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고난과 자기죽음
제가 오늘 여러 목사님과 함께 다루어볼 주제는 목회자의 고난과 자기죽음이라는 주제입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런 내용으로 강의를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목회자라면 이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고 사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많은 갈등과 고난 속에서 이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목회의 길을 걸어가면서 겪는 많은 고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뒤에 보면 마르틴 루터라는 종교개혁가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신학의 내용 자체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특히 신학을 어떤 방식으로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다음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심의 표현이라고 보았습니다. 일단 이 신학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마음을 드려서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 주님이 가장 위대하신 분이며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야한다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묵상입니다. 메디타치오라고 하는데 이것은 머리에 있는 생각들을 깊이 묵상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속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마음에 어떤 소원이 있고 머리에 생각이 있으면 사람은 머리보다는 마음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흘러 들어가서 역사하지 않으면 머리는 머리대로, 생활은 생활대로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묵상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시련입니다. 시련 혹은 고통,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려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묵상하고, 또 시련을 이기는 가운데 신학을 공부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도록 가르쳐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얼마나 참되고,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능력 있고, 위로가 되는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시금석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저작의 서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쥐똥같이 보잘것없는 내가 후추같이 고급향신료와 같은 신학자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이 된다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후추가 동양에서 수입되어 오면서 서양 사람들에게 최고의 향신료였고 매우 비쌌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이 식탁에 후추를 놓는 것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쥐똥과 통후추가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쥐똥이고 교황주의자들은 만약에 후추 같은 존귀한 신학자라고 한다면 자기 같은 시골출신이 그런 사람하고 어깨를 겨누고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것이 고난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난이 없었더라면 결코 신학다운 신학을 못했을 텐데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그는 비로소 참된 신학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교황주의자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역시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옥 속에 갇혀서 쓴 편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능력을 많이 받으면 모든 일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의 크기는 능력의 크기에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례합니다. 그래서 많은 능력을 받았던 사람들은 더 많은 고난의 길을 가도록 그렇게 하나님께 지정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목회를 하면서 능력을 달라고 기도할 때에도 항상 그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능력을 받으면 쉽게 쉽게 목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능력을 구할 때는 조용히 그 능력이 내게 주어지면 고난도 크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들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목회자에게는 운명처럼 고난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꽃길만 걷게 하시는 목회자는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을 주십니다. 그랬더니 누가 그랬습니다. 요즘 하나님이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그렇고 성경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입었던 위대한 인물들 모세, 다윗, 사도 바울, 요한 이런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느냐 하면 결국은 목회자의 삶이라는 것은 진리를 가르치고 전하는 삶이기 때문에 진리를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환영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생각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반대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마 그를 찬성하는 사람은 교주를 따르는 마음으로 따르는 맹신자들이거나 혹은 그 사람이 아예 존재감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결국은 많은 시련을 그리고 고난을 당하며 그 길을 걷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 고난을 어떻게 내 안에서 녹여내서 그래서 나로 하여금 루터가 권면한 것처럼 더 훌륭한 신학을 하게 만들고 그래서 더 훌륭한 목회자가 되도록 만드느냐는 이것이 우리의 가장 커다란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오늘 이제 이 화면에 보이는 예배당은 칼빈이 목회했던 제네바의 생띠에르 예배당입니다. 저는 종교개혁 500주년 되었을 때에 마르틴 루터와 칼빈의 유적지를 개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유적지는 독일이 개신교 국가였기 때문에 그렇고 대부분의 유적들이 동독에 있어서 마르틴 루터의 유적지는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풍운아와 같은 삶을 들으면서 사실 깊이 감동을 받았지만 그러나 저에게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질적으로도 그는 영웅호걸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한 교회를 목회했던 목회자라기보다는 유럽의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던 혁명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깊이 우러러보고 존경은 하지만 사실은 저분의 삶이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기를 돌아보고 제네바에 왔을 때 특히 이 피에르 예배당에 들어가서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은 그렇게 루터같이 혁명가적인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내성적이고 혼자 조용히 책이나 읽고 글을 쓸 선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제네바의 종교개혁가로 살았지만 그러나 항상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으로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시련과 고난이 겹치면서 이 칼빈이 연단을 받으면서 후일에 가서는 아주 굉장히 강인한 사람으로 변모한 것을 우리가 보게 되지만 그러나 역시 기본적으로는 아주 연약한 그런 사람으로서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위대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그래서 제네바의 시의원을 지냈던 ‘피에르 아모’라는 인물은 칼빈에 대해서 비난을 하면서 칼빈은 ‘삐까르디’ 출신이라고 하는데 시골뜨기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교리를 전파하는 매우 불량한 목회자라고 선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카르넬 수도회 수사 의사 ‘제롬 볼색’이라는 사람은 정말 칼빈에게 고통을 주었던 인물이었고 이 사람은 칼빈이 살아있을 때에는 ‘칼빈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든 나쁜 목회자’ 라고 했고 칼빈이 죽은 후에는 칼빈에 관한 전기를 씁니다. 아주 악의로 가득한 전기를 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칼빈은 구제불능의 인간이며 짜증을 많이 부리는 사악한 인간이고, 늘 불만족으로 가득한 사람이며, 동성애 기질을 보였으며, 모든 여성들에 대해 성적 탐닉에 빠졌던 쓰레기 같은 인간.’ 이라고 씁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그 전기의 내용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알다시피 그 당시의 이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면 칼빈이 수립한 기독교강요의 가르침들 중 ‘예정’이나 이런 많은 내용들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성주의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악감정이 되어서 이런 생각들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네바의 목회자 ‘장뜨롤리에’ 라는 인물은 기독교강요는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드는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선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나오는 의사 제롬 볼색의 칼빈에 대한 전기는 나중에 두고두고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중에 연구들이 이루어지는데 도대체 무슨 내용으로 칼빈에 대해서 비난을 퍼부었을까? 더군다나 이 사람은 ‘내가 쓴 칼빈에 대한 비난은 어느 것 하나도 근거가 없이 한 것이 없다.’고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면서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런데 후에 그런 논란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최근에 이레나 바쿠스라는 이분은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종교개혁과 이후의 정통주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여성신학자입니다. 이분이 공정하게 그 당시의 볼색과의 논쟁들을 연구하면서 어떤 것들을 발견하느냐 하면 그 당시에도 그런 문건들이 나왔을 때 수많은 질문들이 제기되었을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칼빈을 그렇게 비난하느냐?’ 할 때 정확한 근거를 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실 이 제롬 볼색이 칼빈에 대해서 비난한 것이 칼빈 때문이 아니라 칼빈의 제자인 데오도로 배자와의 갈등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슨 갈등이었느냐 하면 데오도로 배자가 칼빈이 죽고 나서 칼빈에 관한 전기를 봅니다. 그 전기에서 배자는 칼빈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표합니다. 그런데 실제 칼빈이 생애 후기 특히 말년의 칼빈에 대한 묘사를 보면 인간으로서 저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배자는 제자로서 스승을 깊이 존경했고 그 스승의 존경스러운 면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해서 그 전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칼빈 선생의 경건이야말로 그 모든 중세신학자들은 물론이고 교부들보다도 더 탁월한 경건을 수행한 사람이었다고 묘사한 것을 볼색이 보면서 그런 식으로 칼빈을 미워한 것에 대한 반발을 가지고 그 전기를 썼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이레나 바쿠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볼색이 거짓말과 소문,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존하였음을 거의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이레나 바쿠스가 볼색이 쓴 칼빈에 관한 전기에 관해 내린 평가입니다.
이런 목회자의 고난은 사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회고 속에서 이미 보여주었습니다. 3년이 넘는 세월을 아시아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하는 사도 바울이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전도여행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모두 청하여 유럽으로 가는 설교를 남기려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하면서 자신의 아시아에서의 목회생활을 이렇게 ‘모든 겸손과 눈물이여’ 여기서 겸손이라는 말은 그냥 모든 것이 평화로운 가운데 나 스스로 낮아졌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주어진 이 목회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은 진짜 고린도후서 1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물의 찌끼가 된 경험을 말합니다. 겸비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아주 비참하고 비천하게 된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런 마음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정말 쓰레기와 같은 인간으로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모든 겸손과 눈물이여’ 유대인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모두 고난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그러니까 아시아에 들어온 목회 3년이 넘는 세월을 회고할 때 기억에 남는 것은 모든 비천해진 것과 눈물을 쏟아내 목회한 것 유대인에게 시험을 당한 것 이것이 목회에 대한 기억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하나님의 말씀을 탁월하게 공부한 사람,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을 저술한 사람,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사람, 탁월한 선교사였던 이 사람이 마지막에 이렇게 연약한 자가 되어서 고백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랐습니까? 사도 바울을 덜 예뻐해서 조금 도와주셨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은 이 사람은 특별히 큰 고난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이 사울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이 결국 겸손을 이야기하게 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이야기하게 하시고 참는 것을 이야기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바로 사도 바울이 이러한 고난 속에서 터득해가며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으로 그 악을 이김에 있어서 사랑의 세 가지 특성을 특별히 지적하는데 그것이 오래 참는다는 ‘메크로듀메오’ 라고 했는데 ‘매크로’는 최대한이라는 뜻이고 ‘듀메오’는 참는다는 뜻입니다. 오래 참고 덮어주고 그리고 견디는 것 이것이 사랑의 특성이라는 사실을 예수를 만난 다메섹의 경험에서 즉시 깨달을 수 있는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그런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사랑이 무엇이지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원수조차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목회적인 심성을 길러갔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 고린도 교회가 잘못한 일 가운데 하나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힘겹게 느껴지자 그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의문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생애를 함께 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임명한 사람들이지만 사도 바울은 조금 독특한 방법으로 사도직을 부여받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직접 사도직을 부여받는데 자기 말고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일환으로써 그의 사도직에 의심을 표했던 것입니다. 그때 이 사도가 자기가 진짜 그리스도 예수께 부름 받은 사도가 틀림없다는 것을 변증하면서 ‘그 중요한 증거가 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의 사도의 중요한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과 유사한 기적을 행하는 것이 사도의 중요한 표였습니다. 그런 전통이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오랫동안 유지되고 심지어 성자의 반열에 오르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와 함께 놀라운 기적이 발생했던 증거를 선포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런 증거들을 계속 조작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것을 뒤로 밀치고 첫 번째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참음과’ 즉 ‘나 사도가 아니라고 당신들은 말하는데 나는 틀림없이 사도다. 그 증거가 있다. 봐라 내가 이렇게 오래 참지 않느냐?’ 이런 오래 참는 것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당연히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맞지 않다면 내가 이런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견디면서 살아왔을 수 있겠느냐?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20여 년 전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의미 깊은 발언을 남깁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신령한 은혜의 증거는 사랑이다.’ 신령하고 정말 거룩한 사람의 마지막 부인할 수 없는 증표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사진은 18세기의 미국의 첫 번째 대각성 운동을 주도하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탁월한 신학자이고, 설교자 이고, 목회자이고, 부흥가이고, 철학자이고, 과학 해석가이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3살 4살부터 글을 배워서 쓰기 시작하고 6살 때에는 자연을 관찰하고 글을 발표하였고 8살에는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발표합니다. 특히 철학적 사변에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3살에 라틴어와 히브리어를 희랍어를 탁월하게 습득한 가운데 이 사람이 예일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4년 후에 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졸업식 때 학생들을 대표해서 유창한 라틴어로 졸업축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2년 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예일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모두 촉망받는 학자의 길을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던 그 교회의 부목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노스햄스턴이라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고 그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됩니다. 이때에는 교인의 자격을 시의회가 규정하였는데 거기에서 반쪽언약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됩니다. 즉 예수를 믿고 중생하고 직접 회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믿은 집안에서 태어나 순종적인 삶을 살면 사실상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성찬을 받는데 문제가 없다는 이런 견해였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나중에 성경을 이야기하면서 이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런 사람들에게 성찬을 베푸는 것을 거부하면서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교인들과의 갈등 속에서 이 교회를 23년 목회하던 그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스킨이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 속에서 이런 자기 고백을 합니다. ‘말하자면 이제 나는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나와 내가 부양해야할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자녀들이 11명이나 되었습니다. ‘게다가 좀 더 손에 잡힐만한 것을 위해 열리도록 내가 의지할만한 어떠한 특별한 것이 내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성도들과 고별설교를 할 때 그 제목이 ‘심판 날에 다시 만날 분쟁하는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 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교회와 헤어져서 인디언선교사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의지의 자유를 비롯해서 그의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남기게 됩니다.
시편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가장 좋은 길은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 사랑하는 주님께 피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으신 은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임금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죄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편하게 하심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고난 속에서 목회자는 겸손을 배우고, 눈물을 배우고, 그 모든 시험을 참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그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충만한 사람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림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이 구속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단 한사람도 같은 사람으로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성경책을 들고 있는 이 사람은 주님을 아주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마 목회자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목회하는 교회는 이렇게 은혜를 받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이런 빨간 하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 위에 있는 사람은 이미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사람은 이미 변질되었고 마지막 맨 뒤에 있는 사람은 아예 신앙에서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빨간 사람 이 두 사람만 데리고 목회를 한다면 목회가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이 변질되어가는 사람, 변질된 사람, 아예 미끄러져서 신앙을 버린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모두 사랑하고 돌보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목회자의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고 나의 설교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사람으로 살게 된 사람이 항상 저렇게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며 사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이 나의 대적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명료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사람을 하나의 교회로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들이 그렇게 겪게 되는 많은 고난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나갈 것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독거미에 물려서 지금 피부에 독이 번져서 피부의 일부가 죽어가고 있는 그림이 나옵니다. 의학에서 생물학에서 세포와 관련된 신비는 세포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이 네크로시스의 죽음과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으로 나뉘는데 네크로시스의 죽음은 타의적인 죽음입니다. 그래서 화상이나 타박상 혹은 독거미 같은 곤충에 의해 유형 물질에 자극을 당해서 세포가 팽창한 뒤에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세포의 괴사입니다. 이에 비해서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도 메커니즘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때문인지 세포가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자살을 하면 세포가 아직 성성한데 자살을 하면 자살하면서 ATP라는 화학에너지를 남깁니다. 그 에너지를 받아서 옆에 있는 세포들이 세포라는 공장을 돌리는 에너지로 사용하고 그리고 죽은 물질들에서 영양소들을 섭취해서 그것들을 세포를 성장시키고 분화하면서 몸집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 하나는 대략 60조개의 세포로 되어 있는데 이 몸의 세포는 수시로 이렇게 상처를 입거나 타박상을 입어서 죽는 세포도 있지만 이 안에서 아포프토시스의 자살이 일어나서 수많은 세포들이 죽는 것입니다. 만약에 꼬마전구를 60조개를 모아서 한 덩어리를 만든 것이 인체라면 그것들이 깜박깜박하면서 수없는 세포들이 죽고 다시 살면서 생명이라는 것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았다는 것은 사실은 무엇인가 죽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죽음으로써 사실 그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 아포프토시스의 자살로써 세포가 분화하는데 경우에 따라서 이런 기재가 망가져서 어느 몸의 부위에서 아무 세포도 자살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세포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다른데서 영양분을 끌어당겨야 합니다. 그런데 한 세포만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뭉쳐있는 모든 세포들이 그 일을 하면서 죽지 않는 변질된 세포들을 양산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학적으로 암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니까 암은 아무도 죽으려고 하지 않는 생명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덩어리 때문에 결국은 몸 전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라도 모든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는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항상 그 안에는 욕심을 부리고 저 혼자 살아보려는 사람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이 기꺼이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때 나라는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애들이 못되게 굴고, 남편이 놀음을 하고 폭력을 행하고 해도 옛날에는 어머니들이 그것을 그대로 감내하며 가정을 위해 희생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이 결국은 가정을 떠나지 않고 가정 안에 머물게 됩니다. 여성에게만 이런 의무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 그 가정을 위해서 자기를 다 버리려는 마음을 가질 때 그는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겪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가정이 산다고 하는 것은 너무 분명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니까 의견이 완벽하게 똑같을 수 있습니까? 늘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았을 때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모든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비율의 사람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이 죽고자할 때 즉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때 교회는 그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남고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난을 통해서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죽겠습니까? 세상에서는 가진 사람이 갑이고 없는 사람이 을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고 혈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갑입니다. 그래서 갑질들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감당하면서 기꺼이 교인들과 함께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저는 이 사진 한 장을 보고 여러 날 동안 충격을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아주 선명한데 아주 유명한 사진입니다. 독수리성운이라는 성운입니다. 지구로부터 7천광년 정도 떨어져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 둘, 셋, 네 개 정도의 기둥이 보이는데 제일 왼쪽에 있는 가장 길게 보이는 기둥이 밑동부터 위까지가 빛이 4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놀라지도 않습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가 빛이 8분 20초 동안 가는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거리입니다. 여기가 그렇다고 하면 그러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렇게 연기처럼 보이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먼지입니다. 우주먼지입니다. 그러면 우주먼지는 어떻게 생기느냐 하면 태양과 같은 항성이 우리 은하계에 2000억 개 정도 있는데 그런 2000억 개에 딸린 지구 같은 작은 행성들이 또 있고 지구를 돌고 있는 달과 같은 것들이 또 있습니다. 그래서 얼추 계산할 때 칼 세이건 은 이 전체를 합칠 때 약 4조개의 별이 모인 곳이 우리 은하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하계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범위 안에서 약 1000억 개쯤 된다고 추산합니다. 그러면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태양과 같은 이 항성이 마지막에 자신의 생애를 끝낼 때에는 수십억 년 혹은 백억 년의 세월을 끝내고 폭발과 함께 끝냅니다. 그렇게 폭발할 때 이런 별 많은 먼지들을 남깁니다. 그 먼지들은 이제 중력에 의해서 서서히, 서서히 한군데로 모입니다. 모인먼지들은 분자 사이에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것들이 결국 핵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물론 장구한 세월이 흘러야 합니다. 핵반응이 일어나게 되면 그 다음에 그것들이 강력한 빛과 열을 갖게 됩니다. 이런 하얀 점들이 바로 그렇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끝까지 온도가 올라가게 되면 폭발을 합니다. 핵폭발을 하면서 이것이 떨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새로 탄생하는 별이 됩니다. 이것을 보면서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폭발과 함께 사라지는 별들의 죽음이 새로운 별들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어떤 별이 폭발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별 먼지가 나왔고 그 죽은 별 먼지들이 새로운 별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닭의 내장에 계란이 붙어있듯이 수많은 것들이 달라붙어있어서 폭발을 일으키면서 멀리 떨어져 나가면 별들이 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별들이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렇게 별들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저 밤하늘의 별들도 어떤 별인가 폭발하고 희생하며 죽어간 그 잔해로 새 별들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그 별들은 언젠가 그렇게 폭발하면서 사라져갈 것이고 그렇게 죽음으로써 이 우주의 별들의 생명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주에만 있는 이치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세포 속에도 있는 이치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시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것이 우주의 이치와 우리 몸의 이치와 마지막으로 우리 영혼의 이치까지 하늘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암 덩어리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너무 많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매일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일부가 죽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을 우리가 함께 같이 읽음으로써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강의를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