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고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녹취자: 박재홍
사람이 누구든지 즐거운건 좋고 괴로운거는 싫은 겁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제가 늘 허리가 아파서 치료를 받으러 가는데 50대가 넘어서 60세 정도 되는 아주머니가 있는데, 싸우나에서 마사지를 하는 원장인데 굉장히 잘합니다. 근데 그분 이야기가 뭐냐하면 자기가 실력을 발휘해서 해주면 참 좋은데, 제대로 해주면 손님이 그 다음에는 안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몸의 상태가 안좋은 사람에게는 세게 해야하는데 거의 고문 수준인 것입니다. 그래서 확실히 그분한테 받고 나면 정말 좋습니다. 근데 저도 안가게 됩니다. 자기에게 좋은 것이고 또 남이 자기를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치료를 해 주어도 그게 자기에게 고통이 동반되면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그랬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괴로움을 기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실제로 “내가 그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그랬습니다. 그 괴로움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괴로움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괴로움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너희들’이 누구나고 하면 골로새서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나 빌립보서에서나 골로새서에서나 공통적으로 사도바울이 선교사라기보다는 목회자로써의 고통을 토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근데 그 고통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덜 세우시고 죽으셨는가?‘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아이이지만 완전한 사람을 낳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또 아직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 낳아놓고 아이가 꼼지락거리면 노인네가 와서 “아이고, 저게 언제 사람이 되나?” 라고 그럽니다. 그 얘기는 무슨 뜻이냐고 하면 그 아이가 잘 자라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또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성인이 되어야 되는데, 그때까지 부모가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면, 어른이 된 사람한테는 안 그럽니까? 하도 개념없이 행동하면 “이 사람아! 자네가 언제나 사람이 되겠는가?“ 그럽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나 육체적인 면에 있어서나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지만 사람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사람의 정의입니다. 원래 사람이라는 말이 국어의 어원을 찾아보면 ’살다‘에서 온 것입니다. ’삶‘ 거기에서 온 것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삶을 사는 존재다.‘ 이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만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동물들의 살아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이라고 하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가듯이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사도바울의 이 괴로움을 통해서, 목회자의 괴로움을 통해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서는 부모로서 깊이 헌신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자기가 이렇게 ’너희를 위한 괴로움을 기뻐하고‘ 라고 했을 때의 그것은 자기만 이런 괴로움을 당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그런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그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그런식의 구분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사도바울이 목회자로서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위해 이러한 괴로움을 당했지만,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의 마음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은혜를 따라서 이 괴로움을 나누면서 교회를 섬기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연말이 되면 여러분 구역장 그만하고 싶어합니다. 다만 교역자하고의 차이는 교역자는 연말이라고 그만둘 수 없는 입장이고, 구역장은 연말이면 그만둘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근데 모두 그러한 똑같은 종류의 깊은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목회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것을 평신도 때,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일곱, 그때에 주일학교 교사하면서 목회에 관한 기본적인 거의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 교인들이 시험에 들고 은혜를 받지 못해서 예배 끝난 후에 비통한 마음으로 중간에 문을 열고 브릿지 아래를 걸어가는 그 마음이나 아이들이 은혜 받지 못했고, 그래서 공과공부 끝난 다음에 교회당에서 교회일 을 마치고 개울 다리를 건너가던 그 마음이나 크기의 차이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질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어떨 때는 그때가 마음이 오히려 더 뜨거웠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얘기했듯이 목회자용 평신도용 이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괴로움이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피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이렇게 고통해하는 사도바울이 오히려 기뻐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큰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가 온전해져간다고 하는 그 소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괴로움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보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있다가 떠난 장목사님을 부산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는데, 나보고 그랬습니다. ”목사님, 부럽습니다.“ 그래서 ”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참 많지.“ 장목사가 ”그러게 말이예요.“ ”그런데, 모두 헛된 꿈을 꾸고 있는거지.“ 그러면서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내가 뭐가 부럽냐?“ 그러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장목사!“ ”왜요?“ ”나는 너무 힘든 날은 그만 뒀으면 좋겠어.“ 웃으면서 그랬더니, 장목사가 ”목사님, 안됩니다.“ ”왜요?“ ”누가 그 교회에 후임으로 오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설교를 잘하고 목회를 잘해서 누가 후임으로 오겠냐고 그러는줄 알았더니, ”그 빚은 누가 갚겠습니까?“ 그랬습니다. ”빚 갚기 전에는 못그만 둡니다.“ 나는 원래 목회를 할 때 빛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A man of light. 그런데 빚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A man of debt.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나도 너무 괴로워.“ 그러면서 이야기를 했더니, ”목사님은 보람있는 괴로움이죠. 저는 별로 보람도 없는 그지 같은 일로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게 사람보기에 보람이 없는 괴로움 같아도 그것은 성과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판단이고, 그냥 참고 견디면 그게 다 주님 보시기에는 보람이 있는 괴로움이다“ 왜? 교회에서 일어나는 목회자의 대부분의 많은 괴로움이 미성숙한 교인들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 한칼에 내치면 평화가 오겠지만 참고 견디는 것은 얼마나 큰 괴로움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그러한 괴로움과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변해가니까 그게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 아니냐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가는데 있어서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모님 밑에서 구김 없이 자란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이미 다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그것을 통해서 부모가 그렇게 깊이 희생을 하고 고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게 비록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부모도 그게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고통을 받았는데, 부모가 그것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의 행복과 기쁨에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을 꺾어서 거기에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제길, 이 교회가 잘되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나는 사택도 싫어. 차도 싫어. 그러고 나는 사랑도 필요없어.“ 그렇게 생각하면 교회를 섬기면서 발생하는 모든 괴로움이 나 개인에 대한 공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모든 더러운 인간의 악감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나는 불안전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하는 통로일 뿐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괴로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공급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일하면서 괴로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주 이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에 있는 교회에서 예수의 몸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그게 없다는 거는 자기가 그것을 못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손가락을 쾅하고 다쳐서 찢어져서 피가 철철 나면, 온 몸이 다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못느낀다고 하면, 그것은 몸에 중대한 이상이 생긴것입니다.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이 손가락이 고통을 못느낀다고 하는 것은 다행인게 아니라 중대한 신경 장애가 발생한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목회가 얼마나 행복하냐 하는 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물론, 목회하다보면 기쁘고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끔입니다. 대부분은 고통과 괴로움들로 연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들이 교회를 섬길때 절대 그렇게 만사 형통하게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주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괴로움이 있어야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그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뭐라고 하고 있냐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우리의 육체에 채우노라“그랬습니다. 이상한 것은 한 두개가 아닙니다. 우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낌없이 피흘리고 다 죽으셨다고 그랬는데,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이 미완성인가?’ 하는 의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그런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이 온전했기 때문에 남은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고난을 다 당하셨지만 그렇게 당하신 고난 때문에 교회를 이루셨지만 이루어진 교회는 아까 말씀 드린대로 어떤 면에서는 완전하셨지만 어떤 면에서는 미완성의 교회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져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미 이루신 고난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고 있는 지체들 속에서 actualize(실제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의 진정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거는 예수님이 당하실 몫이 아니라, 그것은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우리들이 당하여야 할 몫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를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봉헌하며 교회를 이루기 위해 당하여야 하는 모든 고난에, 그리고 그 속에서 이천년 전에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신 죽음이 그 교회 속에서 실제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개개인이 연합이 되고 개개인의 연합의 정도가 순결하고 높을수록 교회의 성례전적인 연합은 아주 탁월한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신비적인 교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은 개혁주의 spirituality의 진수인 것입니다. 이게 경건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게 송두리째 무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교회가 어지러운 것입니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목회자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어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그 모든 일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사람이고, 가장 많이 맨 앞에서 그것을 채득하여야 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뉘게나 있는 그 십자가를 우리 모두가 지고 그런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그것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의 육체에 채우지 않고, 내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이 교회를 통해서 그것을 실제적으로 구현될 때에는 그것이 개개인 속에 구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런말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참 그분들이 나쁜 분들이거나 그런 분들은 아닌데, 생각하면 아련합니다. 교육관을 사고 집이 여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상을 빗나가서 15억 이상의 돈이 모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도 하고 온갖 방법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해결의 길이 안 보이는 거입니다. 거실에서 창문을 열면 교육관이 탁 보였습니다. 그때는 성지타워도 없고, 그랬으니까. 두 가지 생각이 막 교차하는 것입니다. ‘저걸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할까?’ 그거하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할텐데.’ 그래서 매일 식구들 잠들었을 때 거실에 나와서 창문을 열고 소파위에 쭈구리고 앉아가지고 창가에 손을 받치고 기도를 했습니다. 도와달라고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몇 억이 필요하다고 그러고, 저기서 몇 억이 필요하다고 계속해서 올라오는데, 거의 돌겠는 것입니다. 근데 어느 성도가 새로 이사 왔다고 나를 가정에 심방을 와달라고 그래서 갔습니다. 새집인데, 인테리어를 했다고 막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인테리어는 뭐가 좋고 뭐가 좋고 쭉... 아무 생각도 없이 이 구석 저 구석 걸어가면서 드는 생각은 ‘이집 잽히면 당장 급한 불은 끌텐데.’ 하나도 귀에 안들어 오는 것입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내가 건축에 관심이 많으니까 얼마나... 하나도 귀에 안들어오고, ‘아! 이집 잽히면 급한 불은 끌텐데.’ 계속 그 생각을 하면서 심방을 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끼는 것인가? 아닙니다. 회심한 영혼들은 회심안한 영혼들이 똑같이 있는데 큰아들은 밤마다 괴로워서 가슴을 두드리며 펑펑울고, 둘째딸은 룰루 랄라하고 교회 생활한다 이겁니다. 그게 결국 무슨 얘기입니까? 한식구라는 이유 때문에만 그것이 모두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아 선지자가 예루살렘성이 망한 다음에, 사람들이 전쟁이 나면 제일먼저 무엇을 구하는지 아십니까? 먹을거 사재기 하는 것입니다. 이은평씨가 미그기를 몰고, 비행기는 비행사들만이 통하는 신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행을 하면서 정면으로 날라오면 공격하겠다는 뜻이지만 날개를 흔들면 항복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딱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러고는 유요한것입니다. 그랬으면 그냥 지들끼리 대충하면 되지 온 전국에 민방위 훈련, 비상 공습 경보를 울린 것입니다. 그게 전쟁끝나고 첫 번째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전투기가 날라온다, 전쟁이 났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하고 나하고는 예배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데, 그 순간에 그게 한 30분, 1시간정도 끝나고 나서 이제 드디어 텔레비전에 그 비행기를 모두 파주까지인가 끌고와 가지고 공항에 착지한 다음에 이제 성명이 나왔습니다. 그게 한시간 약간 안되었습니다. 슈퍼에 먹을것 모든 것이 전부다 팔린 것입니다. 라면, 쌀, 그다음에 특히 참치캔이 싹 팔렸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그것을 어떻게 했는지 좀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성이 망했을 때 선지자가 ‘너희에게는 내게 임한것 같은 슬픔이 왜 없느냐?’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하면, 그랬기 때문에 그것이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에서 이 육체는 몸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육체가 뭐냐하면 sinful flesh입니다. 죄된 육체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채워지니깐 어떻게 되겠습니까? 옛 본성이 파괴되면서 아주 순결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를 잘 섬기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다가 집어 치우고 아무렇게나 섬기면 나쁜 사람이 된다 이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그 몸된 교회를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그것이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가운데 영혼을 위해 한번 기도해 주는 것, 연약한 지체를 한번 만나주는 것. 그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 그를 위해서 위로해 주는 것. 말씀한절 가르쳐 주는 것. 그를 위해 눈물로 간구하는 것.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분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한 섬김은 가장 분명한 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박희천 목사님이 내가 거기 전도사 생활할 때, 교육자회의 때마다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이후의 삶을 책임져주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충성스럽게 섬기던 사람들은 그 안에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시고, 또 그를 위해서도 함께 만드셔서 주님을 섬김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해가 저물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