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대로 세우신 일꾼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
녹취자: 오희정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원리는 사람이 단체를 수립하고 회사를 세우는 원리와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단체나 회사를 설립할 때는 세운 그 한 사람이 분명한 뜻을 가지고 회사를 세우고 그 다음에는 그 회사의 뜻은 잘 몰라도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에 말을 잘 듣고 따를 사람들만 능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골라서 적세적소적제에, 적세적소에 배치를 하고 끌고 가면 끌려갑니다. 그리고 그게 이 세상에 나라나 단체나 그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조직의 원리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러한 단체에서는 입에 혀같이 움직이는 그 지도자에 마음에 잘 맞고 순종하는 그런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세상에 경영에 원리가 너무 많이 교회에 들어와 있어서 합리화라는 미명하에 이런 성경의 규율들이 많이 회손 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7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6절에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만유를 통일하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다’라고 그리스도를 묘사한 후에 그 다음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즉 ‘은사’겠죠? ‘그리스도의 은사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여기서 분량대로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크기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뭐라고 말을 할까, 참 어려운데 이게 라틴어로 ‘맨수라’라는 그런 그 딱 뜻에 의미인데, 이 분량은 단순히 크기를 의미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물마다 이렇게 각자가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이거는 책이 되고 이거는 컵이 되고 이건 책상이 된 겁니다. 그럼 여기서 분량이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크기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다양성, 그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 사람이 되고 그 일을 하기에 적합가게 된 ‘그것’을 가리켜서 여기서 ‘분량’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 ‘분량’이, 분량을 하나님이 따라서 은혜를 주셨는데, 그 분량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겉에로 주셨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우리에게 주신 것
입니다.
(예화) 제 친구가운데 하나가 있는데 신실한 형젠데, 신학을 공부 하다가 중도에 포기를 했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랬더니 신학교를 한 2년을 다녔는데 전혀 설교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몇 사람만 있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더듬고, 그걸 가지고 기도를 많이 했는데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은 자기에게는 이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는 은사가 없다. 그래서 어느 교수님하고 상담을 했더니 “당신에게 은사가 아무리 찾아도 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은 소명이 아니다” 그러면서 헤르만 바빙크의 말을 인용을 하시더랍니다. ‘소명은 은사에 의해 확인이 된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이제 지금은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난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분량, 결국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설교자로 쓰실 려면 말을 잘 할 수 있는 기술을 이미 주신 겁니다. 만약에 우리를 선교사로 사용을 하시려면 이국에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적응력을 주신 겁니다. 우리를 만약에 독신으로 사용하시려면 혼자 살아도 괜찮은 적응성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야 되는 겁니다.
이런 이치에서 본다면 사실 하나님이 분량은 사람들이 정해놓으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이 영원한 계획 속에서 ‘나는 너를 목사로 써야 되겠다’ 이렇게 정해 놓으시고 거기에 합당한 은사를 주시고, 자연적인 은사를 주시고, 그 위에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셔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셔서 그래서 쓰게 하셨으니까 분량대로라고 한들 우리가 좌절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고 또 받았다고 해서 교만할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분량대론데, 분량은 각각 다르나 은혜는 동일한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그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좋은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잘 하는 그 맨 밑바탕은 뭐겠어요? 그리스도 예수에 십자가에 사랑에 대한 감격, 영혼에 대한 뜨거운 눈물, 말씀에 대한 진실한 사랑, 자신을 어찌 하든지 깨뜨려서 주님에 말씀 앞에 복종시키고자 하는 그런 신실함 그런 것 아니에요? 구역장도 그걸 잘해야지 구역장을 잘하는 겁니다. 어디 구역장만이 겠어요? 집에서 계속 문제 일으키는 자매들 많잖아? 집에서 좋은 아내가 되도 그게 되야지만 좋은 아내가 되는 겁니다. 간사가 되도 마찬가지죠. 왜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에 이익만을 생각을 하면서 꾀를 피우는데 어떤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다못해 교회에서 쓰레질을 하면서도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똑같이 아까 이야기한 목사를 참된 목사가 되게 하는 그 자질에서 나오는 거라 이 얘기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의 은혜일 뿐 이예요 그거는, 하나의 동일한 은혜예요. 그래서 내가 항상 주례식 설 때마다 이야기 하잖아요? 결혼과 함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해져? 전에는 그저 나 혼자 청년, 임성우 였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까 누구 아빠 그것도 애들 둘 셋씩 나으면 아빠의 지위가 셋이나 되잖습니까? 그 담에 아내야 뭐 여럿일 수 없지 만은 한 아내의 남편이지, 그 담에 그 아내 만나지 않았으면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관계들로 들어가잖아요? 형부, 뭐 제수 뭐 제부 뭐 그 담에 동서 처남 매부 어마어마하게 많은 관계들이 그럴 때 들어오는 겁니다. 그걸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안에 진실한 아들이 되고, 사위가 되고, 애비가 되고 애미가 되고 그 담에 처남이 되고 매부가 되는 모든 길이 그 안에 있단 말입니다. 은혜아닙니까? 이 은혜 때문에 분량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에 아름다운 통일을 이루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 이 복음 전하는 자는 옛날에 있었던 전도자들, 풀 타임 전도자들을 의미하는 겁니다. 전도자들로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 다양하게 세우신 것이죠. 그 당시에는, 그럼 여기다 또 뭐냐 면은 어 또 그런 사람들에게 쭉 하나님이 교회에 일꾼들을 세우신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일꾼만 세우셨겠어요? 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지금 거론된 이 모든 것들은 교회로 말하자 면은 영적인 그룹들만을 여기에서 지칭한 겁니다. 영적인 그룹들만을 지칭한 겁니다. 카톨릭에서 말하면은 사제에 계급들만을 지칭한 겁니다. 성경은 이것이 모두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장로이야기도 나오고 집사이야기도 나오고 일꾼들에 이야기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세워서, 하나님이 세우셨는데 분량이 각각 다르니까 사도에 일이 다르고, 선지자에 일이 같지 않고, 목사와 교사에 일이 또 틀립니다. 여기서 교사는 오늘날에 교사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목사 곧 교사 이렇게 해석하기도 하고, 후대에 와서는 이것을 인제 소위 얘기하는 ‘독도로 에끌레시아’ 그래서 교회의 박사들, 그 사람들이 교회에 선생노릇 하는 거를 가리켰습니다. 그런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워 주셨는데, 각각 일이 다릅니다.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엊그제도 우리 조 목사하고 같이 당회 수련회 마지막으로 가면서 내가 좀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너 이제 큰일났다. 인제 다 편했다. 다 편했다. 이제 가봐라 정말 외롭다.” 여기서는 뭐가 근심이 있냐 그러면은 부 목사님들이 좀 섭섭해 하겠지만 사소한 근심들입니다. 근데 담임 목회를 하면 부 목사 생활하는 거 하고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전혀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그래서 지금 조 목사는 마음이 가난해져서 기도원 들어 갔잖습니까?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있대. 음 달라요. 전혀 다릅니다. 고민하는 범위나 생각이나 이런 것들이 정말 다릅니다.
근데 그런 아주 다른 것들을 하나님께서 맡기셨는데, 그런데 중요한건 하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의 은혜. 하나의 은혜. 그래서 목회자들이 그리고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야 됩니다. 그 교회에서 그런 은혜가 가득해야지만 이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다양한 일들을 주셨는데, 그 목표가 뭐냐, 목적이 뭐냐
면은 12절에 세가지로 의심할 여지도 없고,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없이 명쾌하게 제시가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랬습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럼 뭐 성도들이 불온전하다라는 뜻입니까? 물론이죠. 여기서 온전하다라는 히랍어가 뭐 건전하다 불건전하다 그런 뜻이 아니라 ‘다 자란’ 그런 뜻 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도, 어린 아이도 완전합니다. 뭐 예를 들어서 어린 아이면은 사람이 아니다. 왜 미성년자는 입장료 60%만 받습니까? 네가 60%만 사람이기 때문에 60%만 받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지금은 중국이 많아 나아졌습니다. 돈을 하도 버는 방법을 터득해서 이젠 많이 나아졌는데 옛날에는 제가 맨 처음 다닐 때만 해도 만리장성 들어가는데 중국 사람은 10원이고, 외국인은 20원입니다. 사실은 우리나라 같으면 거꾸로 해야 맞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외국인이 항의를 했대요. 왜 20원이냐? 왜 사람 차별하냐? 이랬더니 얘네 할아버지들은 이거 쌓는데 돌 짐 졌지만, 너네 할아버지가 만리장성 쌓는데 도움준거 있냐? 외국인들도 할말이 없는 거죠. 진짜 자기네 할아버지들은 여기 중국까지 와 가지고 뭐 사역 했을 리는 없거든? 그 할말이 없는 거죠. 그걸 아주 당당한 논리로 제시를 하는 겁니다.
근데 우린 아이들 입장료를 적게 받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럼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직분을 맡기셨지만, 그 목표는 한결같이 ‘성도를 다 자란 사람으로 길러내는 겁니다. 이것을 존 오웬 목사님은 성장을 이야기하면서 세 가지를 제시하셔요. 그게 뭐냐 하면은 ‘지식적인 성장’ ‘영적인 성장’ 그 담에 ‘생활의 성장’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 ‘지식적인 성장’은 뭐냐 하면 아는 것에 있어서 아주 탁월하게 어른스러워 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영적성장’은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으로 더욱 충만해지게 되는 겁니다. ‘생활의 성장’은 하나님에 복음의 말씀의 교리를 따라서 생활하는, 그런 언약에 충실한 생활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사람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길러내는 겁니다.
근데 그런 성장이 우리가 모든 사역, 설교를 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마당을 쓸기에 이르기까지, 하다못해 꽃꽂이 하나를 해도 그 하는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성도를 그렇게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신 이유다 이 얘기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은 봉사에 일을 하게하기 위한 것, 이거는 히랍어 성경에 보면은 어떻게 되냐면, 성도를 다 자라게 하는데, 봉사에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성도를 자라게 하며,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온전히 자란 그 결과가 full grown to do the services 뭐 이런 식으로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다 자라게 하고 또 하나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사람들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몸소 실천을 하고 모본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동참하면서 순종하고 복종하게 하는 그러한 생활이 훨씬 더 필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리더십 전문가 가운데 지금은 다 옛날 사람들이 됐겠습니다만, 엥스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자기에 ‘다이나믹스 오브 리더십’ 이란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언제가 교회를 갔는데 목사님이 위험하게 사다리를 높이 올리고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교회를 색칠하고 계시더란 겁니다. 그래서 거기 교회에 일꾼들도 있고, 또 그런 위험한 일은 업체에 주어서 칠을 하게하면 될 텐데 왜 목사님이 직접 거기에 올라가서 그 일을 하십니까? 그랬더니 이 목사님에 말이 성도들이 이렇게 교회를 봉사해야 된다는 것을 모본을 보이기 위해서 내가 몸소 여기에 까지 올라와서 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그것을 인제 엥스톰은 자기에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들이 모본을 보일 영역이 많이 있지만은 그 사다리에 올라가서 거기에서 위험하게 매달려서 칠을 하는 것은 목사가 보여야 할 모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방면에서 보여야 할 모본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겁니다.
봉사에 일을 하게 하는 것은 그러니까 뭐 여러분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가장 관심사는 뭐냐 하면 이 일을 누구 시킬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거는 자기에게 그런 지위가 주어졌을 때 일이지. 항상 어떠냐면 어떤 일이 주어지면은 이 일이 혼자 할 수 없는 일일 경우에 이 일을 누구와 같이 한마음을 품고, 일을 하면서 함께 교제하고 기쁨을 나눌 수 있을까? 그걸 생각하면서 먼저 동역할 사람을 찾는 겁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이걸 잘 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맡겨도 항상 사람이 주위에 꼬여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 교역자들에게 항상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매력이 있는 사람이 되야 됩니다. 매력이 없으면 나중에 보면은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자기는 워낙 말씀대로 하니까 사람이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건 그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면은 사람들이 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는 아니지만 있기 때문에 말씀대로 하면 그게 또 좋아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과는 다르게 하나에 인간적인 매력입니다. 매력. 세속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품성적인 매력입니다. 왠지 그 사람하고 차라도 한 잔 마시게 되면은
왠지 커피잔을 들고 딴 자리로 옮겨가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되선 안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은 외면하고 싶은 사람, 어디에 가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렇게 되면은 안됩니다. 그런 매력을 좀 가져야 됩니다. 근데 그런걸 갖는 가장 좋은 비결은 뭐냐 면은 남을 자 배려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은 사람들에게 그런 매력을 줄 주 있습니다. 어쨌든 뭐 여러 가지가 있지 만은 아무튼 성도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는, 그래서 여러분들도 보면은 어떤 사람은 일을 맡겨주면은 항상 동지들을 잘 찾아, 그리고 함께 일을 해 그리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기쁨을 느껴, 그걸 자극을 주고 도전을 주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회로 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주 훌륭한 말하자 면은 사역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어떻게 하는 거냐 하면 ‘그리스도에 몸을 세우게 하려함이라’ 그럼 언제 그리스도에 몸이 무너졌어요? 그 뜻이 아니죠.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렷을 때도 사람 커서도 사람인데 점점 나이가 들고 성숙해 지면서 어른스러워 지듯이 교회도 그렇게 힘이 있고 어른스러워 지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게 이게 성경에 이야기하는 단 하나에 성장입니다. 성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장은 종합적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의 경우, 아이가 자람에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 보시기에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랬잖아요? 그 내면과 외면이 전체가 되는 겁니다. 키를 키울 것이냐, 내면에 정신을 키울 것이냐 그런 선택치가 가능할까요? 몸무게는 그냥 있고 성장 억제제를 맞았기 때문에 이 아이가 지적으로는 아주 어른스러워졌다 그런 게 가능하겠냐 이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커가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들려고 온전한 마음을 기울이면 그럼 사람이 되어가는 겁니다. 사람이. 그러니까 그렇게 교회가 세워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우리에 몸에 60조개나 되는 세포가 죽는 게 있으면 살아나고, 살아나는 게 있으면 죽고 하는 일들이 계속 되풀이 되어서, 몇 년 후면은 우리에 몸 전체가 다 그렇게 변화가 되듯이 우리 교회도 오늘 은혜 받은 사람들이 또 내년에는 미끄러지고, 내년에는 은혜 받은 사람들이 올해는 미끄러진 사람들일 수 있잖아요? 그거는 일평생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숙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놀랍게 13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에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충만하게 이르리니’ 그래서 여기 우리 속에는 누구도 포함 하냐 면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다른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복음 전도자들과 목사와 교사와 이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는 겁니다. 근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 사람들이 자기들도 함께 성장해 가야 하는데, 그 핵심이 뭐냐 하면은 ‘믿는 것과 아는 일’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있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개개인이 영적으로 성장할 때 그것이 교회를 위해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일인데 교회에 어떤 일이 있었냐 면은 구역이 하나 있었는데, 생활도 안 나고 쫌 삐딱하고 구역에 식구들이 좀 그랬습니다. 남성 구역이었는데. 그 중에는 또 교회에 대해서 반감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고 그랬습니다. 늘 거기에서 내가 직접 만난 건 아니지만 부 목사들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삐딱하고 회심 안 했습니다. 그러다 그 사람이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같은 구역에 있는 또 한 사람이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변화가 일어나게 되니까 원래 은혜생활 잘 하던 사람들이 은혜 못 받은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별로 없습니다. 저 사람은 다른 세계에 사람이니까. 근데 회심 안 하던 사람들끼리 모였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이 회심해서 ‘내가 주님을 만났는데’ 이렇게 말을 하면 거기에는 강력한 권위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얘기를 하더라고 주위에서. 자기 굉장히 친한 사람이 회심을 했는데, 어느날 돌아와서 딴 사람이 되어서 복음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담임 목사님 설교할 때는 계속 잤는데, 그 사람이 말할 때는 무섭더랍니다. 무섭더랍니다.
(예화) 근데 그런 경험을 목회하면서 여러 번 했습니다. 고등부 전도사 할 때도 거기에 이 변호사집 아들이라고 하여튼 개고기가 하나 있었거든, 교회 바로 옆에 사는데, 하여튼 온갖 망나니 짓은 혼자 다하고 하여튼 나한테 빠따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나는 뭐 그냥, 절대 여러분들 그러지마. 나는 뭐 대걸레를 붕붕 날리면서 막 두들겨 팼거든, 드물긴 했지 만은, 일년에 한 두 번 씩. 반 죽였습니다. 나한테도 엄청 맞았어 하여튼, 그런데도 안 떨어져 요즘 같았으면 뭐 전도사가 사람 팬다고 돌아 다녔을 텐데 그래도 어쨌든 그랬습니다. 근데 이 녀석이 학교 다니면서 하도 사고를 치니까 그 아버지가 얘를 절에 보내버렸어 그 아버지도, 우리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 수시로 교회하고 가끔 마찰도 있고 했는데, 시끄럽다고. 절에 보내 버린 겁니다. 큰 형이 이제 고시 공부하러 절에 들어가니까, ‘야 이자식 여기다 혼자 둬 가지곤 사람 안되겠다 네가 데려 들어가서 검정고시 시켜라’ 그래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1년 있다가 교회에 돌아온 겁니다. 근데 하여튼 얼마나 장난꾸러긴지 주일날이면 새벽 4시에 모여 가지고, 교회에, 모여서 기도를 했냐? 그러면 내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새벽 4시에 등산을 가서 사직동 골짜기 글루 올라가가 지고 산에 가 가지고 이 놈들이 라면을 끓여 먹어, 그러고 하산하러 내려오는 길에 교회에 들른다고. 예배 간단히 드려 가지고 그 담에 하루종일 농구 하러 다니는 겁니다. 하튼 뭐 온갖 말썽은 다 피우고 그랬는데, 아주 뭐 단짝이 되어서 한 열명이 그 마치 뭐야 오래된 찰떡 엉겨 붙듯이 그러고 돌아다녔거든? 그런데 얘가 일년 후에 돌아온 겁니다. 근데 얘들이 다 회심한 겁니다. 돌아왔는데 마치 그 와서 똑 같은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아무도 동조해 주지 않는 겁니다. 그러고 하는 말이 “너 하나님은 살아계셔” 내가 그 얘기 수없이 했거든 설교 시간에. 비웃고 자고, 중간에 나가고, 늘 성경 가르칠 때는 고개 숙이고 있고, 오락회 할 때는 온갖 기가 사는 애예요. 근데 친구들이 그렇게 하니까 얘가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결국 회심 못한 거 보고 왔는데, 근데 그러한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어도 한 은혜 안에서 신앙 생활을 잘 해야 됩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섬길 수 있는 힘과 동력들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에 신앙생활이 교회를 세워가는데 참 중요하구나, 그래서 교회에서 이렇게 섬기고 있는 일꾼들에 신앙생활은 개인적일 수가 없는 겁니다. 신앙생활 그 자체는 전부 다 개인, 나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런 거 습니다. 전부 다 교회적인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 안하고 그러는 것도 교회적인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람을 통해서 세워 가시는데, 그러니까 참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그래서 교회에 일꾼들이 있으면서도 우리는 교회의 일꾼들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그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