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교역자 수련회 1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 3:14-15)
녹취자 : 조원정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 각기 당신 자신의 존재와 성품을 보여주셨는데 그게 그 교회의 영적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1장에서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 할당되듯이 이제 일곱 교회에 각각 계시가 되는데 그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제시된 예수그리스도의 존재와 성품에 관한 가르침은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창조의 근본이시니 그랬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이걸 다 설명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뒤집으면 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삶이 아멘 하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고 충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충성되셨던 주님의 생애를 소개하는 것이고 또 그가 그런 자세로 증거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증인이었다고 그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이름은 아멘이었습니다. 원래 이 아멘이라는 말은 헬라 말이 아니라 히브리말입니다. 그래서 아멘이라는 뜻이 아만 굳게 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부사 형태입니다. 이 단어하고 모세가 투덜거린 내가 이들을 기르는 유모입니까 할 때 그 단어가 똑같은 어근이라는 여러분 좀 이상하게 느껴지겠죠. 근데 똑같은 어근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잘 양육하는 것도 아만 하는 거라 그렇게 봤습니다. 그거 하는 사람이 어무나 라고 그래서 유모입니다. 결국 이 아멘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굳게 하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서 부사가 되어서 확실히 그렇게 동의 한다 이런 뜻이 된 겁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아멘이었단 말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아멘의 화답이 있기 전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아멘 했고 또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아니면 이미 기록된 율법을 들려주는 낭독이 있을 때에 아멘으로 화답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는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시키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아멘의 생애를 사셨던 분이였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실 때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아멘하시기를 마치 삼위일체 안에서 그 위격 간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진 것처럼 그렇게 아멘의 삶을 사셨던 것 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의 모든 삶이 제일 먼저 아멘의 생애가 되어야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비판하고 자기의견을 세우는 것부터 먼저 배우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주께서 세우신 질서 앞에서 아멘 하는 것부터 배우면서 참된 신앙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각기 주님이 주신 은사의 종류와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우열이 있습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저는 가끔 학문의 세계에서 그런 걸 느끼는데 어떤 책을 이렇게 보면서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공부만 할 수 있게끔 기회를 주셨더라고 하더라도 과연 내가 이 사람을 능가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들게 하는 학자들을 종종 만납니다. 단순히 얼마나 많이 공부했느냐 그런 문제가아니라 아예 하나님께서 학문에 있어서 은사자체를 첨부터 다르게 주셨기 때문에 십리터짜리 병에 꽉 차도 십리터고 백리터짜리 병에 절반만 차도 오십리터입니다. 그런 차이 자체가 존재를 하는 겁니다. 더군다나 그런 차이자체가 천재성일 경우 우리는 겸손하게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다름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나의 흐린 별빛으로 저 사람의 밝은 별 빛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나의 존재의 가치다. 좀 용납하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야지 편하지 나는 왜 천재가 아닐까 그러고 조바심은 건강에만 해롭지 별로 이익이 안 되는 겁니다. 따라갈 수 없는 격차가 있는 겁니다.
재능의 차이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재능을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한가지 밖에 못하는 재능을 주신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똑같이 한 가지 재능을 받았는데 아주 잘할 수 있는 은사의 크기를 주신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한 개밖에 못하는데 그것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겁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자체의 차이가 엄청난 밝기의 차이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 모든 밝기의 차이가 있어서도 그 밝기가 각각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휘하기 위해서 그 은사의 크기와 종류와는 상관없이 베여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게 아멘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는 종종 우리 교역자들이나 동역자들, 가끔 교인들을 심방하고 직원들을 심방할 때 보면 무언가를 결정하고 자꾸 이렇게 뒤돌아보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게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나중에 심리학 쪽에서 보니까 그게 기질의 차이지 완전히 믿음하나로만 돌리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태도들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기질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는 온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리고 그것이 만약에 부족하면 기도할 시간을 벌고 그리고 때로는 너무 중대한 결정일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라도 기도를 하고 그리고 일이 딱 결정이 된 다음에는 뒤 돌아 보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믿고 뒤돌아보지 않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안하고 가장 큰 문제는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첫째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정직하게 기도하고 주님의 주권이 가장 선하다는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서 아멘하고 그 토대를 더 이상 돌아보지 말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가장 사역하다가 기운 빠지는 그 사람들이 그거 아닙니까? 하다가 사역이 잘 안 됐습니다. 하나님 제가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다음에는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면 이런 이런 일이 있어서 제가 실패했습니다. 정직하게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다음엔 잘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큰 실패를 해도 문제가 적습니다. 근데 크게 실패도 안했는데 뭐가 일이 잘 안될 때 '이게 다 목사 되는 거 맞는 건가? 내가 신학을 한 게 소명일까? 하면서 저 뿌리부터 흔드는 겁니다. 그것은 애초에 들어올 때 고민했어야 됩니다. 다 공부하고 난 다음에 고민하면 않됩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고도 저 사람하고 결혼한 게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어떻해 벌써 애가 둘인데... 교회를 하다가 보면 잘 될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막말로 그만두고 싶을 때는 왜 없겠습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부인 안합니다. 주님이 나를 이교회를 개척하게 하셨다. 그거는 부인 안 한다 이겁니다. 더더욱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기도했고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건 일수불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목회사역에 발을 들여놨다. 일수불퇴입니다. 어떤 때는 최선을 다해서 기도를 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더 큰 섭리 속에서 주권 속에서 나를 여기다가 심으셨구나.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하고 안 된게 있으면 주님이 가라 그러시는 길이 아닌데 여기 왔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잘못 했구나 부족 하구나 이렇게 하고 문제를 해결해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도 예수님 안에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 두개가 있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 보자면 십자가 지시는 게 너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그걸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정말 메시아로 온 게 맞습니까? 그렇게 물어보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시키시면 티끌만한 증거가 안 보일 때에도 믿음이 증거가 되어서 아멘하고 그 길을 가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멘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역이 부흥하고 열매가 막 맺는 사람들일수록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님이 여기에 나를 보내셨다. 그 확신이, 그렇다고 한국에 보내셨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유년부를 맡기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청년부를 맡기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교구를 맡기셨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구역을 맡기셨다. 이거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만 그런 부흥을 일으킵니다.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멘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주님의 뜻이면 내가 더한 일도 하겠습니다. 그런 아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아멘이 사역의 큰 열매보다도 더 탁월한 가치입니다. 아멘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뭘 할 때에 항상 그렇게 잘 합니까? 의도하지 않았지만 실수 할 적도 있고 목표는 그렇지 않았는데 실패할 적도 있고 처음에는 순수했는데 나중에 사람이 부패하면서 잘못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때에도 아멘의 사람은 기회가 주어집니다. 주위에 사람이 충고를 합니다. 그때에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멘하면 돌이킬 수 있는 길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아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더 크고 놀랍게 하나님이 응답해주시고 역사해주십니다.
(예화) 안양대학교에 있을 때 기도모임에 나오던 자매들이 있을 때 걔네들이 신학과가 아니고 유아교육과였습니다. 그 녀석이 아주 특이하더라구요. 사학년 때가 되니까 취업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 40일을 놓고 아이들을 잘 전도할 수 있는 유치원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취업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40일을 목표로 기도하는데 20몇 쯤 기도했는데 너무너무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유치원에서 프러포즈가 온 겁니다. 아 이거 아멘 응답이다 그럴 거 아닙니까? 애들이 너무 부러워한 겁니다. 그런데 이자매가 NO한 겁니다. 사람들이 너 돌았냐나? 그런 기회가 어디 오나? 이랬더니 나는 40일을 목표로 기도했지 25일을 목표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NO했더니 진짜 40일이 딱 끝나고 그보다 더 좋은 유치원에서 프러포즈가 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적용이야 각각 다르게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가장 나쁜 것이 좋은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가장 좋은 것도 가장 나쁜 것이라고 하는 아멘 신앙에서 나오는 겁니다. 아멘의 사람들이 돼야 됩니다.
우리 때도 가만히 보면 사역지를 옮길 때 그렇게 뭐 일년에 한번씩 옮겨 다니는 동료들 많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거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이 배운다고 그랬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누가 나보고 뭘 물어보다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한때는 되게 부러워했어요. 수요예배도 다른 교회 가서 드리고 세미나도 다니고 나는 그런 맘도 별로 없었지만 자유도 별로 안주어졌어요. 그래도 목회하잖아요. 기도 할 때는 항상 이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나쁜 교회인가 그런 거 재지 않고 하나님이 하라그러시나 말라 그러시나 간절히 기도하고 가라 그러시면 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주 놀랍게 길들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아멘의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든지 아멘으로 무릎 꿇을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게 지도자로서의 최고의 중요한 자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배웁니다. 아멘의 사람이 되라. 아멘의 사람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단순함이 아니라 자기의 지혜를 하나님의 뜻 앞에 초자연적으로 굴복 시킬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단순함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별명은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이 증인이라는 말과 충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면 누구든지 진리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유학 가는 학생들 쭉 만나고 보니 어쨌든 그렇게 좋아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 보람이 있었는데 보면 다 진리에 대해서 공부하는 거 아닙니까? 얘기 좀 같이 나누어보면 우리 공부할 때는 비교도 안 되게 오늘날의 성서학개통에 아주 엄청난 발전들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문외적 해석 정도에서 멈췄는데 텍스트미니 신학적 해석이니 해서 엄청나게 많이 발전했습니다. 모두 다 진리에 대해서 공부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충성된 증인이 되는 것은 공부한다고 해서 그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된 사람에게 그것이 들려졌을 때에 충성된 증언이 되는 것이지 충성되지 않은 사람에게 들려진 결코 그것을 충성되게 증거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충성된 삶을 사는 겁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할 때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나를 떠나는데 떠날 때 나를 또 그렇게 얘기 하는 건 별로 좋지 않겠지만 여러분들 어디에 가서 사역을 하던지 간에 떠났을 때 언젠가 떠날 거 아닙니까? 떠날 때에 그 사람이 한 교회에서 섬겼던 그 나날들을 생각할 때 목이 메이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담임목사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들도 그의 손에 양육 받았던 평신도들도 각 함께 사역했던 직원들도 여러분들의 이름이 떠오르면 목이 메이는 사람들 여러분 잘 생각해 봅시다. 나도 벌써 수많은 교역자와 직원들을 떠나보냈지만 직원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해보면은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면 목이 메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역자 중에도 어떤 사람은 이미 떠나갔지만 이름을 부르면 목이 메입니다. 그 사람들은 믿을 리가 없겠지만 어떤 때는 혼자 밤에 조용히 누워있으면 보고 싶어집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생각을 해도 별로 목이 안 메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무엇이 좌우 하는 것인가 하면 한순간의 자신에게 아첨하고 아부하고 그런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한사람의 인격의 특징이 된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박목사님이 항상 교역자 회의가 끝날 때쯤에 되면 교훈적인 팁을 하나씩 주십니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의 순교사에 대해서 당신이 안 사람들 중에 순교한 사람의 일화를 한마디씩 시리즈로 들려 주신다던지 옛날과거에 당신과 함께 사역했던 사람 중에서 특별히 충성스러웠던 사람 그런 사람을 떠올리시면서 울먹울먹 하시는 거죠. 눈가에 이슬이 맺히시는 거죠.
오늘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이셨다. 하나님 앞에 증인이셨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정말 놀라워서 거짓으로 지어낸 것은 어떤 계기에서든지 콩꺼풀이라 그럽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콩꺼풀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벗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람을 너무 신뢰하고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언젠가 실망하는 것을 우리들이 늘 보게 됩니다. 여기서 충성이라는 것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하고 구김이 없는 꾸밈이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그런 솔직하고 진실한 사랑 때문에 일관성 있게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되는 그런 성품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게 충성입니다. 충성은 집중입니다. 가치 있는 것에 대해서 집중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혼자 봐야 된다 그럽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충성된 사람은 집중하는 겁니다.
우리 옛날의 믿음의 선배들이 목양일념 목양일념 그랬잖아요. 옛날에는 공부 못하니까 목회나 한다는 얘긴가 보다 했습니다. 사실 좀 그랬습니다. 나중에 목회를 하고보니 그것은 다양성의 문제가아니라 집중도의 문제였습니다.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심지어 월요일날 가서 공을 차도 그게 목회를 위한 것이 되게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집중된 그런 삶을 사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모두 큰 목회를 하려는 그런 꿈을 꾸면 안됩니다. 꾼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안 꾼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사람이 중심이 올바르면 그 중심으로부터 퍼져나가서 얼마나 넓게 퍼트리시는 가는 주님이 하십니다. 한사람이 중심에 서 있을 때 중심이 충성되고 진리중심이면 그것들을 하나님이 펼치셔서 좁게 펼치시면 좁은 사람이 진하게 혜택을 볼 것이고 널리 펼치시면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게 될지 그렇게 우리들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크기 자체에 대해서 그렇게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말씀으로 잘 정리된 사람이기 때문에 사역을 사업처럼 성공하는 관점에서 보지 않을 겁니다. 결코 크기에 문제가아니라 그래서 현혹되지 않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크게 흥왕 하는 속에서도 진짜 빛나는 참된 진리의 요소가 있는가! 그리고 커보여도 그런 진리의 요소가 아닌 다른 것들 때문에 커 보이는 것인가! 이런 것들을 분별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그런 분별력을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역의 많은 열매가 있기를 원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목회사역에 복을 주셔서 그래서 날마다 회심하는 영혼들이 있고 그 영혼들의 회심이 날마다 새로워져서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나가기를 원합니다. 항상 그 모든 것들의 출발은 본질에서 시작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
(예화) 이찬수목사가 한번은 목사님이 이런 걸 했는데, 자기는 이렇게 목회를 크게 하지만 자기 아버지도 목사님이셨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위 얘기하는 성공이나 부와는 거리가 먼 목회를 하셨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교회 목회를 하셨고 그나마 교인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싸워서 그게 목사님이 너무 괴로우니까 40일 금식기도를 결단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참 어디 있는지 40일 금식기도를 하시다가 돌아가신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이찬수 목사님이 나이가 아직 어렸겠죠.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아무리 믿음을 가지고 봐도.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자신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더랍니다. 이미 관객석에서 일어나서 막 뜨겁게 박수를 보내시더라는 겁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 그러면서 자기가 한없이 감격해서 울었다고 자기는 그 예수님의 박수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거 같은 자신의 아버지의 천국의 입성을 환영하는 박수였다고 믿는다고 말입니다. 가치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멘 하는 삶을 살고 그리고 그 아멘위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충성되게 살아야 된다는 그걸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섬겼던 내수동교회서 박희찬 목사님이 설교학을 가르치실 때 설교자의 자격에 대해서 항상 먼저 가르치신 후에 설교와 강의를 시작 하셨습니다. 내용의 첫 번째가 설교자의 자격은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 자체가 소명 안에 내포 되어 있는 겁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된다. 그 증거로서 예수님이 실패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어린양을 먹여라 하신 그것을 근거로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이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장애물이다. 충성된 사람만이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양떼를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된 삶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목표로 하는바가 무한한 온전함입니다. 그게 특징입니다. 왜?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섬김을 드리고 싶어 하는데 사실 세상에서는 그 돈 내고 그 정도 해드렸으면 됐지 뭘 더 바라세요 그거는 사람에게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예화) 얼마 전에도 직원하나를 불러놓고 간곡히 얘기 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일을 만든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고 일이 사람을 만들어 일을 꼼꼼하게 하다보면 덜렁거리던 사람이 꼼꼼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일을 아무렇게나 하다보면 원래 사람 됨됨이는 안 그랬는데 일을 그렇게 계속 하다가 보면 사람이 그렇게 덜렁거리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내가 타일렀습니다. 얘야 사람이 일을 하면 일을 한단다. 그 일을 반복해서 일을 하면서 어떤 사람은 일류가 되고 어떤 사람은 삼류가 되는데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한단다. 그래서 한번 삼류는 평생 삼류로 살다가 죽는 거란다. 그러면 그 일류와 삼류를 뭐가 결정하는지 아니? 그러면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 다 설명해 줬습니다. 사환정신으로서 일하는 것은 삼류가 하는 거다. 복사해오너라. 네. 이거 찾아봐라. 네. 이거해 놨니? 찾아보니깐 없던데요. 이게 삼류다. 그러면 넌 평생 삼류의 삶을 사는 거다. 어디에서 취직해서 다녀도 항상 너를 고용한사람은 너 월급하고 너를 계속 비교한다. 돈 주고 살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게 일류다. 그러기 위해선 너가 일을 할 때 일의 목표자체를 훨씬 높게 두어야한다. 아주 높게 두어야한다. 그렇게 해서 일을 하는 거다.
(예화) 여러분 보면 오늘날에 끊긴 기술 중에 하나가 있는데 칼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칼은 오늘날같이 과학의 시대에 왜 칼을 못 만듭니까? 하는데 아닙니다. 칼은 아무리 잘 만든 칼도 내려치면 다 이빨이 부러집니다. 옛날 칼은 바위를 내려쳐도 바위는 부서져도 이빨하나 꺾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거를 재현하겠다고 장인으로서 도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근데 칼 한자루에 이천만원이랍니다. 쇠를 두드려서 999번을 접어야 된다는데 금속에서 뭘 타서 강한 쇠를 만든다고 생각하잖아. 쇠를 때려서 접고 다시 열을 가해서 때려서 접고 접고 접고를 999번을 하는 겁니다. 그게 현대용어로 말하면 열립니다. 그렇게 해서 바위는 쪼개도 이빨이 상하지 않는 명가의 보검이 나오는 겁니다. 그거 한 자루 만들어서 2천만원이 나오는 겁니다. 그것을 집안에다가 걸어두면 사사로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영험한 신비가 있다. 그래서 칼을 이렇게 비치해두는 일본사람이나 옛날 한국 사람들의 하나의 내려오는 관습 이었단 겁니다. 온전한 것은 치열한 목표를 가지고 도전을 해야 됩니다. 그거를 나는 하는데 저 사람은 왜 못할까 그 차이가 충성의 차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999번을 접는 겁니다. 칼 한 자루에 2천만원이 전혀 비싼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겁니다. 그것을 이겨서 문양까지 새겨 넣어서 만드는 겁니다.
우리의 사역을 싸구려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는 것처럼 사역을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명품을 만들듯이 그렇게 사역해 나아가는 그것이 충성입니다. 그렇게 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높여주고 싶은. 높여줄 때에는 온 마음을 다해서 그 사람을 높이는 것이 자신에게 기쁨이 됩니다. 주님을 높이면 항상 우리의 섬김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여러분들이 아주 훌륭한 바느질 장인인데 주님이 오셔서 옷 한 벌을 만들어드릴 기회가 주어졌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예화) 대만에 갔을 때 내가 씁쓸했던 게 황제는 입는 옷이 있는데 황제는 옷을 빨아 입지 않아 한번 입고 때가 묻으면 버리는 겁니다. 입는 자켓인데 궁녀 한사람이 4년2개월을 만든 겁니다. 자켓 하나를 만들 때 4년2개월이 걸린답니다. 헤아릴 수 없이 섬세한 손뜨개로 해가지고 학을 수백마리의 학을 거기에다가 새기는 겁니다. 날아가는 학입니다. 아주 아름답습니다. 자켓이. 그런 자켓을 한 열다섯 살 때 만들기 시작하면 열벌 정도 만들면 그 사람의 수명이 다하는 겁니다. 온 천하의 모든 백성이 오직 한 황제를 섬기는 겁니다. 그러면 그거를 대입을 해보세요. 그 사람들이 와서 우리 하나님은 왕중의 왕이라 그러는데 그렇게 섬기는 것을 보면 내가 황제를 섬기는 것만 못하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충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아름다운 섬김을 주님께 그렇게 해야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내안에서 계속 솟아나는 겁니다. 그게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권위 중에서 교역자가 유지해야 될 권위는 둘입니다. 진리의 권위와 사랑의 권위, 올바른 것, 그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사실은 진리에 부합하지 못하는 그들의 허물을 미워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랑합니다. 왜? 주님의 사랑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이 충성된 삶이라는 겁니다.
사역이나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런 중압감이 많아지게 되면 현실과 이상사이의 멧돌 속에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잘 쓰는 표현인데 현실과 이상. 이상이라는 건 현실은 이렇게 섬기고 있는데 현실은 이런데 사실은 하나님을 이렇게 섬기고 싶다는 이상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섬길 수밖에 없는 현실은 멧돌의 아래짝이고 이렇게 섬기고 싶은 소망은 멧돌의 위짝입니다. 그럼 나는 그 사이 속에 들어가 있는 곡물입니다. 이게 갈아지면서 으깨어지면서 부서지는 그때 그 통증이라는 것은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역자와 부교역자와 구역장과 모든 성도들이 나와 똑같은 마음을 느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에 외로움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멧돌의 아래짝이 현실이면 위짝은 이상이 되어서 자신은 그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시간의 톱니바퀴를 물고 돌아갈 때 거기서 막 갈아 으깨어지는 겁니다. 곡식을 이렇게 심어 놓고 막 돌리면 이쪽에서 가루가 되어서 나옵니다. 그 속에서 이제 섬기는 자신 속에도 어떤 변화가 오는 겁니다. 하나님을 일정기간만이라도 일정기간이라고 해서 한 두주는 아니겠지만 몇 년이라도 집중해서 오직 하나님밖에 모르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섬긴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서의 독특한 흔적이 묻어 있는 겁니다. 냄새가 나는 겁니다. 향기가, 혹 자신이 경험하고 도달했던 그 한계를 자기가 인식하고 있을 때 성도들의 삶이 아직 멀었다. 봉사를 열심히 하지만 정신이 아직까지 미치지 못했다 판단이 서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이 부여한 은사의 크기에 종류에 너무 마음 많이 쓰지 말고 마음 많이 쓰면 한 달란트 맡은 사람처럼 되는 겁니다. 두 달란트 맡은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들은 주인이 맡겨주신 사람들은 그냥 딴 생각 안하고 이거 주인을 기쁘게 하기위해서 열심히 장사를 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은 자꾸 주인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 이사람 되게 인색한사람이구나. 이거마저 밑천 까먹으면 나 박살나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달란트의 크기 같은 거는 생각하지 말고 내가 공부를 못하면 나 때문에 공부 잘하는 사람이 돋보이는구나. 그 대신 노력은 해야 됩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노력을 안 하는 겁니다.
내가 언젠가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그런 충고해준 적 있는데 음악을 배워라. 내가 아는 성도는 교회 등록했다가 목사님 찬양이 하도 엉터리라서 교회를 떠났다는 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음악을 배우라했지. 몇 사람들은 배웠어. 많이 발전했어.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데 계속 배우고 발전해야 돼. 대신 겸손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된다. 인정하고 부지런히 노력을, 은사의 크기에 종류에 너무 많이 마음 쓰지 마. 오히려 자기보다 탁월한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의 탁월함은 나의 탁월하지 않음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위로를 받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내가 은사의 크기에 있어서는 저 사람의 크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은사 속에 베여야할 그런 아멘의 정신에 있어서는 내가 저 사람을 능가하고 싶다. 그리고 충성된 삶에 있어서는 저 사람을 능가하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살아갈 때 그때 하나님이 우리의 모습그대로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서 아름답게 사용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세요. 허드슨테일러 같은 사람만 오늘날 위대하게 우리에게 향기를 주는 건 아닙니다. 데이비드 브레인우드에 향기가 허드슨 테일러만 못하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데이비드 브레인우드는 내가 알기로는 200명이상 모인 곳에서 설교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우리에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놀라워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