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의 맛을 잊을 때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민 11:4-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약 11개월 동안 머물며 애굽의 더러운 습속들을 털어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율법을 수여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11개월 후에 그들이 출발을 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들은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다베라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원망하는 그들을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도 교훈을 받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번에는 다시 음식을 가지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II. 하나님을 원망함
A. 상실감에 빠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때에 그들은 상실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탄식이 등장합니다.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먹던 때를 회상하였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 11:5-6)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즐겨먹던 음식들을 생각했습니다. 물론 광야에는 그런 음식들이 없었습니다. 특히 부추, 파, 마늘은 강장 식품으로써 정력에 좋은 음식입니다. 어느 나라나 거의 예외 없이 노예들을 일 시킬 때에는 마늘을 먹였다고 합니다. 그때 먹었던 부추와 파, 마늘은 너무 그리웠지만 잠시 그것을 먹기 위해서 그들이 얼마나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짐승과 같이 일해야 했었는지는 기억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사가 얼마나 육신 중심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천하에 애굽에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은 만나만 먹었기 때문에 기력이 없게 되었고, 이제 온 천하에 만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까짓 만나 이것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나는 기적의 식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음식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식이 모두 떨어졌을 때 하나님은 기적 같은 방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만나를 누구의 힘도 빌지 아니하고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였는지에 대해 신명기 8장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먹으며 육신의 원기를 보양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영혼을 보양해야 할 사람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렇게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생명의 떡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분을 믿는 사람들은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예수를 양식 삼아서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 이 만나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감격적인 것이었고, 매일매일 어느 민족도 먹은 적이 없는 양식을 먹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깊은 상실감에 빠지게 되었고,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신앙적으로 미끄러졌던 것입니다. 만나가 있는 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것이 없어도 사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진 것과 다른 것이 없으니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상실감에 빠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B. 자기 연민에 빠짐
두 번째는 자기 연민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만 나온 것이 아니라 거기서 종살이 하던 다른 민족들이 함께 섞여서 따라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 불평이 제일 먼저 터져 나왔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비참한 마음에 울었으나 이것은 가여운 것이 아니라 완고한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날 때 악에 오염되고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자기 연민의 비참한 감정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열등하다는 마음, 그리고 내가 살고 싶어 하는 현실과 내가 처한 이 현실이 너무나 심한 격차가 있다고 하는 낙심, 이런데서 옵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될 때 소용돌이처럼 물이 휘돌아 아래로 내려가듯이 그 비참한 감정들은 점점 더 깊은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오직 자신에게 집중하며 자아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미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는 자기 포기의 감정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에게 몰입하며 자아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이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며 열등감 속에 혹은 단절감 속에 자신은 고독을 겪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야 파멸해 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살하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거치는 심리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일까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느끼는 열등감을 생각해 보십시오. 확실히 현실을 보면 우리보다 지식이 뛰어나거나, 돈이 많거나, 권력이 더 크거나, 우리보다 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만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그 사람처럼 그런 자리에 오른다 하더라도 내가 사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일 수 없고, 또 그 사람이 아무리 나만큼 내려온다고 하더라도 그가 내 인생을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내가 자유로운 주체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남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살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아닌 내가 됩니다. 내가 아닌 나에 속고 속아서 내가 아닌 거짓된 나가 됩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물들 위에 비쳐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하게 합니다. 진리의 빛이 없을 때 이 세상의 물질은 아마 그것을 가지고 자기 육신의 즐거움을 도모하는 도구로 느껴질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비출 때 비로소 인간이 참된 행복이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이 물질을 사용해서 불행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을 평안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진리의 빛은 자신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이 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지식을 자랑하는 대신 모자라는 덕을 탄식하게 만들어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진리의 빛은 이처럼 우리 감각에 소요되는 이 현실들 너머에 있는 것들을 보게 만들고, 그것이 바로 의미를 찾아가며 살 수 있는 인생의 덕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이는 이렇게 공정하게 사물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신조차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지만 자기가 누구인지를 올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부분까지가 올바른 슬픔이고, 어느 부분까지가 올바르지 않은 슬픔인지 헤아리게 만들고, 정당한 기쁨과 정당하지 않은 슬픔 사이의 구별을 짓게끔 만들어 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불편함에 하나님을 깊이 원망하게 되었고 어리석게도 그들은 자기 연민의 감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이런 깊은 연민에 빠지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고기가 먹고 싶어서였습니다. 어린 애들도 아니고 할아버지들과 아저씨, 아줌마, 나이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 200만 명 내지 300만 명 되었을 사람이 통곡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기가 먹고 싶다고 우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무엇에 씌우지 않고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영적인 침체 속에서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 다 바보 같은 짓입니다. 인생 사는데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고 세상 아무도 그런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겨주지도 않고, 설령 마음 좋은 몇 사람이 옆에서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겨준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남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됩니까? 그렇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은 내게 주어진 것이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잘했든지 못 했든지 엄중하게 나라는 인간이 살아서 걸어온 결과입니다. 살아있는 한 그것을 언제나 받아들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애매모호한 인생을 살다가 행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의미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져갑니다. 그래서 ‘나는 나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것은, 내게 주어진 현실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든지 혹은 내가 선택한 것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내 능력을 벗어나서 내게 주어진 현실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나를 원망할 이유가 없고, 내가 선택한 것이라면 잘못 선택했어도 어차피 자신의 인생과는 찢어지지 않는 것이니 자기가 끌어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의미 있고, 올바른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용기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쉬운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나도 내가 너무 싫습니다.’ 그러면 정직하게 주님 앞에 ‘나도 나인 것이 너무 싫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는 주님의 도움 없이 살수 없는 이렇게 가엾은 사람입니다.’ 그것 자기 연민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빛을 따르는 연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회개하는 마음이고 주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C. 주님과의 연합을 상실
마지막 세 번째는 주님과의 연합을 상실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서 먹게 하랴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서 먹게 할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도 그렇게 안 할 거다. 주님과의 영적인 연합의 감정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이끌려 나왔지만 자신들이 광야에 홀로 버려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정말 어마어마한 위기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기를 먹고 싶었는데 고기를 못 먹었기 때문에 자신들 혼자 광야에 버려졌다고 생각하며 지금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아주 작은 것, 음식 한 끼니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을 주실 수도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태도는 하나님에게는 매우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컸기 때문에 악했던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원하지 못할 때에 품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마음이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었지만 그들은 탐욕으로 고기를 원했고, 하나님은 이 탐욕을 채워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라는 듯이 하나님이 고기를 주실 능력도 있지만 동시에 그렇게 악한 마음을 품고 당신을 향해 반역하는 인간을 징벌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탐욕은 원망을 불렀고, 원망은 파멸을 가져온 것입니다. 고기를 그렇게 먹고 싶어 하자 하나님은 바람에 불려 메추라기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메추라기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떨어졌습니다. 메추라기가 얼마나 많아야지만 200만 명 혹은 300만 명의 사람의 배를 불릴 수 있겠습니까? 온 지면에 떨어졌고, 쌓인 두께가 발목을 넘을 정도로 많이 쌓였습니다.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었을 것입니다.
털이 달린 채 생 메추라기를 씹어 먹었을 리는 없고, 틀림없이 털을 뽑았을 것입니다. 태워서 뽑았는지 삶아서 뽑았을지는 모르지만 뽑았을 것이고, 바비큐를 해먹든지 볶아 먹든지 무슨 수를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기분 좋게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원했던 대로 고기 식탁이 차려졌습니다. 드디어 이제 하나씩 손에 들고 우직하고 씹었습니다. 그것을 충분히 씹어서 육즙의 즐거움을 맛보기도 전에 고기가 그들의 이빨 사이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민 11:33-34)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탐욕의 무덤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입니다.
메추라기를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음식 하나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말씀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을 함께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붙드신 증거요, 신발이 해어지지 않고 옷이 낡지 않은 것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기적적인 은혜 때문이었고, 굶지 않고 그들이 모든 것을 먹으며 이렇게 광야의 길에 본향을 찾아가는 자유로운 나그네가 된 것도 하나님의 매일매일 베푸시는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자마자 심지어 홍해에 마주했을 때부터 얼마나 원망함으로 하나님을 욕하고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당한 심판으로서는 그들이 멸망하여야 했으나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심으로 거기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껏 하는 이야기는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워 먹게 하리요. 우리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다.” 라고 탄식 하였으니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 장면이 얼마나 악하였겠습니까?
이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모든 좋을 것을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곤고할 때 은혜를 주시고, 무지할 때 진리의 빛을, 외로울 때 지체들의 위로와 도움을 받게 하시면서 이제까지 살게 하셨는데 자신이 혼자뿐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에 감사할 줄 모르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에 기뻐할 줄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보지 않습니까? 자신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탐욕 때문에 생겨난 어떤 욕심들을 자기 마음대로 못하게 한다고 포달을 떨면서 하나님 앞에 대드는 그런 불량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 모두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III. 말씀의 맛을 알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은 이것입니다. 말씀의 맛을 알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두 번 째달 15일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가지고 온 양식을 모두 먹었습니다. 그들은 굶주리게 되었고,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양식을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 16:4)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매일매일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것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매일매일 그 만나를 모으러 가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나는 자신들이 씨 뿌리고 가꾸어 만든 곡식의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아무의 도움도 없이 하나님이 홀로 하늘로부터 내리신 신령한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여러분들이 씨 뿌리고 가꾼 양식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직접 하늘로부터 여러분들에게 내리시는 양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만나를 가지고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육체의 감각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교육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른 새벽 빈들에 나아가면 만나가 하얗게 내렸습니다. 그것들을 거둡니다. 어떤 사람은 탐욕으로 한꺼번에 많이 거두었습니다. 일용할 것 이외에는 모두 벌레가 나고 상해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루 먹을 것을 매일매일 구하러 광야로 나가야 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을 보면서 그 만나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육신이 그 만나로 살아야 했던 것처럼 영혼은 그렇게 매일매일 하나님이 내리시는 말씀의 양식으로 살아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로부터 내린 떡이었습니다.
그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직접 내려오실 것을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것은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행위요 마시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그를 믿는 사람들은 그 영혼에 충만한 양식을 가지고 배부르게 살게 될 것이니 이것을 성경은 ‘영적 생명’,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이 영생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없는 관계들을 이겨냅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기에 어려운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이 영생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2-33)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6장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 6:35)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로 버림 받았나이다.’ 라고 울면서 불평하는 여러분보다 훨씬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기쁨의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양식을, 생명의 만나를 매일매일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가 아니었습니까? 어둠과 무지 속에 살았던 우리들을 복음의 빛으로 불러주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어떻게 우리에게 중생과 회심의 은혜를 주셨습니까? 주님을 몰랐을 때 우리 자신에게 실망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근거 없는 교만으로 그렇게 자고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다시 만나 주셨습니다. 굶주린 영혼에 다시 하늘의 양식이 가득 채워질 때 우리는 예전에 없던 영혼의 힘을 누리게 되었고, 그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며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아니 극복하며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넉넉히 이기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인생을 살게 하려고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안 가진 것이 무엇이 있는지 한번 자문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그렇게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모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몸에 장애가 생겨보고 나면 비로소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건강을 잃고 활발하던 육체의 기력을 상실하고 나면 숟가락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산 것이 내가 사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날 붙들어 주셔서 사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안 가진 것이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난 남에게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남들 같은 외모도, 남들 같은 돈도, 남들 같은 학벌도, 남들 같은 아버지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안 가져도 되는 것들입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것들을 근본적인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인간들이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특성은 진리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진리의 말씀으로 만족을 얻지 못할 때 영혼은 핍절하게 되고 이때에 육신은 종전에 가지고 있었던 새로운 욕망에 눈을 뜨고 모두 궐기하게 됩니다. 그런 욕망이 크면 클수록 자신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그들을 건져내어 자유를 주셨고, 약속의 땅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을 불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인도하고 보호하셔서 마지막에 젖과 꿀이 흐르는 영광스러운 그 땅에 들어가게 하셔서 기업을 누리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기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고기를 못 먹는다고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잊어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육체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아주 깊은 자기 연민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만나를 지겨워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굶주린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쾌락을 쫓고 세상의 즐거움을 잠시 따라가는 것으로서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빈 잔을 채울 수 없습니다. 굶주린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울 수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알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되찾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요하게 여러분들 마음을 헝클어뜨려 혼란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신령한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한 갈증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고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것들에 매몰된다고 할지라고 여러분들의 영혼은 저 깊은 곳에서 울부짖습니다. 고기를 달라고 울면서 소리를 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나에게 이런 것들 말고 하나님 말씀을 달라고 몸부림치는 영혼의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산란스럽게 살기 때문에 그 소리를 못 듣는 것입니다. 들을 시간이 언제 있겠습니까? 솔직히 산속이라도 조용히 산책하면서 자기를 반성하면 그런 소리를 조금 들을 수 있을 텐데 눈뜨자마자 휴대폰 불빛 속에서 밤 12시까지 지내다가 쓰러져 자니 언제 그런 영혼의 외침을 들을 시간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산다는 것은 편리한 것이 아니라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고 의미를 찾아가며 사는 인생을 살기에 너무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랑을 주의하고 어쨌든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상실감에 빠지고 자기 연민에 빠지고 하나님과의 연합을 잃어버리는 이런 어리석은 일들을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없이 살아온 세월은 예전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 아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신자는 하늘 양식으로 살도록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신자도 육신을 가졌으니 땅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영혼은 하늘의 진리를 양식으로 삼습니다. 세상의 환경이나 사람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급기야 하나님에게 표독한 마음을 가지고 대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 모든 곤고함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생각하고 다시 조용히 영혼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으로 돌아오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