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구역장 수련회(새벽)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네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나면 충분한 성경입니다. 그런데 21장이 달려있습니다. 21장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거의 없고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영적인 회복입니다. 만약 21장 요한복음이 부록 같기는 하지만 만약에 이게 없다면 교회는 굉장히 많은 혼란을 느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에서는 다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날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서 전체의 끝장인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 그 실패한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다시 부름을 받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여기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확인은 했지만 그 부활이 뭘 의미하는 줄을 몰랐기 때문에 제자들이 다시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아간 것에 대해서 우리는 시비를 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잡으러 나아간 베드로와 그 일행에게 누가복음 복음 5장 맨 처음에 베드로를 부르던 상황과 똑같은 상황을 만드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잡은 것이 별로 없을 때에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셔서 그물을 던졌더니 그때처럼 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거둘 수 없을 정도의 큰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이는 예수님이시라고 알려주었고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숯불과 생선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멀쓱해 있는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의 아침상이 차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때이지만 베드로에게 개인적인 말을 건네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반을 먹고 함께 식탁에 참여한 후에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질문은 곧 시몬 베드로가 오래 동안 가슴에 안고 있던 무거운 부분을 찌르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에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동료제자들까지 팔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죽는 데까지 예수를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그곳에서 말입니다. 그런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에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세 번의 질문을 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주신 똑같은 당부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 내 양을 먹이라” 였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돌보는 사역에 있어서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우선 첫째로 영혼을 돌보는 이 사역은 흠 있는 사람들을 사용한 사역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다른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렸을 때에 이 사람 혼자 독야청청하게 배반하지 않고 순교와 방불한 고난의 길을 간 유일한 변절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적응성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베드로는 이렇게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이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예전에 희미하게 알던 복음의 진수를 경험하게 된 거죠. 영혼을 돌보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높은 학식,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은사나 그리고 오랜 섬김의 경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현재적인 사랑이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 용서받은 경험이에요. 하나님의 위대하고 큰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 하나님의 위대하고 큰 사랑은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경험된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흠 없는 많은 사람보다 흠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약한 자를 불러 하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에요. 복음은 바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죄의 용서를 통해서 그 본질이 우리 인간들에게 깊이 전해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죄의 용서의 경험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아주 눈부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게 될 때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면 자기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빚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거예요. 이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이 영혼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네가 왜 그랬니?” 혹은 “네가 그렇게 장담하고 죽는 데까지 따라간다고 하더니 네가 왜 그랬니?” 하고 물어보시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사실 이 이름은 예수님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시기 전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자연인의 이름이 아니었습니까? 만약에 베드로라는 이름이 반석인데 반석과 같은 믿음을 의미하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불러주셨더라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렇게 불러주셨어요. 사람 앞에서는 은혜를 받은 자, 충성된 자, 목사, 그리고 교사, 그리고 또 구역장, 순장, 충성스러운 사람, 이렇게 불릴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일 뿐이에요. 이 베드로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놀라운 능력, 진리의 말씀, 이런 것들이라고 한다면 요한의 아들 시몬의 이름은 그냥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나 잡으면서 먹고사는 그런 종류의 하찮은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의 아들 시몬의 그림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영혼을 돌보는 사역에 하나님의 복이 있을 때에는 우리가 자기 관리를 참 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우리는 충성스러운 일꾼, 하나님의 중요한 사명자라는 사실 대신에 내가 단지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입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에 이렇게 서서 그래서 영혼들을 돌보는 이 영광스러운 섬김을 봉사하며 살아가는 자체를 한 없이 감격스럽게 여기는 거예요. 이게 자기 확인이에요. 하나님이 의롭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러주셨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내가 이렇게 숨 쉬고 살아있고 거룩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 자체가 은총의 소산일 뿐이라고 하는 그러한 신앙의 고백, 그것이 살아있는 거죠. 그때에는 마음에 은혜가 밀려오고 복음의 의미가 자기의 삶 속에서 자기의 신앙 속에서 그대로 경험이 됩니다.
(예화) 언제 우리 교인이 편지를 보냈어요. 제가 전도사 때의 일이었는데 하여튼 이 찬송을 부르면서 몇 년 동안을 그렇게 울었어요. 그랬더니 어떤 자매가 편지를 보냈어요. “전도사님, 예배 시간마다 전도사님이 우시는데 무슨 사연이 있냐고” 그렇게 편지에다 물었어요. 몇 년 전에는 어느 교인이 이메일을 보냈어요. 새벽기도시간에 목사님이 우시는데 교회 돈이 없어서 그러나, 누가 속을 썩이나.
사실 그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살면서 그런 일 때문에 울어본 적은 거의 없어요. 그리고 또 돈이 없어서 운다고 돈이 나올 것 같으면 아예 녹음기 틀고 울지요. 소용이 없구요, 교인들에게 돈이 없다고 눈물을 보여도 더 많은 헌금이 나오는 것은 아니에요. 또 누가 나를 속상하게 하고 괴롭게 한다고 해도 어차피 복수도 못할 텐데 울면 뭐하겠어요. 그런 것들은 두 눈 질끈 감고 이길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아주 값싼 눈물이에요. 그러나 우리들이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우리들에게 사라지지 말아야할 눈물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예수가 누구신질 아는 거예요. 다른 눈물로는 우리의 마음이 녹지 않아도 오직 한 가지의 눈물,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구나, 그리고 나 같은 가치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바로 나의 큰 죄를 구속하기 위함이었구나를 깨닫게 되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게 되요.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불러와요. 그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섬기는데 있어서 불편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만약에 섬기면서 마음 깊이 원망과 그리고 불평, 미움의 쓴 물을 머금게 되면 그것이 영혼을 섬기는 우리의 일을 망치는 거예요. 농토에 기름이나, 소금기가 스며들면 농사를 망치는 것처럼 영혼을 섬기는 사람 마음에 있는 쓴물은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과 원망의 쓴물은 이게 영혼을 섬기는 농토를 망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위대한 첫 번째 지도자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쳤던 사람 중 한 사람을 회개시켜 용서하여 그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종종 많이 배우고 잘난 사람을 통해서는 도저히 드러나지 않던 하나님의 은혜가 못나고 못 배우고 허물이 많은 사람을 통해서는 나타나서 오히려 그럴 수 없어 보이는 사람을 통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런 복음적인 사실이 우리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처럼 이런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삶을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은 복음이 복음이 되는 것이죠. 목회가 어렵다고 말하고 영혼 섬기는 길이 힘들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일은 한은 어렵지 않아요. 더 어려운 것은 그러한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시종여일하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것, 나는 핍박자요, 폭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였으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죄인들을 구하려 이 세상에 임하셨다는 이 사실 때문에 깊이 감격하고 하나님이 아무리 나를 높여주셔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이 자각, 그래서 그 앞에서 자기가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그 자기 참회와 자기 확인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을 가슴 속에 담게 되는 거예요. 그 복음이 바로 예수의 사랑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참으셨던 것처럼 참으며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영혼을 섬기다가 미끄러질 때도 많고요, 그리고 영혼을 섬기는 그 일이 죽는 것처럼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영혼을 섬겨야 하는 그 의무 때문에 교회 나올 지경이 되었을 때도 사실은 그 일이 죽는 것보다도 더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영혼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잘 관리해서 거기까지 내려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내려간 때에도 그는 그 자리를 잘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나면 여러분 모두에게 똑같은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한결같이 우리 안에 유지해서 그래서 영혼을 위해 영혼들이 내 마음을 칼로 찌르고 손톱으로 할켜도 그래도 내가 내 자식을 해산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또 가장 힘들고 어려운 난관을 만날 때조차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난관과 어려움을 이기면서 충성스럽게 이 영혼 섬기는 이 일에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주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은 사랑은 다른 곳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에요. 가끔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보면 둘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둘이 결혼을 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되짚어보면 예외 없이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직장생활을 하던가 혹은 함께 봉사하는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많은 이야기, 그리고 많은 함께 하는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전해주고 전해 받게 만들었던 것이죠. 우리 예수님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말을 많이 들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단지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목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에요. 종종 내게 있는 환경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지고 영혼을 섬기면서 내가 받는 대접이 부당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견디기 힘든 괴로움들이 나를 요동치게 하여 누가 사람이 지어준 것도 아닌 이 짐을 벗어버리고자 유혹을 받을 때에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게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 때에는 나의 고통, 나의 갈등, 나의 시련, 나의 괴로움이 제일 큰 것으로 여겨졌어요. 그런데 어떤 계기에서 주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 거예요. 주님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분의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그 언어들을 채집하는 거예요. 그때에 주님의 마음이 전수되고 나면 사실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영혼을 섬기도록 이렇게 불러주신 것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바로 그런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가슴에 귀를 기울이는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도 항상 덜렁덜렁 읽으면 영혼의 유익이 없어요.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도록 성경을 펼쳐보면 주님이 웃으실 때도 있고 눈물이 가득하게 근심하실 때도 있고 분노하실 때도 있고 감격하실 때도 있고 그러한 수많은 하나님의 감정이 마음이 이 성령 안에 녹아있어. 하나님은 흔들리는 분이 아니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읽게 하셔서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질 때에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에요. 누가 최근에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설교를 준비하는지 물어봤어요. 저는 살아가는 삶 자체가 말씀의 준비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아침에 새벽기도가 끝나고 교회 마당이나 혹은 서재에 앉아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때에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성경을 읽는 거예요. 그리고 마음에 부딪치는 부분이 있으면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반복해서 천천히 계속 성경을 읽어가요. 그런 다음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전해지도록 그래서 이 진리에 담긴 주님의 이 뜻을 알뿐 아니라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주님의 마음도 알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반복해서 계속 읽습니다. 그러면 어느 한 순간에 성경이 열리기 시작해요.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해요. 그러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요. 어떤 의미에서 성경은 닫혀진 조개껍질 같아요. 그런데 그 순간에 조개가 쫙 열리고 살이 들어나요.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진리를 하나씩 하나씩 성경의 원 저자이신 성령께서 마치 오늘이 본문에 대해서 너한테만 알려주겠는데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기 시작하시죠. 그러면서 감격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예배를 드리는 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나의 마음에 깊은 은혜를 준 이 진리, 이 쓸모없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시고 그리고 아직도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목회에서의 축복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전해지는 주님의 마음속에서 읽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것을 노트에다 쭉 정리를 하는 거죠. 그러면 하루 아침 하고 나면 한번 사경회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이 나와요. 최근에는 디모데전서 4장에 나오는 한 구절을 지금 4일째 그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께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그래서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을 때에 삐치고 그리고 토라지지만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모르실 리가 있겠으며, 또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이 품으신들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겠어요? 항상 기준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죠. 주님의 마음을 너무 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이 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반미 운동이 한창 우리나라 전체에 번졌을 때에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한국의 외교 당국자가 외국에 가서 한국이 옛날 같지 않고 많이 변했습니다. 그랬더니 미국이 한 이야기가 의미심장해요. “이보세요. 한국이 변한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미국이 변한 게 더 큰 문제입니다.” 911테러이후로 미국은 예전의 미국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똑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죠. 그래서 주님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요.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해요. 그래야지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질 수가 있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쓸모없는 일에 마음을 더럽히고 허비하는지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마음은 진리의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어요. 그 진리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그 진리를 기뻐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그 진리와 함께 진리를 사랑하면 살아요. 거기에서 주님의 마음을 전수받아요. 결국 한때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던 이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버리고 도망가는 로마로 들어가서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사랑이 시킨 것이죠. 영혼을 섬기면서 어려움이 오고 힘든 일이 생겨나고 갈등이 내 마음속에 있을 때마다 항상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왜? 주님께서 그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그 고난을 당하시고 나를 용서해주시던 그 순간에 나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벌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영혼을 섬기는 이 현장에 두신 이유는 나로 하여금 보람을 느끼고 자기를 실현하게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 두신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장 많이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그 아들의 존귀하고 사랑스러움이 이 세상에 사랑스러움과 비교될 수 없었겠죠. 그런데도 막상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 비하면 예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종처럼 노예처럼 취급을 받으며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싫어 버린바 되셨지요. 그래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다른 일로는 주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서 조국교회 한 구석에서 영혼을 섬기겠다고 복음의 사랑에 붙잡혀 이 길로 들어선 우리를 철없이 육신에 매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우리에게 맡겨준 양떼들보다야 우리를 더 사랑하시지 않겠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사랑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가운데 역사하느니라”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믿음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오늘 베드로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준 십자가를 잘 감당해야 해요. 그 십자가는 우리 자신이에요. 그 십자가를 잘 질 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벗어버리면 우리도 주님 앞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이 길을 잘 감당한 사람은 마지막에 주님께 얼마나 칭찬을 받을까요?
(예화) 저는 지금도 참 잊을 수가 없어요. 89년도였는데 아이들이 하도 변화되지 않아서 토요일마다 여러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모여서 같이 철야기도를 했어요. 한 2년 했어요. 그렇게 철야기도를 하면 너무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미어지도록 가슴을 두드리며 울고 있는데 아주 선명하게 주님께서 내 마음에 말씀하셨어요.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울지마라. 울지마라. 내가 너희의 마음을 안다. 내가 너희의 마음을 안다.”
그냥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영혼을 섬기게 된 것을 큰 특권으로 알고 영혼을 섬기게 된 이것이 나의 일생의 최고의 영광인 줄을 알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이 길을 걸어가요. 그때에 우리가 지은 죄가 있으면 용서해주실 것이고, 우리에게 능력이 부족하면 주실 것이며, 우리에게 이 영혼을 섬기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 아픈 일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들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주의 은혜를 알게 하실 거예요. 모든 것이 협력해 선을 이룰 것이니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서 그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