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장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 20:35-38)
녹취자: 김명진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전도여행을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가는 길이었는데 밀레도라는 항구 도시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사도바울은 아마도 예정에 없이 마음에 감동을 받았던 때문인지 두고 온 에베소의 장로들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청했더니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이 밀레도에 왔습니다. 거기에서 사도바울을 대면하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 사도바울의 유언과 같은 설교였을지 모를 그 내용을 사도바울이 생생한 육성으로 이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들과 함께 3년이 넘는 세월동안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미운사람이라면 지겨운 3년이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정들었을 기간입니다. 그때에 사도바울이 자신의 목회사역에 대해서 서론적으로 언급한 후에 주님이 자기를 어떻게 부르셨는지를 말하면서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성령님이 증거 하시기를 각 성에서 내게 환란과 핍박이 기다린다고 하더라. 그것은 아마 나의 목숨을 요구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은혜의 복음을 받아 죄인 중의 괴수가 구원을 얻었으니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따라 인생을 살도록 주신 사명이 있는데 그 일을 마치려고 하는데 설령 그것이 나의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더라도 나는 기꺼이 그 생명을 버리고 나의 길을 가겠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자체가 이미 카리스마로 뭉쳐진 사람인데 이렇게 순교를 예고하며 설교를 했으니 누가 감히 거기에 토를 달겠습니까? 이미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사도의 결심이 굳게 선 것을 보면서 그의 가는 길을 말리려는 시도는 이미 접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즐거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그 길을 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오래 있으면서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사도바울은 밑바닥까지 봤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염려를 하는 것이 있었는데, 하나는 내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튼튼하게 기독교의 진리들을 가르치고 돌볼 때는 괜찮았지만, 내가 가고 나면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와서 양떼를 아끼지 않을 텐데 그것이 정말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나운 이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하나는 커다란 핍박을 의미할 수도 있겠고, 두 번째는 목자의 탈을 쓴 이리 같은, 혹은 양을 가장한 이리 같은 인물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커다란 손해를 입힐 것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에 관측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로 받은 계시일 수도 있고 일의 정황을 미루어 살핀 사도바울의 경험적인 판단이었을 수도 있으나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 사람이 염려하는 것이 더 우리의 가슴을 찢습니다. 장로들이었습니다. 먼 길을 사도바울이 오라고 하니까 달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했냐면 “여러분 중에서도 교인들을 끌어들여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내가 안다.”, 예수님처럼 “너다”라고는 말을 안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너희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미 사도바울의 손을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야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하나였습니다. 그 교회가 장로라고 하는 사람이 교인들을 데리고 자기의 무리를 만들고 이렇게 해서 교회에 어려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순교의 길을 떠나는 사도바울의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지 않겠습니까? “무슨 목회를 후지게 했기에”,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죽은 자도 기도해서 살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중 그런 목회자를 만난 분이 있습니까? 성경 중 신약성경의 절반을 썼습니다. 그런데 무슨 목회를 그렇게 했기에, 그리고 목회를 놀면서 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써 있는 것처럼 “눈물로 일깨워서 삼년이나 밤낮도 쉬지 않고”, 그런데 “어떻게 목회를 했길래 목회가 그것밖에 안되느냐, 어떻게 했기에, 그것밖에 할 수 없었느냐고”묻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할 수 없었습니다. 하기 싫었겠습니까? 능력이 그것밖에 안되었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22년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단 하루도 ‘이 자리가 정말 내 자리다. 나는 정말 목회를 위해 태어났다. 나는 정말 열린교회의 담임 목사의 맞춤이다’라고 죽었다 깨어나도 단 하루 단 한 시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습니다.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22년 동안 하루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장로님들을 여기에 모셨으니까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목회의 고통에 대해서 모릅니다. 천국에 가서도 모릅니다. 여러분을 얕잡아 봐서가 아니라 완전히 살아가는 영역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길을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아무튼 사도바울의 연설이 다 끝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마지막으로 “자기가 최선을 다했다. 누구의 의복이나 돈을 탐낸 적이 없었다. 모본을 보였고, 약한 자를 도왔고, 날마다 기억하기를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내가 섬겼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 중 몇 사람은 가소롭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여러분은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목회의 고통을 모릅니다. 그것을 깊이 인정하고 장로 생활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죄는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가 장로보다 우월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역이 완전히 다릅니다. 물론 어떤 목사님들은 믿음으로 사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의 몫입니다. 여러분이 교정 할 수 없습니다. 교정이 됩니까? 기도 하지 않는 목사님을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 합니까? 돈에 대해서 정직하라고 충고하면 목사님들이 그 한마디로 교정이 됩니까? 여러분은 목사님에게 교정이 됩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이 자신의 심정을 다 바쳐서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더 이상 구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의 누구를 통해서도 완벽한 사역의 종지부를 찍어 논 사람이 없습니다. 박윤선 목사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제가 모시던 목사님이 박윤선 목사님 제자였습니다. 몇 년을 같이 있으셨습니다. 목사님이 전도사였을 때 박윤선 목사님이 불러서 말했답니다. “박 목사, 우리 큰아들 주모 좀 어떻게 해봐.”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용기 목사님 후배목사들에게 “내 아들 좀 예수 믿게 만들어 주면 내가 뭐든지 해줄게.” 그게 목회입니다. 여러분은 이름을 모르겠지만 배명준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남대문교회를 46년을 담임하신 통합 측 목사님입니다. 제가 그 분에게서 배웠는데 성자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설교를 하시고 정말 머리가 숙여지는 주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님께 가면 심판 받을 것이야. 내가 주님께 가면 무엇이라고 변명을 하지?”, “왜요. 목사님”, “박태선이가 내 밑에서 컸어.” 그게 목회입니다.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목자의 이야기를 다 듣고 마지막에 아마 “우리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을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이 함께 기도했습니다. 얼마간은 아니었겠지만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이게 마지막으로 부른 것인데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하나님, 우리 목자를 지켜달라고 간절히 빌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 크게 울며”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보면 흐느끼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면서 엉엉 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한 사람씩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보여 주냐면 사랑입니다. 사람이니까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에 가서 아들과 대화를 해 보십시오. 아버지 생각과 완전히 다릅니다. 한 이불 덥고 사는 아내와 교회에 대해 속 깊은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전혀 다른 의견입니다. 그런데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 똑같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자를 보내면서 끌어안고 통곡 하면서 교인들이 울었던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사와 장로만 싸우지 않으면, 안수집사와 권사가 싸워서 교회가 쪼개졌다는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런 일은 늘 있는 일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수의 몸이라고 할 때 하나 되게 만드는 연합이 사랑입니다. 칼빈 같은 사람은 이렇게 충고 했습니다. “교회는 한 번 옮기면 거기에서 죽는 것이다.” 그래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특히 장로님들은, 장로가 될 때 감당할 깜냥인지를 생각하면서 할 수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기로 했으면 옮기면 안 됩니다. 거기에서 죽어야 합니다. 목사님 설교가 은혜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려면 진작 옮겼어야 합니다. 목사님의 계획이 좀 후진데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결혼했는데 살아보니까 부인이 살림도 못하고, 계산도 희미하게 하고, 말도 함부로 한다고 쫓아 낼 것입니까? 그냥 거기에서 평생 운명처럼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래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결혼은 아내에게서 단점을 발견하면 남편은 ‘저 인간이 모자라는 데가 있었구나. 저것을 채워주라고 하나님이 나를 이 여자와 한 몸을 만드셨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볼 때 부족한 것이 있으면 ‘이 사람은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평생 망가진 채로 살아갔을 텐데 하나님이 기워주라고 나를 불렀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떻게 그 존경도 안 되는 목사를 사랑할 수 있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선대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면 너희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 플라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판을 하려거든 비판을 하려는 대상을 깊이 사랑하라.” 그러면 비판을 안 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깊이 사랑하면 내 관점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도와서 행복하게 할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할까 그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이 50세이면 끝까지 버티면 2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먼저 죽을지 모릅니다. 그게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장로가 되어서 자기를 길러준 목자와의 관계가 파멸에 이르렀는데 기도가 됩니까?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그 교회에 얼마나 위대한 것을 남겨 놓고 싶으십니까? 이이야기는 부부가 살아가다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다툴 수 있습니다. 다투면 안 됩니다. 저희 부부는 마지막으로 다툼을 한 지 19년이 되었습니다. 다투면 안 됩니다. 더군다나 주의 종의 가정은 다투면 안 됩니다. 언제라도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같이 살려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의 장로들이 밀레도에 와서 사도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목을 끌어안고 기도를 마친 후에 한 없이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바울이 다시 돌아와서 목회를 하면 모두 사도바울을 천사처럼 알고 기뻐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목사와 장로와 사이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던 것입니다. 교회에 돌아가서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내 관점이 아니라 하늘 높이 올라가서 우주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이 교회를 왜 세우셨고, 왜 하나님이 나를 이 교회의 장로로 세우셨고 내가 여기에서 마지막 죽을 때까지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나 나나 목사님 모두 한 줌도 되지 않는 잿가루들 입니다. 30년 후에 우리 중에서 다시 만날 사람 이 자리에 한 명도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에게 크고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에 오늘도 여러분을 일깨워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