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 수련회(2)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겔 1:1~3)
녹취자: 정유선
에스겔 선지자가 부름 받은 소명의 이야기를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선지자였는데 제사장의 아들 에스겔이었습니다.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나났으면 제사장이 되는데 그런데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원래 이스라엘 역사에서 제사장의 마인드와 선지자의 마인드는 충돌을 했는데 이 사람은 제사장인 동시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적인 선지자의 모습으로 예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다시피 제사장의 관심사는 전통에 있었고 제사에 있었고 하나님의 죄 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데려갈까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선지자는 계시의 편에 있었고 하나님을 어떻게 이 백성들에게 알릴 것인가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사장과 선지자의 마인드는 다르지만 에스겔 안에서는 이 두 개가 아주 잘 통합이 되어서 그래서 에스겔의 책에 보면 아주 칼 같은 계시의 말씀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인식이 아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스겔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선지자로서 괄목할 만한 사역을 하게 된 소명의 특징이 세 가지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제일 먼저 이 사람에게 하늘이 열렸습니다. 여기서는 모습이라고 번역이 돼있는데 하나님이 무슨 모습을 보였겠습니까? ‘하존’이라고 히브리말로 이상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아주 정확한 말로 환상이 아니라 반현실적인, 그렇다고 해서 환상은 아닌, 그래서 영어의 가장 좋은 번역이 비전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에스겔 선지자에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에도 나오고 선지서마다 그 선지자의 기본적인 자격은 하나님의 비전을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보게 된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해석이 다르겠지만 여기의 얘기는 그 ‘하존’이 하나님 자신의 형상, 모양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앞으로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역사라든지, 구속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구체화된 비전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비전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제 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비전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비전이 자기 계발적인 비전이 아니라 이런 것입니다. ‘아, 정말 참 예배는 이런 거구나. 진정한 설교가 이런 거구나. 또 진정한 기도가 이런 거구나. 참 사랑이 실현되는 공동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그런 것들이 경험될 때 그것이 하나의 우리의 어떤 표준이 되고 목표가 되는데 그것이 비전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진정으로 거룩히 여김을 받는 그런 것이 무엇일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렇게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비전을 갖는 것은 목회에 있어서 아주 또렷한 표준이 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것이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주실 때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제 여러분들에게 내년에는 교회 전체가 잘 되는 것 그것말로 물론 그것은 우리들이 계속 함께 노력하면서 추구해야 될 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내게 맡겨진 교구나 부서에서 부흥을 보라, 그때 그것이 모든 사역에 있어서 표준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주실 때 그것이 가능하다 그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지난해에도 봄에 설교하는 것 들어보면서 내가 평가를 한번 했지만 그리고 내년에도 하겠지만, 정말 개인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만큼만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를 아직 많이 안 해봤기 때문에 표현이 좀 부족하거나 이런 것들은 극복하면 됩니다. 언어학적인 재주도 모자라서 끝까지 극복이 안 되면 그 모습 그대로 하는 것이고 어쩔 수 없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하잖습니까? 사람마다 음식 솜씨가 다 다르니까 이 사람은 이 맛, 저 사람은 저 맛을 냅니다. 그런데 고기요리를 한다고 치면 고기가 워낙 맛있으면 재주가 없어도 기본적인 맛은 있습니다. 그런데 고기가 싱싱하지 않고 맛이 없으면 재주를 많이 의존해야지만 좀 낫고 먹을 만하고 그렇지 않으면 맛이 없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서 목회사역의 비전을 갖는 것은 마치 설교에 있어서 하나의 원재료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본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살아있습니다. 표현이 좀 달라도 그 속에서 천국의 향취가 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없을 때 깊이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주님을 깊이 만날 확률은 줄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우스갯소리로 목사가 돼서 변화 받은 사람은 박순용 목사 하나밖에 못 봤다고 얘기를 하는데 안변합니다. 절대 안변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목사가 된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설교스터디를 거의 2년 가까이 했잖습니까? 요새 너무 바쁘니까 좀 쉬고 있는데 하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아무리 여러분들이 열심히 들어도 성도들이 상한 마음으로 교회에 와서 그 말씀이 선포될 때에 듣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은 것처럼은 안 됩니다. 절대. 그러니까 벌써 갈망이나 동기 이런 것들이 다른 것입니다. 인턴십을 하면서도 정말 많이 읽혔습니다. 책도 많이 읽히고 테이프도 많이 듣고 정말 죽을 정도로 숙제도 많이 내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변화되는 사람은 아주 미미합니다. 그래서 ‘아, 이게 한계구나’. 그런 원인이 어디서 오냐면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주시는 경험, 그것은 목회의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입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를 듣고 신학 책도 읽고 하지만 정말 간절하게 무얼 만나본 적이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깊이 몸부림하라는 이유가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열어주시도록. 목회 하면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임했고’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전해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마치 다이아몬드의 면처럼, 다이아몬드가 이렇게 보면 투명하고 찬란하게 빛나지만 면 깎은 것마다 반짝임이 다르듯이 선지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주었지만 각 선지자마다 특징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사야가 영광이었다면 미가는 공의였고 긍휼이었고 또 호세야는 사랑이었고 하박국은 믿음이었고 등등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이 필요하니까 네가 전해라 그렇게 주신 적은 없습니다.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질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 개인에게 먼저 주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하박국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속에서도 주님의 일정하신 나타나심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라 그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하박국 자신이 회의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라는 것이 아니라 회의주의자에게 하나님이 그 메시지를 주셔서 “아, 나는 하나님의 의인으로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되겠구나.” 그것을 자기가 먼저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예를 들어볼까요? 6장에서 웃시야왕 때 소명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났을 때에 선지자가 제일 먼저 인식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큰일 났다. 나는 부정한 자들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뵈오니까 그 주님을 너무 전하고 싶어서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주님의 거룩하심을 모르는 백성들을 보니까 너무 비참한 생각이 들어서 나라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소명의 엄중함과 자신의 더러움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숯불을 가지고 지져버리신 것입니다. 시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예는.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경건한 선지자인데 호세아 1장의 이야기를 신화로 보는 사람이 있고 비유로 보는 사람이 있고 역사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역사주의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선지자가 그런 여자한테 장가들 수 있냐, 선지자의 거룩함에 위배된다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벌거벗고 엉덩이를 내놓는 것은 거룩함에 적합합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행동예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것은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하나님의 아가페였습니다. 헤세드라고 그것을 전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답해 보십시오. 호세아는 원래 자기 마누라가 아무리 더러워서 이방남자하고 동침해서 애를 낳고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해도 그렇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 선지자는 선지자로 부름 받기 전에 이 세상 모든 창녀들을 그렇게 사랑했겠습니까? 가까이 하고 싶었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선지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남자라면 누구나 경건한 여자가 좋고 자기 한사람을 정조 있게 사랑하는 여자가 좋지 어디 가서 개처럼 굴러 눕는 여자를 좋아할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고멜을 볼 때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이 먼저 선지자의 가슴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미네징거라고 그러잖습니까? 그런 미네징거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녹아내리는 헤세드의 사랑의 정체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그렇게 박해를 해도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1장에 보면, 한 28년 전에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3절인가 4절에 ‘최초로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하니라’ 하고 나옵니다. 여기에 호세아 앞에 전치사가 붙는데 ‘왜’ 라는 전치사가 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 속으로 into, 뚫듯이 관통하듯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서 호세아 자신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입니다. 그럼 그것으로써 백성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특별히 임한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신약을 제가 해보니까 신약을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그것은 갈멜산에 쌓아올려진 장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자체를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거기에 풀이 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특별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을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는 그것이 아주 장중하게 커다란 사상과 얼개를 가지고 장중하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고 웅장합니다. 그래서 공부는 계속 해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그래서 남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차를 타고 가다 방송도 듣고 여러분들이 하는 설교도 듣고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안타까운 것은 설교자가 ‘아, 저 사람은 저 설교를 쏟아놓지 않으면 정말 힘들겠구나’, 무슨 뜻이냐면 저 사람은 저 말을 너무 너무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가슴에 불붙어서 정말 저 말씀을 사람들에게 쏟아놓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 저 안에 있구나 그게 느껴져야 됩니다. 그것이 특별한 말씀입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결한 삶에 대해서, 공의에 대해서 등등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얘기했던 골수에 사무친다, 자신이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들이 그 진리를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자신 안에 그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외침, 전하지 않으면 가슴에 불붙는 그 무엇이 있으면 그 사람은 말하는 것도 다르고 섬기는 것도 다르고 아무 말 안하고 옆에 앉아서 숨을 쉬어도 숨소리도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있는 이유가 다르기 때문에 숨소리도 다르게 들립니다. 그것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공부를 한다고 존재의 울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안하다고 생기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화) 김동준이라고 인턴십에 학생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김진웅 장로님 아들이라고. 외대 나왔으니 똑똑하겠지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권사님하고 와서 은혜를 받으시고 심방을 하는데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신학을 하니까 나한테 인사를 시키려고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뭔가를 이야기를 자기한테 해주기를 부탁했습니다. “신학대 바로 들어갔으니까 열심히 공부 많이 해라. 남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 그리고 왜 공부해야 되는지 얘기하는데 정말 그 어린 학생이 받아들이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책도 몇 권 갖고 와서 줬는데 안 읽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는 얼마가 됐는데 인턴십을 하겠다고 신청을 했습니다. 자기가 김진웅 장로님 아들이라고. 그 친구 어디 들어갔냐면 김용의 선교사가 하는, 김용의 선교사가 1999년도에 우리 교회에 와서 2000년도에 한 번 집회를 했습니다. 교사 수련회 때. 순수하기는 했는데 조금 지나쳤습니다. 얘네들을 모아 놓고 신학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준 것입니다. “공부 아무짝에도 쓸데없다. 오직 복음이다.” 사실은 그게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는 역사가 증명을 합니다. 신학이 없이는 오직 복음도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가서는 그런 신학에 대한 적대감 속에서 살았으니 거의 풀타임으로 헌신하다시피 지낸 것입니다. 3년 지나고 나니까 공부한 것도 없고 그러면서 공허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그러고 와서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에스겔이니까 특별한 말씀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학이 없이 특별한 말씀이라고 자기가 오버하면 홍혜선 전도사 같이 12월에 전쟁난다고 하나님이 그러시더라 그럽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음이라’ 권능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권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령의 엑소시아입니다. 왜 그런지 저항할 수 없는 말씀의 권위, 큰 능력 그것이 에스겔 위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세 가지를 적용해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것, 말씀이 특별히 임하는 것, 마지막에 여호와의 권능이 그 위에 있는 것, 이것이 여러분에게 정말 함께 하도록 그렇게 여러분들이 새로운 삶을, 사역을 내년도에 감당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