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1
녹취자: 김경애
제9장은 창조에 대해서 다룹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첫 시간에 우리들이 공부할 때……. 우리 기도는 했습니까? 진행하겠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나오기 전에 무슨 교리가 나왔습니까? 또 까먹으셨습니다. 처음부터 하겠습니다.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입을 크게 벌리면서 활발하게 이야기하십시오. 다시 밑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마지막에 종말론, 교회론, 구원론, 기독론, 인간론, 신론, 서론입니다. 서론에서는 3가지 주제를 다루었는데 종교, 계시, 성경을 다루었습니다.
그 다음 커다란 주제인 두 번째 교리가 하나님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교리 하나님론, 혹은 신론은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하나님은 무엇 혹은 누구이신가?’ 가 나오고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나?’ 1부가 지난 시간으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본질, 속성이 나오는데 그 전에 하나님의 존함이 나오고 본질과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이번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제일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창조입니다. 왜냐하면 창조하지 않으셨으면 당신과 관계를 맺을 사물이나 사람이 존재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창조는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창조 그러면 만날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이런 이야기나 하고 앉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교리 중에 지극히 한 부분일 뿐이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창조가 모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을 알 수 있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모릅니다. 혹시 실존하지 않는 것을 우리들이 상상으로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존재가 던져준 질문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어렵습니까? 반응이 없습니까? 활기차게 대답하십시오. 똑같이 다시 말하겠습니다. 창조가 중요한 이유는 창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고 아무것도 없었으면 하나님은 그것들과 관계를 맺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조금 낫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해서 창조라는 베이스가 있으니까 그 위에 구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 1절이 있으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와 구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렇게 훌륭한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그리고 자율적인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타락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창조가 어떻게 됩니까? 창조가 있었고,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타락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당연히 구원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어린이 여러분’ 그러면 병아리들이 ‘네!’ 그럽니다. 무엇을 시키면 ‘저요, 저요’ 합니다. 우리 해봅시다. 정신의학자가 이야기하는데 가짜로 웃어도 그 웃음의 효과의 50%가 인체에 영향을 미친답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웃는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루에 두 번씩 펑펑 울어야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은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 그리고 하루에 두 번씩은 너무 뱃살을 잡고 웃을 수 있다면 훨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트가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 다음에 무엇이 옵니까? 무엇이 옵니까? 이것은 완성입니다. 그래서 창조, 타락, 구원, 마지막으로 완성 이렇게 해서 성경의 대 드라마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를 보겠습니다. 당연히 창조는 신론에서 다룰 것입니다. 두 번째 타락은 어디서 다룹니까? 당연히 인간론에서 다룹니다. 구원론은 어디에서 다룹니까? 여러분들은 이 46기까지 공부했던 교리반 학생들 중 가장 총명합니다. 저는 매 기수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다음에 창조가 나옵니다. 먼저 첫줄에 목적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영광이라는 것은 분류하면 세 가지로 나뉘지만 기본적으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영광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두 번째 하나님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지를 세계에 빛처럼 비추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만 그 영광의 목적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산필름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삼각산 꼭대기에 해놓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 영화가 얼마나 감동적이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영광은 나타낸다고 할 때 나타내는 것을 인식하는 인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적이고 그 다음에 창조의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가 나오는데 기존 물질을 전혀 사용하지 않거나 혹은 이미 있지만 불충분한 물질로부터 만물을 산출해내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Definition 정의입니다. 정의는 어떻다고 했습니까? 시험에 꼭 나온다고 했습니다. 두 줄을 사역이라고 써놓고 두 줄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기존 물질을 사용하지 않거나 본질상 불충분한 물질로부터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산출하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창조는 삼위일체의 사역입니다. 이것은 이미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써 이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이때에 성부가 주도적으로 창조의 계획을 세우셨지만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이 세워지고,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창조가 이루어지고, 성령 하나님 안에서 세계가 창조됨으로써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전치사를 외워두면 좋습니다. By는 성부에 의해, Through는 성자를 통해, In은 성령을 통해서 이 세계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창조의 목적이 정해지고 그리고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인간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마지막 종말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커다란 구조 속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이 속에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간섭을 받으며 자유를 행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이것이 바로 세계의 역사입니다.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는 인간이 행복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이기적이신 것이 아닌가? 어떻게 자기가 창조해 놓으시고 자기만 영광을 받으시고 그러면 우리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질서가 깨집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선하였다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 안에서 우리들이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겪지 아니하였을 많은 고통들을 겪습니다. 그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만약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세계를 통해 인간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과 인간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결코 나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위치 안에서 인간은 가장 완벽한 행복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서로 찢어져서 서로 배치되는 목적인 것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들어왔고 인간은 하나님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여기고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최고의 행복이 자신의 만족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개가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의하셔야할 것은 여기서 행복이 아니라고 할 때 이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행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쾌락과 쾌락의 추구는 무엇 때문에 오는 것입니까? 자신이 한없이 즐거워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것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나는 행복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배치를 이루면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꼭 부탁하는데 도덕적 통치에 보면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Chapter가 있는데 약 50페이지 정도 되는데 그 책이 솔직히 어렵기는 합니다. 6개월 동안 썼는데 밤잠도 자지 않고 진짜 열심히 썼는데 그 책을 쓰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책을 섭렵하면서 그 책을 썼는데 잘 안 팔렸습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어려운 대신에 소화를 하면 갑자기 똑딱선에서 커다란 여객선을 갈아탄 느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아귀가 딱 맞으면서 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시고 도서관에서 너무 빨리 빌려가서 없으면 서점에서 한권 사십시오. 본 다음에 또 팔면 됩니다. 둘이 가부시끼로 사서 반씩 반씩 돌려보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진짜 이것을 읽어보아도 무슨 이야기인지 철학도 많이 나오고 어렵다고 생각이 들면 홈피에서 세미나를 치고 들어가면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한 8개의 설교와 한 번의 세미나가 나옵니다. 그 세미나는 총신대학 일반대학원 학생들이 우리교회를 모두 방문했을 때 제가 작심하고 100분 동안 강의한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메모하면서 듣고 그리고 천지창조의 목적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러면 아마 왜 이 세상이 존재하고 나 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더 깊은 것을 보고 싶어 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제8권 천지창조의 목적을 여러분들이 읽어보시면 됩니다. 영어가 능하신 분들은 원서를 보시고 좀 짧아서 한글로 보셔야할 분들은 번역본으로 보십시오. 번역본이 원본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읽을 수 있을 정도니까 공부하십시오. ‘뭐 이렇게 해야 할 것이 많나?’ 그러시던데 세상사가 다 그렇습니다. 하다못해 화장만 예쁘게 하는 사람들이 일인 방송으로 유투브에 올려도 그 사람의 화장은 절차와 계획과 방법 자체가 일반인 우리 아줌마들이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니까 효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어떻게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이 세상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은 결국은 내가 있는 사회의 목적과 나뉠 수 없고, 내가 있는 사회의 목적은 시대를 관통하는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것은 결국 천지 전체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관통하는 원대한 계획과 맞닿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고민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나는 현학자가 아닙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를 무슨 허장성세나 지식으로 우리를 내몬다고 생각하지 말고 기본적으로 여러분들이 자동차 하나를 사도 매뉴얼이 이렇게 두껍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동차가 수천만대를 합해 놓아도 따라갈 수 없는 여러분 자신이 60년을 살았는데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를 정도로 복잡한 인간입니다. 그러면 그 매뉴얼이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너무 힘들다고 어렵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탐구해야 합니다. 반드시 여러분들의 생각이 똑딱선을 타면 어떻습니까? 미친 듯이 출렁거립니다. 항공모함을 타면 어떻습니까? 그 정도는 까딱없습니다. 파도를 타고 출렁대는 것이 아니라 웬만한 파도는 파도를 찢으면서 수평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신앙이 이리저리 호떡 굽듯이 요동칩니다. 오늘 은혜 받고 다음 주에 또 죄를 짓고 그 다음 주에는 회개하지 않고 이러면서 요동칩니다. 그런 것을 계속하면서 들어가는 막대한 에너지는 그까짓 설교 몇 편을 듣고 책 한 권 정신 바짝 차려서 읽는 것에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서 그 에너지가 고갈되면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머리를 주신 것은 균형을 잡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배우고,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전부 다 해결되었습니다. 설명하면 무지하게 길지만 오늘 잊지말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그 안에서 인간은 가장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음, 이것은 이원론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이렇게 씁니다. 이것은 원리가 두 개다. 혹은 근본이 두 개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이원론은 하나님과 물질이 모두 영원한 것이라고 봅니다. 신과 물질세계는 신에 의해 물질세계가 창조되거나 물질세계에 의해서 신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영원 속에서 둘은 스스로 자존하여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물질이 창조되고 이 물질이 다양한 요소로 결합하면서 우주와 이 모든 세계의 사물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마지막에 완전히 분해되고 나면 죽고 나면 7년이면 다 썩어서 살은 없어집니다. 뼈만 남습니다. 더 세월이 지나면 뼈도 상하기 시작하는데 생각보다 뼈는 오래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 년 전의 유골도 발견되고 심지어 이천년, 이천오백 년 전에 혹은 삼천년 전의 유골들이 발견됩니다. 심지어는 얼음 속에 있었던 맞는지는 모르지만 이십만 년, 삼십만 년 전의 사람들의 유골들도 발견됩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결국 마지막에는 다 소멸하여 없어집니다. 없어지면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마지막 환원하는 것이 원소입니다. 원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이 머리카락의 한 원소는 옛날에 이순신 장군의 몸을 구성하고 있었던 원소일 수도 있고 그리고 백 년 전에 죽은 어느 동네의 다람쥐가 해체된 원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되느냐 하면 두 영원 자가 병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가 영원하면 또 다른 하나는 그 영원한 것에 의존되어 있을 수밖에 없지 만약에 두 영원 자가 영원히 병존한다면 둘 중의 어느 하나도 영원한 것일 수 없다는 논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물질이라는 것 자체가 구성과 배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H는 수소, O는 산소 중간에 두 분자가 들어가면 물이 됩니다. 그다음에 O가 떨어져 나가고 H가 3개가 되면 헬륨이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그 물질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이 결합하고 배열되느냐에 따라서 다른 사물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물질들은 구성요소가 합해졌기 때문에 그 구성요소는 어떤 힘이 그것을 응집하는 힘이 사라지고 나면 해체됩니다. 해체되면 그 물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결합하면 또 다른 물질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물질은 어떤 식으로든지 자존, 우리가 하나님의 자존성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어떤 사물도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유출설입니다. 만약에 이원론이 원래부터 물질과 신이 양립하여 있었다고 한다면 유출설은 물동이 위에 물을 가득 부으면 물이 꽉 찹니다. 차면 어떻게 됩니까? 밖으로 넘쳐흐릅니다. 그렇게 넘쳐 흘러나온 것이 세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사고는 다분히 플라톤에서 착상한 사고입니다. 플라톤은 바로 이 세계가 일자의 충만함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일자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인 존재입니다. 희랍어로 ‘토온’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에는 쉽게 말하면 절대자인 신이 넘쳐흘러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비의지적인 것입니다. 신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성이 넘쳐나서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세계와 하나님이 완전히 똑같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론적인 연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성경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세계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그 대신 신이신 하나님이 창조된 세계에 대해서 관계를 갖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그야말로 관계이지 존재론적인 한 덩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유출설에서는 이렇게 보면 이 세계가 하나님의 신성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성이 보이는 물질화하여 밖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신과 세계는 한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한 덩어리가 돼서 이런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하면 신도 모르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신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신의 신이 되어가는 것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도 끊임없이 이 물질세계 그리고 인류와 함께 진화하면서 모르는 것을 배워가고 불완전한 신이 완전해져 가고 인간이 완전해져 가는 것만큼 신도 자신 안에서 완전해져 가고 이렇게 해서 한 덩어리의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금도 이런 것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이것이 스피노자적인 세계관이고 그리고 지금은 변형된 형태로 나오지만 그러나 소위 과정철학이라고 해서 이런 불완전한 세상에서 ‘왜 이렇게 많은 악이 있는가?’ 그리고 ‘세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이런 것을 이런 유출론으로 설명해서 끊임없이 인간이 스스로 주도적으로 세계를 바꾸어 나가고 세계를 선하게 만들어 가면서 신도 함께 인간의 운명에 참여하며 되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미 여러분들이 자주 즐겨 읽는 유발하라리나 이런 사람들의 이론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신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결국은 신이라는 것이고 신이 있지만 신은 상종하는 것이고 인간 그 자체가 신의 운명을 만들어 가고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관입니다. 신관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도 변화하고 성장하고 발전한다. 하나님의 자기결정 능력과 인간의 자유, 도덕적 책임 같은 것들을 이 이론에 따르면 박탈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이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악이 있는 것도 결국 신이 아직 약간 덜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철이 더 들고 성숙해 나가면 이 세계도 함께 좋아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전적인 타자로서 세계가 있고 그리고 세계와 하나님은 관계를 맺는다는 이 기본적인 성경의 신론의 가르침에 전면적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모르니까 소설이나 재미있는 이야기의 형태로 파고 들어오면 엄청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성경과는 다른 이상한 신앙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뼈대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원론, 하나는 유출론, 하나는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귀가 닳도록 들었을 테니까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 시간에 진화론을 일일이 제시하면서 비판하는 것을 한 학기를 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논쟁의 장이 될 것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이 세계는 창조된 것이냐 아니면 영원한 것이냐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화라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진화론이 있고 인정하지 않는 진화론이 있습니다. 전자를 ‘유신론적인 진화론’ 후자는 ‘무신론적인 진화론’이라고 봅니다. 무신론은 신 같은 것은 없고 물질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를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은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질문이기 때문에 대답해봐야 참된 것일 수 없고 참되다는 것을 입증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논외로 하고 주어진 이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하는 그것이 끊임없는 진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단백질로부터 합성되고 단세포 생물들이 생겨나고 유기체가 되고 생물들이 생겨나고 그것이 분화하면서 점점 고등한 것들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진화를 완벽하게 부인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이 종들은 자기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천합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최근 한 60년, 70년 사이에 북극곰 개체의 평균 무게가 수십 킬로가 줄었습니다. 그것이 한두 마리의 상황이 아니라 모든 북극곰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온난화가 되면서 잡아먹을 수 있는 포식자로서 먹을 수 있는 개체수가 극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몸집을 유지하면 어떻게 됩니까? 계속 먹어야합니다. 여러분들도 부자로 살다가 가난해지면 차부터 팔거나 차부터 바꾸지 않습니까? 왜? 승차감도 좋은데 기름 값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5㎞에 1리터씩 들어간다면 요즘 같은 때에 월급을 타서 다 집어넣을 정도밖에 안되니까 줄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료를 줄이는 것입니다. 다른 종처럼 보이는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그냥 나무는 나무로서 처음부터 창조 되었고, 소는 소로 처음부터 창조 되었고, 원숭이는 처음부터 원숭이로 창조 되었고, 사람은 처음부터 그냥 사람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다르게 창조 되었는데 하나의 종 안에서 환경과 계속 그 개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라는 요인들에 의해서 이것들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스팔라고스에서 다윈이 발견했던 그런 것도 우리들이 해석할 때 그것이 종을 뛰어넘는 진화가 아니라 종 안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원숭이가 변해서 사람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돼지가 변해서 소가 되었다든지 하면 지금 현재 결정되어 있는 종 말고 이 사이에 과정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이 나와야 합니다. 화석이나 그것을 증거하는 것들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들은 수억 년이 지났는데도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면서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 진화가 대진화가 아니라 종 안에서의 진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창조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설명한 것은 물질세계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영적세계입니다. 영적세계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천사들이 있습니다. 천사는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들로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천사에 대해서는 성경이 아주 많은 가르침을 주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수호천사라는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한 사람에게 한 천사가 있어서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세계의 천사들이 있고 이 지상세계에서 인간이 창조되면 그 하나당 하나씩 짝을 지워주어서 그 천사가 그 사람을 지킨다는 것이 수호천사 이론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그것을 암시하는 구절도 나옵니다. 내가 그 아이들의 천사가 있다. 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이렇게 합니다. 그런 것을 확정하기에는 너무 정보가 적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만약에 이렇게 수호천사가 있다고 할 때 그것도 그렇습니다. 천사는 죽지 않는데 이 아이가 태어났다가 갓난아기 때 죽어버리면 그러면 이 아이를 만나서 수호천사라는 직업을 얻었는데 졸지에 실직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또 무엇을 합니까? 이런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샴쌍둥이처럼 두 개체가 함께 태어났을 때는 그것은 도대체 그 천사는 둘이 수호하는 것인가 하나가 수호하는 것인가 이런 복잡한 문제들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세 가지 사실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천사들의 존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인격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인간과 관계를 맺고, 천사들끼리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교통하는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Proof Text 증거 성경구절은 옆에 실었습니다. 천사들은 우수한 영적인 존재이며 비가시적이다. 천사가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어떤 매개체를 사용해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럴만한 목적이 있을 경우에 그렇게 합니다. 세 번째는 어떤 천사들은 선하고 거룩하고 선택을 받았지만 나머지 천사는 그들 본래의 위치에서 떨어져 나와서 타락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가르쳤던 이론은 가브리엘이라는 천사장이 있고, 미카엘이라는 천사장이 있고, 루시퍼라는 천사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출납하는 그런 승정원의 도승지 같은 위치에 있고 미카엘은 전사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천사들을 이끌고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우두머리입니다. 이에 비해서 루시퍼라는 존재가 있었는데 이 루시퍼가 타락해서 천사들을 이끌고 그가 사탄이 되고 종말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대적하는 자로 나타나는데 사탄이라는 말 자체가 히브리말도 대적한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우리들이 너무나 아주 충분한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모든 이론을 정립하고 특히 루시퍼에 관한 것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성경학자들 사이에 아직 부족하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명백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있고, 천사들이 영적 존재이고, 천사들이 어떤 천사는 선하고 어떤 천사는 악하다. 여기까지만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마귀들과 싸울지라.’ 고 이야기하는데 마귀는 복수일수 없습니다. 마귀는 단수입니다. 나머지는 귀신들이나 혹은 악한 천사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탄의 번역이 마귀로 되었는데 하나입니다. 천사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그리고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고, 신자들을 지키고, 하나님의 교회 안에 계심이 아니라 있음입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전달하고, 축복을 전달하고, 대적들에게 심판을 집행함, 이런 것들이 천사들이 하는 일입니다. 과연 나의 수호천사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은 대게 회의적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합니다. 가톨릭에서 그런 것을 많이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천사의 계급입니다. 천사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급과 위엄의 차이가 있어서 질서가 주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 그림에 나오는 것은 언약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대로 만든 언약궤인데 이 전체가 순금 약 60㎏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고 이런 것을 자기네들이 보존하고 있다는 나라들도 있으나 그것은 우리들이 믿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 위에 여기를 확대해서 보면 지금 천사가 날개를 쫙 펼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원래는 구름인데 영어로는 ‘체로빔’이라고 하는데 옷 브랜드할 때 ‘체로빔’이라고 나오는 브랜드도 본 것 같습니다. 원래 이것은 그룹에서 옵니다. 즉 ‘케롭’에서 오는데 ‘케루빔’이라고 합니다. 세 글자로 된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옵니다. ‘카라브’라는 뜻은 가까이 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수고 ‘케루빔’의 단수는 ‘케롭’이 될 텐데 이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뜻이 아닐까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속죄소라고 하는데 이것을 덮고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 사이에 있는 그룹들 사이에 계시다고 묘사됨으로 하나님을 옹위하는 천사들로 묘사하고 하나님의 권능, 위엄, 영광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옹위하는 그런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아래에 스랍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세라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늘보좌 주위에서 시중을 들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명령을 준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화해의 목적을 수행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올바로 접근하게 한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았을 때 스랍들 가운데서 소명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임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브리엘은 아까도 설명했지만 이 그림이 엘그레꼬 라는 사람인데 특히 이탈리아에 가보면 우피치 미술관에 가보면 유난히 이 수태고지에 관한 그림이 많습니다. 수태고지는 무엇입니까? 마리아에게 천사가 와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그것을 전달했던 장본인이 가브리엘이었습니다. 뉴스 자체가 엄청난 계시였기 때문에 이 천사장인 가브리엘이 와서 신적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며 해석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 했던 것입니다. 미카엘인데 왜 미카엘이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도 똑같이 다가가다는 히브리말에서 온 것인데 이것은 히브리말은 이렇게 씁니다. 미카엘 이라고 쓰는데 이것은 무엇 무엇처럼 이라고 쓰이고, 미는 누가 Who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Who is one like God?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자’, ‘하나님을 닮은 자가 누구냐’ 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미카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들을 대항해 하나님의 전투를 수행하는 전사로서의 천사장입니다. 그래서 악마와 싸우는 미카엘의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악한 천사들인데 그들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그들의 본래의 위치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천사들에게도 그렇게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가졌었고 타락한 천사들 중에 공인된 우두머리를 가리켜서 사탄 혹은 Satan 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한국말로는 마귀라고 부릅니다. 마귀는 언제나 단수입니다. ‘디아볼로스’ 라는 희랍어단어입니다.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고자 하고 선택받은 자라고 해도 미혹하려고하며 죄인들을 범죄하도록 유혹한다. 이런 부정적인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에 보면 이 마귀도 사탄도 하나님을 대적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정면으로 겨룬다기보다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으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로 성경에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자녀들과 사탄의 대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훌륭하고 나아가서 천사들과의 대치관계에 있는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질세계가 창조된 것과 관련해서 이제 크게 두설로 나뉘는데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는 것을 지금의 정확한 24시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태까지의 보수적인 교회에서 대체적으로 따르는 견해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기서 ‘날’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이렇게 씁니다. 이것을 읽을 때 ‘욤’이라고 읽습니다. 문제는 날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면 24시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욤’의 원래 본래의 의미는 24시간을 가리키는데 그래서 창세기 1장에 아침과 저녁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도 이것은 결국은 24시 하루를 가리키는 것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은 주실 때 하나님이 6일을 창조하고 하루를 쉬신 것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주셨는데 이 안식일은 하루가 아니냐? 그렇다면 결국은 이 ‘욤’은 24시다. 그래서 창세기는 문자 그대로 24시 오늘날의 날로 계산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들이 은혜로운데 해결이 어려운 것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현대과학과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셨을 것입니다. 젊은 지구 창조설이라고 해서 사실은 놀랍게도 이 지구가 창조된 것은 6,000년밖에 안되었다. 해석하는 사람을 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과학적인 증거는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쯤 된다고 보고 지구에서 6000년 전에 인간이 만든 그러한 유적들까지도 발견되는 상황이고 심지어는 문자형태의 기호까지 발견됩니다. 그러면 훨씬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콸콸 생산되는 석유는 오래전에 수많은 짐승들이 죽으면서 그것이 기름으로 변한 것이라고 과학에서는 증명하는데 이렇게 될 경우에는 도대체 6,000년하고 지질학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서로 합의를 볼 수 있는 갭이 아니라 도저히 너는 너 나는 나로 가는 완전히 화합할 수 없는 차이를 빚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성경이 이 ‘욤’을 24시만으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 4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날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하였을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대략이 이러하니라.’ 그러고 하루가 24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긴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아담이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혼자 살아가는 것이 고독하다고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그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서 여자를 만드시고 둘이 사랑에 빠져서 혼인을 하게 하시고 이런 모든 과정들이 과연 24시 그중에서도 밤중에는 동물들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름을 붙일 수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불과 12시간 사이에 일어나는 일인데 그것을 다 구겨 넣을 수 있습니까? 이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고 그렇게 될 수 있다.’ 고 이야기 하겠지만 이런 의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 라고 할 때 이것 자체가 하루가 아닙니다. 저녁부터 아침이니까 말입니다. 아침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 와야 하루입니다. 이것부터가 잘 맞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것은 말이 잘못되었는데 과학증거와 양립이 불가능함. 무엇이? 24시설이 과학의 증거와 양립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고쳐야합니다. 내가 교정을 다 보았는데 놓쳤습니다. 24시설과 과학의 증거가 양립이 불가능하다. 것이 가지고 있는 약점도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그것을 시대라고 본다면 그러면 해와 달과 별이 나오기 전에는 조화를 깨는 사람도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된 다음부터는 24시이고 그 앞에는 길이를 알 수 없는 아주 꽤 긴 지질학적인 연대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별로 많은 사람에게 환영을 받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이 여기서는 시대로, 여기서는 24시로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문학적인 개연성이 맞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사람은 24시로 보고 어떤 사람은 시대로 보는데 같은 개혁주의 안에서도 이 견해는 그냥 서로 교차하는 견해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오히려 시대설을 더 신뢰할만하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뭐라고 나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두 번째 절에는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물위를 운행하시더라.’ 라고 나옵니다. 이제 이것을 그러면 창세기 1장 1절이 나오고 그 다음에 2절이 나오고 3절 이하가 나오는데 이 세 개의 관계가 도대체 무엇이냐가 창세기 1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창세기 1장 1절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창세기 1장 전체의 제목입니다. 그러니까 창조기사 전체의 제목인데 이것이 히브리사람들의 문학의 방식이었습니다. 마치 신문에서 헤드라인이 나오고 그 밑에 기사가 나오듯이 이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글을 쓴 것입니다. 이제 제목이기도 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단순한 제목만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뒤에 나오는 ‘천지’라는 것이 히브리말로 ‘샤마인에뜨하레쯔’ 라고 나오는데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이 세계의 모든 천체라고 보기보다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들을 창조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질료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창세기 전체에서 기록할 내용의 제목을 제시하시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이 이 모든 물질의 구성요소가 될 말하자면 밑 재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은 그것을 창조하셨을 때의 상태가 그렇게 공허하고 공허하다는 이야기는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사람이 살지 않고, 혼돈하며 는 막 어지럽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무엇인가 불확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수면위로 라는 것은 진짜 물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질료들 위를 성령이 운행했다는 것은 이것들을 왔다 갔다 했다는 뜻이 아니라 감싸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료의 상태가 되는 것이고 이것은 선언, 창조이고 여기부터는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절은 재료 없이 창조되었지만 3절부터는 이미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독특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1절에서 밀가루를 창조하시고, 2절에서 그 밀가루에 물을 부으신 상태이고, 3절에서 하나씩 떼어서 바게뜨빵, 소보로빵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많은 이상한 사람들이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이 분위기가 너무 다르니까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1장 1절은 하나님이 세계 전체를 창조하신 것이고 2절은 천사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허무하게 되어버리고 망가진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면 1절과 2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거기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만 반드시 천사의 타락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귀신론을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1절과 2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그런 것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옥을 창조하고 계셨을걸!’ 조크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문제를 물을 필요가 없고 1절, 2절, 3절의 관계를 이렇게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고, 하나하나 창조하시고, 7일에 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과를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갔습니다.
그 다음에 섭리가 나옵니다. Providence 라고 나오는데 섭리라는 Definition이 나오는데 정의가 나옵니다. 시험에 반드시 나옵니다. 안 나오면 시험문제를 이상하게 출제한 것입니다. 정의는 반드시 암기하고 있어야합니다.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며 모든 사건 속에 활동하시며 만물을 정해진 목적에 맞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보면 이 Definition은 신학자들이 성경의 진리들을 다 기가 막히게 정합성을 가지도록 조직해서, 신학자들이 성경의 사실들을 다 조합해서 정합성을 가지고 있는 논리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말뜻을 풀어나가기 너무 쉬운 것입니다.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결국은 하나님이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설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보존하시고’ 있는 그것이 소멸되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두 번째는 사건들 속에 활동하시며 존재를 보존하고 하나님이 활동하시고 정해진 목적에 맞게끔 이것을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사물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사물을 그 존재가 유지되도록 지켜주시고 또 그 활동을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것을 있게 하신다고 할 때는 어떤 존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들을 존재하지 못하도록 혹은 존재가 지탱되지 못하도록 공격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하나님이 그 존재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섭리는 반드시 인간과의 관계에서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하나님이 활동하시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여기서 인간도 활동합니다. 교리반에 올 것인가? 안 올 것인가? 하나님이 수갑 채워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야지 무슨 소리야? 담임목사님의 강의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옵니다. ‘오늘 안가면 하루 종일 쪽지시험 보려고 공부한 것이 무효잖아!’ 그러면서 옵니다. 돌아갈 때 뿌듯함을 생각하면서 힘들어도 옵니다. 여러분들이 활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활동하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악한 일들은 하나님이 협력하셔서 하게하지 않지만 선한 일은 하게끔 계속하는 것입니다. 교리반을 배워야지만 인생의 까막눈을 벗을 텐데 까막눈이 얼마나 서러운지 모르실 것입니다. 문맹자가 있던 시절에 군대 간 아들한테 편지가 오면 빈대떡을 해서 이웃집 아줌마를 찾아가서 한번만 읽어달라고 부탁하고 옆집 학생에게 아주 간곡하게 부탁하면서 부를 테니 편지를 써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까막눈입니다. 까막눈이 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눈이 까맣다는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주 영향력이 있는 어떤 종교지도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단도 포함합니다. 완전히 껌뻑 죽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너 곰탕집 차려!’ ‘너 피지로 당장 이사 가! 하나님의 뜻이야!’ 피지로 가족들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아빠하고 인연을 끊습니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입니다. 누구 인생입니까? 한 번밖에 없는 내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그 교주에 의해서 움직이는 타율적인 존재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내 마음을 하나님께 알리며 살아가도록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나 자신의 진정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민하면서 삽니다. 요즘은 모르겠습니다. 나는 가보지는 않았는데 저기 장충동 아래 내려가면 철학아카데미라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모여서 가르칩니다. 수백 명이 모입니다. 아줌마 ,아저씨, 청년 심지어 중고등학생들이 와서 철학 강의를 듣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철학 강의를 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까막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 수 없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믿기 싫습니다. 거기에 가서라도 보고 김용옥씨가 나올 때 빨려 들어가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TV를 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인생의 까막눈을 열어주는 것 같은 효과가 그 안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들으면 ‘이 세계가 이런 것이구나! 우리 역사가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살아야하는구나!’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활동하시면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결국 인간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협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협력은 대등한 관계의 협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선한 일을 한다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통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이 목적에 배치되게 삽니다. 하나님이 막 살게 무조건 개방하고 놔두어 버리시면 이 세계가 무슨 꼴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과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살게 하시는데 거꾸로 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것을 자 다스리셔서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후회하게도 만드시고, 가슴 아프게도 만드시고, 이렇게 하시면서 당신의 목적대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섭리라는 것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확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섭리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살아봐야지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이런 것이었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나에게는 필요한 것 같지 않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고 예상치도 않은 일이었는데 나중에 보면 그 우연한 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너무 중요한 결정을 좌우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섭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셉이 끌려갑니다. 그리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감옥에 들어갑니다. 오랜 기간 그곳에서 썩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술 맡은 관원장의 도움을 받아서 바로 앞에 섭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삼십이었는데 애굽의 자료를 찾아보니까 삼십세가 공무담임권을 가진 최소의 나이입니다. 이전에 나와 봐야 그렇게 발탁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로 잰 것처럼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그렇게 만들고 인도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섭리의 요소는 보존, 협력, 통치가 있는데 다 설명했습니다. 보존은 만물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이며 피조물은 항상 하나님을 의존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이 모든 세계와 내가 이렇게 유지되고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협력인데 모든 피조물과 협력하시며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선한 뜻을 갖게 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1원인은 하나님이고 제 2원인은 자연력과 인간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2원인은 제1원인인 하나님과 결코 독립하여 일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으로 팔려갈 때도 하나님이 못된 형들을 사용하셔서 종으로 팔려가게 하셨고 그리고 거기서 보디발의 아내라는 이상한 여자를 만나서 한 번에 모함을 뒤집어쓰고 그 집안을 다스리던 총무의 위치에서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 맡은 관원장의 도움으로 그가 다시 바로 앞에 나타나서 자신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모든 것들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자연도 사용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제2원인은 그 모든 일의 궁극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 뒤에 그것들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협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통치는 존재의 목적에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인데 이것이 전부 다 파란색을 친 것이 전부 다 Definition입니다. 정의입니다. 꼭 외워야할 것들입니다.
섭리교리에 대한 그릇된 견해는 자연신론입니다. 자연신론은 뭐냐 하면 이신론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하나님이란 뜻이고 ism이 붙은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기존에 있는 신론과 만물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결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자연의 법칙들을 만드셔서 그것이 굴러가게 하셔서 자연세계가 유지되게 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이 세계를 넘나들면서 여기에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인간의 도덕세계도 마찬가지로 지들끼리 지지고 볶으면서 결국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은 역사의 법칙, 인간의 양심의 법칙 이런 것들만 부여하셨을 뿐 그 기계를 돌리는 것은 인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신론이 미국의 주류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있지만 그러나 필요하고 아쉬울 때 우리가 찾을 뿐이지 그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영원한 세계와 이 세계를 넘나들면서 우리를 움직이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악한 자를 벌하시고, 선한 자를 격려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섭리교리에 대한 그릇된 견해는 우리를 범신론으로 데려갑니다. 하나님은 곧 자연세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세계는 그 신의 변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이 녹으면 물이 되고, 끊으면 수증기가 되고, 얼면 삐쭉삐쭉 튀어나오듯이 본질은 신인데 그 신 혹은 도가 끊임없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다양하게 변모하는 것이 이 세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이고 이렇게 보면 인간은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핑계할 수 있는 이유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렇게 하나님이 그런 섭리가 있으시고 자연의 법칙이 있으셔서 그렇게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고 보면 이적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연법칙도 하나님이 정하셨는데 그 법칙을 깨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자연법칙은 제2원인을 통해서 자연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법입니다. 여러분 환경을 오염하면 계속 문제가 생겨서 그 해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든지 날이 더워서 수증기가 많이 올라가면 비가 많이 오게 된다든지, 날이 더워지고 이렇게 수분의 증발이 많아지면 폭풍이 생기게 된다든지, 이런 법칙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인데 이적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써 제2원인의 중재 없이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물들이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고 원인이 다시 결과를 이루고, 이렇게 인과가 됩니다. 이것이 다시 인이 되고 이것은 다시 과가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Causality 혹은 인과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과학은 철저하게 인과관계의 고리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것은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세계를 창조하셨다.’ ‘인간의 영혼을 불멸하도록 창조하셨고 죽은 후에 인간은 천국으로 간다.’ 이런 것들은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성경에 제시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적입니다. 혹은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일하시지만 이런 질서를 떠날 수는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이스 벌콥은 이런 예를 듭니다. 공이 있으면 공이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면 사람이 힘을 가하면 공중에 계속 올라가서 정점에 있는 순간까지는 법칙에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법칙을 깨뜨리지 않고도 힘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얼마든지 기존에 있는 법칙 안에 움직이는데도 그 법칙을 깬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깨지 않으면서도 법칙과 맞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필요하실 때는 이런 이적을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원시상태의 인간을 봅니다. 10장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영원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영혼이고 하나는 육체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있다고 배웠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성경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이론들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느냐 하면 만약에 어떤 물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물건을 보는데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구성요소로 되어있는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이 안에 있는 것들이 모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분해해 보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는 이것을 맨 처음에 생산했던 공장으로 가서 그 공장에서 사람들이 이 물건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분해해 볼 수는 없습니다. 분해해 본들 인간에게 영혼이 나타날 리 없습니다. 그러니까 맨 처음에 인간을 만들었던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제일 먼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십니다. 그것은 몸이 되었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부를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풍선을 불면 ‘후’ 하고 불면 우리 폐 속에 있는 공기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나누어주셔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후’ 하는 행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행위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신 후에 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이 창조의 행위를 통해서 이 인간이 이렇게 일어나서 걸어 다니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육체라고 부르고 이것이 육체의 창조이고 영혼의 창조이고 이렇게 일어나서 걸어가서 이 사람이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이런 두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은 수명이 다하면 인간은 죄 때문에 육체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데 원래 창조될 때에는 이 영혼과 육체 모두 영원하도록 창조되었고 결합도 영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제가 썩 좋아하는 영화는 아닌데 거기에 보면 불멸의 여자가 나옵니다. 그 이름이 누구입니까? 이름이 안 외워지는데 불멸의 아름다운 여자가 나옵니다. 그리고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Immortality 불멸성을 유지하는데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 평범한 인간이 되어서 늙고 죽고 마지막에 사라져 가는 존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억이 안 납니까? 뭐하십니까? 영화도 안 보고, 성경도 안 보고, 책도 안 읽고 무엇 하십니까? 요즘에는 영화를 보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서 볼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잘 보면 그 안에 제가 설교시간에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코드들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영화를 보면서도 왜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미친 듯이 열광할까 하는데 잘 안보입니다. 대부분 영화관을 나가는 사람들 중에 천 명 중에 990명에게는 안보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의 갈래를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딱 보입니다. 저 속에 굉장히 중요한 철학적인 메시지가 숨어 있고 그것들이 현대인의 가슴속에 이런 방식으로 호소하기 때문에 자기도 왜 미치는지 모르면서 그것을 1부, 2부, 3부, 4부 계속 나오는데 그것이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열심히 달려가서 봅니다. 사경회는 나오지 않아도 거기는 열심히 달려가서 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현대문화를 꿀벌처럼 쪽쪽 빨아먹는 것이 아니라 보면서 즐기되 그것을 비판적으로 즐겨야 합니다. 이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정신은 기독교가 용인할 수 없는 정신이고 나는 생각이 다르다. 어떤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러면서 나는 그것을 다르게 진술 해내고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며 다른 방식으로 문화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부르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냥 가서 재미있다고 한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벌써 인간론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중간에 끝내야겠습니다. 영혼의 기원이 있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영혼의 기원이 있는데 첫째는 선재설입니다. 먼저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어떤 큰 창고에 수없이 창조해서 넣어 놓으신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에서 창조된 영혼을 보내주는데 헷갈리는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김 아무개!’ 그러면 김 아무개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부터 창조되었습니다. 영혼이 창조된 아이는 반드시 태어나게 됩니다. 안 태어나면 그 아이는 그냥 임자몸이 없으니 그냥 딱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재설입니다. 플라톤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이렇게 강이 있는데 강 저 건너편에 있던 A′ 가 여기에 있는 육체 A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건너오는 것입니다. 이 강을 레테의 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까페라떼가 아니라 레테입니다. 이 물은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느냐 하면 마시면 망각하게 되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여기서 한 사람 A가 있고 여기에 B′가 있습니다. A의 영혼은 레테의 강을 헤엄쳐 오면서 물을 어마어마하게 마신 것입니다. 거의 올챙이배가 되도록 물을 마시고 온 것입니다. 이 사람은 돌아와서 이 영혼세계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민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영혼에 대한 아무 감각이 없기 때문에 육체의 욕심대로 살기에 아주 최적화된 인간입니다. 불꽃처럼 살다가 한 순간에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폭영화에 보면 어떻게 저렇게 살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칼을 휘두르다가 오늘 저녁에 진탕 마시고 내일 저녁에 칼에 맞아 죽는 그런 사람은 영혼과 아무 상관없이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넘어오다가 물이 싫어서 안마셨습니다. 조금 코로 넘어가기는 했는데 여기에 대한 기억이 너무 많이 살아 있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부자가 되어 보고 재벌이 되어 보아도 이것은 아닌 것입니다. 싯다르타 같은 사람의 영혼은 물을 거의 먹지 않고 넘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국에 살면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재미가 하나도 없고 ‘왜 그렇게 살까? 사람들이 미친 듯이 화장을 하고 운동을 해서 예쁜 몸매를 만들고 미친 듯이 공부해서 지적인 사람이 되고 하는데 뭐하는 짓일까?’ 하는 것입니다. 뭔가 자신에게 끊임없는 영혼의 갈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갈증이 이제 이 땅에서의 지식의 크기에 따라서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웨스트민스트세미나에서 제가 신학과 인문학의 연관관계에 대해서 특강했는데 나중에 올라오면 들어가 보십시오. 거기에 나오는 화가의 작품들은 도대체 어떤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지가 설명되는 것입니다.
유전설은 엄마 아빠가 결합하면 결합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셔도 육체가 태어나듯이 영혼도 그렇게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은 대게 설명하게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부모의 어떤 자질이나 특질들이 자녀에게 잘 물려지는 것은 설명하기 아주 좋습니다. 엄마가 까칠하니까 딸도 까칠합니다. 아빠가 펑펑 쓰니까 아들도 펑펑 쓰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렇게 교차해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은 진짜 콩 심은데 콩 나는구나! 이런 것들은 설명하기에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점은 무엇이냐 하면 부모를 영혼의 창조자로 만들어 버리거나 이렇게 될 때에는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쨌든 마리아의 몸을 입고 태어났으니까 영혼도 마리아에게서 받은 것이냐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말하면 예수의 영혼은 순결한 영혼일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나오고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적인 문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에서는 창조설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각 개인의 영혼을 직접 창조하셨다고 봅니다. 언제? 모릅니다. 남녀가 결혼해서 관계를 갖고 수정체가 되었을 때 그 순간부터 영혼이 주입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낙태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인간의 육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영혼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사람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태어나는 순간에 영혼이 창조되어서 만나는 것이라고 보면 뱃속에 있는 아이는 그냥 물질에 불과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해체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벌써 몇 달만 되면 움직이기 시작하고 움직이면 아이가 6개월이 넘어가면 부모가 느끼는 감정과 느낌까지도 이 안에서 헤아리고 태아의 사진을 찍어보면 얼굴에 표정도 나옵니다. 별 모습이 다 나옵니다. 그런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이 그것까지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다고 거기서 멈추고 분명한 것은 각 개인의 영혼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각기 창조하셨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죄 없이 창조하실 수 있었습니다. 영혼은 순수하게 창조되었지만 전 인류를 죄의 구조 속에서 출생 전부터 죄 된다. 그래서 유전적인 대신 도덕적 특성들을 설명하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빠가 공부를 많이 하니까 아이들은 머리 좋게 태어나게 하신 것인가? 엄마가 마음을 잘 쓰고 살면 아이들도 그것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이 그 집안의 딸은 못된 딸이 아니라 그래도 괜찮은 애가 태어나게 하시는 것인가? 그런 것들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런 것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고 문제는 내가 아이를 낳습니다. 그 아이는 어쨌든 오염된 영혼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아이가 하나님에 의해 오염된 채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극단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뒤에 나오는데 언약적인 관 계속에서 인간이 결국 그 죄를 물려받게 됨으로써 창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지 하나님이 죄를 창조하셔서 인간의 영혼 속에 집어넣은 것이라고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혼의 기원에 관한 학설입니다.
자, 그러면 이중에서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 가지 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을 택하는 것보다는 창조설을 택하는 것이 성경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