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론2
녹취자 : 오희열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존함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공부합니다. ‘속성’이라는 것은, ‘屬性’이라고 씁니다. “그것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 없이는 본체가 될 수 없는 것” 이것을 속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신학 용어입니다. 영어로는 attribute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성품 중 일부이지만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이실 수 없는, 그러한 성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학용어 해설집을 한 권씩 가지고 계십니까? 없으신 분 손 들어보십시오. ‘김남준 서가’ 앱에 들어가 보시면 그 안에 신학용어 해설집이 있습니다. 거기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들어가 있고 그 용어들은 개혁신학에서 그대로 차용한 것들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전적으로 제가 다시 definition 하고 다시 썼기 때문에 설교를 듣고 강의를 듣는 데에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오늘 가서 그 앱을 찾아보십시오. 폰에 가지고 다니면서 보십시오. 이런 신학 용어에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어렵다고 해도 한 번 익혀놓으면 아주 경제적입니다. 버스가 외래어이지만 내가 외래어를 싫어한다고 해서 그 버스를 다른 말로 설명하려면 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크고 사람이 많이 타고 전용차로를 이용하는 차’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그 버스를 놓쳐서 다음 버스를 탔는데 다른 버스에서 내린 내 친구를 만나서 버스를 함께 타고 이야기하며 갔다.’라는 말에 조금 전의 그 긴 설명을 넣고 이야기해보시면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속성’, ‘하나님의 성품’, ‘그것 없이는 하나님이실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성질’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절대적인 속성과 보편적인 속성으로 나뉩니다. ‘절대’라는 말은 ‘대를 끊는 것’입니다. 칼로 끊는 것을 ‘절’이라고 하고 ‘대’는 ‘대응하는 것’입니다. 즉, 그것과 맞먹을 수 있는 대응하는 것, 그것과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이것이 절대의 철학적 개념입니다. 그러면 절대적 속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성품인데 피조물 속에서는 도저히 그것과 비교될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성질, 이것이 절대적 속성입니다. 그것과 반대는 보편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것이 인간들에게서도 발견될 때, 그것인 인간들에게도 있기 때문에 보편적, 널리 있는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유적 속성이라고도 합니다. 공유는 함께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소유한 성질입니다. 비공유적은 반대말이 붙어있으니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갖지 않은 성질을 말합니다. 절대적 속성, 보편적 속성, 비공유적 속성, 공유적 속성. 어려워 보이지만 하나도 어렵지 않고 한자 몇 개를 조합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책을 읽기도 편하고 설교, 강의를 듣기도 편해집니다. 그리고 남이 모르는 용어를 좀 알아야만 교리반을 수료한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수료한 사람들끼리, ‘내가 요즘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많이 느끼고 있어.’하면 옆에 있는 교리반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리반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속성은 피조물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것과 인간의 그것은 무한한 격차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간 속에 사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부모의 사랑도 신뢰할 수 없을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1월부터 6월 사이에 가정폭력에 의해서 죽은 아이들이 20명입니다. 대부분 부모에 의해서 폭행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 속에 사랑이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랑은 어떠한 훌륭한 사랑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격차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편적 속성이라고 해서 내게 있는 속성이나 하나님께 있는 속성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절대적 속성에 대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독립성입니다. 이것은 무조건 외워야 합니다. 이것이 시험에 나오지 않으면 그 시험은 무효입니다. 그럴 정도로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루이스 벌콥의 책 한 권을 통째로 암기한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공부하고 복습을 계속하고 기말고사를 볼 때까지 세 번 정도만, 고3때 사회 과목 수능 보는 식으로 외우시면 여러분도 충분히 강의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독립성입니다. 독립성에서 중요한 것은 자존성입니다. 독립성을 자존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세운다.’라고 할 때의 ‘자존’이 아닙니다. 자존심의 자존은 ‘自尊’ 이고, 자존성의 자존은 ‘自存’입니다. ‘스스로 존재한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저것은 누가 만들었지?’ 그러면 ‘그것은 누가 만들었지?’ 그러면 ‘또 그것은 누가 만들었지?’ 생각하면서 계속 근원을 찾아 올라갑니다. 그러면 맨 마지막에 ‘하나님!’에 도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 이상의 답은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존재의 기반을 두십니다. 요한복음 5장 26절에도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존재의 기반을 두십니다. ‘야웨’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누구 때문에 존재하시는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고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만이 자존,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 이상의 존재의 근원은 물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로부터 태어났는가?’ 이런 것은 물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존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존재를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을 의존하여 있도록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독립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이유는 이 모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초월하셔서 하나님이 홀로 스스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오늘도 나오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 직장을 나와서 육아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SNS(Social Network Services/Sites)를 끊는다고 합니다. SNS를 하다보면 함께 있었던 동료 직원들과 신나게 살았던 모습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것 먹었다고 사진 찍어서 올리고 외국 갔다고 찍어서 올리고, 자기는 계속해서 기저귀 갈아주는데 비교의식을 갖고 비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자존심 상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누구로 살기 위해서 나로 태어났다고 했습니까? 왜 이렇게 확신이 없습니까? 이제 교리반 3주차인데 왜 이렇습니까? 내가 나로 태어난 것은 내가 누구로 살기 위해서입니까? 나는 나의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나의 빛깔대로 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신앙생활의 과정은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와 나와, 나와 마주하는 이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불변성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는 물론이고 완전성, 목적, 약속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하셔서 기껏 그렇게 살았더니 “그것은 20년 전의 이야기이고 요즘은 내 마음이 바뀌었다.”라고 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신뢰하며 따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고 말하지만 끊임없이 내가 하나님을 떠나고 마지막에 돌아가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서 나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무한성입니다. 자존성, 불변성, 그리고 무한성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완전성에서 무한하십니다. 존재와 관련해서는 지식은 하나님에게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공유적 속성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식은 유한합니까, 무한합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티끌밖에 되지 않고 지금도 어마어마한 지식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에게도 있지만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는 유한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평균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선, 사랑, 의, 거룩함이 하나님에게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는데 하나님은 그 제한이 없이 무한하십니다. 끝이 없이 한이 없습니다. 시간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와 과거를 초월해서 모든 사물들을 내려다보십니다. 시간 T가 있고 T-1, 여기는 T1이 있습니다. 각 시점이 있는데 여기에서 보면 이것은 현재이고 이것은 과거이고 이것은 미래입니다. 계속 지나갑니다. 현재라는 것은 고정할 수 없습니다. “현…”하는 동안 현재는 지나가고 없습니다. “…재”하는 사이에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현재는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방막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이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도 현재이고 현재도 현재이고 미래도 현재이다. 하나님께는 과거적 현재, 현재적 현재, 미래적 현재, 즉 현재밖에 없다.”라고 설파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시간과 관련해서 존재도 영원하시고 지식과 모든 것들이 영원하십니다. 무변성에서 ‘변’은 ‘변두리’ 할 때의 ‘변’입니다. 즉 ‘변두리가 없다.’ ‘경계가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공간과 관련된 것입니다. 어떤 곳이든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모든 공간에 계시지만,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안에 있지만 하나님은 어느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단순성은 지난 시간에 햇빛의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설명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부분의 성질로 이루어진 분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물질이 두 부분이나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중에 A, B, C, D, 어떤 부분도 꼭 있어야 하는 부분은 아닙니다.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 부분에 절대적이지 않은 부분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 절대적이지 않은 부분이 종합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도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분일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뉘어 분할될 수 있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속성은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부피, 크기, 형체, 이런 것을 가지고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그 하나님을 볼 수 없으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이 세상 속에, 인간 속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일들을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됩니다. 더구나 오늘 삼위일체를 배우겠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을 보편적 속성입니다. 절대적인 속성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독립성, 불변성, 무한성, 단순성.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독립성, 불변성, 무한성, 단순성. 그릴 때, 하나님이 홀로 계시고 - 자존성,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고 -불변성,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속에 영원하시므로 - 무한성, 하나님은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 단순성,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독립성, 불변성, 무한성, 단순성.
보편적 속성은 공유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지식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것은 유한하고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고 하나님은 새로 학습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혀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과, 가능한 일과 모든 실재에 대해서 아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이 교재를 가지고 공부할 때, ‘하나님의 지식이란…’ 하고 정의가 나옵니다. 그것은 무조건 외우십시오. 시험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란 전혀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과, 가능한 일과 모든 실재하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에 대한 정의입니다. 이 지식이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외부로부터 지식을 얻지 않으심, 다시 말해서 학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학습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 이 지식에서 제외되는 대상이 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의 ‘전지’라고도 부릅니다. ‘옴니싸이언스(omniscient)’, 모든 것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것이 전지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감출 수 있는 것도 없고 하나님에게는 새로 발견하게 되는 것도 없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식의 특수한 면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목적에 대한 수단의 적용에서 나타내신 지적인 능력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지혜롭기 위해서는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반드시 지혜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식은 사물 하나하나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지만 지혜는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것에 대해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제가 잘 사용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구슬이 있습니다. 알록달록하고 크고 작은 구슬이 많습니다.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시다. 그 구슬이 커다란 바가지에 가득 담겨있습니다. 그것을 방안에 확 쏟아놓으면 방바닥에 마구 굴러다닐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구슬일 뿐입니다. 그런데 실을 가지고 그 구슬들을 하나씩 꿰어봅니다. 그러면 목걸이도 만들 수 있고 팔찌도 만들 수 있고 다양한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이 구슬이라면 지혜는 실로 구슬로 꿰는 기술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많아도 지혜가 함께 생기지 않으면 그 지식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게 만들고 만물박사처럼 모든 상황에서 자기 지식을 자랑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지식의 몰지혜화 현상이 나타나서 지식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며 인간의 생활이 편리해지지만 범죄도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 사회에서 범죄의 90%이상은 도시에서 일어납니다. 실제로 90%이상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결국 지식이 많은 곳에 반드시 지혜도 많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식을 가르치지만 그 지식을 통해서 나를 자랑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이제껏 알고 있는 많은 지식들을 꿰어서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위한 고도의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곳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최고의 가치 있는 목적을 설정하시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의 방법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아심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세 번째는 ‘선(善)’입니다. 선(善)은 무엇입니까? 좋은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선행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선, 정의는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시도록 하나님을 자극하는 완전한 성질, 이것이 바로 선(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목적을 정하셨습니다. 그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돌아오도록 너그럽고 친절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 부분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첫 장에 상세하게 나와 있으니 집에 가셔서 주무시기 전에 묵상삼아 챕터 1번을 읽고 기도하고 주무시고 필요한 부분을 교리책에 메모하시기 바랍니다. 될 수 있으면 책에 메모를 새까맣게 많이 해놓으십시오. 그러면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만, 그래야 우리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우선은 좋은 나라에 태어나야 합니다. 이상한 나라에 태어나서 고생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부모를 만나서 사랑을 받고 좀 커서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사랑을 받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사랑을 받고 나이가 든 후에는 좋은 남편과 아내를 만나서 사랑을 받고, 그 후에는 자녀들을 사랑하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받고 친구들에게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속에서 죽어감으로써 인간은 좋은 사람이 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그렇게 다 만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도 좋은 부모라고 단언하기 쉽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목숨 바쳐서 친구를 사랑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이 필요하지만 사람들 속에서 사랑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충족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사랑에 의해서 완전해지시거나 더 행복해지시거나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완전성과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체인 인간을 보고 즐거워하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A, B, C, 세 개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입니다. 죄가 있는데도 그것을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용서와 관련됩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그 다음에 자비와 긍휼입니다. 자비는 기가 막히게 번역되어있습니다. 慈悲에서 ‘비’는 ‘슬플 비’를 사용합니다. 슬프도록 가엾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죄의 결과로 비참이 생깁니다. 그 비참을 보면서 슬프도록 가엾게 생각하는 마음이 자비입니다. 자비와 긍휼이 하나인데 그런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긍휼입니다. 가엾게 여기는 너그러운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음. 죄인들을 향하여 자격이 없는 사람을 향해 오래 참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습니까? 나에게 소용이 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악을 행하고 잘못한 사람들에게 과분한 호의를 베풀고 비참한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그들을 오래 참음으로 사랑의 관계가 지속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충족적 사랑이지만, 자기 자신으로서 충분한 사랑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과분한 호의, 그리고 비참한 사람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써 그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려고하는 성질이 사랑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불완전하고 하나님에게는 완전하다.’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사랑은 제가 쓴 책 속에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가 쓴 책을 꾸준히 읽으시면 교리 공부한 것과 함께 연결이 될 것입니다. 저도 세어보지 않았는데 70권이 좀 넘는다고 하니까 오늘부터라도 결심을 하시고, 여기 교리반에 계신 분들은 토요일에 항상 일찍 와서 무슨 책이 있는지 보시고 내가 읽은 것이 하나도 없으면 슬픈 마음으로만 나와도 도서관에 간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가책을 받으면 언젠가 해결을 할 테니 말입니다. 가서 좀 보십시오. 부지런히 책을 읽으십시오. 교리반을 시작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경건한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는 기독교 책들을 손에서 놓지 말고 들고 계십시오. “무슨 책을 읽으시지요?” 물으면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읽고 있는 책이 있어야 합니다. 2년 전의 그 책이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충족적 사랑을 보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혹은 인격으로 존재하십니다. 그 속에 이러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와 교통하고 성자와 성령이, 성부가 성령과 교통함으로써 이 자체, 서로를 사랑하심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모든 만물이 없을 때에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셔서 서로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만물이 없을 때에도 원래 사랑이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넘어서는 사랑의 목표가 없고, 즉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시고 만물들을 사랑하시되 당신 안에서 사랑하셔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모든 만물을 휘돌고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와 모든 인간과 사물들이 당신의 사랑 안에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원인, 목적, 주체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시고 사물들을 사랑하셔서 마지막에 당신께로 향하게 하시고 그 사랑의 주체가 되니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그 흔적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는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것이 일반계시, 일반은총을 통해 우리 안에 전달된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 피조물을 향한 사랑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자기 충족적 사랑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되고 그 인간은 교회로 들어와 교회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그 사랑은 사회로 뻗어나가고 이 사랑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들을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여전히 서로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자기 충족적 사랑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 사람들과 상관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모든 피조물들을 휘돌아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그런 사랑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편적 속성의 다섯 번째, 거룩하심입니다. ‘거룩하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거룩하심’, ‘거룩하다.’, ‘거룩’ 이렇게 사용합니다. ‘거룩한’이 형용사이고 ‘거룩’이 명사라고 생각하는데 ‘거룩’이라는 말이 형용사입니다. ‘~한’이 필요 없이 ‘거룩 하나님’이라고 해야 하는데 우리의 용법이 ‘거룩한’이라는 말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것은 어법이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혹은 ‘거룩함’이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무엇인가? ‘거룩하다.’라는 말은 수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오늘 배우는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은 암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짤막하게 핵심을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것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존재적 초월성’은,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신데 이 모든 만물들을 뛰어넘어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 유한한 인간이 그 무한하신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존재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 계신 것, 그것을 ‘존재적 초월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게 높이 초월해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격차가 있고 따라서 무한하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매우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저도 못 가봤지만 여기 계신 분 중에서 히말라야를 가보신 분이 많지는 않으실 텐데, 가보지는 못했어도 대형화면을 통해서 보면 어마어마한 산이 나오고 그 앞에 인간이 서 있을 때 티끌 같은 자신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존재적인 초월성을 희미하게나마 거대한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주 공간을 보더라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다큐멘터리는 여러분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20편 정도로 되어있는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깊이 보시면 신앙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우주 공간을 볼 때 우리는 한없이 미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무섭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도덕적 완전성’은 나는 불완전한 인간인데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비천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내 힘껏 내 자식들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한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되었을 때 나의 사랑은 그 사랑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내 사랑은 그 앞에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게 되면 자신의 의로운 것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 앞에서는 자신이 미천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완전성 앞에서는 자신이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낍니다. 결국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데 그것을 극복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그 무한한 하나님이 나같이 미천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나같이 불완전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존재적 초월성, 도덕적 완전성. 이것은 시험에 나온다고 보증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거나 괄호로 나올 수 있습니다.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위배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시는 성품입니다.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는 보상하시고 불순종하는 자는 벌하십니다. 상주시는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고, 벌주시는 공의는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벌주실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공의라고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진실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적 존재하심의 방식이고, 진리와 일치하고 모순이 없으심, 계시 관계에 있어서 참되심, 약속을 이행하면서 참되심입니다. 신실하심입니다. 여기 진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내 마음, ‘나’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진리를 내가 아는데 나는 이 진리와 같지 않고 다른 길로 가려고 하는 데서 가책을 느끼면서 진리와 합치되게 하려고 인간은 애를 쓰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 자신의 마음과 삶이 이 진리에 일치하게 된 상태를 가리켜서 ‘진실’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도둑이 잘못을 했는데 솔직합니다. 솔직한 것이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 내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돈을 좀 빼앗았다! 그게 뭐가 나빠? 너희들은 죄 안 지었어? 어쩔래?” 이런 사람을 진실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도둑질하고 나쁜 짓을 했지만 나중에 깊이 뉘우치면서 “나의 행동은 정말 도리에 어긋나 것이었다. 진심으로 내가 뉘우친다. 그리고 나에게 손해 본 사람들에게 평생 배상을 하며 살고 싶다. 정말 나도 내가 밉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 우리는 이것을 진실하다고 보는데 그가 자기를 부인하고 진리에 자기 자신을 합치시키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진실과 바꿀 수 있는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성품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진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 잠시 거짓말이 우리를 편하게 하지만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 침묵할 수는 있습니다. “그때 너 어디에 있었어?” 할 때, 그 대답을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커다란 손해를 줄 것 같아서 그를 보호하고 싶으면 침묵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할 수 있는 자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거짓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실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주권입니다. 주권은 어떤 것을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니까 항상 거기에 합치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떨어졌다가 붙었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붙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 인간에게도 있는 성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감추어진 의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십니다. 섭리는 모릅니다. 살아보고 시간이 흘러가야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 왜 이런 불행한 일이 닥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잘 살다보면 오늘 당한 이 불행한 일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 좋은 삶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섭리입니다.
요셉은 잘못한 것도 없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려 노예로 끌려갔을 때, 그것은 매우 나쁜 것이었고 그는 왜 그런 일을 당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렇게 노예로 팔려가지 않았더라면 보디발의 집에 있을 수가 없고 보디발의 집에 있지 않았더라면 감옥에 갈 리가 없고 감옥에 가지 않았더라면 거기에서 높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고, 높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바로에게 추천되지 않았을 것이고, 바로에게 추천되지 않았더라면 총리가 될 수도 없었을 텐데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데 그것은 시간이 흘러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감추어진 의지라고 하고 섭리라고 합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보인 의지’이고, ‘섭리’는 ‘시간이 흘러가야 알게 되는 의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지와 능력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데…’ 생각하지만 돈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 사람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데 나에게 그럴만한 지식도 없고 돈도 없고 권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집행하시는 능력을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마음먹으신 것을 언제든지 실현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동그란 삼각형을 만들 수 있습니까?” 이런 것은 수학적 문제니까 그러하고 치더라도 더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은, “하나님은 뭐든지 하실 수 있다고 했으니까 악을 하나님이 행하실 수 있습니까?” 합니다.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절대적인 능력입니다. ‘뽀뗀티아 압솔루타’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뒤에 나오는 규정된 능력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선하시고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약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세상을 살다가 외로워도 마약으로 내 마음을 달랠 의지는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없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안 할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신념이나 내 자신의 또 다른 성품에 의해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뛰어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동의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마약은 너무 동떨어진 예입니까? 그러면 제가 흡연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두 갑씩 피웠습니다. 회심하고도 4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해야 할 필요를 별로 못 느낍니다. 유혹을 별로 못 느낍니다. 안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동그란 삼각형을 만들 수 있느냐?’라는 의문은 말장난입니다, 삼각형이라는 것 자체가 각이 세 개가 있고 그것을 모두 합하면 180도가 되는 도형을 삼각형이라고 하는데 그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말장난입니다. 동그랗게 되면 삼각형이라는 개념이 깨져버립니다. 그런 것은 말장난이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지만 당신 성품에 의해서 어떤 것들은 행하지 않으십니다.
가장 어려운 7장에 도달했습니다.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는 교리반할 때 항상 건너뛰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숙제에 삼위일체가 있을 것입니다. 강의 5시간을 들어야 삼위일체를 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학기를 따로 공부해야 해서 항상 7장을 뺐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삼위일체를 가르쳐드리려고 합니다. 특혜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블랙홀 중에 하나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져 이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교리를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데 그것은 성경의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을 분해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준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사면 메뉴얼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분해가 된 모습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그런 목적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메뉴얼로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향해 살 수 있도록 그 한도 안에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주십니다.
이상한 용어가 ‘삼위일체’라는 용어입니다. ‘위’라는 것은 ‘인격’을 가리킵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은 유사한 부분도 있지만 차이가 납니다.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인격밖에 없습니다. 다중인격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현상이고 실제 한 사람에게는 한 영혼이, 한 영혼에는 하나의 인격이 있습니다. 그 인격은 1개체의 인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삼위’라고 부릅니다. 흔히 이런 설명을 듣습니다. 삼위일체란 ‘빛, 열, 밝기’로 설명하거나 혹은 ‘한 남자가 집에서는 남편, 직장에서는 부장님, 교회에서는 집사님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런 것이다.’ 하는 것, 이것은 모두 이단적인 설명입니다. 모두 양태론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삼위일체이시고 이것과 견줄만한 것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설명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일체’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의미합니다. 세 위격, 혹은 인격으로 계시지만 모두 하나의 본질이십니다. 두 번째는 세 위격이 어떻게 연합하여 한 하나님이 되는지 일체라는 용어가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한 분이시고 그 한 분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하는데 성부, 성자, 성령이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동일한 신적 본질이시고 셋으로 분할되지 않고 서로 구별된 존재 양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상호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십니다. 성부는 하나님의 본질이십니다. 성자는 하나님의 본질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이신데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부는 성령이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십니다. 위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면서도 서로를 알고 사랑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부르는데 루이스 벌콥은 ‘엘’을 복수형으로 보고 이것이 삼위일체를 지시한다고 봅니다. 또 창세기 1장 26절에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라는 표현이 나오고 “우리 중 하나…”라는 표현이 나오고 지상적으로 나타나셨을 때는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창 18?1-2) 이런 성경의 구절들이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계시는 것을 증거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 28:19) 이렇게 하나님이 세 위격이심을 보이시고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1-22)이것은 한 장소 안에 성부,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2)하는 음성이 들려오고, 성자가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로 임하십니다. 임재가 동시에 나타난 유일한 사건이 이 누가복음 3장 21절의 사건입니다. 또 축도에서 ‘성자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있어지이다’ 이렇게 해서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계시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특성은 낳은바 되지 않으십니다. 성부 홀로 계시고 그 성부에게서 성자가 낳은바 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십니다. 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부는 낳은바 되지 않으신 것, 성자는 낳은바 되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위격적인 특성은 적극적으로 성자에 대해서 아버지가 되시고 소극적으로는 누구에게도 낳은바 되지 않고 원초적으로 홀로 계신 위격이십니다.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으니 개별적 존재로 나누어지지 않고 인간이 자식을 낳은 것처럼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것을 인간의 심리를 사용해서 하나의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사랑,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이 관계가 삼위하나님의 관계라고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성부이시고 사랑받는 자는 성자이시고 사랑 그 자체는 성령이시다.” 이렇게 심리학적 모델로 설명했는데 그것도 완전한 설명은 아닙니다.
성자의 특성은 낳은바 되심입니다. 성부로부터 낳은바 되셨습니다. 성부의 아들이시고 성부로부터 영원 안에서 낳은바 되셨습니다. 사역은 창조와 구속사역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성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의 세계가 창조되고 성자를 통해서 구속사역이 이루어집니다.
성령하나님은 나오심, 발출이 특성입니다. 성부는 낳은바 되지 않으심, 성자는 낳은바 되심, 성령은 발출하심, 그래서 성령은 성자로부터, 성부로부터 나오십니다. 삼위 안에서 위격들과의 교통뿐만 이 아니라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인격이십니다. 위격적인 특징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 안에서 발출하심, 창조와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성부가 제일 먼저 창조되시고 그 다음 성자가 창조되시고 그 다음 성령이 창조되셨겠구나.’ 그러면 이런 그래프를 그릴 수 있습니다. 이만큼은 성부 홀로 계시고, 이만큼은 성부와 성자가 계시고, 그 다음으로 성령이 창조되셨으니까 여기부터는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사고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시간’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닌 피조물이 생기기 시작하고, 생겼고 그 피조물이 소멸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시간이 도입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전에 계셨고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오셨지만 성자 없이 성부만 계셨던 때가 없는 것입니다. 또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지만 성령 없이 성부, 성자가 따로 계셨던 때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몇 해 전에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헛갈린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이해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강의를 잘 듣고 설교를 잘 들었던 사람은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다 이해했습니다. 왜 이해가 안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어려워 보이는 모든 신학적 문제와 혼란은 시간과 공간이 장난을 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각형 위에 동일한 크기의 사각형이 올라갈 수 있습니까? 중학교 수학 시간에 배웠던 것인데, 면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고 그 선은 굵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선은 점들의 무한한 집합입니다. 그 선으로 사각형을 그려서 그 사각형 위에 같은 크기의 사각형을 올릴 수 있습니까? 올라갑니다. 선의 굵기는 무한소입니다. 그 위에 또 다른 사각형이 올라가도 여전히 무한소입니다. 그것 위에 아무리 수만 개를 올려놓아도 결국에는 네 개의 선분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2차원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사각형 위에 사각형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두꺼운 책이 있고 그 위에 두꺼운 책을 올려놓으면 부피가 달라집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3차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몇 차원이십니까? 안셀무스에 의하면 무한차원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에게 파악된 것은 4차원까지입니다. 선, 면, 입체, 그리고 마지막에 시간. 5차원부터는 모릅니다. 그런데 수식으로는 다 풉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웠던 equation(방정식)… 이런 것입니다. 6은 6차원 7은 7차원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사실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성부 하나님의 특성은 낳은바 되지 않으심, 성자 하나님은 낳은바 되심, 성령 하나님은 나오심. 그리고 마지막에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성부에게서 성자가,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오시지만 아무도 서로 없이 계시던 때는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세 위격이지만 한 분이신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성부는 성자, 성령과 함께 사랑하시면서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 되십니다. 상호간의 사랑의 교통하심입니다. 세 위격은 질서 있는 관계를 유지하심입니다. 세 위격은 다른 위격에 대해 무한히 아름다운 방식으로 존재하심입니다. 성부하나님이 너무 완전하고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시고, 성자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성부에게 사랑을 받으시고 성령에게 사랑을 받으심으로 하나님 자신이 완전한 사랑이 되십니다. 세계 만물이 있기 전에도 하나님 당신 자신이 사랑이실 수 있었으니 만약 한 위격으로만 존재하셨으면 그분은 사랑이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는 대상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각 위격은 존재와 사역에 있어서 다른 위격을 배제하지 않으심입니다. 성부는 구속의 계획자, 성자는 구속의 실행자, 성령은 그 구속의 적용자입니다. 창조하실 때에는 성부가, 구속하실 때에는 성자가, 그것을 적용하실 때에는 성령이 적용하셔서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세계를 완성하십니다. 그런데, 유의하셔야 합니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그림을 그려드리겠습니다. 세 개의 삼각형을 그렸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구속을 계획 하실 때는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참여하시는데 주로 이 일을 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이 구속을 실행하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관여하시지만 성자가 주도적으로 관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적용하여 인간이 실제로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은 성령의 주도적인 사역인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어떤 위격도 다른 두 위격을 배제한 채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 나머지 두 위가 함께 계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랑은 성부가 우리에게 느끼게 하시고 성자는 우리에게 은혜를 느끼게 하시고 성령은 위로를 느끼게 하심으로써 어디서든지 이 세 위격은 함께 일하십니다.
다음 제 8장,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작정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작정’하고 교리반에 들어오셨는데 그것과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면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뜻을 세우고 결정하고 온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작정’, ‘decree’ 라고 합니다. decree는 ‘명령’, ‘지시’, ‘법령’,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데 신학에서 decree는 하나님의 작정, 여기에 ‘divine’이 붙으면 ‘신적 작정’, ‘하나님의 작정’이 됩니다. 정의는,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모든 일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의 영원한 계획, 혹은 영원한 목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모든 사역을 포함하여 인간의 죄악 된 행위를 제외한 모든 행위를 포괄한다.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은 허용된 작정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난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다. 어떻게 네가 내 뒤통수를 치느냐?” 하신다면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를 지어라. 너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라고 결정해 놓으셨으면 그 사람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허용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완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허용하실 수가 있는가?” 여기에는 하나님의 비범한 지혜가 숨어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쓴 책, 『죄와 은혜의 지배』를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보시면 있습니다. 거기 ‘죄와 은혜의 조화’라는 항목이 있으니 찾아보시면 상세하게 나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우리를 조종하시거나 조작하시거나 조장하시거나 혹은 우리를 격려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당신을 닮은 성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런 위대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인간을 기계처럼 창조하지 않으셨고 그런 위대성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나서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좋은 것을 결정하지 않고 나쁜 방향으로 결정을 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진작 교리반을 했어야 하는데 여러분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좋은 것을 결심을 안 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결심하지 않아도 잘 되고 때로는 그런 일에 담대하게 결심까지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계속 살찌는 것은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운동선수나 스모선수 같은 경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사가 체중과 당이 문제가 되니까 5kg, 10kg을 빼라고 하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진단해주는 의사도 비만입니다. 속으로 말합니다. “자기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저렇게 쉽게 이야기하나?” 합니다. 못된 인간이 되게 하려면 특별히 노력할 일이 없습니다. 생긴 대로, 마음먹고 싶은 대로 그냥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면 노력을 특별히 하지 않아도 이상한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을 수 있는 우아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교육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실 수가 있는가? 문제되고, 자기가 죄를 짓고 나서 이게 혹시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 속에서 다 프로그래밍 되어서 나도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한 의도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 죄를 사용하셔서 죄가 없을 때보다 오히려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데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어, 부분적으로는 악인데 전체적으로는 그 악이 선을 위해서 이바지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 혹시 간수를 아십니까? 바닷물의 염분을 농축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전에 사람들이 자살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소수 한 잔 정도만 마시면 확실히 죽습니다. 두부를 만들 때 그것을 넣습니다. 독소가 아니냐고 하는데 희석시키면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없이는 두부가 굳어지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악인데 전체적으로 올바르게 사용하니까 선이 되는 것입니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셨습니까? 꼭 맞으십시오. 65세 이상의 분들은 그냥 맞으실 수 있습니다. 그걸 맞지 않고 겨울에 독감을 걸리면 죽도록 고생합니다. 꼭 맞으십시오. 그걸 맞으면 독감에 안 걸리거나 혹은 걸려도 가볍게 감기처럼 지납니다. 꼭 맞으십시오. 독감 예방주사는 균입니다. 그 자체는 나쁜 것이지만 몸속에 들어가면 온몸이 그 균과 싸우면서 항체를 형성합니다. 겨울을 무난하게 나도록 만들어줍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아, 오늘 내가 짓는 죄가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있고 선하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신다고 해도 그것은 본인이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 받을 일이 없습니다. 도덕철학에 있어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정도로만 아시고 더 궁금하신 분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라는 책을 보십시오.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설교를 많이 들으셨던 분들은 읽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의 특성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지혜를 기초로 한다. 영원한 지혜 속에서 하나님이 그 지혜를 이루기 위해서 하위의 작은 것들을 작정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하다. 이리저리 변덕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효과적이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은 꼭 이루어진다. 불변적이다. 하나님은 신실하고 참되시기 때문에 당신이 정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고 당신의 뜻을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또 하나님의 작정은 무조건적이다. 외부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외부의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당신의 뜻을 바꾸거나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일은 바꾸시나 당신의 뜻은 바꾸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전포괄적이다.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 우발적 사건들, 생명의 기간, 거처 등을 모두 포함한다. 죄에 대해서는 허용적이다. 이상 일곱 가지입니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지혜를 기초로 한다. 영원한 것이다. 효과적이다. 불변적이다. 무조건적이다. 전포괄적이다. 죄에 관하여는 허용적이다. 외우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작정교리에 대한 반대입니다.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모순된다. “하나님이 정하셨다면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 물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작정하셨어도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참 어렵지만, 예를 들어 내가 꿈을 꾸고 그 꿈 이야기를 했더니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그런 꿈을 꿨니? 네가 정말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그런 꿈이야.” 하십니다. 나는 그 꿈을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살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저녁때 20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길거리에서 만나고 반갑게 차를 한잔 마시고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내 꿈에서는 그 친구와 만나는 것이 필연이지만 나는 무엇에 의해서 내 의지에 반해서 밀리는 것 같은 강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살았는데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를 작정하셨다고 성경에 말하고 결국 하나님은 작정하시고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것에 대해서 모르신다고 하면 말이 안 되고 항상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께서 예측하실 수 없는 행동이라면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으려고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에 관해 작정하셨는지를 알지 못한다. 살아봐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어봐야 하나님께 작정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고 작정이다, 예정이다 하는 것은 모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과거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의 계획에 작용하였는지를 회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로 만든다. 그렇지 않고 인간은 죄를 선택하면 죄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지위를 가진 인간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은 그의 결정을 존중해 주십니다. 그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 죄를 통해서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더 놀랍게 드러내십니다. “창조의 목적”은 여러분이 꼭 들어야 할 시리즈이니 8개 시리즈를 모두 다 꼭 들으시길 바랍니다.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싶은 분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제 3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죄를 산출하도록 작정하지 않으셨다.
예정은 도덕적 피조물, 도덕적 피조물은 피조물 중에서 도덕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피조물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인간, 천사, 마귀 등을 가리킵니다. 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예정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큰 것이라면 그 중에서도 인간과 이런 도덕적 피조물에 대해서 작정하신 것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성적 피조물과 관계됨. 선인, 악인, 모든 인류, 천사, 마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예정의 두 부분은 선택과 유기가 있습니다. 선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유기는 은혜의 작용 속에서 어떤 사람의 죄를 따라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입니다. 선택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는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지 못하셨다고 하면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유기, 버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의 두 부분이 이 선택과 유기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미 버림을 받았는데 내가 믿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어봐야만 후에 내가 선택되었는지 유기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 전도할 사람은 앞에 두고 유기되었는지 선택되었는지, 유기된 사람에게 가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나를 보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나면 누가 선택되었는지, 누가 버렸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공정하신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푸실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무가 있다면 그것이 호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모두 참석했기 때문에 가실 때 책 한 권씩 받아갈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다면 누군가의 상으로 선물을 준 것이 불공평이 될지 모르지만, 아무에게도 약속이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누가 받아간다면 받은 그 사람에게는 은혜이고 나머지는 그냥 보통 사람인 것입니다. 두 번째, 전 인류가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버리셨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만일 하나님이 한 사람도 구원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신데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지어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을 구원해 내시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것이 비상한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늦게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주에는 조금 더 일찍 끝내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