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사명과 신학교육
녹취자: 김명진, 백지영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평생에 대만을 두 번 왔습니다. 십 년 저에 왔다가 이번에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이 번 방문은 저에게 훨씬 뜻 깊습니다. 왜냐하면 목자와 양이라는 책이 나온 다음 방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사리바이벌』과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등이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만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 세계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만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선교적 의미를 가지고 잇는지도 알았습니다. 최고의 선교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빌딩을 가진 한정된 장소에 있는 집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흩어진 모든 신자의 영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 대만의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진다면 전 세계에 있는 화교 교회들이 대만교회를 보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회에 변화가 일어나면 그 많은 화교의 교회들이 자신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역할이 다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1억이 훨씬 넘는 화교 교회에 변화가 온다면 세계 선교의 지도를 능히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두 시간에 걸쳐서 목양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은 시간의 순서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관복음서에서 한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주제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장의 주제는 목양입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당신이 오신 목적을 아주 명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두 가지 이중적 목적을 위해서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풍성한 삶을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선 이 말씀은 첫째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론의 거대한 그림을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구원이라는 것은 비참한 상태로부터 구출 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비참한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질병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참한 것입니다. 무지한 것도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구출 받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깨뜨려진 인간관계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여기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중국은 가정이 심각한 위험에 처해져 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혼합니다. 스위스 같은 곳은 50%가 넘게 이혼율이 올라갔습니다. 한국도 네 사람 중 한 사람은 이혼합니다.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개선이 없이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도 이런 것들을 돕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복지를 증지하고 교육을 보충합니다. 그리고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을 재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의 문제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어떤 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런 모든 불행의 요인들은 어떤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뿌리에는 죄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은 무엇입니까? 육체적인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있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생명은 육체의 생명만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은 무엇입니까? 그 생명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주시려고 당신은 죽으셨습니까? 이것은 설명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너무나 쉬운 개념입니다. 여러분이 반은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반이 무엇인지 경험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요한복음 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도 우리는 이것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도 이 생명이 충만할 때도 있고 고갈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목회자입니다. 목회를 합니다. 항상 쉽습니까? 고난이 옵니다. 시련도 옵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옵니다. 당장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어디로 훌훌 떠나고 싶습니다. 이태리에 있는 어느 후배 목회자가 저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래도 부부가 잘 견뎠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중에 자는 데 고양이 울음소리가 계속 나더라고 합니다. 밤중에 어디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날까? 하고 가만히 나가봤더니 화장실 문을 잠가 놓고 아내가 바닥에 엎드려서 울고 있는 소리였습니다. 너무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어느 사람이 나에게 목회가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 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회란,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것, 그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밤새도록 고대합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고난이 생각납니다. 그 분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생각납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그렇게 불순종하고 악했는데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신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와서 회개합니다. 다시 주님께 충성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고 아침을 맞이합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있으리로다.” 그날 아침은 어제 저녁이 아닙니다. 무엇이 지친 목회자를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에게 풍성하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행한 처지를 자신의 인간성을 개선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불행 때문에 망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왜 어떤 고난은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하고 어떤 고난은 어떤 사람을 망가뜨립니까? 그것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얼마나 충만한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고난이 없는 목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들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 생명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충만한 생명이 낯선 것입니다. 그 생명이 중생과 함께 우리 안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되었느니라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기었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 충만한 생명을 위해서 우리가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양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위대한 경륜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수많은 목회자의 사명을 요약을 하면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는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잘 전해서 그들이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 혼자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제국을 세웠던 알렉산더 대제가 존경 받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한 나라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부귀영화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헬레니즘을 전파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습니다. 병사들과 함께 모든 전쟁에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목회자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활동입니다. 자신이 전도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전도하도록 만들 수 있는 감화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동기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눈물이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두 번째 사명은 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생명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까? 신학적으로 구원의 개념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우리의 영혼이 구원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일어난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 번 받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람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가 죄를 짓고 불순종을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하나의 과거적 구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차원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래적 구원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죽습니다. 육체는 땅의 흙으로 살아지고 영혼은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종결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참 존재는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흙으로는 육체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영혼을 넣으셔서 우리에게 사람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혼 혼자 타락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하는 그 날에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완전한 인간 존재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아울러 불멸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 사이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성경은 이 현재적인 구원을 완결된 구원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종종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구원받는 순간에 완전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는 점에서, 또 구원받은 사람은 주도적 성향이 죄를 짓기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완결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목회자라도 현재적으로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영적으로 깊고 경건한 사람일수록 자신 안에 여전히 현존하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고백이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했던 고민입니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내 안에 죄가 있는 것이라 오호라 누가 이 사망의 법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옳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바로 성화의 요청이 생겨납니다. 성화라는 것은 신학적으로 신자가 죄의 본성에서 순결한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점진적으로 장구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구원받은 사람이 내일 구원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내일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에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이 오늘은 그렇지 않은 사람일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주위에서 돈이나 명예 때문에 망가지는 목회자의 소식을 종종 들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원래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칭의론을 내세운 사람이 사도바울이었습니다. 이것은 취소 될 수 없는 영원한 칭의 입니다. 그런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 까 두렵다. 나는 날마다 내 구원을 이루어 가노라.” 이것이 말이 됩니까? 영원한 칭의라면 한 번 칭의는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 모순이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시고 그것을 완성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나의 행실과 의로움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의를 덧입어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나는 육체가운데 살아갑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 이것이 소위 말하는 모티파이드 된 그리스도인의 상태입니다. 죄가 거의 모두 죽은 상태의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구절 다음에 사도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눈물이 확 쏟아지지 않습니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래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셨는데 나는 여전히 육체 안에 사는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사르크스’라고 나오는 이 육체는 죄에 물든 육체입니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넘어 지는 그런 종류의 육체라는 것입니다. 누가 이미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잇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저는 목회자의 두 번째 사명을 성도를 온전케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온전함이 바로 이런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 선교지에 간 적이 있습니다. 후배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경청했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에 그와 조용히 대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렬하던 젊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충고했습니다. “너는 잘못 되었다. 어떻게 그 설교로 이 사람들을 목양할 수 있겠니?” 이런 설교였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었습니다. 할렐루야, 누구를 믿으시겠습니까? 예수를 믿겠지요? 할렐루야.” 그는 거기에서 10년이 넘게 그렇게 설교를 해 온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이미 10년 전에 다 들은 내용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입니다. 그 선교사가 어떤 사람을 자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 교회에서 가장 헌신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함께 대화했습니다. 그 자매는 개인적으로 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만났습니다. 그리고 고민을 들었습니다. 남편과 5년 쯤 별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껍데기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껍데기만의 흉내가 아닙니다. 본성 속으로 스며들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종교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는 설교를 할 뿐만 아니라 온전한 신자가 되도록 설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너무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에 대해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 물론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홀로 인간이 아닙니다. 한 시대에 살고 있고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보면 그 가정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을 보면 다음에 어떤 아이가 태어날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가정은 사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정신은 무엇일까요? 지금의 시대정신은 100년 전의 시대정신과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개혁신앙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입니다. 그 좋은 신학과 함께 현실을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이것을 조직화할 수 있는 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닙니다. 학교의 선생님은 지식을 성공적으로 전달하면 임무가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지식을 전달해서 사람들에게 마음의 감화를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돌이키게 만들어야 합니다.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를 따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의 목표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축구를 생각해 보십시오. 환상적인 드리블을 하는 선수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절대로 절대로 슛은 쏘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축구가 서커스 입니까? 그런 선수는 필요 없습니다.
설교의 목표는 최종적으로 그 사람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진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자신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 설교를 듣고 나면 인생에 대한 어떤 진리에 대해서 ‘쿵’하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가 갖고 있는 설교의 기능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설교를 준비합니까? 엄마가 아이를 어떻게 기르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모유가 좋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엄마가 젖이 잘 나오지 않을 때 먹는 음식이 있습니다. 돼지 뒷다리를 아주 뽀얗게 삶은 국물입니다. 돼지고기를 절대 먹지 못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모유를 먹이고 싶었습니다. 조금 나오고 그 다음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웁니다. 아이도 같이 웁니다. 그 자매가 싫어하는 돼지고기 국물을 먹었을까요, 먹지 않았을까요? 먹었습니다. 아이에게 그 국물을 먹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먹고 젖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목회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이들을 길러보십시오. “뭐든지 잘 먹고 빨리빨리 예쁘게 클게요.” 그런 아이들이 몇 이나 되겠습니까? “엄마, 이건 고기라서 싫어. 인스턴트 식품 주세요. 난 시금치는 먹지 않을래.” 그러면서 아이들이 투정을 부립니다. 때로는 회초리로 때립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엄마는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한 숟가락씩 먹입니다. 때로는 야단을 치고 때로는 사정을 합니다. 그리고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밥을 줍니다. “넌 먹기 싫지만 이것은 몸에 꼭 필요해. 이 시금치 한 숟가락 먹으면 장난감 사 줄게. 이 밥을 다 먹으면 동물원에 데려갈게.” 여러분은 그렇게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나쁜 계모입니다.
목회도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를 할 때 저쪽 한 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눈물로 기다리는 성도가 있습니다. 목회하기 너무 쉽습니다. 설교를 잘 준비해서 설교를 합니다. 정신이 집중해서 깨닫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죄를 회개합니다. 남편과 화해하라고 하니 가서 용서를 빕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잡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 없다고 생각 합니다. 내 인생의 상황은 너무 독특하고 말씀은 너무 일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예배나 드려서는 해결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맞춤식으로 개인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따위로 하려면 너는 교회를 떠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목회는 사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섬기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자와 같은 성도만 섬기도록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성도도 섬기고 때로는 도둑 같은 신자도 섬겨야 합니다. 심지어는 불신자도 그 속에 섞여 있습니다. 예를 갖추어서 그를 섬겨야 합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돌아다니면서 여러분을 욕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의를 갖추어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미워해도 여러분은 눈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마지막 목표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렇게 기다리고 사랑해야만 그 사람이 온전하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있어서 온전해진다는 것입니까? 헌금을 하고 목회자를 공경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포함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모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 아이를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기를 자를 수 없어. 이 아이의 왼쪽 다리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다리로 만들 거야. 털이 많이 난 축구선수의 다리처럼 만들 거야.” 그런 부모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공할 수도 없지만 성공한다면 자기 자식을 장애인으로 키울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키울 때 바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물론 이 아이가 노숙자가 될 정도로 가난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아이가 아무리 착하다고 할지라도 글자도 읽지 못할 정도로 무지한 아이가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사회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래에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 여자에게 좋은 남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식에게 좋은 아빠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결국 전체적인 그림은 이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그럼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에덴동산에 태어났다면 되었을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하는 모든 사역들은 여기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입니다. 설교, 심방, 교육, 모든 것들이 바로 온전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존재 그 자체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습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이는 내 마음에 합한자라”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뒤따라 오는 사람, 혹은 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때 다윗이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황금으로 집을 지어드렸습니까? 복음을 위해 순교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다윗이었을 뿐입니다. 생각하고, 마음먹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와 거의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2장에서 커다란 사건이 생깁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입니다. 그 때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다윗의 소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하였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합했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온전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비즈니스 센터가 아닙니다. 마치 잡화점처럼 수많은 것을 늘어놓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잡으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마케팅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훈련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성장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이 양복을 입든, 거적데기를 걸치든 그 사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이 그들의 마음 깊이 들어가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어야 합니다. 상담은 그것을 돕는 일이어야 합니다. 심방은 정말 그렇게 변화되고 있는 지를 확인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교육은 어떻게 거기에 이를 수 있는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내가 이런 사람이 되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비는 행위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회의 현장은 어떻습니까? 저는 학교의 강단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함께 30년이 넘게 목회자로 살아온 사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목회를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예화를 드림으로 첫 번째 강의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중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거기에서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와 함께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열심히 중국으로 돌진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김 목사님, 더 이상 선교사를 우리에게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선교사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여러분이 우리를 전도했지만 이제는 우리도 우리를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에게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훨씬 쉽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습니다. “돈도 보내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도 많이 나아져 갑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습니다. “목회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중국이 가지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이것입니다. 목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화혁명으로 목회자들이 모두 처형당하거나 추방당했습니다. 교회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교회의 제도나 질서 같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만나면 교회 마다 색깔이 다 다릅니다. 어느 교회는 공산주의 사상이 지배합니다. 목사님을 향해서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어이, 형제”라고 부르는 교회도 보았습니다. 실제로 최근에 어떤 교회에서는 평신도가 당회장이 되겠다고 하는 교회도 보았습니다. “목사, 너는 우리가 월급을 주는 고용인 일뿐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교회는 목회자가 왕입니다. 왕이 아니라 황제입니다. 돈도 자기 주머니에 넣고 혼자서 씁니다. 교인들은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교회에 수천 명씩 모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를 믿을 수 있습니까? 자기를 믿는 그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속을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목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 현장과 신학교, 양 쪽에서 3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60여 권의 책을 썼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신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쳐도 결코 거기에서 좋은 목회자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비유를 하면 됩니다. 어떤 조각가 있습니다. 기가 막힌 솜씨로 조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려진 나무가 아주 질이 나쁜 나무입니다. 그러면 비교적 좋은 작품은 나오지만 최고의 작품은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좋은 나무가 있는데 조각가의 솜씨가 나쁘면 그것도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신학교의 선생님들은 조각가입니다. 그러나 그 원목은 신학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학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신도 시절에 거기, 내가 앉아 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진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자기가 외치는 진리대로 살려고 몸부림 쳤는지를 봅니다. 거기에서 깨뜨려지는 목회자를 만납니다. 눈물을 보고, 사랑을 보고, 결단을 보고, 용기와 신앙을 보고, 거기에서 설교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배웁니다. 삶 전체에 무게를 실은 설교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3학점짜리 강의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목양의 관계를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학생이 신학교에 들어 올 때 최상의 선생님을 만나면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신학교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양이 왜 그렇게 중요한 주제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도대체 목회자로서의 소명과 풍성한 삶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 한 절을 보았으면 좋겠습니까? 마태복음 9장 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3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종종 젊은 사람들은 저에게 목회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무엇을 보고 목회의 소명이 온 것을 확인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환경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소명은 그런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을 여러 번 떨어졌기 때문에 신학교를 갈 수밖에 없었던 것,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이런 저런 사업을 해서 계속 실패하고 회사에서 잘렸기 때문에 이것이 신학교에 가라는 하나님의 뜻이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목회자의 길을 가게 하실 때 그런 환경들을 사용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소명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그 앞에는 예수님의 3대사역이 나옵니다. 가르치고, 치유하고, 선포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설교로 공중적인 선포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목회자의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복음을 전한다는 이야기가 크게 두 가지 희랍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케류쏘’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퍼블릭(public), 공중적인 선포를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평신도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데반 같은 사람은 평신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특별히 설교자의 소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희랍어 단어가 있습니다. ‘유앙게로니아조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포 행위와 관련되어서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이 수군수군하면서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공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우물가의 여인들이 모여서 궁시렁 거리는 것처럼 그렇게 말입니다. 이것은 평신도의 몫입니다. 이런 구분을 분명히 합시다. 그러면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 목회자의 사명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고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치유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도 사람들을 치료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권위와 능력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의 응답으로서 이런 일들을 합니다. 당시의 기적을 필요로 하던 많은 질병들을 이제 의학적으로 고칠 수 있습니다. 이적적인 치료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어떤 한 사람에게 줄곧 따라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그 증거가 바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가 복수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 치료는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육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정신에 대한 치료로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정확히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사랑의 사람이어야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고생하는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저 고생하는 것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자기가 원래 나쁜 사람이라서 저렇게 살아가는 거야. 내버려 둬. 그건 그 사람의 운명이야." 목회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그 사람의 엄마 아빠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마음으로, 꺼져가는 심지의 불꽃을 끄지 않는 마음으로 돌보고 사랑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의 지식뿐만 아니라 심리학의 지식도 필요합니다. 의학의 치료도 필요할 것입니다.
선교지에 강의를 하러 갔습니다. 시니어선교사님의 사모님이 저를 보고 개인 상담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싫었습니다. 무슨 사역자의 아내를 또 다른 사역자가 상담을 한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피해 다녔습니다. 호텔방에 누워서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왜 나를 안 만나줍니까? 지금 그 방으로 가겠습니다." 싫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내려왔습니다. 구석에 앉아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상합니다. 목사님은 영적으로 지식이 있으니까 저를 좀 판단해 주십시오. 20살에 선교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무슬림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눈물로 전도하고 열렬히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상합니다. 왜 그런지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왜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지옥을 만드셨을까? 사랑의 하나님이 그냥 좀 구원해 주시지 왜 이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을 이렇게 고생을 시키실까? 좋으신 분이시라며 왜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하실까?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재미가 없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았다는 데도 다 시시합니다. 그래서 가끔 텔레비전을 봅니다. 그러면 남편이 들어와서 말합니다.” "선교사 부인이 잘 하고 있다." "목사님, 저 이상한 사람이 된 거지요? 영적으로 제가 잘못된 것이지요?" 제가 한 마디로 한칼에 내리쳤습니다. "아니요.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설교자들이 신학만 공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신경전달물질이 제때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알약 하나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을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게 바로 치료입니다. 그렇게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눈물로 엄마처럼 기다려주는 게 목회입니다. 여러분이 종종 아이를 키울 때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엄마, 미워 나빠." 그리고 막 엄마를 때립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함께 싸울 거야." 가슴에 끌어안습니다. 한참 지나고 나면 아이의 움직임이 멈춥니다. 그게 치료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런 마음으로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힘듭니다. 우리 자신의 인생의 무게도 감당할 수 없는데 수없는 사람들의 무게를 함께 집니다. 그래서 아무나 안 가는 길입니다. 그게 바로 치료의 개념입니다.
그 다음에 가르침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있을 때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모였을 때는 가르치셨습니다. 자기들끼리 모였을 때 제자들은 물었습니다. "예수님, 솔직히 아까 한 설교가 이해가 안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저는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질문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묻습니다. 예수님이 찬찬히 잘 논리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설교를 너무 많이 믿지 마십시오. 불을 토하듯 설교해도 이해하기 전 까지는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모두 강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한 세기에 한 두 사람 나올만한 위대한 설교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차근차근히 가르쳐야 합니다. 때로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때로는 걱정하는 듯한 인상으로, '너 이놈' 하는 책망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일을 천사에게 안 맡기셨습니다. 목회자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니 목회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까? 목회자는 탁월한 교사이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설교에 은사가 없어." "나는 가르치는 데에 은사가 없어." "내 은사는 사업이야." 물론 사람마다 은사의 크기가 다릅니다. 여러분이 전도한다고 해서 모두 무디 같이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사명과 은사는 다른 것입니다. 사명은 은사의 크기 여부에 따라서 유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걸어가라는 길인데 내가 걸을 수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야 합니다. 이것을 안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3대 사역이었습니다. 선포하고, 치료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무리를 보셨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이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희랍어 '오라오'라는 단어의 현재분사형사입니다. 희랍어에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성경의 대표적인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브랙포'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사이트'(sight)로서 어떤 광경을,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시력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라오'는 그런 의미도 있지만 좀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떤 사물의 배후를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사람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이놈, 내가 네 마음을 안다." 무엇을 본 것입니까? 옷을 보았습니까? 돈을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 마음속을 본 것입니다. 그게 어떤 행동과 누적된 사실들을 통해서 발각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오라오'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그것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민망히 여기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여기 '민망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것은 문화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에스프랑크니스데'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입니다. 이것은 원래 'be moved to one's bowe',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각 나라와 민족마다 영혼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등 뒤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콩고 사람들은 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창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너무 슬픈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뭐라고 표현합니까? '단장(斷腸)의 슬픔'이라고 말합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프랑크니스데'라고 하는 단어는 어떤 슬픔 때문에 그 사람의 밑바닥의 영혼이 받는 심오한 고통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예수님만 이것을 느끼셨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목회의 소명을 받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요즘 경기도 안 좋은데 목회를 하면 그래도 월급이 제대로 나오겠니?" 그렇게 생각합니까? "다른 회사에 들어가 봐야 50세면 퇴직해야 하는데 그래도 목회자는 평생 할 수 있잖아." 그렇게 생각합니까? 솔직히 말해서 목회의 소명은 교회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목회의 비전이 무엇이냐고 물어봅니다. 제가 별로 싫어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목회의 비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비전을 부서 버리는 데서 나오는 파괴적 비전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전이 파괴되는 것이 비전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살아갑니다. 그러다 언젠가 어떤 계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슨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야 했을까 생각합니다. 그의 끔찍한 고난당하심이 나의 죄 때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고백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맨 처음 구원받을 때의 그 회심의 체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만 그것이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오늘 아침에도 그런 회심의 반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정말 비참한 인간이구나."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될 사람들은 이런 체험이 아주 강력하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와 부활의 사실들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결국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가 없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저주의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하는 것을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원의 신학적인 의미가 그의 모든 지성을 압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자기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당신의 분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들은 왜 그런 식으로 합니까?" 그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그 마음으로 눈물 흘리며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그 마음으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망가진 사람들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외인? 1.25)이 아닙니다. 그냥 죄인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 사람도 여전히 매일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신앙에 이미 도달한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압도하는 슬픔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제쳐놓고 다른 일을 할 때는 만족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이 슬픔을 외면하고 살아가면 어떤 저주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강제력입니다. 무서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을 향해서 사도 바울 마음속에 있었던 운명적인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자기도 어떻게 끊어버릴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우리 한번 솔직히 말해봅시다. 우리의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우리의 가르침을 듣고 깨뜨려지는 성도가 있습니까? 있다고 칩시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사람을 회심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발람 선지자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우리의 관심사는 너무나 외적입니다. 과시적입니다. 더 큰 교회, 더 큰 사업, 더 많은 지지자들, 더 많은 존경, 더 높은 지위, 그러나 이것은 예루살렘의 가치가 아닙니다. 바벨론의 가치입니다. 그런 다른 가치를 인식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목양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을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교회는 예루살렘의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높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유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빛은 빛일 뿐입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의 가치는 드러납니다. 가장 세속적일 때 교회는 거룩함에 요청받습니다. 그런 삶이,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풍성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수많은 삶의 사태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궁핍한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돈이 없어서 궁핍해집니다. 건강을 잃어버려서 궁핍해 집니다. 지위를 잃어버림으로 하찮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승리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습니까? 주님의 도움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말입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말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풍성한 삶의 모두는 아닙니다.
이 풍성한 삶은 정확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철저하게 진리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여러분을 향한 성도의 인상이 무엇일까요? 무게 잡는 어른, 이런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감독자. 오히려 목회자는 이런 인상을 주어야 합니다. "아, 저 사람은 진리의 사람, 진리가 요구하면 죽을 수 있는 사람, 우리 모두가 다 원해도 진리가 시키지 않으면 거절할 사람" 그것이 목회자의 인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스펄젼이 메트로폴리탄에서 테버네클 쳐치를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그의 교회는 원형으로 된 커다란 돔(dome)이었습니다. 모양이 체육관처럼 생겼습니다. 도시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저 건물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고딕 양식의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방문자들이 그곳 주민에게 물어봅니다. "저 건물이 뭐하는 곳입니까?" 질문을 받은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불신자가 방문객에게 대답합니다. “저기는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이것이 목회자가 주어야 할 인상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풍성한 삶이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과 진리는 하나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성령이 계시고 성령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진리가 진리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목회자들은 열렬히 자신의 설교에 기름을 부어주시도록 진리의 성령을 구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풍성한 삶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한 목회자로서 저도 35년이 되는 목회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항상 좋은 날만 있었을까요? 창창 콰일르어(常常快乐)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움도 있습니다. 아주 작은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면 큰 어려움으로 다가옵니다. 큰 어려움이 왔습니다. 내가 풍성한 삶을 삽니다. 성경을 펼 때마다 신학을 공부할 때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비췹니다. 성령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기쁨이 주어집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그리고는 그 슬픔과 상관없는 압도하는 기쁨이 영혼에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렇게 하면서 또 한 고비를 넘어갑니다.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면서. 이게 바로 목회자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런 목양의 원리를 깨우치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충만해 집시다. 그 풍족한 삶을 누립시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저 설교를 따라 예수 믿을 때 저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그것을 보여줍시다. 감사합니다.
(답변 1)
그것은 원리와 실천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교회도 결국은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제도가 필요합니다. 심지어는 경영의 원리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구조적 건축의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요소가 하드웨어입니다. 이런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설교를 훌륭하게 해도 화단 옆에서 매주 모인다면, 그럴 때에 바른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드웨어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소프트웨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어떻게 가르치고 양육해야 할까?" "교회의 어떤 조직이 비효율이고 예산을 낭비하게 하는가?" 이런 등등의 것들을 앞서 한 교회를 보면서 끊임없이 개선하는 것은 바벨론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혜의 문제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제가 만든 단어입니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마지막 세 번째는 스피릿웨어(spiritware)입니다.
그럼 스피릿웨어는 무엇일까요? 하드웨어는 손으로 만져지는 것입니다. 소프트웨어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피릿웨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 예배당에 와서 앉았는데 눈물이 흐릅니다. 설교가 비수같이 마음에 꽂힙니다. 죄인은 회개합니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어머니의 손길처럼 느껴집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왜 그런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의 넥타이 색깔 때문이었을까요? 마이크 성능 때문이었을까요? 설명을 못합니다. 그것이 스피릿웨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성경적인 원리를 실제의 이익과 바꾸는 것입니다. 정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심으로 회심하는 것과 큰 교회가 되는 것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많은 목회자들은 큰 교회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별로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인이 모여야 교회가 됩니다. 교인이 세 명이 모여 있는데 설교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교인들의 숫자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별로 설득력 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교회가 성장한 것은 세속적인 가치를 따랐기 때문이고, 자기가 성장하지 못한 것은 너무 성경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착각일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떤 성경적인 목양의 원리를 실제적인 이익과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기 가치입니다. 원리에 충실하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그 원리에 붙들려 있게 하십시오.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답변 2)
한국에는 그런 문제가 별로 없습니다.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뭐라고 상세하게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면 실질적으로 목양이 불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우리 교회에도 여러 언어를 가진 민족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통역을 하거나 또 다른 자기들만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영혼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답변 3)
한국교회에 기독교 인구가 30% 나 된다고 하는 것은 좀 과장된 것입니다. 교회에 등록한 모든 수를 합해도 아마 그렇게까지는 안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정말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를 계산한다면 훨씬 절반도 안 되는 프로테이지를 가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는 아주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국교회에 신학적인 입장이나 상태가 워낙 층차(層差)가 넓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바벨론의 가치를 따라 가느냐 안 가느냐 이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국이 기독교를 열렬히 받아들일 때의 국민소득 수준이 한 300불에서 5천불 사이였습니다. 만 불될 때까지도 기독교의 교세의 확장이 상당히 활발했다고 봅니다. 지금 3만 불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가장 번화한 도시의 소비수준은 이미 12만 불을 넘어섰습니다. 선교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한 시대의 교회가 아무리 훌륭해도 이렇게 부유해 지게 되면 종교적인 무관심이 널리 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도 예전에 비해서 많이 약화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아주 세속적인 방법을 도입하는 교회들도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세계 수십 개국을 돌아다녀보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나라는 아직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좋은 상태들이 계속 개선을 하고 아름답게 될 것이냐 라는 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고민거리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어떤 교회들을 여러분이 배우고자 할 경우에는 성공의 열매만 보지 말고 신학적인 검증이나 이런 것들도 함께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 1.54) 형편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결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은 한국교회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답변 4)
아주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정당의 후보가 나왔다고 해서 공동체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어리석을 일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항상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절대 그런 의견을 표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적으로 우리는 이러이러한 후보였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견해는 교회가 가지고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기독교의 가치에 정면 적으로 위배되는 정책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는 정치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견해를 갖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교회의 조직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저희 교회에 가끔 정치인들이 방문을 합니다. 때로는 아주 거물급 정치인이 옵니다. 그들을 소개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소개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야당이고 어떤 사람은 여당 견해를 좋아합니다. 저는 어느 쪽이든지 맘에 안 들면 부딪치는 성향입니다. 그러니까 양쪽 다 저를 싫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어느 날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높은 정치인이 전화를 합니다. "우리 의원님이 주일 예배를 거기서 드리고 싶어 하십니다." "드리십시오." "그런데 인사를 좀 하게 해 주십시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 사람이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안 와도 된다.' 이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했습니다. "저를 인사시켜 주십시오." "안 됩니다. 그 대신 기다려 보십시오." "자, 오늘 처음 나오신 분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사람들이 손을 듭니다. "자, 일어나세요. 정말 많이 오셨네요. 저기 국회의원도 오셨네요. 우리 박수칩시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까지는 타협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입각한 확고한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모두 똑같은 견해에 도달할 수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대한 양심과 신앙이 허락하는 데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환경, 동성애, 이런 것들에 관한 논란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원자력발전소 같은 것들을 비롯해서 말입니다. 그런 견해를 갖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투표할 때 자기한테 맞는 사람을 찍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견해는 무엇입니까? 저는 원자력 반대주의자입니다. 동성애 반대합니다. 경제발전보다는 환경 보호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