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와 소명
녹취자 : 장주은
제가 신학교에 교수로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입학시험의 면접을 하는데 연세가 많이 드신 분이 원서를 냈습니다. 면접을 보는데 당시에 ‘연세도 많이 드신 것 같은데 왜 그 나이에 신학교를 오시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가 되고 싶어서입니다.’ ‘그러세요. 왜 목사가 되시려고 합니까?’ 그러니까 이분이 엉뚱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80 넘은 노모가 계십니다.’ 노모가 있는 것과 목사가 되는 거 하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노모님의 평생소원이 제가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효도하려고 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가시고 그 어머니를 신학교에 보내시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한분은 그렇게 나이 들지 않고 50대 초반 쯤 되었는데 ‘당신은 왜 신학교에 오시려고 합니까?’ 하였더니 ‘교수님 저는 모릅니다.’ ‘그럼 누가 압니까.’ ‘우리 집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왜요?’ 그러니까 ‘내가 사업에 위기를 만나고 자살하기 직전까지 갔을 때 우리 집사람이 기도원에 갔는데 내가 목사가 안 되서 그렇답니다.’ 그래서 네 남편을 목사로 만드는 것이 나의 뜻이니라,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아내의 응답을 받고 제가 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집에 가서 쉬시고 부인을 신학교에 보내시면 저희가 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가끔 우리가 신학교에 왜 오게 되었냐고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이 환경으로 인도하셨다고 하는데 소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명은 환경에 의해 인도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환경을 사용하셔서 소명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쓰지 마세요. 왜냐하면 집에 가서 안볼 것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 원고를 우리 황원장님한테 맡기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12월에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라는 책이 나옵니다. 거기에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총장님이 1100페이지라고 하셨는데 깎았습니다. 1400페이지입니다. 1권으로 하려니까 베개같이 너무 커서 1권이 700페이지로 12월에 나오고 2권이 아마 내년 6월 쯤 원고를 정리해서 우리의 계획은 6월쯤 800페이지 책으로 내서 두 권 다 1500페이지 정도로 마무리 하는 것이 좋겠다 싶습니다. 참고도서 목록이 3700권입니다. 제 생애에 몇 권이나 이런 책을 쓸까 했는데 한 4년 썼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앞부분을 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 공부를 해야 할, 쉽게 이야기 하면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결정적인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인식, 신에 대한 경험 같은 것들은 범종교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것들은 목회자가 되거나 신학공부를 하기 위한 그런 만남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는 체험이 신학 공부의 소명에 가장 결정적인 핵심 부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만남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그것이 소명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어떻게 소명의 핵심이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묻겠지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신약성경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신학자가 누구겠습니까? 바울입니다. 물론 마태나 마가나 모든 사람들이 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물론 마태도 훌륭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고전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기독교의 사상의 전체적인 얼개를 1세로서 그려낸 사도바울을 진정한 신학자의 반열에 올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마태에도 신학이 있고 누가에도 신학이 있고 요한에도 신학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웅장한 신학의 틀을 만들고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보면 사도바울이 그야말로 신약시대의 기독교 신학의 원조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목회자 혹은 선교사가 되었는지, 신학자가 되었는지 우리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전범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자, 그 사람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기본적으로 이 사람은 세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 유대교 주의가 그의 종교적 배경입니다. 내가 이 시간에 유대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장황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유대교는 구약에 나오는 정통 구약 신앙하고는 다릅니다. 우리가 구지 이름을 구약의 여호와 종교라고 하는 것을 구약의 정통 신앙이라고 본다면 유대교 신앙은 그 신앙을 그대로 전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어떻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그 당시가 로마시대였기 때문에 로마니즘이 정치적 배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사실은 문화적으로는 이미 헬레니즘이 깔아놓은 문화를 타고 로마제국이 건설된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에 의해서 로마니즘이 동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헬라에 나오는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가 똑같이 병행을 이루면서 신들의 이름만 바뀌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썼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서를 썼습니다. 베드로가 신앙이 더 좋았느냐 사도바울이 신앙이 더 좋았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우리가 베드로가 뱃사람이라고 해서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절대로 로마서를 에베소서나 골로새서를 쓸 수 없는 사람입니다. 머리 구조 자체가. 쓸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로마서가 골로새서와 비교도 되지 않는 웅장한 서신이라고 봅니다. 골로새서나 에베소서나 로마서 같은 것을 쓸 수 있기까지 그 사람은 뒤의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유대교 신앙입니다. 유대교 신앙에 있어서도 이 사람은 전문적인 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전문적인 주다이즘 학자의 길을 갔던 사람입니다. 종교인이자 학자의 길을 갔던 사람입니다. 로마니즘은 지하에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법에 대해서도 아주 밝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헬레니즘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희랍의 문헌에 대한 이야기까지 사도바울의 설교 속에서 나올 정도로 희랍 문헌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인문학적인 배경이 탄탄하게 다져지면서 종교지도자의 길을 걸어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강력한 사명감을 가지고 그 길을 가고 있을 때에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었던 두 개의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이고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입니다. 심리적은 편견은 무엇이냐 하면 유대인 이외의 다른 모든 민족들은 쓰레기라고 하는 당시 유대교 선민사상이 준 편견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신학적인 편견은 무엇이냐 하면 나무에 매달려 죽은 예수는 절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신학적인 편견입니다. 두 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런 얘기는 이 사람이 많이 들었습니다. 만약 누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라면 쓸데없는 소리라고 정리해 버릴 수 있었고 그렇게 해 왔는데 자기가 직접 만난 것입니다. 심지어 음성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사람은 엉겹 결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부인할 수 없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 부활사건과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결코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까 들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엄청난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혼란이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예수가 살아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유대인들의 정교한 플롯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가서 재판을 받으시지 않습니까?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시켜서 소송을 넣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근거가 없는 고발이었습니다. 고발을 해서 로마가 가장 민감해 하는 이 사람 예수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잠재적인 로마의 반역자라는 것을 호소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여러 가지 다른 요인들이 맞물렸습니다. 빌라도가 폭동이 일어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정치적으로 위태로워지니까 이 사건을 조용히 해결하기를 원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으면 안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죽여야 좋겠으면 ‘예수를 죽이소서’ 하면 되는데 백성들은 어떻게 죽이라는 방법까지 요청을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의 문맥으로 보자면 십자가 형벌은 그렇게 흔한 사형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악랄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사형제도입니다. 손에 못을 박고 매다는데 자기 몸무게에 의해서 살이 찢어지고 동맥이 터지면서 피가 쏟아지면서 어마어마한 두통이 찾아와서 숨이 붙어있는 한 극한의 고통을 느끼다가 죽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3일씩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지정해준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아주 중요한 플롯이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 죽음의 의미를 그 당시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학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사형집행 방법까지 요구를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통해서 모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기획했던 바가 성취되었고 사울의 마음속에도 ‘아 저렇게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을 보니까 저 사람이 진짜 하나님에게 반역한 자였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공의로운 판결로 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구나’ 하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을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보았습니다. 살아났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하고 성경의 맥락으로 돌아가 본다면 히브리서 9장 20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이것이 모든 살아있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것에 예외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모세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죽었다고 보지만 유대인들은 모세가 죽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승천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모세의 승천기라고 하는 위경도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녹이 나옵니다.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고 하나님께 들려 올라갑니다.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갑니다. 이런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어마어마하게 의인으로 인정해주신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났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냐하면 하나님만이 이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다면 다시 살림을 받은 예수는 하나님에게 엄청난 사랑과 인정을 받은 의로운 인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인물이면 하나님이 저주하셨을 리가 없고 저주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 모순된 두 사실이 다 팩트입니다. 왜? 죽은 것도 의심할 수 없게 이미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며 자기들이 본 사건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모순된 팩트가 같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머리에서 열이 나고 우주 전체가 휘감기는 것 같은 혼란을 느낀 것입니다.
나는 그 공포심을 이해합니다. 그 엄청난 세계관의 혼란, 가치관을 비롯해서 자기가 일생동안 헌신해온 모든 것들에 대한 어마어마한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 어느 한순간 복음의 빛이 확 째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은 이미 구약성경에 희미하긴 하지만 암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팩트,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이 두 가지의 모순된 팩트를 어떻게 연결시키겠느냐에서 발견한 것이 대속의 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가 죽은 것이 자기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하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저주를 받으신 것이기에 그가 진실로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사실은 진실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어두움을 찢고 찬란한 빛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쏟아지듯이 확 쏟아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찬양)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온 세계와 역사 그 중심에 서신 그리스도 그 존재가 장엄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한 10년 전,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많은 만남이 있었지만 그렇게 우주적인 장엄한 그리스도의 그것을 보면서 감격했던 적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라는 시리즈에서 설교도 했습니다. 진짜 한 순간에 신학을 전체를 관통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고 나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되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성자 예수지 않습니까. 신학에서는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기 전에도 성자는 계셨을 것 아닙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그것이 ‘크리스토스 아사르크스’, 예수 그리스도인데 살 없는 그리스도. ‘사르크스’가 살입니다. ‘육체를 입지 않은 그리스도’. ‘크리스토스 아사르크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계신 그리스도를 ‘크리스토스 사르크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크리스토스 아나바토스’라고 합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분입니다. ‘크리스토스 사르크스’,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분이 온 땅과 우주의 중심에 계시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해 경륜을 베푸심에 있어서 당신을 대신할 자로 삼으신 분이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들이 특히 존 오웬 같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The christ the treasure of knowledge of GOD,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의 보고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한없이 다른 평야지만, 다시 돌아오면, 어쨌든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럼 이것이 그에게 무슨 변화를 가져왔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사상적으로 그리스도가 온 땅과 하늘 위에 중심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지식의 보고라는 사실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이제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진 모든 구원의 은총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그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구나, 이것은 구원 얻을 때만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후에도 우리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과 뜻이구나, 하는 것을 명쾌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에게 기대면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니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까 가슴에 저미도록 밀려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그것이 바로 자기의 그 사랑하는 아들을 짓이겨서 십자가에서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대속해 죽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또한 부활의 세 지평, 부활의 첫 번째 지평은 그리스도 예수의 육체의 부활입니다. 두 번째 지평은 종말에 이루어질 우리 모두가 부활할 지평입니다. 세 번째 지평은 날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소위 이야기하는 motivication of sin, 죄죽임의 교리와 motivication of grace, 은혜살림의 교리들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 주제는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입니다. 일평생의 저의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 합니다. 이 교리가 없으면 우리가 이 현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전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스티그마입니다. 스티그마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 당시 노예들이 새기고 다니던 뉘 집안의 노예라는 표시입니다. 내가 스티그마를 가졌다,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는 말은 흔히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사도가 핍박을 받아서 몸에 상처 난 것이라고 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게 물리적 육체적 핍박설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형상설입니다. 그런 예수의 흔적을 어떤 노예의 흔적을 가진 그 흔적이 노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듯이 우리가 그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예수의 노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부활사건의 의미를 깨달은 후 사도바울이 자기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내가 받았는데 이제는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모든 인생에 대한 행복의 기준과 가치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부여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을 잃어버린 여자가 되었습니다. 외아들 하나밖에 없습니다. 눈물겹도록 그 아이를 사랑합니다. 평생을 수절하면서 이 아이를 위해서 사랑하고 교육을 시키고 희생했습니다. 삯바느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길렀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엄마의 또 다른 행복이 있겠습니까, 아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엄마의 행복이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사랑의 일치가 가져오는 행복의 합치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런 합치를 사도바울이 느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core of calling입니다. 소명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김재은 교수가 신적인 강제력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 언제 예수님이 너 복음 전하지 않으면 내가 지옥에 보내버리겠다든지, 죽여버리겠다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욕하신 적이 있습니까? 유대인에게나 헬라에게는 복음의 빚진 자다, 라고 사도바울이 말하였는데 그 사람들에게 무슨 신세를 졌습니까? 그 사람들은 오히려 사도바울을 박해하고 핍박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불타는 영혼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전수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그를 통한 우리의 구속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아가페를 발견한다고 말했습니다. 아가페는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 에고이즘, 자기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아가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반응으로서 이 사람에게 사랑이 생깁니다. 그것이 까리따스입니다. 까리따스는 번역하기 좀 어려운 말인데 나는 ‘지순애’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사랑, 순전한 사랑입니다. 까리따스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까리따스는 하나님만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사랑은 단절된 사랑입니다. 이기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조금만 해치려는 사람을 만나도 관계가 다 끊어지고 자기의 이익과 상관없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까리따스는 사람을 오지랖 넓게 만들어 줍니다. 저 사람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갈 텐데 어떡하지? 이 사람은 태평한데 이 사람은 눈물을 흘립니다. 저렇게 어려운 처지에서 어떻게 신학공부를 하고 얼마나 힘들까. 저 사람은 그냥 견딥니다. 그렇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못 견디는 것입니다. 뭐라도 도와줘야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외로울까, 하면서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에게 있어서 엄청난 신학적인 발견이었는데,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모습이 관계적인 측면에서 어떤 모습이냐 하면 창세기 2장 23절, 24절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류가 누구였습니까? 아담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가 만들어졌습니다. 두 번째 인간이 와서 처음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생깁니다. 그것이 단순히 부부사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합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뼈들 중의 뼈, 복수로 나옵니다. 많은 뼈들이 있는데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뼈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뼈가 아니라 한마디만 끊어내면 절명하는 뼈, 척추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발가락 뼈 하나쯤은 부러져도 생명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 뼈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살 중의 살도 마찬가지입니다. 밥 많이 먹어서 나온 뱃살은 한 줌 쯤 떼어내도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심장을 손톱만큼만 떼어내도 절명하는 것입니다. 그런 뼈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표현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었지 않습니까? 이것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인류가 서로를 향해서 너는 내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녀노소, 이 모든 언어와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모든 사람을 향해 이 고백 속에서 사는 것이 인류를 창조한 하나님의 뜻이었고, 죄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해 진 것을 종말에 완성시키는데 중간에 그때에 이루어질 그 아름다운 사회를 미리 이루면서 살아가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진정한 영적인 조나단 에드워즈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영성의 표는 사랑입니다.
제가 지금 차기 책으로 꿈꾸고 있는 책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천 페이지 정도 계획을 하고 있는데 700페이지 정도 기록했습니다. 위대한 장입니다. 우주가 열리는 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경험했습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입니다. 그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큰 것입니다. 모든 인류, 심지어는 주님을 모르고 죽어간 인류를 향해서도 사도바울은 눈물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열다섯 살 때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만 14살 2개월 되던 때였습니다. 저는 그때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2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러져서 펑펑 울었습니다. 왜 열다섯 살 먹은 아이가 교회에 가다가 논둑에 엎드러져서 울었느냐. 사는 것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죽는 것은 그 나이에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사는 것이 뭐가 무서웠냐하면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내가 여전히 사람이라는 사실, 나는 사람으로서 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세계 속에서 나와 세계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런 절박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에 그렇게 오래 다녔지만 아무 대답도 교회에서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가끔 질문을 해도 사람들은 아무 생각이 없이 교회에 다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목사님의 많은 설교가 단상에서 이루어졌지만 항상 저것이 나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나, 수많은 선생님들이 주일학교에서부터 나를 스쳐지나갔지만 한 사람도 나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한 사람도.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남준아, 네가 정말 예수님이 마음에 믿어지니?’ 한 사람도 그렇게 물어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그 선생님들과 당시의 교회 다니는 어른들은 나만큼도 인생에 대해서 본분이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러고 한참동안을 눈물을 쏟으면서 울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눈물을 닦고 일어섰습니다. 그 때의 열다섯 살 난 아이는 결심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무신론자로 살기로. 그것이 제가 교회에 나간 마지막 주일이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교회의 집사님 권사님들이 그러셨습니다. 목사님이야 어려서부터 워낙 영특하셨으니까 그 열다섯 살에 그렇게 고민을 하고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어냐 고민했지만 우리 애들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때 나는 그런 질문에 너무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논두렁에 엎드러져 펑펑 울었지만 당신들의 아들딸은 논두렁에 엎드려서 펑펑 우는 대신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빠져서 그 질문을 회피해보려고 몸부림친다고 말했습니다. 향락문화에 빠져서. c.k.체스터턴이라고 하는 영국의 사상가가 있습니다. 자기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는 중이다. 왜, 그것은 그렇게 채워질 수 있는 열망이 아닙니다.
어떤 열망이 있을 때 하나님과 인생의 허무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을 때, 그것이 그대로 정직하게 튀어나오는 것은 상당한 사고력과 혹은 지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대부분이 그것을 자기 속에서 고민은 생기는데 이게 도대체 무엇을 위한 고민인가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 고민의 방향을 틀어버리기 위해서 향락에 빠지거나 가치 없는 일에 몰두하면서 인생을 살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그 사람을 진정한 인생의 행복으로 데려가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도 여러분이 목회하는 교회에는 여러분이 올라가서 설교를 하면, 정말 개소리하고 있구나, 저게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나, 저 사람은 진짜 인생에 대한 진짜 자기 고민을 해서 도달한 답인가, 아니면 신학교에서 주입시킨 답인가, 아니면 모태신앙이라는 이름 하에 자기 엄마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대답인가. 자기의 눈물과 고통이 그 안에 담겨있지 않은 것입니다. 인생의 실존에 대한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 나이에 무신론자가 되어야겠다고 눈물을 닦고 결심하고 일어섰을 때 그때 저는 정말 혼자였습니다. 이제 이 인생을 신 없이 그리고 어떤 다른 인간의 도움 없이 나 혼자 살아가야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열다섯 살 먹은 아이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내가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무엇이냐 하면 왜 교회는 그 어린 아이에게 그런 외로움을 남겨주었을까. 엄마아빠는 교육을 충분히 못 받아서 그 고민을 녹여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왜 교회는.
제가 진짜 모범생이었습니다. 공부는 탁월하게 잘하진 않았지만. 왜냐하면 내가 박사과정 다닐 때까지 나는 단 하루도 학교를 행복하게 다녀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엄청난 정신이 부족하고 모자라는, 쳐지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야간신학대학 들어와서 공부해보니까 공부가 너무 재밌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 학교를 나와서는 총신대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시험을 볼 자격을 주어서 시험을 봤습니다. 우리 때는 M. div가 20:1이었습니다. 1200명이 모여서 60명을 뽑는 것입니다. 실컷 공부하고 학교 교회 봉사도 엄청 많이 했습니다. 1200명 중에서 3등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3등으로 졸업했습니다. 누가 시키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런 열등감이 사라져버리고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이 나라의 교육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안 맞았던 것입니다. 박사과정 들어가서는 더 재미가 없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끔 안하고 학교에서 하라는 공부를 하라고 하는데 이게 내 관심사가 아닙니다. 결국은 논문도 안 쓰고 목회지로 돌아왔기 때문에 필요도 없었지만. 그리고 나는 나 혼자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있고 내가 전 세계를, 우리 총장님은 진짜 영어를 잘하십니다. 저분은 아주 특별한 분입니다. 정말 잘하십니다. 영어 편지를 쓴 것을 보면 한국 사람이 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미국에 보름 이상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엉터리 잉글리시입니다. 다행히 그래도 어떻게 하다보니까 사람들하고 생존하면서 설교도 하고 발표도 하고 하는 척 하고 다니지만 사실 부족합니다. 그렇게 공부한 결과 전 세계 미국 유럽 다 다녀서 나는 솔직히 엊그제도 만났지만 세계적인 학자라고 내 앞에 와서 앉았어도 나는 솔직히 주눅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왜? 자기가 나에게 주눅이 들어야 합니다. 자기는 자기 전공밖에 모르지만 나는 목회를 하는 사람이고 저기 천문학부터 시작해서 생물학부터 시작해서 신학까지 골고루 다 해야 되는 설교자입니다. 내가 늘 이야기하는 것은 너는 학자니까 나에게 말 한마디도 굉장히 조심스러운 것이다. 나는 부담이 없다. 나는 서울도 아니고 이 변두리에 있는 시골교회 목사다. 내가 말을 정확하게 안한들 그렇게 부담이 되겠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누구를 만나서도 내가 세 시간씩은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옥스퍼드를 갔더니 박사과정 학생 하나가 나를 투어를 해주었습니다. 잘 모르는 학생이었습니다. 목사님 부탁을 받고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자네는 전공이 무엇인가? 수퍼스트링이라고 초끈이론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했던 초끈이론입니다. 이 친구가 그 당시 나이가 스물 한 살인가 스물 세 살이었고 중학교 월반 고등학교 월반 월반 해서 2년 후에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합니다. 초끈 이론에 대해서 한 시간 반 동안 토론을 했습니다. 이 학생이 ‘목사님은 뭘 하시는 분입니까?’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라든지 차원의 이야기들을 하면서 흥미진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부담이 없습니다. 저는 역사신학을 전공했습니다. 내가 세 시간이야 할 이야기가 없겠느냐. 미술을 전공했다. 두 시간이야 내가 할 이야기가 없겠느냐. 우주공학을 전공했다, 한다면 두 시간이냐 내가 할 이야기가 없겠느냐. 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후회가 없고 이렇게 공부하는 방식이 18세기까지 신학자들의 공부방식이라는 것을 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나는 새로운 세계의 학문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5년 전에는 잠깐 동안은 양자역학에 깊이 심취해서 공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냐 하면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온 우주가 열리는 것 같은 엄청난 학문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 학문적인 토양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우주가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공부를 한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과 저 시골 할머니, 한글도 잘 못 읽는 할머니가 주님을 깊이 만난 것 사이에는 종교적인 차이점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공부라는 것은 그 자체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갈멜산 위에 벌려진 장작과 같은 것입니다. 장작이 없었으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도 흙만 태우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작에 불이 붙으면서 불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학문과 신앙이 그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존귀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모든 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학문이 결국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엄청난 발견인 것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라는 사람이 로고스 실제론이라는 이론을 제시합니다. 로고스 리얼리즘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도 이미 학문은 존재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었던 이유를 로고스 실제론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연도 계산을 할 수 있는 약 2천 년 전이지만, 소위 이야기하는 아사르크스 크리스토스, 육체를 아직 입지 않은 그리스도는 모든 이 세계 속에 신성으로서 편재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이 학문들 속에 있는 원리, 지식의 체계,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덧입어서 로고스이신 그 성자를 덧입어서 그 모든 학문의 지식의 얼개들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학문이 가능해지는 것은 그 학문의 지식의 대상인 사물 속에 이미 관계를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의 실제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래의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그 학문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어서 모든 사물 안에 있고 그 모든 제시된 지식들은 더듬어서 올라가면 그리스도가 나오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못 만났기 때문에 그냥 학문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학문을 들어서 학문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비판하고 부인하는 데 이 학문들을 사용하니까 결국은 신앙이 없이 학문을 한다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천문학을 공부해 보면 천문학자들이 천문학적인 사실은 알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학을 한 사람들이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최고의 학문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학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그 사랑을 가지고 이 모든 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한분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엮여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성경이 우리에게 주신 지식을 중심삼아서 모든 학문들의 지식들을 수단으로 삼아서 그것들을 모두 사용해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증거 받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 증거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높이며 살고자 하는 열망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공부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신앙이 식었다고 하는 것은 공부하는 방식이 잘못됐고 내용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학교의 마크로 쓰는 것처럼 삐에따스에떼 아카데미아, 경건과 학문이지 않습니까. 원래 칼빈은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시킨띠아라고 했습니다. 경건과 지식, 혹은 경건과 학문이라고 하는 커다란 모토가 여기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언제나 경건이 먼저입니다. 지식이 모자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가 아는 것,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 그런 충만한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 세계 전체가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하는 시대가 오도록, 그런 시대가 앞으로 올 때에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교회가 먼저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런 소명을 받은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학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학생들을 만나서 항상 마음이 아픈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공부를 안하는 학생들은 아예 포기를 진작 해버리고 학문에 대해서 적절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공부를 잘한다고 하면 딱 생각하기에 저건 기도는 절대 안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리고 공부 못하는 사람을 모두 진짜 매일 기도원 다니는 사람일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공부 안하면서 맨날 tv나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목회를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공부를 해라 공부를. 네가 만약에 제자훈련이나 찬양집회나 무슨 신사도운동을 배우러 다닌다고 치자. 아주 잘했다고 치자. 그리고 그것으로 목회를 성공해 보겠다고 치자. 레드오션입니다. 레드오션 아시죠? 무한경쟁입니다. 똑같이 하겠다는 사람이 주위에 많습니다. 매일 경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매일 공부를 해라. 말씀에 깊이를 더해라. 그러면 블루오션입니다. 경쟁자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나는 목회를 하고 나서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나라에 있는, 혹은 다른 나라야 그런 마음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만, 나는 다른 목회자들을 단 한 번도 나의 경쟁상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점령하려고 하는 시장과 내가 점령하려고 하는 시장이 달랐습니다. 거기에는 경쟁자가 많습니다. 여기에는 경쟁자가 없습니다. 한번도. 책을 써도 누구의 잘팔리는 책을 보면서 이 사람은 나의 경쟁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나만을 위한 독자의 세계를 걸어갑니다. 나는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도 하지만 나 홀로 광야를 걸어가서 사람들을 광야로 나오게 했던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릎이 닳도록 기도하고 팔꿈치가 닳도록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럼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원래 공부할 머리가 없는데요. 압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재능과 소명은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에 특별한 달란트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명은 달란트하고는 상관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가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공부에 모두 재능이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연극을 한다면 모두 김태희가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만약 성령운동을 한다면 모두 조용기 목사님이 되겠습니까? 제자훈련을 한다면 모두 돌아가신 옥한흠 목사님이 되겠습니까? 찬양집회를 한다면 여러분이 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없고 우리는 그런 인생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을 주체성 있게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싫어하는 말이 날보고 와서 책 들고 나 팬이라고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나는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그런 게 필요할지 몰라도 나는 그런 사람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각자 자기 세계를 살아가십시오. 자기 인생에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이야기 하면서 주체성 있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못하는데요? 못하면 그냥 많이 기대 안하시니까 하나님이, 그 선에서 공부 안했더라면 못했을 것보다는 훨씬 잘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마음에 막 쿵 하는 좌절감 같은 것이 생깁니다. 책같은 거 읽을 때, 특히 유럽 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서, 야 어떻게 이렇게 깊이 공부했을까, 어쩜 이렇게 잘했을까, 가슴이 서늘합니다. 어떻게 보면 시기심일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무얼 했나, 나는 왜 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위로하는 것은 나도 평생 이거 하나만 파라고 했으면 나도 그 사람만큼 했을거다, 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워낙 많은 일을 했으니까. 또 이렇게 대신대까지 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고 살고, 하나님 나는 내 분량 내 그릇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 뿐입니다, 그러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신학공부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문장단절
아까 오다가 다큐멘터리를 하나 봤습니다. 아이패드에서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천재의 조건이 있답니다. 넘치는 영감, 즉 천재성과 피나는 노력이랍니다. 근데 사람들은 천재를 생각할 때 항상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어마어마한 영감만 생각하지 노력은 생각을 안 하는데 사실 천재들은 엄청난 노력가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덧붙이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천재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무엇이냐. 시련. 시련. 연애에서 실패하는 실연이 아니라 시련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시련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시련이 그를 뒤흔들어 놓을 때에 이 천재성과 노력이 버무려지면서 예기치 못했던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단테입니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사랑합니다. 둘이 연애를 한참 한 게 아니라 어렸을 때 한눈에 반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사랑하다 죽습니다. 그리고 딱 한번 베키오 다리에서 그 여자를 만납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하면서 짝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안고 죽는 것입니다.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시련이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는 그 아름다운 문학작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정말 동의됩니다.
제가 목회를 해오면서 어떤 커다란 신학에 대해서 눈을 뜨면서 번쩍 번쩍 번쩍 하고 비춰주시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었습니다. 모두 죽을 것 같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그것이 주어졌습니다. 최근에 제가 쓴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책도 사람들이 별로 재밌어하진 않습니다. 너무 지루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지만 아주 기독교에 있어서 너무나 결정적인 문제들을 그 책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래도 꽤 많이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그런 것들도 보면 어떤 커다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를 여시고 또 다른 세계를 여시고 또 다른 세계를 여십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될까.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시련이 아니고 무엇이겠나이까.’ 죽을 때까지 우리는 한 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시련, 또 다른 시련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끌려가는 것처럼 지긋지긋한 마음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순교자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그런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들을 누리면서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으로 이 모든 학문들을 사용해서 전체적으로 이 안에서 종합시키면서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정의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자신의 온 설교로 온 인격으로 온 몸으로 온 학문으로 보여주어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사는 일생이 되는 것이 진정한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인생을 다 끝날 때 “정말 예수님 때문에 내가 행복했다. 내가 다시 태어나도 주님을 믿고 싶다. 그리고 이 모든 세계가 정말 아름답다. 하나님 한 분을 향한 위대한 영광이 모든 학문과 신앙과 세계 속에 있구나. 하나님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어지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 죽는 것이 신학공부 하는 사람의 일생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