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과 영력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막 6:18)
녹취자: 백두라
저는 21살에 회심을 하고 성경을 읽었는데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딱히 이 사람이 나의 이상형이다 난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하는 사람을 못만났습니다. 바울이 한때는 좋았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까 집사람이 다윗의 팬 이라고 해서 다윗도 좋아해보다가 그러고 보니까 다윗보다는 요나단이 훨씬 훌륭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또 바울보다는 바나바가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느낌도 받아서 이렇게 지조없이 이사람저사람 돌다가 특별히 이 사람처럼 되고 싶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성경을 읽다가 한사람에 온전히 사로잡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원에 가서
요한복음 1장 6-8절 사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이름이 요한이라 그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한구절을 읽었는데 좀 과장을 하자면 하늘이 열리면서 막 은혜가 쏟아 졌습니다. 그날 하루종일 깨달은 내용을 깨알같은 글씨로 노트에 적었다가 몇 년 후에 그날 받은 말씀을 가지고 한권의 책을 쓸수 있었습니다. [청중을 하나님앞에 세우는 설교자]라는 책을 쓸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이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 사람에 대해서 탐구를 해왔습니다. 이 사람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배웠냐 하면 역사는 사람을 이으면 하나님의 일하신 흔적이 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정경 선지자로서 말라기 이후로 400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그쳤을때에 처음 나타난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엄밀하게 말하면 구약시대에 속한 사람이었고 공교롭게 말라기의 마지막 성경 구절이 엘리야가 오리라는 예언으로 끝나고 신약성경의 처음 시작이 이제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에 대한 시작으로 신약이 열립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례요한은 매우 중요한 구원역사에 있어서 주님의 선구자의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이 사람을 가지고 세 번에 걸쳐서 이제 인격적인 준비, 내일은 학문적인 준비, 모레는 영적인 준비를 차례대로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은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요한은 정치적으로 볼 때 헤롯의 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로운 사람의 인격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인 최고 실권을 가지고 있는 헤롯도 이 요한을 처형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정치적으로는 원수이지만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인격이 경건하고 의로웠기 때문에 그의 앞에 갈때에 정치적으로는 자기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무엇인가 인격적으로는 그 사람 앞에 눌리는 것 같은 위압감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가 헤롯의 불의를 꾸짖으며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책망하였을 때 번민을 많이 느끼면서도 세례요한의 충고에 귀를 귀을이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때문 일까요? 인격적인 놀라운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는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격적으로 잘 준비되어서 우리가 전하고 외치는 이 진리가 참으로 진실한 것이고 효과가 있는 것이고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줄때에 그때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이 진리의 복음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목회자로서 우리들이 준비되어 가는데 목사가 되는것이야 몇 년 지나면 행정적인 절차를 거쳐서 목사가 됩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 면접을 할때 당신은 인격적으로 준비가 덜 되었으니 시험에서 떨어트려야 겠습니다 하는 면접관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목사의 자격증이야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진짜 목회자다운 인격을 갖추게 되는 것은 멀고 험난한 길이고 하루아침에 혹은 필요한 때에 즉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인격과 모든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목회자에게 합당한 것으로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예배시간마다 입고 올라가는 검은 가운은 속이는 망토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목회 사역에 들어서면서 목회자로서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 준비될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또 어떻게 해서 갖추어지는 것일까요?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그가 내걸었던 두 개의 모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어따스 에트 스키앤띠아] 였습니다. 경건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학문이었던 것입니다. 오랜 경건 속에서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때 그 사람 자신의 본성에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희랍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은 그의 운명이라고 보았고 변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바꾸어 놓으실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은 바로 중생과 회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중생과 회심은 우리에게 최소한 영혼의 두 가지의 변화를 도입합니다. 첫째는 존재론적인변화이고 둘째는 인신론적인 변화입니다. 존재론적인 변화는 예전의 나를 사랑하고 이기심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던 사람을 중생과 회심을 통하여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중생한 신가에게는 그러므로 주된 성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입니다. 예전에 회심하기 전에는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중생하고 회심한 이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면 번민과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신론적은 변화는 예전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는데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겨나게 되고 그 눈을 통해서 이 가시적인 사물 세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 지성으로 보는 이 영혼의 세계를 바라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더듬으며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깊은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인데 이렇게 인식의 변화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과 성경을 주신 목적은 동일합니다. 당신 자신을 알게 하시고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로는 사물도 어두워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지성도 어두워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연을 본래 우리에게 주셨던 의도대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상실하게 된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엑기스처럼 녹아 있는 문서를 주셨는데 이게 바로 계시의 책인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번에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 이후에 성경의 계시의 빛을 쫒아서 이 모든 자연과 학문의 세계로 내려오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이 모든 자연적인 질서와 도덕적 질서 속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냥 산이요 풀이요 그냥 하늘을 나는 새였는데 이렇게 변화를 받고 보니까 모든 자연의 사물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여주는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내 영혼이 찬양 하네
교회와서 기도회를 해야 지만 겨우 하나님이 느껴지는 영성은 개혁주의의 영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이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누릴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구약의 [다트 엘로힘] -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노시스 그리스투] - 신약에서 그리스도을 아는 지식으로 기독론 적인 변화를 경험 합니다만은 어쨌든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이 이 세상에서 인간이 누릴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요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 할까요? 하나님의 그 본질을 우리들이 직접 알수 있는 능력이 우리이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하는 이 질문은 우리가 답 할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특별히 중세와 그리고 개혁파 신학자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질문할 때 세가지의 라틴어 의문사를 사용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 꼬보드지트, What is GOD? 하나님은 무엇이냐? 두 번째 질문. 꾸비스지트. 하나님은 누구시냐 세 번째 질문. 꼬보지트. 그분은 어떤 분이시냐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사물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간과 관련해서 영원하신 분이고 장소와 관련해서 무한하신 분이고 변화와 관련해서 불변하신 분이시라는 질문입니다. 꾸비스의 질문은 위격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신데 내가 지금 생각하는 그 하나의 하나님이 어떤 위격으로 이루어져서 어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신가하는 질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이 가장 중요한 질문인데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이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시간 세계속에 묶여 있는 공간의 한정된 유한자로 그 무한자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불변하고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그분이 홀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존재하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으면서 또한 그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그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때에 하나님 자신은 설명할수 없이 단순하시고 그리고 완전하신 한분이시지만 어떤 피조물과 어떤 상태에서 관계를 맺느냐에 의해서 당신 자신의 속성이 찬란한 빛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그분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속성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실 때 특별히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존재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그 속성을 찾아서 올라가면 그 속성은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태양은 찬란하게 눈부셔서 우리의 안광으로 그 빛을 감당할 수 없지만 그 태양을 쳐다보지 않아도 우리는 그 태양의 빛이 이 피조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서 그 태양의 고마움과 아름다움과 위대한 힘을 유추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속성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하나님이 두루뭉실하게 무서운 공포의 대상으로 보일수도 있고 또 신앙이 교만해지만 하나님이 사랑덩어리가 되어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서 눈물만 그러지 말라고 사정하실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분으로 이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참된 빛이 들어오고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씩 하나씩 경험해 갑니다. 그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경험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예를들자면 고난가운데 있으면서 고통을 많이 받지만 주님 한분만이 나의 참된 소망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당신 자신이 얼마나 위로가 넘치는 분이신지를 자비하심을 통해서 비참한 인간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고통과 어려움에 쳐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주님이 그 죄인을 긍휼이 여기시는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여러 가지가 혼잡스럽게 섞이는 것이 아니라 또렷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고 이리저리 방황할때는 주님의 의로우심을 보이십니다. 깊이 뉘우치며 참회하며 아버지앞에 돌아올때에 용서하시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말씀을 붙들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나는 하나님앞에 온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부르실 때부터 사용하실 때까지 일관되게 당신의 계획을 따라 내 인생을 섭리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주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가슴 속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두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앎과 두 번째는 속성이 우리의 인생의 행사되시는 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이 두가지에 대한 앎이 깊어져 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으로 넘어오게 되면 이 구약에 다트엘로힘 사상이 그노시스투 크리스투 사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옛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 당신의 언약백성과 맺으시는 관계를 통해서 속성과 속성이 행사되는 방식을 희미하게 알아갔는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친히 사람의 몸으로 오시는 성육신을 통해서 당신 자신이 생생하게 보이는 인간 존재요 하나님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신 지상의 모든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어떻게 행사되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주심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가 렌즈가 되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체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 만큼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 만큼만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상관관계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