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고난과 자기죽음
녹취자: 김정규
목회자가 누구냐? 여러 가지로 목회자를 정의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본다면 목회자는 고난에 직면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외적으로는 갈등, 가난, 때로는 가족들 사이의 박해, 내적으로는 끊임없는 고통 속에 시달리면서 가야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시골교회에서 심방을 가시다가 고목나무를 발견했답니다. 큰 고목나무에 구명이 뚫려 있어 그 나무를 만지면서 “나무야. 넌 목회도 안했는데 왜 이렇게 구멍이 뚫렸냐?”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목회자의 슬픔입니다.
루터는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루터의 영향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기존의 신학 공부하는 방식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새로운 신학 공부 방식을 제시합니다. 신학적으로 이 사람은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 중세시대의 과목이었다면 자신은 십자가의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신학공부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으로 첫 번째로 기도(Oratio)를 꼽았습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경배의 정신이 가장 깊이 깃들어있는 경건의 행동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없이는 신학공부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요즘 우리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두 번째는 메디타치오(meditátĭo), 묵상입니다. 묵상에 대한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자료는 성경입니다. 성경과 성경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교부들의 글들과 성경의 해석을 더 밝혀주는 지식의 책들을 묵상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생각하며, 묵상하는 것입니다.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를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묵상이라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루터에게 이 두 가지 말고 한 가지 더 있는 것이 세 번째로 텐타치오(tentatio)라는 시련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극단적으로 이렇게까지 얘기했습니다. “한 설교자가 이 시대의 참 설교자인가 거짓 설교자인가를 알려면 한 가지가 동원된다. 그가 고난받는 사람인가? 영광받는 사람인가? 참 종은 반드시 고난을 당한다.” 그러면서 텐타치오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도록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그 지혜가 얼마나 참되고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능력있고 위로가 되는지를 경험해주도록 하는 시금석(試金石)입니다.” 라고 썼습니다. 이글은 1539년에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판 웍스를 내면서 비텐베르크판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 다음에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큰 심금을 울리는데, “만약 쥐똥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제가 후추같이 고급 향신료에 같이 빗댈 만한 신학자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해주신다면-그 당시 쥐똥의 모양과 후추는 그 알갱이가 비슷하고, 후추는 수입향신료로 금과 동일한 무게로 거래가 될 정도로도 비싸서 귀족들이 그것을 자산에 올리는 것을 과시하던 시절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문맥을 갖고 있습니다.-나 자신이 이런 신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교황주의자들 덕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악마의 분노로 나를 공격하고 탄압하고 괴롭혔습니다. 만약 저들은 저를 꽤 좋은 신학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좋은 신학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상이 이미 성경에도 나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제자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목회자에게는 숙명적으로 고난이 주어지는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고 그의 하신 일을 하는 것이 목회자의 직무인데, 예수가 세상에 계셨을 때 환영만 받질 않으셨기 때문에 목회자에게도 고난이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고사항입니다.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모함을 당하고 비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 목회자가 살아가는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생활비가 적어서 가난하고 그런 것은 불편하기는 한데, 무서워해본 적은 없습니다. 저런 일들을 목회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 깊이 목회자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 후에는 존 칼빈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칼빈은 성격상으로 볼 때, 저런 대단한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성적이고 선비로서 조용히 글이나 쓰면 좋았을 성격의 사람으로 사교성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종교개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독을 받으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한 5년 전에 제가 종교개혁지를 다니면서 공부하기로 했을 때, 솔직히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던 비텐베르크에 가서는 눈물이 안 났습니다. 왜냐하면 마르틴 루터는 내가 가까이 가기엔 영웅같은 삶을 살았고, 풍운아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하고는 그렇게 적응이 안됐고, 그냥 바라만 보고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근데 피에르 예배당에 갔을 때, 칼빈이 설교하던 단상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이유는 저렇게 약한 사람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수많은 원수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자신이 목회하던 예배당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상을 제거를 못했습니다. 이것은 뭐든 것을 자기마음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대적자들이 나타납니다. 피에르 아모르라는 제네바 시의원은 “칼빈은 피카르드 출신이고 거짓교리를 전파하는 불경한 목회자”라고 했습니다. 카르멜 수도회 수사인-의사인데-제롬 볼쉑이라는 아주 나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칼빈의 사전(死前)에는 그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들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칼빈 사후에는 칼빈은 구제불능이며, 짜증나며 사악한 인간이었고, 늘 불만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고, 동성애 기질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에게 껄떡대던 인간이었다고 비난했습니다. 제네바의 목회자 가운데 트롤리에는 기독교강요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기독교강요는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드는 사악한 가르침이다.” 라고 비판합니다. 이 사람은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가르치는 이레나 배커스(Irena Backus)인데,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이분이 몇 년 전에 쓴 논문에서 칼빈의 이런 문제들을 과연 진실성이 있는 비난인가에 대해 제롬 볼쉑에 대한 이야기를 해명을 한 가운데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악의적으로 공격한 것은 사실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하면서 “우리는 모름지기 거짓말과 소문과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존하였음을 거의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많은 비난을 퍼부었는데, 그 근거를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이 죽고 난 다음에 그의 제자 테오도르 베자라는 사람이 칼빈의 생애에 대한 전기를 씁니다. 그 전기에서 칼빈의 생애 마지막 모습이 너무 경건하고 거룩한 나머지 이 베자가 완전히 심취해서 너무 극단적으로 존경하면서 곁에서 본 우리 선생, 칼빈의 모습은 너무 거룩하고 경건했기 때문에 어떤 교부들도 능가하지 못할 정도로 기독교 역사상 최고 수준의 경건 속에서 산 사람이라고 씁니다. 이것을 보고 볼쉑이 화가 나서 그 당시의 칼빈의 계승자였던 두 사람-목회는 부게하겐(Johann Bugenhagen), 신학교육은 베자에게 맡겼는데-중 베자에 대한 반감으로 공격하기 위해 나온 것이 칼빈의 비난에 가득 찬 전기였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설득력을 얻고 있는 논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정말 대단한 학식과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을 정도의 능력,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목회하던 사역을 회고하면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이 고백을 합니다. 그 3년이 넘는 사역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인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19-21) 여기서 배운 것은 첫째, 모든 겸손과 눈물입니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낮아져서 겸손해졌다는 것도 있지만, 상황이 그로 하여금 낮아지도록 만든, 자고하지 못하도록 그를 주저앉히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외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겪는 모든 고통과 낮아짐을 함께 말하고, 그러면서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의 고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능력이 많으면 쉽게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훨씬 더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안의 다툼에 대해서 고발하고 소송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의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도 바울이 씁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사랑하고 정말 상관이 없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의 진수를 배워갑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의 특성이 몇 가지가 나옵니다. 인내와 관련된 것이 3개가 나옵니다. ‘메크로듀메오(μακροθυμέω)’에서 ‘듀메오’(θυμέω)는 ‘참다’라는 의미입니다. ‘메크로’는 ‘최대한’의 의미입니다. ‘제고(ζηλόω)’는 ‘덮어주다’입니다. ‘덮개’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포메’는 ‘견디다’, 이런 모든 것들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목회사역과 섬김 사역에서 인내해야 된다는 것을 저런 식으로 온 몸으로 견뎌내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이것은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했습니다. ‘사도라고 하는데 정말 사도인가? 예수님이 생애를 직접보거나 예수님이 임명한 사람도 아니지 않는가?’ 그럴 때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변증하면서 ‘내가 진짜 사도다. 그 증거는 첫 번째, 내가 사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오래 참았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진짜 소명 받은 사람들만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찬양은 목사에게는 해당이 안 됩니다. 교인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목회자는 고난 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인들에게 기대를 바라지 마십시오. 저는 좀처럼 실망하지 않습니다. 기대를 별로 안하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인내를 배우게 되는데, 이 사람은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미국의 학자들 가운데 ‘The Greatist’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설교자의 생활이나 부흥가, 교육자, 문학가, 철학자, 과학자, 해석자 이런 모든 다면체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일대학을 졸업합니다. 13살에 예일대학에 입학을 해서 17살에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그리고 2년 동안 거기서 석사를 공부한 후, 수석으로 졸업을 하고 라틴어로 연설을 합니다. 이 사람은 이미 3살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6살 때 곤충에 관한 짧은 에세이를 발표합니다. 8살 때 유물론에 관한 것을 글로 밝혔습니다. 그리고 졸업하고 2년 후에 예일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그때 나이가 약19살입니다. 이 놀라운 천재가 학교에서 자리를 잡고 학자로 대성할 줄 알았더니, 뜻밖에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 부목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물려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약 23년 정도 목회를 하다가 교인들로부터 쫓겨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찬참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시의회에서는 성찬의 자격을 법으로 규정함에 있어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언약백성으로 보아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법이 붙었고, 여러 가지 솔로몬 스토더드(외조부, Solomon Stoddard)도 그것을 계승했습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가 나중에 성경을 연구하더니 이것이 신학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자각하고 반기를 들게 됩니다. 그래서 중생의 경험이 없이도, 진짜 구원받지 않아도 세례와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그것이 소위 얘기하는 반쪽 언약상태(Half Covenant)입니다. 이 상태도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통적인 주장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반대를 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교인들로부터 쫓겨나게 됩니다. 그는 교인들에게 별 매력이 없는 설교자였습니다. 하루에 13시간씩 공부를 했으니까 심방도 별로 안하고, 그리고 굉장히 귀족적인 배경을 가지고 자랐기 때문에 교인들하고 갈등이 있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하는데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것을 교인들이 공동의회에서 투표를 하는데, 압도적인 표차로 추방됩니다. 설교로 교인을 많이 괴롭혔고, 어떤 교인은 설교를 듣고는 너무 고통을 받아서 나가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교회마당에 종이 달려 있었는데, 그 종이 이유도 없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당신들은 저 종이 왜 떨어졌는지 압니까?” 하니 “우리 담임목사님이 한참동안 째려봐서 종이 끊어졌을거야.”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에드워즈가 고별설교를 합니다. “이제 나는 세상의 넓은 바다에 내던져졌기에 나와 내가 부양해야할 가족들-자녀가 11명이 있었다고 한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게다가 좀 더 손에 잡힐 만한 것을 위해 열림으로 의지할 만한 어떠한 것도 내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설교했습니다.
저런 유능하고 어마어마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18세기 때 이미 책을 읽어보면 사서삼경에 대한 비판이 나옵니다. 다 읽어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판하는 글이 나온 것은 17세기 전반에 이미 유럽에서 소위 ‘차이니즈 필라소피엔’이라는 책들 중 중요한 것들이 다 번역이 돼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번역이 잘 되었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같은 사람들이 공맹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국부론』과 같은 책들이 나오게 됩니다. 영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칸트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유럽에서 책을 정기적으로 구입해서 보내주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사표내고 나온 다음 영국에서 담임목사로 초빙을 하는데 가지 않습니다. 만약 왔더라면 역사가 재미있게 됐을 것입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친구들이 에드워즈를 깊이 존경하고 그 학문을 높이 평가하는 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에드워즈를 돕는 마음으로 열심히 책을 사서 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책에 양에 비하면 별거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책을 얼마 없었습니다. 이런 시련을 만났을 때에 시인도 이런 똑같은 고통을 고백하면서 시편 31편을 노래합니다. 이 시는 실제로 목회하면서 고통 받을 때 많이 낭송했던 시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후배 목회자들을 보면, 가끔 혈기를 못 참고 교인들하고 싸우고, 심지어 교회가 찢어지고 그러는데,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 있었겠지만 참아야 합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목회를 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랑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죄를 용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용납하면서 그 사람이 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있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오직 하나 되어야 할 것은 진리로 하나 되는 것이지만, 다른 것들 때문에 다투거나 분쟁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여기에 남자, 여자, 아주머니, 처녀,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이런 다른 사람들을 모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소중하다고 한 사람을 우리가 하찮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림을 보며) 빨간 것은 아주 마음이 상하고 곪고 있는 것이며, 성경을 들고 있는 것으로 목회자 같습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치니 은혜를 받은 교인들이 마음이 뜨거운 사랑에 불타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사람은 옛날 한때 주님을 사랑하던 빨간 마음을 갖던 사람인데 변질되어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는 미끄러지더니 마지막에는 아예 넘어져 버렸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자기 말 잘 듣고 은혜 받는 사람들만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한때 그러다가 변질된 사람, 미끄러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이 모든 미성숙한 지체들을 다 용납하면서, 다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 목회자의 사랑입니다.
목회자는 그런 모든 고난을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깨뜨려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일단 목회를 하면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고 교회를 원망하거나 교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면 목회자의 마음은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를 떠나면 목회자가 교회에 관심이 없습니다. 밖에 나가서 활동하고 책임을 맡고 리더가 되는 그런 일을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남편과 아내가 둘이 사랑합니다. 남편이 집에 잘 안 들어옵니다. 매일 식구들이 다 잘 때 들어오고 아침에 일어나면 나가버립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출장 다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집이 싫은 것입니다. 아내와 얼굴을 마주보기 싫은 것이며, 애들도 그렇게 크게 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교수와 함께 그리스에 집회가 있어서 가는데, 그 목사님이 저에게 “목사님. 저는 집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요.” 라고 합니다. 그것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 큰 사람이 “우리 집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요.” 라고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목회자의 관계는 부부관계와 똑같습니다. 남편이 목회를 하다가 아무리 인정을 받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도 자기한테 잘 해주지 않으면 “그래. 데리고 살아라.” 하고 줘버리고 싶은 것이 부인들의 마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진심으로 눈물로 사랑해줄 수 있는 엄마와 같은 목회자를 원합니다.
저는 언젠가 생물학을 공부하다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 한동안 기도 속에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포의 죽음입니다. 세포의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네크로시스(necrosis)의 죽음과 아포토시스(apoptosis)의 죽음-적당한 번역이 없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포의 괴사입니다. (사진을 보며) 이것은 피부에 독거미에 쏘여서 죽어가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의학에서는 네크로시스라고 합니다. 이것이 타의적인 죽음입니다. 화상, 타박상, 유해물질, 화학물질들의 작용으로 세포가 팽창하면서 괴사하는 덩어리째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으므로 이성적으로 잘 설명이 됩니다. 다른 것은 아포토시스라고 하는 죽음입니다. 이것은 과학에서 아직 안 밝혀졌습니다. 세포가 어떤 시기에 아무런 원인 없이 스스로 자폭하듯 죽는 것입니다. 이것의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과학자들이 아직 못 밝혔습니다. 우리 몸 전체는 60조개의 세포로 되어있습니다. 그 중에서 뇌세포는 한번 죽으면 생기지 않지만, 다른 모든 세포들은 계속 재생이 됩니다. 이러한 재생은 나이가 들면(노화) 잘 안됩니다. 문제는 이 세포들이 독거미에 물리지 않아서 건강한데도 깜빡 깜빡하면서 수없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꼬마전구를 60조개를 매달아놓고 한 덩이로 보면 수시로 깜빡거리며 죽는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죽는 것이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신비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반대가 아니라 서로 통합된 것입니다. 뒤에 가서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다른 측면이 죽음이고, 죽음의 다른 측면이 생명입니다. 이런 세포가 이렇게 죽어야 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세포가 아무도 죽지 않으려 하면, 서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세포의 양분이 많이 필요하게고 그때 세포들은 바깥의 것을 자꾸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세포들이 죽어가고 힘이 한 군데로 몰립니다. 이것이 덩어리가 되는데 이것이 암세포에 대한 의학적인 설명입니다. 암세포는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는데 암세포의 정체는 생명덩어리입니다. 너무 충만한 생명 때문에 몸 전체가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생물학에서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똑같은 사실이 우주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4개의 기둥이 있는 사진을 보며) 지구에서 약 7천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독수리 성운-약 55만년 전으로 추정-입니다. 기둥들 중 가장 긴 기둥의 길이가 4광년입니다. 빛이 4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기둥입니다. 저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별은 생애를 마칠 때 폭발하고 끝납니다. 백색왜성의 상태에서 폭발을 하면서 끝납니다. 저것은 천문학적인 연대(수십억 년)가 걸리는데, 태양에 만약에 백색왜성이 되어서 폭발하다고 하면 목성까지 불꽃이 갈 정도로 폭발을 하고 생을 마감합니다. 그렇게 터지면서 수많은 분자들이 생겨납니다. 우주공간에는 원래 수소 밖에 없지만 강력한 열의 폭발에 의해서 수소가 다른 원소들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 원소를 변화시키는 것은 100퍼센트 열의 힘입니다. 고대부터 인간이 미친 듯이 개발하려 했던 것이 연금술-금이 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진짜 금을 만들 수 있다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소에 50억 도의 열을 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지구상에서 발견되는 것들은 대개 우주에서 날아온 것들인데, 거기에는 그 정도의 폭발이 있어서 변형되어서 Au(금)가 됐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폭발을 일으키면서 모입니다. 분자들끼리 힘이 있기 때문에 중력으로 이끌리면서 모이고 그 결과 핵반응이 일어납니다. 모인 것들은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핵반응이 일어납니다. 핵융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폭발합니다. 폭발한 구름에서 반짝이는 알갱이들이 떨어져 나오는데, 이것을 별들의 탄생이라고 합니다. 저런 요람에서 집단적으로 별들이 만들어집니다. 참 경이롭고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것은 별들이 죽으면서 가루를 남기고 그 가루들이 뭉치면서 새로운 별을 탄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은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To Die is to gain
이것을 정리해서 교회로 가져와 봅시다. 교회가 100개의 세포로 이뤄져있습니다. 세포가 살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자살하는 세포들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도 똑같습니다. 7천만 명 모인국가가 있다면, 7천만 명이 모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전투력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국가는 있지도 않습니다. 일부만 그렇게 하면 됩니다. 비율을 정확히 잴 수는 없지만, 700만 또는 7000만 명 가운데 단 100만 명이라도 ‘내가 이 나라의 영광을 위해 내 가문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난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라는 사람이 있으면 국가는 망하지 않습니다. 나쁜 무리인 반역자들이 나와도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을 때 밖에서 침공하지 않아도 나라는 저절로 망합니다. 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교회에 목회자로 지정해 주실 때에는 그 죽는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불러주어야 좋아하지, 생일잔치에 가서 자 우리 이런 노래를 부릅시다하고 ‘당신은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러주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다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목회자는 (힘들어도) 난 괜찮다고 해야 합니다. (희생적인) 옛날 우리 어머니들 기억하지 않습니까? 생선을 사와서 같이 먹자고 하면, 어머니는 본인은 생선이 싫다고 하시면서 드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결혼 후 며느리가 어머니께 음식을 드리면 아들은 “엄마. 그런 것 주지 마. 되게 싫어해, 짜증내.”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어머니의 마음은 애들 먹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목회를 해야 합니다.
제가 만일 신학교 선생으로 이 얘기를 하면서 낯간지러웠을 것입니다. 목회를 안 하는 사람으로 이야기를 했다면 공감을 못 얻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목회의 길을 걸었습니다. 24년 동안 열린교회를 하고, 7명의 교인들과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침체도 겪고, 고통도 당하고 많이 컸습니다. 사람들은 잘 안 믿을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교회얘기를 하면 진짜 무서운 교인이 많지만 저희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교인이 저에게 와서 ‘목사님’이라고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고통스러운 때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목사님. 교회 그만두고 싶을 때가 없었습니까?”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6개월 동안 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저녁에 잠이 듭니다. 제발 내일 아침에는 이 세상에서 눈을 뜨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서 눈을 뜨게 도와주십시오.” 모든 목회자의 삶이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리석은 목회자들은 그런 고통스런 상황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이 너무 없어 혈기를 부립니다. (거만하게) 자리에 앉아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걸터앉아서 씩씩거리고 화를 내고 탐욕을 부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저게 뭐지, 저들이 왜 저러지?’ 그것을 궁금해 하십니다. 칼빈이 아주 깊은 고통의 시기를 지나면서 성숙합니다. 그 글들과 설교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 11세기에서 12세기를 산 목회자였고, 사상가였고, 엄청난 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일체의 이기심 없이 당신의 사랑하는 인간의 사랑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합당한 사랑을 받으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모두 욕망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비밀에 있어서 존 칼빈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로 부터 많은 가르침을 차용했을 것이라고 학계의 평가입니다. 그런 모든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이 고통 받지만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회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수천 명을 목회하는 것이 힘든 게 아니라, 한 사람을 목회하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그 한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은 목회자지만, 목회자인 자기는 자기 말을 안 듣습니다. 자기 갈대로 살고 자신은 목양의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속에 흘러들어가지 않는 가르침들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 제3권에서 성화를 이야기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성숙시키는 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의미한다.” 라고 말합니다. 결국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며 살게 하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많은 고통과 괴로움들을 십자가로 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를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인내할 때 그때 그리스도의 죽음이 침투해 들어와서 지금 내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내안에 있는 예수를 부활시켜서 충만한 생명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이것이 목회의 신비, 기독교 신앙생활의 영적인 신비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시련과 어려움들을 만납니다. 그렇지만,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면서 항상 마음속에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도 고난의 길을 가셨다는 것과 우리도 고난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나는 하나님 때문에 목회하는 사람이지, 사람 때문에 소명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그래서 목회가 모두 끝난 다음에 잘 참고 잘 인내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깨어진 관계 망가진 목회자의 영혼, 늙은 육체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일생은 한번 밖에 없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 모든 사람들과 헤어지듯, 교인들과도 헤어집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지금도 나를 붙들고 계서서 나는 외롭지 않다고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목회자들로 마지막 우리의 일생을 마무리 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