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Q&A
녹취자:이경순
Q1) 백상환 전도사(중등부) - 신학함에 있어 통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직 신학을 공부한지 2년밖에 되지 않아 신학적으로 사고하고 고찰하는 능력이 많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어떻게 해야 신학적인 사고능력이 발달할 수 있을까요? 신학적인 사고를 하는 훈련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궁금합니다.
A1) 통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백상환 전도사) 그리스도인은 빛으로 산다는 것 스터디할 때도 그렇고 항상 철학적인 사고뿐 아니라 각 분야의 학문들에 있어서도 아우를 수 있는 그리나 성경으로 다시 돌아와서 신학에 기초한 주관 점을 가져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A1) 예를 들어보면 그대 방이 있다고 칩시다. 맨 처음엔 그냥 빈방이었는데 벽지를 바르고 책상을 가져다놓고 침대를 고르고 이불 베게 등등 많은 것을 다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러면 그대가 그렇게 했을 때는 그렇게 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결국 모든 방이 이미 없었을 때에도 그대 머릿속에는 내게 만약에 공부방이 주어진다면 나는 이렇게 해놓고 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한꺼번에 다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있었으니까 기억을 더듬으면서 나온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서 갖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아니 왜 침대를 이쪽에 놓지 왜 여기에 놓았을까 책상은 왜 비스듬하게 놓았을까 등등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 가장 간단히 해결하려면 누구를 만나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놓은 사람을 만나서 무슨 생각이었는지 물어보면 됩니다. 똑같이 모든 것들이 왜 이렇게 존재하는가 알아보려면 하나님께 물어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 물어본다고 하지만 사실 묻는 것도 나의 이성이고 대답하는 것도 나의 이성입니다. 계시를 통해서 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계시가 우리의 지성으로 들어오면서 알게 됩니다. 결국은 자꾸 통합적인 사고 그러는데 통합적인 게 아니라 원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거미줄처럼 의미와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 KBS에서 다큐를 하나 했는데 아인슈타인VS스티븐 호킹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아는 이야기였지만 내가 한번 설명해 준 적이 있을 겁니다. 아인슈타인 그 이전까지는 타임은 타임, 스페이스는 스페이스였습니다. 스페이스는 3차원이고 시간은 4차원입니다. 다 따로 따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천재인 이유가 그 두 개가 직관적으로 무슨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상에 의해서 두 개가 직물처럼 되어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현대 우주학의 탄생의 순간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아주 얇은 0.01mm정도 되는 얇은 고무막을 여기다 가득 펼쳐놓았습니다. 거기에다 요만한 쇠구슬을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거의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쇠구슬이 축구공만하면 그것을 거기에 놓고 밉니다. 그러면 조금 굴러가다가 계속 가다가 정 가운데 와서 쑥 들어갑니다. 그 위에다 요만한 구슬 이만한 구슬을 확 굴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막 돌다가 가장 큰 게 만들었기 때문에 막 돌다가 그리로 모이는 겁니다. 그게 무한할 정도로 질량을 가지고 그 고무판을 한없이 밑으로 잡아당기는 것이 블랙홀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거운 것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들이 쉽게 이야기하면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이렇게 되는 축을 따라서 왜냐하면 빛 없이는 시간을 계산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빛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다 생각을 했는데 아인슈타인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도 주장하고 죽었는데 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천문학적인 관찰로써 빛이 휜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판판한 대는 예를 들어서 개미가 걸어서 한 시간에 10미터를 간다면 2시간 가면 20미터를 갑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게 휘어있다면 얘는 한없이 걸어 내려갔는데 거리는 1미터도 안 간 것입니다. 걷기는 엄청 많은 시간을 걸었는데 거리는 1미터도 이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직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그러면서 모든 것이 다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결국 내가 얘기하고 싶은 요지는 우주에서부터 떠있는 모든 천체가 서로 상관없는 것이 없고 다 상관이 있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이 아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도 다 그렇게 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위는 결국은 모래가 뭉쳐지면서 바위가 되고 그리고 그 바위가 다시 흙이 되고 그 열이 작용하면서 모든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렇게 하면서 모든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모든 것들이 다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교나 힌두교에서 보면 인간을 이 자연 속에서 분리된 다른 존재로 보기보다 그 커다란 하나의 흐름 속에 있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게 진리의 어떤 면을 발견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환생이라는 것을 믿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만약에 죽으면 마지막에 원소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 원소도 열에 의해서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합니다. 우주에는 F밖에 없는데 그게 어느 순간에 열이 가해지면서 헬륨이 되고 더 큰 열이 가해지면서 온갖 금속들이 나오고 이렇게 다채롭게 수백 가지가 나옵니다. 지금 원소가 200개 넘게 있습니다. 그런 정도까지 다양한 원소를 가지고 있는 별이 이 우주 속에서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게 결국은 열의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결국은 이게 뭔가? 이게 뭔가를 연구하는 게 지식입니다. 이거 하나 연구한 사람은 한이 없습니다. 이것을 펼칩니다. 이것을 다시 이렇게 구성요소가 이루어지고 쪼개면 겉은 초콜릿이고 속에는 비스킷이 나오고 등등 수없이 이루어집니다. 계속해서 내면의 세계 속으로도 한없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주에서부터 피부 속까지 들어가는 것 보여준 적 있습니다. 그렇게 바깥으로도 무한한 세계가 펼쳐지고 안으로도 무한하다고까지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이 탐구하기에는 무한할 정도만큼 얼마든지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결국 인간이 무엇을 안다는 것은 끝없다는 것이 되는 것이고 결국은 이 사물 하나만을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사물과 이 사물이 어떤 관계가 있고 이 모든 사물이 있게 한 원 존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모두 파악하게 될 때 그것이 결국은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 그래서 지난번에 리버 이야기를 하면서 다섯 개중에 어떤 것 선택해야겠느냐고 물어보면 리버 입장에서는 다 비판을 하는데, 다섯 번째 비판을 안 합니다. 자기는 그것을 따른 다는 것입니다. 문화를 변혁시켜가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사실은 우리도 입장의 상당 부분 찬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것 하나만 딱 붙들면 살아갈 수 있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변혁이고 뭐라고 떠들어도 오늘 옆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이것 가지고 우리 인생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심은 있지만 칼빈, 아브람 카이퍼, 이런 사람 등등 문화변혁론자로 뽑습니다. 그런 사람들 예를 들어 칼빈 같은 경우 끊임없이 그렇게 자기의 소명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문화를 변혁시키고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면 16세기 사람인데 이제 우리는 공업으로 가야된다고 부르짖던 사람입니다. 미래의 살길은 공업이다. 벌써 인문학적인 안목이 있고 역사를 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칼빈은 사실은 그렇게 많이 여행을 한 종교 개혁가는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칼빈에게 여행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여행을 많이하지는 않았지만) 유럽 역사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먹을 것을 생산할 토지도 없고 이 가난한 나라에서 살길은 공업이다. 16세기 중엽에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 예언이 맞아 떨어지면서 18세기가 영국의 산업혁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17세기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벌써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당연히 이 세상에 파괴적인 신앙을 싫어합니다. 이 세상을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보케이션이라는 말과 복카치오 소명이 똑같은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던 칼빈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문화변혁론자입니다. 그런데 칼빈의 주석이나 칼빈의 저서를 보면 수없이 인간이 얼마나 허무하고,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 매우 가까이에 있다는 것 그것을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살라고 권고합니다. 그것이 죄를 이기는 세 가지 방법 중에 하나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영원한 하늘나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것, 그 담에 자기를 부인할 것 십자가를 질 것, 그것도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면 아무리 리버가 그런 사람을 문화변혁론자라고 불었어도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하나의 어느 세계관에 발을 딛고 있곤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중심이 될 뿐이지 그거 하나만 가지고는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지식들이 - 그래서 사실은 이 질문 하나가 몇 시간 강의를 해야 되는 것인데 쉽게 이야기하면 - 18세기 이전까지는 인물을 뒤져보면 이상하게 신학자인데 동시에 철학자이고 물리학자고 동시에 천문학자고 동시에 생물학자고 이렇게 나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런데 마치 우리가 조금 더 전신을 보면 신약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면 구약도 알고 조직신학도 알듯이 그 사람들은 학문 전체를 통해서 원래 배우는 그런 방식으로 학문을 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학문은 우리 동양에서 학문을 하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번에 내가 책을 쓴 성학 10도라는 책을 보면 마음과 나의 생활과 나라와 세계와 우주가 하나로 연결된 가운데 그 한가운데서 좌정하고 자기가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 참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가 그랬습니다. 그것을 내가 이야기 한 것이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거기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Q2) 김민성 전도사(소년부) - 요사이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우리나라가 주일예배를 중단하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후에 교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목회방식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많은 학자들이 두 달 만에 그런 책도 내는 사례를 보면서 진짜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도 들었고 변화가 있을 것이라면 목사님께서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 듣고 싶고 이 변화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신학적으로 옳은 것입니까?
A2) 어차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점점 적어져 갈 것입니다. 선교학적으로 보면 복음에 대한 강한 흡인력을 가지는 기준이 국민소득 5천 불이랍니다. GNP 5천 불까지는 종교적인 갈망이 크고 5천 불이 넘어가면 종교적인 갈망이 역으로 서서히 줄기 시작하는데 지금 3만 불이 넘어가니까 이제는 소위 갈브레이스가 이야기하는 고도 대중 소비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경제발전에서 최고 높은 5단계가 고도 대중 소비단계입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대중이 고도소비를 누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거스틴이 이야기했듯이 정신이 자꾸 바깥 세계로 향하게 됩니다. 자신 안으로 들어와서 자신을 관조하면서 지성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게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태들이 그런 풍조에 잘 떠내려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줄 것입니다.
그 대신 그 사람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코로나 사태 같은 것에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시편에서 보면 성전을 멀리 떠났던 다윗 혹은 고라의 자손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그리워하듯이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태를 통해서 교회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이 자체가 교회를 타락시키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너무 경박한 것이고, 단 하나 주일에 대한 관념들이 약해지지 않겠냐 하는데 그런 것들은 실제적으로 염려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잘 가르쳐야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 같은 사태가 있을 때 칼빈 같은 경우나 마르틴 루터 같은 경우에도 역병이 돌 때는 교회 못 나오게 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들의 업적이 그것 때문에 주저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 핑계고 결국은 사람들을 얼마나 깊이 있게 목양하고 사람들이 변화되느냐 그런 것에 달린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여기에 알곡과 쭉정이 있는데 던져보면 날라갈 것은 날아가듯이 어차피 그 쭉정이는 여기 있을 때도 쭉정이고 바람 불었을 때도 쭉정이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것은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교회 맨날 나와서 조는 사람이나 아예 안 나오는 사람이나 차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런 것 개의치 말고 얼마가 모였든지 간에 그 사람들이 진실로 회심하고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돌봐야합니다.
Q3) 이신우 전도사(초등부) - 담임목사님께서 한 인물의 책을 깊이 독서하고 기독교 사상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고 싶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는 오래도록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고 연구해 오셨는데 우선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독서를 통해 한 인물의 사상을 깊이 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A3) 1권만 빼놓고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1권은 거의 지옥을 들락거려야 됩니다. 1권은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읽느냐 보다도 얼마나 그 사람에 대한 탐구열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말고 읽어보십시오. 읽고 싶은 것부터 읽으세요. 설교집을 사람들이 무시하는데 특히 존 오웬의 설교집을 읽을 때는 항상 신학적인 커다란 충격이 항상 있습니다. 워낙 대가입니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면 조나단 에드워즈하고 오웬하고 100년 차이인데 설교에서는 게임이 안 됩니다. 내가 존 오웬도 좋아하고 에드워즈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추종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다 읽은 사람으로 이야기 하자면 존오웬 설교 집을 읽을 때는 대학생 논문 읽는 것 같고 에드워즈는 대학교 신입생 페이퍼를 읽는 느낌입니다. 구조나 논리가 다릅니다. 더군다나 존 오웬은 법학을 했기 때문에 굉장합니다. 존 오웬을 여러분들이 사랑하면 참 좋습니다. 에드워즈한테 빠졌기 때문에 신학이 빗나간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에드워즈 애호가들은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엄격한 개혁주의 라인에서는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개혁주의 라인인 것에 대해서 의심합니다. 그런데 나나 더글러스 스위니 교수 입장은 다릅니다. 우리는 존 오웬을 많이 옹호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존 오웬은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 그 대신 현대적인 적응성을 가지고 보면 조다난 에드워즈가 훨씬 더 많은 (녹음불량)가지고 있습니다.
Q4) 김수민 전도사(유치부) - 담임목사님께서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설교자가 설교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설교를 잘 할 수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A4) 설교를 잘하는 비결은 훌륭한 설교 청취자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존경하는 설교자가 있는가, 그게 글이든지 말이든지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자신의 인생이 변화되는 경험을 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설교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가르쳐주는 페이퍼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전인격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설교자의 그늘 아래서 설교자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하나만 가지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깊이 만나야 됩니다. 그 담에 학문, 사색, 기도, 고난 이런 것들이 모두 어우러지고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들을 찾아내야 됩니다. 그러면서 설교자로서 깊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설교자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좋은 성도가 되려고 했다가 좋은 설교자가 되기를 실패하는 사람은 그보다는 적습니다.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사람들에게 엄청난 박수를 받고 싶은 그런 야망을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 박희천 목사님 말씀이 있습니다. 병을 쏟으면 참기름이 담겼던 병에서는 참기름이 나옵니다. 병에 참기름이 가득 담겨있으면 확 쏟으면 콸콸 쏟아집니다. 조금 쏟아졌으면 한참 기다려야 나옵니다. 그런데 기름이 들어간 적이 없던 병에서는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물이 들어갔던 병은 물이 나옵니다. 농약이 들어갔던 병에서는 농약이 나옵니다. 아무것도 안 들어갔던 병에서는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내가 잘 쓰는 말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있는 게 없을 수는 없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짜로 지어내면 사람들을 잠시 기만 할 수 있지만 팩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Q5) 이지연 전도사(유아부) - 목양을 하다보면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들의 고통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각각의 아픔들은 범위도 정도도 다양한 것 같습니다. 목회자는 성경을 통해 그 상황들을 지나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지만 가끔은 감히 위로의 말을 하는 것조차 상처가 되는 때가 있어 말을 떼기 조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상황에서 심방을 하고 위로를 해야 할 때 함부로 위로라고 권한 말이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고 그 상황들을 지나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만약 누군가 고통에 대해 토로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하나님의 뜻인지"라는 탄식할 때에 어떻게 위로하고 목양해야 할까요?
A5) 결국은 인생에 대한, 사람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져야 됩니다. 결국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사람들을 폭넓게 이해하는 것들을 배워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항상 만나면서 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항상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맨 처음 아직 인생에 대한 경험도 어리고 교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모르면 항상 선배 전도사님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조언을 구해보세요. 그것을 몇 번 하다 보면, 예를 들어서 저는 아무래도 쓸모없이 태어난 것 같아요 합니다. 결국은 그런 사람들의 대체적인 심리가 강한 부정을 원하는 것입니다. 너는 그렇지 않다 너는 진짜 존귀하다 해야지 공감해준답시고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신만이 아니라 나도 쓸모 없는 것 같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누가 쓸모가 있겠냐고 그렇게 말하지 말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심리학책도 읽고 사람에게 제일 좋은 것은 그 사람의 그런 케이스를 가지고 선배 전도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을 어떻게 봐야 될지에 대한 이해도 생기고 자네도 30년 정도 전도사 생활하고 시간이 흐르면 그런 정도 충분히 됩니다. 지금은 그렇게 안 되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좀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렇게 계속 하다보면 아, 인간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가 생겨나는데, 처음엔 어차피 소경인데 코끼리 다리만 만져본 사람하고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등도 만져보고 모든 것 만져본 사람은 다릅니다. 그렇게 하면서 배우다보면 어느 날 눈이 열리면서 코끼리의 실체를 보게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계속 잘 갖는 사람은 누구냐면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사색에 대해서 물어봤지만 결국은 자기가 빠진 사색이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내 지성으로 이런 코로나 사태에 걸려서 응급실에 들어갔는데 그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나의 처지에 대한 생각하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따로 가는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사색은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과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어 있고 사물에 대한 지식과 이런 것들은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서 내게 들어오고 나에게 상념을 불러일으키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일들을 겪으면 생각이 굉장히 폭발하듯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나태하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사고가 계속 활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건이 일어나는 것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굉장히 돈도 많고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싯다르타 같은 사람입니다. 질병하고 죽음하고 가난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성 밖에 나가서 그것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로 생각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너는 무엇이냐’ 너도 결국은 그것을 겪는데 결국은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사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이 산 밑에서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의 모상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만 하나님의 모상이 되는 것이지 하나님도 생각하지 않을 때는 전혀 하나님이 모상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을 관조할 때 그때 그 모상이 하나님을 모상하는 것이지 그것을 떠나고 나면 하나님의 모상이 없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우면서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다가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역에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40에는 논어를 읽어야 될 나이라고 그럽니다. 논어를 읽어보면 알지만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 잡다한 것들을 다 통합해서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인데, 그런데 밑에서 이렇고 저렇게 싸우는 것은 손자병법인데 손자병법도 읽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논어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처세술에 대한 책을 기독교인들이 무시하는데 무시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직장생활하거나 교역자 생활하는데 처세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읽으라고 합니다. 최소한 열 권 이상 읽으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라 그런 것이 하도 답답해서 내가 쓴 책이 개념 없음입니다. 외국인 학자가 왔을 때 이 책이 뭐냐고 해서 conceptlessness라고 하니까 철학책이냐고 했습니다. 영어의 ‘컨셉트’가 어디서 왔냐며 라틴어 ‘콘셉투스’에서 옵니다. 콘셉투스가 회임한 그런 뜻입니다. 아이를 가진 그런 뜻입니다. 이것을 딱 볼 때 확 하고 들어오면서 아이를 잉태하듯이 이 안에서 그 사물에 대한 같은 종의 여러 대체의 사물을 보더라도 그것을 통합시킬 수 있는 통일된 생각이 잉태되듯이 딱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콘셉트입니다.
예를 들자면 초콜릿에 컨셉을 잡은 사람은 막대 초콜릿이 나오든 동그란 게 나오든 화이트 초콜릿이 나오든 손바닥만 한 게 나오든 망치로 깨 먹는 게 나오든 그 사람은 그것을 다 하나로 보고 그 담에 다양하게 변신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콘셉트가 없을 때에는 이것이 전부인 줄 알고 먹다가 화이트 초콜릿 나오면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컨셉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괄적이라고 할 때 대충이라고 하는 골격이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골격은 이 초콜릿이나 주먹만 한 초콜릿이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변신일 뿐입니다. 그게 우리한테 변형되어서 너는 개념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눈치가 없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통일된 생각이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지금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누가 일어나서 아 목사님 추운데 갑시다. 보통 웬만한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만약에 누가 그렇게 이야기 한다면 그 사람은 개념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상황에서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목회에 있어서 중요한 게 많이 있지만 사람과 사람이라는 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질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사랑해도 소통할 수 없는 사람하고 결혼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깨지거나 아마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소통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목회의 수기라든지 아니면 처세술이라든지 사람을 이렇게 다루라든지 경영학이라는지 이런 것에 대한 책을 그렇게 많이 안 읽어도 됩니다. 생각하면서 읽으면 한 20여권 정도 읽으면 눈에 주르륵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선배들로부터 도움받고 그러면서 그렇게 해서 한 5년 정도 배웠는데도 별로 발전이 없다 그러면 목회가 그 사람한테 별로 어울리는 임무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 됩니다.
Q6) 윤한나 전도사(영아부) - 목사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목회의 요소들을 알고 싶습니다.
A6) 목회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나의 설명에 의하면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그것을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르쳤는데 그런 거였구나. 아 나 호기심이 만족되었다 그것은 아니고 결국은 다음 주에 내가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데 왜 진리가 수단이 되는지에 대해서 이번 금요일 날 들어갑니다. 결국은 목회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중심에 오고 나머지들은 그것을 향해서 배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계획하고 있는 목회계획과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도울 것인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 지을 수 없으면 괜히 자기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가야 됩니다.
연애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만나는 모든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를 하더라도 모든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도구인데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데 진리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진리의 포커스가 모두 맞혀져서 이것들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Q7) 이신우 전도사(초등부) - 요즘 초등부 설교하다가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서 울 때가 있는데 애들이 따라 웁니다. 애들의 신앙에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요?
A7) 그것은 가능성이 진짜 신앙적인 변화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실 것이지만 그러나 설교자가 설교 속에서 감정이 없는 것은 물이 없는 골짜기의 계곡과 같은 것이고 너무 감정 표현이 많은 것은 홍수가 난 것입니다. 둘 다 아름답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해 주고 그 담에 그 정서를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내용보다 더 많아서 넘칠 때는 적절한 표현으로 계곡이 아름다울 때는 물이 하나도 없을 때도 안 아름답고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다 뭉개 버리고 흙탕물이 지나갈 때도 예쁘지 않듯이 적당하게 흐를 때 모든 주위에 서 있는 나무와 흙 돌들도 물이 지나가는 게 좋고 걷는 사람도 좋고 물도 흘러가면서 기분이 좋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표현과 절제 사이에서 그런 것들을 배워가고 그 성과 그 자체를 사람들에게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주는 것 어떤 것을 인식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그런 것들을 고민하면서 같이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