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고난과 자기죽음
녹취자: 허혜숙
우리는 설교를 생각하면서 너무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이 있습니다. 설교전달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 너무 중요하고 열심히 배워야 됩니다. 또 하도 성경이야기를 안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니까 설교에서 성경본문을 다뤄야 된다고 우리가 배웁니다. 그것도 너무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설교를 하고 나면 성경 본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를 하는 주체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 설교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설교는 사뭇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전달의 기교가 뛰어나고 성경을 해석하고 본문을 설교한다고 할지라도 그 설교를 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설교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제가 데뷔작이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인데 그 책이 제가 무명 시절에 써서 15일에 3000부씩 팔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순식간에 글 쓰는 사람으로 데뷔하게 되었는데 그 책이 기독교 신앙에 주었던 충격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태까지 설교를 이야기하면서 설교를 이야기 했지만 설교자를 이야기 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웨스트민스터에서 컨퍼런스를 하면서 마지막에 그 문제를 다루기는 하셨지만 저는 설교자의 영적인 변화의 문제 그것에 초점을 맞춰서 사실은 그 책을 쓴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관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자가 탄탄한 신학을, 정교한 전달기교를, 그리고 철저한 원어에 대한 교육을 철저한 본문의 연구를, 시대에 맞게 결과물을 내 놔야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여러분들을 사람의 세계로 한 번 데려가 보려고 합니다. 설교자가 끊임없는 고난과 자기 죽음 속에서 비로소 설교자와 설교가 일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T. H. 파커라는 사람이 칼빈을 연구하면서 칼빈의 설교의 특징이 무슨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든 그 본문과 설교자 자신이 밀착된 것을 느끼게 하는 친밀성이 있었다는 것 그 비결이 바로 설교자의 사람됨과 설교함 사이에 간극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자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순서로 제가 강의를 할 것입니다. 설교자라고 함은 기본적으로 고난의 길 위에 선 사람입니다. 외적으로는 여러 가지 환경의 갈등, 가난, 심하면 가족들로부터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내적인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이기 때문에 겪는 독특한 내적인 고난이 있고 또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고통의 길을 걸어갑니다. 루터는 신학공부를 이런 식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크게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첫째가 ‘오라치오’(Oratio)입니다. 신학공부의 첫 번째 비결을 루터는 ‘기도’라고 제시했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치는 헌신적인 기도가 없이 신학공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메디타치오’(Meditatio)입니다. 이 ‘묵상’은 머리에 있는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가서 가슴을 움직여서 살게끔 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오늘날은 사실 이 두 가지가 매우 약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묵상’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 한 구절 놓고 큐티 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약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이 신학공부를 하면서 특이하게 ‘텐타치오’(Tentatio)라는 것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시련’입니다. 고통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이 시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도록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그 지혜가 얼마나 참되고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능력이 있고 위로가 되는지를 경험하게 해 주는 시금석입니다.” 이 당시에 마르틴 루터는 “참된 설교자와 거짓된 설교자의 차이가 있다면 참된 설교자는 고난을 당하는 설교자이다. 그리고 거짓된 설교자는 영광을 받는 설교자이다.” 그 시대에 진리를 선포하면 누구든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가 쓴 비트마르크 판 저작 전집의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쥐똥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제가 후추같이 고급 향신료에 빗댈만한 신학자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면….” 이것이 뭐냐면 그 당시에 후추는 동방에서 들여온 최고의 향신료였고 금 무게와 후추 무게를 같이 달아서 거래가 될 정도로 귀했다고 하니까 그 당시 귀족층에서 많이 사용을 했습니다. 후추 모양이 쥐똥과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자신은 쥐똥이고 잘나서 후추같이 고급 향신료 같은 카톨릭 신학자들과 자기를 어깨를 겨룰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교황주의자들 덕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악마의 분노로 저를 공격하고 탄압하고 저를 괴롭혔습니다. 말하자면 저들은 저를 꽤 좋은 신학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시련이 없었더라면 저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을 하는 전통입니다. 고난. 사도바울도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능력에 있어서는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을 했고 당대에 학문을 섭렵한 사람이었고 능력으로는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도 결국은 감옥에 갇힙니다. 그래서 설교자에게는 숙명적인 고난이 주어지는데 그것을 제자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우리는 능력이 많으면 모든 일을 쉽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능력이 많은 것만큼 고난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설교자에게 숙명적인 고난이 주어지는데 이것을 ‘참음’과 ‘견딤’으로 이겨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예배당은 칼빈이 목회를 하던 제네바에 있는 성 삐에르 성당입니다. 저는 약 7-8년 전에 종교개혁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솔직히 비텐베르그에 갔을 때는 그냥 감탄만 나오고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르틴 루터는 나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사람이고 풍운아처럼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삐에르 예배당을 들어가서 칼빈이 설교하던 단상을 보고 앉았을 때 눈물이 확 쏟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은 그런 풍운아적인 기질을 가진 영웅적인 인물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내향적이고 조용히 시골에 앉아서 글이나 쓸 선비였는데 하나님의 역사에 떠밀려서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 서면서 점점 강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 사람이 제네바에서 목회를 합니다. 목회가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1차로 추방을 당하고 8년 뒤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마르틴 부처에게 목회를 배웁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초청을 받아서 제네바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왔을 때 칼빈이 목회를 하던 회중이 5천 명쯤 되는데 돌아가실 때는 만 5천 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그 자체가 어마어마한 힘이었고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마르틴 부처에게 이민 목회를 배우면서 자신이 돌보는 영역을 영국의 난민들, 프랑스의 난민들, 이탈리아 난민들 이렇게 쪼개서 각각 사역자들이 그들을 목회하는 것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배워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참 목회할 때 악의적인 비난이 있었습니다. “거짓 진리를 전파하는 불량한 설교자다.” 이것이 피에르 아모(Pierre Ameaux)의 비난이었고 또 악의적인 비난은 까르텔 수도원의 수사이면서 의사였던 제롬 볼섹(Jerome Bolsec)이었습니다. 칼빈이 살았을 때는 칼빈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들었다고 하고 사후에는 칼빈을 비난하는 전기를 씁니다. 그래서 구제불능이며 짜증나며 사악한 인간이고 늘 불만족으로 가득 찼고 동성애적인 기질을 보여서 느와용 성당에서 쫓겨난 것도 그런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서는 늘 껄떡거리던 성적인 탐욕자였다. 이런 비난을 퍼붓습니다. 장 뜨롤리에는 “기독교는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드는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장 뜨롤리에는 사실 꼬디엘 밑에서 칼빈과 함께 공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비난을 받으면서 시련의 시기를 지나면서 이 사람이 점점 더 강해집니다. 서른한 가지의 병이 있었다고 하니까 사람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젤 대학에 있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가입니다. 이레나 배커스(Irena Backus)라고 하는 유명한 여성 신학자인데 이 사람이 논문을 하나 씁니다. 칼빈이 성자, 영웅, 혹은 모든 가능한 그리스도인 중 최악의 인간인가? 라는 논문 제목을 씁니다. 그래서 제롬 불섹에게 비난을 다룹니다. 이 사람이 제시한 바는 “제롬 볼섹의 비난으로 인해 유럽에서 사후 200년 동안 칼빈의 책이 잘 읽히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결국 그 모든 것을 평가하면서 우리는 그가 거짓말과 소문과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존하여서 거의 공개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평가를 내립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가 나왔느냐 하면 이레나 바쿠스의 이 논문의 요지는 사실은 칼빈에 대한 제롬 불섹의 큰 비난은 칼빈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이 죽은 후에 그의 제자인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가 칼빈의 전기를 씁니다. 그 전기에서 마지막 칼빈의 생애를 모두 지켜봤는데 베자의 증언에 따르면 자기 선생님이 얼마나 경건했는지 중세의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자기가 알고 있는 한 교부들의 경건을 능가할 정도로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칭송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제롬 불섹이 비위가 뒤집힌 것입니다. 그래서 테오드로 베자의 전기에 대해서 그것이 fact가 아니라는 것을 항명하기 위해서 또 다른 전기를 쓰는데 이러이러했다고 하더라 누가? 어디에 그런 자료가 있느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답변은 안 하면서 인신공격을 퍼 부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레나 바쿠스가 공정하게 이것들을 다루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 시대에 우리가 가보지 않은 한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악의적인 비난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사도바울도 똑같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에 들어와서 사역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어쩌면 마지막 선교가 될 지도 모르는 길을 떠나면서 에베소에 장로들을 청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들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20:19-21) 사실 이것이 우리의 가슴을 녹이는 것인데 이 사람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학문과 능력을 가지고 이 사람이 직접 전도한 사람이 136명 정도 될 것이라고 추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선교의 대 업적을 업고 기독교 역사에서 소위 위대한 30년이라는 세월을 만드는 중역인데 그 때 아시아에서의 사역을 회고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겸손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말 만물의 찌끼처럼 되어버리는 비참함, 그리고 눈물, 그 다음에 유대인의 간계에 대한 시험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난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삶입니다.
여기에서는 사도 바울이 서로 교회에서 지체들끼리 다투다가 세상 법정으로 들고 가는 것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교회에서의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것인데 이런 것들은 불익을 당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과격한 사람이 사랑의 장(고전 13장)을 기록하게 됩니다. 사랑의 장에서 사랑으로 악을 이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의 특성을 세 가지를 꼽는데 ‘오래 참다’, ‘덮어주다’, ‘견디다’입니다. ‘메크로 드메오(μακροθυμέω)’ 라고 하는데 ‘메크로’는 ‘최대한’ 이고 ‘드메오’는 ‘참는 것’입니다. 최대한으로 참고 ‘스테고(στέγω)’는 여기에서 ‘덮개’라고 ‘스테개’라는 명사가 옵니다. 있는데 그것을 가려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휘고에노*(ὑπομένω)’ 이것은 ‘그 안에서 견디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것들이 사도바울의 사상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것들을 사도바울이 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에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다” 이것이 왜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서 이탈하고 나니까 그의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사도가 맞나? 이렇게 의문을 제기했을 때 ‘나 정말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사도다.’ 증거가 있는데 기사와 능력 표적이 아니라 참음이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었다면, 주님이 나를 불러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참을 수 있었겠느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조나단 에즈워드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보는데 조나단 에즈워드 책이 조금 어렵기는 합니다. 번역에 대한 어려움도 있으니까 번역을 잘 못 했다는 것이 아니라 외국 용어로 쓰인 것을 우리말로 다시 써 나오는 과정에서 벽들이 또 있어서 어렵습니다. 많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이 세 살 때부터 글을 쓰는 연습을 하고 교육을 아주 잘 받았습니다. 여섯 살 때 자연과학에 대한 글을 발표하고 여덟 살 때 유물론에 대한 견해를 글로 발표를 합니다. 그리고 열세 살에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공부를 한 상태에서 예일대학에 입학합니다. 4년 후에 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해서 2년 후에 그 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쳤는데 약관 나이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졸업식 때 수석으로 졸업을 하면서 라틴어로 연설을 해서 극찬을 받았습니다.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뭐라고 한 인물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부흥운동가요 설교자요 목회자요 철학자요 교육자요 사상가요 사회개혁자요 과학 해석가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학자로 대성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의외로 외할아버지가 목회를 하는 교회의 부목사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됩니다. 그러다가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그 당시에 시 의회에서 교회의 회원 및 자격을 규정했는데 그것은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과 그런 부모의 후손으로서 기독교 신앙에 배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교회의 회원이라고 본 것입니다. 특히 후자에 속한 사람을 가리켜서 half covenant라고 해서 반쪽 언약관계에 있는 상태인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중생이 없어도 그렇기 때문에 성만찬에 참여가 가능하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에드워즈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성찬을 안 주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서 결국은 이 교회를 23년 만에 사임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떠나가면서 어스킹이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이 11명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세상의 넓은 바다에 내 던져졌기에 나와 내가 부양해야 될 많은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를 모릅니다. 게다가 좀 더 손에 잡힐 만한 것에 대해 열리도록 제가 의지할만한 어떤 것도 제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 이미 영국에서조차 이 사람을 흠모하는 목회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이 교회를 떠났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초청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정말 영국 목회에 맞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결국은 거부하고 인디언 선교사로 가게 됩니다. 그 때 마지막 성도들과 헤어지면서 설교를 남깁니다. ‘심판 때에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이 설교가 두 시간 이상 계속 되었습니다. 아주 긴 설교였습니다. 그 설교 속에서 분노가 폭발하고 한 것은 아니고 성경적으로 마지막 하나님이 모든 것을 판단하실 때가 된다,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시편에서도 칼빈이 보통 자기 개인적인 이야기를 잘 안 하는 사람인데 시편 주석을 쓰면서 자기가 정말 구약 성경에서 정말 모본으로 삼았던 인물이 다윗이었다고 고백을 한 후 그와 자신과의 격차를 생각하면서 한숨과 눈물 좌절 같은 것을 느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다윗을 자기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좌표로 삼은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특히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최고의 모본을 다윗에게서 찾고 신약에서는 바울에게서 찾습니다. 어쨌든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셨네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민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 31:19-20) 고백을 합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고난의 날에 많이 묵상을 하는 성격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특히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그리고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고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시험이 일어나면 온갖 비난들, 듣도 보도 못한 비난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목회자가 변명을 하면 변명을 할수록 시험의 파장이 더 커집니다. 그 때는 조용히 침묵해야 합니다. 조지 위필드가 평생 안 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비난이 있을 때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돈을 걷는데 천재였습니다. 미국에 한 번 집회를 오면 헌금을 쫙 걷는데 그 헌금을 유용했다, 고아원을 빌미로 돈을 걷어서 착복했다는 비난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마디도 대응을 안 합니다. 칼빈을 읽으면서도 그렇게 많이 비난을 받는데 칼빈이 자신을 변명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스펄전도 그랬습니다. 스펄전도 사실 대학을 못 나왔습니다.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그의 설교와 영향력을 시기하면서 그렇게 씹었습니다. 성령론이 틀렸다. 그 사람들이 쓴 논문을 보면서 스펄전이 분노를 해 가지고 책에 X표를 긋습니다. 아직도 그런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안 합니다. 그럴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사람이 사랑을 할 때와 분노가 일어날 때 제일 솟아나는 것이 언어입니다. 밤새도록 언어가 솟아나서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말해야지, 혼자서 말을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찬송)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라
목사들이 모이면 맨날 자기 교회 속상한 이야기, 장로들에게 괴롭힘 당한 이야기, 우리가 만나면 그런 이야기밖에 할 것이 없습니까? 주님을 새로 발견한 이야기,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한 이야기 그러면서 헤어져 돌아올 때는 자기가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목회자로 부름 받은 것에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헤어져야 합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 우리는 자기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이것이 구속의 강물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거의 없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음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태희가 최고의 미인이라고 그러는데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똑같은 김태희가 한꺼번에 3천 명이 압구정동에 나타난다면 아름답겠습니까? 무섭겠습니까? 무섭습니다. 한 사람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못 생긴 사람 수 천명이 옆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못 생긴 사람은 우리가 외모로 보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여태까지 1천억 명의 인류가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일천 억 명 중에서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일란성 쌍둥이도 다릅니다. 결국은 하나하나를 다르게 창조하심으로 전체가 어우러져서 아름답게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팔을 기가 막히게 분다고 할지라도 나팔일 뿐입니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 수백 명이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이루어서 교향악을 연주한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완전히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목회는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을 아주 아름답게 보면서 이 사람들을 하나의 사랑으로 엮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름다운 하모니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김태희는 얼굴이 예쁘게 생겼지만 김태희가 가지고 있지 못한 또 다른 정신적인 재능을 그보다 못 생긴 사람이 가지고 있어서 얼굴에서는 못 생긴 외모로 김태희를 빛내주지만 김태희는 재능 없는 것으로 재능 있는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해 주고 그것을 모두 인정해 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모습이 교회입니다.
한국에서 한 때 박정희 시대 때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농촌 진흥청에 지시를 해서 수확량이 좋은 벼를 만들라고 해서 만든 것이 통일벼였습니다. 통일벼가 같은 농지에서 수확량이 30%가 더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논을 갈아엎어서 통일벼로 통일을 했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병이 돌아서 병충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에 쓸어버려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농지별로 각각 다른 종류의 벼를 심습니다. 여기에서 병이 생기면 이쪽으로 안 옵니다. 이것이 통일 되니까 한 번 병이 생기면 싹 쓸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다양하게 창조하셨으니까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서로 용납해 주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이 창조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획일적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을 때는 그런 야심을 가집니다. 사령관이 된 것처럼 ‘모두 나를 따르라’ 문제는 자기가 조금만 잘 못 가면 모두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결로 사람들을 만드셨는지 보면서 그 결을 그대로 살아나게 하면서 누구도 주인이 되게 하지 아니하는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난이 많겠습니까?
여기에 보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아마 이 사람은 목회자인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성경말씀으로 가르치니까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따끈따끈해 지는데 이 사람은 변질되기 시작하고 이 사람은 많이 변질 되어서 여긴 나가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모두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목회자들은 꼭 이 사람들만 데리고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때로는 원수처럼 생각합니다. 이러면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하트가 더 큽니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렇게 변질되는 사람을 아파하고 이렇게 이미 심령이 변질된 사람 때문에 불쌍히 여기고 이렇게 미끄러져서 이미 나가떨어진 사람조차 상처받은 양떼라고 생각하면서 모두 용납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둘이 마주 앉았는데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좋지만 스피노자의 표현에 의하면 코나투스가 상승하지만 당신 그렇게 목회를 하면 되겠냐? 그러니까 교회가 그 꼴이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코나투스가 툭 떨어지는 것입니다. 스트레스 받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의 사람들만 찾아다니면서 만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환상을 계속 갖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인가 보구나’ 그런 것들을 우리만의 고백이 아니라 위대한 성자 같았던 어거스틴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해서 반대의견을 피력하거나 비난을 하면 나는 슬며시 저 사람은 뭘 몰라서 나를 비난하는구나 하고 혹시 어떤 사람이 내 의견에 찬동을 해 주면 저 사람은 뭘 잘 알고 싹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나이다, 나의 이 교만을 어찌 하오리까” 이런 탄식을 그런 위대한 사람들도 모두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쓰디 쓴 이야기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항상 조심하고 속으로 그것에 대해서 귀를 막아야 합니다. ‘이것은 쓸데없는 칭찬이다 당신이 나를 아직 모릅니다.’ 이렇게 하고 남의 평가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쁜 평가에 흔들리지 않으나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좋은 평가에 대해서 격려를 받을 수 있으나 교만하지 아니하는 자기중심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목회자들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내가 우스운 말로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시고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을 주십니다. 그랬더니 우리 교회 청년 하나가 “목사님, 요즘 하나님이 저를 조금도 사랑하시지 않은 것 같아요.” 돈이 없나보지요?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통해서 설교자를 점점 더 온전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사실은 모든 훌륭한 설교는 설교를 어떻게 좀 더 잘 할까 라는 고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될까 를 고민하는 데에서 훌륭한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약 10년 전쯤에 생물학을 배워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원도 없지만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할 수는 없으니까 생물학 선생님을 사비로 초청을 해서 약 1년 정도 과외를 했습니다. 그래서 생물학에서 기초 의학까지 넘어가다가 공부를 중단을 했는데 그 때 생물선생님하고 공부를 하면서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서울대 박사과정을 끝내가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물론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 생물에 대해서 가르쳐주는데 놀라운 것은 생물현상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데 의미에 대해서는 해석을 못했습니다. 특히 생명이 뭐냐고 하니까 생물학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그 때 배운 내용 중에 하나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여기 그림에 나오는 이것은 독거미에게 물린 피부입니다. 그래서 피부가 죽어갑니다. 이것을 의학에서 ‘네크로시스(necrosis)’라고 합니다. ‘네크로’는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네크로시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세포의 죽음인데 세포생물학에서 얘기하는데 타의적인 죽음입니다. 화상, 타박상, 유해 물질 등으로 세포가 팽창하면서 괴사해 버리는 것이 네크로시스입니다. 독거미에 세포가 죽은 것입니다. 여러 개의 세포가 한꺼번에 죽은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과학이 아직 못 푼 것이 있는데 또 다른 종류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아포푸트시스라고 합니다. 이 세포가 스스로 죽습니다. 그래서 세포가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살을 하는지는 메카니즘이 안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을 때 ATP라는 화학에너지가 나옵니다. 그 에너지가 옆에 있는 세포에게 동력으로 전달이 되면 이것을 가지고 그 세포 공장을 돌리면서 증식하고 분열을 하면서 세포 개체수를 늘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세포에게서 얻은 생산물들이 그 옆에 있는 살아있는 세포들에게 활용이 됩니다. 여기에서 아주 아이러니가 나오는데 우리 몸 전체가 60조개의 세포로 되어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60조개의 세포를 꼬마전구로 환원을 해 보십시오. 60조개의 세포가 있는데 이것이 가만히 불이 켜진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깜박거리면서 꺼지며 죽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서 옆에 것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내리는 놀라는 결론은 살아있다고 하는 것들이 그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자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서 그 몸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유지가 부분적인 죽음에 의해서 지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가다보면 세포에 이상 현상이 생겨나서 아무 세포도 특정부위에서 특정부위의 세포 중 아무도 아포푸트시스를 안 합니다. 세포가 안 죽습니다. 세포가 자살을 안 합니다. 그리고 네크로시스도 안 당합니다. 그러면 세포는 살기 위해서 영양분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세포에 갈 영양분을 빨아들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인자 몸이 바짝 마르면서 특정 부위에만 세포들이 안 죽고 덩어리가 져서 강력하게 모이는 것인데 이것이 암에 대한 의학적 설명입니다. 그래서 암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세포도 자살하지 않는 생명 덩어리가 암세포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 덩어리 때문에 결국 몸 전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세포가 주는 수명을 넘어서 무제한으로 증식하려고 하는 세포 이것이 다른 조직으로 전이됨으로서 비정상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만져보아서 암 덩어리인가 할 때에는 형체가 아주 일정하면 암 덩어리일 가능성이 없습니다. 암은 비대칭적입니다. 불규칙한 형태를 갖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죽지 않는 특정부위의 왕성한 생명 때문에 몸 전체는 죽음으로 됩니다.
목회자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너무 가벼운 찬송들이 교인들의 의식 수준을 한없이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공정하게 다뤄야 합니다. 그 찬송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들 용으로 불러주고 여러분들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 생각해야 합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국가론에서 국가가 지탱되는 비결에 대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나라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결혼도 안 하고 자식은 낳지만 특정한 부인도 없는, 전사 계층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유지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교회에도 이렇게 아포푸트시스의 죽음을 자처하는 선두에 목회자가 서야 합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기꺼이 아포푸트시스의 죽음을 죽으려고 할 때 그래서 그 죽음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려고 할 때 교회는 문제가 생겨도 여전히 생명이 살아있을 수 있지만 목사를 중심으로 이런 역할을 하는 상황도 종종 벌어지기 때문에 결국은 몸 전체가 죽는 것입니다.
생물학을 배우기 1년 전쯤 천문학을 꼭 배워야 되겠다는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돈이 한참 돈이 많이 나갈 때 개인 돈으로 과외비가 한 달에 160만원씩 나갔습니다. 그 때는 책을 써서 인세가 들어오니까 교회에 기댈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똑같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여러분 천문학이 교부들하고 종교개혁 시대 때에 휴머니스트들은 거의 필수교양과목이었습니다. 그것이 음악하고도 연결이 되고 모든 것들과 연결이 됩니다. 의학하고도 연결이 됩니다. 어쨌든 그 천문학을 1년 배우고 더 배우고 싶었는데 그 선생이 하는 이야기가 지금부터는 아주 고급의 미적분의 세계로 들어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배우고 더 공부를 하시겠냐고 해서 우리 교회에 공학을 전공한 박사가 있어서 물어보니까 고3수준에서 1년 정도 미적분을 하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내가 언제 미적분을 해서 천문학을 수학으로 풀어보랴 하고 1년 하고 끝냈습니다. 1년 동안 너무 재미있게 배웠습니다. 배우면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유사한 강의를 들은 것이 아니라 내가 발견하면서 신학하고 엮은 것입니다. 인터넷을 모두 뒤져도 이런 강의는 안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로부터 약 7천 광년 떨어진 곳에 독수리 성운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기동이 하나, 둘, 셋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큰 기둥이 여기에서 여기까지 빛이 4년을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태양까지가 8분밖에 안 걸립니다. 4년을 가야된다고 하니까 그 길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4년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뭐냐? 원래 우주에는 H(수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수소도 없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분자간의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우주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H 가 모토가 되어서 수많은 원소들이 생겨납니다. 그 비밀은 열입니다. H에 열을 3만도 정도를 가하면 수소분자 세 개가 뭉치면서 H3인 헬륨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도 지금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헬륨으로 풍선도 끼우고 합니다. 역사이레로 사람들이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금을 만들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연금술이라고 합니다. 아무도 성공을 못 했습니다. 이유가 있는데 지구상에 있는 모든 금은 우주로부터 날라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H에 50억 도의 열을 가해야지만 금이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만들 수 있는 온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 공간에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거대한 것이 태어났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분자운이라고 말하는데 우주 공간의 먼지의 집합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생기느냐? 별들이 수십 억 년을 지나다가 생애를 마칩니다. 그러면 이것이 마지막에 적색 외성의 상태가 되었다가 커다란 폭발과 함께 생을 끝냅니다. 태양도 언젠가는 생을 끝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폭발을 하면 그 폭발의 파장이 수 금 지 화 목성까지 지나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별의 일생을 끝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렇게 폭발을 하고 분자로 환원이 됩니다. 그것들이 특정 부위에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면 이것이 중력이 작용하면서 장구한 천문학적인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이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끌어당기면 여기에서 핵반응이 일어납니다. 온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핵융합이 일어납니다. 그런 긴 세월 끝에 끝에서 폭발을 합니다. 폭발과 함께 분자운에서 떨어져 나와서 별이 되는데 이것이 새로운 별의 탄생입니다. 별은 아무 곳에서나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알집처럼 이런 별이 탄생하는 산실이 있고 여기에서 수없이 나옵니다. 이것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던 이유는 이 별 먼지는 어느 별이 폭발하면서 죽은 가루입니다. 그 죽은 것들에서 이것을 재료로 삼아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별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데 태양계 안에 이런 위성을 포함해서 항성은 2천 억 개쯤, 위성까지 모두 합하면 약 4조개의 별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우리 은하계이고 우주에는 이런 것들이 약 일천 억 개쯤 있다고 보고 이런 우리 은하계가 4조개의 별이 초속 220km로 우주로 날라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그 한 순간 약 6개월 동안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뭐냐면 저 우주에서 별들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별들을 탄생하게 하시는 원리가 세포 속에서 적용이 되더니 놀라운 것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찬송)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To die is to gain.” ‘죽는 것이 얻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하는 그 고백도 사실은 이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우주 속에서, 세포 속에서, 인간의 영혼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천명 교회에서 백 명만 죽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리고 백 명보다 중요한 것은 목사입니다. 목사가 죽으려는 마음을 가지면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체처럼 있는 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모든 것을 주신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교회를 위해서 죽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으로 죽으십니다. 목회자를 삼으셨습니다. 이 친구는 투덜이 입니다. 사건만 나면 자기 보따리 싸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씩씩거립니다. 이 친구는 탐관오리 자기가 엄청난 벼슬을 하고 있는 것처럼 배가 불뚝 나와 탐욕이 가득차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참 궁금하게 생각하십니다. 나는 널 위해 죽었는데 너는 뭘 하는 것이냐? 모두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구원 받을 때 Lordship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제껏 내가 나를 주인 삼았던 삶을 불행한 삶이라고 여기면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한데 있어서 하나님이 십자가를 사용하십니다. 이쪽에 나오는 사람은 중세시대에 수도사였던 동시에 신비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어마어마한 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hlaraevallensis)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교회론의 해석에서 나오는 신랑과 신부의 비유 그런 것들이 이 사람에 의해 발달해왔습니다. 칼빈이 그리스도의 연합의 교리를 설명할 때 사실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들이 강력하게 제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중세 친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 다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일체의 이기심이 없이 당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 자신에게 가장 합당한 사랑을 받으신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으로 일체의 이기적인 섞임이 없이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한 그런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번에 그렇게 거룩해 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을 성숙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신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성숙시키시는 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고난은 고난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는 동기가 되는데 조건은 이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에게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겪으면서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합치하려고 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예수의 죽음이 오늘 나의 마음속에 actualization 현실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죽음이 그리스도의 육체를 죽이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리켜서 청교도들이 칼빈이 modification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 modification이 있는 그곳에 칼빈의 설명에 의하면 vivification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modification이 죽음이라면 vivification은 살림입니다. 죄의 죽임이 있는 그곳에서 예수의 생명이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죽음을 이긴 것처럼 우리가 죄와 현재적인 사망을 이기고 충만한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고난을 통해서 십자가상에서 우리에게 영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는 도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서 저는 우주를 관통하는 원리를 하나 읽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영어성경에는 ‘죽는 것이 얻는 것이니라’ 이것이 우주와 인간의 몸과 마지막으로 인간의 영혼까지 관통하는 하나의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누리는 원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하고 다음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한 사발의 피 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토해놓지 않을 수 없는 내적인 강제력을 가진 사람이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것을 피처럼 토해놓는 그 행위가 설교입니다. 한 사람이 설교자로 서는 순간 그는 일생을 살았던 자신의 생애 전부를 가지고 그 자리에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떻게 잘 설교할까를 아무리 많이 고민을 해도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그 설교는 살아있는 설교가 될 수 없습니다. 설교는 잔인한 것입니다.
<서편제>라는 영화를 오래 전에 보신 적 있습니까? 거기에서 오정혜라는 배우가 나옵니다. 창을 하는 사람입니다. 시장에서 창을 하고 옆에서 장구를 치고 창을 합니다. 스승이 여관에 불러놓고 회초리로 치면서 말합니다. “이년아 그것도 창이라고 하고 있냐? 창은 한이 맺혀야 하는 거야.” 장구를 치는 놈을 작대기로 등판을 때리면서 “그것을 장구라고 치느냐? 장구는 한이 맺혀야 장구가 장단이 나오는 거야.” 창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폭포수가 떨어지는 뒤편에서 소리를 질러서 십리 밖에서 그 소리가 들려야 했답니다. 발성연습인데 그 목청이 트이기까지 한 사발의 피를 쏟아야 된다고 합니다.
설교자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설교자가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설교자가 되어갈 때 하나님은 설교자 없이 당신 은혜로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은혜로 그 사람을 바꿔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경험에 의하면 여태까지 제가 5300편의 공식 설교를 했습니다. 열린 교회를 한 지가 25년이 되어 가는데 그 중에서 약 300편은 목회하기 전에 한 것이고 아마 제 생각에 5100편쯤은 열린 교회에서 설교를 한 것 같습니다. 1년에 부흥회를 4번을 했고 24년 동안에 한 번도 외부 강사가 온 적이 없으니까 약 90편정도 했습니다. 제가 돌아보면서 확실하게 느끼는 것 하나는 나는 쓰레기 같은 인간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몇 년에 한 번씩 제 눈을 생애적으로 열어주신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전혀 보지 못했던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고, 보고, 보고, 그리고 저는 왔고 지금도 저는 새로운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 저의 초창기 책을 읽고 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에게 저는 말합니다. 나는 그 때의 생각은 변함이 없으나 저는 지금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열어주신다는 이야기는 매일매일 설교를 준비할 때 열어주시기도 하지만 영적인 수준을 상성시키는 그런 깊은 변화가 질적으로 영적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중학교 3학년이 목숨을 걸고 수필을 써도 그것은 중학교 3학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깊이가 깊어진 중년에 쓴 수필은 중학교 3학년 수준에서 유서를 쓰고 혈서를 써도 도달할 수 없는 수준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면서 설교자로서 온전해지려고 할 때 설교도 함께 상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끊임없는 자기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