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설교
녹취자: 김경애
제가 1993년 12월 12일에 7명의 교인을 데리고 방배동 지하예배당에서 개척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왔습니다. 22년이 되는데 제가 설교한 설교가 재작년 12월 12일을 기준으로 5,215편이었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얼마를 더했는지는 세어보지 않았지만 5,500번쯤 설교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훨씬 많이 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의 경험으로는 22년 동안 한 번도 ‘다음 주일날 무엇을 설교해야하지? 큰일 났다.’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늘 하고 싶은 것이 해야 할 시간보다는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가끔 사람들이 저에게 물어봅니다. ‘그런 엄청난 책을 쓰고 계신데 ’제가 95년도부터 책을 쓰기 시작해서 지금 공식적으로 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이 세어보지는 않았는데 60권이 확실히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3권의 책을 한꺼번에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되니까 그것이 미장원 파마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아는 것이 한계가 있으니까 책을 썼어도 계속해서 내용이 있으려면 결국 글의 세계는 냉혹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책을 안사면 아무 출판사에서도 책을 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안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대부분 시간을 공부하는 일에 시간을 쏟습니다. 자랑 같아서 이야기하기 뭐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서재의 책이 오만권입니다. 목회를 해보셔서 알지 않습니까? 교회도 큰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교회는 작은 교회는 아닙니다. 오천 명 정도로 해나가려니 그러니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러면서고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 하면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저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고 즐겁고 기쁘기 때문에 사실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설교준비를 그렇게 절대 안 해도 되느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훨씬 더 나아집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공부할 수 있는 비법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필기하실 것도 별로 없습니다. 듣기만 하면 됩니다. 강의안에 나오니까 읽어보시면 됩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이것입니다. 설교가 요리 같은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설교는 요리라기보다는 젖을 먹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요리는 어떤 것입니까? 요리는 요리사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삽니다. 사서 그것을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맛있게 요리를 해서 먹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젖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아이를 생각하면서 무엇을 먹어야 젖이 많이 나올까 그리고 아이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나는 정말 싫지만 고기를 좀 먹어야하고 야채는 정말 싫어하지만 야채도 먹어야하고 나는 정말 괜찮지만 아이를 생각해서는 유전자 변형이 된 식품을 먹으면 안 됩니다. 혹은 등등의 생각을 가지고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다 소화되어서 젖이 가득 고이면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설교는 요리하는 것처럼 되어서는 안 되고 젖을 먹이는 것과 같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좋은 말씀을 성경과 책속에서 쭉 펼쳐놓고 그 속에서 그것을 꺼내서 조제를 해서 약사같이 조제를 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먹이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자기가 그것을 먼저 먹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교부가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교부가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모두스 디벤디’ 라틴어로 말하면 ‘가르침의 풍부함은 삶의 방식이 결정한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가르침이 풍부해지기도 하고 가르침이 약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늘 전도를 많이 하는 목사님은 전도설교 할 때 제일 힘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님은 다른 설교를 할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라고 설교할 때 가장 은혜가 되고 ‘당신은 그렇게 기도를 안 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고 책망할 때에 거기에 대들 수 없는 어떤 권위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모두스 디벤디’입니다. 삶의 방식입니다. 삶의 방식이 그랬기 때문에 거기에서 풍부한 가르침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설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오해는 무엇이냐 하면 무엇인가 새로운 정보나 사실들을 가지고 교인들을 설득하는 것이 설교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설교의 지극히 일부분이고 설교시간은 목회자 자신이 설교시간에 시작하는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면서 경험했던 고민들, 하나님 앞에 해결해가는 것을 성도들 앞에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이 설교입니다. 이것이 설교가 돼야 하니까 결국 어떻게 됩니까? 아이들을 놓고 아이들에게 삼겹살이 좋다고 해서 그것을 갓난아이 입에 넣어줄 수 없습니다. 푸른 야채가 좋다고 해서 샐러드를 아이의 입에 쑤셔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자기가 하나하나 여러 가지들을 먹고 다 먹으면 무엇을 먹어도 젖 색깔은 우윳빛이 납니다. 고기를 먹어도 우윳빛이 나는데 빨간 토마토를 먹으면 빨간 주스색이 나오고 샐러드를 먹은 젖은 그린색이 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먹든지 뿌연 우유가 되어서 젖가슴에 고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는데 그 속에 성분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엄마가 먹은 성분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 아이들의 생명을 지탱시켜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을 펼쳐놓고 설교를 하는 그 시간에 불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은 설교를 준비하기 이전에 먼저 설교를 듣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설교하시는 것을 잘 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설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교역자들 중에서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진실한 예배자인 적이 없던 예배인도자, 훌륭한 설교청취자이었던 적이 없는 설교자, 열렬한 기도자가 아닌 기도회인도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한 적이 없는 당회장, 이런 사람들은 그 사람의 사람됨이 그 일을 하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Position, 교회에서 해야 하는 사역이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거기에 두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면 설교시간에만 자기가 설교한 시간에만 예배자 같고 남이 설교하는 시간에는 전혀 예배자가 아닌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청중 중에서 제일 부산스럽고, 소란하고, 진중하지 않은 사람들이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 부교역자, 장로 이 네 그룹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모든 말씀의 권위는 그 말씀을 자기 속에서 자신이 체화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선지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지를 보십시오.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받은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을 때 기존에 없는 말씀을 주시는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회개하라고 해라.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라.’ 아니면 ‘순종하라고 전해라.’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읽는 수많은 말씀이 그중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서 이 말씀을 하도록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선지자들이 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원숭이처럼 앵무새처럼 리피트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특히 모세오경에 대한 지식, 신학적인 지식들이 함께 작용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더 풍부하게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마치 선지자 자신의 마음에서 불타는 말씀으로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보면 첫째는 영적인 것입니다. 목회자가 깨어있어서 지금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받을 수 있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교감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깊은 기도가 필요하고 하나님을 향한 묵상이 필요하고 그런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학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어도 그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도록 하나님이 설교자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성경을 알고 신학을 아는 지식 속에서 그 하나님이 주신 교감을 풍성하게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구축해내어서 장중한 하나의 질서를 가진 설교의 틀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풍부하게 전달될 때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변화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 일들을 교인들을 향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해야 되는데 이것은 인격적인 문제입니다. 저도 맨 처음 초창기에 설교를 할 때에는 성도들에게 설교할 때 막 노려보면서 불타는 눈빛으로 마치 내 자신이 예언자가 된 것처럼 그런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요즘 호세아서를 설교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잡아먹을 듯한 그런 눈빛이나 노려보는 예리한 눈빛보다는 설교자의 인격 속에서 비록 준엄한 하나님의 책망이 설교된다고 하더라도 모두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설교자의 인품 속에서 읽을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설교자의 인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영적인 것, 학문적인 것, 인격적인 것 이런 요소들이 어우러져서 자기화 된 언어로써 백성들에게 다가갈 때 말씀이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성경읽기에서 제일 먼저 답을 찾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설교를 해야 될 텐데.’ 그러면서 성경을 펴기 시작하면 이것은 일평생 설교에 추격을 당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피를 말리는 일입니다. 왜? 수없이 설교할 기회가 오니까 말입니다. 주일 낮 설교, 저녁설교, 수요일설교, 금요설교, 새벽설교는 예외로 하더라도 그러니까 교회가 조금 커지고나 나면 목사님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분업화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는 주일날만 설교하고 나머지는 다 부교역자에서 주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교역자들에게도 설교할 기회를 주어야한다고 하는데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자기가가 다 준비하기 싫으니까 하청을 주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목회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설교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한 사람이 교회 전체의 말씀에 대한 통일적인 강단의 사역을 줄기차게 이끌고 지나가야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할 시간이 없다고 떠넘기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 아닙니까? 저희 교회는 부목사들이 열 몇 분이 있습니다. 금요일은 제가 나가지 않습니다. 부목사들이 하게합니다. 설교하고 기도하고 돌아가면서 합니다. 수요일에는 제가 몸이 아프다든지, 외부의 사역이 있다든지 아무튼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부목사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하고 내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제가 설교를 합니다. 22년이 되었는데 일 년에 네 번의 사경회가 있습니다. 신년사경회, 고난주간의 십자가사경회, 여름수련회, 가을말씀 경회를 하고 한번하면 5일 동안 합니다. 여름수련회는 3일간 합니다 십자가사경회는 새벽만하고 나머지는 새벽과 저녁을 10번씩 합니다. 사경회만 80회 정도 했습니다. 한 번도 외부의 강사가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준비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저는 주일설교를 4번 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에너지가 주일오후까지 할 체력이 안 됩니다. 몇 년 전까지는 제가 다 했는데 몇 년 전부터 내려놨습니다. 그러면 설교준비를 어떻게 하느냐고 하는데 개척교회를 할 때보다 지금이 설교 준비하는 시간이 2배, 3배 많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는 어디부터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맥체인의 성경 읽기표를 하든지 마음먹고 이번에는 골로새서를 읽어야겠다고 하든지 골로새서가 끝나면 출애굽기로 하고 출애굽기가 끝나면 에스라서로 나가든지 계획을 세워놓고 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성경읽기는 쭉쭉 읽어 가면 답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정독입니다. 그냥 천천히 읽는 정독을 제대로 할 때에 그것은 묵상과 결합이 되어서 설교준비로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우선 성경을 펼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은 고린도서를 폈습니다. 쭉 읽는데 읽을 때는 항상 옆에 히브리어 성경, 헬라어성경, 주석을 펴놓고 헬라어성경, 히브리어성경, 영어성경, 사전을 옆에 놓고 읽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정확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읽습니다. 집중해서 천천히 쭉 읽어나갑니다. 뭐가 느껴지는 것 같으면 스톱하고 다시 앞에서부터 다시 읽는데 별것 아닌 것 같으면 그냥 지나갑니다. 또 뭔가 느껴지면 멈춥니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습니다. 은혜가 시작되면 거기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읽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원어성경으로 읽어보고 우리말 성경에서 잘못된 번역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사례를 찾아보고 알고 있으면 안 찾아도 되고 그 다음에 영어성경이나 독일어성경을 펴놓고 이 번역이 옳게 된 것인가를 반복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원어 성경에 대한 해석이 확신되면 정리를 합니다. 얼른 천천히 다시 읽습니다. 그러면 은혜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오기 시작합니다. 감동이 옵니다. 눈물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거기서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도가 길어질 수가 있습니다. 제가 한참 그런 작업들을 풍부하게 할 때는 보통 세 시간씩 걸렸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커다란 회개와 기쁨이 있습니다. 끝나고 난 다음에는 즉시 설교를 위해서가 아니가 내게 말씀하신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작은 노트에 기록해야합니다. 기록할 때에는 그때에 은혜 받은 말씀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어떻게 논리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골로새서 몇 장 몇 절부터 몇 절, 몇 년 몇 월 며칠, 어디에서, 들어가는 말에는 이런 이런 말을 다루고 있다. 그 다음에 그 안에 나오는 내용들을 크게 A, B, C, D 네 가지로 나누는데 다시 세부적인 내용은 이렇게 이렇게 나눈다. 그 다음에 내용들을 적으면서 거기에서 성경의 정확한 의미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들을 적으면서 거기에는 내용들을 간략하게 적으면서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은혜를 많이 받으면 본문이 확 열리면서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 성경과 관련된 다른 성경들이 연관되면서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것을 다 적어놓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흠뻑 받고나면 저 같은 경우에는 한 번에 설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통 3번 혹은 6번 정도 설교할 수 있는 분량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오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하고 모레도 하고 계속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교인들에게 이런 것을 설교하면 좋겠다고 생각되었는데 며칠 전에 받은 말씀의 은혜가 생각나면 그것을 찾아서 다시 펼쳐놓고 성경을 천천히 읽고 다시 생각해보면 예전의 은혜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설교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처음의 경우에는 Full Text를 쓰라. Full Script를 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으로 시작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까지 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의 경우에는 5년 정도 썼습니다. 그러면 제법 문학적인 실력도 늘고 논리적으로 됩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내려놓고 그 다음에 요약만 해서 설교를 하고 오히려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 원고를 씁니다. Text화해서 그렇게 풀어 놓습니다. 그렇게 메모를 해서 어떻게 나오느냐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제가 어제 설교를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제는 사실 준비한 것의 절반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밤에 너무 늦게 갈까봐 절반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본문해설이 나오고 신자의 정체, 택하신 족속, 제사장나라, 왕 같은 제사장, 이렇게 쭉 나옵니다. 이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질서가 정연하게 갖춰져 있어서 저 같은 경우는 이것을 보면 책을 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여기에 다 나옵니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설교할 때에는 원고를 보지 않고 이 틀만 보고 자기가 설교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하면 절대 남의 설교를 베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은 것은 자기가 즉석에서 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것은 머리 속에서 외워서 기억해야하는 것은 너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들이 몸에 붙도록 자신들을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놓고 설교를 합니다. 설교를 하면 그 설교가 녹음이 됩니다. 녹음이 되면 누군가가 Textual 합니다. 다 풀어서 풀은 Text에다가 제목을 다 집어넣고 저는 22년 전에 설교한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은 원고지 4백만 장 정도의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성도들이 애를 써서 그 일을 해낸 것입니다. 저는 정말 감사합니다. 그것들이 있으니까 그것으로 교재도 만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어떤 사람은 같은 성경을 읽는데 깨닫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깨닫습니다. 그 차이는 두 가지 차이입니다. 하나는 그 성경을 읽을 때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아서 감동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입니다. 그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설교시간에 선포될만한 품질을 가진 내용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은 너무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학지식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의 교수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학생이 입학한지 두 달도 되지 않은 학생이 원고를 나에게 이만큼 들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책을 내려고하는데 교수님이 한번 봐달라는 것입니다. 나이가 좀 드신 아주머니였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아니 당신은 신학공부한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책을 낼 수 있느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주신 책이라는 것입니다. 하도 읽어보라고 해서 한번 읽어보니까 줄줄이 줄줄이 성경구절을 수백 개를 엮으면서 스토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어느 날 은혜를 되게 많이 받은 것입니다. 머리에 수많은 상상이 오가면서 성경을 연결하여 한없이 이야기와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뭐냐 하면 엉터리입니다. 그래서 신학이 없고 신비체험을 하게 되면 아주 엉터리가 됩니다. 성경의 구절들을 연결하고 연결하는데 전혀 신학이 없습니다. 그렇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고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한 다음에 내라고 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이 어느 날 추천서를 써달라고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몇 번을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후배 목사입니다. 정말로 목사다웠습니다. 목사님들이 대개 그 나이 때에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그러는데 꼬박 앉아서 늘 성경을 읽습니다. 교인들에게도 성경을 읽어야한다고 하는데 마침 원고를 읽었습니다. 온갖 성경이야기가 나오고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대로 가야한다고 하는데 해석은 신학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무 가슴 아프지만 제가 추천서를 써드릴 수 없습니다.’ 돌려보냈더니 고쳐달라고 하는데 너무 틀린 데가 많아서 어디 한두 군데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돌려보냈는데 마음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공부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신학공부를 하지 않으니까 수시로 가슴에 부딪히는 대로 자기가 해석을 했는데 말 갈 데 소 갈 데 마음대로 가는 책들은 가치가 없습니다. 나중에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할 때는 뜨거운데 몇 년 설교를 하면 설교할 내용들이 서로 모순이 되어서 충돌을 일으켜서 교인들이 신앙이 헷갈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보면 책을 읽는다고 하는데 책을 보면 쉬운 것을 찾습니다. 제가 쓴 책 중에 게으름 같은 책을 읽습니다. 재미있고 쉽습니다. 그런 책도 좋지만 설교의 예화에나 쓸 책들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되고 책들을 탄탄하게 독서해 나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직한 책들을 읽으면서 신학적인 골격이 되는 그것이 성경신학, 조직신학, 특히 조직신학, 역사신학, 성경신학, 교회사, 성경원어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지적인 기반을 탄탄하게 하고 그 밑으로 들어가서는 일반 인문학에 관한 역사, 과학, 문학, 철학,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탄탄하게 기반을 쌓아야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독서하는 것이 싫으세요? 그러면 목사의 소명이 아닐걸요!’ 하나님의 말씀의 소명을 가진 사람들은 책을 충분히 읽어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뜻이 있으시면 월요일에 독서모임을 만들어서 균형을 맞추십시오. 그냥 목회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월요일에 놀려고 하지 말고 평일과 똑같이 일어나셔서 오전에는 열심히 어려운 내용을 가지고 공부를 해서 지적으로 탄탄하게 하고 그리고 시간이 되면 골프를 치든지 족구를 하든지하고 오후에는 집에 일찍 들어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못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월요일에 휴무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월요일에 출근을 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야합니다. 월요일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내가 공부하는 날입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아파서 설교를 못해도 월요일에는 보따리를 싸들고 갑니다. 왜? 우리 집사람이 나를 붙들고 그럽니다. ‘여보 오늘은 가지 말고 쉬어요.’ ‘가야해!’ ‘아니 어제 설교도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팠는데 오늘은 쉬어요.’ ‘아니 가야해.’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를 비유하자면 매일매일 석탄차를 타고 막장에 들어가서 교인들은 놀 때에 나는 가서 곡괭이질을 해서 석탄을 캐어 올라와서 그것으로 불을 때어야지 주일날 성도들을 덥힐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성도들이 쉰다고 나도 피곤하다고 TV나 보고 스포츠나 하고 놀고 있으면 몇 달이나 그렇게 하면 뭐가 되겠어?’ ‘당신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안 해도 그것만 써먹으면 돼!’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 겸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공부를 하려고 애를 많이 써왔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외국에 가서 학자들도 만나봅니다. 신학의 세계는 정말 드넓은 바다입니다. 그 위대한 지성의 역사에서 기독교지성사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거대하게 흐르는 강물의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위대한 지성의 세계를 한번 흘낏 보고나면 자기가 아는 것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학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면 물론 그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나보다 더 많이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일평생 그거 하나만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나는 배우는 것입니다. 저 작은 세계 하나를 저 사람이 힘을 다해서 공부를 했는데 저 정도를 알았다고 하면 하나하나 그 모든 부문마다 어마어마한 지식의 세계가 있을 텐데 도대체 내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면 한없이 눈물이 나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냥 매일매일 그냥 조금씩이라도 알아가는 것뿐입니다. 그것 외에 무엇이 있습니까? 목회자들과 대화를 해보면 안 그러신 분들도 소수 있지만 많은 분들에게서 무엇을 느끼느냐하면 신실하고 기도 많이 하는 분들도 만나기 쉽지 않지만 좀더 많은 지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누가 저 멀리에서 설교를 듣고 굴복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하는 것이지만 좀더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신학서적들을 책을 분류할 때 소파에 기대고 앉아서 편안히 읽을 수 있는 책, 침대에 누워서 잠자기 전에 읽다가 잠드는 책, 화장실에 앉아서 볼일을 보면서 읽는 책,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앉아서 정자세로 앉아서 읽어야하는 책, 그 정도로는 안 되고 스탠드 켜놓고 노트 갖다놓고 필기하면서 읽어야하는 책까지 구분하면서 공부해야합니다. 그래서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님 가운데 김희보 박사님이 계신데 정말 존경했는데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애들아, 너희들은 독서와 휴식의 차이를 아니? 독서란 읽어야할 책을 읽는 것이고 휴식은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것이란다.’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말씀하셨습니다. ‘애야, 천권의 책을 읽어야 한권의 책을 쓸 수 있단다.’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한 목회자가 은혜를 많이 받았고 체험을 많이 했으니까 몇 번 설교를 해서 성도들에게 충격을 주고 은혜를 주는 것은 아주 특별히 뒤로 물러나지만 않으면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한교 회에 부임해서 한 3년 정도는 성도들에게 옛날 목사님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신선하게 설교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30년입니다. 30년이 되었는데도 ‘정말 새롭다. 저 깊은 말씀의 세계는 끝이 없구나!’ 그런 감동을 주려면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탄탄한 공부에 투자해야합니다. 그래서 지칠 정도까지 공부해야합니다. 연세가 많으신 목사님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운도 없고 힘든데 그냥 틈틈이 하십시오. 젊은 후배목사들에게는 그럽니다. 덜 자고, 덜 놀고, 덜 쉬어야합니다. 그리고 목회에 대한 쓸데없이 허비하는 시간을 버려야합니다. 교인들하고 헬스클럽에 몰려다니고 밥이나 먹고 대접이나 받으러 다니는 것을 싫어해야합니다. 나중에 좋을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부해야합니다. 그래서 뭔가 한창 공부할 때는 아침에 나가서 어두운 밤까지 교회 안에 연구실이 있는데 연구실에 홀로 앉아서 공부하고 저녁때 끝나고 나면 내려옵니다. 직원들은 다 퇴근하고 교역자들도 집에 가고 11시 넘어서 깜깜한 밤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옵니다. 그러면서 밤중에 걸어 나옵니다. 그러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하면 ‘어제보다 한 뼘은 커졌구나! 어제의 내가 아니구나!’ 그리고 뭔가 신학적으로 커다란 것들을 발견하고 해결이 되었을 때 가슴이 꽉 차며 ‘아 정말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시구나! 정말 놀랍다!’ 깊은 감탄을 하게 됩니다.
누가 어제 저보고 존 오웬의 신학에 대해서 강의를 해달라고 하는데 저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던 분들이 많이 있지만 크게 4부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칼빈,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존 오웬 같은 경우도 20년을 읽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이 18,000페이지입니다. 17세기의 영어입니다. 그 사람이 쓴 전집만 12,000페이지 됩니다. 그것을 17세기의 영어인데 영국 사람들도 옛날 영어니까 못 읽는 책입니다. 그것을 20년 동안 집요하게 매달려서 거의 다 읽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000페이지 27권입니다. 얼마나 지겨운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극복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신학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자들을 넘어서서 교부들, 중세신학자들, 초대교부, 그리스의 철학자들 그렇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지적인 폭과 길이가 깊어지는 것을 경험한 만큼 신학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영혼이 충격을 받으면 비록 가까이 와서 같이 밥을 먹고 이러지 않아도 존경을 받지만 자주 만나서 인격이 바닥이 보이면 신앙심 하나로 그 목사님을 존경하는 그럴 정도로 착한 교인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삶을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맡은 종답게 살아야합니다. 오늘 요점은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 성경 자체에서 은혜를 받아라. 거기서 설교의 재료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료의 수준은 자기가 얼마나 주님을 깊게 만나느냐 또 하나는 얼마나 신학적인 지식이 풍부한가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성경을 진중하게 읽고 은혜받기를 위해 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신학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큼만 보이는 법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