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의 목적과 목회1
녹취자: 김경애
성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내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때는 바울이 좋은가 했지만 또 언제 보니까 다윗이 훨씬 더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러다가 어느 때 생각해보니까 바울보다는 바나바가 더 훌륭한 것 같기도 하고 다윗보다는 요나단이 훨씬 더 훌륭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여러 인물 사이를 지조도 없이 왔다 갔다 하다가 지금으로부터 한 15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가슴에 꽂히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일평생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고 구약은 이 사람에 대한 예언으로 끝났습니다. 이 사람의 구속사적인 위치는 따라서 매우 독특하고 의미심장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가복음에서도 먼저 나오고 뒤 이어서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27년경에 소명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확하게 이 사람의 사역의 연대가 언제 끝났는지 알 수 없지만 아주 지극히 짧은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그의 평소의 소원대로 자신은 망하고 그리스도는 흥하게 되는 일을 기대하면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동시에 영광스럽게도 자신이 예언한 내용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는 것까지 공유하면서 역사적 뒤편으로 사라졌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장에는 이 사람의 탄생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계획 하에서 이루어졌는지를 기적과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그가 태어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는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주님의 두 눈 앞에서 큰 사람이 되며, 그리고 뒤이어서 메시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눈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이 이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정말 이 사람의 인생이 큰 자의 인생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당시의 예루살렘에만 18,000명의 제사장이 있었다고 하니까 사실 내노라할만한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의 당번을 따라서 제사장직을 보고 그리고는 다시 평상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형태 속에서 한 제사장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것입니다. 부모가 모두 연로한 때에 태어난 늦둥이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제도권 안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자란 들사람으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사람이 에세네파에 속한 사람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에세네파는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의 뼈도 발굴되는 것을 보아서 거기에는 결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독신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사람이 제도권에서 교육받지 않고 광야에서 자랐습니다. 누가복은 1장 80절에 보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그랬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라는 말은 ‘파이디온’이라는 말인데 원래의 의미로 따지자면 영아의 상태를 벗어난 아이를 가르치지만 그러나 마가복음을 비롯한 여러 성경본문에서 파이디온이 Baby를 의미했기 때문에 역시 누가복은 1장 80절에서 나오는 아이도 아마 Child나 아니면 더 큰 Boy, Girl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이 아이의 상태는 Baby의 상태에서 광야로 보내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야로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그 광야로 보내져서 아이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양육을 받으면서 자랐던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학자는 아마 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제도권에 있는 제사장들을 신앙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예 어린아이를 광야로 보내어서 하스딘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양육을 받으면서 자라게 했을 것이라는 것으로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성경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어느 쪽이든지 이것은 이렇다고 잘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 어린 아이 하나가 그렇게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 오실 때쯤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에는 그 정말 들판에서 자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약대 털옷을 걸치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들판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를 몇 편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는 것도 여자아이에게 주는 선물거리가 되기 위해서 목이 잘려졌고 그 목이 쟁반에 받쳐진 그렇게 일생을 마친 사람이었습니다. 긴 인생을 산 것도 아니고 혁혁한 말씀사역에 성공을 보아서 그래서 자신이 예언한 위대한 역사가 전개되는 것을 역사 속에서 보고 누린 사람도 또한 아니었습니다. 가문의 태생도 큰 자가 아니었고 성장의 과정은 물론 그리고 그의 사역은 물론 마지막에 그의 죽음도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두 가지 모순 사이를 우리들이 어떤 논리로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단서를 ‘에노피온 투 큐리오’ 라는 말이 우리에게 제시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이 큰 자가 될 것인데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이나 관점에서 볼 때 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두 눈으로 보실 때에 큰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에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우리의 사상의 체계 속에서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도대체 우리의 버린 세상의 길과 가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중요한 사람들 그리고 뛰어난 사람들을 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많은 학식, 그리고 성공이 보장된 미래, 그리고 많은 재산,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뜻대로 행해주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이 세상의 유한한 자원을 많이 소유하고 있으며, 유한한 인간들에게 얼마나 많이 인정받고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는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중요성이 저울질됩니다. 바로 그런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김세윤 박사는 자신의 책속에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올바르지 않은 태도 이것이 죄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앞에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그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삶을 위해서 스스로 그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며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구원이 우리에게 이중의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신분의 자유를 가져다주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마음과 영혼에 놀라운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순종하며 살면 그러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범죄의 행위를 저지르지 않으면서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모든 자유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의 두 눈앞에서 사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놓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치를 끝까지 붙들고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어제 말씀드린 그 창조의 목적과 선과 사랑의 관계에 의해서 그는 열심히 살았는데도 하나님 앞에서는 산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학구적으로 ‘꼬람데오’라는 말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만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그 어떤 자원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있을 때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년을 목회를 해오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전에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이렇게 설교하면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은 ‘아, 이 세상의 높은 지위가 배설물이래, 이 세상의 많은 재물이 해로운 것이래, 이 세상의 좋은 평판과 이 세상의 진귀한 것들이 이 세상의 쾌락이 똥이래, 그 배설물을 나에게나 부어주지!’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님의 눈앞에서 사는 것, 그것이 한없이 즐거운 사람들 그 사람들만 코람데오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코람데오의 삶은 ‘내가 이 일이 너무나 하고 싶고 하나님을 속이고 싶은데 그렇지만 이 일을 했다가는 요절이 날걸!’ 그러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그 일을 못하는 것 그것은 코람데오의 삶이 아닙니다. 진실한 코람데오의 삶은 하나님께서 나같이 미천한 것을 하나님의 눈앞에 즐거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갈 수 있는 그 마음의 동기,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코람데오의 삶입니다. 진정으로 코람데오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많이 복 주실 것이야. 역사는 우리를 몰라줘도 내가 코람데오의 삶을 살면 이후에 역사는 우리를 재평가할 것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역사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에나피온 투 큐리오.’ 하나님의 그 시선 앞에서 가장 하나님이 있기 원하시는 자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부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면서 사느냐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신학교에 9년 동안 있으면서 학교를 나 때문에 신학교를 떠난 학생이 200명쯤 됩니다. 내보냈습니다. ‘내가 신학의 길을 안가니까 재앙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하지 마라.’ 그래서 그 학생 중에는 자동차 세일즈맨이 된 학생들도 있고, 파파이스치킨 가게를 하는 학생도 있고, 내 평생 소원 이것뿐 햄버거 2인분 그러더니 왜? 참된 소명은 내가 이 소명을 떠나면 하나님 앞에 벌 받을 텐데 이런 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참된 소명이라고 하더라도 맞아 죽을까봐 목회사역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200명 정도를 내가 다 내보냈습니다. 어떤 학생이 4학년 2학기 졸업을 두 달 남겨놓고 자퇴했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자퇴했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잘했다. 하나님이 세우셨으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면서 사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E. M. 바운즈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책속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에서 천사 셋이 있었다. 하나님께로부터 각각 미션을 받고 이 세상에 내려왔다. 한 사람에게는 온 제국을 다스리라는 미션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황금 홀을 받아서 구름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큰 사업가가 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금빛 주판을 들고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똥을 푸라는 사명을 받고 육군 모자에 막대기를 끼워서 철모에다가 그것을 들고 내려왔는데 내려온 첫날 왕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금빛 보좌에 앉아서 금 홀을 흔들었고 두 번째 사람은 금빛 주판을 들고 비단방석 위에 앉아서 큰 사업을 경영했고 세 번째 사람은 추운 겨울에 철모에 막대기 낀 것을 들고 와서 똥을 풀 구멍에 풍덩 담갔습니다. 그런데 그 세 순간에 첫 번째 일을 하는 천사의 마음이 각각 달랐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질문입니다. 이 미션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은 미션 자체가 무엇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미션을 주신 분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신자들이 심지어는 하나님을 위해 부름을 받은 목회자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이미 영적 생명이 파괴되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깊이 사랑하고, 그분이 너무 사랑스럽고,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똥을 푸는 일이든, 황금 홀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든, 주판을 튕기면서 돈 계산을 하는 일이든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한 천년이나 이천 년 동안 계속 한다고 그래도 아무것도 아닐 텐데 백년이나 계속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같이 채플 실에 앉아서 채플시간에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내가 은퇴할 때까지 얼마나 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글을 쓸 수 있을까? 그것을 계산하는 시점에 오게 되었습니다. 젊을 때는 모르지만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많은 일을 하다가 죽을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큰 자가 되리라고 그랬는데 무슨 큰 자가 되었습니까? 그 흔한 MD졸업장 하나 없었습니다. 뭐가 큰 것입니까? 그런데도 이 사람은 큰 자가 될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그렇게 많이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신학자가 되어서 신학교 교수가 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모두 명망이 높은 선생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선교를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감동적인 눈빛으로 보아주는 것도 아니고 만약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 목회자가 된다, 선교사가 된다, 신학교 선생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그러면 얼마 안가서 허탈에 빠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즐거움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하나님 앞에서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먼저 무엇을 배워야 하느냐하면 하나님 앞에 한없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티끌만도 못한 처참한 인생이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서 엎드려 두려움 속에 떨면서도 그 두려워 떠는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의 비밀을 터득한 사람, 그 사람들만이 에나피온 투 큐리오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코람데오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만나는 날 기도하는 여러분들에게 오셔서 너는 내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라는 응답을 해주실 때 여러분들은 착각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 이게 바로 총회장이 되라는 계시인가 보다. 아, 이게 결국은 내가 비록 성적이 에프선상에서 왔다고 하지만 내가 미래에 이 고신의 총장 한번 해보라는 하나님의 계시인가보다.’ 아니면 ‘아마 하나님이 나에게 일만 명의 교회를 한번 맡겨 주시려나보다.’ 그런 머저리 같은 꿈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세상의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눈앞에 큰 사람이 될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은 이미 크기가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은 신학교에 간다면 젊은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말을 많이 하는 모양인데 나는 가기만 하면 거기에 초를 쳐서 꿈 좀 버리라고 외치는 사람입니다. 그놈의 꿈 때문에 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꿈을 그렇게 꿉니까? 다 개꿈입니다. 비전이라고 그러는데 성경적으로 보면 이 비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자기 암시적인 자기 개발의 비전이고 계시적 비전이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큰 도시에 가서 돈을 벌고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은 모두 다 자기 암시적 자기 개발적인 비전입니다. 해와 달과 열한 개의 별이 절하는 것을 보는 꿈은 계시적 비전입니다. 꿈은 내가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멋대로 꿈을 꾸고 하나님을 거기다가 끌어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도 자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하는데 하나님의 지존하심을 인정하고 자기는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경배의 영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눕혀놓고 팔 꺾기를 하는 것입니다. ‘믿사오니! 주여! 이래도!’ 인본주의가 신학교에서 제일 많습니다. 버려야합니다.
한번은 정말 죽어도 나가기 싫어하는데 하도 나오라고 그래서 기독교 TV에 나왔습니다. 유명한 탤런트 둘이서 나를 인터뷰합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 비전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내 생애 최고의 비전은 한 사람의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랬더니 방송이 끝날 시간이 되었는데 끝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젠가 지방에 내려갔는데 친구인 목사 하나가 신실하고 목회를 잘하시는 분인데 이런 시골에서 부목사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그래요.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여기가 무슨 비전이 있느냐고 그래요. 그래서 안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냐?’ 그랬더니 그러면 김 목사님은 비전이 없는데 방배동에서 땅을 사서 교회를 짓고 옮기고 그러느냐고 그래요. 그래서 그랬습니다. ‘없다.’ 그럼 뭐하느냐고 그래요.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비전이냐? 아니 애기를 낳았으니까 기저귀를 사고 학교를 들어갔으니까 가방을 사는 것이지 교인들이 많아지니까 할 수 없이 땅도 사고 더 많아지니까 교육관도 사고 그러는 것이지 그것이 무슨 놈의 비전입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나는 교회에서도 종종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인이 반으로 줄면 교회건물 일부를 처분해서 선교단체에 기부하든지 자선사업단체에 내놓든지 하자. 필요 없는 공간을 왜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냐?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해서 서울로 세워주시면 서울로 가고 지방으로 세워주시면 지방으로 가고 낙도로 세워주시면 낙도로 가고 군대로 가라고 그러면 군대를 가서 몇 명을 보내주시든지 그 영혼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다가 피를 토하고 죽으면 그것이 비전이지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입니까?’ 이 목사님은 은혜를 조금 덜 받았는데 사모님은 너무나 그 말에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더니 어느 사모님한테 전화를 해서 김남준 목사님이 참된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그랬는데 그 사람이 우리 집사람이었습니다.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전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훌륭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두 눈앞에 먼저 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무슨 꿈인들 없었겠습니까? 그 사람도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에 가서 스랍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위엄하신 영광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꿈도 박살나고 비전도 다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고백이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자 가운데 있으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도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 망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밥’인데 멸망시킬 때 쓰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 비참하게 멸망당했구나! 왜? 영광의 빛 앞에서 자기의 비천함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은 누가 하는 것이냐 하면 그 영광의 빛을 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이 세상의 가치와 길을 버릴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것은 내가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거나 아니면 학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쩔쩔매게 만들 정도로 유능한 학자가 되거나 아니면 선교적인 위업을 이루는 그런 위대한 선교사가 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그 눈빛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누리고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거기에서 한없는 관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생이 공부에 욕심을 많이 가진 신학생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단순히 지적인 욕구가 아니라 좀 야망 비슷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루는 불러서 그랬습니다. ‘야, 목회자로서 너를 보니까 너는 공부를 잘하고 공부에 대한 야망도 가지고 있는데 나는 네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너를 움직이고 있는 근본적인 동기가 공부를 하게하고 그 다음에 뭔가 네 자신의 준비를 위해서 몸부림치게 만드는 동기가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네 미래에 대한 야망으로 보인다. 내가 너에게 하나 묻겠는데 지금 여기서 대답하지 말고 집에 가서 대답해보아라. 네 인생의 계획표가 다 있는데 오늘 밤에 하나님이 오셔서 그 계획표 사실 내가 준 것이 아니라 네가 짠 것이거든 쭉 찢어버리고 저 낙도에 가서 열댓 명 있는 섬인데 그중에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가서 하꼬방이나 하나 얻어서 그 사람들과 평생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어라. 그래도 아멘을 할 수 있는지 집에 가서 한번 생각해보아라.’ 심히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모두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그리고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분 앞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그분 앞에서 살 수 있는 삶이라면 똥을 푸면 어떻고 일평생을 교회에서 봉고기사를 하다가 죽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정말 주님을 더 잘 알 수 있고, 더 바르게 사랑할 수 있고, 더 많이 영화롭게 할 수 있고, 더 충심으로 그분을 찬양할 수 있다면 이것 말고 다른 일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보는 앞에서 큰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두 번째는 여기에 보면 동사가 나오는데 ‘에스타이’입니다. 미래입니다. 우리는 항상 크고 유명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다릅니다. 울음소리가 다르다든지 엄마가 태몽에 우물에 뜬 달을 삼켰다든지 뭐 하여튼 태어나자마자 글을 읽었다든지 하여튼 뭔가가 달라야지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게 태어났는데 ‘에스타이네바스’ 앞으로 크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오늘 궁금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그렇게 크게 된다는 예언이었는데 실제적으로 세례 요한을 크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유명한 학벌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바울처럼 가말리엘 같은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소 같은 훌륭한 도시에서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은 있기는 있었겠지만 명함을 내놓아도 알아줄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성경에 이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크게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자체가 철저하게 영적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유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신도시 아파트 옆에서 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니라 모래바람이 펄펄 일어나는 허허벌판에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단강 건너편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여왔습니다. 그리고 그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의 표현이나 설교는 예루살렘에서 살았던 사람들처럼 세련되고 박학다식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에는 들을 수 없었던 특징이 있었으니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서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고 자신의 죄를 참회함으로 만들어서 강력한 말씀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입니까? 작은 사람입니까? 큰 사람입니다. 그것이 말입니다. 잘잘한 목회자들은 네가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MD급이냐? 아니면 예과냐? 본과냐? 유학을 했는데 어느 나라에서 했느냐? 어느 학교에서 유명한 교수한테 지도를 받았느냐? 아니면 별 볼일 없는 교수한테 지도를 받았느냐? 잘잘한 목회자들은 그것을 따지지만 워낙 큰 목회자들에게는 감히 어느 신학교를 나오셨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칼빈이 어느 학교에서 공부를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는지 기억하십니까? 프란시스 에스파니가 그렇게 훌륭한 선교사가 되기 전까지 이름 없는 시골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무명의 설교자로 지냈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13살에 예일대학을 들어가고 17살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2년 뒤에 교수가 된 천재 조나단 에드워즈가 세계적인 사상가가 되기 전까지 저 시골에 있는 노스햄턴 교회에서 부목사를 지냈던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워낙 사람이 큰 사람이 되면 그런 것은 묻지 않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은 졸업장을 가지고 말하지만 이 사람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는 주님의 면전에 서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 서고 싶은 것입니다. 감히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이 ‘에스타임 에라스’ 라는 이 예언은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명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비추어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그리고 그 엄청난 영적인 권세를 느끼면서 그 앞에 깊이 회개하고 뉘우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 때 세례요한이 양복이 아니라 약대 털옷을 걸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지 않고 광야에서 자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고 나온 그 사람 앞에 부복했습니다. 그래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들의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이사야 40장에서 예언된 바와 같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요 육체의 모든 아름다움은 꽃과 같도다.’ 그러면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서 높은 마음은 낮아지고 낮은 마음은 돋우어져서 찬란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큰 자입니다.
이렇게 큰 자가 되는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사람이 The man of the word of God.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 말씀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현존을 세례 요한의 선포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조금 잘하면 회중들이 그 설교자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함의 영광이 나타나면 설교자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전부 다인 것처럼 영광을 나타내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은 자신의 책 ‘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방법’이라는 논문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이 지상에 당신의 말씀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 세 곳을 두셨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계시의 책인 성경이고 또 하나는 신자들의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놓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목회사역 속에 말씀의 저장고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사역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빌딩을 짓고, 차를 사고, 기도원을 짓고 하다가 안 되니까 납골당까지 만드는 것이 목회가 아니라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풀어서 그들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밝은 빛을 계속해서 비추어주어서 마지막 죽을 때까지 목회사역 속에서 흘러나오는 진리의 빛을 인해서 복음적 현장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현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현자는 현자가 되게 하신 지혜롭게 하신 주님이 있었기 때문에 피동적으로 현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밝은 지혜의 빛으로 어둠속에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을 가르쳐야하는 것입니다.
이 어두움도 덩달아 어두운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어두움과 객관적인 어두움으로 나눕니다. 이 객관적인 어두움은 뭐냐 하면 이 진리를 잘 가르쳐주기만 하면 눈이 띄어서 알게 되는 그런 어두움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주의 법의 기이함을 보여주시옵소서. 내가 눈을 떠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한 그런 의미에서의 아직 하나님의 말씀과 참뜻이 무엇인지를 접촉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아있는 어두움입니다. 이게 Objective Darkness입니다. 그러나 신자를 비롯한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이 객관적인 어두움이 아니라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주관적인 어두움은 뭐냐 하면 죄 때문에 생겨난 어두움입니다. 그 캄캄한 어두움의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고 영혼의 세계에서는 아무 생각도 갖지 않은 그러면서 하루살이처럼 이 세상에서 아무 의미 없는 허탄한 것에 목숨을 걸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어두움이 생각이라는 영역에 적용될 때 그러니까 에베소서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에는 세 가지 작용이 있는데 첫째는 뭐냐 하면 생각입니다. Mind입니다. 두 번째가 Understanding입니다. 이것이 총명입니다. 세 번째가 Heart입니다. 마음입니다. 이것이 생명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영혼이 어둡고 캄캄한 세상입니다. 그러면 그 어두움이 생각에 영향을 미치면 생각이 Blind 하게 됩니다. 눈 먼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아무 의미 없는 허탄한 것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이태리 피렌체에 갔을 때 기롤라모 사원을 올라가서 순교당한 자리가 있는데 그 앞에 성당이 있는데 크지도 않고 조그마한 문짝인데 쇠로 깎아서 만들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나서 가슴에 막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 문짝 하나를 150년 동안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가운데서 생각이 눈멀어졌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가치가 없는 그 일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불나방처럼 날아드는 것입니다. 총명이라는 것은 Understanding인데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오성이라는 것은 그 생각으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받아들일까 말까를 판단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받아들여진 것을 가지고 적용을 해서 다시 판단하는 자료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눈멀었는데 총명은 뛰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판단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 생각을 통해서 들어온 빛을 사용해서 그것을 적용하고 사용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어두움이 가득해지면 총명은 흐려지게 되고 그리고 결국은 이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 안에는 다시 지정의의 작용이 있는데 그런데 처음 창조된 상태에서는 항상 이성이 우위입니다. 이성이 우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그 이성 우위의 상태에서 의지가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성의 통제를 받으면서 감정이 따라오고 그 이성과 감정의 통제를 받으면서 의지가 행해져야하는데 이 감정이 이성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이것이 다 파괴되어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의 빛을 비추어서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상태가 어떠하고, 그들을 창조한 분이 어떤 분이며,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고,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이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서 선을 이룰 수 있고 그 안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은 현자가 되어야 합니다. 빛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얼마나 더 빛의 사람이 되어야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례 요한을 그렇게 큰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이제껏 들어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찬란한 빛이 비추면서 그들은 그 어두움 속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으로서는 너무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이 축복이 되기는커녕 자신들에게 진노와 그리고 두려운 징벌이 될 정도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새 너무 마음 아픈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똑똑한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목회를 잘하기 위해서 세상을 연구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반만이라도 성경을 연구하면 교회가 변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용역회사에 돈을 주고 용역을 주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몇 명이고 그 다음에 주민들의 학력이 어떻고 성향이 무엇이고 다 적습니다. 이것은 외국에서도 편의점을 낼 때 쓰는 방법입니다. 교회할 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빛입니다. 참된 복음의 빛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의 빛입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을 듣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건져내셔서 그래서 당신 앞으로 나오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목회자 자신 속에 이런 어두움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회사역을 통해서 더 많은 빛을 끊임없이 부어서 그래서 성도들이 점증하는 계시의 빛 아래서 목양을 받으면서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이것이 목양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몇 년을 파내고 나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목회, 설교시간에 자꾸 집중이 안 된다고 그래서 어떤 사람이 권면을 했더니 ‘목사님 설교를 받아 적으세요.’ 그랬더니 교인이 하는 이야기가 ‘쓸 내용이 없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말씀 준비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결정적인 것과 과정적인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3장에 보면 나오지만 길게 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는 것입니다. 가이사랴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쭉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서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쭉 나오는데 이 인물들이 무엇이냐 하면 그 시대가 어느 시대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총체적 배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장엄하게 역사를 설명하고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이것이 결정적인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라는 이것은 희랍어 성경을 히브리어로 번역해놓고 읽어보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의 소명 기사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선지자들의 소명 기사가 무엇이냐 하면 ‘파이에히 학다바르 엘로힘 엘’ 혹은 ‘레’, 혹은 ‘베’, 그리고 사람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누구누구에게 누구누구를 향해 누구누구 속으로 있었다. 혹은 누구 위에 있었다. 그게 단순히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고한 그것이 한번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서에서는 50번 가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의 의미는 다릅니다. 처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선지자로 소명하는 첫째 Calling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의 임함입니다. 이것은 핵심적으로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것입니다. 호세아 1장 3절에 보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하면 ‘떼이락’ 처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디빼르아도나이’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웨호세아’ 라고 나옵니다. 직역을 하자면 ‘하나님께서 호세아 속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이 뻗어나가서 호세아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소명 기사의 공통점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선지자는 다양했지만 한 가지 체험이 선지자들에게 꼭 필요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시대를 향해 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들에게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넣어주시는 경험은 단지 정보를 전달해주시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성령을 통해서 그에게 넣어주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그에게 넣어주시는 방식 자체가 매우 영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소명을 받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이상이 보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자기 위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과정을 통해서 강력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하면 말씀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 말씀을 모두 하나님의 안에 있는 내적인 경향성의 외부적 유출입니다.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생명이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에 아무것도 느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빈말로 우리에게 계시를 전달해주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것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참된 말씀을 우리들이 제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열리는 것이지 사람의 사람들에게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슈엘로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그럴 때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일차적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이슈엘로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그분의 강한 권능의 장중에 붙들려서 그분과 함께 ‘히트엘라카’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 세례 요한이 30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 침묵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은 1장 80절은 아이가 광야에서 자랐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키만 크고 몸무게만 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처럼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고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기 전에 간난아이 어린 때부터 시작해서 소명을 받고 이제 광야의 말씀을 외치러 나오기 전까지 돌아다니면서 꿀이나 따먹고, 메뚜기나 잡아먹고, 짐승이나 구워먹으면서 일생을 살던 그런 짐승 같은 사람이 어느 날 말씀이 임했고 그래서 그 사람이 부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말하면 삼척동자가 웃을 일입니다. 귀신도 아무에게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들어가느냐 하면 자기들을 향해서 잘 준비된 사람을 찾아내서 갑니다. 그러니까 웬만큼 사는 사람들은 귀신이 들어올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들어가시는데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들어가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결정적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히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짜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공과 그리고 보장된 장래, 이런 것은 안중에 없고 그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다.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아이고 한곳에서 3년씩만 목회를 하라고 그러면 참 할 만하겠는데 그러면 죽을 때까지 평생 신선한 설교를 하다가 죽을 수 있겠는데!’ 3년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한 것밖에 나오는 것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년이 아니라 5년을 할 수 있으면 무엇 합니까? 오늘날의 예배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예배가 아니라 민방위 훈련입니다. 민방위 교육입니다. 11시 예배인데 15분이 되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옵니다. 그리고 오면 이 앞부터 앉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폭탄 맞은 것처럼 비어있습니다. 가장자리부터 앉습니다. 그리고 섰다 앉았다 하며 예배를 드리고 설교시간은 가관입니다. 주보를 읽는 사람, 핸드폰을 들고 뛰어나가는 사람, 벨을 울리는 사람, 주보 꺼내놓고 틀린 글씨를 찾는 사람, 헌금 낸 액수를 가지고 사람 수로 곱하고 나누기 해보는 사람, 또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확신합니다. There is no God. 하나님은 거기에 안계십니다. 하나님이 오신다고 그래도 내가 말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민방위 교육을 받는 것처럼 예배를 드리는 거기에 오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배는 성령에 의해서 주관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 순서지에 의해서 주관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목표 자체가 60분 만에 마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도저히 시간이 모자라면 ‘찬송가 384장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예배당 문이 열렸을 때 공휴일 오후의 햇살이 계단 아래로 내려 쪼입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 예배가 끝난 행복감에 그냥 계단을 걸어 내려갑니다. 그 예배시간에 받은바 은혜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내가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피를 흘리기까지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러면서 걸어 나가도 세상이 바뀔까 말까인데 통계에 의하면 100명이 예배를 드리고 나가는 사람을 예배당 앞에서 물어보니까 95명이 오늘 설교한 본문이 어디인지 알지 못합니다. 95명중에 반은 신약이었는지 구약이었는지 기억을 못합니다. 이게 다 목회자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매주는 그만두고 1년에 한번 정도만이라도 하늘의 능력을 끌어내려서 교만한 교인들을 거꾸러뜨리는 말씀의 역사가 나타났다면 그들이 그렇게 방자하게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거의 배교에 가까운 예배상태입니다. 그러면 그 예배시간에 모두 노래 부르고 춤추는 즐거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 교수는 말하기를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스스로 즐거움을 찾다가 망한 종교라고 규정했습니다. 진지함과 신중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뇌가 없습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교회당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장난의 한복판에 말씀을 받지 못한 목회자가 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정직하게 묻고 싶습니다. 최근에 성경을 읽으면서 다른 이유 말고 성경을 읽으면서 거기에서 비친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거기에 압도되어서 그 말씀이 점점 선명하게 나를 찔러서 성경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려본 최근의 일이 언제입니까? 대답을 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하러 단상에 올라갔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자신의 전인격으로 불붙을 때에 이것이 말씀이 되는 것이지 지성의 것을 꺼내서 하는 것은 이것은 말장난이라는 것입니다. 이 속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배시간이 매우 사변적이 되거나 유희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은 뜨겁게, 기도는 열심히, 설교는 짧게, 그게 은혜로운 예배의 삼박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를 알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칼빈 시대의 설교는 두 시간 가까이 행해지는 설교였습니다. 최근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저작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편의 설교가 너무 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산을 해보니까 어떤 때는 세 시간 가까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마치 설교를 풀어놓으면 신앙논문처럼 되는 설교를 청중들이 귀를 기울이면서 들었습니다. 그중에 ‘Surprised Conversion’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4년 2개월 된 아이가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월요일부터 나에게 교회는 언제 가느냐고 묻는다. ‘왜? 선생님이 무엇을 준다냐?’ ‘아니.’ ‘6밤 더 자야해.’ ‘5밤 더 자야해,’ ‘4밤을 더 자야해.’ ‘너는 왜 그렇게 예배당에 가고 싶어 하는데?’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요.’ 4년 2개월짜리가 지금 대학생들도 못 듣는 설교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사람들에게 들려옵니다. 진지함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설교의 기본은 기독교 사상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순교자가 되었던 스데반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그렇게 긴 구약의 역사를 설명하다가 결국 마치지 못하고 돌을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라는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상이 담기지 않은 설교는 종교적 담론일 뿐입니다. 대륙에서 19세기의 설교의 역사를 보면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까? 한창 합리주의 신학이 일어나서 역사하고 있을 때 그냥 달려가서 합리주의와 손을 잡은 사람들이 평신도가 아니라 다 강단의 목회자들입니다. 머저리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가 되느냐하면 이게 실제로 설교역사의 기록에 있는 것입니다. 독일 설교사에 나옵니다. 주일 낮 설교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감자를 먹는 즐거움’, 그 다음에 ‘예방주사를 맞아야하나? 말아야하나?’ 그 다음에 예수님의 고난주간쯤 되어서는 설교제목이 ‘생매장 되는 것의 위험’, ‘예수님은 왜 결혼을 안 하셨을까?’ 심지어는 ‘돼지는 방목하는 것이 가두어 기르는 것보다 낫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행복’, 이것이 실제로 문헌에 나오는 주일 낮 예배 설교제목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이 속에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이 외치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느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전에서 쏟아지는 말씀을 받고 거기에 마치 총에 맞은 짐승이 계곡 사이에서 신음하는 것과 같은 고뇌의 순간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라는 것은 그 설교자의 마음을 가르고 흐르는 한줄기의 물입니다. 어려운 시대에 독일의 복음주의를 그래도 지켰던 헬무트 티리키는 자기의 저작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주일날 외치는 설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겠는가? 가장 연약한 인간의 증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가 6일 동안 그 진리와 함께 치열한 분투의 삶을 살았을 때에만 주일날 강단에서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연약한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본 적도 없고, 살기 위해서 피를 흘려본 적도 없고, 그렇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본적도 없고,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과 피 흘리면서 분투해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강단에 올라가서 온갖 고뇌를 짊어진 것처럼 설교를 하는 것은 가증스럽고 위선인 것입니다.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언제입니까? 성경을 읽다가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말씀이 깊이 다가와서 확 박히면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쏟아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토설하고 그러면서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이 지나면서 이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속에 있는 내재하는 죄와 분투하며 살아가면서 수없이 흔들리기 쉬운 자신 안의 모든 약점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가 가져다주는 모든 의심과 오해에서 벗어나야합니다. 그리고 찬란한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체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올라와서 말씀할 때에는 이 말씀이 이미 자기화 되었습니다. 자기화 되지 않은 것은 꺼내기가 너무 힘듭니다. 자기화 된 것은 꺼내기가 너무 쉽습니다. 배추장사에게 배추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원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배추장사에게 휴대폰의 전자공학을 이야기하라고 그러면 적어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것이 거의 매일은 힘들다고 할지라도 성경에 얼굴을 묻고 화살에 맞은 짐승처럼 신음하면서 그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일들이 일주일에 한번, 한 달에 한번은 일어나야합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살기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고백이 거기서 처절히 생겨나야합니다. 마틴 루터가 그 캄캄한 중세신학의 어둠에서 헤어 나오는 비결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편과 갈라디아서 등등을 강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에 수도사로서 깊이 고민하다가 비텐베르크 대학에 와서도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을 그때에 일생에 잊힐 수 없는 귀한 만남을 하나 갖게 됩니다. 시타우피치라는 선배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뇌하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랬더니 슈타우피츠가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사람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형제! 로마서를 다시 공부하십시오.’ 그러면서 집요하게 로마서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또 한 번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기회를 만나게 되었는데 랑데라는 수도사를 만납니다. 이 사람은 희랍어와 그 다음에 히브리어의 도사였습니다. 그 사람을 한번 가는 길에 세 시간 반이나 말을 타고 가야하는 거리에 있는 사람인데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찾아가서 거기서 지독하게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문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성경이 가톨릭의 해석 속에서 철저히 유린되었는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롤랑 베이턴이 쓴 전기 속에서 루터의 고백이 인용될 때 이렇게 인용됩니다. ‘그 순간 캄캄한 어두움을 찢고 진리의 빛이 들어왔다. 내 눈에 낙원이 열렸고 이제껏 보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었으며 이제껏 까지 내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모든 짐을 벗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마틴 루터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신학을 공부하려는 많은 후학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한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해서 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향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 있어야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례 요한은 학벌도 별 볼일 없고 대단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체험을 가졌습니다. 정도에 있어서는 이 사람과 같은 경험을 동참하기 힘들다고 할지라도 같은 종류의 경험이 우리에게는 날마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읽는 것 이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도 가장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이것입니다. 개인적인 성경읽기입니다. 꾸준히 성경을 읽으면서 존 오웬은 자신의 저작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 그 자체는 신적 저작이므로 탁월한 통일성이 있다. 그러나 이 통일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단일 저작으로써의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감각을 갖는 가장 좋은 길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이다.’ 오웬의 탁월한 지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방대한 대작은 성경적 신학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Biblical Theological’ 에서 그는 그 긴 천지창조로부터 마지막의 구속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다 마친 후에 마지막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이 마치 신학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인 것처럼 우리의 귀에, 우리의 마음을 울리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과 그 모든 것에 관한 학문이다. 이 신학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경배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신학을 연구하는 그 사람은 먼저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성경 말씀을 통해 깊은 감화를 받고 그 속에서 신적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신학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 자기화 된 하나님의 말씀 이것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신학책이 아니라 성경 이 자체를 대하면서 거기서 이미 가지고 있는 신학의 범주 안에서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눈물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 아파하심과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와 이런 것들을 쭉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찍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라는 것은 여기서 떠다가 여기를 주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남의 책에서 떠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설교가 아니고 배달입니다.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되느냐하면 자기가 말씀을 먹고 그리고 성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풀어헤쳐서 젖을 먹이는 그런 것입니다. 여기다가 상추쌈을 싸서 돼지고기에 쌈장을 발라 싸서 어린아이 입에다가 쳐 넣는 것입니다. 아이는 죽습니다. 아니 과학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이렇게 영양가 많은 것을 주었는데 왜 죽느냐는 것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먹고, 힘들게 요리해서 힘들게 먹고, 그리고 힘들게 소화시켜서 그래서 진액을 짜듯 가슴을 풀어서 지극히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많이 깨달았으니까 좀 나누어줘’ 이런 자세가 아니라 그것은 말씀의 주인이지 종이 아닙니다. 칼빈에 표현에는 The servant of word God. 존 오웬의 별명은 The servant of the gospel of Christ. 자신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것이 목회입니까? 만날 땅을 사서 건물 짓고 납골당 짓는 것이 목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행기 타고 설교말씀 전하러 다니는 것이 목회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강한 감동을 받고 강력한 감화를 받아야합니다. 같은 책 Biblical Theological 에서 존 오웬은 신학자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의 위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신자이든 신학자이든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내재하는 상태에서 역사한다.’ 그 역사하는 Direction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반감과 대적입니다.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계획,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선한 상태를 가로막거나 훼방하거나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그 어떤 기능을 신학도의 마음속에 있는 이 죄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순결한 삶을 사는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이를 악물고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제 말씀 드린바와 같이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온전한 순종을 위해서는 온전한 사랑이 필요하고 그 온전한 사랑을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은혜를 성령 자신이라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필요합니다. 그것들이 어떤 사람에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이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방편을 사용해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방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열심히 말할 수 없는 애정을 가지고 그래서 그것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두려움과 감격 속에서 그 말씀을 읽고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다시 즉각 엎드려야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성경만 읽는 것은 꽝입니다. 그것은 못 쓰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간절함 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 눈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성경을 밝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합니다. 그것을 끌어안고 그것은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먼저 들어가서 자기를 관통하고 지나가야지 이리로 들어와서 이리로 나가면 안 됩니다. 그렇게 깊이 들어온 다음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야하는 것입니다. 덜 했으면 다시 회개하고 기도해서 이 말씀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건져주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서 노트를 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도들에게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쭉 적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만 그렇게 깊이 은혜를 받으면 제 표현에 의하면 어떤 때는 6개월 또는 8개월의 분량이 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그때 다시 꼼꼼하게 정리를 하면서 그러면서 본문을 연구하고 신학적인 참고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을 더 연구해서 설교를 만들어서 한번 깊이 은혜를 받고 하루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몇 달 동안을 그 은혜 속에서 내 삶의 방향이 꺾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이 성경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에 깊이 젖어드는 것입니다. 여기 참고가 많습니다. 그중에 어느 것을 하나 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20주를 계속 설교하는 것입니다.
로이든 존스 목사님은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하시면서 그랬답니다. 주일날이면 성도들이 모두 설교를 듣고 예배를 마치고 떠나갈 때에 그랬답니다. ‘아 어떻게 하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까지 6일이나 기다려야하는데!’ 오늘 설교의 고갈이 있는 목회자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그래서 막 쏟아놓는 것입니다. 그 빛을 받으면서 이 교인들이 아직까지도 모르던 신앙의 위대한 세계를 쫙 뻗는 것입니다. 새로운 빛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새로운 삶을 삽니다. 이것이 끝나기 전에 또 다시 새로운 말씀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으로 빛으로 온전하게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서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무슨 설교가 제빵입니까? 자신의 온 삶으로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첫 번째 자격이 무엇이냐 하면 그가 구도자여야 합니다. 순례자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 교역자에게 그럽니다. ‘다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용서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추구하지 않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도와줄 수 없다.’ 다른 것은 다 도와줄 수 있는데 말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을 보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그분을 본받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치열하게 공부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신학이라는 것은 이 신학이라는 많은 책은 이 한 책을 위한 학문입니다. 그래서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말하기를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만인의 책의 사람의 되기 전에 먼저 A man of one book.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 한 책이 바로 Bible 성경인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공부하다보면 도저히 하나님의 그 계시의 섬세한 부분을 번역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눈물 나게 공부해서 희랍어와 히브리어와 아람어 고문까지 꿰어야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되면 살을 깎고 뼈를 갈아서라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 슬픈 현실이 무엇이냐 하면 다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싸웁니다. 성경 이야기도 그렇게 성경이 천대받고 있습니다. 마치 성경을 한 번도 못 읽은 사람들에게 박사학위를 주던 중세시대 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가 교과서가 되고 성경이 부교재가 되어서 그들의 사상에 Free Text나 제공해주는 그런 시대로 오늘날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성경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거기서 내적인 순종을 터득해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자신에게 은혜를 전달해주고 그 말씀이 어떻게 살아있는 운동력이 있는지를 경험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가슴속에 살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탐구해야하는 것입니다.
저를 가르쳐주시던 은사이신 고 김희보 박사님은 그런 점에서 탁월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분은 구약을 깊이 공부하셨지만 무슨 신학 책을 읽던지 거기에서 나오는 의미 있는 결론은 모두 성경책 남은 가장자리에 새카맣게 기록하셨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결국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신학 책들은 성경의 종이다. 성경을 섬기기 위해서 있는 책들이다. 그래서 그분이 채플시간에 올라오면 원고도 없이 다 낡은 성경 하나를 가지고 오셔서 펼치고 소리 지르지도 않고 천천히 설교하셔도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개혁신학의 전통입니다. 어떻게
마지막 두 번째는 그러나 과정적 요인도 검토합니다.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적으로 임할 뿐만 아니라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매일매일 성경을 대하면서 생생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수련회에 오셔서 총신대 교수님 한분이 역사신학을 하시는 분인데 강의를 하셨습니다. 의미 있는 책을 하나 쓰셨는데 깊이 있게 잘 쓰신 역사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그분이 고백하기를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은 한없이 감동을 받았고 더 감사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책을 쓰면서 자기가 7년 동안을 거의 안 빠지고 새벽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연구를 하다가 어떤 때는 손에 잉크자국을 남기고 잠이 드는데도 새벽이면 교회에 나가서 계속 엎드려 기도하고 ‘자신에게 영감을 주시옵소서.’ 이것이 신학을 하는 자세입니다. 신학생일 때도 그렇게 안하면 언제 하겠습니까? 매일 매일 성경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추가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이 말씀을 공부한다는 것은 성경만 읽고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한 사람이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복음 그 자체만이 아니라 복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성경적 원리에 입각해서 세워진 복음적 교리의 체계들을 공부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철저하게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생은 말입니다. 이 무릎은 기도하느라고 닳고 이 팔꿈치는 공부하느라고 닳아야하는 것입니다. ‘나는 외과의사다.’ 라는 책을 쓴 사람이 외과의사의 조건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사자 같은 심장,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로 이야기하면 영성입니다. 불굴의 영성, 강력한 하나님과 교통하는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독수리의 눈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리한 지성입니다. 선명한 성경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에 들어간 것 없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여인의 손길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용의 기술입니다. 그 손으로 수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손길만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염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여인의 손길만 있으면 무엇 합니까? 또 염통이 어디 붙었는지도 알고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사자 같은 심장이 없습니다. 어느 병원에서 한 사람이 구석에 이렇게 서있는데 간호사가 계속 그러더랍니다. ‘너무 걱정하시 마세요. 그 옆구리 2㎝만 째면 됩니다. 잠깐이면 끝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 환자가 아니라 의사였답니다. 그러니까 사자와 같은 심장과 독수리의 예리함과 그리고 여인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를 하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목회를 하고 신앙을 위한 신학을 공부하면서 느끼게 된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 후회해봐야 소용없지만 느끼게 되는 결론은 신학교를 갈 때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합니다. 최소한 3년, 허락한다면 7년 정도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자기를 극한의 벼랑 끝까지 모는 공부의 수련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은 지능이나 이 모든 것들을 평균이라고 칠 때 3년 내지 7년 정도를 ‘저렇게 공부를 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는 정도까지 벼랑 끝까지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의신학, 교의학, 성경 신학, 성경언어, 고전 언어, 역사신학, 최소한 이 정도라도 그것을 위해서 최소한 3년이나 7년을 거의 죽음의 벼랑 끝에 갈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뜨거운 사랑 하나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녀 중에 하나가 혹은 가족 중의 하나가 암에 걸려서 드러누워 있는데 부엌칼을 들고 뛰어가서 ‘의사가 뭐를 좀 안다고 하지만 이 오빠만큼 너를 사랑하겠느냐?’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유가 어쨌든 간에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치열하게 공부해야합니다. 목회를 하고 목회를 하기 전에 신학교를 다닐 때는 책을 살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일주일씩 점심값을 아껴서 그것을 모아서 직장에서 점심시간에 막 차를 타고 그때는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가서 서점에 가서 원서 하나를 사서 돌아올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책 살돈은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씩 서재에 들어가서 책꽂이를 붙들고 한없이 웁니다. 이렇게 많은 지식이 있고 그리고 이것들은 내 영혼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지식들이 더 많이 살아 역사함으로 내가 진리를 더 옳게 분별할 수 있고, 진리를 더 옳게 분별하면 내가 더 진실한 삶을 살 수 있고, 내가 더 진실한 삶을 살면 그 살았던 구도의 삶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고, 그것을 할 수 있으면 성경을 다시 볼 수 있고, 그러면 성도들에게 전혀 새로운 말씀의 지평을 열어 보일 수 있는데 그런데 세월은 너무 많이 흘렀고 이제 기력도 쇠퇴하고 목회의 환경은 이렇게 학문에 전념해서 내 영혼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오늘 눈에 불을 키고 성경을 읽다가 한 시간 뒤에는 심방 가방을 들고 나가야하고 지금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다가 눈물을 씻고 교회의 재정에 관한 회의에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현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교회를 팽개치고 유학을 가겠습니까? 숲속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가하지만 그것은 특별한 것을 한 뒤에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차를 타고 오면서도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몸부림을 친다고 해도 얼마나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학문을 광범위하게 포괄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하지 못한 내가 이제 이 나이에 얼마나 그 빛을 보겠으며, 본 빛을 얼마나 소화하겠으며, 소화한 것을 얼마나 나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성도들에게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성과를 보지마시고 매일 매일’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성과를 보지마시고 저의 걸음걸음을, 걸음걸음으로 만족하시옵소서.’ 그리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걸음 한걸음 갑니다. 그래서 몇 달에 한 번씩 책꽂이 앞에 서서 사다는 놓았지만 펼칠 때 처음 햇빛을 받는 그 소중한 값진 책들을 보면서 그러면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지나가버린 수많은 내 젊은 나날들, 부분적으로는 게으름과 또 게으름을 이길 때는 가는 방향을 잘못 알아서 너무나 많은……. 저녁 7시부터 새벽 7시까지 글을 쓰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벌써 4일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의사는 나에게 경고를 합니다. ‘그러다가 돌연사합니다.’ 겸손해지십시오. 인생의 기간을 수학적으로 나누면 안 됩니다. 나이 많이 먹어서의 10년은 젊었을 때 5년도 안됩니다. 비효율이 많습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놀라운 지식이나 신앙적인 탁월한 지혜가 개발되어 있으면 그 갭을 줄일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않으면 그렇게 인생을 살면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부지런히 자기를 채찍질해야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다가 학교에서 쓰러졌다는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너무 힘들고 약할 때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채플 실에 와서 엎드려서 펑펑 울며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너무 약합니다. 주님도 이런 고난의 길을 가셨지요?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신학의 정치한 학문들을 이 신앙적인 풍부한 체험 속에서 하나하나 터득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광대한 세계를 맛보고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이렇게 깊이 있는 신학의 지식을 깊은 눈물의 기도 속에서 섭취하고 나면 이게 점점 많아질수록 작은 똑딱 배를 타고 파도가 많이 일어서 흔들리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이었는데 항공모함이 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도도히 대양을 가로질러가는 그러나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없이 필요로 하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의 과격한 언어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상심에 가까운 부담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때문에 이보다 더한 고난의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구체적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여러분들의 삶속에서 치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그 말씀에 불붙은 가슴을 가지고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참 빛을 비추고 그 뜨거운 불을 붙여서 그래서 이 어두운 세상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