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2
녹취자 : 오희열
15장, 그리스도의 신분입니다. 맨 처음에 교리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처음에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론이나 교회론이나 공통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1부는 “무엇인가?”, 2부는 “무슨 일을 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 기독론에도 똑같이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지난번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존함에 대해서 공부하며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슨 일은 하는가?” 이렇게 1부, 2부로 나누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는 것은, 오늘 15과까지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고 16과에서 그리스도의 직무, 하신 일을 다룹니다.
신분입니다. 이 도표는 100% 외우셔야 합니다. 시험에 꼭 나옵니다. 시험에서는 주관식으로 비평하거나 논하는 문제는 안 나옵니다. 짤막하게 답하도록 나오니까 세 번만 줄을 치고 빨간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외우는 사람은 거의 90점, 100점을 맞으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하고 거의 읽지 않고 오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직장으로 집으로 계속 전화를 할 겁니다. 교리반 시험 떨어졌으니 재시험 보러 오시라고 말입니다.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에 붙으십시오.
이 도표는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제가 만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분,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셨는데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다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그 때까지 주님의 신분에 계속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분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세상과 관계를 맺고 하시는 일을 위해서 그분의 신분이 계속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는 성육신입니다. 어려운 말인데 사실 중국식 표현입니다. “성”은 “이루었다”, “육신”은 “육체, 몸”입니다. 영어로는 incarnation., in은 무엇이 된다, ~tion은 명사형, carna는 라틴어 “까르네”에서 온 것입니다. 강남에 가면 까르네스테이션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고깃집입니다. 까르네는 “고기”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다 아시는 “육적”이라는 표현의 “까나리”가 나옵니다. “카니발”을 아실 것입니다. “카니발”은 “사육제”라고 합니다. “사”는 감사한다는 뜻이고 “육”은 “육체”입니다. 그래서 카니발은 육적인 축제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때 인성을 입고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십니다. 고난을 당하신 것을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만 이야기하는데 그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여러분이 어느날 소설 “카프카”에 나온 것처럼 변신을 해서 코코로 변했다고 해보십시오. 아무리 “엄마!”하고 불러도 “멍멍!” 짓는 소리만 내고 가끔 엄마가 발길로 차고 남이 먹다 남긴 밥을 준다면 어떻겠습니까?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은 그러한 예화를 무한대로 확대해도 비교될 수 없는 낮아짐입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리고 사람처럼 무덤에 장사되십니다. 이렇게 1, 2, 3, 4번의 순서로 되어지고 문제는 “지옥에 내려가심”입니다. 우리 말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부활”이라고 나오는데 그 사이에 신앙고백의 원본는 “지옥으로 내려가셨으며”가 나옵니다. 이 “지옥에 내려가심”을 두고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첫째는 루터파 계통에서 해석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desended to the hell 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대부분의 개혁파의 해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고난을 받으시고 겪으셨던 지옥과 같은 고통, 그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런가하면 가톨릭에서는 이 부분을,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사실상 음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내려가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가톨릭의 해석으로 하자면 두 번째 구원이 기회를 줘야하는 복잡한 문제가 생겨서 우리는 별로 신뢰하지 않고, 앞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따르는데 일반적으로 개혁파의 공통적인 견해는 지옥에까지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뇌라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확실한 성경의 언급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십니다. 여러분 중에서 정돈을 잘 못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유전자 자체가 정돈을 잘 못하는 분들이 있는데 예쁘장한 자매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예쁘게 하고 다니는데 집안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떤 목사님이 부부싸움 한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사모님이 너무 안 치워서, “여보, 방 좀 치워.” 하는데 너무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첫 번째로 하신 일이 무엇인줄 아느냐? 자기 옷을 개키신 것이다.” 했답니다. 어쨌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십니다. 부활하셔서 자신을 40일 동안 보이신 후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십니다. 보좌 우편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우편”은 선택한 자,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데 보좌 우편에 앉으셨지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권한을 주시기 때문에 사실상 그 보좌 우편은 세계와 우주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통치주의 자리입니다. 그 다음에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면 다시 이 세상에 내려오십니다.
여기까지는 계속 낮아지심 쪽으로 가는 것이고 여기서부터는 높아지시면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비하의 신분”이라고 하고 이쪽은 “昇貴(올라갈 승, 귀할 귀)의 신분”이라고 합니다. 명쾌하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단어를 외우려고 하지 마시고 머릿속에서 그려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마지막에는 “죽으신” 후에 그 많은 고통 속에서 그분의 정신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승천”하시고, 승천하신 그분이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분이 “다시 오심”입니다. 이렇게 그리는 이유는 장사 된 다음에 정신의 고통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순서와는 상관없이 3번에 대한 묘사가 되는 것이고 루터파의 견해를 따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측에서 이것을 없앤 것입니다. 고난받으시고 죽음을 경험하신 것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성육신, 고난, 죽으심, 장사되심, 지옥에 내려가심, 3일 만에 부활하심, 승천하심, 보좌 우편에 앉으심, 다시 재림하심. 여러분은 가서 누군가에게 예수님이 어떤 신분이었는지를 다 가르쳐 줄 때,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 한 장을 그려서 하나하나, 그 밑에 성경구절까지 찾으면서 설명하면 한 시간짜리 훌륭한 성경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십시오. 세 시간을 강의해도 못 할 정도로 많은 내용입니다.
성육신은 아들이 인성을 취하심으로서 육신이 되셨습니다. 동정녀에게 나셨는데 만약 사람의 생식을 통해서 나시게 되면 죄 없는 사람이 되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죄의 오염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보호되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렇게 오해받으실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 다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난을 퍼붓는, 그런 방법으로 사람의 몸을 입게 하셨겠습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사람이 아니면 죽으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첫째는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시고 두 번째는 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사람이셨기 때문에 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순종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르시는 것이 없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분, 하나님의 성품을 없애버리고 사람의 성품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감추고 사람의 성품을 입으셨는데 그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으셨을 때에는 모르는 것도 있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당신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심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성품 아래 신의 성품을 감춘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히브리서에 의하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이 순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당신 자신이 배우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가 감각을 지닌 사람으로 오신 것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각적인 예수의 모습 속에서 그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시려고, 그래서 믿음으로 들어가게 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전 생애가 고난이었습니다.
죽으심. 법적 판결을 받으셔서 죄인으로 간주되어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도표로 만들어서 밑에 깨알같이 잘 쓰시면 됩니다. 오늘 저녁, 내일이라도 집에 가셔서 교리반에서 배웠다고 하시고 도표를 하나 그려놓고 동생에게 가르쳐주십시오. 찬찬히 설명을 하시고 무슨 은혜를 받았는지 이야기하십시오. 얼마나 기특하겠습니까?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 우리를 위해 저주를 당하심. 우리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사지내심, 지옥에 내려가심. 이 책의 저자는 루이스 벌콥이라고 하는데 화란사람입니다. 화란에서는 “베르코프”라고 발음합니다. 미국에서는 벌콥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개혁주의적인 견해를 취하고 루터파의 견해와는 거리를 둡니다. “겟세마네와 십자가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죽음의 가장 낮아지신 상태에까지 들어가신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장사되기 이전까지 있었던 일을 가리키는 것이니까 시간적인 순서로는 장사지낸 후에 바로 온 사건이 아니라 그 직전까지의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표가 이렇게 됩니다. 지옥에 내려가심이 여기에 옵니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다음은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육체와 영혼의 단순한 재결합이 아닙니다. 인성, 인성은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품 안에 인성과 신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성이 본래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회복하고 더욱 더 탁월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육체가 아름답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육신을 입고 있으실 때의 그 영혼의 인성이 보다 더 완전한 인성이 되시는 것입니다. 인성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인성에 의해서 감춰진 신성이 온전히 발현되면서 인성이 육신 속에 있을 때의 한계처럼 있었던 것이 없어지고 완전한 인성을 갖게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의 인성이 불완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완전한 인성이 되신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 가시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지금 육체를 입고 있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이별합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부활하는 그날에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다시 만납니다. 그때의 육체도 육체이고 지금의 육체도 육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지금의 이 육체보다 더 완전한 육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도 본래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회복할 뿐 아니라 더 탁월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육체를 가지고 다시 부활하신다. 잠자는 자의 첫 열매이며 죽은 자들 가운데 나신 자이다. 그리고 부활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모든 요구에 응하셨다는 하나님의 선포이다. 왜? 사람이 죄 때문에 그 형별로써 죽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죽음이 무효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죄가 더 이상 죽음의 형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죽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을 영원히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좀 더 궁금하시면 “십자가와 구속”이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사경회 때의 시리즈이고 서점에 가면 “십자가와 구속”이라는 오디오북을 팝니다. 오디오북을 뜯어보면 cd가 들어있고 책자가 들어있습니다. 그 책은 제가 하룻밤에 쓴 것입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8시까지 12시간 동안 쓴 것입니다. 거기 cd에 들어있는 다섯 개 정도의 설교의 요약들이 깨끗하게 정리되어서 책자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도서관에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를 보시면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무엇인지 나옵니다. 이번 부활절때의 설교도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가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부활의 의미를 모르면 기독교를 잘 모른다는 뜻과 비슷한 것입니다. 요즘 여러분이 국민일보를 보시면 뒷편에 간증들이 실린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춘천에 있는 어떤 교회의 이름이 실리는데 그것은 조금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론들을 지지하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이를 아주 명백하게 갈라놓고 십자가만 경험하면 안 되고 부활도 경험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경험하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십자가를 경험하지 않은 것이고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예외없이 부활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그 설교를 여러분이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승천. 하늘로 오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의 인성에 의해 지상에서 하늘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지는 유형적인 상승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현저한 영화를 내포한다. 승천의 의미는 성소에 들어가 보좌의 중보자의 역할을 하심. 우리의 처소를 위해서 승천하심. 이미 하늘에 거하게 됨. 하늘에 있는 처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됨. 그분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계속 이어서 오는데, 보좌 우편이라는 것은 권능과 영광의 처소를 상징합니다. 거기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통치하고 교훈할 뿐만 아니라 교회만이 아니라 우주를 통치하시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에 근거하여 신자들을 위해 중재하시고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일을 지금도 보좌 우편에 앉아서 하고 계시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다음, 재림. 이것은 알지 못하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와 똑같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산자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 그리고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또 육신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서 형벌을 받으며 지옥에 있기 적합한 몸으로 부활하고 어떤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거하기에 적합한 육신의 몸을 입게 됩니다. 그때의 육신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먹고 마셔야만 겨우 기동하는 그런 식의 육체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형적이고 육체적인 것입니다. 언제 오시느냐?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효과는 구원 사역의 완전한 승리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직무. 지금까지는 신분을 배운 것이고 이제부터는 직무입니다. 직무는 무엇입니까? “직”은 office 입니다. “직임, 자리, 직위”입니다. “무”는 work 혹은 ministry, 일, 섬김입니다. 도표를 그렸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3직이라고 합니다. 세 가지 직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는 셋으로 이루어집니다. 통치하시는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습니다. 신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왕이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만족하고 세상에 왕이 필요없고 그분이 주시는 말씀을 따라서 통치받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 있는 나라들을 경험하고 특히 가나안에 정착하며 살면서 다른 나라와 비교하며 계속 콤플렉스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허용해주셨습니다. 기뻐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진노하심으로 왕을 주셨고 분노하심으로 폐하셨다”고 호세아서에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이 계속 요구하니까 허용, 허락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왕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중국이나 이집트, 혹은 동남아의 나라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이 세상 전체가 한 사람을 위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중국의 황제들이 살았던 흔적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보면 황제 앞에서 떠드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지위에 따라서 황제에게 접근할 수 있는 거리가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저 100m 앞에서 황제에게 이야기하려면 큰 소리로 이야기하거나 이야기를 전달해주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궁궐에서 모든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니라 스스로 “천자”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을 “天(하늘)”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정말 믿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다 자신을 “천자”라고 합니다. “천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다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황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박물관에 가서 보고 감동이 되었던 것이 있는데 왕이 입고 다니는 외투같은 튀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천 마리의 학을 자수로 놓은 것인데 한 사람이 밤낮으로 만들어도 약 5년 2개월 정도 걸려야 한답니다. 왕은 그것을 빨아 입지 않습니다. 한번 입고 버립니다. 뭐가 묻었거나 땀냄새가 나면 버린답니다. 그러면 그 옷을 만드는 여인은 평생동안 여덟 벌 정도를 만들다가 죽는 것입니다. 왕이 입을지 안 입을지도 모릅니다. 장롱에 있기만 할 뿐 왕이 입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그 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 같은 똑같은 흉내를 인간이 내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앙없이 돈 많이 벌고 사람을 무시하고 갑질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하나님처럼 하려는 것입니다. 직원을 때리는 이상한 사람,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술을 꼭 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술을 했으면 그렇게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못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수업시간에 꼭 강조합니다. 20대 초반에 무술을 해서 특수부대원은 아니더라도 평범한 사람 세 명 정도는 맨주먹으로 제압할 수 있도록 하고 평생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살라고 합니다. 그런 학생이라면 양진호 회장이 때릴 때 무술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1, 2초 안에 완전히 상황을 뒤집어버릴 것입니다. 딱 한대만 맞고, 이미 정당방위는 되었고, 팔 한번만 잡아서 돌리면 바닥에 쫙 뻗어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통쾌합니까? 하십시오. 그리고 이 교리는 영적인 무술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까?
이 사역을 떠받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세 개의 기둥같은 office, 직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왕, 제사장,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기는 “미리 아는 사람”인데 평범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알려지지 않는 미래를 훤하게 보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이미지를 지우셔야 합니다. 히브리말로 “나비”라고 하는 명사인데 이것을 선지자로 번역하는 것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장 훌륭한 번역은 이것입니다. “預 (맡길 예) 言(말씀 언)者 ”, “하나님이 말씀을 맡기신 사람”, 이것이 정확한 뜻입니다. 또 선견자라고도 씁니다. 예언자는 미리 안다는 것이고 선견자는 미리 본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주신 중요한 직무는, 요즘 호세아서를 설교하고 있는데, 여기가 A.D와 B.C를 가르는 지점이라면 우리는 주전 8세기를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before christ, B.C입니다. 이것을 예수 안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기분 나빠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C.E라고 씁니다. Common Era. 기원전, 기원후가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그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예언 활동을 하는데 이 사람들의 관심사는 여기입니다. B.C 15세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사람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이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이것을 7세기가 지난 후의 사회, 완전히 다른 사회일 것입니다. 그때에 모세가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가르쳤을 것인지를 설교했던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그것이 예언활동이고 그것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목적이 있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일깨우셔서 미래에 될 일들을 보여주십니다. 전체를 훤하게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늘구멍처럼 어떤 특정한 사건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한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어떻게 망하게 되는지는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한도 내에서만 보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활동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마치 그것이 전부이고 전문인 것처럼 이야기해서 점쟁이를 생각하듯이 선지자를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해석해내는 것입니다. 이때의 선지자들은 당시의 사회를 보면서 모세가 살아있었다면 우리에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믿고 살라고 가르쳤겠는가? 를 생각했고 이 대답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이 살아계셨다면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훨씬 더 명백하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설교자는 똑같은 위치에서 선지자들이 했던 그 일들을 다시 하는데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토대로 예수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어떻게 이런 컴퓨터 시대, 4차산업혁명 시대, 포스트 휴머니즘, 트랜스 휴머니즘 시대, 페미니즘 시대, 68혁명 정신이 지배하고 있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으로 살라고 말씀하셨을지를 설교 속에서 녹여내는 사람들이 설교자인 것입니다. 당연히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이 시대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문화와 모든 것들을 꿰뚫어 보고 거기서 여러분이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보고 거기에 적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을 정리하자면, 선지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당연히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것인데 가장 중심적인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돌판 두 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 계시가 우선적이라면, 이에 비해서 제사장은 어떻게 하면 여기 이렇게 죄 때문에 쓰러져 있는 비참한 죄인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인들은 나아갈 수 없는데 그 문제를 제사를 통해서 일시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 오는 직분의 사람이고, 이 제사장들은 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죄인의 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선지자가 계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제사장은 전통입니다. 이 두 개가 종종 충돌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성경 속에서 보여줍니다.
왕은, 하나님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자신이 잘 인식하고, 당연히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자기 나라 속에 백성들 사이에서 그 질서가 구현되게 하는 것이 왕의 존재 목적이었습니다. 그 일을 잘하면 하나님께서 왕국에 복을 주시고 못 하면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 이스라엘처럼 심판하시고 왕을 데려가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굉장히 무섭고 중요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정도전”이라는 드라마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드라마는 다시 볼 가치가 있는 드라마입니다. 이방원이, “그렇습니다! 소자는 저 자리에 앉아보고 싶습니다!” 하며 정도전을 죽이고 이성계에게 반역을 일으킵니다. 만일 정도전이 살아서 그때 개혁이 이루어졌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어마어마하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왕이 아니라 정승 중심의 체재, 쉽게 말해서 내각책임제, 총리제를 구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관리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천민이라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고 했습니다. 지금 자본주의 국가의 이상적인 체제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것인데, 정도전은 그것을 꿈꾼 것입니다. 이 나라의 소유는 영원히 이씨 왕조의 것이지만 경영은 유능한 백성들이 맡아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혁명적 발상이었는데 이방원이 칼을 뽑은 것입니다. “소자도 저 자리에 앉아보고 싶습니다!” 하니까 이성계가, “이 미친 놈아!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아느냐? 불이 펄펄 타오르는 지옥이다!”한 것입니다.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너는 여기서 단 사흘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바마마, 저는 불에 타도 좋으니 한번 앉아보고 싶습니다!” 하고 아버지를 자르고 자기가 왕이 됩니다. 결국 조선의 탁월했던 이상은 다시 거꾸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왕입니다. 이것이 이 과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선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메시지를 가져왔다.” 하셨고 장래의 일을 예고하셨습니다. 독특한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꿈이나 환상, 언어전달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것을 구술이나 가시적인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 신약의 선지자들도 그러한 활동을 합니다. 성경이 완성되고 나서는 이러한 선지자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단들이 교리를 바꿉니다. “내가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시커먼 성경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됩니다. 자기가 받았다는 그 계시에 의해서 성경을 재해석합니다. 그리고 명백한 성경구절보다 비유를 해석하면서 그 속에서 교묘하게 자기 자신에 관해서 집어넣고 자신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은 사람인 것처럼 오해하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단의 전통적인 방법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이단들이 이런 방식을 택합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갑니까? 교리반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교리반을 하고 나면 교리요약을 다 외우게 됩니다. 그것보다 약간 더 두꺼운 “기독교 신학개론”도 더 상세하게 나오고 잘 읽힙니다. 그것을 읽고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 상, 하 600페이지짜리 두 권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7권으로 나왔습니다. 그 1권이 무엇이겠습니까? 서론, 그리고 신론, 인간론, 이런 식으로 7권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천천히 읽는 것입니다. 물론 조금 어려울 수는 있겠지만 이미 뼈대가 다 서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학이 없는 내용들을 기독교로 포장해서 우리에게 가르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보다 깊은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올바른 방식으로 해석되어서 자신 안에 떠오르게 됩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ESV 같은 성경을 구입해서 천천히 읽으면서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 뼈대를 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매우 가까이 읽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선지 사역은, 그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도덕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해석하심. 그리스도께서 하신 예언사역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포함하였습니다.
제사장직은, 대제사장은 백성의 대표자이고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고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과 제사를 드려줍니다. 백성들을 위해 간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렇게 수많은 양들, 짐승들이 죽어가는데, 그 의미는 기본적으로 이런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고 실행죄를 짓는다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배웠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런 죄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제사를 드리고 제사에 참여할 때에는 짐승만 죽이면 제사가 되는 게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 제사장이 제사를 대신 드려주고 거기에 제물을 갖다 바치면서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을 헌제자라고 하는데 그 헌제자에게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이다.”라는 믿음,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진지하고 통절한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이 잠시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문제는 또 죄를 짓게 되고 또 교제의 문이 닫히게 됩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사는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 만큼이나 일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렇게 죽어가는 양들을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라고 부릅니다. 이 제물에 손을 얹으면서 헌제자의 죄를 그 짐승에게 옮겨주고 그 죄에 대한 형벌로써 이 어린 양은 비참한 죽임을 당합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헌제자들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 것이지, 그리고 자기를 용서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거기서 온 몸으로, real play 방식으로, 실연식, 실제 연기하는 방식으로 보여주심으로써 생생하게 눈에 보이는 교육을 터득하게 합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또 죄를 지어서 교제의 문이 막히고 또 다른 제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모든 것을 종식시키고 우리를 영원히 죄에서 구속해내실 한 메시아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구약의 시대에도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구약의 희생은 다가올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예표하고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고 유월절 양입니다. 그리스도의 직무는 보혜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원래 희랍어 성경에는 “파라클레이토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옆에서 부른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로 번역됩니다. “중재자”, “돕는 자”, “선생님, 가르치는 자”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로 해석해야 하는데 하나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번역자들이 고민을 하다가 단어 하나를 만들어냅니다. “보혜사”. “보”는 “중재자”이고, “혜”는 “돕는 사람”이고, “사”는 “counsellor, 가르쳐주는 사람, 지도해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세 가지를 다 넣은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권에서 사용한 지가 100년이 넘었는데도 사전에 올려주지 않습니다. 그정도면 올려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올려놓고 기독교인들만 사용하는 단어라고 설명해줘도 되는데 올려주지 않습니다. 어쨌든 성경은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이런 뜻인지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 중보적 사역은 우리가 이미 배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가 있었다. 제사장들이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영원한 중재자일 수가 없고 영원하신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영원한 중재자가 되어주신다. 백성들을 위한 신령한 축복을 하나님께 간구했고 사단과 율법과 양심의 고소로부터 신령한 축복을 받도록 보호해주고 그들을 대적해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용서해주실 것을 확증했으면 성령의 역사를 통해 백성들의 예배와 봉사를 하나님께 바쳐주십니다. 우리의 선한 일도 하나님께 직접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충분히 거룩해진 후에 하나님께 바쳐지고 우리의 기도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바쳐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도 그리스도를 통해 오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범위는 선택받은 자에게 한합니다.
왕직은 무엇입니까? 왕은 그야말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백성과 교회를 향한, 우주를 향한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그 성격이 영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미국의 대통령 후보로 나오셔서 트럼프와 겨루어 이기신 후에 트럼프와 반대되는 정책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환영을 받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지를 받지 못해서 다음 투표 때 당선을 기대해야 하시는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방식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가 어떤 문화에 살든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세상의 모든 통치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사람이 되고 마음이 되기를 기뻐하고 그렇게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만큼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열망을 주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소명입니다.
영적 왕권의 범위는 하나님의 나라. 무형교회의 회원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임.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이 이만큼 있다면 사실 우주적인 의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통치하십니다. 어느 하나도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을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통치하십니다. 누가 형벌을 가지고 위협하지 않는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달으면 마음에 깊은 감화가 일어나서 이 세상의 임금에게 죽임을 당해도 보이지 않는 왕이신 그리스도께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직업활동을 하고 공부를 하고 교회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고 오늘 하루도 휴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이고 숨쉬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생활 속에 있는 현재적이고 영적인 실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을 미래적 소망입니다. 이런 것은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시간이 가면서 실현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열렬히 선교사들을 보내며 헌신하면 이때가 빨리 올 것이고 불순종하고 게으르면 천천히 올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통치는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적 왕권을 가지고 계신데 마태복음 28장에 의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개인과 백성의 운명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세계의 생활을 지배하시고 백성의 영적 성장, 정화, 완성을 증진시키고 세상의 위험에서 교회를 보호하시고 모든 원수들을 굴복시키시고 멸망시키시고 최종목적이 성취되면 우주적인 왕권은 정부에게 반환될 것임.
그리스도의 속죄입니다. “속죄”는 이렇게 씁니다. “속죄”. 죄가 있는 것을 댓가를 이미 지불한 것으로 효과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 속죄입니다. 예를 들어서, 술을 먹고 가벼운 행패를 부리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습니다. 사람을 때리거나 하지는 않고 고성방가를 했습니다. 큰 피해를 주진 않았지만 법률 위반이라서 유치장에 들어갔습니다. 갇혀있는데 휴대폰도 없는데 친구의 전화번호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전화를 빌려달라고 해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 설명을 하고 그 친구가 범칙금 20만원을 냅니다. 범칙금을 못 내면 재판을 받고 약식 재판을 통해서 몸으로 때워야 합니다. 범칙금 납부한 영수증을 보여주었더니 이틀만에 석방을 해줍니다. 이것을 보면 그 친구가 그 사람을 “대속”한 것입니다. 그 친구가 대신 희생을 치른 것입니다. 피같은 돈 20만원이 날라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잠시 정신줄을 놓고 술 한잔을 먹고 떠들다가 저렇게 된 것이니 도움을 준 것을 족하다고 생각하고 돈을 돌려받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을 “속죄”라고 합니다.
이런 개념은, 멀리는 구약에서 오지만 당시에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실제 로마시대에 있었던 한 문화를 그려냅니다. 노예제도입니다. 노예들을 팔기 위해서 노예시장에 전시를 했습니다. 건장한 아빠 노예, 엄마 노예, 형 노예, 누나 노예, 동생 노예, 이렇게 다섯 노예가 있었습니다. 장삿꾼이 그 노예들을 팔기 위해서 아빠 노예를 채찍으로 때리면서 튼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여자 노예는 얼굴도 예쁘고 건강하고 요리도 잘한다고 선전합니다. 어린 노예들은 조금만 더 기르면 훌륭한 일꾼으로 쓸 수 있다고 선전하고 가격도 흥정을 합니다. 시간이 흘러가는데 노예들은 팔리지를 않으니까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한꺼번에 다섯 노예를 사갈 능력이 없다면 따로 따로 사가도 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노예들이 들으면서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가족이 흩어지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무서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주인님, 제발 우리를 나누어 팔지 마시고 한꺼번에 팔아주세요!” 사정을 하며 모두 손을 꼭 잡고 있는데 어떤 부자가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갑자기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하인을 보내어 다섯 노예의 가격을 알아오라고 하고 돈주머니를 꺼내어 노예 장사꾼에게 주고 한푼도 깎지 않고 노예를 사고 그 증서까지 받아옵니다. 마차에 그 노예들을 태워서 집으로 갔더니 노예 가족들은 따로따로 팔리지 않고 한 집에 팔려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좋아하면서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해서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 부자 주인은 노예들의 옷을 다 벗기고 깨끗이 씻기라고 하고 새로 지은 옷을 주라고 합니다. 새 옷을 입고 차려준 밥까지 먹게 합니다. 노예 가족들은 불안감과 행복감이 뒤섞인 채로 하룻밤을 보냈는데 아침에 주인이 노예 가족들을 부릅니다. 주인의 응접실에 다 모였는데 주인이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합니다. 노예 해방증서입니다. 그것을 주면서, “너희들이 불쌍해서 내가 샀지만 이제 너희는 우리집에서 봉사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내가 써주는 노예 해방증서이다. 너희는 이제 자유인이다. 언제든지 이것을 가슴에 품고 절대 다시는 노예가 되지 말고 자유인으로 살아라.”하고 보내줍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대신 그 대가를 치루어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방시켜 주는 것이고 그때 지불했던 돈을 “속전”이라고 부릅니다. “속죄”도 속한다는 것은 구원해준다는 것인데, 죄에서 구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속의 개념이 나오는 것입니다. “속량”이 바로 이렇게 노예를 사서 자유인으로 만들어주는 개념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전”이 되셨다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대속에 의해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 사랑은 죄인들에게 피할 길을 제공해주고 공의는 율법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해 인간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시는데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시라 죄를 간과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죄인들은 사형을 선고받고 그대로 집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속죄라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구원의 핵심이 속죄입니다. 그것을 넓은 의미에서 구속이라고도 합니다. 속죄는 “죄에서 건져내는 것”이고 구속은 “죄로 말미암는 나쁜 모든 효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지은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 할 형벌을 이렇게 대신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런 것이 복음으로써 죄인들에게 전해질 때 그들에게 믿음이 생기고 회개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결국 주님께로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속죄의 성질인데 그것이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었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심판을 요구하시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 이 속죄는 우리가 직접 우리를 속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죄는 대리적 속죄였습니다. 죄인들의 개인적인 속죄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갚을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너무 크게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말도 되지 않는 예이지만, 한 아이가 사고를 쳐서 원자력 발전소를 터뜨렸다고 해봅시다.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조상대대로, 후손 대대로 갚아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망가뜨린 장본인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리자로 죄의 형벌을 짊어지고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고 구약의 그 많은 희생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대리적 속죄입니다.
1, 2, 3, 4번을 외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만족 대리적 속죄, 피동적 순종을 포함한다. 능동적 순종은 율법을 준수하셔서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신 것이라면 피동적인 고난은 죄를 통해서 죄에 대해 대신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죄의 저주를 제거하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고 죄의 저주에서 해방을 누리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이루셨을 때 속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그것에 대해서 보편속죄, 제한 속죄로 나누어지는데 보편속죄는 주님이 모든 인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이미 속죄하셨고 결국은 인류가 이만큼의 범위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고 어떤 사람은 구원의 요구조건을 충족하고 어떤 사람은 충족하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이 이루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일어납니까? 여기는 하나님이 구원을 의도하셨는데 좌절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마음먹은 정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실제로 속죄를 하셨는데 그 속죄가 어떤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무효가 되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해버리셨는데 그 속죄가 조건적입니다. 사람들이 선한 행동을 하거나 주님을 믿을 때, 특히 이 사람들은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인간이 그런 선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주님이 속죄한 것이 무효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개혁파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예외없이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계획된 결과가 사실성 성취되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개혁파는 선택된 자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성부와 성자의 의도이고 그렇게 속죄한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구원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얻게 하신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요만큼만 하나님이 구원을 의도하셨고 저쪽의 사람들은 구원을 의도하지 않으셨다고 봐야 하는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의도조차 안 하셨으니 결국 속죄를 받지 못한 것인데 속죄받지 멸망한 것이 어떻게 그들의 책임일 수 있으며 책임이 없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형벌을 내릴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노트에 지금 이야기하는 의문을 적어 놓으십시오. 나중에 예정론을 다룰 때 다시 나오게 됩니다. 지금 궁금하니까 간략하게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놀랍게도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속의 은혜를 받아들일 마음을 실제로 갖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들로서 죽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놀랍게도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을 경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로 다뤄야 하고,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봅니다. 두 가지 방법으로 주셨는데 하나는 돌판에 새겨주시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마음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사회 속에서 성장하면 놀랍게도 우리의 모든 윤리는 그 십계명으로 집약됩니다. 약간씩 변형된 형태이지만 A라는 문화에서는 부모를 죽이는 것이 선이라고 가르치고, B라는 문화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선이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C라는 문화에서는 살인은 놀랍게 칭찬할만한 행동이라고 가르치고 D라는 문화에서는 살인을 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공통점이 인류의 문화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공통적인 성격,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율법을 새겨놓으셨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에 따라서 심판에 받는 것이고 율법을 받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율법의 요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주신 구원의 복음, 그것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갖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던 사람들은 2번대로 심판을 받는 것이고 율법을 받았던 사람들은 1번대로 심판을 받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살아있는 것인데 그것이 행위계약이 유효하다고 설명했던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베풀기로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베풀지 않기로 하셨는데 그것 하나에만 모든 것이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인간의 마음 속에 지키면서 살아야 할 율법을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형벌을 내리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공정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복음이 전파되는 시대에는 더더욱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려질 수 있도록, 온 땅에까지 복음을 실어나르신 후에 종말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과 지식들이 주어졌는데 의도적으로 귀를 막고 복음을 듣지 않고 자기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간은 구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이 문제는 “예정”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제한속죄”입니다. “보편속죄”라고 하면 속죄하셨어도 안 믿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하고 완전하신 분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시리즈로 설교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중에서 “열매없이 알리라”라는 설교가 있었습니다. “열매로 알리라”가 보편적인 설교 제목인데 저는 열매없이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 시리즈가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거기에 철학적인 문제들이 감춰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핵심적인 진리 하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보편속죄를 이야기하면 이것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구원하려고 속죄까지 해 주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 속죄의 의도가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동급이 아닌가? 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하셔도 인간이 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한 속성에 비하면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 과 밀린 것을 따라잡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치지 마시고, “내가 이것을 못 해낸다면 무엇을 하겠는가?”하면서 이런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십시오. 끝까지 완주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