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사명과 신학교육
녹취자 : 장주은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학교를 처음 방문합니다. 그렇지만 한국 선교사들을 통해서 이 학교에 대한 좋은 소식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저와 함께 말씀을 나누는 것이 여러분의 신학 공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분량에 있어서나 종에 있어서 많은 사역들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설교하고 기도하는 일 이외에도 많은 다변화하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더욱이 산업화 사회 이후 널리 퍼진 자본주의적 경쟁 심리는 우리의 목회를 더욱 바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의 현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기 쉽습니다. 저는 오늘 사회자가 읽은 이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항구적인 대책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알다시피 모세에게 성막의 제도를 주셨을 때 그 성막은 창문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물돼지 가죽으로 덮인 텐트였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하나님은 일체의 빛이 들어올 수 없도록 성막을 설계하셨을까요? 그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등잔불이 필요했습니다. 햇빛이 아니라 등잔불 빛 말입니다. 이것은 제일 먼저 우리가 진리의 빛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세상의 학문과 상식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최종적인 규범은 오직 성경입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다면 진리는 하나님 자신임에 틀림없다.’
목회란 무엇일까요? 그냥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목회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사회 사업기반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동호회에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추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다시 하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아닌 상태에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질서로 돌아가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회가 그렇기 때문에 피상적인 신앙을 가진 목회자는 결코 이 목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말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이다’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진리가 바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그 진리를 획득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두 번째로는 진리의 빛으로 교회를 밝혀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와 설교, 심방과 교육, 교회의 운영과 치리, 이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깨우쳐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자신의 설교대로 살았을 때 사람들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사람이 아닙니까? 물론 사람입니다. 그러나 망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신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이 세계도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세계의 상태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들려오는 수많은 전쟁과 갈등, 범죄의 소식들이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불행과 모순의 근원이 무엇때문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육안으로 바이러스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징후를 경험하므로 감기에 걸렸다는 것을 압니다. 목이 아프고 기침이 나거나 열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죄는 보이지 않지만 죄에 감염된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돕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여 하나님의 행복에 이를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목회자는 뛰어난 학자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행정과 조직에 능한 사람일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중보다 뛰어나게 진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설교단에 서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것은 진리의 빛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현대의 정신은 절대적인 진리와 도덕의 규범을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믿는 시대입니다. 성경의 계시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신앙이 필요한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상식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의 설득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진리에 집착하는 설교자와 그 진리를 역사하는 성령의 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의 기독교를 보십시오. 죄에 대한 절대적인 개념은 상처라는 말로 대체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절대적인 관념은 행복이라는 관념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이 세상 나라를 살기 좋게 만드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엇때문일까요? 왜 이런 사상들이 오염되었을까요? 목회자들 때문입니다. 여기가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18세기의 독일 교회상은 이런 사실들을 잘 입증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생명력을 상실해가고 이성주의가 득세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소위 경험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신앙과 삶이라는 기치를 내겁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들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합리주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이후에 일어나는 합리주의 신앙은 설교단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18세기 말기에 독일 교회 안에는 이러한 설교제목들이 강단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음료로서의 커피의 가치’,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축복’, ‘가축은 축사에서 기르는 것 보다 방목해야 한다’, ‘예수님은 왜 독신이셨나’, 부활절은 앞두고는 ‘생매장 당하는 것의 위험’, 이것이 실제로 당시 주일날 설교 제목이었습니다. 결국은 설교단이 진리의 힘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명은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진리를 탐구해야 할 목회자의 사명을 보여줍니다. 진리에 대한 탐구는 크게 두가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잘 믿는 것입니다. 신학의 두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으려는 신앙의 기능이고 추론하려는 이성의 기능입니다. 잘 믿으려는 경향은 잘 추론하려는 경향보다 신학에 있어서 더 중요합니다. 소위 믿음과 이성의 문제로 귀결되는 이 문제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구 안젤모스가 말했듯이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고 알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선하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완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신학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진리를 깨달은 다음에 그것이 왜 진리인지를 탐구해 가야 합니다. 이것은 지성의 친밀성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서 사상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통해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목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궁극적으로 목회자가 전해야 할 것은 세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지혜입니다.
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영혼으로 특별히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좋은 교사를 못만났던 것입니다. 제가 열 다섯 살 되던 해 겨울의 일이었습니다. 교회를 가고 있는 주일이었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저는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논둑길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가난이나 다른 고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왜 매일 살아야 하는가. 하루 하루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몸서리 쳐지도록 무서웠습니다.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런 수많은 질문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나에게 티끌만한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열 다섯 살 난 나만큼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견딜 수 없는 절망속에 오랜 시간을 그 논둑에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소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일평생을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기로 말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설교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교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워낙 총명하니까 열 다섯 살에 그런 고민을 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그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사상가 C.K.체스터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것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 때는 내가 그런 고민을 말로 할 수 있었지만 이 아이들은 그 고민을 하는데 회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귀를 귀울여 보십시오. 그 아이들의 통곡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 흐느끼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사명은 바로 그런 아이들에게 아주 명쾌한 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입술이나 말로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성령의 역사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믿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의 영 없이 주님의 진리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언제나 진리를 사용하십니다.
자, 어떤 사람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비교적 훌륭한 답을 줍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인간의 고민을 전혀 포용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공감은 하지만 눈물을 흘릴뿐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학문을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신학은 더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합니다. 많은 학문은 각자 자기 분야를 공부합니다. 철학은 이 모든 학문의 세계를 관통하는 진리를 찾아냅니다. 신학은 더 높은 곳에서 그 다양한 진리를 비판하고 바른 길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가 아주 탁월한 지성의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특히 여러분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기독교 사역자가 되기 위해 이 학교에 모였습니다. 공부하기 싫은 것은 소명이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한국 학생들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웃습니다.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국 목회는 진리를 붙들고 씨름하고 전하는 일입니다. 거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달려있습니다. 한 순간도 장난처럼 목회할 수 없습니다. 한 편의 설교에 여러 사람의 생사의 갈림길이 주어집니다. 우리 교회에는 첫 날 교회에 와서 회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불교 신자도 말입니다.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학문은 그 진리를 다루는 도구입니다. 탁월한 기술자는 쓰는 도구가 다릅니다. 도구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일에 대한 욕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해야 합니다. 열렬히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했습니다. ‘책 읽기가 싫으십니까? 목회자의 소명이 아닐겁니다.’ 여러분은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설교자 4세기의 요한 크리소스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의 설교를 매우 좋아합니다. 젊은 날에 이 사람의 설교를 모으로 연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탁월한 설교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웅변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0대부터 치열하게 연마해 온 수사학적 훈련과 성경에 대한 연구가 있었습니다. 7세기에서 8세기로 가면 마지막 동방 신학자가 등장합니다. 소위 황금의 청산 유수로 불리우는 신학자 다메섹 요한입니다. 17세기에 오면 영국의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이 등장합니다. 모두 치열한 공부의 사람이었습니다. 칼빈과 루터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마르틴 루터는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매주 3시간씩 말을 타고 선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젊은 날에 너무나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건강을 해칠 정도로까지 매진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자잘한 신학자는 남의 신학을 연구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위대한 신학자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등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이 위대한 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지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지성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결심문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자. 가능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100에 가까운 사도요한이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 왜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통곡하였을까요? 하늘로부터 두루마기가 내려왔습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미래에 교회의 될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그것을 파악하여 일곱 교회에 가르침의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두루마리가 내려왔습니다. 인봉되어 있었습니다. 천사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도 이 인봉을 뗄 사람이 없다. 계시는 주어졌는데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늙은 사도를 통곡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히랍어 성경에는 ‘에클라이 온 폴 유’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흐느끼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크라잉’입니다. 소리내어서 우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족들이 그리워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있는데 그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울어 보셨습니까? 그 위대한 기독교 지성의 바다에서 자신이 모래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이 등잔불을 밝히기 위해서 사용한 기름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올리브 기름이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멘 자이트 자크 까띠뜨’라는 구절입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찧어낸’이라고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것은 ‘까띠뜨’라는 단어입니다. 깨뜨리다, 부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까따뜨’에서 온 것입니다. 수동 분사 남성형 단수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올리브유를 만드는 두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감람나무 열매를 절구나 혹은 연자맷돌에 찧어서 기름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그것들을 모두 모아서 프레스에 넣고 누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더 많은 기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름은 순수한 기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으로 불을 키면 많은 그을음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성막에서 쓸 수 있는 기름으로서는 부적격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한 십 여년 전 이 본문을 대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자기 깨어짐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 앞에서 자기가 깨뜨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깨뜨려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릇된 자신의 본성과 성령의 역사로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가 영향력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체험적인 지식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펄전의 전기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설교가 훌륭했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느 성도가 단상을 내려오는 스펄전에게 다가갔습니다. 당신이 이 설교를 며칠이나 준비하셨습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일평생 걸렸습니다. 그 한 편의 설교를 하기 위해 일평생 걸린 것입니다. 끊임없는 깨어짐과 진리에 대한 앎, 그리고 자기 복종의 순간들이 한 편의 설교를 만든 것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학교 시절에 성경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감동으로 여러분이 성경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린 것이 언제입니까? 그 속에서 자기를 미워해 본 적이 언제입니까? 성경을 덮고 거룩한 열망에 붙잡혀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 적은 언제입니까?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말이어서 라틴어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리벤두 입무 모리엔도 엣트 다르난도 피트 데올루 쿠스 논 인테느겐도 레겐도 아우투스 스페쿨란도’ 번역하면 이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깨닫고 책읽고 사색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살고 죽고 정죄받음으로써 신학자가 되는 것이다.’
저는 교회를 일곱 명의 성도들과 세우고 23년을 설교해 왔습니다.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목회는 죽음의 길입니다. 고통은 우리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만약에 그것 밖에 없다면 아무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로하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는 열정, 진리에 대한 불붙는 확신, 그 말씀을 자신의 온 삶의 무게를 걸고 외칠 수 있는 담대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호한 용기, 어디에서 옵니까? 그 말씀 앞에 끊임없이 깨뜨려진 자기 복종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을 그냥 단순히 많은 신학자들의 지식을 공부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변화받는 사람이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그 진리의 빛 앞에 깨뜨려지며 새 사람이 되는 역동적인 체험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학문 때문에 박수나 갈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비즈니스맨이 아닙니다. 그는 진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정된 신학교 시절에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진리와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고 죽고 다시 사십시오. 그 일을 위해서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의 증인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한 편의 설교에 수많은 사람의 인생이 달려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