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우물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지난주에 우리에게 기도의 골방을 찾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참된 경건은 기도 생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기도시간, 특히 개인 기도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의 골방을 찾으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이제 그 기도의 골방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교훈하십니다.
II.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라
A. 중언부언하지 않음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의 첫 번째 요소는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라고 말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바텔로게세타(batelogesete)’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헛되이 말을 반복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 중언부언은 문자 그대로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26장 43절에서 45절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 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마 26:43-45)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동일한 말을 반복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이 세 번 반복된 기도를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같은 말로 세 번을 기도하시면서 땀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중언부언은 단순히 같은 말을 반복해서 기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기도의 언어가 마음과 동떨어진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기도해도 중언부언이 아닐 수 있고, 한번밖에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중언부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 번 반복해서 기도해도 기도하는 매순간 마음이 그 기도 속에 실려 있다면 말은 같아도 그 기도는 모두 새로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한번밖에 말하지 않았어도 마음이 실려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과 언어가 분리된 상태에서 드리는 모든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이고, 이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교훈을 가르쳐 주셨을 때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의미에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렸고 그 위에 그들은 자신들이 외식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사람들이 좋은 평판을 받을 것을 기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교훈을 주실 당시 이러한 유대인들의 기도의 태도는 성경으로부터 말미암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이교도들을 닮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언어 자체의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 속에 있는 신통력을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도려내시며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 친밀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분이고, 그리고 가까이 하기에는 위험한 분이었습니다. 너무 거룩하고, 그리고 심판에 능하셔서, 그래서 어떠한 죄인도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는 엄격하신 하나님을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에서 자비하신 하나님이 게시되었으나 그들은 역시 여전히 이러한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매우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이셔야 했기 때문에 완전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신령한 눈이 없는 사람도 일정한 키와 용모를 가진 예수는 볼 수 있었고, 그 손으로 그 분을 만질 수도 있었으며, 귀로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었고, 코로 그 분의 체취를 느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 것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그리고 위험하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그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리 만치 우리를 사랑하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게 교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그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할 만한 분이시며 그리고 아무리 가까이 해도 결코 위험한 분이 아니심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를 나누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뵈오며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예전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느끼게 해주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존재였지만 예수님은 인간성으로서 하나님을 친밀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심정을 담아 진리를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외로운 자의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억지로 짜낸 경건이 아니라 당신의 인격과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 같은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는 아들임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은 하나님과 연애하는 마음입니다. 연애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언어가 솟구쳐 오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대화는 지루하고 힘든 의무가 아니라 달콤한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모든 기도를 하되 그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되기를 바라셨기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언어가 없는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도는 신에 대한 깊은 관상과 같은 심리적인 몰입이 아닙니다. 기도의 오류는 두 가지인데 언어밖에 없는 기도와 그리고 언어는 없는 기도, 이 모두 올바른 성경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마음만 그 분을 바라고 언어가 없는 것, 마음은 그 분을 떠나 있으면서 언어만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멸시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영혼의 언어활동입니다. 그리고 언어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실까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가 자신을 쏟아 부으며 열렬히 기도해야지만 겨우 겨우 움직이시는 것처럼 그렇게 일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사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바로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와 근심, 걱정, 때로는 유혹과 번민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혼란스러워질 때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심으로서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도는 언어활동입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찾아내고, 그 언어들을 생성하고, 생성된 언어들을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고, 이러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에서 언어가 흘러나오고, 언어는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자신의 기도록에서 이러한 기도의 섭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려운 일 때문에 주님 앞에 우리의 사정을 아뢸 때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이루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로써 우리의 마음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처럼 마음으로부터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바꾸십니다. 그래서 냉담했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열기가 피어오르게 만드시고, 동토의 땅과 같이 얼어붙었던 우리의 가슴에 은혜의 물이 흐르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이 바로 언어가 마음과 떨어지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기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자체가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언제나 이렇게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해서 안 됩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신앙적인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우리의 마음에 경건의 샘물이 흐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주께 하듯 하되 특히 기도는 그 주님 앞에서 올리는 경배의 행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B. 마음에서 길어 올림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기도하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음에서 우물을 긷듯이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기도를 길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바꿔 놓습니다. 적합한 언어를 찾고,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어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싣고 기도하는 일은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면 언제든지 무릎을 꿇으면 그런 기도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의 다수는 그럴 정도로 깊이 있는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중의 일부는 껍데기와 같은 신앙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와 심정이 일치가 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이런 기도를 마음 깊은 곳에서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들 중 얼마나 될까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나의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여” 시인이 고난을 받을 때에 울부짖었던 것같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차량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매우 가파른 언덕을 오르도록 임무가 주어졌다고 칩시다. 큰 트럭으로 출발을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트럭을 저 멀리 뒤로 뺄 것입니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그리고 기어를 넣은 다음에 가속 폐달을 밟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게 밟고는 계속 밟아서 단숨에 그 언덕을 넘어야 합니다. 만약에 중간에 브레이크를 밟고 서거나 혹은 엔진에 시동이 꺼진다면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무거운 트럭은 사정없이 뒷걸음질 치며 언덕 아래로 굴러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브레이크라도 파열되는 날에는 생각하기 끔찍한 결과를 빚어낼 수 있습니다.
기도 생활도 똑같습니다. 기도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차량과 같습니다. 일단 마음의 시동이 멈추면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주 빠르게 뒤로 미끄러지며 자신이 이런 나쁜 사람이었는지 상상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가게 됩니다. 그냥 기도를 멈추었을 뿐이지 뒤로 가려고 한 것은 아닌데 자기가 의도한 것이 아닌데도 끊임없이 뒤로 미끄러져 끝없이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 마음의 엔진이 일단 식어서 기도의 불이 꺼지게 되면 마음먹은 때에 한 번에 다시 시동을 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열렬한 기도가 된다면 그것을 멈추지 않도록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도 생활이 멈추게 되면 죄와 정욕이 득세하고, 이 마음에 있는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우리를 어두움에 가둡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서 죄와 정욕이 번성할 때 그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너무나 명약관화합니다. 만약에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이 기도의 은혜에서 멀어졌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여기가 끝이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기도가 잘 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불이 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언덕 위를 힘차게 올라가고 있는 트럭입니다. 거기서 브레이크를 밟거나 시동을 끄면 올라온 것만큼 빠른 속도로 뒤로 미끄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됩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기도의 은혜에서 미끄러져 거의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이 종종 기도하려고 시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안됐을 것이고, 또 됐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를 계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마음의 기도의 시동이 켜지다가는 다시 꺼지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기도의 은혜에서 멀어져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여러분에게 실제적인 네 가지 실천 지침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마음을 따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슴에 핫팩을 올려놓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 은혜의 세계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간절히 기도하면 되지만 기도의 은혜에서 멀리 미끄러졌을 때에는 이상하게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눈이 온 언덕길을 낡은 고무신을 신고 올라가는 것처럼 노력은 하는데 자꾸 미끄러집니다. 이럴 때에 먼저 기도하려고 애쓰지 말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으로부터 그리고 신문으로부터, 잡지로부터 좀 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 이외에는 쓸데없이 만나지 않도록 우선 자신의 활동 반경을 좀 덜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듣는 음악이 있습니다. 꼭 찬송가가 아니어도 저는 명곡들을 들으면서 조용히 묵상하면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정돈되고 하나님께 기도할 자세가 됩니다. 근심과 걱정에 쌓여있을 때 듣는 음악도 있고, 이 세상 일이 모두 하찮아 보이고 허무해 보일 때 듣는 음악도 있습니다. 찬송을 들으면서 질이 높은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향하도록 변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은혜와 가까이 다가가야지만 마음이 덥혀지는 것입니다. 은혜 충만하고 겸손한 지체들과 나누는 따뜻한 교제는 우리의 속된 마음을 정리해주고, 하나님을 향해 살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논증적이고 복잡한 신학 서적 말고 쉽게 읽히면서도 마음에 찔림을 주고 격려를 주는 좋은 경건 서적들이 퓨리탄 도서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 책을 아주 쉬운 책을 하나 펼쳐서 천천히, 천천히 읽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두 번째 해야 할 지침은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제가 혼자 있는 시간보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을 1번에 둔 이유는 이런 이유입니다. 혼자 있기만 한다고 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앙망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우울증에 있는 사람을 홀로 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끊임없이 염세주의적이고 자학적인 사람을 혼자 놔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낙심하고 절망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먼저 따뜻하게 한 후 그 다음에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쁩니까? 이른 아침서부터 밤까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우리는 바쁘게 보내고 그래서 마음을 쏟아 주님을 찾을 시간도 없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성경을 한 장 읽을 시간도 없이 보냅니다. 책은 언제 읽었는지 손에 책이 들려졌던 기억조차 없는 바쁜 삶을 삽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산 그 삶의 끝에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정말 영생의 열매와 평강의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거기에 있을까요?
우리가 하는 일중 대부분의 일은 안 해도 되는 일이고 덜 해도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도 건강했을 때는 몰랐습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줄 알았고, 그리고 하나도 내가 안하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덜컹 병원에 갑자기 입원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꼭 해야 하는 일이 없습니다. 심지어 집회를 약속했어도 ‘목사님 입원하셔서 수술 들어가셨습니다.’ 그게 끝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저는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러니까 집착을 내려놓으면 시간이 납니다. 그 시간을 세 시간, 네 시간, 열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 30분이라도 사람이나 어떤 것도 여러분들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으니 기도가 글씨라면 시간과 장소는 편지지입니다. 편지지 없이 아무리 사연이 많은들 연애편지를 쓸 수 있겠습니까? 너무 어렵습니다. 안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고 삶을 버텨 나갈 수 있는 은혜의 힘을 비축하는 것은 이리저리 쓰러지고 방황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보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과 장소를 가져야합니다.
세 번째 지침은 이제 마음에서 언어를 길어 오르는 것입니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날, 온 땅의 식물들이 가물어 타들어 갈 때 긴 길을 걷다가 기갈 하여 쓰러질 것 같은 때에 한 동네에서 우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낙네로부터 두레박을 넘겨받아 그 두레박을 던집니다. 저 깊은 곳에 두레박이 떨어지면 물에 닿는 소리가 나고 그때 물을 긷는 사람들은 그 두레박을 쓰러뜨립니다. 그래서 몇 번을 위 아래로 들어 올리며 첨벙첨벙 잠기게 한 후 그리고 오랫동안 그 두레박을 길어 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쏟아지는 그 물을 먹으며 해갈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서 우물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습관이 좋지 않게 배어 있는 사람들은 육적으로 기도하려고 합니다. 일부러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의자를 흔들거나 아니면 자기도 뜻을 모르는 방언으로 기도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도는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을 담아 언어를 길어 오르고 그 단어들을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나열하여 사연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단어가 길어 올려지고 올려진 단어들이 문장을 이룰 때에 우리의 마음에 울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에 붙었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자기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찬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그러면서 내 마음에 요동치는 갈등과 번민이 사라지고 영혼이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언어는 급속하게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렇게 마음에서부터 진심으로 언어를 길어 올리되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표현 같은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습관적으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의 마음도 담겨있지 않으면서 수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기도했기 때문에 그 표현들을 계속 씁니다. 마음에 없이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기도가 아닌 기도입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언어를 천천히 길어 올리고, 그것도 도저히 불가능한 마음이 된다면 천천히 천천히 그 기도를 글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언어를 낭독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지침은 이제 그렇게 기도를 올린 후에 아무리 반복해도 괜찮으니 간절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 지침을 실행하면 닫혔던 기도의 문이 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아주 쉽게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는 거절감이 느껴지고 내가 지은 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자책감이 듭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까 라는 의심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맞서야 합니다. 복음의 약속으로 이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굳게 붙들며 주님 앞에 더욱 기도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잘못한 죄에 대한 양심의 송사가 있습니다. 율법의 정죄감 때문에 도저히 우리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주님은 나를 버리셨을 것이라고 낙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기도해도 소용없으니 나는 그냥 하나님 없이 살아버릴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때에 복음으로 맞서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이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것이요”(요일 1:9) 이러한 모든 일들을 반복하면서 역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잡은 손을 놓지 말고 주 하나님만을 의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미워하는 원수들과 교만한 자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받던 시인이 그 환란의 날에 하나님께 어린 아이처럼 의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시편 56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2-3)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자비로우셔서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나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기회입니다.
지진이 났습니다. 커다란 씽크홀이 생겼습니다. 빗물과 폭우가 들어오면서 금방 꺼진 땅은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아스팔트가 꺼지면서 미끄럼틀처럼 저 아래 싱크홀로 빠지고 거기 여러분들은 그 아스팔트로 미끄러져서 단번에 그 진흙창에 처박혔습니다. 물은 땅에 점점 발목부터 빠져 들어가기 시작해서 이제 여러분들이 몸부림치며 손을 허우적거려 구조를 외쳤으나 폭우 속에 여러분들의 부르짖음은 허공에 흩어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몸을 휘저어 몸부림쳤으나 이상하게도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오히려 더 깊이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진흙이 묻은 손 간신히 진흙위에 올라와 있고 이제 이 진흙탕 속에 여러분들의 입까지 잠겼습니다. 그때 구조대원이 헬기에서 내려와 여러분들을 향해 손을 뻗친다면 여러분들은 그 손을 잡지 않겠습니까? 아마 사력을 다해서 이게 내 삶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구조대원의 손을 전심으로 붙들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결코 발휘해 본 적이 없는 괴력적인 힘으로 구조대원의 팔을 붙들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 진흙탕에서 헤어 나와 헬기에 매달려 씽크홀 위로 빠져 나오고 그리고 점점 지면으로 내려옵니다. 그때까지 여러분들은 구조대원을 잡은 그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괴롭지만 아직은 견딜만하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진짜 괴로워서 죽을 것 같으면 신앙이 없으면 죽어버리던지 신앙이 있으면 기도합니다. 그러면 얼마큼 더 가야할까요? 충분히 고통 받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곤고하지 않습니까? 충분히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기쁨의 삶을 살게 하셨는데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그런 기쁨의 마음을 근심으로 물들이고, 하나님 찬송하고 살 우리의 마음을 염려로 절어버리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시련을 당하나 곤고하나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그리고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교제하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찬송을 듣고 경건 서적을 읽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은 마치 발판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눈길에 낡은 고무신을 신고 미끄러지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런 노인에게 한번 밟고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미끄러지지 않고 힘을 실어서 한번 뛰어 오를 수 있다면 그 언덕을 넘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발판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마음이 따뜻해졌을 때 그 때에 틈을 놓치지 말고 제가 가르쳐 드린 이 네 가지의 지침을 따라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갖고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당신께 피하는 모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시련의 폭풍을 피하여 당신의 품으로 들어오는 어린 새와 같은 여러분들을 보호하고 여러분들을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가르쳐 주는 바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우리가 늘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태우고 우리의 모든 욕심과 그리고 욕망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안식이 없이 사는 날들이 언제까지 계속 되어야 되겠습니까? 기도가 없이 그렇게 현실에 적응해 나가며 그냥 그냥 살아가는 날들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전에도 하나님 안에서 충만한 기도 생활 속에 누리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거기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어디서 떨어지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돌이킨다면 하나님이 다시 우리의 기도를 불붙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로 이 모든 상황을 다스리고 이 모든 상황들을 통치하면서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삶이 버거운 것은 원래 인생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이 버거운 인생을 버겁게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충만한 영적 생명이 필요합니다.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십시오. 무엇보다도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메마른 삶에서 벗어나 하늘의 복을 누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되는 일이 없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고통 받던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평탄한 길을 주실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어서 위로 받지 못하고 곤고한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