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회복과 가정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4-6)
녹취자: 김향진
지난 시간에는 누가복음 1장 17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에서 아버지가 하나님일수 없고, 그것은 인간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수의 주석가들이 그 부분을 하나님이라고 해석합니다. 지난주 설교에 이어 이것이 왜 사람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인가를 설교를 통해 논증하려고 합니다.
우선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예언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장 16절과 17절에 보면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에 대한 누가의 독창적인 해석이 아니라 말라기 4장의 내용을 다시 상기하면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7절의 아버지의 마음에 대한 해석은 철저하게 말라기 4장에 나오는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빛 아래에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이 왜 누가복음 1장 17절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이라고 할까에 대한 것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말라기서 1장 6절에 보면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해석하게 하는 좋은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잘 보면 명시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아버지라고 지칭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문맥을 잘 보면 하나님이 당시 사회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이야기하면서 근본적으로 인륜이 끊어진 것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사회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도리적으로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게 맞고 종은 주인을 공경하는 게 맞다.’ ‘그런데 그것이 다 끊어져버렸다.’ ‘인륜만 끊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천륜도 끊어져버렸다.’ 그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당신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런 아버지라고 하는 표현이 누가복음 1장 17절의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해석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2장 10절의 앞에 나오는 ‘아버지’는 나의 판단으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아브라함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가지고 있고, 거기로부터 영적인 조상으로서 언약백성으로서 핏줄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느냐’ 하는 것이 언약적 혈통을 의미하는 거라면 동시에 ‘우리는 한 하나님에 의해 지은 바 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한 창조를 의미합니다. 훨씬 더 위에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낮은데서 부터 시작해서 높은 데로 올라가는 화법이고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선택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선민의 핏줄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류 전체로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규율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오니까 1장 17절을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로 돌아가 이것을 왜 육신의 아버지로 해석해야 하는지 근거를 말해보겠습니다. 우선 16절 17절의 연결이 부드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남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17절에서는 ‘또’는 16절과 대등한 내용으로서의 ‘또’가 아니라 히브리적 화법을 도입한 것입니다. ‘또’라고 하면서 16절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텐데 그리고 클론(;)이 들어갑니다. ‘설명이 나온다.’ 아버지의 마음을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표현합니다.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표현한 이유는 엘리야가 있던 아합의 시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타락의 시기 아합왕조 시기에 탁월한 두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보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세례요한이 와야 했을 이때를 인륜이 땅에 떨어지고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기이고 그래서 세례요한이 와서 강인한 스피리셔니티(spirituality)와 능력으로 사역하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 시대의 앞뒤로 있었던 선지자 중 전설적인 탁월한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 그가 맞섰던 가장 불의한 시대를 생각나게 하는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라고 해석하게 되면 문맥이 잘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16절에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클론(;) 그 돌아오는 게 어떤 양상이냐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거스르게 하는 자는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해서 결국 주를 위하여 세운…” 이게 바로 세례요한이 할 사역입니다. 실제로 세례요한이 복음서에서 설교한 내용을 보면 예수님처럼 갯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다는 내용이나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했다는 내용보다는 설교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설교의 내용은 대부분 인간들 속에서의 불의한 삶을 질타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요지는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면서 17절을 해석할 때 하나님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에게로 돌이키게 하려는 것들을 그의 사역에서 어떤 것들을 찾을 수 있을까? 오히려 언제나 하나님은 거기 계신 분이고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시는 분인데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오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준비가 안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연스럽게 온다. 그런데 이런 날이 반드시 축복의 날이 아니다. 낙관주의 속에 젖어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날이 재앙의 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충격적인 교훈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그 나라를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외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현실적으로 상세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문맥에서 보면 이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을 때 마지막에 무너지는 것은 가정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입증하듯이 말라기 2장 11절부터 보면 가정의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16절을 보면 옷은 성도의 행실을 가리키므로 부부가 살면서 사랑의 행실로서 아내를 감싸주어야 하는데 학대의 옷으로써 가리는 것은 행실이 악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저버렸다는 증거로서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말라기서의 문맥 속에서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고 멀리 떠난 중요한 논거가 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말라기서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끝납니다. ‘치료하는 광선이 나와서 그들을 비추게 되고 그들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되리라’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 회복을 예고하시면서 그것과 함께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전망하시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만약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면 말라기 4장 6절이 해석이 안 된다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문학적 태도로 6절을 읽어보면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식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게 하리라”입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이라는 조건절이 나오는데 그 조건절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이키게 하고…”에는 해당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파괴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해석하려면 “돌이키지 아니하면”이 “자식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게 하리라”에만 걸리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때에 엘리야가 와서 큰 능력을 말씀을 전할 것이다.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는 율례는 있을 수 없다. 율례는 사람이 지켜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따라서 6절이 이렇게 해석하면 자연스럽습니다. “너희가 호렙에서 내가 온 이스라엘에게 준 율례를 깨버렸다. 모든 인간관계들이 정의를 버리고 다 깨졌다. 인륜의 마지막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깨졌다. 그런데 내가 엘리야 같은 능력의 종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가 큰 능력으로 선포하고 이스라엘을 고치기를 마치 엘리야처럼 하리라 그러면 그가 무정한 아버지를 자식에게 돌이키게 하고 불순종의 자식을 아버지에게 돌이키게 할 것이다. 그 아버지도, 자식도 만약 돌이키지 않는다면 내가 그 땅을 친다.”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구절이 말라기 3장 7절입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가능성이 추호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누가복음 1장 17절과 말라기 4장 6절에 대입할 때 해석이 어그러집니다. 따라서 이 아버지를 사람 아버지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주된 관심사가 가정이었다는 것을 봤을 때도 그렇습니다. 누가의 주된 관심 분야는 가정, 치료, 기도였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개인의 회개인데 그 회개의 뚜렷한 표가 가정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누가로 하여금 아버지의 마음을 언급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오셔서 선포하신 것도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서 돌이켜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면 가장 심각한 것이 가정의 해체입니다. 기본적으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이론의 여지없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이미 무너지고 있습니다. 비정한 사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이 하나님의 백성이 갈망해야 할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후기 산업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의 욕망이 커지고 그것은 더 많은 노동과 치열한 경쟁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 속에서 가정은 입지가 매우 좁아져버렸고, 데다가 통신기능의 발달로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의 즐거움보다는 자신 혼자 즐기는 것에 익숙해져 가족관계의 필요성이 역력히 떨어지게 되었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깊은 회개로 들어가게 될 때 하나님, 부부, 자녀, 교회라는 세 가지 부분에 대한 깊은 회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상들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의 증표가 됩니다. 결론은 본문의 아버지는 사람 아버지로 해석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