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학교 신대원
개강 수련회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목회와 인격(막6:18-20) 2008.3.5 총신대학교 신대원 개강수련회 1
2. 경건과 학문(시119:18-20) 2008.3.6 총신대학교 신대원 개강수련회 18
3. 교회와 기도(눅19:41-46) 2008.3.7 총신대학교 신대원 개강수련회 37
2008. 03. 05 총신대학교 신대원 개강수련회
1.목회와 인격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막 6:18-20).
우리의 목회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또한 마귀들과의 싸움만도 아닙니다. 또 수도사들처럼 자신과만의 고독한 싸움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회 사역은 깊은 산 속이나 수도원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에서 모든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들과 함께 섞이며 그 죄인 중의 한 사람으로써 주님을 먼저 만났기 때문에 복음을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들리는 설교는 예배시간에만 울려 퍼지지만 그의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모든 향기들은 바로 목회의 실제적인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실질 세계의 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 목사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교회에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 참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치게 하실 뿐 아니라 참 진리대로 사는 삶의 표본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하여 목회자를 세운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한편으로는 진리를 전파할 뿐 아니라 또 한 편으로는 그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대로 사는 실제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성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모본이 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죠. 저는 오늘 교수님께서 읽어주신 이 본문을 주경학적으로 분석해서 여러분들에게 본문을 잘 설교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여기에 선 것은 아닙니다. 그저 먼저 목회의 길에 들어선 사람의 여러 가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충고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설교를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많이들 거론되는 것이 리더쉽의 문제입니다. 아마 그만큼 오늘날의 시대는 리더쉽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한 마리의 사슴에 의해서 영도되는 일 천마리의 사자의 떼가 무서울까, 아니면 한 마리의 사자에 의해서 영도되는 일 천마리의 사슴의 떼가 무서울까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천 마리의 사자라 할지라도 영도자가 사슴이면 두려워 할 것이 없지만 천 마리의 사슴의 떼라도 그 영도자가 사자의 심장을 가진 사자라면 우리는 두려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만큼 리더쉽이 중요하게 여겨지니까 요즘은 리더쉽을 배우는 열풍이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리더쉽은 리더쉽 하나를 배운다고 해서 리더쉽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죠. 도움은 될 수 있겠지만 먼저 리더쉽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자신이 리더가 될 때에 리더쉽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기독교에서의 리더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주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습니다. 그 테마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 지도자의 리더쉽을 군자형 리더쉽과 소인배형 리더쉽으로 대별하고 싶습니다. 소인배형 지도자는 그야말로 소인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리더쉽이죠. 저는 회심한 후 32년이 지나는 동안에 3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사역지를 포함해서 4교회를 몸담고 있었고 신학을 마친 후에는 2개의 신학대학에서 각각 교수생활을 했습니다. 그 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가장 아팠던 것은 목회자와 혹은 학교를 경영하는 사람들의 그 전행적인 리더쉽입니다. 우리들이 이 일은 회사가 아니고 공장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나가서 다 할 수 있는 일이 각각 다 있는데도 준님의 사라에 붙들려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 교회의 전도사가 되고 혹은 한 학교의 교수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 길을 걸어간 사람 중에 누가 호의호식하기 위해서 교역자가 되고 또 목회의 길을 걸으며 신학교에서 선생 노릇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치 교회가 자기의 것인 것처럼 그리고 학교가 자기의 재산인 것처럼 그 부교역자와 교수들을 몰아세우고 자기에게 인격적으로 불복하는 그렇게 줄 세우기를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런 불쌍한 지도자들을 많이 만나고 마음고생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혈기를 내고 심지어는 구타까지는 아니지만 갖은 모욕과 폭언을 퍼붓고 심지어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교수들 앞에서 그 아들 같은 사람이 폭언을 퍼붓는 이런 광경도 치욕스러운 광경도 목격하면서 전도사 생활도 하고 그리고 교수 생활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참 치욕스러운 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고용이 돼서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름을 받아서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학교를 경영하거나 혹은 교회를 목회한다고 해서 그렇게 인격적으로 사람들을 모욕하고 짓밟을 수가 있는가..우리는 좀 더 인격적으로 포용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해나갈 수는 없는가 하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항상 옆에 자신에게 아첨하고 아부하는 사람들이나 곁에 두고 그렇게 하면서 사역이랍시고 해나가는 사람들이 바로 소인배형 지도자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들은 대개 소인배들이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드물긴 하지만 가끔 군자형의 지도자들을 전 가끔 기독교계에서 혹은 목회자들의 세계에서 만납니다. 이 분들은 정말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큰 교회를 목회하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겸손한지 모릅니다. 준엄하게 꾸짖어야 하는 것과 인격적으로 모욕해서 자기 발 앞에 굴복시켜서 자기의 추종자로 만드는 것 사이에 구별이 확실한 사람들입니다. 준엄하게 책망하고 희로애락이 분명하지만 결코 자기에게 종속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그런 지도자입니다. 넓은 심성과 포괄적인 마음의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함께 손잡고 주님을 배워가고 알아가도록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군자형 리더쉽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리더쉽을 정말 잘 보여주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 분의 품 안에서 각양각색의 사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결국은 주님께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섬기고 그 분을 닮기를 원했던 것이죠. 이 목회자의 모든 삶은 사람들과 관계를 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특별한 영성 그리고 탁월한 말씀의 능력이라고 하는 이 특별가치는 사람이라고 하는 보편가치의 터 위에 세워져야지만 그것이 정말 빛나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의 능력은 있는데 정말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그런데 무엇인가 인격이 모자라서 결국은 그 좋은 것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는 60년대 70년대가 아닙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그 발로 차듯이 멸시하고 욕이나 하면서 그렇게 한다고해서 사람들이 거기에서 예속의 감정을 느끼면서 목회자를 존경하고 떠받들던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인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인격의 바탕이 바로 예의입니다. 예의..이것은 보편적인 가치에요. 그 예의가 사람을 구원하거나 변화시키지는 못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품에 모이게 할 수 있는 인격적인 향취를 가질 때에 그들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마켓팅에 열중하듯이 그렇게 사람들을 모으는 목회는 그것은 컴비니언투스토와 같은 걸 만들 때 사용하는 원리이지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가 성경적으로 성장하는데 통용되는 그런 원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런 예의 속에서 사람들을 잘 맞아들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성장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좋은 교육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의 도리, 그리고 내가 어떻게 행하여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 나를 희생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늘 그리스도의 희생의 정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신앙을 가진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고모들 품에 안겨서 교회를 다녔고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전혀 교회를 다니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이제 한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 가족들은 모두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교회의 제가 다니던 목사님이 우리집에 심방을 오시게 되었고 저는 그 때 중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귀한 목사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집에서 시장을 봐다가 잘 반찬을 하고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 말씀도 모든 가족들이 모여서 귀담아 듣게 되었으니 이제 그야말로 목사님이 따뜻하고 인자한 언어로 가족들을 잘 설복해서 교회에 나오시라고 한 말씀만 하면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게 될 그러한 순간이었거든요. 식사를 다 끝내고 접시가 치워지고 이제 과일이 들어올 때였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는데 그 바로 그 순간에 경악할 일이 벌어졌어요. 식사를 끝내신 목사님, 설교도 은혜롭게 잘 하시고 기도도 간절하게 해 주셨는데 밥을 잘 먹고 나신 다음에 피곤하셨는지 등을 벽에 기대시더니 두 다리를 쫙 벌리시고 젓가락으로 이빨을 쑤시기 시작하시는데 얼마나 쑤셔야지 끝이 나는지 끊임없이 한 쪽으로 양치질을 하면서 이빨을 계속 쑤셔요. 결국은 우리 집안 가정 복음화가 20년 연기 됐습니다. 그게 그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목사가 되기 전에 상식적인 사람이 돼야죠. 누가 거기 점사님 집에 초대를 받아가서 두 다리를 쩍 벌리고 그것도 물까지 양치질을 해 가며 젓가락으로 이빨을 쑤시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뿐이 아니죠. 이 목회를 하면서 보는 이 혈기 말입니다. 제가 총각집사 때 일이었습니다. 제직회를 하는데 조용히 제직회를 하는데 목사님은 미국가고 안 계신데 뭐라고 뭐라고 지금 안건이 토론이 되는데 뭐 밝히고 싶지 않은 별로 안 좋은 건이었어요. 갑자기 문 부서지는 소리가 와장창 하더니 어떤 사람이 탁 뛰어 들어오더니 “너희 이 인간들 내가 싹 전부 다 고소해 가지고 다 유치장에 쳐 넣을 거야. 이 자식들이”..그 얘기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 교회 전도사였어요. 전도사..뭔가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안건이 올랐더니 명예 훼손으로 이 자식들을 다 집어 넣을 거라고 혈기를 펄펄 부리는 거죠. 자초지종은 잘 모르겠습니다. 말하고 싶지도 않고..뭐 어떻게 교역자 생활을 하다가 보니까 좀 안 좋은 일로 오해를 받았을 수도 있죠. 그러면 그 때 그렇게 문을 부수듯이 발로 차고 들어와서 자기 아버지벌 되는 집사님 권사님들 앞에 이 인간들 다 잡아 쳐 넣을 거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교역자의 도리겠습니까? 아니면 비난 받을 때에 잠잠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쓴물을 머금으며 주님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목회자의 도리이겠습니까? 다윗도 그런 비슷한 때를 만났죠? 그 때에 시편 31편에서 뭐라고 고백을 했습니까? 그는 고백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 곧 그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저를 구설의 다툼에서 면케 하시며 비밀한 장막에 감추시리이다”그게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혈기를 전도사 때부터 참지 못 하고 부리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20년 후에 정확하게 변하지 않습니까?제가 아는 한 교회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개척교회를 한 어느 젊은 목사님이 어느 날 교인도 열댓명 밖에 되지 않는데 제정을 담당하고 있는 집사님에게 주먹을 날려서 이빨이 한꺼번에 4대가 부러졌습니다. 돈을 갖고 아마 달래는데 안 주고 안 주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 자식이 하면서, 주먹을 날리는데 옥수수가 4개가 확 빠져 버렸어요.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직접 그 분을 뵙지는 못했지만 참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오십이 훨씬 넘으시고 이제 노인이 되어가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교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모님은 일찍이 상차하시고 자녀도 없이 혼자 사시는 목사님이었는데 교회에 있는 어떤 자매가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배가 계속 불러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의 어른들이 저게 미쳤구나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결국은 교회에서 이것이 공식적으로 문제가 됐어요. 그랬더니 이 자매 하는 이야기가 이 아이는 목사님의 애기라는 거예요. 교회가 발칵 뒤집혔죠. 목사님이 사모님도 없이 혼자 사시니까 자매가 드나들면서 빨래도 해 주고 밥도 좀 챙겨드리고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러니까 목사님은 그게 아니라고 그러는데 교인들은 목사님 이야기를 믿지 않고 그 자매 이야기를 믿었어요. 교회에는 당회에서 결의를 해서 목사님을 퇴직금도 없이 쫓아냈고 노회에는 이 목사님을 간음죄로 면직시켜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요. 그 교회에서 결국은 부흥회가 열렸는데 어느 날 저녁에 이 자매가 걸어나오더니 울면서 통회 자복하는데 5년전에 그 때 그 사건은 자기가 거짓말 한 거고 사실은 그 때 자기가 임신한 그 아기는 목사님을 그렇게 헐뜯던 어느 집사의 애기다...그래서 그 집사의 사주를 받고 목사님을 모해해서 자기가 그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가 발칵 뒤집히고 당장 목사님 쫓아보내는데 가편 투교 하던 교인들이 장로들한테 손가락질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목사님을 알지도 못 하고 왜 내보냈냐고 교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장로들이 할 수 없이 사죄단을 만들어서 전국을 누비면서 이 목사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저 강원도 사북 있는 어느 탄광에서 결국은 목사로서 면직이 되고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으니까 신분을 감추고 떠날 때 이 아이까지 목사님한테 줘 버렸어요. 목사님이 이 아이를 안고 강원도 사북으로 들어가서 자기 신분을 감추고 광부 생활을 하면서 이 아이를 5살이 되도록 키운 거예요. 그러면서 세월이 흐르고 가서 장로님들이 마당에서 엎드려서 석고대죄를 했죠. 마침 후임으로 온 목사님이 다른 좋은 인재가 나서 가서 그 교회는 신기하게 공석이 되었어요. 그래서 그 목사님을 만장일치로 다시 모셔와서 그 목사님을 일평생 그 딸 아이를 자기 자녀로 기르고 그 평생 동안에 목사님은 거기에서 거의 성자 대접을 받으시면서 목회를 한 거예요. 이게 바로 목회자의 인격이 아니겠어요? 할 얘기 다 하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신학교 다닐 때 바로 여기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우리 학급에 같은 학생이 하나 있는데 늘 공부 안 하고 만화책만 전도사가 있었어요. 근데 그 만화책을 보는 것이 뭐 학교에 만화책을 가져와서 본 게 아니고 만화방에 다니면서 열심히 보는데 그 만화방 주인이 내 친구 어머니였기 때문에 탄로가..하루는 그래요.. 형..왜..제가 나이가 많았으니까..우리 담임 목사 참 신기해..뭐가? 어떻게 그 설교를 하고 밥을 먹고 사는지 기적이야..그래? 야 진짜 더러워서 전도사 못 하겠어.. 왜? 뭔일 있어? 나 있지 교회에서 30만원 주는데 나 진짜 인격적으로 훌륭한 목사님이 있으면 한 달에 30만원씩 아르바이트를 해서 갖다 바치면서도 내가 그 교회에서 전도사 할 용의가 있어..그래?.. 그런데 얘야, 네.. 그런 훌륭한 목사님이 왜 널 전도사로 쓰겠니? 끊임없이 토해내는 엄청난 혈기와 폭언, 사실 전 전도사 때 이해를 못 했어요. 목회자들이 왜 그렇게 성질이 나쁠까 이해를 못 했거든요. 근데 제가 목회를 해 보고 나니까 이해가 조금 돼요. 이해가 돼요. 왜냐하면 어쩜 그렇게 지혜가 없는지 정말 당신은 일 못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어쩜 그렇게 지혜가 없는지..교역자들도 어쩜 그렇게 게으른지,,당신은 놀기 위해 태어난 사람,,심방을 열심히 하나 전도의 불이 있나, 새벽기도를 열심히 나오나, 기껏 나오면 저 뒤에 앉아서 그냥 침 흘리면서 자지 않나, 영성은 그만두고 밥 값이나..(23분째부터 잠시 잡음이 심해 녹취 잘립니다.)(여기부터 잡음 때문에 잘 안 들립니다)그래도 참아야 됩니다... 참아야 됩니다. 롬펠러라고 하는 시인이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뭐 하도 오래 돼서 다 외우지는 못 하지만..“하늘을 향해 화살 하나 날렸다네 아주 먼 훗날에 그리고 난 그 화살이 어디 갔는지 몰랐지 오랜 세월 후에 알았다네 그 화살이 나무에 박혀 있는 것을 하늘 향해 노래 한 곡 불렀지 그 노래 하늘 멀리 퍼졌는데 몇 년 후에 깨달았다네 내 속 마음 속에 그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아니 그가 그것을 끊임없이 누리며....(잡음 때문에 도저히 안 들립니다)
(24분 27초부터 다시 음질 괜찮습니다) 그 변화되지 마치 변화되지 않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그 성도들이 변화될 거라고 기대를 하면서 기다려야 되니 그 목회자들이 암 같은 거 걸려서 빨리 빨리 죽는게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내가 목사님들을 몇 분 만났는데 저는 뭐 목회자들하고 영화 구경 갈 일이 없습니다만 목회자들이 대개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면 뭐 야한 영화도 아니구요 스토리고 멧세지도 필요없이 다 때려부수는 영화 좋아해요. 다 때려 부수는 영화..평소에 교회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극장에 가서 한 번 해 보는 거예요. 다만 그 인물이 실베스타 스텔론이나 아니면 람보나 이런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그런 걸 좋아해요. 그리고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제가 여기서 이름을 거명하면 여러분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 있는데 스피드 광입니다. 그래가지고 뭐 저기 도시를 이야기하면 그 분 또 추적을 할 거 같아서 뭐 한 400키로 되는 거리를 나 갈게 그리고 한 시간 45문만에 도착하신다니까 뭐 어느 정도 스피드 광인지 알 만해. 이러한 것들도 알고 보면 결국은 다 이런 데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뿐만 아니죠. 참 그 손양원 목사님 하면은 우리 한국 교회가 자랑하는 목사님 아닙니까? 사랑의 원자탄..말이 그렇지 자기 자식을 둘이나 죽인 그 놈을 자기의 아들로 삼아서 일평생 그렇게 사랑하셨으니 외국에서도 이 분의 스토리는 아주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분 따님을 한 번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간증을 듣고 전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손목사님이 그런 성자이신데도 그 교회에 그 손 목사님을 그렇게 못마땅해 하고 여기저기서 그 흉을 보고 그러는 교인들이 교회에 상당히 수가 많았다는 거예요. 이것 보면 사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가져도 하나님은 만족시킬지 모르지만 그 죄악된 인간들은 만족을 못 시켜요. 그 그래서 오죽했으면 어느 목사님 참 듣기 거북하지만 권사들이 하도 자기를 씹으니까 권사들은 족제비라고 부르고 장로들이 자기를 하도 갈구니까 장로들은 너구리라고 불러요. 그래서 너구리와 족제비 속에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사람 인격 목회자의 인격이 순교를 할 정도로 자기의 자식을 죽인 사람을 아들로 삼을 정도로 그렇게 사랑과 신앙심이 깊은 목사님도 그렇게 갈구고 싫어하는 교인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은 참 이 목회의 끝이 어디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이 뭐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따라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이 되면 안 돼죠. 김진홍 목사님이 한 번 그런 얘기를 해요. 사모하고 같이 목회를 하는데 어느 날은 집사들은 모여서 그러더래요. 도대체 사모님은 왜 옷이 꼴이 그거냐고..남들이 보면 우리가 목사님 얼마나 사례금을 안 주면 그렇게 추례하게 하고 다니겠느냐고 흉 보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하나의 위선입니다. 그래서 이제 목사님이 들으니까 그 말도 그럴 듯 해서 여보 당신 머리도 좀 하고 옷도 좀 신경써서 입고 다녀서 교인들 맘에 들게 좀 하라.. 그래서 이제 좀 예쁜 옷을 입고 머리도 하고 나타나서 몇 달 지났더니 교인들이 수군수군거리기를.. 세상에 말이지 우리도 못 입고 다니는 옷을 저렇게 좋은 것을 입고 다니니 말이지 어디서 돈이 또 생기는 데가 있나보지 우리 사모님은 정말 사치해..그러더래 그러더니 그래서 목사님이 여보 교인들이 그러는데 그것도 또 별로래. 다시 원위치했어요. 이게 계속 몇 번 반복되더니 목사님 하는 얘기가 여보 그냥 생긴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 이래도 결국은 만족해하는 사람이 없고 저래도 만족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우리가 무엇을 바꾸고 어떻게 한다고 하더라도 교인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된 목표는 교인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관되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인격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살아가는 걸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과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인격은 자기 본성의 틀이야. 삶은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거죠. 지어 먹으면 한 두 번 쯤 흉내를 낼 수 있겠지만 그건 매우 고통스럽죠. 선하지 않은 사람이 선한 흉내 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혹은 선한 사람이 가끔 악한 사람 흉내를 내는 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처사입니까? 웃음이 나오죠? 그런 속에서 결국은 관건은 우리 자신의 인격이 서서히 서서히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다듬어져 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김장철이 되면 요즘에야 뭐 김장을 거의 안 하지만 우리 어렸을 때만해도 김장을 하면 한 집에서 백포기 이백 포기씩 하고 큰 집은 삼 백 포기씩 합니다. 그것을 겨우 내내 애꿎은 김치만 죽이는 거죠. 그 배추를 시퍼렇게 배추를 툭툭 쳐서 그래서 소금으로 풀어서 커다란 양동이에다가 집어넣습니다. 배추가 펄펄 살아서 웬만큼 눌러서는 물속에 들어가지도 않고 퍼들퍼들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소금으로 뿌려놓고 한 하루만 지나고 그 다음에 들어오면 배추가 소금물에 푹 쩔어서 아주 야들야들해서 그저 쌈을 싸 먹어도 좋고 배추를 씻기도 좋은 그런 그야말로 소금에 절인 배추가 되는 것이죠. 신학을 하면서 많은 지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지 않습니다. 지식이라는 그것은 무슨 지식이든지 사도 바울이 경고한 바와 같이 우리를 교만하게 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고 할 때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걸 모르나 그래요 바보같이..이렇게 생각을 하죠. 이것은 마치 모든 방면에서 그러한데 이게 하나님을 알고 또 기독교 신앙에 관한 이치를 아는 지식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학적인 지식이 많으면 겸손해지기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학문을 하면서 학문을 하면서 그 학문을 통해서 영향을 받는 것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깊이 잠겨서 지식을 통해서 교만해지려고 하는 성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주어진 새 본성이 아니라 죄인으로써 아직 우리 가운데 남아 있는 잔존하는 죄의 본성이에요. 그러니까 죄 된 본성이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서 깊이 녹고 깨뜨려진다면 그 지식을 통해서 교만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이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는 사람들이 될 것이고 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생겨날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요한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쓰면서 그 첫머리의 시작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학함으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우연이 아닙니다. 아마 그가 가장 고민했던 문제가 바로 “두인도피알라지”..“ 신학함의 문제”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마틴 루터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탁월한 신학자답지 않게 그 사람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하고 명상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다. 진리를 향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는 신학자가 되어 간다” 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참 왜 그런지 학교 다닐 때부터 보면 기도를 많이 하고 밤이면 방석 싸 들고 산에 올라가서 눈물을 쏟으면서 목이 쉬도록 기도하는 학생들은 대개 수업 시간에 자..그리고 하다 못해 영어 원서라도 좀 보고 히브리어 희랍어도 좀 하고 라틴어라도 글줄이라도 읽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뺀질거리고 기도를 안 해요. 그리고 교회 봉사도 안 해. 그리고 교회를 옮겨도 그 하나님의 인도도 어디 무슨 철새의 인도인지 1년에 1번씩 그렇게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메뚜기처럼 옮겨 다녀. 그러니 거기에서 무슨 인격적인 성숙의 기회가 있겠어요? 가장 훌륭한 것은 뭐냐하면 이 팔꿈치가 닳도록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무릎이 닳도록 기도를 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 속에서 지적인 감동에 사로잡히고 나서 무릎을 꿇고 이를 내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이시니라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면서 자기가 다만 지푸라기와 같은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에 흐느끼는 신학도가 될 때에 그 때에 그 지식은 절대로 자기를 자유롭게 하지 못 합니다. 칼빈 선생이 마지막 남긴 유언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러운 것이 많은 사람이다. 내 죽은 후에 내 무덤을 만들지 마라” 그게 칼빈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글줄 꽤나 뭐 안다고 해서 교만해 진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학교 때 흘린 눈물은 30년이 간다고 합니다. 30년 동안 잊혀지지 않는다는 거죠. 저는 지금도 여기에 와서 1학년 때부터 공부를 했습니다. 이 빨간 건물 하나 있을 때 그 때에 그 추운 겨울에 3월이라고 아침은 추운데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씩 나가서 자기가 어느 학교 나왔고 이름이 뭐고 앞으로 뭘 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때 그 때 그 인상이 지금 수 십년이 지나도 그대로들 살아갑니다. 극히 예외의 몇 사람을 제외하곤 그 때의 첫 인상이 저 사람은 정말 기도 많이 하는 신학생이구나 지금도 그렇게 눈물 흘리고 기도하며 크던 작던 목회를 해 나갑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판하고 교수님들 욕이나 하고 그러던 사람들은 지금도 총회장, 총회임원들 학교장, 노회 위원들 욕하면서 또 다닙니다. 그렇게 사는 겁니다 평생을...그거죠. 오늘 여기의 본문에 보니까 헤롯과 세례 요한은 정적의 관계였습니다. 헤롯 입장에서는 이 인간 정리해 버리는 것이 자기 정치에 도움이 될 수 있었고 또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실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요한을 해꼬지 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적인 견해는 틀렸지만 이 요한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세례 요한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하는 헤롯의 마음 속에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을 해치면 천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인격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요? 세례 요한이 “하나님 내일 헤롯을 만날 텐데 내가 그래도 그 정도는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일 당장 인격을 주옵소서” 그래서 생겨난 인격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은사는 한 순간에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은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한 순간에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격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도 않고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고매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면서 우리는 내일 저녁에 저 인격이 사라지면 어떻할까라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 않도록 거룩한 본성 속에 남아서 성령과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속 행사되는 것이죠. 세례 요한은 신비하기 짝이 없는 인물입니다. 신학자들은 세례 요한의 출생을 주전 4년이나 혹은 7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30세 가까이 될 동안에 공중에 나타나지 않고 광야에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의 공생애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짧은 기간이었고 성경에 나와 있는 기록에 의하면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왕궁이나 거리에서나 지도자들에게 수시로 나타나서 사자처럼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몇 편 설교하고 그리고 그 목이 잘려져 죽은 순교자의 불과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그 많은 세월들은 몇 편의 설교를 꽃피우기 위해서 치렀던 연단의 시기였다고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광야의 긴 세월 동안 그가 뭘 하고 지냈겠습니까? 설마 꿀이나 따 먹고 메뚜기나 잡아 먹으면서 놀지는 않았겠죠? 누군가 스승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자기 동족의 역사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사모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그 날을 기다리며 연단되어 갔습니다.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임하게 하셨고 아무도 돕는 자 없고 칼 한 자루 들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담대하게 그 시대 앞에 나타나서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으로 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외쳤으니 700년 전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고 그의 고고한 외침은 잠들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려 깨워 그리스도 예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는 회개의 새 길을 만들었으니 우리는 그의 이름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고 부르는데 바꾸어 말하면 회개 요한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광야에서 외로움을 친구 삼고 고독을 이웃 삼아서 철저하게 자신을 복종시킨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연단의 세월들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우리 모교인 총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입학하기 힘드니까 여러분들의 자부심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시겠죠.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목회는 총신 나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한 해 동안에 5000개의 개척교회가 문을 닫는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또 그만큼 생겨나긴 하겠죠. 어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개척을 믿음으로 하라고 그래서 믿사오니 하고 문을 확 열었더니 낭떠러지”라고 그러더만요. 그게 현실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아주 훌륭한 대학을 나오고 그리고 준비도 많이 했습니다. 교회 개척을 하신다고 그래서 한 번 만났습니다. 교회 개척을 먼저 해 본 사람으로 내게 이러이런 걸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답을 해 줘야 되나 강대상이라도 하나 해 줄까 뭘 좀 도와줘야 되나 그랬는데 상당한 돈을 가지고 아주 빌딩을 뭐 사서 그렇게 교회를 개척하여 그리고 뭐 내게 무슨 도움을 구하거나 그러는 것 전혀 필요를 못 느끼시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한 2년 정도 지났는데 생각처럼 그렇게 교인이 많이 모이질 않았어요. 2년 후에 다시 만났는데 굉장히 온유해 지셨어요. 그래서 “목사님 2년 동안 교회 개척해 보니 어떻습니까?” “많은 걸 느꼈습니다. 김 목사님..” “어떤 걸 느끼셨습니까?”“저는 부목사 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안 되는데 이유가 있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아이그 저 교회는 목사가 설교를 저 따위로 하니 교회가 될 리가 있나 저 교회는 아이구 저기는 교인 성경공부를 저렇게 후지게 시키니 교회가 저렇게 될 일이 있나 목사가 저렇게 행정을 못 하니까 교회가 비비꼬이지 전도를 그렇게 하는게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는 살아왔다는 거죠. “그랬더니 어떻습디까?” 그랬더니 “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김 목사님” “뭡니까”“개척교회는 교회는 이유가 있어서 안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원래 안 되는 겁니다”다만 되는 것만 이유가 있고 그래서 자기는 후배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대요. “개척교회 안 되는 거다”이렇게 하고 자기에게 될 이유가 있는가 그거를 생각하라는 거예요. 이 헤롯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세례 요한이 불우이웃을 도왔다던지 아니면 데모를 한 번 했다던지 하는 어떤 행동을 보고 헤롯이 인상을 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 것 안 하고 있어도 의로운 사람은 그 안에서 의로운 그 향취가 풍겨나고 거룩한 사람은 그 사람 안에서 이미 아무말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웃고 있어도 죄악된 것을 생각하는 내 마음에 진상들을 정죄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놀라운 인격의 향기는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죠.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서 광야에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두셨던 이유..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레미야처럼 아주 어렸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임하게 아니하시고 그 긴 세월 동안에 쓰라린 연단을 고독 속에서 받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광야에서 그는 또 하나의 신학교를 졸업했던 거예요. 그게 바로 소위 제가 얘기하는 광야의 신학교..그래서 총신 선배들이 목회를 잘 하는게 아니라 총신 다니면서 신학교 하나 더 다닌 사람들이 목회를 잘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무인가 신학교인데 광야 신학교야. 문교부 졸업장도 없어요. 그런데 동창생끼리는 동창생을 알아봐. 그 동문에 잘 안 끼워줘. 그게 문제에요.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 시대를 움직였던 주님의 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모세의 미디안 광야에 40년, 사울이 회심하고 간 곳이 어디였죠? 아라비아의 광야였어요.예수님이 공생애 들어서면서 가신 곳이 유대 광야였어요.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그리고 사도 요한은 밧모섬 그 절해 고도의 외로운 섬에서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시기를 갖다가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일에 대한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고독의 사람이 되어야 되는 거에요. 그 속에서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몸부림 치는 그런 기도의 시간이 없이는 결코 이렇게 거룩하고 의로운 인격으로 변모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보내신 편지를 우리 학교에 계시던 어느 교수님이 책으로 펴내셨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모으신 그 교수님의 정성도 지극하지만 그 필체를 다 보면서 편지마다 박윤선 목사님이 권면하신 놀라운 일치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아무개 목사. 기도 많이 하세요.당신 유학가서 기도 안 하면 자유주의자 됩니다.” 사실 들으면 얼마나 우습습니까? 뭐 기도 안 한다고 자유주의자가 되겠습니까? 목사님은 아주 등식으로 여겼어요. 기도 많이 하면 개혁신학자, 기도 안 하면 자유주의자..그러면서 편지마다 자기 제자에게 기도 많이 하십시오 기도 안 하면 당신은 자유주의자 되고 맙니다. 편지마다 편지마다.. 편지마다 그렇게 썼어요. 박윤선 목사님 가까이 모셨던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좀 평범한 분은 아니었다고 그래요. 차를 타고 학교 일로 어디 가시면서도 계속 중얼 중얼 중얼 하신대요. 하나님 이 학교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도와 주시옵소서.. 은혜를 주시옵소서..그 노인네가 말이지..그게 바로 이 그러한 생활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서서히 우리를 주님 닮은 인격으로 변모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나다이엘 호든의 큰바위 얼굴을 읽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돈을 많이 모은 사람도 아니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도 아니고 정권을 쥔 사람도 아니고 시골에서 자란 촌부에 불과하지만 결국은 그가 전설적인 큰 바위 얼굴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늘 그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도 바라보면서 저런 훌륭한 사람이 언제 우리 마을에 나타날까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표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묻는거죠. 저희 교회 교역자를 면접할 때는 항상 우리 부교역자나 장로님들이 당신 스승이 누굽니까 라고 묻습니다 라고 묻습니다.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교역자 후보생들이나 신학생들이 자기 스승의 이름을 대지 못 해요. 왜 대학에서 4년을 공부하고 총신에서 3년을 공부하고 심지어는 대학원에서 2년을 공부해서 5년씩 공부했으면 누군가가 스승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스승이 없어요. 또 어떤 사람은 자기 멘토라고 그러고 사람 이름을 죽 대는데 멘토끼리 신학사상이 정반대인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 제자도 아니라는 이야기죠. 말하자면 칼빈도 제 멘토고 바르트도 제 멘토입니다. 그러고 얘기하죠. 그러니까 뭐 그러고 그러는거죠. 그러면 안 되지 않겠어요? 그런 식으로 되어가는 거예요. 그게 결국은 뭘 보여주냐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는 그런 거 찾는게 촌스러운 거예요. 왜냐면 자기가 각자 하나님이니까 자기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주체성이 있는 사람이죠. 그런데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무슨 멜기세덱도 아니고 뭐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아니던데 뭘 그러냐 이 얘기에요. 그래서 내가 항상 하는 얘기가 그거에요. 살아있는 사람 중에 당신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없고 머리 숙여서 배울 사람이 없으면 그거는 죽은 사람 가운데서라도 찾아라. 기독교 사상 2000년 동안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많이 있었을텐데 그 중에서라도 한 사람 찾아서 존경하라 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또 살아있는 사람은 교만해서 존경할 수 없지만 죽은 사람은 책으로 통해서나 그 분의 제자가 될 수 있는데 책 읽긴 또 싫잖아요. 그러니까 어차피 스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죠. 여러분들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을 한 마디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면서 이 신앙이 전파되어 나가는거죠. 그래서 옛날 평양 신학교 혹은 평양 신학교 이전에도 신학교육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땐 어떻게 했는지 압니까? 그냥 이렇게 아무나 나와서 교회에서 그저 행정실에서 찍어주는 도장으로 지원하는게 아니라 목사님 소명 받으면 먼저 목사님 따라 다니면서 가방 들고 다니면서 조사 노릇 하면서 심방도 하고 그 다음에 죽은 사람 가서 염도 하고 전도도 다니고 핍박도 받고 그러다가 밤중이면 들어와서 호롱불 켜 놓고 목사님 밑에서 강도학이란 그 다음에 목회학이란 하면서 불러주면 그거 받아 쓰면서 다듬이방 위에서 배우다가 나중에 신학교가 생겨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조사는 신학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목사님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분에게 가르침을 받은 한 사람의 도제로써 배우면서 제자가 되어서 그 분처럼 훌륭한 목회자가 되고 싶어서 신학교를 가는 형태였거든요. 지금 그런게 어디 있느냐 이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부지런히 살아있는 좋은 선생님들을 찾고 그 분들에게서 훌륭한 것들을 배우도롞 노력해야 된다라고 하는거죠. 작은 흠집이 없는 선생님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흠집 하나 있다고 해서 자기의 생애에서 그 말하자면 그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멘토를 마치 고용인 해고 하듯이 이렇게 툭툭 목을 잘라선 그 사람 자신이 쓰레기 같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나는 그래서 여러분같이 신학생이나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스승이 없는 신앙은 유통기간과 제조업체가 표시되지 않은 먹거리와 똑같다..여러분들 유통기간도 표시 안 돼 있고 상표도 없는 그 투명한 비닐 봉지에 들어있는 언제 제조된 지도 모르는 그 먹을 것들을 과자 같으면 여러분 식품점에서 사먹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난 만나면 항상 물어보는게 당신의 정신적인 신학적인 멘토는 누구냐 이거에요. 누구냐..칼빈입니다. 그래? 칼빈이냐 뭘 읽었느냐..기독교 강요 여러 번 만져 봤습니다...그러면 안 되지.. 적어도 그 사람 멘토라고 하면 그냥 닳도록 강요를 읽고 그 분의 칼빈 오페라가 얼마나 많아요. 내가 진짜로 그 분의 진정한 멘토라면 그 분의 이야기를 딴 사람 통해서 듣고 싶겠어요 직접 귀를 기울이고 듣고 싶겠어요? 대답해 봐요. 직접 듣고 싶지 두 다리 세 다리 건너서 듣고 싶겠어요? 그거를 라틴어도 배우고 중세 프랑스어도 배워야지..그게 그걸 못 하면 칼빈의 멘토리가 될 수 가 없다 그 뜻이 아니라 진짜 사랑하면 그 정도의 열망이 생겨야 되지 않겠어요? 존경하세요. 저는 저는 누가 뭐라고 투덜거려도 저는 총신에 보내주신 것을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에요. 들어와서 학교 다닐 때는 저도 투덜거리는 사람 중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훌륭한 선생님들을 몇 분 만났고 지금도 그 분들 생각하면 가슴에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그런 훌륭한 분들이 계셨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우린 어떤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의로운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법 대로 사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정직이 아닐까요? 제가 신학교 교수가 된 다음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수는 머리가 나빠도 이 본능적인 감각을 몇 개 가지고 있는데 출석부의 학생들 이름과 그 다음에 수천장의 레포트를 읽어도 언젠가 본 듯한 레포트를 식별해 낼 수 있는 그런 은사가 있습니다. 죽 봤는데 분명히 이 레포트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레포트에요. 그래서 조교와 함께 400장이 넘는 레포트를 복도에 깔아놓고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의 레포트를 써서 세 사람이 레포트를 냈는데 이 사람은 명조체, 고딕체, 필기체에요. 이게 이게 신학교에서 이러면 됩니까? 신학교 채플 시간에 특별한 일이 있어서 30만원 짜리 카메라를 들고 와서 옆에 놓고 예배를 드리다가 깜박 잊고 나갔다가 15분 만에 왔는데 없어졌습니다. 이 신학교가 이럴 수 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벌써 23년 전 일이네요. 24년 전 일이네요. 그 때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겠지만 학생들이 컨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마음이 상해 하는 학생들이 있었어요. 어느 한 클라스에서는 목사님이 학생들의 인격을 믿고 아너 시스템을 도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명예롭게 너희들 스스로 시험을 보고 시험지를 걷어내라 그랬는데 마침 그 시험이 히브리어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니 히브리어를 여러분 해 봐서 알지만 하는 사람은 안 하는 사람은 전혀 안 하지 않습니까? 이거는 뭐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이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너도 보고 나도 보고 해서 웃기지도 않는게 이 사람이 답을 틀리게 썼는데 베낀 것도 틀리고 그 다음 베낀 것 틀리고... 이 때 어느 학생이 뒤에서 그랬습니다. 이러지 맙시다. 보고 쓰지 맙시다. 학생이 강력하게 항의를 했어요. 저 앞에서 더 큰 소리로.. 보고 쓰지 말자고 그런 얘기 하지 맙시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학생 중에 뜻이 있는 몇몇이서 교수님들도 지금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여기 학교 구간 로비 앞에서 취팅 추방 서명 운동을 했어요. 주장은 아주 획기적이었어요. 그 후로는 아무도 그것을 못 했을거라고 봐요. 취팅하다 걸리면 교계 일간지에다 내자 하고 그리고 당회에 통보하자.. 그게 관건이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돈 모아서 시험 치르고 끝나서 학생들의 명단을 기독 신문하고 몇 개의 종교 신문에다 내고 그리고 당회에다가는 정식으로 학교 이름으로 공문을 해서 당신 교회에서 추천한 아무아무개 전도사가 무슨 과목 교수님 시간에 취팅을 해서 학교에 걸렸습니다라고 보내자..학교에서 안아준다면 우리 원우회에서라도 하자..결국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그 주도했던 학생 3명이 저 학교 뒷산에 끌려가서 죽도록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았어요. 그리고 끝났어요. 그리고 그 학생들 둘은 자퇴하고 나갔어요. 극복했나요? 극복했습니까? 오늘날 터지는 이 뉴스에서 나오는 이 엄청난 사건들이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서 서서히 싹이 자라는 것이에요. 왜 우리는 그 훌륭한 하나님 영광을 위한 개혁신학을 했으면서 삶은 이렇게 개혁주의적이 아닌지 이해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 꼴이 꼬리를 물고 떠도는 그 돈에 관한 수많은 추문들, 무슨 교회든지 어떤 단체이든지를 막론하고 마지막에 들어가보면 그 돈에 대한 부정문제, 끊임없는 비리의 의혹들, 그리고 끊임없는 논쟁들,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겪습니까? 교회에서도 이런 일은 예외가 아니고 늘 어느 목사님이 비판을 받는 그 뒤에 보면 반드시 이 돈에 대한 부정직의 문제가 나와요. 내가 보기에는 그럴만한 분들이 아닌데 왜 그럴까? 결국은 처음서부터 결론 내리는 건 처음서부터 우리는 뭔가 합리적인 생활을 하는 철저한 윤리훈련이 안 돼 있는 것이에요. 잘못된 거죠. 그래서 이런 얘기하면 좀 뭐합니다만 그래서 저는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교회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 커져요. 한해에 그래도 6,70억 정도 돈을 쓰니까.. 제가 사회생활을 좀 해 본 사람으로써 평신도들이 주일날이나 와가지고 예배 드리는 사람이 70억씩 되는 돈을 다 감사한다고 하는 건 불가능하죠. 그러니까 그것이 자의적으로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당회에서 의결해서 연말이면 공인 회계사 감사 받습니다. 공인 회계사 사무실에서 한 일곱 명 나와서 일 주일 동안 샅샅이 감사해요. 교인들에게 직접 보고하게 책임질 사람 책임지고 물어낼 사람 물어내고..아니 왜 떳떳하게 못 하냐 이겁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 하면서 거기에서 몇 억씩 돈을 호주머니에 챙겨 갖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겟으면 교회 돈통에서 몇 천만원씩 일 억씩 꺼내서 목회자가 가지고 가는 목회자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하나님 앞에 옳지 않죠. 근데 왜 그렇게 자신 있게 못 하냐 이거죠. 그것이 어느 날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신학교 다닐 때 그런 문제 있어서 칼날 같은 정신에 서도 나중에 실제 목회 현장에 보면 칼날 같이 그렇게 못 합니다. 교회를 개척해서 생사 고락을 같이 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 목에다가 원리 원칙에 어긋난다고 칼을 대겠어요? 해야 되지만 못 할 때 많거든요? 본인 자신이 아예 그런 칼이 없어요. 어떻게 되겠느냐 이거죠. 제가 하튼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 취팅이었습니다. 신학교 교수가 됐어요. 학생들하고 한판 벌어졌습니다. 그게 뭐냐면 아니 시험을 보러 들어갔는데 책상에 새카맣게 낙서를 해 논 거예요. 그 보면 시험볼 내용을 여기다 노트 한 학기 필기를 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시험보러 앉아있는 학생들을 전부다 일어나라 했어요. 다 일어나고 그 다음에 시꺼멓게 칠한 책상들은 다 빼 내고 아무것도 안 칠한 책상을 꺼내놓고 그리고 학생들을 앉게 하고 자기 원래 앉았던 자리를 바꿔서 시험을 봤어. 그래도 컨닝을 해요. 그래서 그 학생들 둘을 잡아서 그래서 이제 그 졸업을 안 시키려고 영점 처리를 했어요. 그러고 처벌해 달라고 학생과로 넘겼어요. 그랬더니 그 다음날 아침 9시부터 와 가지고 교수실에서 진을 치는 거예요. 안 가는 거예요. 잘못했다는 거예요.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거예요. 근데 잘못했다는 표정은 전혀 진지하지 않고 한 번만 봐 달라는 건 정말 간절해요. 그래서 내가 안 된다 그랬어요. 하튼 삼일 동안을 9시부터 5시까지 안 가는데 이 사람이 거의 돌 지경이더라구. 강의가 계속 있으니까 연구실에 안 있을 수도 없고 학생들하고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삼 일째 되던 날 그 중의 한 녀석이 뭐라고 하냐면 “봐 주십시오” “안 된다 난 너희들에게 선생이고 이건 옳지 않는 거다. 개선의 점이 없다 안 된다” 근데 정말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그러면 봐 줄까라고도 생각을 했어요. 근데 티끌만치도 없고 재수없어서 걸렸다는 표정 밖에는 없어요. 그러더니 자기들도 마음이 상했겠죠. 독이 올랐어. 막 대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잘못하면 치겠더라고..그러더니 뭐라고 그러냐면 결정적인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럼 교수님 하나 물어보겠습니다”“그래 물어봐라”“ 교수님도 신학교 다녔죠?”“다녔다”“그럼 교수님은 시험 시간에 살짝이라도 보고 쓴 적 없습니까?”그래서 내가 그랬어요.“너 같은 놈이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를 것 같아서 내가 7년 동안 한 번도 안 했다”준비하고 산 사람이에요. “없다 하나님이 여기 계셔도 난 똑같은 대답 할 수 있는데 없다 한 줄이 아니라 한 문장도 그런 적 없다 내 회심하기 전에 고등학교 때 내가 취팅했다 근데 내가 신학교 와선 안 했다 지금껏 없다 어쩔래?”“정말 없습니까?”“없다”“레포트도 베껴 쓴 적 없습니까?”“없다 없다니까” 여러분 만약에 그런 위치가 됐을 때 저 같은 똑같은 질문을 받을 때 없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 상전 걸리는 거예요. 하루 아침에 없다 그러는데 이 속에서 “있잖아” 양심이 그러면 어떻해. 그렇지 않으면 권위로 눌러야지 자식이 어디다가 말대꾸야..그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고신의 총회장을 하시고 고신과 합동이 합쳐졌을 때 만장일치로 총회장에 추도됐던 75년도에 돌아가신 한상동 목사님이 계셔요. 그 분의 이야기를 측근에 있었던 목사님으로부터 상세하게 들었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이 뭐 본과도 아니고 예과에 들어가셔서 공부를 하셨는데 그 뭐 학교 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하셨으니 얼마나 힘들게 신학 공부를 하셨겠어요? 다른 신학과목이야 하다가 안 되면 은혜롭게 설교라도 한 편 쓰고 나가면 설마 0점이야 주겠어요? 선교사님이 영어 시험 문제를 낸 거예요. 영어 시험 문제를 냈으니 아무리 성령 충만한 한 전도사도 뭐 알아야 I am a boy를 쓰죠. 그래서 주여 주여 이러고 있으니까 옆의 학생이 시험지를 자꾸 옆으로 밀어주는 거예요. 이렇게..얘가 왜 이러나 그러고 봤더니 이게 한상동 목사가 주님을 계속 부르니까 주님 찾지 말고 내 시험지나 봐라 그리고 시험지를 보여줘요. 그 의미를 딱 알고 한상동 전도사를 딱 엎어놓고 뒷산에 올라가서 회개기도 했다는 얘기 아닙니까. 내 옆에 있는 친구는 학교를 함께 다니면서 3년 동안 나 한전도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안 신앙의 동지인데 내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으면 이 시험 시간에 자기가 보여주면 내가 받아쓸 수 있을 거라고 평소에 나를 생각했으니 내가 평소에 얼마나 경건하게 살지 못했으면 이 친구가 나를 그렇게 평가했습니까 그리고 뒷산에 올라가서 회개를 했다는 거예요. 그 영어를 잘 해서 한 목사님에게 시험지 보여준 목사님은 역사 속에서 잊혀졌어요. 근데 이 목사님은 시험지 영어 시험 0점 받은 학생이 그 학교에서 학장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죠. 후일 하나님이 그 학교를 맡기셔서 그래서 그 학교에서 학장이 되셔서 교회를 섬기셨어요. 이게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원리에요. 아니 너무 놀았으면 그러면 당연히 한 과목 과락하고 한 학기 연장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제가 교수할 때마다 시험시간에 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학생들이 교회를 섬기랴 또 아르바이트를 하랴 바쁘게 다니는 학생들입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잘 깨닫게 하셔서 시험지를 잘 쓸 수 있도록 총명을 주옵소서” 하면 학생들이 “아멘” 그래요. 그 다음 기도 “그러나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학생이 요행으로 시험 문제가 나와서 뜻밖에 좋은 점수를 받게 하지 마시고 애써서 많이 공부했는데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 해서 마음 아파하는 학생들도 없도록 행한 대로 갚으옵소서” 하면 아무도 아멘을 안 해. 이게 틀린거죠. 그래서 그렇게 정직한 속에서 훈련을 받는 것이 몸에 벨 때 목회 현장에 나갔을 때 오랫동안 내려오던 관행인데도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된 거예요. 그래야 개혁이 되는 것 아니에요. 그 밥에 그 나물이면 어떻게 개혁이 되겠어요. 그런 정신을 신학교에서 칼날같이 배워야 돼요. 여러분 학교 다니면서 여러분 맘대로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욕심만 버리면 여러분 맘대로 할 수 있어요. 자기 신앙의 양심에 어긋나는 그런 행동을 하도록 강요 받는 체제는 난 신학교 안에는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있다면 여러분들이 고쳐 나가야죠. 뭐가 있습니까? 목회 현장에는 많아요. 많아요. 그래서 그것돠 타협하지 않으면 때로는 자기가 사임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질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여기서 신앙의 양심을 따라 살았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이 학교에서 퇴교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때에 이것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진리르 향한 야성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라면 그 감각대로 자기가 믿는 그 믿음대로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용기 같은 것들을 여기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죠. 배우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닙니다. 최근에 이런 여러 사건들이 터지면서 한국교회는 굉장히 위태로운 때를 만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시켜서 전도 내보내면 사람들이 힐끗 한 번 쳐다보고 개신교에서 왔수? 하고 문을 쾅 닫아 버려요. 그게 오늘날의 현실이에요. 그러니 우리 지도자의 인격과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요새 문제되고 있는 이 목회자들의 지나친 사치한 생활은 정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각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저는 참 많이 듭니다. 물론 그 사람들의 편파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우리들이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만약에 그렇다고 해서 혈기를 부리면 맨 처음 시작할 때 얘기했던 그 제직회의 때 문을 박차고 들어온 전도사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겠지만 자성의 기회로 많이 삼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터키의 성지 소피아 성당은 원래 거기가 요한 크리소스톤이 설교하던 자리였습니다. 이 사람은 그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신학적으로 탁월하고 말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원래 한적한 시골에서 목회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분의 명상이 워낙 자자하니까 콘스탄티노플 귀족들이 이 훌륭한 분의 설교를 시골 무지랭이들이 들어서 어떻하겠느냐 우리같은 지성인들이 들어야지 하고 이 분을 콘스탄티노플로 초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단한 실수였다는 것이 불과 몇 달 지나지도 않아서의 일이었습니다. 오자마자 그는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을 하고 교회의 벽에 붙어 있던 수많은 금붙이과 은붙이, 폐물들을 다 뜯어서 그래서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사서 나눠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치스러운 귀족들의 생활과 그 이 왕실의 생활들을 적나라하게 복음으로 비판했습니다. 결국은 가시방석처럼 된 그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이 사람을 살해하고 맙니다. 그래서 본투스라고 하는 그 곳에서 결국은 유배를 가면서 그 길거리에서 결국 물을 먹지 못 해서 기진해서 결국은 탈진해서 순교를 하고 맙니다. 그 때 그가 남겼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아, 네가 정녕 나를 버리려느냐 그러면 나도 너를 버리노라” 유명한 크리스토스톰의 말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그 귀족들의 주일을 지키지 않고 마차 구경 같은 것들에 대해서 아주 정면적인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비록 작은 체구의 사람이었지만 마음 속에 사자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어디에서 그런 놀라운 힘이 나옵니까? 욕심을 버린 삶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목회자들이 금욕주의적이고 지나치게 청렴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신학적인 견해에 대해선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아주 이상한 교인들의 심리적인 요인이 자리잡고 있어요. 자신들은 그 성경에서 지시하고 있는 엄격한 삶,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세상의 것을 버리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하면서 자신들이 못 사는 삶을 목회자에게 심리적으로 투사해서 금욕주의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누리고 싶어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목회자가 무슨 진리를 선포하느냐에 관계가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차를 프라이드를 타고 다니네에만 관심이 가는 거죠.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했듯이 어디에서도 지지받을 수 있는 가난에 대한 미덕을 성경이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런 시류에 의해서도 우리들이 그렇게 과도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은 자기의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셔서 당신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누리도록 주셨습니다. 그러므로우리가 주님 안에서 얻은 것들을 누리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덧붙였어요.“그러나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왜 문제가 되는 것은 탐욕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목회자들이 그렇게 과다하게 탐욕을 부리면서 재산을 소유하고 그리고 과도한 사례비를 받아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정도가 돼야 할 그럴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삼시 세끼 먹고 살고 아이들 그저 커다란 허물 없이 교육 받을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노년에 부부가 살 수 있는 집 정도 있으면 족한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직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도 그 정도만 노후가 되면 만족하게 삽니다. 최근에도 우리 교단에서 몇 개의 교회들이 50억을 내 놔라 10억을 내 놔라 20억을 안 주면 절대로 못 떠난다 이러면서 싸우는 교회 여럿을 알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말로가 이래야 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도 안 하는 이러한 일들을 왜 합니까? 여러분 이러한 현실을 볼 때 의로운 분노 같은 것 일어나지 않는다면 잠재적으로 여러분도 똑같이 그럴 가능성을 지금 안고 있는 거죠. 왜 우리는 그래야 되느냐 말이죠.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신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어요. 목회를 하고 계속 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나는 한 가지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걸 감사하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것을 감사하게 돼요. 정말로 말이죠. 그냥 입에 바른 말이 아니라 정말로..이 얼마나 훌륭한 신학인지 알 수가 없어요. 교수님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알미니안 신학 공부해 봐도 유치원이에요. 한꺼풀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두 꺼풀만 벗기고 나면 모순 덩어리에요. 그러면 우리들이 물려 받은 이 정통적인 개혁신학이 얼마나 훌륭한 유산인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삶은 그렇게 개혁적이지 않다 이 얘기에요. 왜 그러냐 이 얘기에요. 우리가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렇게 피땀 흘려서 수많은 생애를 살면서 그렇게 눈물겹게 헌신해서 교회를 일구고 정말 훌륭한 분들이거든요. 그리고 정말 그 분들은 저와 여러분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젊은 시절을 하나님 앞에 헌신했던 분들이에요. 사실이에요. 조금도 과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흉내내라고 그러면 못 할 거예요. 그런데 왜 왜 우리의 마지막은 그래야 되냐 이거죠. 왜 우리들이 그리해야 되냐 이 얘기에요. 돌아가셨으니까 이름을 대도 괜찮을겁니다. 저를 신학교 시절에 성경을 가르쳐 주신 목사님 가운데 우리 학교 나오시진 않았지만 배명준 목사님이라고 통합측 교회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남대문에 있는 교회를 목회하시던 목사님이었고 교인이 한 5000명이나 모이는 하나님이 잘 세워주신 교회였습니다. 그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일생 지워질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분이 한 교회에서 42년을 목회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유아세례 준 사람을 장로 안수까지 줬다고 하니까 실로 긴 세월을 목회하신거죠. 때가 되어서 목사님이 은퇴를 결심하셨습니다. 은퇴를 앞두고 교회에서 큰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뭐냐면 은퇴할 때 목사님이 “나 이제 물러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랬더니 은퇴준비위원회가 생겼어요. 당회에서 결정하기를 “목사님이 이렇게 이렇게 대접을 해 드리고 그리고 45평 아파트를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45평이 그저 별거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45평은 보통 사람이 그런게 있나 할 정도의 아파트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한 100평 된다고 봐야죠. 그 얘기를 듣더니 목사님이 펄쩍 뛰시면서 “이제 우리 두 늙은이밖에 안 남았는데 자식 집에 얹혀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이 노인네 둘이서 45평 아파트에서 뭐 하냐 나의 걸어가는 길을 욕되게 말라 나 사택 필요없다 나 우리 아들 집으로 들어가겠다” 장로님들이 난리가 났어요. 장로님들이 어느 날 찾아가서 얘길 했어요. “목사님이야 그렇게 은퇴하고 가시면 청빈한 목회자였다고 사람들이 높이 존경하겠지만 우리 장로들은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45년 동안 소를 부려 먹어도 마지막에 그렇게 안 내보낼텐데 42년 동안을 실컷 부려먹고 마지막에 자식들 사는 곁방으로 두 노인네를 내쫓았다고 하면 우리 교회의 명예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착한 목사님이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마음이 꺾이기 시작하면서 고민에 잠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시고 어느 날 안면에 웃음을 띄고 당회에 나타나셨어요. “제가 기도 많이 하면서 장로님들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13평을 주시면 받겠습니다. 13평이면 우리 두 노인네 살기에 충분합니다.”당회에서는 “그럼 우리도 한 번 양보할 테니 32평으로 가십시오.” 결국 해결이 안 나는거야. 그러다가 나중에는 마지막에 목사님이 합의를 보기를 19평 연립을 받기로 합의를 봤대요. 깨끗하게 그렇게 가셨어요.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얼마나 설교를 잘 하시는지요 그런 정신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가야 돼요. 그 때가 벌써 30년 전이니까 그대로 할 순 없겠죠.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항상 그런 정신을 우리들이 가지고 이 시대를 향해 거스릴 수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지금은 우리 학교를 은퇴하셨습니다만 제가 이 학교를 다닐 때는 이상근 목사님 조교를 하면서 다녔습니다. 이 주석을 쓰시는 이상근 목사님이 아니십니다. 동명이인이신데, 그 목사님이 이제 은퇴를 하셨죠. 오래 전에 은퇴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래서 LA에 갔을 때 그 분을 일부러 수소문을 해서 찾아뵜어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나니까 저를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보여주던지 디즈니를 보여주겠대요. 그래서 나 필요 없고 내가 꼭 뵙고 싶은 선생님이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그 분을 좀 뵙게 해 달라 그랬어요. 이름은 적어 한자를 적어 드렸더니 수소문을 해서 찾았어요. 그래서 거기를 찾아 갔습니다. 그 노인네들이 사시는 그 아파트에 기거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거기에 찾아가서 94이세요. 그래서 이제 제가 쓴 교리책 한 권을 드리면서 절을 했어요. “목사님 제가 이 때 이 때 목사님 조교하던 김남준 전도사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꽃다발 바구니 하나 하고 선물 하나를 드렸어요. 그 때 처음에 못 알아보시더니 나중에 기억이 나시는지 반가워 하세요. 그러면서 순간에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그 굉장히 건강하셨는데 이제는 무릎이 안 좋으셔서 운전을 못 하셔서 이것을 짚고 다니시고 7년전에 사모님도 돌아가셨어요. 혼자 그 방에 계셔서 사회복지사가 와서 일주일에 이틀에 한 번씩 와서 봐 주는데 제가 그랬어요.“목사님 여기 이렇게 홀로 계신데 얼마나 외로우셔요?”그러니까“목사님 외롭긴 뭐 혼자 있나? 우리 주님과 함께 있는데 ” 그러면서 웃으시는 거예요. “드러 누워서 책도 보고 기도도 하고 하면서 지내지..”가슴이 그렇게 눈물이 나서 울었어요. 그 분이 말입니다. 아시는 분 얼마 안 되는데 그 분 가까이 계시는 분한테서 직접 증언을 들었어요. 30년대에 존 머레이 밑에서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하셨어요. 그 선친이 부산의 큰 지주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공부하고 오셔서 고신에서 교수생활을 하셨는데 학교나 뭐 이루 가난하기 말이 없었습니다. 채플실에 기도하러 들어갈라치면 학장님이 거기서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기도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하나님 학장인 제가 부족해서 직원들하고 몇 명 되지 않는 교수님들 월급도 못 드리고 있습니다.”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세요. 그러면 끝나고 사무실에 내려가면 집문서 하나 갖고 가서 학장님이 “이거 집문서인데 이거 팔아서 월급이라도 주시오” 집문서 땅문서 하나씩 하나씩 학교에 갖다가 바쳤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으면 학교든지 교회든지 무엇이든 호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 경우에는 한 번 이런 어른들의 생활의 본을 한 번 눈여겨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총신을 졸업하신 목사님 가운데 김예진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이 분은 후함교회(?) 목회 하시다가 순교하신 분입니다. 일서에 의하면은 6.25가 나서 이제 기도원에서 나라를 위해 3일을 금식하고 기도하고 내려오시다가 나라를 위한 염려를 다 이야기하는데 알고 보니까 옆에 말한 사람이 빨치산이었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신고를 해서 광주까지 경기도 광주까지 끌려와서 피투성이가 된 가운데 결국은 마지막에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셨죠. 그 때에는 그 언덕 위에 있는 그 동네들이 남산아래 가난한 거지들 모여서 사는 동네였습니다. 나가서 그 당시에도 열심히 부흥회를 인도하시면 사례금을 주셨대요. 그러면 그것을 갖고 집에는 끼니가 간 데 없는데도 집으로 바로 안 들어오고 산 동네 방문해서 김 집사 집 이 집사 집 방문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쌀을 팔아주고 그리고 당신은 빈 손으로 들어오셨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런 목회자의 삶입니다. 자기를 다 버려서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 목회자의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날 여러분들이 지도자가 되었다고 해서 한 순간에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서서히 서서히 그런 사람으로 가능한 삶에서 끊임없이 훈련받아 가는 가운데 그런 사람으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화되지 않은 우리들을 결코 홀로 버려두시지 않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하시면서도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고난을 주셔서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의 겸비함을 배워 서서히 우리의 모난 인격이 변화되기를 그렇게 하나님께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학교 다니는 동안 가능하면 고난을 많이 받으십시오. 고난 그 자체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힘이 없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은혜 가운데 있지 않으면 성격이 일그러지고 포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비인격적인 목회자 밑에서 훈련을 받으면 그렇게 상처를 많이 입었는데 후일에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이걸 심리학에서 보복적 모방심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깊이 잠기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여러분들이 변화되면 시인이 고백한 것과 같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엔 그릇 행하였거니와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하는 거죠. 저는 신학교 3년을 졸업하고 나서 그 이듬해 다음해에 뭐 생애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면서 사실은 오늘날 설교자의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학교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 여기에서 강의하시던 박희천 목사님 교회 내수동 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목사님 워낙 인격적이어서 예전에 있던 교회 하곤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인격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황송한 교역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공평하신지 그렇게 좋고 인격적인 목사님을 만난 그 교회에서 사실은 가장 가슴 아픈 일들을 많이 당하게 하셨습니다. 햇수로 그 교회에 7년을 있었는데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뭐 부러울 것이 없이 그렇게 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는데 이게 중학교 학생들을 맡겨주신 거예요. 갔는데 애들이 전혀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이에요. 뭐라고 설교를 해도 붙잡고 상담을 해도 절대로 회심을 안 하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신학으로는 중생과 회심이 없으면 지옥으로 가는 애들인데 내가 여기에서 이년 삼년 몸을 담으면서 이 영혼을 돌보라고 하나님이 보내셨는데 변화는 커녕 회심도 없이 이 아이들을 사역하다 떠난다면 하나님 앞에 내 책임은 어떻게 질까 하는 쓰라린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때 마음에 각오를 담대히 하고 제가 토요일마다 철야로 교회에 갔습니다. 추운 겨울 밤에..그래서 가서 예배당 공간을 사찰 집사님이 청소를 하셨지만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웃통을 벗고 빠께스에 물을 길어다가 한 시간 반에 걸쳐서 매주 청소를 했어요. 온 몸에 땀이 잔뜩 흐른 다음에야 마지막에 강대를 닦으면서 기도 했어요. “하나님 제가 여기서 내일 아침에 설교 합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내가 아는 신학으로는 이 아이들에게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닦았어요. 눈물이 확 쏟아져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셨는데 대체 이 아이들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길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않는 것일까..그리고 거기에 엎드려서 밤새도록 기도했어요. 거의 2년 반 정도 그렇게 했어요. 기도하다 잠이 들면 자고 안 도면 할 수 없이 세수하고 새벽기도를 맞이하고 이렇게 지냈어요. 그래도 변화되지 않아요. 근데 후에 깨닫게 된게 뭐냐면 하나님은 그 나는 그 아이들이 변화되지 않아서 울었는데 알고보니까 하나님은 내가 변화되지 않아서 울고 계셨던..이러한 극렬한 고통이 아니면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돌 같은 아이들은 내 앞에 세워셨던 거예요. 결국은 한 1년 지난 다음에 부서를 옮기긴 했지만 하나님의 큰 부흥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혼들이 그 때 회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리가 영 안에서 선포될 때 영혼들이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그리고 그 악한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지 모두 경험 속에서 생생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87년도에 민주화 투쟁이 한창 격렬할 때 극심한 고난에 처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얘기만 하고 제가 마치겠습니다. 직장 생활하고 퇴직금 탄 걸로 전세를 얻어서 살았는데 갑자기 사기꾼한테 걸려서 길거리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7년만에 하나 낳았는데 끊임없이 최루탄이 총신에 터지면서 이 아이가 기관지염에 걸렸는데 생명이 위협할 정도가 됐어요. 의료보험도 없고 아무 돈도 없는데 이젠 더 이상 살 수 없었어요. 그 때는 휴업 중이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많았어요. 하루에 한 15시간씩 방학 때 나와서 공부를 했는데 공부하고 나면 하늘이 확 도는 거예요. 그 땐 그게 뭔지 몰랐어요. 젊어서..나중에 알고 보니까 영양 실조였어요. 그리고 수업 이제 공부가 다 끝나고 나면 저녁 어스름할 무렵에 터덜터덜 걸어서 5층으로 올라갔어요. 채플실이 고요해요. 앉으면 무슨 기도를 준비할 필요가 없어요. 살아가는게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이 주님의 도움이 아니면 견딜 수가 없어요.
(찬양)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너무 배가 고팠어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도저히 등록할 돈이 없어요. 교회에서 쳐다도 안 봐요. 그리고 채플실에 올라가면 끊임없이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한 한 시간 반 길면 두 시간 반 기도하고 나면 온 몸에 땀이 흠뻑 젖어서 내복까지 모두 온 몸에 휘감길 정도가 돼요. 나무 의자에 땀이 흥건히 고였어요. 그럼 내려오는데도 시원하지가 않아요. “하나님 나는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그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아니면 내 생애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그러면서 계단을 걸어 내려갔어요.
(찬양)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될 때 내게 소망을 주셨으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다가 다시 주저 앉아서 통곡을 하고 울고 또 내려 가다가 울고 또 내려 가다가 울고
(찬양)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말씀 드릴 순 없지만 거기에서 여러분 내내 기도하는 동안에 이제껏 까지 저의 신학이 뼈다귀와 같았다면 거기에 살을 붙이는 아주 놀라운 체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신학에서 배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저의 말하자면 신학의 에시야(?)였습니다.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합니다. 성공하는 목회자가 되려고 꿈꾸지 마십시오. 성공은 복음 사역의 가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마치 일평생 자기는 아무것도 없고 주님의 영광 하나만을 위해서 타오르다가 산화사면 충분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많이 기도하십시오. 많이 기도하십시오. 밤이나 낮이나 그대들이 앉은 그 책상 자리가 눈물로 흠뻑 젖을 때까지 차가운 땅바닥의 냉기가 치고 올라올 때까지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마음 깊이 어느 한 순간 주께서 세우신 그 날에 불꽃처럼 아름답게 확 산화하고 죽을 그 날을 꿈꾸며 세례요한같이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연단되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2008. 03. 06 총신대학교 신대원 개강수련회
2.경건과 학문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 119:18-20).
제 일생에서 만약에 시편이 없었더라면 아마 신앙 생활 하는 그 삶이 굉장히 허전했을거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련이나 어려움이 올 때 시편은 저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목회를 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아주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될 때는 언제나 시편을 펴고 조용히 소리 내어서 읽었습니다. 읽다가는 그 시편에 얼굴을 묻고 울기도 하고 또 시편을 읽으며 소망을 갖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편 가운데 특별히 119편은 시편 전체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이 영광스러운 시편 119편에서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보게 해 달라고 비는 기도였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이 기이한 것이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기이한 진리들이 많이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겠죠. 여기에 있는 이 눈은 결국 지성의 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성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진리를 알 수가 없죠. 타락한 이후로 더더욱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도움을 전적으로 필요로 하기에 되었던 것이죠. 이것을 가리켜서 개혁신학에서는 “일루나미치오” “조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이 조명이라고 하는 것은 지성의 활동 위에 무엇인가 덧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조명은 그 자체가 지성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가진 성령의 작용이죠. 지성의 활동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열어달라고 간절히 비는 것이죠.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의 기능 그 자체를 그냥 지성이라고 생각을 했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냥 지성이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입니다. 좀 더 이 지성을 세분하자면 이 지성은 오성과 이성으로 후에 구별이 되죠. 물론 이 오성의 의미는 이제 17,8세기 넘어오면서 근대주의 이후에 이 오성의 개념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기독교 신학 중세 이전서부터 인간의 사물과 하나님을 파악하는 이 지성의 활동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오성이고 하나는 이성이라는 것이죠. 이 오성은 성경에서 총명이라는 말로 많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성은 그야말로 이성이죠. 지성에 있어서 이 두 개는 각각 작용하는 기재가 틀립니다. 오성은 판단작용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말하자면 변증적 작용, “디알레티케”라는 작용을 하게 되고 이성은 사물과 사물의 원인과 결과 사이를 추론해 들어가는 소위 얘기하는 “라치오키나치오”라고 하는 추론의 작용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이 라치오키나치오를 담당하는 이성의 기능으로는 감각적이고 인간이 타락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파악을 할 수 있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지식들은 절대로 이 이성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은 결국은 이성 자신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고 무엇인가 오성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 오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의 빛으로 비추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어떤 것들을 보여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것이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빛, 이 지식들을 모아서 이룬 학문이 신학이에요. 그것이 골격이 되고 골격이 된 그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진리,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 진리 사이의 연관들을 이성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 진리를 보다 풍성하게 사람들의 지성 속에 파고 들게 만들어주는 학문이 바로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이에요. 그럼 이제 결론이 났죠.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뛰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는 뭐냐면 믿음이 뛰어나야 하고 그래야지만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빛,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하고 추론할 수 없는 그런 진리들을 아멘 하고 믿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이 믿는 이 믿음은 어떤 육감이나 마음의 현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리로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 그 분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깊은 믿음 속에서 그 분의 말씀이 틀림 없다고 하는 신앙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성립을 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칼빈 선생님이 자기의 기독교 강요를 시작하면서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신학의 원인론적인 동기인 동시에 목적론적인 동기에요. 즉 하나님을 향한 경배 때문에 신학을 시작하게 되고 그리고 그 신학함은 하나님께[ 경배를 돌리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해 나가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믿음이 훌륭해야 된다는 거죠. 두 번째는 뭐냐면 이성이 뛰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성이 뛰어나서 그래서 이 진리와 진리, 성경이 이렇게 진리를 명제로 제시하고 또 이것과 관련돼서 이렇게 명제를 성경이 제시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 때문에 이 성경을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래서 이 둘 사이의 명제 사이의 연결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성경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성의 활동을 통해서 이 명제와 명제 사이를 이어가면서 하나님의 진리는 아주 놀랍게 변화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신학이에요.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보면 언제나 이 두 가지를 그 온전히 겸비하면서 그 역사가 달려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성을 중요시하는 이성주의와 그 다음에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는 체험주의가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을 해서 계속 진자운동을 반복하면서 역사는 흘러오게 돼 있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저는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이 지성과 체험의 두 가지 진자운동을 모두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구지 역사를 헤아리지 않아도 명백한 것은 이것이죠. 오늘날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우리에게는 은혜만 받으면 목사가 되는 거지 지성 같은 것들은 필요가 없다,,,이러한 풍조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무자격의 목회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을 불러서 자기의 뜻들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공부 잘 하고 지성이 뛰어난 사람들만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니죠. 그렇지만 이러한 이성적인 능력이 없이도 은혜만 받으면 충분히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성경의 많은 증거를 끌어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뽕밭을 매던 사람도 성령을 받으니까 주의 종이 되고 소 몰던 사람도 능력을 받으니까 지도자가 되고 평범한 아녀자도 하나님 권능을 받으니까 한 시대를 주름잡는 주의 종이 되더라.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까짓 것 무슨 공부 학벌 이 까짓게 뭐가 필요하냐 우리 모두 불 받으러 산으로 가자...이런 사람들이 생겨나는 거죠. 이것은 사실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독교 안에 있는 목회자의 자격으로서의 반지식주의의 역사는 초대교회 이단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1800년대 초에 캔터키 지방에서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부흥이 일어나는 것도 미국의 역사를 보면 “트루 리바이벌”이 있고 그리고 “리바이벌리즘”이 있습니다. 리바이벌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는 부흥을 가리키는 것이고, 리바이벌리즘은 임의적으로 부흥을 일으키려고 하는 시도 속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현상을 동반한 그러한 부흥 운동입니다. 이러한 리바이벌리즘 속에서 놀라운 어떤 영적인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외치는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맥리머”같은 사람이 “원더풀 프리덤 인 리바이벌” 외쳤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성령이 임재하시는 이 부흥의 시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더풀 프리덤을 주셨다 이거죠. 이제는 정규적인 과정을 거쳐서 목사가 되는 거 그런 거 전부 다 필요없다..이런 놀라운 성령의 임재가 있는 시대에는 누구든지 이 불을 체험하면 설교할 수 있고 주의 종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친 것이죠. 그러면서 성경의 많은 예들을 들었던 것이죠.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서부터 이제 미국에도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 1800년대 중간 부분에 와서는 여러분도 잘 아다시피 제2차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1차 대각성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그러한 부흥이고 두 번째는 샬 피니에 의해서 주도되던 그야말로 리바이벌리즘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점점 정규적인 신학 교육을 통해서 제대로 공부하고 이성의 훈련을 받아야 하는 필요성들에 대해서 하찮게 여기는 현상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죠. 이러한 것들은 결국은 뒤로 넘어가 보면 경건주의 후기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같이 맞아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죠. 초기에 비교적 순수했던 경건주의가 교리보다는 삶이라는 신선한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시작을 했고 아다시피 진잔 도르프 백작이나 프랑케나 이런 사람들, 슈페너나 이런 사람들, 그리고 할레디악을 중심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난 후 200년 후에 독일의 할례 대학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첫 문호를 연 대학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죠. 그러니까 역사를 보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해서 목회자직을 양산해 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복음사역은 누구나 할 수 있게끔 문호를 활짝 개방해 주고 공부를 안 하거나 지적 자질이 없는 사람들은 목사가 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직업적인 전도자들이나 아니면 복음 사역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들을 만들고 이 사람들은 전도만 하고 가능하면 공적인 설교를 할 수 없게끔 하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그렇게 사역을 하게끔 펼쳐두고 목사의 자격은 매우 엄격하게 해서 그래서 제대로 된 지성적인 훈련과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신앙과 믿음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목사가 되는 것이 옳다,,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목회를 위해서 이런 식으로 이제 성령의 은혜만 체험하면 목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열심히 준비하면 그래서 빨리 빨리 유학도 가고 학위도 받고 공부를 하면 그러면 목회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런 생각들 두 개가 여태까지 내려오는 하나의 갈래였는데 요즘 와서는 제 3의 현상이 또 생겨나고 있어요. 그것은 뭐냐면 소위 목회방법론을 재빨리 배워 가지고 와서 새로운 모델의 목회 사역을 열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실용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미국 같은 곳에 가서 열심히 새로운 방식의 목회들을 배워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여기에 접목하고 여기에 펼쳐 보려고 하는데 사실 미국에서 성공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의 성장을 저는 신학적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낱낱이 거명하면서 비판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배워 가지고 와서 여기서 펼친다고 할 때 제가 보기에는 신학의 뿌리가 없는 것들입니다. 더욱이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도저히 장로교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이설들을 갖고 와서 그렇게 해서 심리학, 마케팅, 그 다음에 현대 경영의 기법, 이런 것들을 모두 버무려서 그래서 국적도 없고 브랜드도 없는 이상한 목회 스타일을 만들어서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모두 신학적인 뿌리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럼 이런 것들을 도입해서 성공하는 교회도 지극히 소수이고 소수의 성공한 교회도 결국은 다른 교회에서 모두 수평 이동을 해서 모인 사람들의 만든 하나의 그 현상들이고 이런 거죠. 대형 마트 하나 생겨나기 위해서 구멍가게 수 천 개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그런 현상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라는 여러분들은 그것을 보면서 그렇게 성공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어떤 교회를 보면서 꿈에 부풀고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들을 본받으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비전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비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비전은 자기 암시적인 비전과 계시적인 비전으로 나뉩니다. 계시적인 비전은 하나님에 의해 감동되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받을 수 없는 비전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그 비전, 그 하준이(?) 진실로 비전이지 자기가 잘 될 것이다 성공을 꿈꾸고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살아남아야겠다..이런 식으로 꿈꾸는 그런 비전은 그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아닙니다. 모두 목회라는 사역을 자기 자신의 비전 놀음으로 사용하는 그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교회들을 위한 진정한 섬김의 행위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죠. 왜 그러면 이런 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진정한 변화가 없기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생겨나는 것 아닙니까? 그 교회의 영광스러움이 무엇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교회에게 이 세상이 모두 귀 기울이고 들어야 할 진리를 위탁하셨으며 그리고 당신의 종인 목회자는 바로 이 진리의 보고에 열쇠를 쥐고 있는 하나님이 보낸 사자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세속적인 비전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어젯밤에도 잠깐 어느 책을 보니까 미국에서 이 나스닥에 상장한 기업 가운데 교회 경쟁력 높이기 위한 그 유료 컨설턴트 회사가 나스닥에 상장 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업들이 생겨나서 교회에서 돈을 받고 주위에 있는 교회들과 경쟁해서 어떻게 그것들을 무찌르고 성공할 수 있는지 비결을 가르쳐 준다는 거죠.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고 있다는 걸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찬양)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외치는 자만 것많은(?) 생명수는 말랐어라
정말 눈물이 납니다. 정말 이 시대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에요. 그러면 그런 일들이 무엇 때문이죠?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제 4권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 하나님은 진리의 저장고를 지상에 세 개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성경 말씀이고 두 번째는 성도의 마음이며 세 번째는 목회자”라고 말했습니다. 목회자 그 인격 안에 하나님이 진리를 저장하셔서 그래서 그것을 목회 사역을 통해서 쏟아놓게 하심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진리로 가득 채움으로써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가는 것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는 성경 계시의 말씀에 대해 깊은 사랑을 가지고 그 진리들을 깊이 탐구하고 그 진리로부터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충만하게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평범한 목회자로써 우리 동료 모든 목회자들에게 묻고 싶어요. 나 자신을 포함해서..그렇게 교회가 부흥되고 많은 성도들이 모이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보내주시면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 성도들을 목양하는 마지막 목표는 무엇이냐고 나는 묻고 싶어요. 교회를 위해서 섬기는 충성스러운 종들로 만드는 것? 나는 그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파송되어 나가는 것?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삶면서 땅 끝까지 가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답일 수 없어요. 잘 들으십시오. 교회는 이 세상에 미담을 만들어내기 위한 윤리적인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지만 그 이상의 무엇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이에요. 그것은 바로 진리를 붙잡고 있는 거룩한 공동체에요. 그러니까 그 모든 성경적 윤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은 그 거룩한 삶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한 원천은 끊어버리고 도덕주의를 흉내내고 이렇게 해서 뭔가 미덕과 착한 행실로 이 세상의 신문지상에 오르내려서 사람들에게 감동이나 주려고 하는 교회의 이런 모든 행태는 19세기에 있었던 구자유주의 치하에서 교회가 이 세상의 인도주의에 아부하던 현상을 다시 되풀이하고 있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교회는 진리의 공동체에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는 죽어도 들을 수 없는 그 인생에 관한 진리, 참된 종교, 그리고 진정한 신적인 철학, 이 지혜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교회에요. 그리고 교회는 성도들이 바로 그렇게 참된 진리, 참된 종교, 참된 철학, 이것들을 붙들고 완전히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전개해 가는 전포괄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들이 나와 다르다는 이별성을 발견하고 그 복음에 대해서 가치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것이 교회에요.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의 전망에 대해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나라의 꿈 꾸는 비전이에요.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런 사상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 바로 교회가 하는 일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설교 속에 사상이 들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객담입니다. 객담..만담이에요. 최근에 제가 우리 교파가 아닌 어느 신학교에 말씀을 전하러 갔습니다. 교수님 한 분이 저를 친절히 맞아주면서 “아이고, 교파도 다른데 오셔서 봉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래서 “저는 그런 것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봉사합니다” 그래서 그 학교도 가서 전교생에게 식사 한 번씩 하고 책 한 권씩 주고 세미나도 해 주고 그랬어요. 우리라도 교단을 넘어서 그렇게 봉사를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진리에 있어서는 견해가 좀 틀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제라고 생각하고 가서 선배들이 갈라놓은 것들 우리가 가서 그래도 이렇게 넓은 아량으로 봉사하고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고맙다고 생각을 해서 여러 교단의 교회들을 가서 섬깁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래요. “아 목사님 요즘은 좋은 세상 아닙니까?”그래서“왜요?” “이제 뭐 성결교건 감리교건 통합측이건 합동측이건 다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고 이제 뭐 특별히 경계가 없으니까요 뭐 예배도 다 비슷비슷하고요” 그래서“교수님 저는 좀 생각이 틀립니다.” “왜요?”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놀라운 사랑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감리교든 성결교든 무슨 통합측이던 합동측이던 모두 신앙 사상을 설교 속에서 버렸기 때문에 화해와 공존의 시대가 된 거니까 우리는 그런 화해 현상 앞에 울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감리교는 감리교답지 않습니다.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어느 교단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이렇게 찬양하면서 소위 얘기하는 온누리 교회식의 집회를 하는거죠. 그래서 내가 가서 한 침 놨어요. “여러분들이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교라고 그러는데 여기서까지 이렇게 온누리 예배를 드립니까? 저는 굉장히 충격입니다” 그랬어요. 이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속에서 요즘 누가 설교 속에서 설교가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켜서 논쟁의 이슈가 되는 이름난 설교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워낙 기가 막히게 개혁주의적인 설교를 하고 칼빈주의 설교를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을 얘기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사상이 안 나왔으니까 흠 잡힐 것도 없는 거죠. 오프라 윈프리 쇼나 아니면 한선교가 인도하던 아침마당 같은 분위기의 설교인데 거기서 무슨 신학을 논합니까? 착하게 삽시다, 도와 줍시다. 같이 아파 합시다, 잘 지냅시다..무슨 신학적인 문제점이 거기에 있습니까? 오히려 설교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단들입니다. 구원파에서는 그래도 신학을 설교하니까 그 신학이 잘 됐니 잘못 됐니 그러면서 싸웁니다. 전 정말 너무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니 묽은 죽만 먹고 성도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감리교인은 자기가 왜 감리교인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장로교인은 장로교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서 아는바가 전혀 없습니다. 최근에 제가 감옥에 갇혀 있는 청년 한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회심을 했습니다. 굉장히 그 그런데 그 그 형제의 고백이 그런 얘기에요. 뭐냐면 “ 내가 신앙에 뭐 궁금한 게 있어서 사람들에게 이 사람 저 사람 물어봤더니 사람마다 다 아는 게 없고 대답하는 게 다 틀리더라” 무엇 때문입니까? 사상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거죠. 그러니까 왜 그러면 사상을 설교하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는 성공해야 되겠다는 조급증 때문이고 두 번째는 사상을 설교할 수 있을 만한 기반 자체가 목회자의 지성 안에 수립이 안 돼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일관되게 개혁주의를 이야기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정치적 대적들을 때려 잡을 때만 개혁주의가 사용되지 설교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개혁주의가 사용 안 되잖아요. 예배 시간에 박수 치는 거 이거 개혁주의 아니잖아요. 근데 여러분 하잖아요? 웃으면서 하지 않습니까? 시험 중에 취팅이 개혁주의입니까? 아니죠? 그런데 안 사라지지 않습니까? 아무도 이런 현실을 보면서 흐느끼는 사람이 없죠? 그런 속에서 도덕적인 불감증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곱게 책장에 모셔다 두는 거죠. 그리고 어디 가서 말할 때 나는 칼빈주의 신학을 말하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라고 하는 거죠.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의 지성의 부재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죠. 목회를 위한 지적인 준비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성경 자체에 대한 지식과 성경에 관한 지식입니다. 성경 자체에 관한 지식과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변의 학문들을 함께 공부하는 지식, 이 두 가지가 이렇게 신학교육의 핵심이 된다라고 하는 거죠. 성경이 가운데 있고 성경에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 주변을 더 크게 맴돌면 맴돌수록 성경을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의 바탕 위에서 볼 때에 그 진가가 더욱 훌륭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죠.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신학에 관해서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점점 이론주의 신학을 팽개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죠. 최근에 한국에 있는 유수한 신학교의 어느 교수님을 만나서 커리큘럼을 가지고 하도 논쟁을 하길래 자기가 종교개혁자들은 신학교에서 커리큘럼을 어떻게 했는지 들어가서 조사를 해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거죠. 왜냐? 리버랄 아트가 너무 많더라는 거죠. 실제로 루터는 그러지 않았지만 루터의 제자인 멜란히톤은 자기의 신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곽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이럴 정도로 종교 개혁자들은 인문학에 철저한 바탕을 목회자들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신학교는 어떻습니까? 이제는 써 먹을 게 없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이론 신학을 다 버리고 뭐 목회 나가면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신학교에서 가르쳐 줘야 한다고 이야기 하면서 무슨 장례 지내는 법, 심방 하는 법, 전도 하는 법, 이런 것들을 커리큘럼에 집어 넣어서 가르치자고 하는데 사실 그런 것들은요 졸업하고 난 다음에 전도학교 가서 3개월만 배우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바보가 아니면..이런 실천적인 것들은 목회 현장에 나가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세고 버렸고 사실 이런 것들은 목사가 된 다음에 목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해야 되는 것들이 아니라 은혜 받고 신학교 오기 전에 교회에서 전도학교 같은 것 하면서 열심히 배우고 주일학교에서 심방하면서 이렇게 해서 목회를 배워야 될 것들이었어요. 이것들이 신학교에서 이론 신학과목을 전부 다 몰아내고 이런 것들이 들어오는 거죠. 근데 저는 반드시 20년이 지나기 전에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보다 엄격하게 철저하게 인문학적인 기반, 지성적인 기반, 이런 것들을 탄탄하게 요구하고 그렇게 해서 종교 개혁자들이 걸어갔던 것처럼 우리들도 탄탄한 지성 위에서 계시를 공부하고 경건을 쌓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제네바에 있을 때 그가 이 경건과 학문에 관해서 내놓았던 두 개의 큰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문장에는 심장을 찌그러질 정도로 손으로 꽉 움켜잡은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꼬르메옹띠비오페로도미네” “나의 이 마음을 주님께 드리나이다” 뭘 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었습니까? “삐에따씨에뜨스킨티아”“경건과 학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건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서 지성을 헌신하면서 하나님 앞에 추구하면서 그 진리를 알아가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이 개혁주의의 전통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초창기에 중세 철학에 대한 거부감으로 말미암아서 의도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논별들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세철학은 신학과 철학을 통합해서 하나의 지평 속에 올려 놓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과오를 저지른거죠. 그렇지만 적어도 종교개혁자들은 그 모든 논의들을 다 이해하는 지적인 바탕에서 개혁신학을 세웠습니다. 그런 속에서 철학에 대한 담론들을 절제하고 형이상학적인 담론들이 경계를 넘지 않도록 절제했습니다. 알고 말 안 하는 것과 몰라서 말 못 하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 모든 학문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a book" 하나의 책을 위한 공부야. 그 하나의 책이 뭐에요? 조직신학이 아니라 성경이에요. 성경..그래서 한 책의 미친 사람이 돼야 되는 것에요.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면 잘잘한 신학자들은 남의 신학책을 읽고 공부해서 태어나지만 큰 신학자들은 성경을 대면하다가 태어나요. 그래서 그들은 성경 자체를 읽고 습득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일에 온전히 헌신해서 그것이 주된 목적이 되었고 나머지 모든 신학의 공부들이 이 일을 위한 수단이 되었던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철저하게 성경에 헌신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된 거란 말이죠. 에드워드 제이영 박사는 자신의 책 다이월드투스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어요. ”오늘날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싸움은 결국은 성경 진리에 관한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이냐 아니냐 이 문제를 놓고 비평주의자와 복음주의자가 갈리고 복음주의자 안에서도 여러 갈래로 갈려져 나가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런 식의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그렇게 진리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는 그런 것 없이 여러분들이 신학을 공부해서 그 신학은 쪼가리쪼가리 떠돌아다니면서 파편처럼 돌아다녀서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도 잃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헬무트 딜리케라는 사람이 독일 사람이죠? 2차 대전 시절에 독일의 경건한 목회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신학생들에게 주는 글이라고 하는 책을 쓰게 됩니다. 거기에 보면 바로 어떻게 복음에 생명력이 넘치던 신학생이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지에 대한 상세한 그 지적 타락의 기록들이 나와요. 그게 무엇이죠? 성경에 대한 생생한 사랑, 여러분들이 신학교에 문을 두드렸을 때 뭣 때문에 신학교 오고 싶다고 그랬어요? 성경을 좀 더 알고 싶습니다..그러고 왔죠? 그런데 신학교 들어오고 나면 성경을 버리는거죠. 그래서 어느 신학교에서 신학대학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평범하게 교회에서 노회 성경고사대회에서 치를 정도의 시험을 가지고 냈더니 어느 한 교단의 신학교에서 신학대학원생 전체 평균이 30점 나왔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우리들이 가슴에 새겨야 될 이야기에요. 중세 시대에는 성경을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이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그럼 사람들이 되풀이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은 성경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위한 신학이에요. 그래서 신학을 하면서 신학 그 자체의 논쟁과 논의에 빠져들어가서 거기에 매혹되는 것은 그것은 전문적인 학자면 그게 필요할지 모르지만 목회자는 그런 거 필요없다 이 얘기에요. 그것까지 다 하다가 언제 목회를 하겠어요? 사람의 인생이 하나 밖에 없고 능력이라는 건 한계가 있는데 그렇게 삼지사방으로 다 찢어 발기면 진짜 해야 될 일어ㅔ 자기를 쏟아부을 수 없잖아요? 제가 한 때 구약공부에 아주 깊이 심취해서 재밌었습니다.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나니까 충격을 받았어요. 히브리 단어 가운데 대부분이 그 뜻이 뭔지 모르는 단어라는거죠. 결국은 거기에서 우가리더, 아카더, 수메러..이런 것들을 공부해야지만 케롤로지컬 렉스칼라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재밌었으니까 신대왕 상왕이한테 이제 혼자서 오가리도 텍스트를 읽으면서 600페이지짜리 싸이러스 고든 것을 띄었어요. 너무너무 재밌어요. 그런데 결론은 뭔지 압니까? 끝이 없더라 이거예요. 끝이..뭐 가보지도 않았지만 조금 가 보고 나니까 끝이 없더라..그래서 결국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 발 한 발 들여놓다가 외국에는 그러다가 깊이 빠져서 어학 속으로 들어갔다가 결국은 돌아오지도 못 하고 결국은 끝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결국은 제가 은혜를 좀 못 받았을 때는 그것을 계속 했는데 신대원 졸업하고 하나님을 깊이 만났어요. 그러고 나서 빠빠이 했어요. 그것은 신학교에 계신 몇몇 교수님들이 말씀해 주시면 아멘 하고 그냥 내가 쓰자..내가 그것을 왜 들어가서 그것 토판까지 놓고 내가 이 짓을 하고 있으랴..이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에 그 시간에 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서 전하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회심하는데 내가 인생을 이렇게 써서 되겠느냐 하는 각성이 생겨나게 된 거죠. 지금도 주님 못 만났으면 어디 가서 돌멩이 만지작 거리면서 그것 가지고 논문 썼을지 몰라요. 그러니까 끝이 없는 거라 이거죠. 저희를 가르쳐 준 선생님 가운데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제가 참 존경했고 사랑한 목사님 김희보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권면하셨어요. “전도사님 신학은 성경을 위한 신학이지 성경이 신학을 위한 성경이 아닙니다. ” 그래서 당신은 신학책을 읽을 때마다 성경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그분의 성경책은 날근날근하게 낡았는데 새카맣게 글씨가 써져 있어요. 그럼 거기를 들여다보면 신학책들 이름이 수없이 나와요. 이 성경 구절에 대해서 각각 신학자들이 이해한 내용들을 신학 공부를 하시면서 거기다가 수십년 동안 적어놓으신 거죠. 그렇게 놓으신 거죠. 그래서 그 분에게 그 분이 채플 시간에 설교를 하시면 하여튼 참 많이 울었어요. 뭐 소리도 별로 안 지르시고 조용히 말씀 하시는데 그렇게 은혜가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오늘 설교자가 어느 목사님인가 하고 궁금해 하면서 채플실 올라가면 목사님이 교무실에서 이렇게 창가에 이렇게 안경을 이렇게 하시고 이렇게 성경을 날근날근한 성경을 조용히 넘기고 계세요. 난 한 번도 그 분이 설교 노트 가지고 올라오는 채플 시간을 못 봤어요. 읽으셔요. 그리고 그 다음에 뭐 하나 이렇게 껴 가지고 올라오셔서 성경을 항상 손에 들고 우리에게도 들고 설교를 하라고 가르치셨어요. 왜냐면 이게 얼마나 성도들이 보기에 이 목사가 성경을 친근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게 하느냐 라고 말이죠..평소는 책장 위에 올려둘찌라도 설교 시간엔 이렇게 들고 이렇게 가슴에 탁 품고..그러면서 조용 조용히 설교해요.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세요?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 여러분,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등록금을 못 내서 그거 말고 교회에서 쫓겨나서 그거 말고 사역에 괴로운 일이 있어서 그거 말고, 성경을 읽다가 정말 주님을 만나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내가 알지 못하는 은밀하고 비밀한 아름다운 그 세계를 보여주시는 그 진리에 대한 감격 때문에 성경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어본 적이 언제죠? 그게 여러분 신학교 오기 전에는 가끔 그랬잖아요. 지금은 어때요? 어떻습니까?
(찬양)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내 영혼의 치료자
옛날에 제가 박희천 목사님을 담임 목사님으로 모셨습니다. 그 분이 연초에는 전교인 심방을 하십니다. 참 재밌습니다. 저는 구역을 하나 맡았기 때문에 그 구역 심방할 때에는 구역장 자격으로 따라갑니다. 목사님이 전혀 설교 준비를 안 해 가지고 6~700명 되는 교인 심방을 떠나십니다. 그리고는 한 집에 가면 한 5분 동안 차를 마시며 그 집이 작년에 어떻게 살았는지 남편이 뭘 하는 사람인지 상세하게 물으십니다. 그럼 조용히 눈을 감고 말씀하십니다. “찬송가 353장 한 장 부르시겠습니다.” 찬송을 부르시는 동안 눈을 조용히 감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책장을 넘깁니다. 쫙..찬송이 딱 끝났을 때에는 “시편 119편 18절입니다.”그러고 탁 펴는 거예요. 그러면 어쩜 그렇게 그 집안에 맞는 정확한 말씀, 비행기 조종사의 집안에 가서는 거기에 딱 맞는 것, 회산 다니는 사람에겐 딱 그거, 사업 하다 위기 만난 사람은 딱 그거, 영적인 침체에 있는 사람은 딱 그거..입시를 앞둔 사람, 정확하게...저는 그 분은 하루에 4시간을 성경을 읽으셨던 분이에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언젠가는 교역자 회의 하는데 그러세요..20년 전이에요. “전도사님, 제가 오늘 아침부로 시편을 400번째 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히 부끄러워요. 전 그렇게 못 살았어요. 그렇지만 흉내는 내보려고 해요. 그래서 심방 가서 조용히 나도 눈을 감고 근데 생각이 안 나면 찬송 한 장 더 부릅니다. 그래도 뭐 그저 가끔 헛방칠 때도 있겠지만 뭐 위로를 받으면서 그렇게 해요. 그래서 성경과 친숙해지세요. 사랑, 성경에서 주님의 위로를 받고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 사랑, 성경 말씀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것을 품에 안고..그겍 바로 우리의 목회 생활이에요. 어느 신학교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하더라구요. 데모 그러면 대개 뭐 재단이사 물러가라 뭐 아니면 교수님 누구누구 뭐 각성하십시오 뭐 아니면 등록금 내려라 대개 이런 거잖아요? 근데 굉장히 데모하는 구호가 신선해요. 이슈가...전혀 그런 학내문제가 아니고 캐치플레이가 뭐냐면 히브리어, 희랍어 선택과목으로 돌려라...점수 안 주는 히브리어 교수 물러가라..물러가라...참 신선하죠? 그래서 제가 미친 놈들이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 그리고 희랍어로 씌여 있죠? 그런데 다 공부해야 돼요. 그것은 기본이에요. 기본..유창하게 읽지 못하더라도 번역서를 갖다 놓고 이 번역이 틀렸다는 것까지 집어낼 수 있어야 돼요. 필요하면..더 유창하게 읽으면 너무 좋지만 그것 해야돼요. 대전 고속버스 터미널 역에서 하도 궁금해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는 중 한테 가서 물어봤어요. “스님” “예” “뭐 하나 물어봅시다” “예” “평범한 사람이 팔만대장경 정도 주절주절 읽으려면 학문을 얼마나 공부해야 돼요?” 그러니까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수준에서 7년 정도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요..근데 그것도 사실은 불경의 원전이 아니잖아요.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해야 되잖아요. 그러더니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뒤에다 대고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 요즘은 번역본이 많아서 그런 거 안 해도 됩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뭐라고 했냐면 “너도 땡중이구나” 땡중과 고승의 차이가 뭔지 알아요? 땡중과 고승의 차이는 두 개에요. 뭐냐하면 최소한 삶이라도 깨끗하면 땡중이라고는 안 불러. 근데 땡중과 고승의 차이는 뭐냐면 하나는 공부하는 중이고 하나는 공부 안 하는 중이야. 여러분도 공부 안 하면 땡목이 되는 거야. 땡목들이 얼마나 많은데..그리고 가서 폼이나 잡고 말이지 교인들이나 타고 다니고..목사 잘 섬겨야지 복 받는다고 이런 공갈이나 치고 말이지..그게 뭡니까? 이제 좀 품격있게 삽시다. 그러지 말고..근데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나는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없지만 그냥 지독하게 시켜야 된다고 생각을 해..지독하게..그래서 할 수 있으면 그 희랍어 같은 건 말이지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기 고전 희랍어부터 공부를 해 가지고 그 희랍저작들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해서 교부들의 글들을 읽을 수 있어야 돼요. 히브리어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저는 뭐 희랍어를 많이 공부 못 했습니다만 대학원 다닐 때 너무 히브리어가 재밌어서 밤에 그 막 밤중에 히브리어 성경이 꿈에 나오고 그럴 정도로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한 3시간씩 2년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서 그래서 대학원 다닐 때 저도 일 개월도 교회 봉사를 쉬어 본 적이 없어요. 전도사 생활, 뭐 전천후 폭격기로 작은 교회에서 별 거 다 했어요. 교회 사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사 생활했어요. 그래도 했어요. 뭐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더 싱싱하고 얼마나 머리가 총명한데 열심히 공부했어요. 근데 안 돼요. 어느 날 그런 생각이 신앙적으로 기도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 도대체 히브리어가 안 되는데 이게 왜 안 될까? 하나님이 무슨 심보로 아니 그렇게 훌륭한 계시의 말씀을 공부해도 공부해도 안 되는 언어에다가 담으셨을까? 그럴리는 없을거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믿음을 가졌어요. 맨날 믿음을 주시옵소서에요. 될 거라는 믿음을 주시옵소서..너무 낙심이 되니까. 글자도 거꾸로 봐야되나..공부했어요. 그래서 겨울방학 때 알파벳부터 공부하기 시작해서 9월부터 시작을 해서 틈틈이 공부하다가 1월달부터 혼자 앉아서 공부하다가 창세기 17장까지 읽었어요. 그리고 나서 졸업할 때쯤 돼서는 구약 전권의 3분의 2를 읽었어요. 신명기를 펼쳐서 명문이 1페이지씩 다 번역되어 나갈 때 그 환희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지금은 그렇게 공부 못 해요. 왜 다른 거 해야 될 것도 많으니까.. 그러나 항상 설교하기 전에 혹은 설교 준비 할 때 강대에 있는 히브리어 성경을 펼쳐서 번역을 대조하는 것은 그 때 지불한 수고한 비교될 수 없는 유익을 가져다 주어요. 단어 한 천 개 외우고 그리고 조금만 공부하면 할 수 있는데 지금 왜 안 합니까? 그 뿐만 아니죠..라틴어를 여러분들에게 꼭 하라고 나는 당부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이피엘피이지” 라틴교부들의 문헌과 희랍 교부들의 문헌 전체가 450권 정도 됩니다. 그것 신학 공부하는 사람이 신학이 어려웠던 이유는 이것을 읽을 수 있어야지만 신학 공부가 가능했기 때문이에요. 모두 이것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 신학에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왜? 이 때까지 교회에 은혜를 받은 주의 종들이 빗나가든 똑바로 갔든 어쨌든 교회에 초석을 세우는데 있어서 이 모든 이바지했던 신학적인 족족들을 그건 나하고 상관없고 오늘 성경을 보고 번쩍하는 이것이 내가 일류최초로 깨달은 진리다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 중의 매우 위험한 교만이에요. 그렇게 해서 공부를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런 중요성을 학교 다닐 때 몰랐어요. 그러다가 제가 어느 순간에 목회를 이미 시작하고나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접하게 됐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몇 권 읽었는데 중요치 않게 생각하고 성경 신학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얼마나 이 그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 혹평을 하는지 가까이 가면 큰일날 사람인 것처럼 여겼어요. 그런데 목회를 하고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저는 솔직히 절대로 뭐 교만이 그런게 아니고 사실 어떤 신학자들의 책을 읽어도 참 좋다, 참 훌륭하다, 부럽다는 생각을 했어도 이 사람은 정말 천재다라는 생각은 못 했거든요. 근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은 촥 펼쳐서 2권의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비범한 천재구나 하는 생각에 내 온 몸과 마음이 사로잡혔어요. 그리고 그 다음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이제껏까지 탐독하고 있어요. 250권 가까운 책을 썼습니다. 그 사람이..그것을 써나가는데 그러면서 이제 “아 이거 안 되겠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그 사람의 라틴어 책을 보려고 하는데 이미 배운 추억은 새카맣게 2,30년 전오래 이야기예요. 그 때부터 과외 선생 불러다가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근데 안 돼요. 왜냐면 이 라틴어는 어렸을 때 책상 위에서 동사변화표 못 외우면 그냥 종아리에 핏줄이 팍팍 서도록 종아리로 세차게 채찍에 맞으면서 회초리를 맞으면서 이게 퍽퍽 들어가는 거란 말이죠. 근데 내가 지금 누구한테 회초리를 맞겠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된다면 종아리 걷고 내 후배들에게 맞을 용의가 있어요. 그런데 뭐냐면 머리도 녹슬었는데 시간도 없어요. 책 보다가 심방 간다고 하면 심방 가야 하고 회의 있다고 하면 회의 들어가야 되고 교회 건축한다 그러면 설계 도면 펴 놓고 초상 나면 장례집에 뛰어가야 된다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안 된다 이 얘기에요. 그런데 지금이 여러분들이 얼마나 좋은 때입니까? 지금 왜 왜왜 놉니까? 왜 놉니까? 시간이 없다고 그러는데 거짓말입니다. 지금처럼 여러분들이 한가로운 때가 일생에 없고 여러분들이 마음만 먹으면 공부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래서 항상 얘기합니다. 몸의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있지 않는 한 6시간 이상 자는 것 범죄자다...죄 짓는 거라 이거예요. 자기의 영혼에 대해서 죄 짓는 거야. 아니 건설회사 다니면서 경제를 이뤄보겠다라고 하는 이명박씨도 4시간 이상을 안 잔다는데 멀쩡한 몸을 가지고 침대에서 뒹굴뒹굴 합니까? 그게 도대체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을 종으로써 합당한 행동입니까? 언제 그러고 공부할 시간이 있습니까? 공부해야 됩니다. 계속..지금도 너무 부러운 사람들은 뭐냐면 라틴어를 주절주저리 읽는 사람들...휙휙 넘기면서 읽는 사람들 보면 눈물이 나도록 부러워요. 어느 날 제가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책 1권을 붙들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내가 정말 이 글을 아우구스티누스의 목서를 통해서 직접 듣고 싶은데 하나님 시간도 없고 그리고 머리고 다 녹슬었습니다.” 근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지금 현대 아우구스티누스 연구가 중에 90퍼센트는 바르티안들이에요. 이게 도대체 정통 개혁주의를 한다고 하면서 교부의 이런 글들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이 건너 뛰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러면 안 된다 이거죠. 여러분 공부를 해야 돼요. 온 마음을 다해서 나는 죽었다라고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 이거죠. 보십시오. 주님을 영화롭게 한 지성들이 이 세상에 참 많았습니다. 어느 날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시험을 보는데 교수님하고 학생들하고 실갱이를 해. 뭔가 하고 들여다 봤더니 시험 보는데 또 컨닝을 한 거야. 그러니까 이제 못 봐주겠다는 선생님과 한 번만 봐 달라는 학생 사이에 실갱이가 벌어지는데 그 광경을 보고 어떤 학생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면서 얘길하면서 “어이 씨. 좀 봐주지. 까다롭기는.그래도 주님이 쓰시겠다는데 무디도 쓰셨는데..”내가 말하고 싶은 게 그거에요. 하나님이 무디를 쓰신 건 사실이고 그가 무학자였다는 건 사실이에요. 근데 하나님이 공부 못 했기 때문에 무디를 택하셨습니까? 그런 논리가 어딨어요? 그래서 걔네들이 닮은 것은 공부 못 하는 것밖에는 닮은 게 없어 무디하고..무디랑 닮은 건 딱 하나야..공부 안 하는 거 그것만 닮은 거..무디에게 있는 그 뜨거운 영혼 사랑, 물질에 대한 철저한 포기,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열정,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겸손, 그런 거 본받아 본 적 있느냐..가슴을 저미는 영혼을 위한 그 부령의 기도, 그런 거 있냐 이 얘기에요. 무디는 무슨 무디..경상도 말로 문둥이지..무디는 무슨 무디..저는 일생을 살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개혁주의 신학을 만난 것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는 사람이니까 그저 제한적인 공부지만 공부를 하면서 저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얼뜻 신앙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참 훌륭한 신앙처럼 아주 달콤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신앙의 깊은 체험을 가지고 한 걸을 더 지성적으로 들어가보고 나면 뿌리가 없습니다. 진짜 이 개혁신학은 깊이가 있고 심오합니다. 근데 사실은 이런 개혁신학이 초창기에 세워진 모든 사람들의 지성에 의해서 세워졌다라고 하는 것은 말할 것 없지 않습니까? 제가 처음 학교에 와서 만난 사람이 칼빈이었고 깊은 감동을 받고 목회사역을 하는 가운데 제가 만난 사람은 존 오웬이었습니다. 목회사역을 하고 개척교회를 하고 한 1년 쯤 지났을 때인데 제가 심각한 탈진 상태에 빠졌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것이 내 안에 많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고 한 때는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펑펑 울고 거꾸러지던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교만해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이 낙심이 됐고 이게 내 정말 소명인가라는 생각도 들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몸도 아파서 집에 3일동안 누워있을 때에 너무 낙심이 되어서 눈물 밖에 안 나왔는데 그 때 마침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얘야. 그렇게 낙심하고 있지 말고 내 종 오웬의 글을 한 번 읽어보아라” 그러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무엇엔가 이끌리는 힘에 의해서 걸어가서 몇 년 저에 사 두었던 전집 중의 제 6권을 탁 꺼내서 그래서 펼쳐서 6권과 7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손에 넣은 것이 “모티피케이션”이라고 하는 그의 작은 논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천천히 앉아서 읽었는데 영어가 왜 그렇게 어려워요.17세기의 영어니까 400백년 간격이 있잖아요? 현대 영어에 익숙해져있다가 그 영어를 보니까 너무 어려워요. 그래도 지혜를 구하면서 천천히 읽었는데 하루 종일 15페이지를 읽었어요. 이틀 째 이 책을 읽으면서 거의 전율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어요. 어쩜 이렇게 인간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전혀 내가 접해보지 않았던 청교도들의 그 장엄한 교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삼일에 걸쳐서 그 논문을 모두 읽고 난 다음에 나는 우리 집사람 손을 붙들고 침대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여보” “왜” “나 오늘 오웬 목사님의 이 책을 3일만에 논문 한 편을 읽었는데 여보 난 짐승처럼 살았어 짐승처럼 살았어” 그게 이제 제가 오웬에 입문하게 된 본격적인 계기였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13년 가까이 존 오웬의 멘토링을 받으면서 목회해 왔습니다.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탁월한 진리의 빛 때문에 너무 감동을 받아서 온 몸에 비늘이 돋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지성이 어쩜 이렇게 예리하고 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인간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어쩜 이렇게 탁월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서 깊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신학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통합을 이루는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치열한 고난의 뼈를 지나는 청교도로써 심지어는 오마일영에 묶이고 청교도를 핍박하는 그 왕정복고시대를 살면서 컴퓨터도 없고 비서도 별로 없던 그런 시대에 그 사람이 무려 700페이지 되는 책을 26권이나 쓰고 죽습니다. 50몇세에 죽었는데 그렇게 어마어마한 저작을 남겨놓습니다. 옥스퍼드에 공부했죠. 그의 전기에 의하면 십대 때에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체격이 굉장히 건장하셨는데 생명이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그 분은 나에게 기를 많이 꺾었습니다. 공부를 그렇게 잘 하면 사람이 좀 멍해야 되잖아요? 크롬웰 치하에서 이 사람이 다 기울어져가는 옥스퍼드의 총장이 없는 부총장을 맡았습니다. 총장은 올리버 크롬웰 자신이 됐습니다. 그 때 교수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학생들은 자유주의로 기울어지고 있고 학교는 많은 부채 속에서 기울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옥스퍼드를 맡은 다음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좋은 교수들을 채용하고 교수들의 처우를 개선해서 사기를 높이고 학생들에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시설을 확충하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경건을 진작시키고 많이 기도시켰고 끝까지 말을 안 듣는 학생들은 지하에다 감옥을 만들어놓고 철저하게 가둬 버렸습니다. 우리 학교도 그렇게 해야 돼요. 정말..공부 안 하는 학생은 지하의 감옥에 가두고 말이야..그렇게 했습니다. 그가 4년의 임기를 마치고 끝났을 때 학교는 최고의 학교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만 돼도 기가 죽잖아요. 우리에겐 그런 정도의 행정 능력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당대 유럽 최고의 플륫티스트였어요. 틈틈이 플륫을 배웠어요. 그런 천재들도 목숨을 잃을 정도로 공부를 했으니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되지 않겠어요? 칼빈도 파리에 있던 22살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럽 최고의 지성인을 꼽으라면 나는 젊은 칼빈을 꼽겠다”라고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만난 후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게 되죠. 그가 탐구했던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교부들의 저작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태어날 때부터 천재였죠. 세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6살 때 자연과학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했고 8살 때에는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밝혔습니다. 16살 때에는 유럽의 학회지에 거미에 관한 보고서라고 하는 자연철학에 관한 글이 실렸습니다. 13살에 예일 대학에 입학할 때 히브리어, 희랍어, 그리고 라틴어를 모두 섭렵한 가운데 입학을 하고 4년 뒤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2년뒤에 대학원을 마친 후 그 학교의 교수가 됩니다. 약관 19세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했던 일이 뭔지 압니까? 라틴어를 거의 통달한 그 사람이 4년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오직 교부들의 저작 전집에 매달립니다. 마틴 루터는 어떤 사람인지 기억하십니까? 1519년 7월 4일부터 14일, 당시 인문주의자였던 잉골슈타트 대학의 에크라는 사람이 루터의 교리적 주장에 대해서 반박을 하며 책을 냈습니다. 오벨리스크라는 이름의 책이었는데 오벨리스크는 원래 호모의 저작 중 사본에 근거가 의심되는 부분에 표시하는 단검표시를 가리켜서 오벨리크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니 루터의 내건 이 모든 교의들이 다 가짜라는 의미의 오벨리스크라는 책을 써서 루터의 교리를 철저하게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마틴 루터는 아스떼리스크라고 하는 책 이름을 책을 냅니다. 그것은 중요하다라고 하는 표입니다. 내 말이 가짜가 아니라 얼마나 중요한지 들어봐라..그리고 그는 이제 저작 활동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모두 맞섰습니다. 천재적인 기억력과 폭포수 같은 달변, 섬뜩할 정도의 통찰력을 가진 정신의 소유자였고 이 사람과의 논쟁에서 승리했는데 이것은 탁월한 지성 준비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증인은 루터에 관해서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틴은 중간 키에 걱정과 연구로 마른 몸이었기 때문에 살갗 위로 드러나 뼈를 거의 다 셀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창의 나이였으며 음성이 또렷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 들었습니다. 학식이 풍부하며 성경을 알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와 희랍어에 정통하여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사 시절에 성경을 읽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하는데 어떤 수도사가 히브리어를 잘 한다고 하는데 말은 타고 세 시간을 가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어요. 그런데 매주 한 번도 안 빠지고 그 수도사를 찾아가서 히브리어를 배우는데 그 수도사가 감복을 하게 됩니다. 하루는 천둥이 치고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 부으는데 그것을 온몸에 다 맞고 그 히브리어를 배우기 위해서 그 수도사를 찾아가답니다. 이러한 지성적인 준비를 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대위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그 정도가 아닙니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할 때 순수한 말씀의 증언자들이 세 사람이 출중하였는데 프로방 비레 그리고 퐈렐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로잔에서는 종교회당이 개최되었는데 개혁자들과 카톨릭 사이에 공개 토론이 벌어진거죠. 이제 이 토론의 결과에 따라서 이 도시는 개혁파 쪽으로 올 수도 있고 아니면 카톨릭 쪽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양측의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젊은 학자 칼빈은 조용히 한 쪽 구석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3일이 지나갔습니다. 나흘 째 되던 날은 토론의 주자가 성만찬이었습니다. 카톨릭 측의 유능한 변론자인 미마르라고 하는 사람이 나와서 자신이 준비한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교부들의 저작을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 때에 3일동안 한 쪽을 조용히 지키고 있던 수줍은 청년인 것 같은 한 사람이 창백한 얼굴의 한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비웃음을 머금은채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이 카톨릭의 변론자에게 시선을 고정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존 칼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뜻밖의 젊은이가 일어나선데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그는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 룩한 교부들에게 나는 영예를 돌립니다. 우리들 중에 당신보다 교부를 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부들을 들먹이지 않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교부의 저작을 좀더 철저하게 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유감입니다. 아마 당신이 제대로 공부를 했더라면 어떤 구절은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아무런 준비된 원고가 없었습니다. 즉석에서 카톨릭에 의해 제시된 여러 가지 의견들을 적어 두었다가 조목조목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유창한 연설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연고는 철저히 교부들로부터 도출되었습니다. 개혁파 사람들이 무시한다고 비난하던 교부들의 글을 통해서 카톨릭의 사람들이 이토록 궁지에 몰리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을 못 했던 것이죠. 한 번 들어보십시오. 제일 먼저 토틀리아누스의 견해를 인용한 후 주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는 갑자기 존 크리스토스맥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설교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출처를 밝혔습니다. 제 11장 중 중간부분입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자기의 선생인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23장 마지막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니교도인 아만투스를 반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에서 인용하면서 이상은 그의 글 중간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시편 98편에 대한 주석을 인용하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교부 어거스틴의 98편 시편 설교 중에 중간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다시 반론이 죽 반박을 하면서 이상의 내용은 교부 어거스틴의 요한복음 설교의 시작 부분인데 아마 제 기억에 8번째 설교가 아니면 9번째 설교라고 기억이 됩니다. 상당히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 젊은 칼빈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는 수많은 교대 교부의 이 증거들을 희랍교부와 라틴교부들을 오가면서 개진했습니다. 그 중에는 거기 온 카톨릭의 사람들이 읽어보지도 못 하고 뚜껑도 열어보지 못한 교부들의 저작들이 수없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토론되고 있는 문제에 관한 복음적인 해석을 입증하기 위해서 아직까지도 언급되지 않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암기로 쏟아놓기 시작했고 근는 말했습니다. “집사 베드로를 위한 신앙론이란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고, 다르다누스라고 하고 제목 붙여진 그의 편지 속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 있습니다.” 칼빈은 이 모든 것을 암기해서 대답을 했습니다. 원고도 없이 책도 없이 그는 자신의 정리된 기억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폭포수처럼 쓸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신학적 천재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난님의 말씀을 그것을 통해서 확신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 속에 심겨지고 신앙적인 확신화가 되어서 자신의 온 인격과 신념을 움직이고 있는 어떤 진리의 결정체들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는 드디어 말했습니다. “ 리 개혁파 사람들이 교부들에 대해서 적대적이라고 하는 당신의 주장은 무례하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주장이 아닌지 판단해 보십시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교부들의 책을 읽기는 커녕 껍데기도 못 만져본 사람입니다. 만약 당신과 당신 앞에서 연설했던 사람들이 단 한 번만이라도 지금 제가 인용한 이 교부들의 저작을 통독했더라면 아마 내가 이렇게 말할 때 침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 말이죠. 그들은 한 수 한 수 밀리다가 마지막에는 신학적으로 외통수에 몰리게 되었어요. 자기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교부들의 저작을 통해서 그들은 완전히 코너에 몰린거죠. 거기 모인 청중들은 조용히 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했습니다. 그 때에 장시간의 토론을 통해서 칼빈이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어요. “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은혜에 의하여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진리와 사실 안에서 우리를 결합시켜 주는 영적 교제, 우리들을 우리의 구세주와 연합시켜 주는 영적인 연합, 이것은 영적인 끈, 곧 성령의 줄을 통하여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만찬입니다.” 칼빈은 자리에 앉으면서 장시간의 연설로 말미암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손을 내려놨습니다. 완벽한 침묵이 교회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의 연설 중 일부분밖에는 이해하지 못 하는 많은 회중들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이 젊은 칼빈 선생에 의해 무엇인가 진리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어요. 카톨릭식의 사제들은 경악에 가득찬 얼굴로 질리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유능한 변론자였던 미므르타 블랑쉐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때 침묵을 깨고 프란시스교단의 탁발승 한 사람이 일어났는데 역사적으로 장땅띠라고 하는 사람이었어요. 다른 때였더라면 웅변적이고 선동적인 그 설교를 능숙하게 해 낼 그 사람이 무엇인각 창백한 얼굴로 말하기 위해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혀가 목구멍에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그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바 성령을 거스리는 죄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진리에 반항하는 완고함이라고 여겨집니다. 내가 지금 들은바대로 연설을 따라 나는 내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동안 나는 무지 때문에 오류 속에서 살았고 잘못된 가르침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그 동안 내가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려 말하고 행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나는 무릎을 꿇고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회중들에게도 이제껏 내가 잘못 가르쳐온 모든 것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바입니다. 나는 지금부터 그리스도와 그의 순수한 가르침만을 따르기 위해 성직의 옷을 벗겠습니다.”충격이었죠. 이주표가 지어낸 소설이 아니라 역사의 자료에서 인용한 거예요. 거기 모인 토론자들이.. 잘 들으세요..카톨릭 측의 토론자들이 신학적 토론에 진 게 아니라 다수의 사람이 칼빈의 그 연설을 듣고 회심했던 거예요. 회심..토론이 끝난 이튿날 아침 스위스 로잔은 참된 신앙으로 돌아왔어요. 매춘속으로 모두 폐쇄되고 창녀들은 추방되고 종교회당은 구체적인 결실을 맺기 시작했어요. 매일 매일 보호지역의 성직자들이 개혁을 찬성하는 입장을 밝히게 되었고 수개월 내에 200명의 사제들과 수도사 후보생들이 카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개혁신앙으로 돌아옵니다. 이게 바로 스위스에서의 승리에요. 그들 중에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완고하게 고수하던 미마르 같은 지도자도 포함돼 있었던 것이죠. 아무리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셔도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무질서가 있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신학은 바로 체험이라는 그 무질서한 질료에 형상을 부여해요. 그래서 신학을 올바로 잡아주게 되는 거예요. 이런 원리가 실제로 입증된 것이었죠. 사실 영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파렐은 칼빈은 파렐을 미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급기야는 학자인 이 칼빈이 자기 쉬고 싶다고 얘기하니까 파렐이 막 야단을 치잖아요. 하나님의 종에겐 죽음 이외에는 쉼이 없다고...무슨 놈의 쉬냐고..당신이 만약에 그렇게 쉬고 싶으면 나는 당신의 그 휴식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그랬어요. 당신이 여기에 종교개혁에 동참하는게 하나님의 뜻이고 이걸 안 하면 당신의 휴식에 저주가 있기를 바랍니다..어린 아이처럼 파렐 앞에서 펑펑 울면서 종교개혁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영적인 어떤 파워에 있어서는 비교가 안 됐죠. 그러나 그 뛰어난 영력을 가지고 막을 수 없었던 이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이 개혁신앙을 지켜낸 거예요. 그게 무엇이 가져다 준 거예요.? 지성적인 준비가 없었다면 그것을 할 수 있었겠는냐 이거죠. 저는 그 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천착하고 그의 저작을 읽으면서 정말 그 천재성에 감복을 하게 됩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초기의 사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신플라톤주의도 들어오고 그 다음에 심지어는 페르시아니즘도 들어오고 뭐 스토이시즘도 들어오고 뭐 이렇게 그 약간 얼룩들이 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그 때에는 아직 교리들이 정립이 안 돼 있을 때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우리들이 학문적으로 한 텍스트 안에서 그걸 이해하면서 받아들이는 거죠. 그런데 어떤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 말하기를 “아우구수티누스 이후의 1600년 동안 모든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각주”라고 표현했어요. 서구 사상사의 큰 물줄기가 아우구수티누스라는 수문을 통해서 기독교 사상사로 흘러나오게 되는 거죠. 그가 마니교에서 벗어나고, 마니교는 당시 최고의 지성적인 종교였거든요. 벗어난 후에 마니교에 대한 반박문서를 쓰는데 혼신의 힘을 쏟게 되어서 소위 얘기하는 마니교 반박 5경이라고 하는 시리즈를 쓰게 되고 이 외에 많은 마니교의 반박을 위한 마니케니안 디베이트 문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그 때 역사를 보면 이 기독교 신앙에 돌아온 사람이 철저하게 그 지성을 가지고 마니교의 이 철학적인 교리가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하나하나 드러내요. 그 저작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속기사를 두어서 시작 하고 토론하는 걸 다 기록으로 남겨서 양측이 싸인하는 방식으로 역사적인 자료들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 보면 그 마니교의 그 마니교의 근본교리에 대한 비판, 그리고 파우스투스와의 논쟁, 그 다음에 펠릭스와의 논쟁, 그 다음에 아드만투스와의 논쟁, 그리고 펠릭스와의 논쟁, 그 다음에 세큰두스와의 논쟁, 그 다음에 파우스투스와의 논쟁, 이런 많은 논쟁들 속에서 거기에서 상당히 많은 마니교도들을 무릎을 꿇게 만들어요. “봐라..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무릎을 꿇고 내가 마니교 신앙을 버리겠습니다.” 항복을 받아내는 거예요. 근데 그게 지성적인 준비가 없이 가능했겠느냐 이 얘기에요. 철저하게 연구했던 것이죠. 나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몇 세기에 한 번씩 태어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우리 모두 될 수 있을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많은 기독교의 위대한 지적인 유산들을 우리들이 모두다 소유할 순 없지만 태어나서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들의 학문적인 탐구를 더 많이 이해하고 그것으로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풍부함을 더 많이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소명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부지런함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또 신학교에서 몇 년 사역을 하면서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신학교 안에 아주 형언할 수 없는 게으름과 무기력함이 가득하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왜 그렇게 마른 뼈와 같이 사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 학교 다닐 때도 보면 아니 열심히 공부를 하던지 피 나게 전도를 하던지 눈물 쏟으며 기도를 하던지 그렇게 열렬하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도 우리의 시간이 별로 없는데 그걸 한없이 채플 시간에 뒤에 엎드려서 자고 수업 시간에 딴 책 읽고 레포트는 베껴서 내고 남들 공부하는 시간에 잔디밭에 앉아서 수없이 과자 먹으면서 수없이 떠들고 담임목사 욕 하고 그게 무슨 유익이 있겠어요. 무슨 유익이 있겠어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 얘기에요. 어느 신학교에서 제가 강의할 때 일이에요. 학생들에게 수업이 끝날 때쯤 돼서 항상 한 마디씩 그 데보셔날 멘트를 한 적이 있어요. 그 때에 제가 이야기를 했어요. “ 우리들이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한 번 생각해 봐라.” 그러면서 마가복음 1장을 펴서 그에게 읽게 했어요. 1장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시니라”라고 말입니다. 그 앞 부분에는 논쟁하시는 장면, 핍박받으시는 장면, 심방 가시는 장면, 저녁 때 숙소에 돌아오니까 환자들이 잔뜩 모여 있어서 그들을 하나씩 하나씩 고치는 장면까지 다 나옵니다. 이른 새벽에 사역이 끝나셨겠죠? 그리고는 그 다음날 새벽에 아직 깜깜할 때 기도하러 제자들도 잠들어 있었을 새벽인데 한적한 벌판에 기도하러 나가셨어요. 저는 한 15년 전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없이 울었어요.
(찬양)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 분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니까 육체의 연약함이 있으셨을텐데 그렇게 이른 새벽까지 당신의 사역에 온전히 헌신하시고 그리고 그리고도 그 이튿날 새벽 미명에 어둠 가운데 일어나셔서 표표히 한적한 곳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잃어버린 세상과 영혼을 위해서 진액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이죠. 그 때 제가 마음 속에 깊이 결심을 했었어요. 무슨 상황이 벌어지든지간에 새벽기도는 간다..간다...몇 시에 자든지 상관 없다..난 간다..가다가 쓰러지면 난 간다..그것이었어요. 게으를 때마다 그 성경구절을 생각했어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곳이 있지만 머리 둘 곳이 없는 생애를 사셨던 그 분이 그렇게 고난으로 가득찬 생애를 사셨는데..그래서 신대원 다니는 시절에는 금요일날 밤에는 금요기도를 다 마치고 돌아오면 한 시반쯤 돼요. 근데 성도들은 안 가고 교회에서 기도를 해요. 돌아와서 어느 날 따뜻한 아랫목에 드러 누웠는데 가시 방석이에요. 내 마음 속에 이런 소리가 들려.“야. 성도들은 교회를 위해서 그 추운 교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철야기도를 하는데 전도사인 너는 자빠져 자?” 근데 기도를 하러 또 가기에는 좀 그래요. 그래서 그 때 한 동안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한동안 결심을 세웠어요. “금요일날은 철야기도를 하든지 철야공부를 하든지 교인들의 고난에 동참하자.” 우리는 저는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 나는 이 세상에 큰 교회를 목회하는 사람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고 뭐 좋은 집에서 사는 사람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어요. 근데 하나..이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 부러워. 왜냐하면 새롭게 생각해 내기는 커녕 그 사람들이 한 얘기도 이해가 안 가니까 이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눈물 나는데요. 아니 이 사람은 그걸 새롭게 창작을 해내는데 나는 그것을 쳐다보고 읽는데도 이해를 못 한다는게 얼마나 괴로워요. 그래서 어떤 땐 가끔 그래요. “하나님 왜 나는 그렇게 좀 좋은 걸 왜 안 주셨습니까?” 그럼 그 때마다 마음에 위로가 돼요. “네 은혜가 족하다” 그렇죠. 맞습니다. 족하죠. 그 사람들만 못하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야 되잖아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이 신학을 공부하되 토열의 정신으로 공부를 해야돼요.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바둑 기복 가운데 토열국이라는게 있어요. 그대로 전해 내려와요. 바둑을 두다가 한 사람이 졌어. 졌지?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서 바둑판을 꽉 붙들고 피를 확 토하고 거기 엎어져서 죽어버렸어요. 내가 이 인간한테 바둑을 지다니 그러면서 죽은 거예요. 오락을 하면서 바둑을 두는 인간도 그런 열정이 있는데 응? 아니 이 진리를 전하면서 사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이거죠? 그러니까 어때요? 최근에 제가 어느 지방에 있는 교회에 갔어요. 그 지방에서 한창 뜨고 있는 교회였어요. 부목사님이 너무 너무 자랑을 하는 거예요. 자기 교회에 대해서.. 그래서 나는 조금이라도 배우고 싶은 사람이니까 난 항상 목회에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나 좀 배웁시다” 근데 막 너무 자랑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한 번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부목사님. 당신 총신에서 공부했죠?”그러니까 “그렇습니다.”“중생과 회심 알죠?” “예 압니다”“근데 당신 그렇게 교회를 자랑하는데 내 시비거느라고 묻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 보는데 뭘 담당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장년을 담당하고 있대요. “장년 당신이 교구를 담당하는데 중생과 회심 없으면 구원 없죠?” “맞죠 목사님” “당신이 양심적으로 목회자로서 당신 교회 장년 교인이 얼마나 중생했다고 생각합니까?”굉장히 우울해 지는 거예요. “30프로가 약간 안 될 걸요.” 그래 내가 그랬어요. “절대 책망하는게 아니라 그럼 목사님 이제까지 저에게 뭘 자랑하신 겁니까? 뭘 자랑하신 겁니까?” 존 오웬 목사님은 목회 사역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 두 가지로 대답했어요. “사람을 중생하고 회심에 이르게 하는 것, 두 번째는 회심한 사람들이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며 순종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목회 사역의 주임무라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이 기독교 신학을 팽개치고 사상이 없는 설교를 한 결과 교회에 이르게 된 재앙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교회에서 누구도 중생했느냐고 묻는 이 시대에 뒤떨어진 질문 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리팬트 월 패르시..회개하십시오. 당신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이런 식의 설교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혁주의 안에도 별로 없어요. 그게 뭡니까? 인간의 철저한 죄에 대한 진지한 설교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는 설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대한 인간의 소망,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의 핵심 아닙니까? 근데 도대체 누가 이것을 설교합니까? 여러분은 설교하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저와 함께 저의 설교를 듣고 함께 대화를 나누다 은혜 받은 형제가 교회에 가서 수요 예배 설교 시간에 펼치면서 회심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회심론을 외쳤어요. 잘렸어요. “너는 신학 사상이 안 맞으니까 교회를 떠나라” 담임 목사가 통보했어요. 이게 개혁주의에요. 이게 합동측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버티고 나갈 수 있는 신학적인 저력이 기본이 너무나 안 돼 있는 거라 이 얘기에요. 여러분들 삯꾼 목자가 의도해서 삯꾼 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권위주의, 저도 한 때 그런 지금 그런 사람으로 변해 버렸지만 왜 이렇게 정치적이고 말이지 이렇게 사람 어쨌든 목사라고 할 때 제일 생각하기 싫은 그런 그 그런 상태 있잖아요. 왜 그런 사람이 됩니까? 진리에 비치고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알고 진리를 전하는 그 일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그렇게 야비한 일에 신경을 쓸 새가 있습니까? 정치노름이나 하고 권력이나 한 번 손에 쥐고 사람들 타고 다니고 사람들 깔보고 줄 세우고 그렇게 해서 자기를 휘두르면서 그런 일을 할 여유가 있습니까? 진리는 언제 탐구하고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매일 매일 사랑하셔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를 드시고 시편에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영광 나의 방패, 내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기쁨이 있는 사람이 교인들 타고 다니고 교인들한테 금품이나 갈취하고 그런 바보 같은 행동 합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교인들한테 대접 받기를 좋아합니까? 우리가 그럴려고 들어섰습니까? 그렇게 해서 교회 전체를 말이죠 비민주적적인 집단을 만들고 그렇게 하면서 폭군처럼 군림하고 그것이 과연 개혁주의 입니까? 주의 종이라고 하는 그것은 존귀하게 주의 종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곁에 있다가 주님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무릎을 꿇기 때문에 원님 덕에 나팔을 부는 거지, 목사가 그 무엇이 그 자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검은 가운 뒤집어 쓰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냐구요. 그게 전부 다 다 가르칠 내용이 없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독교 서점 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수련회에서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서점 주인 한 사람이 와서 저한테 얘기해요. “목사님, 우리는 목사님에게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제발 교회에서 도서비 주면 용돈으로 쓰지 말고 책이나 사십시오. 그러면 우리 기독교 서점 먹고 삽니다.” 안 한다 이 얘기에요. 뭐 하러 합니까? 그렇게 비싼 돈을 들여서 그렇게 그렇게 해야 될 이유가 뭐가 있느냐 이 얘기에요. 저는 교회 개척해서 7명 시작을 해서 14년이 지났습니다. 교회 3층에서 삽니다. 공장 건물이에요. 아파트 사주겠다고 그래요. 그 사줄 돈이 있으면 책을 사 달라 그랬어요. 만약에 5억원어치 책을 사면 나는 춤을 추겠다고..그게 뭐냐 이거에요. 정말 정말 우리는 각성해야 돼요.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정말 전심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우리는 진리의 종들입니다. 진리를 책임 맡은 사람들, 우리의 입을 통해서 그 진리를 외칠 사람들, 우리의 온 몸으로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인카네이션하여 보여줄 사람들입니다. 저는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빈이나 존 오웬이나 스펄젼이나 로이드 존스 이 사람들을 보면서 아주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했어요. 그것이 뭐냐면 잘 들으세요. 자신의 서재를 생츄어리로 삼았어요. 자신의 서재를 성소로 삼았어요. 그래서 그 서재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며 깊이 울고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의 귀한 빛을 발견하고 그 진리와 함께 숨쉬면서 그 진리 속에서 영혼과 정신이 고양되는 지상의 기쁨을 누렸던 거죠. 그래서 역사의 기록을 보면요, 진짜에요. 역사의 기록에 보면 에드워즈가 목회하면서도 하루에 13시간씩 공부했는데 서재에서 나올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났대요. 근데 그 사람만 그랬는 줄 알았더니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기록도 똑같이 나와요. 서재에서 나올 때 얼굴에서 환한 광채가 비치는 것을 여러 사람이 경험했다는 거예요. 그게 뭐죠? 우리는 영성은 영성이란 말 자체도 개혁주의에서 쓰면 안 돼요. 에피타스에요. 경건이에요. 전부 다 이 그 하튼 쓰면 안 돼요. 근데 어쨌든 보십시오. 그런 그렇게 해서 신앙의 체험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탐구와 학문이 한 짝을 이뤘던 거죠. 진리를 깨달은 그 곳에서 감격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는 그 곳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래서 나올 때는 얼굴에서 환한 광채가 비췄어요. 우리 나라에서도 박윤선 목사님에 대해서 그런 증언을 하시는 분을 여러분을 만났어요. 그 분이 정말 주석을 쓰다 나오시면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나는 것을 봤대는 거예요. 스펄젼에 대해서도 똑같은 기록이 나와요. 그리고 그 전에 사람이긴 하지만 로버트 머리 맥체인에 대해서는 더 생생한 기록이 있죠. 설교하러 올라오면 교인들이 설교 시작도 안 했는데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왜 ? 그 얼굴에서 비치는 그 환한 거룩한 광채 때문에 말이죠. 이게 몇 개의 학위, 이런 것들이 가져다 준게 아니죠..몇 권의 저술 이런 것들이 가져다 준게 아니죠. 속에 깊이 들어간 가죠. 진리에 대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철저한 경험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사용해서 진리를 알고 싶어했던 거죠. 그것이죠. 그러니까 오늘날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회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죠. 내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목회에 있어서 최고의 아름다운 꽃은 중생과 회심의 역사에요. 성령께서 그 진리의 사역에 복을 주셔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깨닫고 거듭나고 죄를 책망하고 중생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은 사람들이 진리와 맞부딪혀 피 흘리고 쓰러지고 그 안에서 진리를 향해 다시 태어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는 이 놀라운 영혼의 변화, 진리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죠. 종교 개혁자들이 이 신앙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꿈베로(?)의 신앙이에요. 성령이 역사하시되 허공 속에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은사 받은 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과 함께 사람들의 지성 속에 역사하여 그들을 굴복시키는 놀라운 간증을 가지고 신학을 계속했던 거예요. 이게 개혁신학이에요. 그랬기 때문에 그 놀라운 체험의 신앙으로 그리고 이론의 신학으로 그 위에 혼이 불어 넣어진 거룩한 신학으로 이 모든 카톨릭주의와 소시니안주의와 그리고 알미니안주의와 이 모든 것들을 무찌르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거룩한 강인함이 필요합니다. 단지 성령에 의해서 열 받은 강인함이 아니라 진리에 굳게 붙잡힌 사람, 이런 강인함, 이렇게 믿을 수밖에 없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살 수밖에 없는 그 강인한 홀리 터티네스,편,,,종교 개혁을일으키고 난 후에 칼 5세가 마틴 루터를 보름수읍(?)에 소환했습니다. 그리고 설득했습니다. “ 너의 견해를 취소하고 나라와 교회를 평안하게 하라” 그 때 마르틴 루터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죠? “주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도 달리는 어찌 할 수가 없나이다”달리는 어찌할 수가 없나이다. 오늘날 여기에서 교수님들이 힘을 다 해서 개혁주의 신앙을 가르칩니다. 가서 졸업하자마자 성공주의와 바꿉니다. 성장주의와 바꿉니다. 성공과 바꿉니다. 현실과 바꿉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교회가 교단만 합동측 간판만 걸면 개혁주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 망음 속에 살아 있는 칼비니즘이 없는데 개혁주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칼빈주의는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요한 사도가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일들의 계를 보였고 기다리고 있는데 두루마리 하나가 내려옵니다. 봉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하늘에나 땅 에나 이 인봉을 떼어 보일 만한 자가 없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갇혔을 때 나이 90세가 넘은 백발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때 백발의 노사도가 이제 이 계시를 열어서 네게 보여 줄 사람이 없다 그랬을 때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어떤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에끄라션 폴루”라고 나옵니다. 흑흑 흐느끼는게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 그 할아버지가 방성대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지 못 해서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 하기 때문에 내 사명이 진리를 전하는 사람인데 나는 진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도 아마 그런 기도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정말 누가 이 비옥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 이 개혁신학을 목회 현장 속에서 최대한 그대로 구현하여 그래서 이 시간에 이렇게 성공주의가 판을 치고 그리고 성장주의에 매료가 되고 동료 목회자들을 경쟁자로 생각하며 교회의 공동체성이 깨뜨려지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도 그렇게 진리의 말씀만을 외치면 구석구석 그 진리를 그리워하는 당신이 구원하고자 정하신 양떼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너무 기대합니다. 너무 기대합니다. 성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꿈일 수 없습니다. 그냥 진리를 외치고 그 진리 때문에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전 어느 덧 목회한지가 교회를 세우고 14년이 지났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5년만 더 하고 퇴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요즘 아침마다 마음 속으로 무슨 소리를 혼자 되뇌이는지 아십니까? 아무 것도 기대걸지 말자. 아무것도 기대걸지 말자. 무슨 뜻인지 압니까? 은퇴 할 때 교회가 아무 것도 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왜? 그 마지막에 10억 20억 놓고 교회하고 흥정하면서 교회가 갈라지는 것들을 눈으로 보면서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요. 주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부르셔서 이 복음 사역에 발을 들여놓게 하실 때 우리가 이 세상의 영광을 구해서였습니까? 안락하고 편안한 삶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기대 때문에 우리들이 목회 사역에 들어섰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만난 주님, 허우로운 인생의 날에, 벼랑 끝에 선 인생의 위기에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주님, 그 분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러니 너무 감사하죠.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는 상관 없이 조국 교회 한 모퉁이에서 그냥 겸손하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존귀 영광은 그 분이 다 받으시고 멸시 천대는 우리가 짊어지고 우리의 인생을 마감하는 날 까지 섬기게 해 주신 주님 감사해야죠. 여기 들어서지 않았습니까? 저도 맨 처음에 이 하교에 합격을 하고 정원에 앉아서 한없이 울었어요. “제가 무엇인대 이렇게 유서 깊은 학교에 입학하게 해 주셨습니까? 주님이 기회를 주셨으니 잘 배워서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라고 말이죠. 어찌 이 고백을 저만 가지고 있겠어요. 그래서 이 시대를 본받으면 안 돼. 맨 처음 자기를 불러주신 주님을 깊이 사랑하며 매 순간 매 순간 그 소명에 충실하면서 그러면서 불꽃처럼 치열하게 피를 토하는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해요. 여러분들이 많이 고통스럽고 가시밭길 같은 고통스러운 연단을 받으며 신학을 졸업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도들이 행복하게 돼요. 그래서 이슬처럼 잠시 태어났다 사라지는 우리의 인생인데,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제단에 다 바쳐져서 찬란하게 타오를 때까지 그 한 순간 산화하는 그 순간을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해 준비하다가 주께서 세워주시는 그 날에 그렇게 아름답게 타올라 우리 선배 목사님들이 다 못 이어간 이 조국 교회의 위대한 역사를 여러분들이 징검다리처럼 이어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교회와 기도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41-46).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번에 제가 설교하는 것은 사실은 설교라기보다는 세미나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을 읽고 계속 딴소리를 하나 그렇게 시비를 걸지 말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지난 시간에는 학문과 경건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랑과 열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들어가실 때 성을 보시면서 우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에클라우셈”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모두 3번이 나오는데 두 번은 에클라우셈이라고 씌여졌고 또 한 번은 “에다클리우센”이라고 씌여졌습니다. 에다클리우센은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고 에클라우스는 소리를 내서 엉엉 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엉엉 우셨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죠. 아무도 예수님의 그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우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십 년 후로 다가오고 있는 예루살렘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미리 알고 계셨고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밀려오면서 예수님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역사의 미래에 대한 통찰로 눈물을 흘리시고 우셨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는 이 부분을 상세히 주경하는 것이 설교의 목표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 마음 안에 있었던 이러한 뜨거운 열정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느냐 묻고 싶은 것입니다. 제이 앤 케인즈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 영국에서 공부를 한 경제학자였습니다. 대단한 실력가였지만 영국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의 학문적인 깊이를 인정받아서 미국에 크게 기여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침 미국은 이제 일대에 없었던 1939년도에 대공황을 경험하고 있었고 이때에 이 공황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이제 이론적인 대안들을 제시함으로써 미국을 경제 공황의 늪에서 건져낸 인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경제학을 연구하려는 모든 후배들에게 늘 해 주는 교훈이 있었습니다. “Have a cool head and warm heart 경제학을 하려거든 차가운 머리와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계량 경제학에 의한 합리주의적인 경제정책이야말로 모든 국가의 부를 불러오는 최고의 방척인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시경제의 안목에서 이 모든 경제를 이론을 새로 세우면서 가장 합리적이고 좋아 보이는 경제 정책이 수행된다고 할지라도 그 그늘에서 고통하는 사람들 때문에 합리성을 포기해야 되는 때가 있다는 사실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학은 최고의 과학적인 학문이지만 인간을 위한 학문이니 인간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없이는 이 경제학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후일 그의 이러한 사상은 이제 이 합리적인 경제학에 경제학의 도덕성을 가늠하는 규범 경제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야를 불러 들이는 그러한 시도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신학을 하려거든 냉철한 지성과 하나님과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함께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열정과 지성이 함께 갖추어지기를 원하시는데도 왜 그런지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런 점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근본이 냉철한 지성이냐 아니면 뜨거운 열정이고 체험이냐...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 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온 것이 교회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에 이러한 신앙에 있어서 지성과 그리고 열정에 있어서 어느 쪽에 신학이 치우치면서 오류에 빠졌는가를 한 번 일별해 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갖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축으로 해서 신학과 이지와 교리를 중시하는 경향, 그리고 신비한 체험과 열정, 하나님과의 직통적인 내적 교제를 중시하는 경향이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계속 해 온 것이 바로 교회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에요. 초대교회의 생명력 있는 불길들이 식어가고 로마 제국은 드디어 사상적인 박해를 가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기독교의 대안으로 많은 변증가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교회는 아주 든든한 교리들을 수립할 수 있었고 애매하던 기독교의 모든 그 규칙들을 새롭게 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러는 한편 교회에 생명력이 식어가게 되었고 이러면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몬타누스 운동이었습니다. 주후 2세기경서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극단적인 신비 체험과 열정, 그리고 감성을 중시한 신앙의 경향이었습니다. 몬타누스 자신을 통해서 보혜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교리를 내세운 대표적인 이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한 쪽으로 치우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감성과 체험을 중시하는 이 몬타누스주의는 쇠퇴하고 이번에는 기독교에 대한 지성주의적 이단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2,3세기 어간에 인간의 구원을 지식에다 둘 정도로 지식에 치중하였던 영지주의라고 하는 중요한 이단과 마주하여야 했습니다. 그 후 다시 신앙에 있어서 수도와 개인의 체험, 열정, 내적 관상 같은 것들을 중요한 수도원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제 4세기 넘어서 시작이 되어서 10세기까지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중세의 신비주의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중세의 신비주의를 복원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복음주의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토마스 머튼 같은 사람들이 다시 일으키고 있는 이것은 매우 우리가 신학적으로 경계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토마스 머튼의 생애에 대해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중세의 수도적 영성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너무나 청빈하고 깨끗했지만 마지막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중세의 신비주의를 현대에 재건하기 위해서 그가 만난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고승이었고 마지막에는 베트남 불교의 지도자였던 팀나칸을 만나는 것으로 해서 범세계적인 종교의 다원주의를 꿈꾸는 것으로 그의 생애는 마쳐졌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자신의 인생의 공공연한 대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복음주의 목회권에 와서 버젓이 커다란 교회들을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관상기도회니, 영성이니 하는 것에 휘몰아치면서 그러면서 새로운 수도원주의의 바람들이 불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 개혁주의는 침묵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알지도 못 하는 무지한 양떼들은 여기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죠. 10세기까지 이런 운동에 접어들다가 11세기에 접어 들면서 서서히 이제 이 수도원 주의 운동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식상하게 되자 새로운 지성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중세의 스콜라주의입니다. 14세기까지 계속된 스콜라주의는 여러분들이 아다시피 희랍의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과 구원을 설명하려고 했던 신학사조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면 뭐든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교만으로 이제껏까지 논의되어 오던 모든 신학의 주제들을 세분하기 시작했고 미세하게 쪼개어서 번세한 스콜라철학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와중에서 단지 철학의 틀을 빌린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더 큰 야망이 있었으니 철학과 신학의 통합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에 있어서 명제적인 사실은 오직 성경만이 제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철학 속에서 이런 명제들을 제시하고 이것으로써 성경에 있는 진리들을 억압하면서 말하자면 철학을 통해서 이 전 세계를 포괄하는 지식의 체계들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죠. 이러면서 신앙적인 열정 같은 것들은 하찮게 생각하게 됐던 것이죠. 그러나 그 다음에는 14세기 15세기에는 이 스콜라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 운동입니다. 중세 후기에 이 신비주의는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존 에쿠와르트, 존 타올러, 헨리 수소, 공동생활의 창립자인 러이스 브레이크 등에 의해 후일 에보츄 모데르나라고 하는 새로운 경건주의 운동의 물결로까지 이어지는 이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에쿠와르트는 정죄되고, 교황 요한 2세에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들 중 상당부분을 이단적인 것으로 공포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이성을 중시하고 체험을 무시하는 강하게 빠진 스콜라철학에서 몸부림을 쳐 본 그런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 오랜만에 이 신앙과 신앙에 있어서 이 체험과 이 진리, 지식이 균형점을 잡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6세기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 칼빈, 쯔빙글리, 그리고 멜란히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종교개혁 이전에 있었던 종교개혁가들, 팀베이나 이런 많은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성경, 특히 복음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지식과 경험이 일체된 가운데에 종교개혁이 태동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의 글을 보면 냉담하고 차갑지가 않고 뜨거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존 캘빈이 디모데서를 설교한 설교를 읽으면서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의 직무는 성경의 직무와 연속선상에 있다는 거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 그리고 또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그는 설교에 있어서 설교 본문과 설교자의 패밀리 에러티, 즉 친밀성을 강조하였고 그 친밀성의 근원은 본문에 대한 영적인 체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설교 속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만약에 아비라면 당신의 새끼가 잘못했을 때 얘야 그러지 말거라 이렇게만 말할 수 있겠느냐. 만약에 명백하게 그가 잘못했다면 이 놈의 자식, 네가 그 따위로 행할 거야. 너 정말 죽고 싶어 라고 회초리를 들 것이다 교인들에게 그렇게 설교하라”..그러나 종교 개혁 후기부터 일어난 이 교파간의 치열한 교리 논쟁, 특히 카톨릭과 루터파와의 논쟁을 통해 그 변증의 과정에서 새로운 번세 철학적인 요소가 중시되고 교회는 어느 정도 생명력을 결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리 보다는 삶이라는 구호를 내건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17, 8세기에 있었던 경건주의 운동입니다. 할례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진전 도르프, 프랑크푸르트의 목회자이던 필립 야곱 츄페너 등에 의해서 일어난 이 운동은 교회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교리 보다 삶이라는 그들의 이 순수한 그 의도와는 달리 후일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고 복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인류 평화주의의 추구에 의한 보다 나은 세상의 건설 사이를 혼돈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마는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제 19세기로 넘어오게 되고 19세기 말쯤으로 넘어오게 되면 자유주의의 물결에 의해서 모든 대륙들이 거의 삼킨 바 됩니다. 이 때에 이제는 초자연적인 계시 같은 것들은 믿지 않고 그리고 이제 인도주의적인 그러한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에 모든 것들이 집중되게 됩니다. 이런 속에서 성경에 대한 곧은 비평이 이루어지게 되고 계시의 신적인 기원을 부인하는 기독교의 절삭점(?)부인하는 이러한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서 이제 서서히 지성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들이 미국에서 구라파에서 쇠퇴하게 되고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또 다른 하나의 체험을 중시하는 신비적인 경향의 운동들이 일어나고 대중의 환영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오순절 운동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이런 것들이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이제 포스트 모더니즘의 치하에서 진리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시대의 정신과 함께 이러한 것들이 아주 혼란스럽게 되어 가고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극단적인 신비체험을 강조하고 또 한 쪽에서는 윤리운동이 일어나고 또 한 쪽에서는 기독교를 차가운 지식의 세계로 보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이 이제 목회의 후보생들로써 하나님 앞에 훈련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을 우리들은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기는 하지만 그러나 가장 좋은 해결책은 도대체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무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는 것이 가장 훌륭한 해결책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러한 문제들은 도대체 어떤 식일까요?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개념부터 손을 대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 하게 하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트”곧 “다트 엘로힘”이었습니다. 다트 엘로힘..곧 하나님의 지식,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버려서 더 이상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 하게 하셨다고 하였으니 결국 이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거룩하고 선택된 백성들의 모든 총체적인 삶, 한복판에 있는 핵심적인 요소였던 것입니다. 자...그렇다면 도대체 이 다트 엘로힘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다트라는 이 명사는 야다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왔고 구약 성경에서 이 야다라는 동사가 제일 먼저 씌여진 것은 창세기 2장에서의 일입니다. 아담이 하와와 함께 동침하니 아이를 낳았는데 가인이었더라...할 때의 동침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이 야다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나는 저 남자를 안다”라고 말하면 혼사길이 막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를 안다라고 하는 것은 같이 성교를 했다라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똑같은 표현이 마태복음 1장에 나오지 않습니까? 누가복음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마리아에게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 할 때 마리아는 물었습니다.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거늘 내가 사내와 교접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다라고 하는 이 단어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 히브리 마인드를 대충 여러분들이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지식과 경험을 세분하게 나눈 것은 히브리의 통합적인 마인드가 아니라 그리크의 분석적인 마인드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그리크의 분석적인 마인드가 아니라 히브리의 통합적인 마인드하에서 기록이 된 것이죠.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지식의 개념이 어떤 것일까요? 어떤 사실에 대한 지성적인 앎과 그것에 대한 감정적인 경험이 하나로 합쳐진 그것이 바로 참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지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바로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이 지식이 공동체적으로 경험될 때 그 공동체적으로 함께 공유하고 있는 다트 엘로힘이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의 유니티를 이루게 만들어 줬던 것입니다. 좀 더 핵심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체결이라고 하는 것이 껍데기라면 그 껍데기를 꽉 채우고 있는 내용은 그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를 통해서 공동체적으로 함께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그 내적인 지리였습니다. 이 두 가지 껍질과 외포와 그리고 내면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 하고 언약관계 속에 들어오지 못한 다른 모든 이방 백성들과는 구별되는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제 호세아 선지자가 그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너를 버리노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과한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역사를 타고 구약 속에서 면면히 흐르게 됩니다. 선지자들이 꿈 꾸고 바라보던 미래,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이뤄질 하나님의 왕국의 완성은 바로 이런 다트 엘로힘, 그것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편만하게 되고 그 안에서 모든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세상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이 꿈 꾸던 이스라엘의 왕국의 미래상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런 다트 엘로힘 사상은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기독론적인 해석을 거치는 가운데 바울 신학 속에서 구체화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너시스투 크리스투”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의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히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아주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중보로 성령 안에서 창조된 것처럼 또한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모든 상호교통이 깨어진 이 무질서한 세상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중보자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연합된다라고 하는 사상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구약에서 다트 엘로힘이라고 했던 그것이 신약에서 기독론적인 해석, 그리고 교회론적인 해석을 거치면서 바울을 통해서 새로운 신학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너시스투 크리스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빌리보서에서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이 고백, “내가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유대인 중에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으며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는데 그랬는데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 왜냐하면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 그 고백의 의미를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그너시스투 크리스투와 그리고 다트 엘로힘, 이 두 사상은 구속사적으로 기가 막힌 연대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따라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독자적으로 찾아야 될 것이 아니라 수도원에서 관상을 하고 토마스 머튼의 제자가 될 것이 아니라, 네? 아니란 말이야..네?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탐구하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그렇게 갖고 싶었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다트 엘로힘을 소유하게 된다 이거에요. 유일한 길이에요. 모든 하나님에 관한 신비한 비밀이 오직 그 예수 안에 있는 거예요. 그 사상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일생의 비전이 뭐였는지 생각해 보면 오늘날 이 유치한 교회 성장주의의 비전놀음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로마에다 500개 교회 세우는 것이 사도 바울의 비전이었어요? 100만명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세례를 주는 것이 사도 바울의 비전이었어요? 아니면 세계에서 제일 큰 처치빌딩 세우는 것이 그 바울의 비전이었어요? 5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바울의 비전이었다고 말한다면 난 그 사람을 비웃겠어요. 그의 생애적인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합니다. “내가 나의 얻은 의는 곧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말합니다. 자기의 일생의 비전이 이거라고 말합니다. 다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붙잡았다함도 아니라 미친 듯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데 그 비전이 뭐였어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여...그랬어요. 알고자 하여...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비전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리고 급기야는 그리스도의 그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었어요, 그게 비전이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개혁주의 목회자가 되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 하신 그 예수그리스도 한 분의 인격에 철저히 매인 사람이 돼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계 속에 있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지혜를 발견하고, 그래서 참 재밌는 것이 뭐냐면 존 오웬 목사님은 창조론을 기독론 속에서 진술했어요. 큰 창조론의 틀을 기독론 크리스톨로기아에서 기독론을 진술해 가요. 그 분의 판단으로는 기독론 속에서 창조론을 다루는 것이 가장 복음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 안에 무엇인가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능을 주셨어요. 그게 뭐냐면 하나는 감각하고 사변하는 기능이고, 또 하나는 마음 안에 있는 호불호의 성향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눈을 통해서 내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보고 그것이 지성 속에 들어와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은 대개 세 가지의 인식론적인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거예요. 첫째는 감각이에요. 감각을 통해서 물상들이 뇌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들어온 그것들은 하나의 느낌과 커다란 인식의 질료가 되어서 불명확한채로 어떤 질료의 상태로 우리의 정신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을 “퍼셉션”, ‘지각’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것들이 마치 형상을 부여받고 물체가 되듯이 우리 속에 있던 어떤 고유한 관념을 통해서 해석됨으로써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우리 속에 인식되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카그니션’, ‘인식’이라고 부르는 거죠. 이렇게 해서 내 밖에 있는 사물들이 인식론적인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인식론적인 과정은 필연적으로 해석을 필요로 해요. 그럼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그러한 해석을 무엇이 미치냐 하면 우리 안에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지식만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우리의 감정, 우리 안에 있는 애정의 성향 같은 것들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서에 붙잡혀 있게 되면 사물들 모두를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의미적으로 연결되며 해석이 되게 되고,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들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하여 연결을 짓고 해석이 되게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우리 안에 있는 인식론적인 특성이에요. 어느 장로님이 선심 예배 시간에 성경 봉독하러 올라갔는데 이 분이 배추장사 하시는 분이었어요. 예배 시간 내내 배추값이 떨어진 것 가지고 고민을 하다가 “박 장로님 올라오셔서 성경봉독 해 주시겠습니다.” 그러니까 얼핏 해서 올라가서 한다는 얘기가 “오늘 설교 본문은 요한복음 3원 16전입니다.”이 마음의 무슨 느낌이 있는가에 따라서 이것들이 이게 인식이 좌우되는 거예요. 그러니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학을 공부하는데 이 신학이라는 것 자체는 두렵고 사랑스러우신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에 대한 학문을 공부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은 그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그 학문의 목적이 되는 경배의 정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의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고, 그런 속에서만 하나님에 관한 제대로 된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오늘날은 세상이 변했다고 많이 이야기하고, 그래서 이제 옛날의 목회의 방식들, 그리고 전설적인 목회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이 사람들의 이 모든 체험 같은 것, 경험 같은 것들은 별로 필요가 없고, 그런 지혜를 배울 필요는 별로 없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오늘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세대는 옛날하고 전혀 틀린 세대고 격변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정신의 목회 방식이 필요하고 우리의 선배는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직면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분들에게서는 별로 배울 것이 없다라고 생각을 하는거죠.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든지 그렇게 얘기하지 않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네 시대는 새로운 시대라고 생각했고, 옛날 시대의 재판이라고 생각한 시대는 아무 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이러한 우리 속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교회와 이 시대에 대한 견해들이 정상적인 견해인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에요. 저는 오히려 지금 교회가 세상이 변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 말고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진짜 큰일난 것은 세상이 변한게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너무 많이 변한거예요. 자기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교회가 경악을 하지 않으면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아무리 충격을 받아도 새롭다고 내놓는 그 방법들이 결코 교회를 살리지 못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지금 교회가 너무 많이 변한 것, 거기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죠? 교회 안에서 진리에 대한 진지한 체험이 사라져 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도대체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신앙생활 그 자체가 진리를 찾아가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죠. 사도 시대 때에 유대교 속에 묻혀있는 한 종파로 알았던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그들이 보기에 새로운 철학과 종교를 들고 나왔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뉴 웨이 오브 라이프’였습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의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새로운 철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복음 전파에 대해서 그렇게 철학자들과 사색하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의 사상에 대한 개방성이 이러한 자유를 어느 정도 허락을 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곧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곧 새로운 철학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신앙 때문에 자신의 삶을 바꾼다든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상에 있는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수준이 더 낫지도 않고 또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고 이렇게 방송을 통해서 교회가 얻어맞고 하면 분노하고 그리고 궐기대회도 해 보지만 교회의 도덕적인 수준에 뭐 특별한 변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별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심각한 교회의 본질의 변화 중심에는 무엇이 있냐면 이 진리에 대한 체험의 결핍이 있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전도라고 하는 것은 그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트루쓰 커뮤니케이터’가 되는 거예요. 진리의 전달하는 전달자들이 되는 거예요. 자기가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 분에게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전수받고 그렇게 그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놀라운 은혜 속에 살면서 천국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그래서 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보다 더 소중한 그런 영원에 잇대인 어떤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이 험악한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이기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그 모습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의 모습이에요. 근데 문제는 뭐죠? 진리에 대한 체험이 교회에서 사라지는 것이죠.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교회 모두 다니시고 사역을 하고 계시니까 여러분 주위에서 최근에 진리를 경험하고 그 진리 때문에 회심한 사람을 얼마나 만났습니까? 그 진리 때문에 예전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도입한 사람을 여러분들이 얼마나 만나게 되었습니까? 영혼의 변화를 여러분들은 교회 속에서 발견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이 이처럼 진리에 대한 체험을 상실한 것은 전수받을 진리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런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진리를 전달해 주는 주된 통로인 목회자 자신이 이 진리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이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목회라고 하는 말은 교회 경영 정도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지. 그 이상의 일상적인 목회자의 그 기능을 수행하는 정도로 이해되지, 더 이상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목회자에 대한 중요한 그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미국을 기준으로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목사 하면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정체성은 트루쓰 커뮤니케이터였습니다. 진리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19세기의 중엽에 미국에서 중대한 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산업혁명입니다. 구라파 보다는 한 100년 뒤졌죠?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물건을 만들어서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한테 실명제로 팔았습니다. 재화의 유통 속에 인격적인 교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장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대량 생산이 이뤄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량 생산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자본과 기술, 그 다음에 노동력 등을 한꺼번에 모을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시가 발달하게 되는 거죠. 예전에는 나 혼자 성실하게 농사를 지으면 이제 농사를 할 수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집 안에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면 연장이나 도구들을 생산해 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많은 도시의 인프라를 사용하지 않으면 이 생산이 안 되는 거죠.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산의 한 요소로 작용을 하게 되는 거죠. 이제 누구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면서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의 상대성이 인정되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누구의 의견도 이젠 절대적인 것이 없는 그렇게 고집해서는 생산 활동과 경제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죠. 예전에는 동네 사람이 동네 사람에게 팔았는데 이제는 대량 생산해 내고 업자들이 그것을 사다 날라서 유통망을 통해서 배포하고 그리고 알지 못 하는 미지의 고객들에 의해서 구입되어 소비되게 되는 거죠. 사람들의 관계는 사라지고 돈과 자본, 기술이 물 처럼, 비인격적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죠. 이 속에서 진리에 대한 심령들이 급격히 약화되지 시작합니다. 물론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부흥이 있었다면 괜찮았을텐데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부분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사회 전체적으로 진리의 절대성 자체에 대한 확신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전쟁이 끝나기 시작하면서 이뤄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식이 된 속에서 이제 목사라고 하는 사람도 우리가 필요로하는 삶의 다양한 영역 중에 문화, 교육, 생활, 뭐 등등 있는데 그 중에서 종교라고 하는 한 부분에 맡아서 우리에게 서비스해 주는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리고 그 사람의 이야기는 또 많은 나의 삶과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견해 가운데 한 견해일 뿐이라는 생각이 사람들 현대인 사이에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는 준비가 되는 거예요. 자, 이렇게 된 속에서 해결책이라고 한다면 결국은 이 진리가 결코 그런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여전히 이 시대가 수없이 변했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목회자들을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로 부르셨다고 하는 것들을 실제의 삶의 현장을 통해서 목회 사역의 현장을 통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것은 결국은 설교자 자신이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진리에 사로잡히는 일들이 필요하게 된 거예요. 필요한 거예요. 그것이 바로 뭐냐면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체험에 의한 이 거룩한 열정과 사랑을 소유하게 되는 거라 이거죠. 저는 뭐 직접 교육을 그 분을 통해 받지 못했습니다만, 아주 가까이 지내시던 제자가 저의 스승이셨기 때문에 자주 그 분에 관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우리 학교에 계시던 고 박윤선 목사님이셨습니다. 50이 훨씬 넘으셔서 서울에 교회를 하나 개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설교를 하셨어요. 그 교회에 문선명 교파에 속한 대학교수 여교수 한 사람이 전도를 받아서 예배에 참석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수요예배 주일예배 이렇게 지내면서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지내오게 되었어요. 한 두어달 지난 후에 부목사님이 이 여교수를 만나서 물었습니다. “교수님, 이제 우리 박 목사님 설교를 그 동안에 여러 번 들어셨는데 이제 좀 깨달아지십니까?” 이 여교수의 대답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커요. 그게 뭐냐면 “저는 솔직히 지금도 문 선생님 말이 맞는지 박 목사님 말이 맞는지 잘 판단이 안 섭니다. 그러나 제가 두 달 설교를 들으면서 확실히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확실히 깨달은 것 하나는 저 박 목사님이 외치는 말씀이 진리일 가능성이 많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분이 외치는 설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저렇게 나이 드신 분이 설교 시간에 저렇게 피를 토할 듯이 온 몸으로 부르짖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는 누가 저더러 설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피 바른 성경의 진리에 대한 발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설교자 속에서 성경을 통해 깨달아진 진리가 진액과 피를 바르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간에게 전달된 발화, 이것이 바로 설교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 체험하지 못한 진리를 설교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이 현대 교회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이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인들을 방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들은 방자하게 마련입니다. 이 사사기를 보십시오. 여호수아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던 모든 조상들이 죽게 되자 그들은 각자 자기의 옳은대로 행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은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동기가 순결하지를 않습니다. 즉, 이 신학의 공부를 통해 성경을 더 잘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공부를 통해서 보다 좋은 자리를 마련하고 그리고 공부한 후에는 다른 사람보다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더욱이 그러한 공부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사람들을 향해 자만해 지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자기의 자랑을 위해선 공부하는 것은 신학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도 우리가 이런 식으로 신학 공부를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학을 시작할 때 뿐만이 아니라 그 신학적인 지식을 추구하고 쌓여가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까지 하나님에게 철저히 복종되고 하나님에 관한 아름다운 진리들을 한하나 배워갈수록 예전보다 그 분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이 사랑과 열정의 정서 속에서 성숙되어져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제 10장은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9장까지 계속해서 예수님 곁에 있었던 소위 제자들이 10장을 계기로 해서, ‘아포스톨로스’, ‘사도’로 파송이 되기 때문이죠. 이렇게 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은 본격적으로 파송받은 사도로써 일하게 되고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칠 수 있는 권세를 주셔서 영적인 놀라운 권세를 주셔서 자기의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무엇이엇습니까? 마태복음 9장에서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이 세상에 파송하셨던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라고 하는 이 번역이 희랍어 성경에는 ‘에스플랑 크니스데’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수동태 동사입니다. 이 에스플랑 크니스데는 적당한 번역을 찾기 어려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자적인 이 뜻은 ‘비 무부드 투 원스 바울’입니다. . 즉 한 사람의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라고 하는 것이 이 에스클랑 크니스데의 원래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제 팔레스타인의 문화적인 맥락과 관련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좌소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콩고 사람들은 콩고나 우간다 지역의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때 우간다의 독재자였던 이디 아민이 자기의 정적을 죽여서 간을 꺼내서 씹어 먹은 사건이 신문에 보도가 되어서 전세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의 문맥에서 보면 대적자의 어떠한 부활도 방지하는 훌륭한 종교적인 방책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보면 에스플랑 크니데스라고 하는 단어는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말로 등가번역을 시도한다라고 할 것 같으면 이런 번역이 되는 것이죠.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셨으니..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신학교에 올 소명을 받게 되었냐고 물으니까 환경이 거기로 갈 수밖에 없도록 몰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결코 소명은 그렇게 자기의식과는 상관이 없이 환경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가르쳤던 많은 신학교에서 나의 후학들에게 했던 것처럼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서 소명되지 않은 분들은 신학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주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에게 한 형제로써 간곡히 권합니다. 그것은 본인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고 교회에게는 더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조지 윗필드라는 사람은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야말로 교회에 두고두고 독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소명되지 않았다면 여기 왜 이 자리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여기 있어야 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길은 그렇게 기분 좋은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학교를 마치고 나면 어떤 좋은 일이 기다릴 것이라고 희망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치욕과 멸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참된 목회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거긴 영광이 없습니다. 부유함도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세속적인 기쁨과 환락,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영광과 존엄 같은 것,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후배가 저를 찾아와서 “저는 선배님이 부럽습니다.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뭐가 그렇게 행복해 보입니까?” 그러니까 “책도 많이 쓰시죠, 교회도 개척해서 사람도 모이죠,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형제여 오늘 뜨게, 오늘 떠라..내가 만약에 6개월 동안을 매일 하나님 이제는 내 생명이 충분합니다. 나를 이 고통스러운 목회의 현장에서 이제 나를 거두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면 네가 믿을 수 있겠느냐”그런 영광 기쁨 없습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시는 목회자들은 가시밭길을 걷게 하셔요. 그들의 흘린 피가 설교를 살아있게 하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그들의 기도를 생명력 있게 그래서 하나님이 놔두지 않으셔요. 놔두지 않으셔.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정말 진지하게 말하고 싶어요. 부인할 수 없는 소명은 환경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의식 세계 속에서 오는 거예요. 그 의식 세계 속에서 오는 거라는 것이 뭐냐면 바로 이 에스플랑 크니스데에 동참하는 것, 그게 소명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에요. 그래서 이 소명은 어떤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비전을 통해서 소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한 분의 인격과 맞닿뜨리면서 소명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진리의 빛이 확 비쳐 물론 예전에도 비쳤고 예전에도 그리스도를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복음 사역을 위해서 일생을 살기 위해서는 매우 특별한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소명의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만났기 때문에 만났을 때의 자신의 마음속에 드는 건 뭐죠? 그게 뭐예요? 그게 왜 그리스도께서 쓸모없는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그러면서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에 전율하는 거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존귀하심과 그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신의 비참한 사이에서 좁힐 수 없는 그 무한한 격자 앞에서 흐느끼며 감격을 하는 거죠.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십자가의 사랑 앞에 깊이 꺾어지는,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나를 위해 살았던 모든 날들이 서럽도록 다가와요. 이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 나를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쓰레기 같은 이 인간을 택하여 당신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시고 그 분의 아름다움을 찬송하며 살게 해 주신 그 크신 은혜에 깊이 감격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복종하여 드리는 것, 그러고 나서 보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내 마음 속에 이 에스프랑 크니스데의 마음이 함께 느껴지는 거죠. 나는 이 큰 사랑을 알고 이 십자가의 은혜 속에서 이렇게 살게 됐는데 아직까지도 이 눈을 들어 세상을 보니까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무엇으로도 그들의 불행을 막을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들에 있어서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그들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내가 만난 이 그리스도 예수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요. 이것이 너무 크게 짓눌러서 내가 도저히 일상적인 직업에 종사해서는 그렇게 살 수가 없고 시간을 틈틈이 내서 복음을 전하고 직장 생활 하면서 틈틈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내 마음에 있는 이 견딜 수 없는 열정이 채워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가난할지언정 세상의 명예를 잃어버릴지언정 보장된 미래가 없을지언정 사람들에게 멸시와 치욕과 고난을 받을지언정 나의 가려던 인생의 모든 길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 이 소명이에요. 만약에 없다면 떠나십시오. 제가 신학교에 9년 있는 동안 약 200명 내지 300명의 학생들을 신학교 밖으로 내보냈어요. 떠나세요. 그리고 떳떳하게 정직하게 자기 생업에 종사하며 한 교회의 훌륭한 평신도가 되십시오. 동료들 중에 너무 훌륭하고 좋은 전도사님들이 목사 되면 그 밑에 가서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봉사하면서 물질적으로 헌신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십시오. 만약에 떠날 확신이 없다면 모든 것을 멈추고 여러분 마음 속에 외치시는 성령님의 긴급 동의를 들어보십시오. 소명을 확인하거라 하고 말이에요. 목숨을 걸고 소명을 확인하십시오. 만약에 하나님이 내가 이 신학교를 다녀서 복음 사역을 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내 마음에도 그 필연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목숨을 걸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목숨을 걸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이 소명은 목숨을 걸고 기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응답이 없으면 아닌 줄 알고 정직하게 교회로 돌아가서 직업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만난 많은 제자들을 소명 없음을 확인하고 보냈습니다. 자동차 맨 세일즈 맨으로, 햄버거 집 주인으로. 회사에 다니며 그리고 컨설턴트 대표로 열심히 일하면서 좋은 신앙 생활 하고 있는 내 제자들 많습니다. 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윌리암 퍼피스는 ‘디 아트 어브 프로페사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대표적인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설교가 무엇인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을 파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어떤 설교자가 진리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를 아는 사람만이 진리를 말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 진리가 저 인간의 심령을 파헤치고 지나가야되겠다라고 하는 설교의 목표를 가진 설교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자신이 그런 것을 미리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뮤지컬 오르가즘이라는 단어를 알고 계십니까? 종종 음악회에 음악을 듣다가 기절하는 사람을 두고 가르키는 단어입니다. 한국이 낳은 팝페라 가수 조수미 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대에서 서실 때 어떤 마음이십니까? ” “나는 무대에 설 때마다 내 노래를 듣는 모든 청중을 쓰러뜨려버려야 되겠다라는 마음으로 노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어쩜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그렇게 맥이 없고 재미가 없습니까? 자기가 보고 경험하고 자신의 마음을 불 붙인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에는 무엇인가 신비스러운 그 무엇이 사람들 속에 전달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대부분 제일 먼저 선지서가 시작될 때마다 거기에는 소명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그 소명의 기사는 ‘봐이 예히 데봐르 엘로힘 엘’ 혹은 ‘레’ 혹은 ‘뵈’이렇게 등등 등장합니다. 번역을 하자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혹은 ‘여호와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니라’고 나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소명을 묘사하는 구약 선지서의 공통적인 기록입니다. 여기에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주 깊은 선지자직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과 관련된 비밀이었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신약에 있어서의 성령론과 구약에 있어서의 성령론은 사뭇 다릅니다. 신약의 성령론은 이미 오셔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내주하시는 성령이시지만 구약에서의 성령님은 각기 당신의 직무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찾아오시고 그리고 그에게 비범한 지혜와 능력과 권능을 주신 후 일이 끝나면 성령님을 거두시는 것이 구약에 나오는 일반적인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그 경험은 반드시 그 위에 성령님이 함께 임하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영만의 독자적인 신비체험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선지 활동하러 나가기 전에 그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이 주신 각각 개별적인 메시지들이 있었습니다. 이 메시지들이 성령과 함께 임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런 임재를 통해서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거룩하심, 이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코데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함의 경험이야말로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된 소명의 특징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느 정도 깊이 경험했느냐는 선지자에 따라서 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선지자는 모두 하나님의 이 거룩하심을 말씀이 임하는 영적인 경험 가운데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하여 그들은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이 영혼과 지성 안에 간직하게 됩니다. 하나는 무엇이냐하면 우선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 시대에 자식이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신학공부를 하면서도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총명한 사람들이 결국은 그 시대가 가르쳐준 정신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놀랍니다. 그러나 사실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나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영향이 필요하지만 이 시대를 본받기 위해서 우리들이 애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시대에 섞여서 살아가면 모두 이 시대를 본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임재의 경험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 시대의 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모든 그 시대가 가르쳐준 잘못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부터 결별하도록 만들어주는것이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는 것이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에 대한 장중한 경험을 통해서 그 시대에 전파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를 이 가슴 속에 소유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에 대한 웅변적인 증거를 한 증거를 예레미야 선지자가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시위대 뜰에 갇혔습니다. 그 사람은 인간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진리를 말하는데도 너희들이 듣지를 않아? 그럼 나도 말 안 할 거야’ 그러나 그는 잠시 후 자신의 이러한 결심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즉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할라치면 그 말씀이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골수에 사무치는 것 같아서 그걸 토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핍박을 받고 매 맞으면서도 그 진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치사 하나를 가지고 이런 것들을 논증하는 것 자체가 뭐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러나 저는 하나의 본문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호세아 1장 4절에 나오는 호세아의 소명에 관한 기사입니다. 그 부분은 이렇게 적습니다. ‘떼일라뜨디떼르 엘로힘 베 호샤’라고 말합니다. 직역을 하자면 맨 처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을 하시니라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호세아라고 하는 이름 앞에 나와 있는 전치사가 히브리 말로 ‘베’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자면 ‘인투 호세아’죠. 즉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데 호세아에게 그냥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말씀은 호세아 속으로 들어가서 호세아를 관통하며 그 시대에 태어나서 젖었던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과 이런 것들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훌륭한 통로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이러한 놀라운 이 속에 있는 이 틀들을 깨뜨리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던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의 소명은 그런 점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선지자들에게 임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이 기독론적인 새로운 해석을 거쳐서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죠. 그래서 다트 엘로힘이 그노시스투 크리스토스 투 된 것처럼 성령으로 말미암는 여호와의 메시지의 경험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경험이 된 것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 김세윤 박사님은 자신의 박사 논문 속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의 신학과 모든 삶의 핵심 속에는 다메섹의 체험이 있다”고 말입니다. 다메섹에서 무슨 체험을 했습니까? 빛으로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그는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네즘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면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갈 어떤 자리도 없는 그 시대의 정신에 꽁꽁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으로 예수님을 나타나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났습니다. 그 분에게 온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와의 만남, 부활의 만남,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신학적인 해석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죄, 율법을 어긴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인류의 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그러면서 그를 감싸고 있던 이 모든 시대의 정신의 틀들이 박살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숙명, 즉 아낭테(?)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였습니까? 디바인 엔폴스먼트..그것이 바로 신적인 강제력이었습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그래서 다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말하지 아니할라 라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그것이 소용없어서 피를 토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말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예수는 그리스도시라 너희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보내신 메시아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필연적인 숙명에 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소명입니다. 그게 소명입니다. 안갈 수 없는 길, 그게 소명이에요. 냉담한 시대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려 살던 일주일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와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드리는 찬송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기 같이 걸레만도 못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 때문에 구속 얻은 사람으로 드리는 기도가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이 감사의 제사인 예배가 어쩜 그렇게 냉냉할 수 있습니까? 제가 하는 이야기가 가슴이 아프더라도 여러분들이 좀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참 사랑하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 학교에 대한 사랑이 내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총신을 다니는 여러분들에게는 제가 다니는 수많은 학교와 비교할 때 아주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겸손의 결핍..그리고 냉소주의, 신학적 냉소주의, 아마도 전국에서 똑똑한 학생이 모였기 때문에 그럴 거다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가 그런 분위기입니다. 그렇게 위로를 해 봅니다마는 잘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냉담한 것은 큰 질병입니다. 자기의견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면서 무엇이든지 냉소하는 것, 칼빈도 씹고, 그 다음에 교수님도 씹고, 신학자도 씹고, 현대주의자도 씹고, 어거스틴도 씹고, 난 묻고 싶어요. 네가 그렇게 잘났냐고..겸손해져야 됩니다. 그러니까 총신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스승이 없어요. 여러 학생 보고 물어봤어요. 없어요. 선생님이 없어요. 예전에 총신에 훌륭한 선생님들 여럿 계셨고요, 지금도 제가 이 나이 먹었는데도 머리가 숙여지는 선생님들이 아직도 이 학교에 계세요. 안 믿어질지 모르지만 목회 하다가 깊은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면 그 선생님이시라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선생님들이 아직도 이 학교에 계세요. 존경하세요. 정말 냉담해요. 이것이 결국은 신학이 불 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신학 공부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의 열정 속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에요. 이것을 나는 신앙적 정동이라고 부릅니다. ‘아펙투스’ 혹은 영어로 ‘어펙션’이라는 단어는 우리 말로 정서로 번역이 되지만, 저는 이것을 정동이라는 말로 옮기기를 좋아합니다. 즉, 정이 흔들리는 것이죠. 자 그러면 이제 왜 이 참된 신학 지식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사랑의 정서와 나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 우리의 인식은 지성의 작용이고,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영혼 안에 있는 또 다른 어떤 애성의 기능이 되는 것이겠죠? 그러면 이것은 이렇게 아는 것 따로 그 다음에 뜨거운 열정 따로 이렇게 목회 현장에서 추구돼야 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요즘 하는 얘기는 뭐냐하면 교리는 집어 칩시다, 이제 우리가 머리만 커졌습니다..그런데 아니거든요? 누구 머리가 커졌는지 내 묻고 싶습니다. 누구 머리에 그렇게 기독교 지식이 많이 들어가고 염려스러울 정도로 성경 지식이 많이 들어갔는지 묻고 싶습니다. 절대 머리 커진 적 없거든요? 머리는 커질 지 모르지만 속은 비어 있습니다. 충격적입니다. 신학대학원 다니는 학생들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고 왔습니다. 우리 학교만은 아닙니다. 평신도들과 함께 가장 기초적인 교리 문제 50문제를 내고 OX 시험을 봤습니다. 신학대학원 다니는 학생들이 30점 맞았습니다. 성도들은 60점 내지 70점 맞고...자, 무슨 머리가 그렇게 염려스러울 정도로 커졌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이제는 머리만 키우는 것 하지 말고 이제는 가슴을 뜨겁게 키우는 것을 합시다..그리고는 무슨 수없이 사랑을 끌어올리는 그런 열렬한 찬양, 아니면 무엇인가 분위기, 그리고 교회를 공연장처럼 만드는 어떤 새로운 시도, 경건의 미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고 거대한 행사나 이벤트 페스티발처럼 열리는 그 예배, 이런 것들은 정말 개혁주의 아닙니다. 정말 개혁주의 아닙니다. 한 트럭이 넘는 음향기기를 쏟아놓고 그리고 막 현란한 음악과 조명 속에서 그렇게 번쩍거리면서 그렇게 사람들의 흥을 돋두는 거기에 미친듯이 날뛰면서 노래 부르는 그 속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다 쓰레기 같은 열정주의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경건한 열정과 그리고 그 신령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은 이러한 공식으로 요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렐리저서펙션’이라고 하는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개진한 바 그의 교리와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신령한 체험은 은혜로운 정서를 반드시 불러온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믿는 신앙으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관한 그 놀라운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지식들을 갖게 되면 그 갖게 된 지식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될 때 반드시 그것은 우리 안에서 합당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이 지성적으로 인식한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진리에 대한 사실과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뜨거운 정서의 반응이 함께 합쳐져서 이것들이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마음 안에서 진리의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한 감격하는 사랑이 함께 움직여서 이 마음을 출렁거리며 정동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이러한 출렁거리는 정동들이 우리 안에서 계속 반복될 때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한 생활로 우리들이 이어질 수 있는 거라 이거죠.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도 오기 전에 어떤 책을 잠깐 읽고 왔는데 거기서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목사의 개척 수기를 이야기 하면서 “개척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개척할 땅에 가 보니까 기라성 같이 커다란 교회가 떡 버티고 사방에 진 치고 있었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너희들 나 하고 붙어보자, 그리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전도의 동기가 뭡니까? 그 대형교회하고 한 번 붙어서 이겨보기 위해서 전도한 겁니까? 그래서 경쟁을 해서 이겨서 마지막에 무얼 얻고 싶은거죠? 그 교회 교인이라도 한 번 뺏어와 보겠다는 겁니까? 아니죠. 만약에 사도들이었다면 그런 큰 교회들이 있는데도 여전히 복음이 소외된 외로운 그늘 속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며 흐느끼며 전도지를 돌렸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은 이것입니다. 신학 공부는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앎, 그것들을 성경과 학문을 통해 진지하게 탐구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게 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그것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 안에 그에 합당한 정서가 일어나는 것이지, 이것은 젖혀놓고 우리 모두 마음을 뜨겁게 하기 위해서 박수를 치자, 최신 음향기기를 동원해서 한 번 뒤집어보자, 그렇게 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정말 개혁주의 아니거든요? 정말 아니거든요? 우리가 개혁주의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위대한 신학자들은 이러한 신학 공부와 그리고 진리, 그리고 열정 이것이 조화된 것을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칼빈 선생은 주석을 쓰면서 갑자기 주석을 멈추고는 장문의 기도를 써내려갑니다. 탄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준 그의 저술은 그 마음 안에 있는 신적인 정서를 보여주는 것이죠. ‘플로스 로기온’이라고 하는 이성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하는 그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를 하면서 드리는 안셀무스의 긴 탄원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에 다가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마틴 루터, 존 오웬, 그 이외에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믿음의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하는 그 현장에서 목매이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위대한 성학들, 그들 모두 이 체험과 학문이 동반된 가운데 하나님의 신학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읽은지가 오래 되어서 어떤 그 시기에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문맥은 상실했습니다만 청교도들 가운데 길레스피라고 하는 유명한 경건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을 작성하기 위하여 모두 모여서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 보는 목사님이 “오늘 우리 이 신앙 고백 작성을 위해 모임을 위해 길레스피 목사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했어요. 목사님은 조용히 눈을 감고 천천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 쭉 기도하고 기도하는 그 순간 고백서를 작성하기 위해 모인 모든 목사들이 함께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에 신앙 고백 작성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을 때 어느 목사님이 긴급 동의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껏 살았지만 오늘 길레스피 목사님이 기도하시는 가운데 묘사한 하나님만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의 기도를 다시 옮겨서 우리 신앙 고백의 자료로 삼도록 합시다”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어요. 진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선지 동산에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가 지나고 나면 여러분들은 누구 앞에가도 손쉽게 ‘나는 모릅니다 날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를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몰라도 아는 척해야 되고, 아는 게 없으면서도 그래도 아는 게 꽤 있는 것처럼 행세를 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여기에 머무는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 기억해 보십시오. 공부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에 관심이 없으면 소명이 아닙니다. 적어도 목사의 소명은 아닙니다. 전도자로 사십시오. 전도자로., 열심히 전도자로 사십시오. 목사라면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래서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부가 하기 싫으십니까? 아마 목사의 소명이 아닐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진리의 전달자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 깨달은 사람들의 족적을 탐구하는 것을 계속할 때에 싫증이 날 리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정말 공부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싶어요. 제가 여러분만할 때에는 책이 없어서 공부를 못 했어요. 우리 학교 도서관 통 털어도 6만권 밖에 없었고 그 중의 절반 이상은 독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돈이 없어서 일주일씩 점심을 굶고 그 돈을 모아서 생명의 말씀사에 가서 원서를 사 가지고 돌아오곤 했어요. 시간은 있었는데 책을 살 수 없었어요. 지금은 책 살 돈 있게 됐어요. 그런데 읽은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작년에 어느 시절에도 서재에 가서 책을 만지다가 주저 앉아서 막 울었어요. “이제 조금 눈의 띄어져서 이제 어떻게 이 학문을 하면 알겠다는 지혜가 생겨났는데 하나님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잠을 아무리 줄여도 입술이 부르트도록 잠을 줄여도 이미 내 머리가 퇴화되어서 외워지지 않습니다. 두 달 전에 읽은 책이 펴 보면 줄 친 자국만 있고 내 마음 속에 새로운 책입니다. 하나님 도와 주십시오..진리를 전달하도록 부름 받았는데 내가 이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참을 울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좋은 때에요? 제가 여러분만할 때 하루에 라틴어 단어 200개씩 외웠어요. 지금은 20개도 외워지지 않습니다. 이 소중한 때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세월을 낭비하면 나중에 주님을 어떻게 만나시려고 합니까? 제가 대학교의 신학 대학에서 강의했을 때 책을 많이 소개시켜 줬어요. 그랬더니 2년이 지난 후에 어느 학생이 찾아와서 “교수님 머리 숙여서 감사드립니다. ” “왜? ” “교수님이 2년동안 저를 가르쳐 주셨는데 교수님이 읽으라는 책을 읽으면서 제가 지적으로 영적으로 많이 성숙했습니다 교수님이 우리에게 읽으라고 수업 시간에 소개해준 책이 얼만지 아십니까? 한 학기에 한 키였습니다.”이 학생은 정확하게 1년에 한 키씩 읽은 거예요. 2년에 걸쳐서 두 키를 읽었대용. 그것도 신학서적과 거룩한 책들을 말이에요. 가슴에 찔리시겠지만 들으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1학년 2학년 아니면 졸업을 앞둔 3학년일 것입니다. 양심에 손을 얹고 레포트를 쓰기 위해서 군데 군데 읽은 것 말고 그리고 책 사서 수업시간에만 들여다 본 것 말고 그리고 사다각 점잖게 꽂아놓은 책 말고 카바에서 카바까지 신학적인 무게가 있는 책을 읽은 것이 입학한 이후로 여태까지 몇 권이나 되는지 한 번 여기에다가 쌓아놓아 보면 여러분들 그 키가 3년 동안 읽은게 어디까지 올라올까요? 어디까지 올라올까요? 정말 여러분들이 각성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대학의 선생으로 있을 때 퇴수회 시간에 어느 강사 한 분이 오셨습니다,. 그 분은 여러분들도 잘 아는 분입니다. 예전에 있었던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보면 6 25의 참상을 묘사하는 흑백사진에, 손에 밥그릇을 들고 숟가락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울고 있는 가난한 어린 아이가 바로 그 강사였습니다. 그 사람이 와서 우리에게 강의를 해 줄 때 저는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하버드에서 석사와 학사와 박사를 모두 했고 그리고 헨리 키신저 시절에 그 백악관에 들어가서 고위 관리를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자신은 한국에 와서 보고 통탄을 한다는 거죠. 학생들이 너무 너무 공부를 안 한다는 것, 그리고 기껏 공부하는 것 보면 취직 시험 공부하는 거라 이거죠.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미국이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인 이유를 아십니까 되물었어요. 자기가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전학생들이 하루에 600페이지의 책을 소화해야 됐답니다. 그 얘기를 상세하게 들려주는데 전 충격이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고 나면 모두 도서관으로 가고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거나 찾아서 그 다음서부터는 읽기 시작하고 그리고 읽은 그 학생들이 가지고 올라와서 10시 넘어서부터 기숙사에서 레포트를 쓰기 위해서 타이프를 치는데 당시엔 컴퓨터가 없었으니까 여름에 창문을 열어놓고 타이프를 치면 소나기 소리가 확 난다는 거예요. 실력이 있는 학생서부터 2시 정도에 불이 꺼지기 시작하고 3시 4시 급기야 실력이 없고 그리고 쳐지는 학생들은 5시까지 결국은 불이 안 꺼지다가 5시 좀 넘어서 교수들과 함께 조깅에 나온다는 거예요. 그리고 레포트는 칼 같이 정해진 시간에 내지 않으면 자기가 10분 늦게 갖고 갔더니 교수가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딱 받더니 ‘노 땡큐’그러더니 쓰레기 통에다 탁 집어 넣더래요. 그러면서 대학 4년, 대학원 1년 내지 2년, 박사과정 3년 내지 7년을 공부를 하는 거예요. 물론 그 600페이지는 영어, 독일어, 불어, 심하면 다른 나라 언어까지도 공부를 해야 되는 거죠. 그러면서 덧붙이는 얘기가 재밌어요. “요즘 우리 학교 이제 폭삭 삭았습니다. 엊그제 가 보니까 480페이지씩 밖에 소화를 못 하고 있습니다.”그 얘기를 들을 때 마른 뼈처럼 살아가는 나 자신과 신학생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어요. 도덕적인 수준도 욕을 먹는데 이제는 지적인 수준까지 욕을 먹는 처지에 와 있는 것이 너무 슬펐어요. 여러분 능력 받고 은혜 받으면 된다...거짓말이거든요? 속지 마십시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해 보면 절대 그게 아니라는 걸 여러분들에게 3시간에 걸쳐서 논증할 수 있어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절대..2년 정도는 여러분들이 신선하게 설교할 수 있어요. 2년 지나고 나서는 공부 안 하면 옛날 설교 재탕해야 되는데 교인들이 담임목사와의 끈끈한 인간의 정에 붙들려서 묶여 있거나 혹은 교인들과의 끈끈한 정에 있어서 묶여 있거나 건축 헌금 낸 돈 본전이 아까워서 묶여 있거나 셋 중에 하나이지 진리 때문에 묶여 있는 건 아니라는 거죠,. 그게 얼마나 중대한 죄입니까? 그리스도의 교회가 진리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그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지, 막역한 담임 목사와의 인간적인 관계, 교인들과의 끈끈한 정에 묶여서 그렇게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느 한 순간 신학이고 성경이고 하나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캄캄해지고 아무것도 설교할 것이 없는 빈 마음이 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젊은 날 열심히 살려고 애썼지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그리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진리를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는 것이죠.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김 목사님, 신학교에서 흘린 눈물은 들어가기 전에 흘린 눈물, 졸업하고 난 후의 눈물과 틀립니다.” “어떻게 틀립니까?” “신학교에 다닐 때 흘린 눈물은 30년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하고 얘기했어요. 어느 날 신학교에서 어느 학생이 노트가 있길래 무심코 겉장을 툭 폈더니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나는 세상의 법정에 서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다 일평생 나의 생명을 다해 그 분의 누명을 벗겨 드리리라’..정말 숙연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성경이 각 성에서 증거하기를 환란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의 복음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노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그 소명이었습니다. 그런 신적인 정서 속에서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선생의 목회의 성공의 비결을 묻는 어떤 사람에게 그의 유적지를 방문하면서 예배당에 들어가서 가이드하는 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웨슬레 선생의 목회의 성공의 비결을 물으셨습니까?” “예” “자 강단에 올라가십시오. 웨슬레 선생처럼 똑같이 해 보십시오 자 무릎을 꿇으십시오. 손을 모으시죠. 고개를 숙이십시오. 잘 하셨습니다 자 이제는 우십시오. 그 분처럼 흐느껴 우십시오.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 전까지는 따라할 수 있는데 그 마지막은 따라할 수 없죠.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설교를 모두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사람이 되십시오. 깊이..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거예요.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만큼 안전한 하나님이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만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는 측면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성경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 1년 2년쯤 되었을 때 일이었습니다. 너무 몸이 아파서 집에 드러누웠는데 잠이 도저히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계를 보니까 10시 20분쯤이었어요. 그래서 이제 일어났습니다. 성경을 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 보시는 교수님이 읽어주신 그 본문이 제가 읽을 차례의 성경 본문이었습니다. 서서히 읽다가 잠이 오면 자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시선이 멈췄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읽는 동안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강력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타락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애통하시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도시가 멸망을 앞두기까지 잠들어 있는 교회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많이 깨달은 후에는 걷잡을 수 없이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무릎을 꿇고 한참을 기도를 했습니다. 얼만큼 기도했는지 시간도 잘 모르겠는데 끝나고 난 후에는 이 진리가 깨달음이 사라져 버리면 어떻하나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노트를 펴 놓고 깨달은 내용을 깨알처럼 막 적기 시작했습니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 밤에 내가 깨달은 내용을 중요한 것들은 거의 정리했다고 생각이 되어서 연필을 놓았을 때 이튿날 아침 8시 40분을 시계가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10시간이 흐를 수가 있을까..제 느낌에는 한 2시간 흘렀는데 10시간이 흘렀습니다. 종종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될 때마다 사실 일주일에 한 번 설교해야 된다는 것은 목사에게 있어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 그렇게 들어갔다 나오니까 한 3개월 이상을 설교할 재료들이 얻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설교할 기회는 일주일에 공식적인 예배에서 설교가 주어지지 않아요. 설교할 재료를 얻기 위해서 따로 노력하지 말고 자기가 말씀 앞에 서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 다니는 이 길이 산에는 항상 있습니다. 수없이 밟고 다녀서 대머리가 까지고 먼지가 풀풀 납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다가 저 숲속에서 들리는 가냘픈 소리를 들으며 남들이 가 보지 않은 숲 속에 두려움 속에 길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성경을 펴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도 다 생각하고 발견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더 많이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그 성경 속에 있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가 보여요. 숲 속으로 들어가 활짝 펼쳐진 빽빽한 나무 사이로 활짝 펼쳐진 새로운 풀밭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그리고 찬란한 구슬처럼 빛나는 아침 이슬들이 이 풀밭에 하얗게 깔려 있어요. 그리고 하늘 높이 솟습니다. 나무들, 아침 이른 햇살에 나부끼는 반짝임, 그 나뭇잎새를 찢고 들어오는 아침의 찬란한 햇살, 그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아침 이슬, 그리고 펼쳐지는 끝없는 호수와 그리고 풀벌레 소리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학문이 없이 성경을 읽고 깊이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이 묵상을 깊이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겁니다. 대부분 신비주의자들과 그릇된 성경 해석가들이 거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깊은 신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로 깊이 침장하여 묵상의 세계 속에 들어가도 절대로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은 뭐냐면 탄탄한 신학의 틀, 개혁신학의 탄탄한 틀, 이것이 아무리 깊이 묵상해도 결코 우리를 빗나가게 해 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학문의 중요성은 신령해지면 신령해 질수록 학문의 중요성은 아주 화두로 떠오르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깊이 진리를 깨달은 후에 나타나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 앞에 이 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거죠. 신대원을 졸업을 하고 어느 날 18세기의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기라는 책을 읽었어요. 그 책을 읽었을 때의 저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평생에 4권의 책을 샀고 4번 정도 책을 읽었습니다. 최근에도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예일대학을 나온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었고 모두들 인디안에게 영혼이 있느냐고 물으며 주일 예배가 끝나면 인디안들 머리 가죽을 벗기러 총을 메고 나가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렇게 미국 사람들이 버린 인디안들을 위해서 헌신적인 선교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21살에 회심하고 25살에 선교사로 헌신해서 29살에 과로한 목회사역 속에서 폐결핵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서 나는 그래도 기도를 꽤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일기 속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은 나의 스물 몇 번째 생일이다.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과 하루 종일 교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쏟아지는 새벽 별빛을 받으며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생각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금식하면서 기도할 때 내 영혼은 고양되었다. 온 몸에 땀이 흘렀다. 추위가 느껴졌다. 기도가 모두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눈 덮인 언덕에서 미국 사람들이 버린 인디안의 영혼을 위해 혼신의 힘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너무 너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 설교하고 난 강대 아래 앉아서 한 사발의 피를 토해야 할 정도의 형편 없는 건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섬겼고 기도했습니다. 눈 덮인 언덕에 엎드려서 씨름을 하며 죽어가는 인디안의 영혼들을 위해 온 몸으로 기도하고 나면 그가 기도하고 일어난 자리에는 시뻘건 선혈이 가득히 토해져 나왔던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제가 티에이치에 있을 때인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총신의 옆에 제가 살았어요. 기도하러 새벽에 총신하러 올라갔어요. 그래서 한 일주일을 다녔어요. 산에 올라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는데 11월 하순경이었어요. 그래서 폐결핵 4기에 브레이너드도 했는데 내가..그리고는 그 바닥에 엎드려서 이마를 땅에 대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딱 30분이 지나고 나니까 이 서리 맺힌 땅에서 쏟아지는 그 냉기가 나의 머리는 물론이고 내장까지 완전히 얼어붙게 만드는 거예요. 나중엔 이렇게 기도의 정신이 모아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일주일동안을 그렇게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난 후에 다시 한 번 그의 헌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선교사에게 헌신한 사람이었지만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판단에는 신학적으로 대단한 깊이가 있는 명석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런 흔적들은 그의 설교 속에 잘 묻어나 있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마지막 죽으면서 자기의 일기를 출판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안 된다고 말리다가 마지막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도 안에서만 출판하라고 마치면서 넘겨진 그의 일기 속에는 이러한 그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우리의 신학함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어떻게 하나되어야 하는지를 절실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일기의 글이 너무 아름다워서 제가 노래를 붙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찬양)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를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학창에 공부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기도 많이 하십시오. 마음에 뜨거운 눈물과 사랑을 담은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총신대 신대원 개강수련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