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섬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녹취자: 백지영
오늘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연합과 섬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생각할 때 오늘날의 신관을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신관이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관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신관은 이신론적(理神論的)입니다. 이신론이라는 것은 데카르트, 칸트 이런 사람들이 나오고 나서 유럽에서 자연과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뉴턴이 쓴 ‘프린띠삐아’, 우리말로 하면 ‘원리’라고 하는 것인데 정확한 제목은 '자연학의 수학적 원리' 이런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자연현상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학으로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뉴턴의 ‘프린띠삐아’라는 책, 이 책이 세계정신사에 미친 파장은 그 어떤 책이 미친 영향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입니다.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파장을 미쳤느냐 하면 예전에는 자연현상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서 무엇인가 그 뒤에서 초자연적인 힘이 역사한다고 보았고 기독교권에서는 당연히 하나님 아니면 마귀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자연현상이 한결같이 도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천둥이 친다든지 번개가 친다든지 벼락이 떨어져서 집이 불탄다든지 사람이 죽는다든지 아니면 전염병이 일어난다든지, 전염병이야 수학 원리하고 다르지만, 어쨌든 그러한 현상들이 하나님의 진노, 분노, 도덕적인 의미의 표현이라고 보았는데, 그것을 뉴턴에 의해서 만유인력이 발견되고 이런 것들을 수학으로 풀고 나니까 사실은 자연계 안에 있는 규칙적인 질서와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때까지는 대기권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무슨 상대성 원리가 적용된다든지 아니면 원자 이하의 세계로 내려가면 거시세계에서 통용되는 법칙들이 아닌 또 다른 법칙이 작용한다든지 그런 것들은 눈뜨지 못했기 때문에 이 법칙이 어디로 가든지 모두 통하는 획일적인 법칙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와 현대의 사상은 과학과 함께 아주 탁월하게 폭발력을 가지고 발전을 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에 지성인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 중에 하나가 과학철학이라는 분야입니다. 그래서 어떤 과학적인 것들이 발견이 되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고 특히 우리나라 출신의 학자 가운데 세계적으로 널리 이름을 날리고 있는 케임브리지대학에 있는 교수가 있습니다. 형제가 모두 케임브리지 교수인데 장하준 박사와 장하성 박사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연철학에 관한 이야기들을 아주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그런 것들이 해석에 관한 것인데 어쨌든지 간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사실은 그것이 미친 파장은 다윈의 진화론이 미친 파장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더 광범위하고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개, 뉴턴의 자연과학과 다윈의 진화론이 현대 계몽주의 사상의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 세계 속에 개입하셔서 일하신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상들이 한참 팽배해지고 있을 때에 사실은 문화적으로 변두리 국가라고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에서 그것을 새롭게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면서 쓰나미 철학처럼 밀려오는 근대사상과 싸웠던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정리를 하면 그럼 그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만약에 자연이 그런 법칙대로 움직인다면 우리의 도덕 생활도 그렇지 않을까 이렇게 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사람이 무엇을 잘못하면 하나님이 이 사람을 벌 주신다든지 다루시고 그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일정한 법칙을 만들어 놓으셔서 그래서 법칙대로 살면 마음도 편안하고 모든 게 잘 되고 이탈하면 마치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건강이 망가지듯이 그렇게 뭔가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르네상스 때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사상하고 조화를 이루면서도 하나님은 부정하지 않는 그런 제3의 길이 없을까 하고 만들어낸 것이 이신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理)는 법칙이라는 것이고 신(神)은 신(神)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직접 이 세계에 오셔서 다스리시고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법칙만을 만들어놓고 당신 자신은 저 멀리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계태엽 감아놓듯이 움직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과장이고, 법칙을 만들어 놓아서 자연세계가 정확하게 법칙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도덕세계에도 그런 법칙이 있어서 위반하면 하나님이 벌주시고 그러지 않아도 그냥 자신이 괴롭고,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질병으로 가까워지듯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법칙을 설정해 놓으셨고, 그러면 거기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그러면 그 법칙을 최대한 지키면서 그 법칙은 성경에 나와 있지만 그러나 인류가 여태까지 찾아온 도덕주의적인 원칙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 하는 그 법이나 아니면 그런 것 특별히 없이 하나님은 계시다고 지적으로 동의하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면서 만드는 도덕주의적인 생활방식이나 둘 사이에 차이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하나님 멀리 계십니다. 그런데 한없이 멀리 계시다고 하면 인간이 너무 외로워, 인간이 막 살다가 위급할 때를 만나면 그러면 하나님에게 SOS를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법칙대로 움직이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날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내 문제를 해결하신 후에는 다시 철수하시고 그래서 그냥 내가 큰 문제가 없이 살아가면 살아가고 위급할 때 부르면 하나님이 오시는 이런 종류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종교가 다른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대화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고, 결국은 그러한 사고방식의 궁극적인 근원이 르네상스부터 일어났던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다. 그래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 신이 인간의 자율을 존중해 주는 신이지 인간의 자율을 해치고 깊이 개입해서 그 자율을 비틀어서 신율(神律)대로 움직이게 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들이 광범하게 번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중생, 회심, 요새 회심에 대한 이야기들이 거의 사라져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의 양심이 하나님을 따라가면 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이신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신앙이 심각하게 변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회개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매일매일 자신을 정결케 하고 거룩하게 살고 분투하고 기독교의 진리의 유일성을 고수하고 그것을 더 깊이 터득하고 배우고 이런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구원의 신비가 이러한 신관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신비중의 진정한 신비가 무엇이냐 하면 ‘양자(養子)됨’입니다. 혹은 ‘수양(收養)’이라고도 부르는데, 우리가 이 세상의 인간인데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양을 우리입장에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 입장에서 입양하면 항상 자기가 낳지 않은 자식을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친자라고 하는 개념에 묶여서 열등하거나 혹은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사실은 피도 살도 안 섞였는데 말하자면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갖는 그래서 친자식하고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그 친밀함과는 언제나 비교가 되는 그런 종류의 불완전한 관계를 생각합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핏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양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최대한 그 오해를 걷어내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수양을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는데 우리의 죄 때문에 멀리 소원해지고 타인처럼 되었던 인간을,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그 인간을 돌이켜서 다시 친자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해가 훨씬 더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양자됨이 결국은 연합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은 영(靈)이신 하나님의 본질과 섞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말하자면 휘발성의 혼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는 분명히 다른 존재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다는 말과 우리가 직접 삼위 하나님과 연합된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이것은 좀 미묘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령은 말하자면 신성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자는 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 할 때에는 예수의 신성과의 연합이 아니라 인성과의 연합입니다. 깊이 들어가면 굉장히 신비스럽고 복잡한데, 오늘은 거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인성과의 연합이고 그래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 있는 행복을 우리 자신도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그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 우리에게 부어져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연합입니다.
그런데 이 연합이 세 지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지평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고 회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 신자 개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개인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평은 설교 속에서 늘 얘기했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과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개인과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의 연합 안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연합이기 때문에 이 두 지평이 완전히 구분된 두 지평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보는 두 각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또 하나의 지평이 있는데 세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이 세상과 연합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선 종말론적으로 생각하면 결국은 마지막에 모두 이 세상을 심판하고 마지막에 남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질 모든 한 몸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와 세상이 나뉘지만 마지막에는 교회가 곧 세상이 되고 세상이 교회가 되어서 실질적으로 교회라는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모두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과의 구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회가 결국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말에 그렇게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될 예외 없이 한 몸을 이루게 될 이 세상이 시간 속에서 그 구원의 계획이 진전되면서 누가 구원 받을지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볼 수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이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못 받겠지만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확률적으로는 그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절대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그것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일반적으로는 복음이 전파되고 그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고 이럼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고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주 예외적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면 복음전파 없이도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지능력이 전혀 없는 장애상태에 있는 사람, 그러면 그 사람들은 글을 읽을 수 없고 남이 전하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다 구원을 못 받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신학적으로 이 중생이라는 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 없이도 중생이 가능하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방법은 물론 아닙니다. 성인의 경우에는 중생과 회심이 두 개가 떨어질 수 없습니다. 또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믿는 집안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몇 시간 만에 죽었습니다. 이 아이는 인지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영혼을 가지고 있으니까 산 사람이 된 것일 터이고 이 아이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얼마든지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도 그를 중생시켜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놓고 보면, 이 세상이 어떤 사람은 결국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못 받겠지만 그리고 우리가 과거의 선교의 역사나 예를 보면서 대충 이 사람들까지는 죽기 전에 복음이 전파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확실하게 줄을 그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떤 생각을 가져야 되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시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결국 테루툴리아누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토투스 크리투스’에 대해서 배운 것처럼, 교회 안에는 거듭난 사람도 있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있고 확실하게 확정할 수 없어도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어떤 사람이 아주 개념 없이 행동하거나 불신자처럼 교회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치리(治理)하고 정리하는 것은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모두 그들을 그리스도의 한 몸처럼 여기면서 한 몸이라고 생각을 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면서 살아가야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것이 ‘토투스 크리투스’ 개념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을 향해 적용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불신자라고 해서, 무식하다고 해서, 혹은 무신론자라고 해서, 혹은 기독교 전도를 심각하게 훼방을 놓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아주 무례하게 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예수 믿은 사람들도 아주 많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사형시키다가 회심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가 확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느냐 하면 지평적으로는 개인, 교회, 인류사회 이렇게 되지만, 이해할 때에는 내가 받는 개인적인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와 함께 내가 구원을 받았고 그래서 교회론에 대한 생각, 개인적인 구원론에 대한 생각, 그것이 뻗쳐나가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우리보고 그리스도의 몸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사랑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못 받겠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실현하기를 원하시는 정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정의 실현을 생각할 때 세상과 교회가 구별됐다는 인식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교회 밖에서보다 훨씬 높은 도덕적인 기준이 요구가 되고 그리고 높은 수준의 삶을 요구받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 있느냐? 그러면 정당하게 보상을 받고 그 정도는 앙갚음을 해도 된다.” 이게 세상의 윤리라면, 교회에서는 “용서하라. 그리고 오히려 사랑하라.” 이렇게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하고 안 하고는 신앙의 문제지만, 높은 윤리의 기준, 사랑의 기준을 요구합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타락한 이 세상과 교회가 구분은 되고 높은 도덕적인 요구와 윤리적인 삶, 진리에 대한 생각 이런 것들은 갖지만 그리고 결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런 이신론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는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이것을 확신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과 자신 사이를 대치하는 전쟁국면으로 몰아가면서 그러면서 저 나라는 마귀의 나라이고 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결국 치열하게 싸워서 박살내기 전에는 끝이 없다 이런 식으로 대치 국면으로 몰아가는 것은 일리가 있는 측면도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서의 합당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사상계를 장악하고 있는 어두움의 역사, 그리고 그 속에서 나오는 각양 모든 악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움직이고 있는 영적인 세력들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성경 말씀과 신학의 진리의 빛으로 어두움의 궤계를 밝히 드러내고 그리고 그것들을 십자가의 권세로 파하고 하는 일들은 필요합니다. 죄와 사단의 권세, 이런 것들에 대한 아주 강하고 뚜렷한 미움과 적대감을 갖는 것은 너무나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적대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월정사 가서 혼자 산책을 하는데 스님이 태워달라고 차를 세우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하고 절하고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임직식을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몰려오니까 차 댈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 스님이 오셔서 무슨 일이냐고 그래서 임직식이 있어서 그렇다고, 굉장히 보수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스님이 우리 절 뜰에다가 대시라고, 괜찮으니까 마음대로 쓰시라고 그래서 임직식을 잘 치렀습니다. 그런데 절에서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오셔서 이번에는 우리가 교회 마당 좀 쓰자고 했습니다. 빌려주었을까요? 안 빌려주었을까요? 성도가 낸 헌금으로 어떻게 마귀들이 와서 여기다 차를 대느냐, 그러면서 성도가 왜 마귀 마당에다 차를 대느냐는 것은 문제로 안 삼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 망신만 실컷 당했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아예 안 쓰겠다고 그러든지. 대기는 거기다 갖다 대고 빌려달라고 하니까 안 된다고 하고. 그런 것들이 다 어디서 오느냐 하면 죄와 사단의 권세는 덜 미워하고, 왜냐하면 안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인식할 정도로 영적으로 뛰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면 미운 감정이 확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귀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이제 생각을 달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력, 죄,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강한 미움을 갖되 진리가 없었으면 우리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히려 그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의 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것이 선교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타락한 세상, 죄악 된 세상, 그리고 교회와 대치되어야 될 이 세상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의 몸인데 병들었다고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결국은 종말에는 이 모든 세계가 한 몸이 될 것인데 병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 한 구석이 계속 생태파괴로 인해서 파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어마어마하게 전기를 낭비하고 그리고는 핵폐기물을 어떻게 할 줄 몰라가지고 쩔쩔 매고, 방사선에 누출되고 해서 사람들이 기형아를 낳고 난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탐욕입니다. 덜 쓰면 됩니다. 뭘 그렇게 불을 많이 밝혀 놓습니까?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방탕입니다.
결국은 그런 것들을 모두 하나의 몸처럼 여기고 아파하는 것, 물론 몸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사람을 몸으로 여기는 것과 생태계를 몸으로 여기는 것은 좀 다르지만, 그런 몸이 진정으로 사랑을 받으려면 생태계도 아름다워야 되지 않습니까? 지금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여러 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짐승들이 민가(民家)로 무자비하게 내려와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이를 옆에 놀게 놓아두고 밭 가는데 늑대가 와서 먹어버립니다. 부모 보는 데서 물고 갑니다. 왜 그럴까요? 예전에는 짐승들이 나오는 지역이 있고 상당히 떨어져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개발이 되면서 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짐승들이 서식지가 다 파괴가 되니까 할 수 없이 민가에 내려와서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사람들을 막 해치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이런 것들은 모두 지구라고 하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환경들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정말 부탁하는 게 있습니다. 에너지를 아껴서 쓰십시오. 꼭 필요한 만큼만. 돈을 누가 내든지 문제가 아닙니다. 돈 문제가 아니라 지구 환경이 자꾸 파괴되는 것입니다. 음식점 가도 뭘 먹으면 웬만하면 싸가지고 오십시오. 그 음식이 탐나서가 아니라 그게 더럽힐 환경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인간과 모든 세계를 하나의 몸처럼 여기고 세계를 그 한 몸이 살아갈 환경으로 여기면서.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이 된 후에는 이 환경 속에 담겨진 모든 해악들도 모두 사라지겠지만 그때까지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실현해 가야할 정의의 실현의 모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보면 정말 측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극악하게 기독교에 대해서 대적하는 사람들조차도 너무 너무 어떤 정신적인 불구의 상태에서 그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것을 교회론적인 지평에서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교회에서 어떤 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 잘 모르고 실수하고 이런 정도가 아니라 교회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들이 교회에서 그것을 다룹니다. 그것을 치리한다든지. 그것은 네가 이런 죄를 지었으니까 우리 교회는 너에게 보복한다는 그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몸에 심각한 상처가 납니다. 그런데 내버려두면 아물 상처가 아닙니다. 그럴 경우에는 외과적인 수술을 합니다. 도려내는 것입니다. 도려내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면 몸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도려내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식구가 입원을 했는데 굉장히 잘난 척하는 의사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집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이 헐레벌떡 와 가지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수술은 환상적으로 잘 됐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죽었습니다”.
수술이 환상적으로 잘됐는데 사람은 죽었다? 그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뭔가를 잘못하면 그 죄에 대한 미움과 죄로 말미암아서 미끄러진 그 영혼에 대한 긍휼이 나누어질 수 있는 것만큼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까리따스 사랑의 깊이입니다.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죄나 허물이 있을 때 그 허물과 잘못은 미워하되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죄에 대한 미움과 나뉘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의 신앙이 열등한 것입니다. 그리고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으면 이것이 나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바라보고 교회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모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그렇게 교회의 아픔에 동참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치료하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은 신자의 모습니다.
편도선만 부어서 열이 나면 온 몸이 춥고 떨립니다. 전 몰랐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춥고 막 덜덜 떨려서 내과에 갔더니, “목사님, 체하셨습니다.” 그럽니다. 저는 체하면 그렇게 추운 줄 몰랐습니다. 몸살 난 것하고 똑같습니다. 몸살 약만 계속 먹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체하면 그렇게 춥고 떨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체하기만 해도 온 몸을 오한이 나게끔 만드는데 그런 것들이 바로 교회의 약함과 결점 이런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런 질문을 했답니다. “어떻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일흔 번에 일곱 번씩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만날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할 때는 우리가 죄를 짓거나 잘못을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미워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회개할 때 미워지는데 그것은 우리가 미운 게 아니라 우리의 죄가 미운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실하게 회개한 다음에는 자살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새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증거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연합과 본받음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성육신의 원리와 사역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사학적(修辭學的)으로 좋으면 그게 진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선교는 성육신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수사학적으로 멋있습니까? 그게 뭐냐고 그랬더니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처럼 우리도 어떤 선교지에 갔을 때는 그 사람들과 기계적으로 똑같이 생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 가능할까요?
(예화) 실제로 어느 한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서양 선교사가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나는 성육신의 원리를 따라서 선교할 것이다.” 그리고는 가자마자 서양에서 누렸던 모든 문명의 좋은 이점들을 다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대개 주택에 살고 침대에 사는데 모두 포기하고 원주민과 똑같은 움막에서 똑같이 살았습니다. 고기나 버터 우유 커피 이런 것 없이 못사는 서양 사람이 모두 포기하고 그 사람들의 식생활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바나나열매 같은 것, 곡식 찐 것 먹으면서 산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무 존경을 받았습니다. 10년, 20년 가까이 그렇게 존경을 받으면서 그 사람들하고 똑같이 옷도 다 벗고, 똑같은 차림으로 똑같이 하면서 일 퍼센트도 자신이 문화의 혜택을 그 사람들보다 더 누리기를 포기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화의 메리트라든지 익숙해진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병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를 비행기에 싣고 미국을 가는 순간 모든 환상은 다 깨진 것입니다. 그 원주민들이. 그 원주민들 중에는 자기 딸이나 아들이 비행기타고 미국 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오랫동안 성육신의 원리로 했던 게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타드 빌링스라는 학자가 그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처음서부터 할 수도 없는 것이고 해야 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성육신 한다’라고 하는 그 원리는 그 문화를 포기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고생하고 동고동락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좋은 정신이지만 그런데 조상 대대로 침대에서 살았으면 그냥 침대에서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지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대표적인 예가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너무 치우쳤다할 정도로 금욕주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수도사들이 들어오게 되면, 별 볼일 없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돌다가 수도사가 들어오면 그러면 옷도 후진 것을 주고 담요도 얇은 것을 주고 먹는 것도 거친 것을 줍니다. 그런데 왕족이나 귀족 중의 아들이 수도원에 들어오면 모포도 좋은 것을 주고 이불도 두꺼운 것을 주고 고기도 좀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 사람이 기부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귀족이 그 호화로운 삶을 살다가 이 수도원에 들어와서 고기 한 덩어리를 먹는다고 하더라고 여러분이 낮아진 것하고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낮아진 것입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은 훨씬 더 큽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차별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게 사실은 굉장히 휴머니즘적인 요소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그의 사역을 훼손하는 게 아니라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대목인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그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 부자도 오고 가난한 사람도 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너는 한 끼에 삼만 원짜리 밥을 먹느냐, 우리는 5천 원짜리 먹는데. 나는 걸어서 오는데 너는 왜 그 좋은 자가용을 타고 오느냐? 네가 진짜 예수의 정신이 들어간 사람이라면 거기서도 내려와라.” 이런 식으로 우리들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신앙의 문제이고 그것을 하나의 문화로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을 교회에서 앞자리에 앉히고 대우를 해 주고 이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말하자면 기계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서로가 살아오는 문화를 존중해 주면서 그 안에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한 성육신의 원리를 따르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음 사역을 할 때도, 또 사도들이 복음 사역할 때도 보면 아주 끼니가 간곳없는 가난한 사람서부터 아리마데 요셉같이 아주 부유한 사람 그리고 왕족과 귀족에 있는 사람들까지 복음을 듣고 사도들을 따랐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도들의 사역 안에서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든 문화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러면서 그들을 존중하고, 각각 빈부의 차이는 있고 격차가 있고 그래도 그들을 모두 묶는 하나의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그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본받음, 컨포메이션(conformation),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가는 성숙함 속에서 그들이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연합과 본받음 안에서 이루어가는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사역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영적 생활의 긴박성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다시 말하면 부유하고 풍족한 문화 속에서 살던 사람들은 거기서 내려올 수 있고 또 그만 못한 위치에서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존중해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의 일치의 힘들이 결국은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은혜 생활들이 철저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회가 모든 것들이 잘 되고 그 다음에 교회가 교육의 체계나 이런 것들도 잘 갖추어져야 되고 이런 모든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너무너무 강조되어야 할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신앙생활입니다. 그 중에서도 경건생활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실으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는 기도생활과 끊임없이 말씀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생활,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을 뵈옵는 감격, 그 다음에 매일 매일 자기의 무지를 깨우치는 신학에 대한 공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순종하는 실천, 이런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간절한 기도생활과 말씀생활 없이는 누구도 그런 것들을 본질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모든 어려움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면 될수록 신앙의 본질적인 것들을 붙들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고 신앙의 본질적인 것들을 붙들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가 하는 목양사역과 이 모든 것들도 힘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기와는 다른 어떤 종류의 사람이 오더라도 그 목양의 품속에서 안식을 얻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구역이나 교구나 혹은 순에서 우리들이 영혼들을 섬기는데 그들이 모두 우리 입맛에 맞게끔 움직여 주지 않습니다. 누군가 반짝반짝한 눈동자로 여러분이 전하는 공과공부에 귀를 기울이고 은혜를 받고 변화가 일어나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막대기 같은 여러분을 사용해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안 일어나고 있다면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에스프랑크니스데이의 마음, 그래서 창자가 떨리기까지 흔들리는 이러한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없는 이유가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마음을 싣는 경건생활, 말씀과 기도로 충만해 지는 영적 생활이 결핍될 때에 아주 차가운 이론만 남고 방법론만 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바꾸는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방법론이나 제도나 인간의 수단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성령의 역사 이런 것들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목양의 현장이 우리에게 있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은 여러분만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만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편안해야 됩니다. 근심과 염려 없이 목양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거기에서 영혼에 대한 진정한 사랑,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아져서 빗줄기처럼 하나의 목표를 향해 뚫고 가는 그런 목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은혜로 늘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목양만 하라고 인생에 있어서 어려움이나 걱정 근심이 하나도 없는 것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안은 집안일대로 걱정, 회사는 회사, 사업은 사업, 그 다음에 친구관계는 친구관계, 노후에 대한 염려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근심 걱정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늘 그런 속에서 분투하면서 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뜨거운 기도생활과 은혜 생활입니다. 그러면 그런 시련이 오더라도 기도 속에서 녹여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오면 말씀 속에서 그 빛을 받으며 붙들고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시련과 어려움의 의미를 캐면서 믿음으로 나아갈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힘이 없으면 어느 한 순간에 다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 안 그렇겠습니까?
아프지 않는 목양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오늘 오전에 설교한 것처럼 그런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프지 않은 목양은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많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는 사람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출석표를 갖다 놓으면 어떤 때는 한심할 것입니다. 성한 구역원이 별로 없습니다. 가정에 시험 들어서 안 나오고, 이 사람은 뭐해서 안 나오고, 이 사람은 와봐야 딴 생각하고, 이 사람은 만날 늦게 오고, 이 사람은 만날 책도 안 가지고 오고 다 나옵니다. 그런데 섭섭해 하지 말고 그것을 가슴에 안고 한 달만 기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두 달에 걸쳐서 한번 이 사람들이 진심을 털어놓든 안 털어놓든 내가 새로 구역장 됐으니까 두 달 안에 다 심방을 하리라 그리고 한번 만나보십시오. 그리고 요새는 입이 열려야 마음이 열립니다. 그래서 구역장이 가장 중요한 일은 계속... 그러다보면 마음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됩니다. 구역장 만나면 그냥 쑤셔 넣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 아닙니다. 교수들도 만나고 목사님들도 만나고 사회적인 사람들을 만나도 이런 유형이 있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거품을 물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르치려고 드는 사람. 그 중에서는 훌륭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좋은 인상을 서로 갖고 사는 것이지 마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밥 먹는 것은 더더욱 싫습니다. 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불편하게 밥을 먹고 체하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그러면 “예, 좋으신 분이시지요. 훌륭하시지요. 그분 참 큰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가로치고 속에서 “개인적으로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멀리서 후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를 만나서 가만히 들어만 준다면, 한 한 시간동안 들어주고 세 번만 하면 그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들어준 여러분을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다닙니다.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그것을 명심하십시오. 어려우면 그때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영혼을 위해서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면 가장 덕을 보는 사람이 예수님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여러분이 돌보는 구역식구도 아니도 그것 때문에 여러분의 영혼이 가장 큰 덕을 보는 것입니다. 한 시간 더 할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