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이 죽을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절)
녹취자: 이현정
우리들이 이 성경구절을 잘 알고 있고 아마 신약성경에서 믿지 않는 사람도 알고 있는 서너개의 성경구절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조차도 어느 문맥에서 이 말씀이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주위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명절이니까 이스라엘 유대사람들이 많이 모인 유월절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때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중에 헬라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럿이서 뵈옵고자 했으니까 틀림없이 지혜를 찾기 좋아하던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단한 사상가나 아니면 스승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무엇인가 지식을 얻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가르칠 내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영광이잖아요.
그래서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와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주님을 예수님을 뵈오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아무대꾸도 없이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게 뭐냐면 "얘들아.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느니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독사라고 하는 이 영광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지금 워드플레이를 하고 계신 것이죠. 너는 헬라사람들 몇이 나를 만나서 지혜를 배우려는 것을 보고 우쭐해 있느냐?
나는 지금 그런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때가 가까운 것에 관심이 있노라. 이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으로 돌려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
이것의 영광이고 또 하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후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성결의 영으로서 다시 살아나실 부활의 영광 이 두 가지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을 얻을 때가 왔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에 도달하기까지에는 십자가라고 하는 커다란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유명한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려니와... 라는 말씀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고난이 앞에 있는대도 만약에 고난만을 주목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또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이후에 받을 영광을 바라보시면서 잠시 받는 죽음의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고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서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을 사는 아주 중요한 믿음의 법칙입니다.
우리에게 항상 기쁘고 봄날 같은 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고난과 시련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에 고난을 주목하는 사람은 그것이 요구하는 큰 희생만 엄청나 보여서 감히 그 강을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고난이나 역경을 당할 때 그 고난과 역경이 끝나고 난 후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마 약속하신 그 영광스러운 결과들을 전망하게 될 때 그 때에 고난과 역경을 이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커다란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성도들을 사자와 같이 만들었던 두개의 커다란 중심축이 이었습니다.
그 하나는 십자가 사상입니다. 이 고난이 올 때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셔서 내가 살았으니 이제 나의 모든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이 죽으라고 하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것도 영광이다. 라는 십자가 사상과 이 십자가의 고난 후에는 영광스러운 안식이 기다릴 것이라고 하는 내세사상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상 때문에 사도바울은 감옥에서도 그 고난을 견디며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마다 그 자체를 보지 말고 그 너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지막 영광스러운 결과..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면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면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밀이나 콩이나 곡식들 보면 씨눈이 있습니다. 씨눈은 죽지 않습니다.
씨눈이 죽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씨눈이 살아있고 씨눈은 아주 작은 크기이고 나머지 곡식은 씨눈이 스스로 양분을 섭취할 수 있을 때까지 썩어서 양분을 공급해주는 용도로 썩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썩어지는 양분을 먹으면서 씨눈이 발하를 하고 그래서 결국은 뿌리를 내리고 줄기 가지가 뻗어 나오면서 식물이 되는데 그것은 씨를 닮지도 않았고 씨눈을 닮지도 않은 완전히 다른 것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리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한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죽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믿음의 후손들이 결실을 맺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 할 수 있는 것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적용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우리보고 모두 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죽으면 그건 사망입니다. 우리 안에는 죽어야 할 것도 살아있고 살아야할 것도 살아있습니다.
때로는 죽어야 할 것이 산 것 처럼 살아야할 것이 죽은 것처럼 되는 경우도 있고. 죽어야 할것도 죽은것 처럼 있고 살아야 할것인대로 죽은것처럼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모든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것이 우리안에서 죽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굉장히 번민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나 모르겠는데 그 분이 공부는 많이 안하셨지만 목회를 참 잘하시고 채플 시간에 참 선한 영향력을 학생들에게 많이 미치셨어요. 그분 사택이 학교 바로 아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찾앙가 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이렇게 신학교 들어왔는데 너무 괴롭습니다. 그리고 갈등을 쭉 이야기 했더니 위로하느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전도사님 당신이 남들이 별로 고민안하는 그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괴로워하고 갈등한다는 것은 당신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이 참 적지 않게 위로가 되었습니다.만약에 우리가 완전히 죽어있다면 갈등이 없을 것 입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죽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들이 죽기 원하고 그것이 때로는 아주 힘든 것 같아도 한알 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 처럼 ..
교회에서도 보면 문제가 많고 어려움이 있어도 구역장이 잘 죽으면 충분히 죽으면 구역원들은 죽지 않아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다루시면서 살려내십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충분히 죽을 때 오히려 목회에 방해가 될 것 같은 요소들이 나중에는 도움이 되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지요. 누군가가 깊이 죽을 때 그 때 나머지 가족들은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한 알의 밀알이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벼 하나가 일반적으로 2300개의 알곡을 맺는다고 합니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농사짓고 돈 못 벌 사람이 없습니다. 한알을 뿌리면 2,300개가 되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아주 풍성한 열매를 맺기 까지는 한 알의 씨눈을 띄우기 위해서 죽어야 했던 한 알의 씨가 있는 것 입니다.
참 재미는게 이 세상에서는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날 이용합니다. 직장생활에서 양보해보십시오. 여러분 생각에는 몇 일이 지나기 전에 감동을 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그것을 충분히 자주 애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즉각적인 보상을 바라면서 죽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와 만날 날을 앙망하였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 목회를 하면서 그렇게 모진 모함과 시련 안팎 으로 다 당하면서 기독교 강요를 쓸 때 초판에는 안나오는데 최종판에 나오는데 그것이 무어냐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날 그날을 사모합시다.
신앙하듯이 사모하며 삽시다.
얼마나 현실이 괴로우면 그 그리스도와 만날 그날을 신음하면서 그리워하며 삽시다.
그래서 철저한 내세신앙, 이 세상에서 최천을 다해서 이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이 세상이 자신에게 충분히 보상되어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내세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때로는 이용당하고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도구가 되어서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를 죽였던 사람들은 개의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의 죽음에 죽음을 누리지만 나는 죽을 때 사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그것을 마음에 아끼지 않고 그곳에 갈수 있는 것입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우리의 개인의 성화 생활과 가정 교회, 나의 섬김 쭉 돌아봅니다. 그 때 내가 충분히 죽었더라면 살아났을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더 잘 죽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