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세 세명줄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4-6)
녹취자: 김지혜
죽기 직전에 남기는 말을 유언이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일종의 유언입니다. 1차 투옥에서 석방된 후 사도 바울은 스페인과 크레타, 에게아 연안의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이 서신이 기록된 장소는 로마의 지하 감옥이었습니다. 1차 투옥 때는 제법 대접을 받았지만 2차 투옥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로서 로마 정부를 혼란하게 한다는 죄목이 덧씌워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으로 알려진 곳에 직접 가본 적이 있습니다. 지하의 아주 음습한 감옥이었고, 아주 작은 쇠창살로 바깥으로 통하는 빛이 겨우 들어오는 완전 지하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썼습니다. 아시다시피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자식 같은 목회자였습니다. 그에게 목회자가 일평생 붙들고 살아야 할 그것이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세 생명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이 세 생명줄을 가슴에 새기고 붙들며 목회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첫 번째 생명줄은 흐르는 눈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생각할 때 늘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음식이든지 퍼먹는 포식가의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호의호식하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도 아니었습니다. 어떡하든지 논리를 좋아하는 태만한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스승인 사도 바울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디모데를 그렸을 때 항상 떠오르는 장면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디모데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한다’라고 했습니다. 떠오를 때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디모데가 눈물 흘리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목회하고 있는 곳에서 떠나고 난다면 교인들이 여러분들에 대한 무슨 인상을 가지게 될까요? 컴퓨터를 잘 고치는 분, 농담에 능숙한 사람, 정치에 아주 다재다능한 사람, 이런 사람으로만 기억에 남는다면 여러분들은 생명줄을 놓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줄은 흐르는 눈물입니다. 목회를 해보십시오. 교인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땀을 흘리면 교인들은 가만히 출석할 뿐입니다.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면 교인은 겨우 땀을 흘립니다. 목회자가 피를 쏟으면 그때 서야 교인들은 땀(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흐르는 눈물이 없다면 어찌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겠으며 흐르는 눈물이 없다면 어떻게 그가 목회 사역에서 둘러싸이는 수많은 유혹과 수많은 역경들을 이기며 주님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이 눈물은 사랑에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 눈물 속에서 결국 우리의 목회의 생명줄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이 교회를 세우신 김창인 목사님처럼 이렇게 큰 교회를 목회할 거라고 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든지 여러분 중에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수천 명의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치는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칼빈 선생이 말했듯이 교회의 가치는 순수성에 달린 것입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목회의 첫 번째 생명줄, 흐르는 눈물의 삶을 계속 산다면 큰 교회를 할지 작은 교회를 할지는 모르지만 그 교회는 확실히 순수한 교회가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눈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오천 명 교회를 담임하는 중국 목회자를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모든 교회들이 폐쇄되고 이 젊은 목회자는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십오 년을 가족들과의 일체의 연락이 두절된 가운데 형을 살았습니다. 15년 후에 겨우 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이미 마을에 교회는 없어졌고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고 집은 폐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공산주의자가 되고 한 아들은 마약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두 아들을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파서 화병에 걸려서 이미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그 폐허가 된 마당에서 너무 슬퍼서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얘야,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목회자는 통곡하면서 “그렇습니다.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한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이 일평생 가야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해보니까 이 강대에서 목회자가 눈물로 교회 바닥을 두루 적시는 것이 목회입디다. 그러면 하나님을 신기하게 목회자가 너무 부족한데도 결국은 그 교회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흐르는 눈물이 생명줄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두 번째로 바울이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아주 깨끗한 믿음이었습니다. 일체의 꾸밈과 가식이 없는 진실한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흐르는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을 들어선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을 수도 없는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믿음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알잖아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광경을 경험하면서 그는 이제껏 자신이 알던 구약의 모든 역사들이 한 사람을 향해 달음질쳐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깊이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리라고 하는 복음 신앙을 수립했습니다. 그때 그 믿음은 거짓 없는 믿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한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만 의지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너무나 가슴에 벅찼고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을 보면서 너무 가여웠기 때문에 그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이 너무나 넘쳐서 이제는 도저히 다른 일을 하면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이고, 그것이 아닌 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렇게 들어섰습니다. 그게 누가 시킨 겁니까? 누가 강요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거짓이 없는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있는 많은 문제들, 사람과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것, 목회자들이 덕을 세우지 못하는 모든 것에 뿌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순수한 믿음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무엇인지 압니까?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목회자를 교회에 세우셨는데 그것은 목회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믿으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목회자를 세운 것이다.” 그러면 목회자 자신의 믿음 생활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목회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더 치열한 믿음 생활,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 생활을 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노력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이 가진 지위나 유명도나 그가 가진 재능이나 모든 것들은 전부 다 다 모래 위에 세워진 집에 불과한 것입니다. 높이 올라가면 높이 올라갈수록 결국 무너짐이 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목회자인 우리들의 가장 큰 잘못은 목회를 한 사람은 이미 믿음에 관해서는 수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사도 바울은 이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디모데 같았으면 좋았을 그런 믿음이 이 사랑하는 아들의 마음속에서 읽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목회의 두 번째 생명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있고, 나의 사역이 있고,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 본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의 기반은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목회는 정년이 되면 더 이상 그만두게 되고 임지를 구하지 못하면 아직 목회를 못하게 되지만 주님을 믿는 것은 목회하기 전에도 목회가 끝난 후에도 계속해야 할 생활이니 거짓이 없는 믿음을 붙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록 눈부시게 성공하지 못해도 모든 사람이 기억할 때 눈물이 있었던 목회자, 진실했던 목회자, 거짓된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목회자로, 두 번째 생명줄을 붙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목회의 생명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타는 은사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안수’라고 하는 것은 안수받는 사람을 어떤 사명으로 구별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목회자가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이 안수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수받음으로써 목회자가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안수하고 싶은 겁니다. 결국 우리의 목회지의 부르심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순간 자신의 목회직으로 아침마다 새롭게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30여 년의 세월이 지났으니까 별의별 일이 다 있지 않겠습니까? 너무너무 기쁜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너무 괴로워서 밤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하늘나라에서 눈 뜨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밤중에 침대에 누워서 제가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가슴을 두드리면서 “하나님 제가 목사입니다. 이길 힘을 주시옵소서. 이길 힘을 주시옵소서.” 자신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매일매일 다시 안수 받는 마음으로 자신 안에서 재확인하는 부르심의 아로새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안수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너의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헤르만 바빙크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소명은 재능에 의해 확인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소명이 진실한 것이라면 반드시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파보질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 묻어 두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발휘하려는 사람들에게만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은 불타는 열정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한 번밖에 없는 이 인생에, 한 번 밖에 없는 목회지에 헌신을 하면서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불살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리라 하는 이 열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몸부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타오르는 열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회지에서 떠나가고 나면 교인들이 여러분들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겠습니까? 담임 목사를 눈치나 보던 사람, 할 만하면 하여튼 쉬기를 원했던 사람, 이렇게 기억할까요? 아니면 무엇이든지 주님을 섬기고 싶어 하는 열정으로 가슴이 불탔던 사람, 게으른 나를 부끄럽게 했던 사람, 가슴에 불타는 정으로 주 앞에서 살았던 사람, 어떤 사람으로 여러분들이 기억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의 분야에서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던 사람들 모두를 보십시오. 미치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끔 후배 목회자들을 만나서 농담 비슷하게 말합니다. “야, 길거리에 장사도 그렇게 해선 안 된다. 근데 목회를 그렇게 해서 목회가 되겠느냐?”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재밌는지 아십니까? 수많은 목회자들 만나보면 공부를 많이 한 목회자일수록 설교 준비 시간이 길고 공부를 안 한 목회자일수록 설교 준비 시간이 짧습니다. 영성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기도 시간이 길고 영성이 후진 사람일수록 기도 시간이 짧습니다. 목회의 업적을 많이 이룬 사람일수록 부지런히 살고 해 놓은 게 없는 사람일수록 게으릅니다. 이게 반대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세상 이치라는 게 그런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불타는 열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불타는 열정이, 피를 토하는 열정이, 이렇게 토혈을 목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이 목회를 하며 죽을 것이다’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열정이 가슴 속에 불을 붙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열정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이 감화시키지 않으면 누구도 그런 열정으로 살 수 없습니다.
저는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을 혼란스럽게 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찰스핀이었습니다. 그는 원죄도 믿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대속도 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펠라기우스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전기를 읽으면서 내가 마음 깊이 본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정이었습니다. 아침에 맨하튼 거리에 나아가서 전도를 하다가 주저앉아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들이 지옥에 가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그 눈물을 보시고 신학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셔서 위대한 전도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슴에 불타는 열정이 있습니까? 그 열정이 여러분들이 붙들어야 할 세 번째 생명줄입니다. 어찌하든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모두 태워드리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한량처럼 지낸 남편이 있었습니다. 술도 먹고 노름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으면 이상하게 아내가 무슨 고상한 그림 하나를 주는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빼먹는 돈을 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도 남편이 아내에게 “그림을 하나 다오. 어디다 감춰놨지?”라고 말하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조르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내가 그림을 그릴 테니 절대 방을 보지 마시오.” 시간이 지나도 안 나오니까 남편이 너무 궁금해서 구멍을 뚫고 그 안에서 아내가 뭘 하는지 봤습니다. 그랬더니 하얀 화선지를 펴놓고 새 한 마리가 울컥 울컥 피를 토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새는 죽었습니다. 결국 그 아내는 피를 토하면서 그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일본 바둑의 역사에 보면 토혈국이라는 기보가 전해 내려옵니다. 양쪽의 가문들이 서로 바둑으로 경쟁을 하다가 한 쪽이 패배하게 되니까 너무 분해서 두 팔을 벌리고 바둑 위에 피를 토하고 엎드려져서 즉사를 한 것입니다. 그 기보가 아직도 전해 내려옵니다. 그림을 그리고, 오락을 하는 사람도 이렇게 피를 토할 듯이 하는데 목회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열정이 없는 것은 소명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니면 생명줄을 놓친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생명이 죽음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은 목회직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 생명줄을 굳게 붙드십시오. 흐르는 눈물, 거짓이 없는 믿음, 불타는 은사, 이것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