿밥이나 뜯어먹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무리 하나님이 당신을 믿어보라고 말씀하셔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쪼개진 짐승의 가운데를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이냐하면 하나님이 언약을 안 지키시면 스스로 쪼개져 죽겠다는 의미입니다. 말도 안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언약이 이런 그림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은 항상 죽음에 이르는 약속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음으로 이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나가야 하는데 그리스도가 대신 지나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대신 고난을 받으셔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신 것입니다.
b. 은혜 계약의 약속과 요구
이런 언약으니 성격은 주권적 성격이 있습니다. 권위있게 종주가 불러 봉신을 하라는 것은 주권적인 것입니다. 이런 언약의 형태를 맺음으로서 의무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 측면이 함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 언약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제네바를 비롯한 칼빈과 영국으로 들어가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그래서 자기네들을 스스로 ‘카비넌터’(ovenanter) 언약도, 즉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언약도라고 불렀고 영국에서는 청교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고 그래서 이 언약 관계를 폐기할 수 없다고 하며 수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제 시대 때 55명이 설교를 하고 50명이 순교합니다. 그러나 50명 모두가 순교라고 말하기는 힘들고 순교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2만명이 순교합니다. 언약 사상의 힘이라는 것이 굉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한 없는 은혜와 특권을 누리며 살지만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의무가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하나님과의 맹약이 있습니다. 이것을 배반하면 우리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언약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언약 사상의 힘입니다.
맨디티 크라인이라는 학자는 왕이 영주로 불러서 밧셀(vassal)로 해서 종주권 조약을 맺은 것 처럼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위치가 그러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처음 맡겨주셔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섭정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봉신이 되었으면 충실하게 상황의 뜻을 받들어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도록 창조의 목적을 따라 봉사했어야 하는데 자기가 쥐위에 오르자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의 범죄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파기한 것입니다. 파기한 인간에게 돌아가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렇게 형벌 받아야 될 인간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밖혀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구약의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의 사건인 십자가를 향해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최대의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서건들이 한 없이 달음질 치면서 십자가로 달려오고, 십자가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미래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3) 은혜 계약의 특성
a. 은혜로운 계약이다.
b. 영원한 계약이다.
c. 특수한 계약이다.
d. 단일한 계약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할 때 어떤 행동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라고 할 때 안하면 개패듯 패면 공포에 사로잡혀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중국이나 북한 아이들) 그러면 미친듯이 공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긴 하지만 이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다른 방법으로 설득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감화를 주어서 공부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은혜로 설득하십니다.
계약이 짤라진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계약을 통해서 당신의 성품과 경륜을 보여주시지만, 그 시대 시대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약이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짤라버리면 세대주의가 되어버립니다. 세대주의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 이 때 )에만 해당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통일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e. 유원적 계약이다. 테스트먼트(Testament)가 유원적이라는 뜻입니다.
f. 조건적인 동시에 무조건적인 계약이다.
4)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회원
a. 계약 안에 있는 성인
b. 계약 안에 있는 신자의 자녀들
계약 아래 있지만 그들이 진실로 은혜 언약 안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믿고 그 다음에 그 계약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조건을 이행해야합니다. 그래서 입교라고 하는 것이 부모 때문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c. 계약 안에 있는 비 중생자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도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고,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도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럴 경우엔ㄴ 비중생자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별할 수 없기에 세례도 받고 의무도 행할 것이지만, 그들이 만약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믿음을 갖고 언약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런 모든 외적인 징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약의 파괴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의무라는 것을 여기서는 강조합니다. 교회 나오는데 은혜가 되고, 드리나마나합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안갑니다. 가봐야 소용없기에 교회를 안가기로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언약 관계를 깨트리는 일종의 행동이 됩니다. 자신이 왜 잘못되었나를 생각하고 은혜를 받기위해 개선되기 위해서 노력해야합니다.
5) 계약의 시대적 경륜
a. 계약의 최초 계시
b. 노아와의 언약
무지개 언약이라고 하는데 다시는 홍수로 사람들을 멸하지 않을 것이며 추위와 더위와 추수등등의 축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 ) 지탱하게 하셔서 인간들이 생명을 부지하고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은혜와 구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형벌의 효과를 경감시켜 주는 것입니다.
c. 아브라함과의 언약
할례를 행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8일만에 고추의 표피를 깝니다. 의학적으로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어난지 8일 정도가 바이타민 케이가 가장 최고도로 나와서 할례를 행하는 것이 적합한 때라고 했습니다. 써컴이라고 해서 아이 낳자마자 산부인과에서 써컴을 하시겠냐고 묻습니다. 거기에서 굉장히 많은 이물질이 생겨나고 ( ) 원인이 됩니다. 그것은 교육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쉬하면서 자신의 고추를 보면서 자신의 아덴티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 대한 교육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d. 시내산에서의 계약
시내산에서의 계약의 성격은 복합적입니다. 행위언약적인 요소와 은혜언약적인 요소가 같이 들어가 있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중 각주 속에서 도표 확인)
e. 신약의 새 계약
신약의 새 계약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해서 이루어진 계약입니다. 이 계약을 외형적으로 볼 때는 교회에 이미 출석하고 하나님을 믿은 경건한 가정들의 후손들이 이 언약 속에 들어오지만 그러나 누가 이 언약 속에 들어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될 때 이 언약의 성질은 굉장히 영적이고 신약에서 이야기 하는 영적이고 충만한 복이고 또 혈통과는 상관없이 어떤 계층의 사람들에게나 주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도하고 살아가는 것이 요채가 되는 것입니다.
8 강
조직신학에서 논재들이 나올 때, 본질이 무엇인가와 작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시는가, 교회는 무엇이고 무슨 일을 하는가, 똑같이 그리스도는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시는가,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14과에서는 그리스도의 명칭과 본질을 다루고, 여기서 본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에 양성론, 즉 인성과 신성에 대해서 나오고, 15과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해서 나옵니다. 신분은 낮아지신 신분과 높아지신 신분인 상태에 대해서 나오고, 16과에서는 그리스도의 직무,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나오고, 마지막 17과에서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나오며 기독론이 구성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1부는 그리스도의 인격, 2부는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1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존함과 본질, 신분 상태가 나오고, 2부는 그리스도의 직무, 속죄가 나옵니다.
A. 그리스도의 명칭
1) 예수 (Jesus)
예수라는 이름은 희랍어이지만 히브리어를 음독한 것입니다. ‘야샤“((Yasha) 구원하다 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는 여호수아(Joshua), 호산나(hosanna) 입니다.
2) 그리스도 (Christ)
그리스도는 희랍어입니다. 이 희랍어의 히브리어 형태가 ’메시야‘(Messiah)입니다. 메시야는 ’마사‘(massa)라는 단어에서 왔고, 피동명사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고, 이것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 ’크리스토스‘(kristos)입니다. ’크리오(Xrio)‘는 ’기름붓다‘ 의 수동분사입니다. 크리스토스는 영어로 크라이스트(Christ)가 됩니다.
3) 인자 (Son of Man)
“그리스도에 적용된 이 명칭은 다니엘에 근거한 것으로 가장 통상적인 명칭이며, 다른 사람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인자라는 명칭은 예수님의 인간성의 표시이지만 역사적 기원을 보면 이것은 초인간적 특성을 지적해주며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위엄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지적해 주시는 것이다“ - 117p
이 부분은 ‘구원과 하나님에 계획’에 상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물어볼 때 대답하지 않으셨는가, 거기에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대답하시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신자사상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신자사상은 구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을 강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상 왕권을 받을 자로 여기는 사상입니다. 그것은 당시 로마의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 속에 팽배하던 정치적 메시야와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전파하려고 하시던 하나님 나라는 사라지고, 예수를 임금 삼아 로마를 때려잡자는 사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에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오병이어 기적으로 먹이신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용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속에 있는 것은 지상왕국이었습니다. 그 왕국은 깨어져야 할 왕국이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질문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셨으면, 유대인들은 지상왕국을 거꾸로 세우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 기대가 마지막까지 계속되면서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가 되어서도 ”그 나라를 회복하실...“이라고 묻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메시야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The Son of Man”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중요한 초점은 'The'라는 관사입니다. ‘내가 바로 그 한 사람의 아들이다‘ 이것이 구약으로 넘어가면 초자연적인 메시야로 통합니다. 신자에 호소하지 않고 인자사상 ( ) 정치적 메시야가 아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일러주신 것입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참조)
4)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
“삼위 중 제 2위이시며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이며, 그의 탄생이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 117p
5) 주 (Lord)
‘주’라는 말은 희랍어 퀴리오스(Krios), 이것의 동치어가 구약의 야웨([Yahweh)입니다. 아도나이(Adonai)라는 단어입니다.
B. 그리스도의 본성
1) 두 가지 본질(성품)
a. 신성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므로 이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강조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안다." - 118p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것은 굉장히 신비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셨다” 이것을 신성과 인성을 가졌다고 해서 양성이라고 부릅니다. 양성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관계가 있느냐에 따라서 여러 학설로 나뉩니다. 두 개가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두 개는 구별될 수 없도록 섞여있다는 것도 이단입니다. 인성과 신성 중 하나밖에 없다 역시 이단입니다.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으며, 두 개가 연합되어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것이 신인양성론입니다.
b. 인성
"예수님은 문제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주장하고 있는 예수님의 유일한 신성은 완전한 인간성의 표현이다. 예수의 인성에 관한 증거도 많이 있다. 사람이라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불리셨다." - 118p
인성의 본질적 요소
“예수님은 육체와 영혼을 소유하셨다. 그 뿐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의 성장 과정을 따르셨고, 인간적 욕망과 고통에도 영향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지만 죄는 없으시다.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지을실수도 없으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이 되셔야함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가 우리 대신에 고난 받아 죽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야 했고, 그가 인간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가 또 무한한 가치의 희생을 제공하고 진노로부터 인간을 건지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되셔야 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교리가 하나하나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전부다 하나로 엮여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번 사경회 때, 레카피타라치오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교리를 배우셨는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필연이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인간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이루어진 전체의 몸 속에 ( )으로 오셨어여지만 가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담 - “그리스도인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가장 큰 고통은 무지입니다. 우리는 공부해야 합니다. 무엇을 공부합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과 나를 공부하기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공부라고 하는 것은 대입이나 입사시험에 대한 공부가 아닙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탐구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해서만 공부한다고 칩시다. 그것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가지고 인간이 어디로 가면서 살아야 될지는 모릅니다. 또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개별자 진단에 대한 지식은 인간 보편에 대한 지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했습니다만, 아내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고 한다면 보편적 아내에 대해서 알아야 되고, 개별적 아내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공부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마지막 죽는 순간 까지 공부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입니다.
교리반에서 다 잊어버려도 이 명제가 뼈 속에 배어야합니다. “나는 공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나에 대해”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은 세계 그중에서 아주 조금과 인간 중에서 아주 조금 가르켜주는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인간이 성공과 실패가 갈리고 지위가 결정되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대학이나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을 대입시켜보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나에 대해서 배운 것에 비해 아주 작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학 4년동안 학사 과정까지 공부를 해서 아주 작은 지식 하나를 배웁니다.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인간에 대해서 조금 배웁니다. 머리가 터져라 고민을 하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에 대해서 조금 배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총체적인 지식을 공부하면 물음표의 인생이 느낌표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올바른 판단력들이 생기고 사회 문제에 대해서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 전반적인 성경적 세계관으로 인해 판단력이 생기게 됩니다.
교리를 잘 배우면 질문이 없어집니다. 지금은 많이들 안하지만 옛날에는 상담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을 언제든 만납니다. 그러면 만나는 성도마다 목사가 맘에 안든다던지, 교회의 문제를 말한다던지, 하는 문제들을 저에게 상담합니다. 그러면 저는 가만히 듣고 있으며 속으로 기도합니다. 다 듣고 난 후 “굉장히 힘드시겠네요”라고 말하며 목자와 양 테잎 전체를 주면서 “이것을 다 듣고 난 후에도 상담하길 원하시면 만나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연락이 안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물어보면 답을 찾았다고들 말합니다. 그렇게 찾은 답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단답으로 툭하고 알려주면 바로 옆에만 나가도 답이 뭐였는지 또 몰라서 다시 물어보게 됩니다. 그것은 삶이 불안정하게 됩니다. 자기가 찾아야 합니다.
또 어떤 성도가 “자꾸 마음 속에서 죄된 욕망이 떠오르는데 어떻하죠?“라고 물어보면 죄와 은혜의 지배 22개 테잎을 줍니다. 이것을 듣기를 원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질문은 그냥 뜬금없이 떠오른 질문이지 진짜 삶의 문제가 걸린 질문은 아닙니다.
2) 한 인격 속에 결합된 두 성품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가지셨지만 인간의 인격은 아니다.” - 119p
성품은 두 개인데, 인격은 두 개가 아닙니다. 기독론에서 가장 최고의 신비 둘이 있는데, 속죄의 신비와 양성의 신비입니다. 인간은 인성을 가졌으니까 인격을 갖습니다. 그러다면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셨으니까 인격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으십니다. 그러면 두 인격이어야 합니다.(두 인격이라함은 인간의 인격과 신성의 인격) 그렇게 되면 다중인격이 됩니다. 인격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인격은 신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의 실체를 취하시되 ( )
(그림 설명)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취하십니다. 그런데 신성을 통해서는 인격을 취하십니다. 여기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가지고 있는 자질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아니시지만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은 몇 개입니까, “삼위”라고 할 때, ‘위’는 펄스(Persons)입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은 세 인격을 가지신 한 본질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신성에서 인격을 취하신 것입니다. 양성이 될려면 신성과 인성이 만나야 되는데 인성을 취할 때, 인성을 인격과 함께 취하시면 그 속에서 인격이 두 개가 되게 됩니다. 그래서 인성을 취하실 때, 인성은 취하셨는데 인격이 없이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안 휘포스타시스“라고 합니다. “안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휘포스타시스는 헬 : hupostasis) - 하나님의 본질, 'hupo'는 하부를 뜻하고 ‘stasis'는 ’지지하는 실체‘를 뜻함)
ps : “안 휘포스타시스”의 ‘안’이 영어 un을 말하는 것인지 잘모르겠습니다. 책이나 검색을 해보아도 휘포스타시스에 대해서는 나오는데 ‘안’이 붙은 설명은 찾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인성으로부터는 인격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인격으로는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일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인성을 취할 때, 인격을 취하게 되시면 죄도 있으시는 분이 되고 죄를 지으실수도 있으신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 없이 인성을 취하신 것이고, 이것을 전문 용어로 “안휘포스타시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하늘 보좌에는 예수님이 계신 겁니까 안계신 겁니까? 라는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다면 하늘 보좌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인성은 장소의 제약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셨을 때에는 예루살렘에는 안계신 것입니다. 유다 땅에 계실 때에는 갈릴리를 떠나시는 것입니다. 한 장소에 두 군데 예수님의 인성이 동시에 계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성은 편재합니다.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의 몸에 입고 내려오셨는데도 하늘 보좌에 계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은 안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인성을 가지셨지만 인간 인격은 아니십니다. 중보자의 인격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인간되심으로 인간 인격으로 변한 것이 아니요, 하나의 인간 인격을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에 덫 붙여 인성을 취하셨는데 인성은 독립적 인격으로 발전할 수 없으나 하나님 아들의 인격 속에서는 인격적이 된 인성이다. 이런 인성을 취하신 후 중보자의 인격은 신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신인적인 것이 되었다.” - 119p
“신적의지와 인적의지를 소유하셨듯이 동시에 신적의식과 인적의식을 소유하고 계시다. 이 진리는 인간으로서는 청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 인격의 단일성을 지적해 준다. 말할 수 있는 의식이 인적이든 신적이든 관계없이 말하는 분은 언제나 동일한 인격이시다. 인간의 속성과 행동은 가끔 신적 ( )으로 표현된 인격으로 묘사되고, 신적 속성과 행동도 가끔 인간적 ( ) 인격으로 묘사된다.” - 119p, 120p
의지는 신적의지도 가지고 계시고, 인적의지도 가지고 계십니다. 예를 들자면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시옵소서“ 는 인적 의지입니다.
이 교리에 대한 오류
“알로기파(Alogi)와 에비온파(Ebionits)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 소시니안파(Socinians) 혹은 소피누스주의(Socinianism)와 유니테리안파(Unitarians), 현대주의자들도 이런 부인설을 따른다. 아리우스는 신성을 부당한 것으로 보았으며 반신으로 간주했다.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적 로고스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형 대신해서 취한 것이라고 보았다.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는 한 인격 속에 두 본질의 결합을 부인했으며, 유티크스파는 두 본질이 완전히 섞였다고 본다” - 120p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신은 아니지만 아주 탁월하게 신의 존재로 가까이 간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은 성부 한 분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삼위일체를 부인합니다.
C. 그리스도의 신분
1) 낮아진 신분
낮아진 신분은 성육신, 고난, 죽으심, 장사지내심, 지역에 내려가심을 말합니다. 낮아진 신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 자신이신데 아주 비천하게 취급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적 순서대로 보면,
1)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은 인성을 취하심으로 육신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한 사람이 되셨다.” - 124p
그래서 제세례파의 주장 같이 하늘에서 인간성을 부여하셨다면 그는 참 사람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고, 반대로 땅에서 사람의 몸만 받으시고 하늘로부터 신의 성품을 부여받지 못하셨다면 죄된 인간이 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로 부터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 땅으로부터는 인간의 성품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동정녀 탄생을 가르쳐준다. 이 이상한 출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신 것) 시초부터 죄의 오염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보호해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다. 만약에 남자로 말미암아 인성이 생겼다면 죄를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
좁은 의미에서는 십자가 고난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부터 성육신 이후에 생활하신 그의 지상 생애 전체의 생활이 고난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만주의 주가 종 되신 생활이었으며, 저주 받은 세상에서 무지한 자의 생활이었다. 사단의 공격, 백성의 배반, 대적의 괴로움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셨다. 영혼의 고난은 육체의 고난보다 격렬한 것이다. 악마의 유혹, 불의한 세상의 억압, 죄짐에 의해 눌림을 받으셨으므로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질고를 아는 분이셨다. ” - 124p
3) 그리스도의 죽으심
“육체적 죽음을 사람들은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불의한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법적 판결에 의하여 죄인으로 간주되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 위해 저주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이다.”
- 125p
4) 그리스도의 장사지냄
“그리스도의 죽음이 고난의 최후 단계이었던 것처럼 생각되었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능동적 고난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장사지내심은 하나님의 아들된 자로서 인식했던 바 낮아지심의 한 형태이다. 인생이 흙으로 돌아감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다음 성구에 나타난 바와 같이 구원자가 무덤에 머무심은 낮아진 신분이었다“ - 125p
죽으신 다음에 장사지낸 바 되시는데, 그것은 사실 신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5) 지옥에 내려가심
우리 사도신경에는 “음도에 내려가시고”가 빠져있는데, 근데 여러말로 해석이 됩니다. 이것은 크게 3가지 설로 나뉘어집니다. 첫 째 가톨릭은 이것을 그리스도가 구약 성도를 해방하기 위해서 선조 림보(limbus patrrum)로 내려가셨다고 말합니다. 림보는 구약 성도들이 임시적으로 갖혀있는 곳인데, 스올, 즉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음부로 내려가셨다고 봅니다.
루터파에서는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을 승리의 선언이라고 봅니다. 지옥에 내려가신 것을 그리스도께서 부활 기간에 흑암에 권세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며 기념하기 위해 음부로 내려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개혁파의 견해는 동산에서와 십자가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고, 사망 상태에서 있어서 낮아진 상태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계심, 다시 오심을 연결하면 예수님의 오심에서 재림까지 연결이 됩니다.
2) 높아지신 신분
1)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단순한 재결합이 아니다. 자기 안의 인간성 육체와 영혼의 본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이름으로 되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전의 부활한 자들과는 달리,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고, 먼저 낮은자라 불리어질 수 있게 되었다.” - 126p
단순하게 살아난 것이 아니라, 아주 영광스러우신 몸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전에 부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실 때 무덤이 터지면서 죽은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자들은 다시 죽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완전한 부활체, 즉 우리가 마지막 날에 영화 상태에 도달하게 될 그런 정도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은 아니었고,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로 보여주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이 갖는 3가지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은 율법의 요구에 응하셨다는 선포였다. 부활은 성도의 칭의와 중생 최종부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126p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서 우리가 그렇게 부활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와 중생과 부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126p
정리하면 첫 째 율법의 요구에 응함, 성도의 최종 부활의 상징, 칭의와 중생 부활의 원인이 됩니다.
2) 승천
“승천은 부활의 필연적 완성이었지만 승천도 독자적으로 높아진 신분이다.” - 127p
“이것은 인성의 현저한 영화를 내포하는 것이다. 루터파는 승천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는데 승천을 조건의 변화라고 보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성이 어떤 신적 속성의 완전한 기쁨 속에 들어가시어 영구히 편재하시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 127p
루터파에서는 인성도 편재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개혁파 견해는 다릅니다. 인성도 편재한다고 보면 성찬론과 연결이 되어서 공재설을 주장하게 됩니다. (공재설 모든 성찬에 주님이 계신다고 보는 견해)
“우리의 대재상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승천하심으로 희생을 성부께 나타나시기 위해 중보자의 역할을 하신다. 그는 거할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 승천하셨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하늘 처소에 거하게 되었고, 승천하심으로 우리도 하늘 처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 127p
3) 우편에 계심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말은 문자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권능과 영광의 처소를 말하는 상징적 지식이다. 그리스도는 우편에 계시는 동안 교회를 다스리고 보호하시고 우리를 통치하고 그의 완전한 희생에 근거하여 백성을 위해 중보하신다.” - 127p
4) 재림
“그리스도는 심판하러 오실 때에 높아지심은 최절정에 달한다. 재림은 육체적이고 유형적이 될 것이다. 재림의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심판하러 오실 목적과 심판하시고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여 오실 것이다. 재림은 구속사역의 완전한 승리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 128p
D. 그리스도의 직무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 이렇게 세 직분이 있습니다. 이 세 직분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고, 말씀을 해석해주는 사람이었고, 제사장은 범죄하고 불결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돕는 사람이었고, 왕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분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할 권세를 가지고 실제로 통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었다가 신약 시대에 와서 만나게 됩니다.
(그림 설명)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됩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 여자를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 타락하게 됩니다. 이후에 하나님은 개인, 가정, 국가라는 기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정 통치를 실현하십니다. 그리고 선지자, 제사장, 왕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수직적인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전통보다는 계시의 편에 서 있습니다. 제사장은 거꾸로 수평적이면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계시보다는 전통의 편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왕은 하나님께로부터 바은 뜻을 백성들에게 펼치는 통치를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직분들이 (속발?)처럼 구성되면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위에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지자, 제사장, 왕의 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신정 통치 안에서 이어져오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들을 그대로 구현하십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가르치시고, 제사장으로서 속죄하시고, 왕으로서 통치하십니다. 이 통치가 결국 영적 통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인격안에서 통합된 것들이 수 많은 교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1) 선지자직
“구약은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로 오실 것을 예약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말씀하셨고, 아버지로부터 메시지를 가져오셨다고 말씀하셨다...그의 일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그의 중요한 일중의 하나는 백성들을 위해 율법을 도덕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해석하는 것이었다.” - 132p
선지자라고 하면 예언자라고 부르는데, 그런데 예언하는 기능은 선지자의 주된 임무가 아닙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선지자에서 중요한 직무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세가 살아있더라면 어떻게 살라고 했을까 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모세의 율법을 그 시대에 해석해서 오경의 정신을 따라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은 예수님이 이 상황에 계셨다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라고 생각하는데, 구약에서도 똑같이 모세가 살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삶의 문제, 생명 윤리 문제, 컴퓨터와 중독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을 다룰 때,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셨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 ) 예수님 시대에 가르치신 것을 종합해보면서 지금 우리의 상황에 대입해보면 가장 올바른 해석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 견주어 해야만 했습니다.
지상에 계신 동안 선지자직을 계속하셨고, 승천하신 후에도 이 사명은 계속되는데, 성도와 목회자를 통해 성령의 역사로 그 사명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을 보면서 선지자가 외치는 가르침을 받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주실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2) 제사장직
“구약은 오실 제사장이시라는 것을 예언하고 예시했다. 신약에서는 그를 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히브리서이다. 거기에는 여러 번 반복적으로 이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 133p
(그림 설명)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창조하실 세계가 (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이 동산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충분히 갖추어 놓으셔서 인간이 노동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족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은 이러한 곳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정복은 여성성을 상징하고, 다스리는 것은 남성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했는데, 이 완전이라는 말 속에서는 현실적으로 완전한 것과 더불어 가능성으로 완전한 것 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가능성에 대한 여성의 화정에 대한 예회 안적음)
인간의 노동으로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완전성을 가능태적으로 부여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이 아무리 노동을 하더라도 전혀 소용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아름답게 만들면 인간의 노동이 영광을 받는게 아니라, 아름다워질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창조 속에 넣어주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퍼져나가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구현해 내는 것을 문화명령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문화명령이 수행되기 위해서는, 삼위 하나님이 또 다른 명령을 주시는데 그것을 제의적 관계라고 합니다. 종교 명령 혹은 제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문화명령이고 두 번째는 제의적 명령입니다.
(여기에서 - 여기라는 것이 문화적인지 제의적인지 아니면 둘다인지 불명확함) 하나님에 대한특별한 지식과 사랑이 혹은 은혜가 임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주셔서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서 주님에 대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을 가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의 대상이 하나님과 세계, 인간과 나의 모든 지식은 결국 한 하나님을 위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제의적 관계에 대해서 오는 지식과 사랑을 세계 속에서 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타락한 다음에는 오염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원형?)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사람들이 경건에 대해서 TV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뉴스, 과학, 가끔가다가 가족간의 일치를 위해 드라마도 봅니다. 거기에 푹 빠져서 보지 않고 한 두편 정도만 보아도 우리는 그 문화 속에서 무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이해합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문화적인 접촉점을 활용해서 죄에 대한 요소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제의적 관계 속에서 펼칠 때 우리에게 무엇을 고치고 바로 잡으라고 하시는가를 이해해야합니다. 아이들에게 문화를 단절시켜버린다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를 올바로 해석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나쁜 경험을 하거나 이야기하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차근차근 설명해주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으니까 오늘도 사람들을 당신을 통해 예수님께 ( ) 제사장 직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 받은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시면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상징이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 펄쳐 나가게 됩니다. 세상의 문화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세상 문화는 죄악 덩어리이기 때문에 접촉하면 부패해진다고 생각하면서 현대의 문화를 냉소적이거나 반감을 품고 원수대하듯이 대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인을 깊이 이해하려고 하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이해하면서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믿을려면 믿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 복음을 전해서는 안됩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권을 가졌으며,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특권을 가졌다.” - 134p
a.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역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보다 사죄를 위한 희생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구약으 희생은 다가올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예시해 주는 형태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유월절 양이라 불리워진다.“ - 134p
b. 그리스도의 중재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죄를 위한 큰 희생을 드릴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하시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함축적으로 우리의 보례사라고 불리워졌다.” - 134p (기독교 교리 요약 참조)
보혜사는 기독교에서 만든 단어입니다. ‘보’는 중재자라는 뜻이고, ‘보’는 에드버킷(advocate), ‘혜’는 헬퍼(helper)입니다. ‘사’는 카운슬러(counselor), 혹은 티처(teacher)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대표적인 중재자, 헬퍼, 카운슬러, 성령이 가지고 있는 이 세 가지 기능을 하나로 묶어서 보혜사라는 말을 만든 것입니다. 보혜사 즉, Parakletos인데, "para"는 ‘곁에서’, "kletos"는 칼레오 ‘부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간청하는 자’ 라는 의도를 갖고있습니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은 그의 희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가끔 잘못 생각되는 것 처럼 중보적 기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희생을 드림으로 자기 백성을 위한 신령한 축복을 요구하며, 사탄과 율법과 양심의 고소로부터 이런 신령한 축복을 보호하며, 이들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용서해 줄 것을 확증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들의 예배와 봉사를 하나님께 바친다.” - 135p
하나님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려오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내려오고, 인간이 하나님께 올리는 모든 기도와 선한일 같은 것들은 아무리 선해도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모든 관계 속에서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유일한 통로가 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론의 압도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에베소서를 읽으면 그리스도가 얼마나 탁월하시고 왜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의문들이 풀리게 됩니다. 설교가 그런 기독론적인 구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존 오웬(John Owen)의 죄 전집 1권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묵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기독론 안에서 창조론까지 말합니다.
3) 왕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함께 참여하신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중재인으로서 그리스도가 부여 받으신 왕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왕권은 교회를 향한 영적 왕권과 우주를 향한 왕권의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 135p
a. 영적 왕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자기 백성을 향한 그의 통치인 것이다. 그것은 영적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의 왕권이 영적 영역에 속한 것이며,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며, 죄인을 구원하려는 영적 목적을 가지며, 영적 수단인 말씀과 성령에 의해 실시되기 때문이다.” - 135p
b. 우주적 왕권
이것은 레카피타라치오의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모두 통합하여 머리가 되신 후에 그 모든 것들을 통치하시는 그 나라가 완성 될 때,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 되시는 그리스도의 원래의 왕권과는 그 미치는 영역이 동일하지만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왕권은 그의 교회를 위하여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 맡겨진 우주를 다스리는 권한인 것이다...이 왕권은 하나님나라의 대적들을 물리칠 때까자 지속될 것이며, 그 목적이 성취되면 우주적 왕권은 성부에게로 반환될 것이다.” - 136p
예수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고, 성부께 반환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형식이고 그리스도의 분신은 영원히 또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교리 공부의 필요성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사실 오늘 날 우리들이 가고 있는 신앙의 길, 아니 신앙의 길이라기 보다는 열린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방식의 신앙 교육들, (즉 체계적인 교리공부나 신학에 대한 강의, 또는 오늘 날 시대 사상에 대한 강의같은) 이것이 현대적입니까? 이러한 방식의 신앙 교육들은 사실 오늘 날 현대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방식은 아닙니다. 지난 번에 우리가 (강릉) 기도원에서 “진리의 전달자”에 대해서 강론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이해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 설교로 보충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설교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강의나 책을 통해서 현대 사상의 주류들을 이해해야지만 우리들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 주위에 어떤 목사님은 굉장히 진실하신데, 교회는 세속적인 교회가 있다는 말씀을 드린 적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목사는 진실한데 교회가 세속적일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영혼에 대해서 너무 애타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역의 사람들이 구원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런 마음은 순수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제일 많이 교회에 데려오는 사람에게 쏘나타 승용차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세속화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왜 일어나는가하면 시대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교리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목사나 전도 담당하는 평신도 지도자는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금식하는 중에 아이디어를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를 접하는 사람들은 목사나 전도를 담당하는 사람이 엎드려 기도하는 것까지는 모릅니다. 다만 많이 전도하면 쏘나타를 준다는 것, 그 방법만을 보며 교회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처음에 그렇게 구원해내는 열정의 의도는 안전해지고, 방법만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법만 전해지면 사람들에게 그릇된 인상을 심어주게 됩니다. 교회가 그런 것들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지는 이유는 성경의 교리에 대한 이해의 부족, 신앙의 체계적인 훈련의 부족, 현대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상에 대한 이해의 부족들이 이런 현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올바로 교리나 사상을 배워 나가는 것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지금 현대 이후 시대는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굉장히 경건한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주 세속적으로 살수 있는 가능성들을 우리들은 갖고 있습니다.
현대 사상의 특징은 뿌리 자체를 싫어합니다. “매타담론”이라고 하는데, 뿌리가 되는 담론, “인간이란 누구인가” “사람은 무엇를 위해서 사는가” 이런 것들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하다보면 항상 궁극적인 가치의 기준, 존재의 근거를 말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은 인간의 이 세상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저 건너편 신적인 세계로 환원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어놓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플라톤의 작품을 보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서 논쟁을 합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살아야 돼”라는 명제로 시작해서 “그러면 올바른 것은 무엇이냐, 참된 선은 무엇이냐,”라며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논쟁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나도 잘 모르는데, 일설에 의하면 죽은 뒤에 저 세상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 세상에서 속이고 욕망을 따라서 살면 죽은 뒤에 고생한다더라” 그러면서 그것을 밑에서는 논리로 이성으로 치열하게 논쟁을 하다가, 갑자기 초월로 도약해서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립니다. 이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끝까지 올라가다보면 마지막에 결국에는 하나님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 사회의 문제는 문제에 문제를 더할 뿐이지, 답은 없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봅시다. 오늘 날 마케팅 교회도 지나가고, 이머징 처치가 떠오르고, 또 신비주의도 오고, 수 없이 변화되어 가지만 어떤 것도 건전한 지식에 기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총체적으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나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통해서 우리가 왜 믿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 자체가 지겨운 것입니다. 자기 나라 역사도 안배우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은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성경 공부한다고 그러는데, 사실 성경도 성경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위로받고, 오늘 내가 사는데 좀 편하려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점점 더 감각적인 시대가 되어갈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 3만불 정도 넘어가면, 완전히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해 질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종교에 대한 변형된 갈망들이 일어나는데, 즉 건강, 요가등 심신의 편안을 찾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요즘 시대에는 ‘심리’라는 간판만 달면 백년 이상을 먹고 살수 있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은 심신의 편안을 갈망합니다. 이것은 매우 허망한 일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다음 세대들은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교육을 시키면 따라오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들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잘 따라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미국에서 요새 아주 재미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부인했던 사람들이 아주 가볍게 교회를 다니면서, 당신은 상처 받은 사람, 심리학적인 치유, 신비운동, 다 참여해봅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 없이, 단순히 그럴듯해 보이는 방법들로 대체하다보니 그런 현상 속에서 인간은 더 나아지지 않고 한 없이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요새 미국에서는 개혁주의의 부흥이 부분적이지만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패션” 세미나에는 4-5천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장중한 설교를 듣는 상황도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날 말도 안되는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보여주냐하면, 다음 세대에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매마른 시대에 살면서 인간들이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미친듯이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1년 이상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가 힘든 교리공부를 통해서 사람들이 어렵게 배워가며 확신을 갖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나 자신이 그런 사람입니다. 어렵게 교리를 공부하고 신학적으로 이해를 해서, 넓게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나 개인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는 이 힘든 탐구에 과정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방황하는 시대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날 사람들이 수 없이 가벼움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거기서 만족을 못느낀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고 교회로 몰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는 그런 갈망들이 더욱 강해질거라고 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교리반을 6학년때쯤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더 내려가서 유아부, 유치부용까지 “어린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쓰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의심이 없이 순수할 때, 하나님과 세계와 우주와 모든 것에 대해서 통합된 교육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예화
어떤 공산주의적 무신론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 반대편의 딸 아이가 무엇을 떨어트렸습니다. 그것을 주으려고 딸 아이가 허리를 굽히는 순간 옆 모습을 딸 아이의 귀를 보게 되었는데, 그 귀가 너무나 이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공산주의적 무신론자는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귀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도대체 저 아름다움의 근원이 뭘까” 생각을 하면서 창조주가 계시지 않다면, 우리 딸 귀는 저렇게 이쁠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풀잎 하나하나도 놀라운 질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세계 속에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온 천하 만물이 그림 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 )” 아이들이 거듭난 후, 신학과 연관 시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 ( )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우주와 하나님과 모든 지식들을 총체적으로 연결할 때, 학교 가서 공부할 때 눈이 번쩍 뜨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수학 속에, 역사 속에, 국어 속에 있구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배우는 교리반은 초등학교 6학년 정도의 수준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 수준 더 올라가 공부해야 합니다. 창조부터 종말론까지 총체적으로 꾸준히 근원적으로 배워가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를 모두 공부하며, 하나님의 제의적 사명이 이 문화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어가는가를 깊이 고민하면서 어떠한 이유에서도 이 세상을 버리면 안되고 고쳐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9 강
인간이 태어난 목적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알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인간에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내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 하나하나를 전부 연결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움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필요합니다. 제가 예전에 신학을 배우다가 천문학을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자연적인 사실들에 대한 의미는 전공한 사람들이 많이 알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을 때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 의미를 알려주었을 때, 그 때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적인 지식, 즉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이나 자연을 통해 탐구하는 학문에 대해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참답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지식들을 참 하나님을 아는 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이 세계에 있는 학문 자체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세계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자연이나 사회 속에서 발견된 학문들을 신앙과 잘 연결된 책을 읽으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A. 성화와 성도의 견인
1. 성화의 본질과 특성
앞에서부터 우리가 구원을 되돌아보면, 제일 먼저 성경의 일반적 적용이 나오고 부르심과 중생, 회심과 믿음, 칭의와 성화와 성도의 견인이 나옵니다.
“성화란 죄인을 순결케 하시며 죄인이 전 성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며 죄인으로 하여금 선행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 성령의 계속적이고 은혜로운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178p
칭의는 바깥에서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욕을 먹어도 법적으로 무죄를 선언하면 누구도 그 사람을 벌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칭의입니다. 그런데 성화는 내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화는 인간의 내부생활에서 일어난다는 점으로 볼 때 칭의가 아니다. 성화는 법적행위가 아니라 재창조의 행위이며 장기적 과정이며 현세생활에서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 178p
칭의는 덜 칭의되고 더 칭의되는 것이 없지만, 성화는 더 성화된 사람이 있고, 덜 성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의롭다 칭함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으로 인도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거룩해 가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성화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그의 뜻대로 정해주신 시간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서 성화에 있어 하나님과 상호협력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178p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같고 계시지만 성화는 신인 협력적인 사역입니다.
“성화란 중생에서 이미 주어진 것들로부터 저절로 단순히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새생활에 힘을 돋으며 증신시키며 견고케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인간성의 오염과 타락의 점진적 제거이며,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는 새생활의 점진적 발전이다.” 179p
소극적으로는 죄책과 오염이 있는데, 죄책은 칭의에 의해서 해결되고, 오염, 곧 부패성의 문제는 성화에 의해서 해결이 됩니다. 한편으로는 죄를 멀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려고 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성화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자연히 전생애에 영향을 준다. 내적인간의 변화는 외적생활의 있어서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 상호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악과 유혹에 대한 경고, 거룩한 삶에 대한 권고로부터 오는 것이다.” 179p
2. 현세에 있어서의 성화의 불완전성
“성화가 영향을 주지만 영적 성장은 현세에서 불안전한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자는 죄와 더불어 투쟁해야만 한다. 신자의 생활은 육과 영사이에 함구적인 투쟁의 생활인데, 가장 잘 믿는 자라도 죄를 고백해야하며, 용서를 위해 기도하며 완전하게 디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179p
누구도 성화를 생각하면 교만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성화되었으니 더 성화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성화되어야 합니다. 누구도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 다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 가운데 있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인도를 받으면 자기의 결점과 단점이 잘 보이지만, 그렇지 않고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면 자기 허물을 계속 덮어주고 자기를 두둔하게 됩니다. 이것을 청교도들은 “Self Flattering” 자기아첨이라고 했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동네에서 테니스를 치러갔습니다. 그런데 잘 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과 테니스를 치게 되었는데, 그는 “전광석화와 같은 스매싱에 날카로운 서브, 세계적인 선수와 비할 때 손색이 없는 선수”였는데 ‘자신이 간신히 이겼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타인을 한없이 치켜세우면서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누구도 성화에서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완전하게 도달할 수 없게 하신 이유는 가장 뛰어난 신자라도 당신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 스스로 완전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진리는 소히 완전주의자들에 의해서 부인되는데, 웨슬리주의자들은 인간이 현세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완전하게 된다고 말하며, 죄를 짓지 않는다고 언급한 사실에 근거해서 말한다.” 180p
완전주의자들의 견해는 성경과 거리가 멉니다. “우리 영원히 사랑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를 말합니다. “우리 모두 북두칠성을 향해 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공중에 붕 떠서 우주로 날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거듭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죄를 짓길 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죄를 지을 때 조차도 마음 한 구석에는 안짓고자 하는 성형이 있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를 공부하면서 비중생자가 죄를 짓는 것은 단일의지로 죄를 짓는 것이고, 중생자가 죄를 짓는 것은 복합의지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롬 7장]에서 바울 사도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내게 있으나 악을 행한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갈라놓아서 악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닌 것처럼, 또는 선도 그렇게 갈라놓아서 나 자신이 선하게 투쟁한 희생양인 것처럼 생각한 것이 마니교의 사상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 완전은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노아가 당대에 의인이며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뒤에 타락하게 됩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요한 사신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해준다”
진리는 빛과 같은 것입니다. 개판을 하고 다녀도 거울 없으면 자신이 개판인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누가 가르쳐주어야 자신이 개판인 줄 압니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빛이 어둠을 비추는 거울이 없기 때문입니다.
3. 성화와 선행
“성화는 자연히 우리를 선행의 생활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선행의 생활은 성화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선행은 완전한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원리와 신앙의 원리에서 솟아나오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뜻을 의식적으로 순종하므로서 행해지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궁극적으로 목적삼는 행위입니다.” 180p
우리들이 선행이라고 할 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깨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 위함이라” “성경은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나니” 성경의 목적은 두 개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온전히 선행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직무와 교회로의 사명도 이 두가지를 위해서 존재해야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만으로 만족을 얻게하는 목회사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일반은총적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모든 선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좁은 의미에서 본다면, 그런 일반적인 양심의 빛으로 행하는 인도주의적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선입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 1, 2부”, 전집 8권 참된 “미덕의 본질“, 존 파이퍼 ”하나님의 열심”을 읽을 것.
"이런 의미의 선행은 성령에 의해 중생한 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비중생자도 일반은총에 따라 외적으로 율법에 맞는 행위를 할 수 있으며, 훌륭한 목적에 이바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안전 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영적 뿌리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진정한 내적 순종을 나타내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과는 반대로 신자의 선행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를 참으로 주시기는 약속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장해야 하며, (율법폐기론자들은 그런 선행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 율법폐기론자들에 대해서는 선행을 주장해야 한다.“
시험 문제 - 이 말이 비중생자는 어떤 의미에서도 선행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x
인간이 중생했다 하더라도 바탕자체는 여전히 부패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어떤 선행을 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도권을 잡고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선행을 행해도 자랑할 것이 없고, 하나님이 은혜로 나로 하여금 선행을 하게 하였기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행을 행하고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악을 행했을 때는 순전히 자기의 힘으로 행합니다. 인간은 악을 행하는데에서는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악을 행한 후에 인간은 그 책임을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습니다.
찬양 - “찬양하라 내 영혼아”
이 세상에는 샘솟듯 솟아나는 기쁨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손잡고 동행하면서 사는 것이 신자에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5. 성도의 견인
“성도의 견인이란, 자연히 신자들이 구원의 길에서 인내하는 계속적인 활동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견인의 은혜란, 심중에 일어난 심적은혜가 계속되고 완성되도록 역사하는가, 신자 내부에서의 성령의 계속적인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이 교리에 대해서 가르쳐준다. 우리가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견인의 은혜를 믿을 때 뿐이다. 이 교리는 개혁주의 노선 외에서는 찬성을 못받는다. 이 교리는 배교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과 신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계속 유지하도록 권고하는 말씀과 심지어는 배교의 경우를 기록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한다. 그러한 권고와 경고는 타락할 가능성을 가정하는 것 같으며, 배교의 신뢰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증명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그 경고와 권고는 다만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역사하시며 인간에게 견인 은혜의 사역의 협력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배교자 참신자들이었다는 증거가 없다.” 181p
견고하게 인내한다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견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붙들고 인내하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견인에서 비롯되는 견인입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전인편에 들어가보면, 누가티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논쟁에 관한 대화가 나옵니다.견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이 신앙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데, 신앙이 좋을 때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고, 안좋으면 떨어지는 붙었다 떨어지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때 주님이 붙었다 떨어졌다 할 때, 하필이면 잠깐 떨어져있을 때 그 때 와버리신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지껏 붙었던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떨어져서 놀다가 다시 붙었다가 하는 도중 다행이도 붙었을 때 주님이 오셨다, 이런식의 붙었다가 떨어졌다는 논리는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 번 구원하기시로 끝까지 구원하신다고 봐야하는데, 그 사람이 끝까지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한다면 주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님을 믿기로 한사람들이 잘 믿을 것인데, 그 원인은 주님이 그들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잘 믿는다고 해석을 해야 옳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잘 믿는 사람도 주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이,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주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신앙이 깊어지고 능력이 많아질 수록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이고 섭리입니다. 주님만 의지하고자하는 마음 때문에 어린 아이같이 눈물이 흐릅니다. 한 순간도, 주님이 절대 그러실리 없지만 ”주님 제발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주님 저를 붙든 손을 놓지 말아주시옵소서, 주님 이외에는 날 도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우리는 비록 약하고 시시때때로 고난을 당하고 때로는 정욕에 시달리는 인생을 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꼬 붙들고자 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심으로 우리로 당신을 붙들게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이 나의 약함도 붙들어 주셔서 강하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의 전체적인 구조는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주권을 가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도록, 그렇게 계획되어 있는 것입니다.
B. 교회론
1. 교회에 대한 일반적 고찰
“교회에 관해 구약에서 사용된 용어는 ‘부르다’라는 뜻에서 파송된 것이며, 신약 용어는 ‘불러내다’ 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모두가 교회를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회중으로 표현한다. 이 용어는 예배를 목적하고 모였든 아니든 간에 지교회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가정적 교회를 의미한다. 포괄적인 의미로 이 말은 하늘에서나 지상에서나 불문하고 믿는 자의 모든 무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188p
1) 신약용어의 다양한 의미
장로교회에서는 노예제도를 택하는데, 사실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교회는 노예와 비슷한 것입니다. 처음에 갈라디아교회는 지금처럼 갈라디아 지방에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예배당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지역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 전체를 가르켜서 갈라디아 교회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모였겠습니까, 기본 단위가 가정입니다. 그 사람들이 날을 정해서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모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역에 있는 교회들 전체가 하나의 성경적인 기본 단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들을 우리들이 본 받아야 합니다.
2) 교회의 본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는 본질에 관한 견해에 차이가 있다. 구교는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과 같은 고위 성직자와 함께 사제들로 구성되고 있는 외부적이고 유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본질을 찾는다. 신교는 이런 외적 관념을 깨고, 성도들의 무형적이고 영적 교통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는다.” 189p
“교회는 그 본질적 성질에서 볼 때, 모든 시대의 성도들 이외는 아무도 포함하지 않는다.”
3) 교회의 구별
a. 투쟁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투쟁적 교회는 지상에 현존하는 교회, 승리적 교회는 천상 교회입니다.
b.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이 구별은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적용되는 것인데, 영적 성질에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무형적이다. 그렇지만 신앙 고백, 행위, 말씀, 성례, 사역, 교회의 외적조직, 정치면에서는 유형적이다.“ 189p
영적 교통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무형적이지만, 교회의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어떤 방식을 취하는지에 따라서 장로교제도, 감독제도, 회중제도로 나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교회입니다.
c.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이 구별은 유형적 교회들만 적용된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와 세상에 대한 공동적인 단행에서 유형적이며, 또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직무와 형체의 면에서 유형적이다.” 190p
교회가 똑같은 유형교회인데,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상관없이 죄악된 세상과 더불어서 투쟁합니다. 또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유기체를 이루지만, 직무와 형체의 면에서는 조직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례는 목사가 하고, 교회를 치리하는 것은 장로와 목사가 하고, 가르치는 것은 교사가 하는 식으로 조직으로서 구별되어있습니다. 교회의 다양한 국면들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4) 교회의 정의
“무형적 교회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아 선택된 자들의 영적무리라고 할 수 있으며, 또는 단순히 성도들의 영적 회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교회의 속성과 표지
1) 교회의 속성
a. 교회의 통일성
“로마 가톨락의 주장에 따르면 전 세계에 퍼져있는 교회를 가르키는데, 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b. 교회의 거룩성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거룩성을 교리, 교훈, 예배, 권징에서 찾으려는 거셍 반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완전한 성결로 이끄는 새생활을 영위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은혜로 인해서 거룩한 교회의 회원들 가운데 둔다.”
c. 교회의 보편성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데, 이유는 구교가 점진상에 퍼져있으며, 모든 종파들의 총수보다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교는 무형적 교회를 진정한 보편적 교회로 보는데, 이유는 교회가 모든 시대와 신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191p
2) 교회의 표지 혹은 외적 특성
“교회의 속성이 원래 무형 교회에 속하는데 반해, 교회의 표지는 무형교회에 속하며, 참 교회를 구별해 내는데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191p
a. 말씀의 참된 전파
이것은 종교 개혁자들 속에서 의견들이 많이 갈리게 됩니다. 1 표지설부터 3 표지설까지 다양합니다. 1 표지설은 말씀의 참된 선포가 있으면 교회라고 보고, 2 표지설은 말씀과 성례, 3 표지설은 말씀, 성례, 권징이 교회의 참된 특성이라고 봅니다. 개혁파권안에서는 다양한데, 루터파같은 경우는 두 개만 인정하고 마지막 세 번째는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개혁파에서는 3가지로 보는데, 참된 말씀의 전파가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이 말은 말씀 전파가 안전하고 절대 순수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근본에 있어서 참되어야 하며, 믿음과 행위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만큼 전해야만 참된 ( ) 완벽하게 참될 수 는 없지만, 선포된 말씀을 다 들었을 때 기독교 신앙의 기본진리에 대해서 알 수 있게끔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성령 안에서 모두는 아닐지라도 반드시 믿을 사람들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b. 성례의 정당한 집행
"로마 가톨릭처럼 성례가 말씀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합법적 성직자들에 의해서 성도와 자손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한다." 191p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례와 성찬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거나 성찬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c. 권징의 신실한 시행
이것은 잘못된 교리를 믿고 가르치거나 혹은 올바른 도덕생활을 영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징계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로마 가톨릭이 권력이 있으니까 잡아서 가두기도 하고 너무 심하면 죽여버리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은 교회 권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과 달리 성례의 순수성을 보호하는데에 목적으로 합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거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리는 현장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므로 교회의 거룩성을 보호하게 하는 것입니다.
C. 교회의 정치와 권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모든 권위의 근원이 되신다. 교회를 다스리시되 강제로 하지 않으시고, 말씀과 성령에 의해 다스리신다.” 196p
1) 교회의 직원
예배에 있어서 본질적인 두 요소가 진리와 성령입니다. 목양 역시 진리와 성령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지혜는 말씀으로 사랑은 성령으로 창조하셨습니다.
a. 사도
"교회의 직원은 두 종류로 나타나있다. 가장 중요한 직원은 사도직이다. 예수님에게 직접 택함을 받은 제자 바울에게만 적용되지만 이 충언은 사도의 인물에게도 적용된다. 사도는 특별 자격을 가진자.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부름을 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보았으며, 영감을 의식했고, 기적을 행했으며, 사역을 행하는데 있어서 충만한 축복을 받았다.” 197p
b. 전도자
“전도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사도들의 일을 돕는 자들이었다“
오늘날의 전도자하고는 틀립니다. 예수님 당시에 전도자로서 72명의 전도대처럼 그것도 당대로 끝납니다. 오늘날의 이러한 특수 직원은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 새워진 사람들입니다.
c. 보통 직원
“사도행전은 장로에 대해서 언급한다. 감독이라는 칭호가 사용되는데 동일한 직원이다. 장로란 나이를 강조한 것이고 감독이란 감시자로서의 직무를 강조한 것이다. 장로는 본래 교사가 아니지만 가르치는 직무가 그들의 직책과 관련되어있다.”
2) 교회의 회의
“개혁교회는 많은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사도의 관계는 순서에 의해 구분된다. 여러 회의는 당회, 노회, 총회를 말하는 것이다. 당회는 지교의 목사와 장로로 구분되고, 노회는 일정한 지원내에 각 지역교회 목사일인과 장로 일인으로 구성된다.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된 같은 수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197p
“정치”라고 불리는 것은 폴리티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은 권력이 어느 한 단체에서 행사되는 방식입니다.
a. 지교회의 정치
“지교회의 정치는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회를 구성한다. 장로교의 정치는 대의정치이다. 장로는 교인들에 의해서 선택되나, 그들의 권위를 인간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정치 의해 충분히 구비된 하나의 완성적인 교회이다. 그러나 지교회는 공통적 일치점을 근거로 해서 다른 교회와 관련을 맺음으로 지교회 완전히 독립할 수 없다.”
b. 주요의회
“지교회가 연합성을 이룩하기 위해 맺는 경우, 노회대회와 같은 대회의가 필요하다”
3) 교회의 권세
“교회의 권세는 영적이다. 이유는 교회의 권세와 성령에 의해 주어지며, 성령 권세의 표명인 동시에 신자들에게만 관계되며, 영적인 방법으로만 집행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권세는 대리적인 권세인데, 이 권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시행된다. 이 교회 권세는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교리, 치리, 봉사이다. 교리권은 진리를 수호하며 ( )세대의 진리를 신실하게 전하고 불신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위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을 끊임없이 전파해야하고, 신자와 신앙 고백을 작성해야 하며, 장래 사역자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199p
a. 교리권
결국은 교리권이라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진리와 관련된 사명으로서, 다시 말해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잘 전수 받고, 자기 시대에 더 연구하고 살아서 진리의 풍성함을 발전시키며 완성된 형태로 후손들에게 전수해주는 것입니다. 후손들은 그것을 잘 전수 받아서 자기 세대에 발견한 하나님을 보태어서 더 풍성한 교리를 자손들에게 전수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신학의 지적활동, 하나님과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의 활동,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과 연관시키는 활동, 등을 연구하면서 창조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증진하려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후원해주고 좋은 학자들을 교회에서 길러내야 합니다. 신학만이 아니라 여러 학문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b. 치리권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교회의 모든 것들이 단정하고 질서있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의 일들을 적절한 규정을 제시해 주셨고, 그리스도의 법을 실행할 교권을 교회에 주셨다. 권징의 권한도 포함이 된다. 교회의 권징의 목적은 두 가지인데, 하나님 교인의 입교와 출교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게 하므로 그들의 영적 교훈을 촉진시키려는 목적이다.“
c. 봉사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전도만 하게 하실뿐 아니라, 모든 질병들을 낫게 하기 위하여 활성하셨다. 초대 교인들 중에는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특별한 사람들은 사도가 시작된 후로는 중단 되었다.”
특별한 은사로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은 중단되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누가 기도해도 병이 나을 수는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은사를 주셔서 그 사람의 기도로 병이 낮는다는 그런 개념의 은사는 우리들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기도의 응답으로서 누구나 하나님과 친분이 있고, 하나님이 그를 고치고자 하는 섭리가 계실 때에는 누가 기도하든지 병을 하나님이 낮게 해준다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집사를 영어로 ‘디콘’인데, 이것은 ‘디아코니아’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디아코니아는 ‘봉사하다’라는 뜻입니다. 봉사중에서도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희랍어 διακονείν τραπεξαις, 그리스어 Diaconie Trapeza)라고 하면 식탁을 차리는 것인데, 대게 식탁을 차리는 것은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사라고 하면, 명함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노예처럼 봉사하는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우리 속에는 노예 유전자 같은 것이 배어있습니다. 자기가 치우고 싶고, 자기가 허리를 굽혀 봉사해서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주고 싶은 좋은 의미에서의 노예의식이 배어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가 조금 불편해도 봉사하는 것이 봉사권입니다.
벌코프의 조직신학에서 배우는 것들은 양도 할 수 없는 선에서 알아야 될 국민 상식 수준의 구원론만 가르켜줍니다. 벌코프는 암기해야 될 내용들이고,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은 반복적으로 읽기를 권합니다. 암기되지 않은 지식은 끈 떨어진 지식과 같습니다. “우리는 공부한다 그러므로 공부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보편적 인간과 개별적 인간, 나를 배우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이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를 배움으로 가장 잘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A. 회심과 믿음
“중생에서 비롯된 변화가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나타날 때, 우리는 회심이라고 본다”
회심은 중생한 영혼의 최초의 움직임입니다. 그 움직임이 의식 속에서 파악되는 것입니다.
1) 회심에 대한 일반적 고찰
시험문제
“회심이란 중생받은 자로 하여금 그들의 의식적 생활 가운데서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를 보면 하나님이 회심의 창시자이고, 중생은 새 생활의 의식적인 변화를 통하여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에 있어서는 하나님만 역사하시고 인간은 피동적인 대 반하여 회심에 있어서는 인간은 협력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인간은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행하는 것 뿐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기여하는 것이 있습니까, 엄마가 힘 줘서 낳는 것이지, 태어나는 데 이바지 하는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도 죽어있는 영혼 그 자체가 살아나게 하는데 이바지 할 수 없습니다. 중생은 일반적 역사, 회심은 현렵적 역사입니다.
“회심은 중생과 같이 순간적인 변화이지, 성화와 같은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어느 한 순간에 분명하게 회심하게 됩니다,. 이 회심이 대부분 어른들의 경우에는 중생과 회심이 일치합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중생과 회심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심의 경험이 있는가, 어느 날, 언제 회심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심한 결과가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 마음 속에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중생하고 회심하게 되면 존재론적인 변화, 즉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또 인식론적인 변화, 즉 하나님의 아름다움, 신비를 지각할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록 사랑은 점점 더 깊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중생과는 달리 회심은 인간의 무의식적 생활에서 일어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회심은 모든 성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회심이 각 사람의 생활에서 현저한 전환점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회심의 경험이 외적으로 굉장히 강렬해도 그것이 참다운 회심이 아닐 수 있고, 외적으로 강열하지 않은 데도 참다운 회심일 수 있다. 회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 사람에게 중생하고 회심한 증거가 있는가, 존재론적, 인식론적인 변화가 있는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에 다 있습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액기스 처럼 뭉쳐있는 곳이 성경의 계시 속입니다. 중생한 자의 뚜렷한 특징은 성경이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는 길“ 시리즈 참조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세상을 자꾸 사랑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진짜 그것이 사랑할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는 상관없이, 자기가 아름답다고 느끼고 끌리면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선한 것에 끌립니까, 아름다운 것에 끌립니까, 아름다운 것에 끌립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선한 것입니까, 악한것입니까, 그런데 공부 안하고 게임을 하는 것은 게임이 이쁘니까 끌리는 것입니다. 공부 안하고 맨날 게임만 하면 나중에 몰고올 결과가 당시에는 안보입니다. 그런 것들을 벗어나는 올바른 판단력을 갖추는 것이 신앙의 지혜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일시적인 회심도 있다.”
예화
신대원 3학년 때 농촌 봉사를 갔습니다. 그 때 저는 어린이 사역에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 농촌 지역에서는 아이들을 전도해 데리고 와서 성경학교를 해야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아이들을 어디가서 데려올수 있냐고 물으니, 아이들을 데려오려면 3시간은 걸릴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설마’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정말 3시간이 걸렸습니다. 가는데 1시간 30분, 오는데 1시간 30분, 봉고도 없이 걸어서 아이들을 50명정도 데리고 왔습니다. 시골 예배당 마루에 아이들을 동그랗게 둘러 앉혀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다음에 기도회를 하는데, 성령님이 은혜를 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찬송을 부른 다음에 기도를 하는 순간 아이들이 회개를 하면서 회심을 하는 아이들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청년들이 함께 울며 기도했는데, 그 아이들 중에는 절대 회심하지 않았던 뺀질뺀질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이 아이가 회심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 끝나고 저녁때가 되어서 다 함께 모여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성령님이 은혜를 주셔서 뜨거운 기도회를 한 것과 아이들이 회심한 것에 대해 간증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오늘 기도회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묻자, 오늘 정말 은혜가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듣고 싶은 오늘 주님을 만나 회심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왜 회개했나? 왜 눈물을 흘렸나? 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시골 아이들이 학용품도 없이 걸어다니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울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누가 그래서 울었을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외적인 증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증거는 될 수 있지만, 완벽한 증거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렬하게 회개의 경험이 있어도 두 가지 변화가 도입되지 않은 사람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고, 오히려 그런 변화가 별로 없어도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 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들어오게 될 때, 그 때 그 사람이 진짜 회심한 사람입니다.
“회심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반복을 인정하지 않지만, 이 반복이란 회심의 반복이 아니라, 흐려졌던 새생명의 회복적 활동을 말한다. 소극적 회개와 적극적 회개가 있다. ”
좁은 의미의 회심은 구원에 이르는 최초의 회개와 믿음이고, 넓은 의미의 회심은 그러한 회심의 경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2) 회심의 소극적 요소인 회개
“회개란 과거를 돌아보는 것으로서 죄인의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죄를 쫒아버림으로 일어나는 변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1) 회개의 요소
a. 지적 요소
“이것은 과거의 생활이 자신의 비행과 추행, 무력함을 수반한 죄의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b. 감정적 요소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항하여 슬퍼하는 것이다”
c. 의지적 요소
“이것은 목적의 변화에서 일어나는 요소인데, 죄로부터의 내적인 전환과 이런 죄를 용서받고 씻어버리려는 성향을 가르킨다”
지, 정, 의 전인격적인 변화입니다. 누가 물건을 훔쳤다고 하면, 훔친 물건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지성입니다.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 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감정입니다. 다시 돌려드려야지 하는 것은 의지입니다. 그 안에는 똑같이 죄에 대한 인식도 똑같이 생겨날 것이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이고, 죄에 항거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에는 반드시 열매가 뒤따릅니다.
(2) 로마 가톨릭의 개념
“로마 가톨릭은 죄에 대해 외적 관념을 가지며 회개는 선척전 죄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외적 형벌에 대한 공포로부터 일어나는 것에 불과한 개인적 범죄에 대한 슬픔이며,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신부에게 말하는 고백이며, 금식수행, 성지순례,
요즘 성지순례는 성지순례가 아니라 성지여행입니다. 예전에는 이교도들의 핍박을 견디며 목숨을 거는 말그대로 성지순례였습니다만 요즘은 좋은 호텔에서 스파나 하고 관광용품도 사고, 편하게 보고 오는 여행입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회개의 관념을 자기의 죄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죄가 가지고 있는 영적 특성 갖은 것들을 이길 수 없게 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영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서, 세계의 구원과 창조와 구원과 구속과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을 바라보는 개념이 아닙니다. 존 오웬의 신앙이라는 책에 보면, 죄의 형이상학이라는 ( )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이해하면 교리 전체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3) 회심의 적극적 요소인 믿음의 종류
(1) 믿음의 종류
a. 역사적 믿음
“이 신앙은 아무런 실제적, 도덕적, 영적 반응없이 진리를 지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본다. 이 신앙은 중생한 자에게는 뿌리 밖지 못하는 것으로 양심의 자극과 감정의 흥분으로 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시적이라 칭하는 이유는 영속적 성질이 없음므로 시련과 박해시에는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다운 구원이라고 볼 수 없고, 마귀도 가질 수 있는 종류의 믿음입니다.
b. 일시적 믿음
c.. 이적적 믿음
“성경은 또한 이적적인 믿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이 신앙은 이적이 자기에 의해 두는 자신을 위하여 행해질 수 있다는 개인적 확신이다. 이 믿음은 구원적 신앙을 수반할 수도 있고, 수반 하지 않을 수 있다.”
d. 구원적 믿음
“성경은 구원적 신앙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구원적 믿음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이 신앙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죄의 자리는 마음이며, 또한 신앙의 자리 역시 마음이며, 사랑의 자리도 마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함께 마음에 있을 수도 있고 안그럴 수도 있다. “마음지킴의 교리 책이나 테잎 참고” 마음 지킴의 교리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이 치열한 전쟁터라고 나온다. 죄도 우리의 마음을 정렴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의 마음을 정렴하려고 하며 치열한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신자의 또 다른 별명은 마음지킴이입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들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잠언 4: 23
(2) 믿음의 요소
“우리는 진정한 구원적 믿음의 요소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지, 정, 의를 모두 동반한다.”
a. 지적 요소(지식)
b. 감정적 요소 (찬동)
c. 의지적 요소
“이 요소는 구원받는 요소의 으뜸가는 요소이다. 영적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인데, 이 시뢰는 그리스도에게 범죄한 영혼의 항복을 포함하는 것이다. 마지막 분석에 의하면 구원받는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앙의 수행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복적으로 권고받는 인간의 활동이다.”
(3) 믿음의 확신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확신이 없어도 상관이 없는 것인가, 여러분은 어느 것이 맞다고 보십니까,
“감리교에서는 믿은 자는 자기가 하나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그가 궁극적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은혜에서 떨어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올바른 견해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포함하는 진정한 믿음이란 자연히 안정과 보호의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 확신은 영구한 의식적 소유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충실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의와 불안정의 동요받을지도 모름으로 확신을 ( ) 기도함으로서, 명상함으로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 그 확신에 달린 것은 아니지만, 확신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B. 칭의
1)칭의의 성질과 요소
“칭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죄인을 외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칭의는 중생이나 회심이나 성화와 같이 갱신의 행위나 과정이 아니므로, 죄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신분에 영향을 준다” - 171p
“칭의는 몇 가지 특별한 점에서 성화와 차이가 있다. 첫 째 칭의는 죄인 밖에서 하나님 법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죄책을 제거해주며, 단번에 영원히 완성되는 행위이다. 둘 째 성화는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죄의 오염을 제거해주며 계속적으로 일생을 거쳐 일어나는 과정이다.”
(1) 칭의의 성질
인간에게는 원죄와 좌범죄, 즉 실행죄가 있습니다. 원죄는 실행죄의 뿌리가 됩니다. 원죄는 물려받은 죄입니다. 이 원죄는 죄책과 오염이 있는데, 죄책은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입니다. 오염은 선천적 부패성입니다. 죄책은 칭의에 의해서 단번에 해결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차를 몰고 가다가 남의 집 담벼락을 들이받았습니다. 주인이 나왔는데, 같은 교회 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물어주려고 하는데, 주인이 하는 말이, 어차피 벽을 허물고 새로 지을려고 했다면서 그냥 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죄책이 해결이 되는 칭의입니다. 그런데 무너진 담장도 그냥 있고, 찌그러진 차도 그냥 있습니다. 그것은 오염입니다. 이 오염은 성화에 의해서 해결이 됩니다. 죄책은 순간에 해결이 되고, 오염은 일생에 거쳐서 점진적으로 해결이 되어 갑니다.
(2) 칭의의 요소
a. 소극적 요소 (그리스도에 의에 근거한 죄의 용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죄를 한꺼번에 용서하신 것이기 때문에 칭의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과거의 죄는 지은 죄고, 현재의 죄는 짓고 있고, 미래의 죄는 무슨 죄를 지을지 모른다는 시간과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시간의 전개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죄는 하나님 시각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없는 영원의 시각에서 모두 한 번에 용서되는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용서해준다고 하지만, 자기가 지은 죄 하나하나를 거명해서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용서받게 됩니다. 또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다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하나님의 영원의 시각에서 한번에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는 넓은 의미, 좁은 의미도 없고, 일회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죄의 용서를 위해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죄를 저지릅니다. 그 죄도 논리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다 용서해주신 죄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멸망 받을까봐 두려워서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남아 있는 죄책의 인식을 떨쳐버리고 용서받지 못했다는 분리의 감정을 없애고, 사제의 확신에 대한 위안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백성들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b. 적극적인 요소 (칭의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양자가 됨)
“칭의로 인해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즉 하나님은 신자들을 자녀의 위치에 두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상속권은 물론 자녀의 모든 권세를 부여하신다. 신자들의 이러한 법적 아들됨은 중생과 성화를 통한 도덕적 아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법적으로 자녀가 되어도, 실제로 자녀답게 되는 것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왕이 아들이 없어서 왕자하고 똑같은 아이를 왕자로 들였다고 하더라도 왕자다운 품위를 갖추는데는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그렇게 왕의 아들로서 입적되는 것이 양자됨이라면, 왕의 아들답게 되는 것은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도덕적인 아들됨으로 나아갈 때 가능해집니다.
2) 칭의의 시간
사중적 칭의라고 볼 수 있는데,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그리스도 부활로 인한 칭의, 믿음에 의한 칭의, 마지막 심판의 봉적 칭의로 볼 수 있습니다.
(1)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관련적인 의미로 이 칭의를 설명해 보면, 그리스도의의 의는 구속의 뜻으로 신자들에게 이미 설명된 것임으로, 영원으로부터 왔다고 말할지 모르나, 이 설명은 죄인의 칭의에 대한 성경적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 가운데 작정된 것과 역사의 과정에서 실현되는 결과를 구병해야만 한다.”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 안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에 이미 영원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함을 해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칭의라고 말할 때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이 시간속에서 죄인들을 의롭다 칭하시는 것으로 구원 계획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는 수용하지 않고, 그리스도 부활로 인한 칭의, 믿음에 의한 칭의를 수용합니다.
(2) 그리스도 부활로 인한 칭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칭의는 몇 가지이유가 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대한 칭의였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칭의는 보편적이고 순수한 객관적 처사임으로 죄인에 대한 개인의 칭의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모든 구원받는 사람들을 의롭다 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그런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칭의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개인에 대한 구원론적인 칭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부활로 인한 칭의도 칭의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가장 고유한 의미의 칭의는 이신칭의입니다.
(3) 믿음에 의한 칭의
“성경은 죄인의 칭에 대해 말할 때,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관적으로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전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일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말은 칭의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칭의의 도구요, 칭의가 전용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에게 적용하는데, 이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받는다. 인간은 그 믿음이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한 의로 여겨진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은 자신의 본래 의나 자신의 믿음을 근거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가톨릭과 알미니안파의 잘못을 경계하여야 한다. 인간 자신의 의나 믿음은 인간의 칭의의 근거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자신의 의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속에서만 발견된다.”
진정한 의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 시간 속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칭의가 가장 고유한 의미의 칭의입니다.
3) 칭의 교리에 대한 반대설
a. “어떤 학자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인간은 은혜로 구원받는 거싱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칭의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선물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칭하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이다.”
b. “어떤 학자는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지 않으시고, 죄인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게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죄 값 때문에 우리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의 옷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c. “어떤 학자들은 칭의교리가 도덕생활을 무관심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만일 죄인들이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왜 죄인들이 개인적인 경건의 마음을 써야만 하는가, 그러나 칭의는 생명력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기초하므로 이것은 진정 경건생활을 위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 그리스도와 실제로 생명력 있는 연합을 이룩한 자는 도덕적 면에서 무관심할 리가 없다.”
이것은 잘못 적용을 하게 되면 이런 주장이 나옵니다. 거져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면 더 감격해서 하나님게 순종하며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촉진하는 방법이 됩니다. 진정한 회심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따라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10 강
교회론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성경인데, 그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구원론이나, 인간론에 안나오고 교회론에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말씀과 성례가 나란히 나오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관한 교리 그 자체는 우리가 이미 배운 바와 같이 서론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은 성경론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르치실 때 풀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믿도록, 그리고 잘 살도록 훈련하고 가르치는 일들이 교회에 위탁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교회론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작에서부터 도전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꼭 공부만 한다고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르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인 기관에서 하나님과 교회와 사랑하는 지체들과 하나되는 가운데 생활을 하면서 그 가운데서 질서를 배우며, 거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세계와 인간,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네 가지 지식들의 지평을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 즉 배운다라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척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생을 배우는 것 처럼 교회 안에서 참된 신앙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성경을 배우기만 하면 기독교 신앙이 저절로 되어가는 것이라는 것은 재대로 된 태도가 아닙니다. 올바른 교회론에 입각해서 교회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위탁하여 그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풍성한 해석으로, 풍성한 교리로 가르칩니다. 성경에 가르침들이 많이 있는데, 그 많은 가르침을 올바로 배열했을 때, 올바른 가르침이 됩니다. 잘못 배열하게 되면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지식은 사실인데, 그것들을 잘못 연결 시키서 전혀 가치가 없는 지식이 되는 경우처럼 되어 버립니다. 성경에서 어떤 진리들을 꺼내어서 올바른 질서 속에 배열해서 가르치는 것이 신학이라는 학문이 하는 일입니다.
이런 올바른 가르침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여러분들은 일차적으로 어디서 배웁니까, 가정에서 먼저 배웁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가 젖을 먹이고 사랑해주고 선악을 가르칩니다. 아이는 엄마의 말이 법인 줄 알고 선악을 분별합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것을 다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자라면 엄마 잘못된 것에서 야단을 치면, 아이는 반항하게 됩니다. 그 때쯤되면 선악의 분별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점점 인생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렇게 배워도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인생 잘사는 법에 대한 권위 있는 아무개가 오늘 떨이로 싸게 수강료를 할인해서 받고, 7일만에 속성으로 가르쳐준다면, 여러분들은 신뢰할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인생을 잘 사는 방법은 그런 식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물론 인생을 잘 살려면 돈도 있어야 하니까 주식투자 7주 단기코스 이런 것들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 되는 5주 단기 속성 코스는 우리들이 신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그렇게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생각하면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공부는 매이는 공부가 아닙니다. 지금은 모두 다 단답형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몇 년전에 ( ) 책이 나왔는데, 40분만에 읽는 회개, 40분만에 읽는 아리스토텔레스, 40분만에 읽는 기독교 같은 시리즈가 나옵니다. 물론 이렇게 요약을 할 수는 있겠지만, 40분 읽고 칸트를 이해했다. 40분 읽고 회개를 이해했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참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기독교 사상가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가라고 하면 굉장히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린 아이들도 사상가입니다. 회심 집회 할 때 4살 아이한테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거든 복음을 들어볼래?” 라고 하면 “싫어!” 라고 말하는데 그것 자체가 사상입니다. 어쩌다 한번 소 발길질에 개구리 맞은 격으로 선한 일을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날의 기독교 신앙이 가장 잘못되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 때문에 남과는 다른 눈으로 신을 보고, 세계를 보고, 인간을 보고, 자기를 보는 그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웁니다. (이렇게 안배우기 때문에 오늘 날 기독교가 문제라는 말씀인 것 같은데, 어중간하게 말이 끝나네요)
비유(칠판 설명)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신, 세계, 인간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온 세계와 모든 역사의 중심이라는 것을 신앙으로 받게 되고, 성경을 통해서 잘 배움으로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나를 잘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게 될 때,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고, 인간이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가 역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렌즈가 아니라 자신의 시각으로만 세계를 보게 되면, 대상 자체로부터 진실을 얻기가 희미해집니다. 보는 사람의 눈 자체도 이미 어둡기 때문에 안질이 있는 사람이 밤에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사물에 대한 판단이 흐려져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왜곡된 형태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사상을 쌓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상은 성경의 사상과는 정면으로 충돌해서 화합할 수 없는 불구의 형태를 만들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햇볕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다. 우리 눈이 건강할 때 햇빛이 찬란하게 비추면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눈에 안질이 있다면 그 좋은 햇빛도 괴로운 것이 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 자체가 망가졌기 때문에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항상 행복하고 유쾌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이 옳다고 칭찬해줄 때는 좋아하다가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해 줄때에는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이유였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지식들을 갖게될 때, 총포괄적인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교회 안의 사람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지식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함께 죽고 살 수 있는 사실이고 신념입니다.
그렇게 해서 흔들림 없이 인생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이 남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이것은 웃을 만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해야할 명제입니다. 공부 안하고 절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것만 공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을 보면 비판은 하고 있지만 답은 제시를 못합니다. 살인을 해도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는 것은 컴퓨터를 켜서 마우스 몇 번 클릭하면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게임이나 동영상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그것이 그들의 사상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인간이 누구인가를 배워가는 것을 최소한 사람이나 자연 속에서 배웠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이 전부 다 폐기되어버린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공중에 붕 떠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도 내가 누구인가라는 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너는 나를 사랑하거라”, 그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참된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독교인인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신앙생활을 잘하고 교리를 올바르게 배우면 질문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 총포괄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공부해야 합니다.
A.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1) 하나님의 말씀
은혜의 방편 혹은 수단 혹은 방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사용하시는 가장 성경적인 방편을 말합니다. 은혜의 방편론에 대해서는 일개설, 이개설, 삼개설이 있습니다. 일개설은 성례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다라고 가톨릭은 말합니다. 이개설은 말씀과 성례라고 봅니다. 삼개설은 말씀과 성례, 기도라고 말합니다. 통상적으로는 두 개로 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은혜를 많이 받는데 왜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고 그러는가,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수단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기도는 기도 자체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주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우리에게 은혜를 스스로 공급하는 힘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받는 은혜는 결국 알고 들어가면 기도 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에 기도의 은혜는 말씀의 은혜에 귀속된다고 봅니다.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는 성경을 늘 읽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성경의 더 깊은 곳에 있는 의미들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됩니다. 그런 점에서 개혁파에서는 통상 은혜의 방편을 성례와 말씀을 봅니다. 그리고 말씀이 더 우위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례가 은혜가 되려면 성례의 의미를 알아야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례의 은혜를 다 아는 사람은 한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그 위에 물이 뿌려질 때, 침례의 경우에는 물 속에 들어갈 때, 죄와 더불어 함께 죽고 다시 일어날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또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을 때에는 성찬에서 떡을 땔 때, 눈물이 납니다. 왜냐하면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이 떡이 찟어진 것 처럼 자신의 몸을 찟으셨구나, 포도주가 따라질 때 이 포도주가 붉은 색인 것 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구나 라고 깨달아집니다. 이렇게 될 때 성례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줍니다. 성례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성례의 의미를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 부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서 떡 한 조각을 먹고 가고, 포도주를 마시고 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슨 은혜를 받겠습니까, 일표지설, 이표지설, 삼표지설 중에서 우리는 이표지설이라고 보고, 성례도 은혜를 전달해주는 방편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말씀을 아는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고 봅니다.
“가톨릭에서는 가장 중요한 방편을 성례라고 하지만 말씀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방편이다”
(1) 말씀과 성령
“은혜의 방편이란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 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교회가 사용하기로 한 방편의 (평원)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할 때, 우리는 삼위 중 제 2위이신 인격적 말씀이나 능력 있는 창조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포함되어 있고 교회에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므로 은혜의 가장 중요한 방편이다. 강조할 점은 전파되는 말씀인데,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인간에게 전해지는 것이니, 즉 가정에서와 학교에서 대화나 종교적 문학의 방편으로 소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은혜의 방편이 된다. 이 말씀만은 믿음과 회심을 일으키는데 충족치 않지만, 꼭 필요한 도구이다. 한편 성령은 믿음과 회심을 일으킬수 있기는 하지만 말씀을 떠나서는 통상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말씀 전파는 성령의 의해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 p206
지난 번에 제가 현대 복음주의의 흐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몇 개의 세미나를 철저히 들어야 합니다. “세계화 사회에서의 진리의 전달자로서 신자의 역할” “회심 목회” “현대 복음주의의 흐름”을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날 행해지고 있는 성령에 대한 수 많은 이단적 행위들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성령으로 사람을 쓰려뜨리거나, 금 이빨이 되는 것도 유행했었고, 요새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발 빼기 운동이 있는데 사람을 쓰러뜨려 놓고 발을 잡아 당기면서 당신의 모든 질병의 원인은 발이 짝발이라서 그렇다고 말하고 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발을 빼는 것입니다. 성령과 현대의 흐름을 잘 모르면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들을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이 잘 안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늘 못하게 하는 말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는데” 설사 성령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자신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또 아류로서 “기도하던 중에”라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말은 미묘한 영적인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말들입니다. “성경을 읽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아니라, “성경을 읽다가 생각이 났는데”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교만한 표현이 아니라, 훨씬 더 겸손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조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해야하는가,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가장 훌륭하고 고유한 역사는 어떤 사람이 성령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더 많이 깨닫게 되고, 문자적인 표현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더 깊은 심정을 이해하게 되고, 거룩해지고 싶은 사람이고 가장 고유한 성령의 경험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합니다.
교리반으로는 부족하고 기회가 닿으면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역사, 신학, 사회등 아주 골고루 배웠으면 합니다. 자동차 운전 면허 따려고 백만원씩 투자해가며 학원까지 다니며 투자하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기 인생 자체를 운전하는 것에는 얼마나 많이 배워야겠습니까, 그래서 올바로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벌코프는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지식입니다. 여러분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은 데이비드 웰즈의 4부작 시리즈가 있습니다. ‘신학 실종, 윤리 실종,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그리스도’와 4권을 압축해 놓은 ‘용기 있는 기독교’까지 총 5권입니다.
(2)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말씀 그러는데 말씀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둘로 나뉘어집니다. 율법과 복음입니다.
“은혜의 말씀 방편인 말씀은 두 부분, 즉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된다.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율법은 죄를 자극하게 하며,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에 무능력함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몽학선생이 되게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율법은 신자들의 생활의 규칙이므로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준다” - p 206
a. 율법
첫 째로 죄를 깨달음, 둘 째로 그리스도께 인도함, 셋 째 살아야 할 지침입니다. 하나님께 구원받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감사해야하는지를 생각하며 율법대로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b. 복음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바 구원의 방도의 명백한 표시이다. 복음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와서 믿고 회개하도록 권고하며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구원의 축복을 약속한다. 또 복음은 믿는 자를 위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거기에서 “위하여”라는 말 속에는 대신, 이익, 대표 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11 강
A. 육체적 죽음과 사후의 중간 상태
1. 육체적 죽음
우리가 예전에 알기로는 예수 믿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가고,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들어가보면, 중간 상태라는 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생소해하는 사름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전에 우리들이 배운 방식의 교리들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좀 더 상세하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중간 상태라고 하는 것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우리들이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타락 후에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원래 불멸하도록 창조된 육체에 죽음이 들어오게 되고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육체는 소멸하는데 영혼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안전하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은 모든 악인과 선한 사람이 동시에 육체를 입고, 선한 사람은 육체와의 영혼이 맨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영생을 누리기에 접합하도록 육체를 입고, 심판 받을 악인들은 영원한 심판을 견딜 수 있도록 거기에 접합하도록 몸을 입는 것입니다.
맨 처음 사람이 창조 되었을 때, 영혼은 육체와 아울러 창조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완전한 구원이 되려면 처음의 창조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 처음 창조된 사람은 육체와 영혼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선했기 때문에 완전한 구원이 되려면, 영혼과 육체 모두가 완전히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만약에 육체는 사라지고 영혼만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완전한 구원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서 완전한 성화에 이르러서 하늘 나라에 가도 그것이 구원서정의 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육체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부활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은 이후부터 부활이 이루어지기까지 상태를 중간 상태로 부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그렇다면 중간 상태의 장소는 어디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이것은 이렇습니다. 쉬운 말로 ‘음부’라는 것은 지옥의 현관쯤 되고, ‘낙원’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현관쯤 된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직 완전한 몸을 입지 않았는데도 영혼 만으로도 고통을 당하고, 영혼 만으로도 천국의 기쁨을 일부누린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두 장소가 완전히 불리된 별개의 장소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성경 계시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정도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됩니다.
“성경에 여러 가지로 나타나있다. 육체적 죽음을 영혼의 죽음을 구별해서 말하고 있으며, 생명의 종결이나 상실로 언급하고 있고,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육체적 죽음은 멸절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의 불리에 의한 육체적 생명의 종결인 것이다. 펠라기우스파(펠라기오)와 소기노안파(소키누스)는 인간이 죽어야 될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지만, 이 견해는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다.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로 죄의 형벌이라고 가르쳐준다. 죽음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자연적인 과정이라기 보다는 신적 진노의 표현이며 심판이며 정죄이며 저주이다.”
여기서 죽음의 의미가 나뉩니다.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면, 신자는 죄책에서 구속을 받았는데 왜 신자들이 아직도 죽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지만 죽음이 신자들에게는 형벌이 아니라, 성화 과정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성도의 죄에 대한 죽음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죽음은 성도들에게는 형벌이 아니라, 성화 과정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성화를 위해서 노력을 해도 결국 완전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면 낙원에 이르기에 접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과 함께 우리가 못한 부분들을 하나님이 완전히 성화 시키셔서 낙원에서 주님과 교통하기에 적합한 영혼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화를 완성시키십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수고하고 고통받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안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이 되는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는 죽음에 대한 기억입니다. 여러분은 메멘토 모리를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언제입니까,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갑자기 어느 한 순간에 죽어야 된다는 사실 때문에 커다란 공포가 다가오면서 슬픔이 엄습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최근에 이어령씨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6살 때, 굴렁쇠를 굴리며 놀다가 석양에 해가 떨어지는데, 갑자기 우주 공안에 자기 혼자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막 울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메멘토모리입니다. 어떤 아이가 엄마에게 죽는 것이 무엇인가 물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엄마는 “네가 건너방에서 장난감 가지고 놀다가 잠이들지? 아침에 일어나니까 그 장난감이 어디있었니?”라고 묻자, 아이는 “엄마 방에 엄마 옆에 있었어”라고 말합니다. 엄마는 “죽음이란 그렇게 네가 장난감 가지고 놀다 잠들었을 때에 번쩍 앉아서 딴 방으로 옮기는 것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그런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죽음 이외에 우리에게 참다운 안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 ) 심방 했는데, 몇 년전에는 교회 아이가 소아암에 걸렸습니다. 너무 가엾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룬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아이가 폐암이 커져서 칼비뼈를 누리면서 심장을 누릅니다. 수술을 한번 했는데 대책 없이 고통을 받는 것 보면서 “아..내가 네 대신 죽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라는 마음을 갖었습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 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 보다도 귀하다.
참된 개혁주의적(성경적) 영성은 죽을 준비가 된 영성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견해를 예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요 심판이라고 생각했다가, 하나님이 나를 이 시련이 많은 세상에서 안식의 나라로 옮기시는 주님의 어머니 같은 두 팔이다라고 생각을 하니까 죽음에 대해서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경적 경건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죽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 중간 상태
스올(Sheol)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이고, 하데스(Hades)라는 말은 신약에 나오는 음부의 개념입니다. 스올의 번역이 아마 하데스일 것이라고 보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들은 성경 계시의 역사를 따라서 처음에는 불분명하게 주어지다가 나중에는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구약에서는 지옥에 대한 개념과 음부에 대한 개념이 혼합된 가운데 아주 불투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다가 신약 시대에는 하데스와 게헨나가 나옵니다. 게헨나라는 히랍어는 지옥으로 번역되었고, 하데스라는 말은 음부로 번역되었습니다.
(1) 스올과 하데스의 현대적 개념
“현대에는 경건한 자나 악한 자나 누구든지 죽은 후에는 스올이라고 부르고, 하데스라는 중간 지대에 내려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보상 형벌이 없고, 모든 자의 동일한 장소이며, 지상 생활에 약화된 방영에 불과한 음침한 장소이고, 삶의 희열이 슬픔으로 변해가는 약화된 인식과 침체된 무능력의 장소이다. 이런 개념은 성경적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스올과 하데스를 의미한다면, 그곳에 내려가는 것을 악한 자를 향한 경고로 어떻게 지지하겠는가, 하나님의 진노가 스올에서 불붙고 있는 것으로 성경이 경고할 수 있었겠는가, 부자는 음부에서 쳐다보며 고통하는 곳이라고 했다. 스올과 하데스가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지만, 무덤, 죽음의 상태나 조건, 형벌의 장소들으로 사용되었다.” - p227
(2) 연옥, 선조림보, 유아림보
a. 연옥
연옥은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교리입니다. 이것은 한번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보는 교리입니다. 순교 했거나 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만 천국에 가고,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잉여공로라고 합니다. 잉여공로를 교회는 공로가 모자라는 사람에게 보태주어서 그 사람을 천국으로 올려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교리를 토대로 통공사상이 나옵니다. 상호유통하는 것인데, 내가 천국에 들어갔는데 나에게 남은 공로가 있어서,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려오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나의 공로를 보태줍니다. 그 배급은 교회가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옥에 있는 사람이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면죄부 판매가 나옵니다. 면죄부 판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런 교리를 토대로 나오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기도할 때,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기도합니다. 그런데 가톨릭에는 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주교에서는 정말 잘해줍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옵니다. 그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장례집에 찾아다닌 것도 천국에 올라갈 때 공로로 쌓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할 때,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요셉이여 우리를 위해..” 라고 기도하다가 죽은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아무개여..우리를 위해....”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하면, 우리는 공로가 모자라기 때문에 주님이 조금만 들으시고, 잉여공로가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주님이 많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들어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명령도 내리실 수 있는 정도의 강력한 공로를 가지신 분이 있는데 그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죽었을 때, 간절히 기도하면 연옥으로 올라가려면 영혼이 통공에 의해서 힘을 얻어 곧바로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례집에 그렇게 많은 천주교인들이 조를 짜서 밤새도록 연불같이 연도를 외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대충하는 사람들에게 이 교리는 위로가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연옥에서 정결하게 되어서 천국으로 올라가는데, 밑에서 그 사람 이름으로 공로를 쌓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친구를 위해서 공로를 열심히 쌓으면 속죄함을 받아 천국으로 올라 갈 수 있다는 교리를 천주교는 갖고 있습니다. 헌금함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영혼은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허망한 사상입니다. 이 교리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가톨릭에서 포기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 때문에 일년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천문학적인 액수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자체가 집단 최면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 할 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이성의 스위치를 꺼야지만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참된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는 “웜 하트, Cool 헤드”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케인즈가 경제학에서 가르쳐준 화두인데, 냉철한 지성과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경제학을 해야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신앙 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올 때, 제일 먼저 가하는 공격은 지성을 혼미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냉철한 지성을 갖고 방어 해야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인 활동 뿐만 아니라, 잘 믿는 활동까지 포함합니다. 지성의 활동은 오성의 활동과 이성의 활동으로 나뉘는데, 오성의 활동이 바로 믿음의 활동입니다. 그리고 이성의 활동으로 논리를 따라 믿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해야합니다.
성경 외에는 아무것도 안 읽는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을 중심에 두고, 일반 책들도 부지런히 읽어서 사회가 어떻게 변하는지, 죄인들이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 세상 문화를 냉철한 지성으로 분별해 내야 합니다. 영화를 볼 때에 너무 재미있어서 속편은 언제 나오나 하고 빠지지 말고 항상 냉철하게 보면서 코드를 읽어내고,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과 인간들이 어떤 생각들을 갖고 있는지를 분별한 후에, 그것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열린 신문에 매번 싣고 싶은 것이 문화 비평입니다. 가령 광고 카피 속에 들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를 찾아내서 거기에 우리들이 생각 없이 물드는 것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주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세상의 정신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현명한 지성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리만 배워서 교리칼을 붙들고 틀리게 말하면 목을 확 베어버리려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냉철한 지성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중심에 두고 문화를 읽어내시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b. 선조림보(Limbus Patrum)
“선조림보는 죽으신 후부터 부활하실 사이에 오셔서 해방해주실 때까지 구약 성도들이 억류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유아림보는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의 영혼이 거하는 처소라고 본다.”
선조림보나 유아림보(Limbus infantum)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3) 영혼의 수면
(4) 멸절설과 조건적 영생설
멸절설은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와 영혼은 멸절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정하신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무지무정하신 분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유시무정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조건적 영생설은 “인간은 사멸하도록 창조 되었지만, 믿는 자들만은 불멸의 그리스도 안에서 불멸의 선물을 받는다. 악인은 완전히 멸절하게 되거나 의식을 잃어버린다.”- p229
(5) 제 2의 시련
이것은 심판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 2의 시련을 이야기 합니다. 죽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두 번째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인간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골고루 생각할 때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것은 전능하는 영광과 점증하는 진노의 교리입니다.
B. 그리스도의 재림
“초림이 있으면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 p233
1. 재림 전의 대사건들
(1). 이방인을 부르심
천국 복음은 재림전에 온 세계에 전해져야 한다. 이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전 국민이 완전히 복음화 되어 복음이야 말로 국민 생활의 능력이 되며 결신을 촉궇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을 부르신 것을 어느 정도까지 부르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복음을 제시 받고, 거부하든지 상납하든지 둘 중에 하나의 태도를 밝힌 후에야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이미 보편화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이 의지를 갖고 들으려고만 한다면 충분히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이스라엘의 회심
“고린도후서와 로마서는 이스라엘의 회심을 말해주는데, 로마서는 이 회심을 시간적 종말과 연관시키는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서 이스라엘 전체, 국가적 이스라엘이 결국 주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종말의 표라고 생각한다.”
“Back to 예루살렘”이라는 구호는 신학적으로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이고, 개혁신학에서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은 구약으로 종료되었다고 봅니다. 구약이 모세를 입법자로 하면서 예시했던 공동체가 이스라엘이라면,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인 백성들인 교회가 실현되는 것인데, 종말이 오는 것만 갑자기 옛날 구약의 시점에서의 문맥이 그대로 들어와 새대주의적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신학적으로 옳은 해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믿고 안믿는 것이 전세계 종말을 좌우하는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원을 얻어서 이루신 새 언약 백성의 무리들이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진 예표의 성취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 구약과 신약 사이에 존재하는 계시의 연관성과 예표의 실현
구약 | 신약 |
입법자 모세 -> | 그리스도 |
이스라엘 -> | 교회 |
율법 -> | 복음 |
할례 -> | 세례 |
유월절 -> | 성찬 |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서 구약의 역사들이 성취되어 가는데, 종말에 있어서는 갑자기 구약의 이스라엘이 회복되면서 종말이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구의 모든 나라들이 복음을 다 듣고 난 후, 그 마지막 지점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오면 종말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존재하는 계시의 연관성과 예표의 실현을 모두 무시하는 논리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는 필요없어집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종말론은 무엇입니까, 육적 이스라엘에서 찾으면 안되고, 영적 이스라엘에서 찾아야 합니다.
(3) 큰 배도와 재난
“세상 끝날이 가까울 수록 크게 배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세상 끝날에 죄악이 증가하고 사랑이 식을 것이다.” - p234
(4) 적그리스도의 출현
“적그리스도는 분명히 있었으며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끝날에 개인이 악의 화신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친다.” - p235
적그리스도를 자기를 신격화한 인물이라고 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에 와서 제수이트같은 곳에서는 깨어라, 파수대, 666, 세계정부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EU(유럽연합)에서 유럽 통합 대통령을 뽑으면 종말이 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사와 연관된 이야기들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종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우리의 후손들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됩니다. 미래의 불분명한 사실들에 대해서 수 많은 상상으로 살아가는 대신에 오늘 현재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5) 표적과 기사
“성경은 이상한 표적을 세상 끝날의 징조로 말해주고 있다. 전쟁, 기즌, 지진이 각 처에 있을 것이니, 이것이 재난의 시작이며, 이 재난은 우주의 재창조전에 일어날 것이다. 하늘의 무서운 징조가 나타날 것이며, 그 때 하늘의 권세가 흔들릴 것이다,” - p235
2. 재림 자체
(1) 재림 시기
“어떤 학자들은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는다.” - p235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신앙이 아주 깊으면 주님이 천년후에 와도 오실 것 처럼 느껴지고 신앙이 타락하게 되면 다음 시간에 오실 텐데도 일만년 후에 오실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의 영원의 빛 아래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이 영원을 빛되어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살아갑시다.
(2) 재림의 양식
주님의 재림은 인격적으로 다시 오십니다. 위격인데, 주님이 오실 때 천사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인격적으로 재림하십니다.
“오순절에는 영으로 오셔서 육체적 재림, 각인이 눈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견적 재림, 많은 징조가 재림 전 일어나지만 불시에 일어나는 돌발적 재림이 될 것이다. 재림의 목적은 사물의 영원한 상태를 돌입하실 것이다.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목적을 실현할실 것이다. 부활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뉜다. 악인과 의인이 모두 부활할 것이며,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 p236
3. 천년 왕국설
천년왕국설에는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로 나뉩니다. 전천년설은 다시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나뉩니다. 엄밀히 말해 천년왕국설은 역사적 전천년설까지 포함해 크게 네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설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지상에 세워진 정부들을 통해서 통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통치자가 되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천년동안의 때를 가르킵니다. 그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천년 통치가 있다는 설이 전천년설이고 없다는 설이 무천년설입니다.
예수님의 천년동안의 지상 통치가 그리스도의 심판 전에 있을 것이라는 설이 전천년설이고, 심판 후에 있을 것이라는 설이 무천년설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 왕국 후에 될 것이라고 보느냐, 앞에 있을 것이라고 보느냐,로 전천년설과 무천년설로 나뉩니다. 지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대통령이나 왕으로서 인간 관리들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무천년설입니다.
a. 역사적 전천년설
그 중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은 완전히 잘못된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은 “666” “세계 정부” “짐승의 표”를 계시록에 말씀으로 영해해서 그 근거로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합니다. 순복음 교회에서도 한 때 이런 설교들을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ex : 오늘 날 역사적 전천년설을 실제 종말론적 교리로 채택해서 가르치고 있는 교회는 형제단이다)
우리가 잘 알고 이쓴 존 맥아더 같은 경우, 역사적 전천년설 교리를 신봉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존 맥아더의 책을 읽을 때 조심하며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머지 부부들은 아주 건전하고 좋은 작가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에 있어서는 우리와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b.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성약기분할설이라고도 말하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전 세대에 통일된 언약의 본질이라고 안보고, 세대마다 각각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봅니다. 구원을 오늘 날의 시대가 지나고 나면 행위로 구원을 얻는 시대가 온다고 봅니다. 그래서 일곱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c. 후천년설
후천년설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후천년주의자였습니다. 대게 우리들이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이 건전하다고 보고, (앞에서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완전히 잘못된 교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그나마 건전하다는 의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종말론의 아디아포라의 개념인 것 같음.)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도 이 둘은 사람들이 어느 것을 선택해도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 전통은 전천년설에 가까웠습니다. 그것은 시대적 상황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자마자 한국은 일제의 강점기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왕으로 이 땅을 통치하시며 일본 강점기에 겪은 핍박과 억울함의 한을 풀어보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핍박받고 고난이 많은 곳에서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전천년설주의자입니다)
C. 부활, 마지막 심판, 무궁세계
1. 부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실 때 부활하실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 p240
(1) 부활의 성질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육체적 부활을 기대한다. 부활은 의로운 자나 악한 자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의로운 자를 위한 구원과 영화의 행위가 될 것이다.” - p240
악한 자들은 심판 받기에 적합한 몸이 될 것입니다. 지금 같은 우리 몸을 지옥 불에 던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냥 육체는 타고 없어져버릴 것입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산 그 죄인들의 죄에 합당한 죄 값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심판에 견디기 적합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이런 몸을 가지고 만약에 우리가 천국에 간다고 한다면, 천국에 적합하지 않은 세상의 육체를 가지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에 적합한 몸을 만들기 위하셔서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부활시키십니다.
(2) 부활의 시기
“일반적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세상 끝 날과 일치할 것이며, 최후의 심판 직전에 있을 것이다. 전천년설주의자들은 이중적 부활을 주장하는데, 재림시에 의로운 자의 부활이요, 또 하나는 천년이 끝날 때 불의한 자의 부활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전천년설의 약점입니다. 주님이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때, 의인들이 함께 부활해서 예수님과 함께 세계 정부의 주요 지위를 자치해서 이 땅을 통치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회적 지위가 현격히 낮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재림하시면 자신들은 한 자리 자치해서 이 땅을 통치하는 권한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 영적인 통치의 나라와 세계의 통치를 혼돈하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무천년설은 이 세상 끝 날에 고난, 배교등의 징조들이 오긴 오는데, 그 때에 가면, 복음의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면서 말씀이 놀랍게 승리하며, 숨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복음의 혁혁한 승리가 모든 역사의 휘날레를 장식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천년이 다 끝난 후에 부활이 다시 있는데, 악한 자들을 모두 부활시켜서 주님과 성도들이 함께 심판하게 됩니다.
2. 최후의 심판
“부활의 교리는 심판 교리와 연결된다. 성경은 궁극적 심판이 있을 것임을 언급한다.” - p241
(1) 심판주와 보조자들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는 심판주가 되실 것이다. 천사들은 보조할 것이며, 성도들도 다소나마 참여할 것이다.” - p241
(2) 심판 받을 무리들
“인류 개개인이 심판대 앞에 서야 된다는 사실은 분명이 있다. 의로운 자는 심판에서 제외된다.” - p242
의로운 자들에게 심판의 개념은 사실 악인들이 받는 심판의 개념이 아니라, 원한을 풀어주는 의미의 심판입니다.
예화
10년전 출판사에서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출판 문제로 만나자고 해서 엘란트라를 타고 천천히 가는데, 갑자가 쾅하는 소리가 나서 브레이크를 밝고 멈추어 섰습니다. 내려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내 차에 부딪친 것입니다. 놀라서 비상등을 켜고 뛰어가서 안다쳤냐고 물어보니, 그 사람이 운전을 그 따위로 하냐고 욕을 합니다. 내가 2차선에서 파란 신호등으로 직진을 하는데, 오토바이가 3차선에서 좌회전을 하다가 내 차 뒷 문짝을 들이박고 쓰러진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좀 황당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저는 직진을 하고 가는데 신호등을 무시하고 좌회전을 하다가 와서 밖은 것 아닙니까” 하고 말하니, “내가 지나가면 당신이 비켜야 할 것 아냐” 라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교통경찰을 부른다고 하길래, 불러서 상황 설명을 쭉 하고 나니까, 그 사람이 방방뜁니다. 교통 경찰이 가만히 듣더니, 서초 경찰서 교통과에 가라면서 무전을 쳐주었습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경찰이 사고난 경위를 그림으로 그리라고 해서 그려서 주었습니다. 경찰은 그림을 보고 난 후에 그 오토바이 운전자에게 말합니다. “당신 몇 살이야, 그렇게 눈치가 없어? 지금 당신이 싹싹 빌어야 손해를 덜보는 상황이야, 당신이 이 사람 차를 찌그러뜨려 놓았잖아. 이거 불법이야” 그러자 오토바이 운전자는 다시 방방 뛰며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교통 경찰이 하도 답답하니까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당신 편 들만한 친구 있냐고 묻자, 오토바이 운전자는 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한테 전화해서 교통경찰이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더니 오토바이 운전자 친구가 다 듣더니, 친구를 바꿔달라고 해서 통화하는 것을 듣는데, 그 오토바이 친구도 네가 잘못했고 빨리 잘못했다고 빌라고 말합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전화를 가만히 내려놓더니 가만히 있습니다. 교통경찰이 저에게 “교수님, 차 수리를 원하십니까” 라고 묻길래, “아니요, 이 분 택배하시는 분이신데 차는 제가 수리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오는데 오토바이 운전자가 그 때서야 “잘못했습니다” 라고 합니다. 참 보니까 너무 안되어보여서 봉투에 10만원을 넣어서 열린 교회 신문하고 주었습니다. 당신 돈도 없을 텐데 이 돈으로 치료받고 다음서부터는 안전운전하라고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그런 심판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경찰이 없었으면 길거리에서 오토바이 운전자가 저의 멱살을 잡았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심판이라는 개념이 죄를 짓고 벌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무섭지만, 주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자신의 맺힌 한을 풀고, 위로와 도움을 받는 날이 됩니다. 그런 개념에서의 심판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양면성입니다.
(3) 심판의 시기
예화로 설명 대체
(4) 심판하는 표준
복음의 충만을 아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심판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집니다. 유대인 같이 율법을 이미 받았던 사람들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개의 율법을 주셨는데, 하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는 돌판에 세기셨습니다. 돌판에 세긴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마음에 세긴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졌습니다.
무신론자들이 범죄할 때 마음에 두려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형법 때문에 떨리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나타날까봐 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범죄에 성공하고, 자기가 돈을 훔쳐서 피해를 준 사람도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떨린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잘못됐다는 것을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율법이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세기신 율법의 효능은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댈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구원을 받아야 되겠다는 것을 가르쳐주기에는 현저히 모자라는 정도로만 핑계할 수 없도록 주어지는 율법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표준이 되어서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규율할 때, 율법을 통해서 선과 악을 제시 받는데, 선과 악을 규정하는 최종적인 원천은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도덕적 통치] 참조 - 선과 악
3. 최후의 상태
(1) 악인의 최후의 상태
“악인은 지옥이라 불리는 형벌 장소로 전해진다. 지옥이 장소임을 부인하고 상태로 말하지만 아니다. 지옥은 장소이다.” - p243
(2) 의인의 최후상태
“신자의 최후 상태는 현세에 지나고 새 창조가 이룩되기 전에 이루어 질 것이다. 미래의 창조는 새 창조가 아니라, 오히려 현 우주의 갱신인 것이다.” - p243
마치 세상이 창조되면 공간, 시간이 다 무너져버리고, 즉 물질적인 세계가 소멸되어 버리고 영화된 세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물질 세계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천상과 지상 세계를 창조하셔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가지계를 통해서, 가시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십니다. 다만 이 세계 속에는 침투한 죄의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라고 하는데 하나도 재미 없습니다. 서로 물어 뜯고 죽이는 일들이 매일 발생합니다. 바다나 물 속에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한 것 같지만, 그 안에서는 작은 미생물들부터 큰 물고기까지 매우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까 고생물학자들이 고래를 잡아먹는 바다 짐승이 있었다는 근거를 찾아 냈다고 합니다. 이빨 한 개의 크기가 36cm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밍크 고래 같은 것도 씹으면 반토막이 났을 겁니다. 그런 바다 짐승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물 속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몇 년전에 태평양 쪽에서 길이 17m, 무게 480kg의 대왕 오징어가 잡혔습니다. 이런 오징어가 바다 속에 산다고 하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머어머한 몸집의 고래가 밥을 한번도 안먹고 한 숨도 안자고 4천 8백 km를 항해한다고 합니다. 1천 km 밖에서도 고래 울음소리를 소나로 추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어머어머한 것들이 물질세계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모든 것들은 전부 다 고통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서 누군가를 잡아먹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죄의 결과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죄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화 속에서의 죄의 영향들은 제거될 것이고,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유산 조차도 아주 아름다운 형태가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천국이 마치 영혼의 유령들이 떠돌아 다니는 판타지의 세계라는 환상은 버리고, 물질 세계는 영원할 것입니다.
불에 타서 없어질 소멸될 세상이라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질적으로 완전한 세상이 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성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못생긴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고 미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 옛 사람은 죽었고“ 라고 말합니다. 세계 역시 그런 연관성 속에서 보면 됩니다.
“모든 사람이 완전한 복락을 누릴 것이지만 이 천국의 복락에도 등급이 나뉠 것이다.”
이 복락 자체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복락 자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인 의미에서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성도가 더 많은 복락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시기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천국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의 등급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기쁨은 지성적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매일매일 새롭게 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신자들은 은혜와 기쁨이 밀려오고, 그 분을 사랑하게 되는 일들이 매일 일어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고 나면 더 알 것이 없어지지만,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무한하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셔도, 하나님의 자신의 존재의 크기와 지성적인 내용은 변화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용량 자체를 초과하기 때문에, 계속 보여주셔도 주님의 아름다움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천국에서 누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말씀에 놀랍게 은혜를 받고 삼위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느끼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아주 작은 맛보기입니다.
결론은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모든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찾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010 상반기 교리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