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 1
녹취자: 김정규
Ⅰ. 은혜 계약 안에 있는 인간
A. 구속의 계약
계약이라고 개념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설교시간에 다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딱 한번만 들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현저하게 모자랐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누군가인지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각과 눈높이로 낮아져야만 그들을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을 맺습니다. 쭉 뒤로 가면서 그 사이사이에 작은 언약들이 있지만 굵직한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이 있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입니다. 가족단위로 맺은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이라면, 이 언약은 가족이 민족을 이뤄서 맺은 언약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에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아지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하나님이 그것을 꼭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짐승들을 쪼개놓고 그 사이를 불길로 지나가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 마음속에 이 일을 이룰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생깁니다. 그것은 당시 근동지방(Ancient Near East), 중국 쪽이 아닌 반대의 끝에 있는 지역을 근동이라고 부릅니다. 서구사람들이 볼 때 메소포타미아 쪽이 한국이나 중국보다 가깝기 때문에 그 쪽을 근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근동지방에서는 주전 22세기 아브라함때 부터 소위 말하는 계약체결의식이 있었습니다. 소위 Vassal Treaty라고 합니다. 왕이 땅이 가지고 있는데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어려울 때, 땅을 쪼개서 각 땅마다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부하를 둡니다. 이 사람이 봉신(vassal)입니다. 왕은 봉신에게 행정, 사법, 입법의 모든 권한을 주고 세금을 걷을 수 있게 합니다. 대신 왕에게만 충성하고 언제든지 군사적 협조를 하고 심할 땐 생명까지도 주어야 하는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이 봉신의 입장에서 보면 계약으로 부름자체가 영광입니까 수치입니까? 그에겐 커다란 영광입니다. 엄청난 의무가 따르지만 엄청난 특권이 따릅니다. 이제는 이 영토에 있는 사람들은 이 분을 왕의 대리자처럼 생각하고 복종하며 봉신을 거스르면 왕을 거스르는 것처럼 됩니다. 이 계약에는 여러 조항이 나오는데 역사적 서언 즉, ‘너와 나는 피로 맺은 사이’라는 것을 시작으로 서로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적은 의무조항과 계약의 시작을 말하는 부칙 등이 있습니다. 이것을 만든 후, 뿔 달린 황소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반으로 쪼갭니다. 한 600kg의 소를 머리부터 반을 갈라 벌여놨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사이는 피가 낭자할 것입니다. 이 사이를 왕과 그 뒤에서 봉신이 이 조약문서 3개를 만들어 각각 들고 하나는 신당에 보관하고 그 사이를 지납니다. 이곳에는 제사를 맡은 종교의 제사장들이 있고, 수많은 제후와 영주들이 지켜봅니다. 그리고 이 계약을 낭독하면서 신들을 불러냅니다. 이들은 ‘이 계약을 위반했을 때 이 반쪽이 난 황소에게 임했던 저주를 그에게 임하기를 원하노라, 동의합니다.’라고 하며 지나갑니다. 그것을 한번 조용히 머릿속으로 그려 생각해보면 장난스러움은 하나도 없습니다. 언약문서를 들고 뒤에 따라가는 봉신은 떨며 지나갑니다. 이것은 신들 앞에서의 서약입니다. 왕도 지나며 ‘내가 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겠구나’하며 엄숙하게 지납니다.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약’이 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Testament는 유언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것은 Promise하고 다릅니다. Promise는 인간과의 약속도 표현하지만 Testament는 특히 신과의 약속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죽음과 관련되는 용어입니다. 구약은 옛날의 약속이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이런 그림이 구약과 신약의 핵심입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그 사람들이 모두 문화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생생한 언약체결의식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갖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맺는 이 언약이 어마어마하게 심각한 것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맺는 언약이 은혜언약이라면 이 은혜언약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이 상층부에서 하나님 안에서의 언약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구속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평화의 의논이라고도 부르는데, 슥6:13에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하고’의 말씀에 따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님 이 삼위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입니다. 특히 성부와 성자가 주가 되어 맺어지는 이 계약을 토대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은혜의 계약이 이뤄집니다. 삼위의 대표이신 성부와 선택을 받은 자의 대표이신 성자사이에 언약입니다. 성부는 그에게 주신 사람들에 대해서 의무를 맡기시고, 성부는 속죄사역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약속합니다. 성령도 배제하지 않고 성부와 성자사이에 구속의 계약이 맺어져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계약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계약을 가능하게 한 동기는 사랑이었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구속계약은 인간을 향한 은혜계약의 견고한 기초가 됩니다.
이 구속계약의 성경적인 근거는 구속 계획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시기전 성부와 맺으신 계약과 또 위탁받은 것을 말씀하셨고, 그리스도는 언약의 머리가 되심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고, 계약에 당사자와 하나의 약속을 스스로 언급하십니다. 메시아가 희생제물이 되므로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언급하셨고, 언약의 관념이 메시아와 직접적으로 관계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구속계약(언약)에서 있어서 머리와 보증인은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서 죄의 형벌을 짊어지셨고, 성자가 구속계약의 머리임을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모든 구원받을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신해서 형벌을 짊어지셨고, 자신의 백성들의 율법의 요구-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고 언약을 파기 하였으니, 이제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당해야 한다는 것-에 응하셨고, 따라서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 되십니다. 첫 번째 아담은 아담이고, 그 사람이 인류의 대표자가 됨으로서 죄가 들어왔고, 사망이 왕노릇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두 번째 인류의 머리가 되셔서 인류의 죄때문에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사람들의 구원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에 있어서 행위계약입니다. 인간의 모든 구원받을 인류의 머리로서 이들이 지은 죄가 형벌을 요구하고 이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로 담당하셨기 때문에 이 언약이 그리스도 행위계약이 됩니다. 그 공로를 여기에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저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은혜언약의 영원한 기초가 됩니다. 계약의 효능은 선택받은 자에게만 제한되고, 구속이 이뤄지고 영광을 상속하는 것이다.
구속계약의 요구 중 성부가 성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성자는 인성을 취하시고 죄는 없으시지만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취하고 인간이 겪는 모든 육체의 고통을 죄를 빼고는 모두 경험하는 것입니다. 선택자를 위해서 형벌을 받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자신을 율법아래 둘 것, 성령의 역사로 자기 구원의 공로를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헌신하게 할 것, 이것이 바로 성부가 성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구속계약의 약속은 성부가 성자에게 주시기로 한 것입니다. 첫째로 죄로 더럽혀지지 않는 육체를 준비시켜 주십니다. 두 번째는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셔서 메시아의 자격을 갖게 하십니다. 성자의 사역을 지원해 주시고 사망권세에서 부활하게 하여 하나님 우편에 있게 하십니다. 그의 죽으심을 토대로 교회의 설립을 위해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파송하십니다. 택한 자를 불러내고 보호하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후사, 즉 구원의 열매를 허락해주시는 것, 이것이 성부가 성자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은혜계약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신 구속의 계약을 근거로 해서 확립합니다. 인간이 혜택을 받는 은혜계약이 있기 위해서 먼저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에 구속의 언약이 있었다는 것과 여기에 성령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약이 성립하기 위해 당사자가 있어야 하듯, 은혜언약의 첫 번째 당사자가 하나님입니다. 제2당사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결정지으려면 계약을 어느 면에서 볼지 고려해야 합니다. 목적자체로서의 계약으로 볼 때와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계약으로 볼 때 각각 당사자가 달라집니다.
목적 자체로서의 계약입니다. 은혜계약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역사전개의 과정에서 실현하시는 궁극적이신 영적 실재로서 만물의 마지막에 완성되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상호친교(사랑)와 성령을 교통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있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약속된 축복들이 완전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점에서 보면 제1당사자는 하나님이고 은혜계약을 통해 맺는 제2당사자는 택함을 받는 죄인입니다. 목적자체라고 함은 이 은혜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결론지어집니다.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계약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과 계약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면 이것으로 끝나지만 구원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써 본다면 이 계약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렇게 될 때에는 신자들뿐 아니라 그 자녀들까지도 이 계약의 당사자들로 봐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은혜계약 안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계약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한쪽으로는 계속 들어오고 한쪽으로 계속 빠져나가게 됩니다. 이것을 구약을 기준으로 보면 혈통적 이스라엘입니다. 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가나안 원주민이 이스라엘로 들어오고 예로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중다한 접족들이 이스라엘을 따라서 가나안을 향하여 갑니다. 그 사람들은 신앙고백과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을 보면 이삭은 남고 이스마엘은 떨어져나가고, 야곱과 에서가 같이 태어나지만 야곱은 남고 에서는 떨어져나가면서 한편으로 들어오고 다른 한편으로 계속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면 들어오는 사람들은 신앙고백과 할례를 통해 들어오고, 다른 사람들은 불신앙과 계약을 어기면서 자기를 떠남으로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입증합니다. 넓은 의미의 언약이고, 순수한 합법적 언약입니다. 언약의 생명을 보지 못한 사람들과 언약의 실현을 보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형식입니다. 하나의 형식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믿음으로 거기에 있고, 다른 이들은 불순종과 반역으로 자신의 하나님의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면서 떠납니다. 이런 구조에서 이스마엘, 에서, 엘리의 악한 자식들은 육신적으로 같은 혈통에서 태어나지만 떨어져 나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약의 당사자는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신자들과 그 자녀들까지 포함됩니다. 그러면 그 자녀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런 자녀들은 태어나면서 넓은 의미의 언약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관계 속에 있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장성하면서 진정으로 자신이 믿음 안에 속했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입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여 신앙을 버리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 계약을 파기한 언약의 파괴자가 됩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일단 이런 언약을 기초로 해서 이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죽었을때 구원받은 아이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 볼지는 여러 의견으로 나뉩니다. 이 계약의 당사자들을 좁게 보면 신자들에 해당되고 넓게 보면 신자의 자녀들에게까지 확대됩니다. 유아세례는 이 계약 안으로 이 아이들이 들어왔다는 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66권이 있는데 어느 구절이 가장 중요할까라는 질문은 바보 같지만 어려서 우리가 배우기는 성경 66권의 요절은 요한복음 3장16절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장16절은 사실 이 밑에 창세기 1장 1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장 1절을 통해서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가 규정되고 그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세계가 규정됩니다. 그렇게 규정된 관계가 있는데 그 관계에서 인간이 이탈하여 죄를 짓고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괴합니다. 파괴한 인간을 그대로 두어서는 도저히 인간을 창조한 목적대로 인간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일 심각한 것은 사람들이 왜 사는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적입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으나 그런 모든 것들은 ‘내가 왜 사는가’라는 바탕위에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는 인간에게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이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렇게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없는 인간에게 제시된 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모두 묶는 본드가 무엇일까? 성경 66권은 이 짧은 구절인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를 풀어헤친 설명입니다. 원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된다고 하는 것은 너희 스스로 나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나를 멀리 떠나서 나와의 관계가 깨진 너희들을 다시 불러들이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을 본드처럼 묶어줍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여기에 나오는 이 성경구절이 전개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언약은 마지막 날에 완전히 실현될 것이며 이 은혜계약의 약속 속에는 현세적인 복의 약속들이 있고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다는 약속이 있고,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고, 마지막에 이 믿음을 따라 산 사람들에게는 최종적으로 영광을 누리게 하겠다는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계약은 아주 신령하고 영적인 복만을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복까지도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약속에 대한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복을 언약관계 안에서-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은혜계약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원래 말하면 은혜계약은 요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grace로 라틴어 grátĭa에서 나옵니다. 스페인어 gracia이며 이탈리아어로도 표기됩니다. 이것은 Buy one get one free, 하나사면 하나 공짜로 준다는 뜻인데, 이 공짜를 gracia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혀 그 대가를 받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일한 품삯을 주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결국 이 계약이 이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뤄지는 것임을 우리는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모순은 무엇입니까? 은혜계약 자체가 거저 주어지는 것인데, 요구가 무엇입니까? 근데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들을 받아들이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만원을 꺼내어 가질 사람을 부릅니다. 그 사람이 이 만원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때 저 사람이 만원을 받은 것은 손을 들고, 손을 뻗은 공로의 대가로 받아간 것입니까?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공로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순종을 공로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이 모든 손과 같은 것이 믿음이고 순종이 삶입니다. 은혜계약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결코 인간의 공로 혹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을 수여하는 조건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요구에 응하는 것이 결코 공로는 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믿었더니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이렇게 순종했더니, 이렇게 많은 복을 받아다.’라는 영웅주의적 간증은 자칫 잘못하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잊히고 믿었던 그 사람, 순종했던 그 사람을 추앙하게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은혜계약의 요구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예수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결코 구원의 길을 찾지 않겠노라는 다짐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길은 무엇입니까? 내가 만약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쾌락을 쫓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의 길이 쾌락에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태만하고 아주 유유자적하게 아무것도 안하면서 사는 생활을 즐긴다면 그게 자신의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것은 죄에서 건져낸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해지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도 구원의 길이고 나의 쾌락도, 게으르게 사는 것도, 죄를 짓더라도, 나의 쾌락을 위해서 사는 것도 다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면 믿음은 진정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의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종종 죄에 빠지긴 하지만 그러나 즉시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끊임없이 그분을 신뢰하면서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언약의 생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순종은 새 생명의 원리입니다. 새 생명의 원리는 롬8장에서 ‘그런즉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였다.’는 법이 원리입니다. 새 생명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생명이 우리 안에 심깁니다. 그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차가 몇 달 동안 못 달리다가 기름을 넣고 시동을 걸면 엔진이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이 생명이 없어도 삽니다. 사는데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참된 생명이 사라지면 악이 충만해져서 죽어있는 증거를 활발하게 나타냅니다. 미워하고 원수 맺고 수군수군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쟁하고 원한을 맺는 이런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이것이 죽은 영혼으로서 인간이 하는 일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무너지고 새 생명의 원리가 심겨집니다. 그러면 새 생명이 우리 안에 심겨지고 역사하는 법칙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는 계속해서 정욕을 먹으면서 성장합니다. 새 생명은 끈임 없이 죄를 죽이고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실천을 통해서 이 새 생명은 우리 안에서 점점 풍성해집니다. 생명이 없을 때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이런 시련을 도저히 헤쳐갈 수 없었는데 이 새 생명 때문에 시련을 헤쳐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묘미입니다. 죽어도 행복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세상에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행복해 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런데서 새로운 순종심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은혜언약이 요구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무한한 생명의 은혜를 우리 안에 실제로 역사하도록 그렇게 우리들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고 순종할 때 가장 먼저 혜택을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은혜계약의 특성은 첫째, 은혜로운 계약이다. 그런 관계 속으로 부름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불러내셔서 언약관계 속으로 데려가십니다.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성악가가 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이름이 없습니다. 자기는 잘하는 것 같은데 인정을 잘 못 받습니다. 그런데 파바로티가 내한 공연을 왔습니다. 그가 자신의 노래를 한번 듣고 ‘너는 참 장래가 촉망되고 재능이 있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바빠도 너를 사사한다. 너는 나에게서 배워라.’ 그리고 이탈리아에 올 수 있는 표까지 주고 그의 집에 친딸같이 지내게 해준다면 어마어마한 특권일 것입니다. 그것을 무한정으로 연장해서 생각하면 됩니다. 물론 노래 싫어하는 사람은 파바로티의 그런 호의가 싫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 요리를 한다면 피에르 가니에르라는 전설적인 요리사가 ‘너는 내 밑에서 수학을 하라’고 한다면, 어느 건축학도에게 르 코르비쥐에 같은 사람이 ‘너는 건축가로서 괜찮은 소질이 있구나, 너를 나의 3명의 제자중 한 사람으로 삼아주마.’ 그렇게 했을 때 사람들이 감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 이제 돈을 벌 수 있겠구나’하는 것이 아닌 자기 같이 미천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 어마어마한 大家(대가)와 특별한 관계속으로 들어간다는 감격입니다. 그것이 은혜로운 계약입니다.
당연히 그 계약은 영원합니다. 둘이 악수를 했는데 한쪽이 변심해서 도망가려고 팔을 빼려는데 절대적으로 힘이 센 사람이 꽉 붙들고 놓지 않는다면 그는 도망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 계약의 내용이 주일날 선포되는 호세아서 말씀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과의 약속을 다 파기하고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반역을 했는데 연약하기 짝이 없는 엄마처럼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과 같이 아드마와 같이 지켜보겠느냐?’하며 탄식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약속을 맺고 인간은 신실하지 못해 그것을 파기하고 떠나가지만, 하나님이 그 언약을 붙들고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만약에 영원하지 않다면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연애를 해보면 인간의 마음이 한길로 가지 않고 요동치면서 변한다는 사실이 가장 힘듭니다. 마지막에는 ‘신이라면 이 여자의 비위를 맞추면서 연예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도 못할 것이다.’ 근데 남자가 워낙 사랑하면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놓으면 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인간의 이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계약은 영원한 계약입니다.
특수한 계약입니다. 은혜 계약의 범위는 광범위하지만 항상 특정한 인간만을 포함합니다. 네 번째 단일한 계약이다.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런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일부 교파에서도 있고 특히, 순복음 같은 교회에서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은 이번 시대가 끝이고 이다음에는 순교해야지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특히 이렇게 시대마다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고 각각 분할해서 가르칩니다. 신천지도 그런 교리를 따릅니다. 그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나 계약의 모양은 좀 달라지만 본질적으로 이 은혜언약은 하나로 관통하는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진 계약입니다. 약속이 동일하고 복음이 동일하고 믿음의 요구가 동일하고 중보자도 동일합니다.
조건적인 동시에 무조건적인 계약이다. 인간의 어떤 공로에도 의존하지 않기에 무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믿음과 순종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인간의 반응입니다. 믿음은 은총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공로 때문에 이 은혜언약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이 언약은 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유언적인 계약이다. 예를 들어 유언이란 민법에 자식에게 유산을 분할하게 되어있지만, 자식4명이 서로 유산을 갖고 다퉈도 아버지가 죽을 때 전 재산을 열린교회에 기증한다고 작성 후 공증을 받으면 다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유언은 본인이 죽기 전에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그 봉한 유언장을 아무리 개봉해도 효력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언이 법적으로 유효하기 위해서는 유언자가 죽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언적 계약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도입된 계약입니다.
행위계약에서는 중보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간 사이에 계약이 맺어지고 인간이 그 행위를 어기면 하나님께 벌을 받고 계약이 파기됩니다. 이 은혜계약은 중보자가 있다는 점에서 행위계약과 다릅니다. 중보자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은혜계약 안이 있는 회원이 누구인가? 계약의 당사자 이야기입니다. 성인은 오직 믿음으로서만 합법적인 협정으로서의 계약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인이 된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 예수를 믿지 않고는 이 은혜계약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두 번째 성인은 즉시 하나님의 생명이 중생과 함께 역사하고 완전한 언약적 생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성인이 된 사람가운데는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구원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뇌의 이상으로 스스로 복음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문제는 구원론에서 다루겠습니다. 두 번째는 계약 안에 있는 신자의 자녀들입니다. 핵심은 태어나면서 계약 속에 들어가지만, 즉시 하나님의 생명의 교통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고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자녀도 하나님과 은혜계약 안에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계약생활이 생애 속에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장성하면 자발적으로 진실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자기가 계약당사자로서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계약의 파기자가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나도 그가 구원 못 받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약 안에 있는 비중생자는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는데 아직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합법적인 협정으로써 계약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한사람씩 예수를 믿게 됩니다. 시간을 사상(捨象)해서 본다면 이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받기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들이며 그것이 시간 속에서 전개됩니다. 이들의 중생 전까지 시간이 흘렀어도 이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보면 합법적인 하나님의 계약 안에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 교회는 그의 자녀들을 계약의 자녀들로 보고 훈계합니다. 일단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면 심각하게 믿음의 도리를 배반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는 한, 일단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다고 보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언약의 자녀들로 대우하고 훈계하지만 성찬에 참여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은 자기 자신의 자력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겠다는 것을 진정한 회심과 함께 그것을 고백하고 서약함으로 성찬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속으로 들어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일반적 축복과 성령의 일반적 역사에 참여합니다. 언약적 책임아래 있고 신앙적 책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계약의 파기자가 됩니다.
계약의 시대적 경륜. 계약의 최초의 계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 하나님이 주신 창세기 3장 15절 말씀입니다. 뱀을 저주하시고 인간에게 책망하시는 장면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라고 할 때 여자의 후손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전자가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사단의 세력들이 궤멸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에 메시아를 약속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복음, 어머니의 약속이라고 봅니다. 모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좋은 약속들이 바로 이 모태가 되는 창세기 3장 15절에 매달려 있다고 봅니다. 계약의 형식적인 확립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아와의 계약은 홍수로 다시는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주어지고 다음에 자연적인 규칙을 따라서 이 땅이 복을 받을 것임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자연의 언약, 일반은총의 언약입니다. 이 계약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계약입니다. 아브라함과는 계약의 형식의 확립이 아브라함 때부터 이뤄집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계약이 언제부터 이뤄지게 되었는가? 형식적으로 아브라함때 부터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특수한 계약이 이뤄지고 현세적인 축복과 영적인 축복을 아울러 약속하시고 신앙과 함께 할례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 후 시내산에서 계약이 이뤄집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이것은 국가적인 계약입니다. 이 율법은 은혜언약에 공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율법 그 자체도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올바르게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은혜언약의 비밀을 알게 되고 은혜언약 속에 자신들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유월절이 제2의 성례로 첨가가 됩니다.
신약시대의 언약은 새언약이라고 부르는데 ‘새’라는 것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본질적으로 구약의 계약과 동일하지만 특정 민족이나 사람의 장벽을 깨뜨리고 축복이 모든 나라 백성들에게 확장됩니다. 우주적인 구원계획이 이뤄질 것을 보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하나의 씨앗이었다면 이 씨앗 속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계획을 보전하시고 이것들이 터지면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줄기가 자라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이 씨앗인 구약의 이스라엘이열매인 신약의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더 충만하고 영적인 복들을 약속합니다.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이제 구약의 유월절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유월절을 지켰던 것처럼 이제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은 표를 갖게 됩니다.
Ⅱ. 그리스도의 명칭과 본질
예수 그리스도의 존함이 여러 가지 나옵니다. 예수는 구원자,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크리스토스(χριστος)라는 단어로 이것은 크리오(χριω)라는 ‘기름을 붓다’에서 나온 피동명사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영어의 Christ가 됩니다. 인자라는 말은 人子로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님의 아들과 반대되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다니엘서와 연결되면서 종말존적인 존재를 뜻합니다. 종말론적으로 임할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인자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부, 성자, 성령에서 제 2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함은 통치, 주인으로서 온 세계를 지배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 과 전체의 요약입니다.
예수라는 말은 여호수아의 헬라어형태입니다. 여호수아는 ‘구원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야사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주가 되시고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선지자, 제사장, 왕 세 종류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는 점에서 선지자요,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게 하신다는 점에서 제사장이며 그분이 모든 것 위에 임하시며 당신의 뜻대로 통치하신 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은 참 선지자인 동시에 제사장이며 왕이십니다. 역사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때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때,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신 때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라는 뜻은 하나님께 특별한 일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인자는 다니엘서 7장 13절에 이르는데, 초인간적인 특성과 구름타고 재림하실 종말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부, 성자 성령 중 2번째 성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히브리어 번역입니다. 크리스토스는 그리스어고 그것의 희랍어는 메시아입니다. 주는 원래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이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후부터 특별히 의미를 갖게 되고 교회의 주인이며 통치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의 본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신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이미 성경에서 폭넓게 입증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성품과 함께 인간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비한 것입니다. 인간이면 신일 수 없고 신이면 인간일 수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신 동시에 인간성을 갖고 계신분이라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가지시는 분임을 부인하는 신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람으로 불리셨고, 인성의 본질적인 요소인 육체와 영혼을 아울러 소유하셨습니다. 인간의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따라서 어린아이 때부터 성장하셨습니다. 인간적이 욕망과 고통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 되실 수 있지만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셔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는 그분은 반드시 죽을 수 있는 생명을 가진 분이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은 죽을 수 없으니 참 인간의 본성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가지고 계시지만 신의 인격과 인간의 인격을 동시에 갖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두 인격을 가진 다중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지만, 인격으로는 하나님의 인격 하나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한 인성 안에 한 인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인성을 취하시되 인격이 없는 인성을 취하십니다. 그리스도에게는 한 신적 인격만 있고 성육신에서는 인간의 인격이 아닌 인성만을 취하시고 인성은 독립적인 인격으로 발전하지 않고 신적 인격 안에서 인간의 인격적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소유하신 신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가지고 계셨지만 스스로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셔서 당신 스스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당신 스스로 인간이 아는 한계에 자신을 두시기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이 언젠가 물을 때 예수님은 당신도 모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이 모르는게 있으면 안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완전한 신의 인격을 인간의 인격아래 감추시고 인간의 한계를 가지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온 몸으로 겪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더욱 현실적인 것입니다. 기독론의 오류는 신성이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인성을 부정하는 파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도 예수가 신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었고, 종교개혁시대에도 있었고 현대자유주의 신학자안에서도 예수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이에 태어난 한 인간일 뿐이라는 주장이 여전히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나타난 것은 실재가 아니라 환상같이 나타난 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결국 2세기의 그노시스파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부정하고, 4세기 사벨리우스(양태론)파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변장하신 모습이라고 봅니다. 집에서 아버지가 회사에서 부장님이 되는 것처럼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지 실재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아니셨다고 봅니다.
두 본질은 신성과 인성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이고 절대 신이 아니다. 그는 신만 못한 존재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근거로 보자면 낳은바 된 것은 항상 낳은 것보다 열등하기 때문입니다. 아폴리나리스는 육체와 혼이 본성이고 영이 신적 로고스 등이라고 했으며 네스토리우스파(경교)는 한 인격 속에 두 본질이 결합되는 것, 그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질을 인성도 신성도 아닌 제3의 것으로 표현해서 두 본질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이단이었습니다. 결국 기독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이신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인격은 오직 하나님의 인격 하나만을 취하셨다는 것,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데 혼합이 되어버리거나, 아무 상관없이 따로 존재하거나, 아주 유기적으로 이 두 개가 섞이지도 않고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으면서 참 사람이신 것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방해하지 않고 참 하나님이신 것이 참 인간을 부정하지 않는 그런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