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2
녹취자 : 이경순
새로운 책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감사의 박수를 칩시다. 이미 2006년 새해 말씀 사경회 자료인데 한 3줄도 중복되지 않게 전부다 다시 썼습니다. 큰 흐름이야 같겠지만 표현을 완벽하게 다 고치고 출전도 찾았고 성경구절까지도 다 찾아서 완벽하게 보충을 했습니다. 우선 1장 제 1과부터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번) 사랑의 원인은 사랑 받는 대상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렇지만 삼위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교통과 인간의 사랑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피조물들의 사랑은 남녀가 있고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사랑을 할 때에는 무엇인가 에이라는 사람이 비라는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볼 때에는 뭔가 사랑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외모든 무엇이든지 간에 좋은 점이 있으니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도 있는데 이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이 발견이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워낙 사람 자체가 사랑의 사람일 경우에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알고 보면 사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것들이 사랑을 하면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사랑은 본성적으로 볼 때에는 아름다운 것을 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신이 즐겁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담에 두 번째 하나님 안에서의 내재적인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흔히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부 성자성령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할 때에는 사랑할 대상이 이세상에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사랑이 되셨느니라 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는 영원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가? 그것은 바로 위격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삼위일체에서 배웠지만 세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위격인데 서로 관계를 가지시는 위격입니다. 그 위격이 서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결국 또 무엇과 나뉘어지지 않느냐면 각 위격은 모든 나머지 위격들과의 질서 속에서 가장 무한히 아름다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 성부 성자 성령님이 서로 사랑하시므로 이 각 위격의 사랑이 결국은 하나님 한 분 안에서의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사랑의 원인이 되시고 목적이 되시고 대상이 되시고 사랑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고 이 사랑을 이제 하나님이 인간사회 속에서 이것을 펼쳐서 당신이 성부 성자 성령 이 위격 안에서 서로 사랑하시는 것 같은 관계를 가지고 인간들이 그렇게 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사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그것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르네상스시대 때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문인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단테를 쳐보고 단테의 이야기를 한번 읽어보세요 그럼 아마 아실 수 있습니다. 거기서 이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 영원한 빛이시여 당신은 당신 안에만 계시고 당신만이 당신을 아시고 당신은 당신에게만 알려지고 당신을 스스로 알면서 사랑하시며 웃으시는 도다’ 집에 가셔서 이것을 다섯 번은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그림을 한번 보세요 의미심장한 위격들 간의 교통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2번) 본문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2-1번) 개별적 위격의 완전성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서 저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둘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 두 번째는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사람을 모델로 쓸 때에 부분 모델을 씁니다. 손이 아주 예쁜 사람은 손 모델로 씁니다. 보험사가 와서 계약을 하는데 아줌마인데 손가락이 너무 예쁩니다. “아 정말 손가락이 예쁘시군요.” 그런 사람들은 방송을 할 때 모델로 씁니다.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아무리 예뻐도 얼굴은 안 보여줍니다. 왜 그럽니까? 미인이 되어서 카메라에 후레쉬를 받을 정도가 되려면 코나 눈, 입 이런 것 하나만 예쁘면 안 되고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야 됩니다. 한 사람의 얼굴이 예쁘다고 할 때는 코가 사람의 코로써 완전성에 가까워야 됩니다. 눈도 마찬가지고 입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첫 번째 조건이고 두 번째는 그것이 제자리에서 높이와 낮이 이런 모든 것이 어울려야 됩니다. 그 두 개가 성립이 되면 예쁜 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것입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랑새 예뻐요 미워요? 숲 속을 나는 파랑새가 예뻐요 안 예뻐요? 그 열 마리가 지금 여길 날아다닌다고 생각해보세요. 예뻐요? 안 예쁜가요? 그런데 왜 똑같은 새인데 아깐 예뻤는데 지금은 안 예쁜가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지요.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런데 그 나무가 여기에 세 그루쯤 아름드리나무가 서있다면 예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하나는 완전하고 멋있는 나무인데 주변에 있는 것들과 함께 어울리는 아름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름답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을 하나님을 놓고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간이 설명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굳이 설명한다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각 위격이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무한한 선이고 진이고 성이고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각 위격은 홀로 있지 않고 다른 위격과 함께 있음으로써 그 성부 성자 하나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위격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또 성자 성령에 어울리는 최고의 위격은 성부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개별적 미의 완전성 때문에 그리고 위격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은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너무 많이 들으셨으니까 보람을 느꼈습니다. 연세 드신 권사님들은 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 대해서 스위니(Douglas A. Sweeney) 교수가 와서 ‘유다이모니아(eudaimonia)’ ‘행복’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상당히 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늘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도 수없이 들어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원리를 가지고 사물을 보세요. “이 공간이 다 아름답다.” 그것은 딱 두 가지 조건입니다. 하나, 하나가 완전하면 이것이 어울릴 때 또 하나는 보는 사람이 그것을 올바르게 관찰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다음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하나 나오는데 ‘하나님의 단순성’이라는 개념입니다. 이것도 설명을 하고 설교도 여러 번 했는데 아마 쉽게 기억하시는 분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쪽은 나중에 설명하고 여기부터 설명합니다. 삼위일체에서 다 배운 내용이지만 그러나 한 번 더 설명하자면 성부는 하나님이시다. 성자 역시 하나님이시다.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다. 그러면 이 복잡한 이야기를 딱 둘로 설명하면 위격은 각각 서로 구별되어 있으며 서로 다르다. 그리고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시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동일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시다. 이 뜻입니다. 그래서 각 위격은 하나님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다우실 수 없는 무한히 완전하신 하나님 그 세 위격이 관계를 이루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단순성이라는 좀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는 위격은 위격간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각 위격은 동일한 신적 본질이다. 그 담에 스스로의 완전성으로 각 위격은 무한히 아름다우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단순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성이라고 하는 것은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구성 요소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사서 보면 뒤 포장지를 보면 성분 그러면서 그 제품에 들어간 모든 것이 나옵니다. 과자라면, 밀가루, 우유, 코코아가루, 설탕, 전분, 베이킹파우더, 소금 어쩌고저쩌고 쭉 나옵니다. 그 성분이 합쳐져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성분을 과학적으로 다시 분해하면 그 성분으로 다 추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구성요소를 가지신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해할 때 파이조각처럼 그림을 그리고 이것을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서 성부 성자 성령 이런 식으로 설명하려면 안됩니다. 더욱이 이렇게 놓고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할 때 이렇게 파인애플 조각처럼 그리면서 하나님의 사랑, 공의 그 다음에 공평, 의, 정의 이런 식으로 설명해도 안됩니다. 그럼 그것은 하나님은 단순한 분이시기 때문에 구성요소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고 당연히 성부 성자 성령도 하나님의 구성요소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이 삼위일체가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물건을 설명할 때 유비에 의해서 설명을 합니다. “이 제품이 말하자면 이미 예전에 우리들이 보았던 이런 것과 비슷한 거야.”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데 존재의 양상이 양식이 하나님과 유사한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인간에게 매우 난해한 영원히 불가해한 존재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설명한 모든 것은 성경에 근거를 가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시 단순성으로 돌아가서 단순성이 무엇이냐면 이렇게만 이해하면 됩니다. 제가 즐겨 드는 비유인데 햇빛이 수많은 역할을 합니다. 식물을 자라게 하고 얼음을 녹게 하고 그래서 물이 흐르게 하고 개구리가 깨어나게 하고 빨래를 말리고 많은 역할들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햇빛이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햇빛이 가지고 있는 작용에 의해서 균이 있는 빨래는 살균이 되고 씨가 뿌려진 땅에서는 싹이 나고 얼음이 언 땅에서는 물이 녹는 것이지 그 햇빛 안에는 얼음이나 풀이나 이런 것들이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프리즘에 빛을 통과시키면 빨주노초파남보 이렇게 일곱 개로 분광이 됩니다. 놀랍게 이 분광을 합친다고 해서 다시 그 빛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은 단순하셔서 구성요소를 가지고 계신 분은 아니지만 그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이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성품을 무지개 빛깔처럼 비추시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악인과 만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이 비참한 사람과 만날 때에는 자비하신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이 선한 사람과 만날 때에는 은혜로운 하나님으로. 이런 식으로 당신이 설명할 수 없는 단순하신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다양하게 당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를 하고 이 세상과 맺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성경의 역사 그리고 이런 것들을 보면 아주 예전에 흑백사진으로 보던 세상이 칼라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주 생생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해 가지고 계시는 역사하시는 방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단순성은 ‘하나님은 어떤 구성요소를 가지시고 나뉘어지는 분이 아니다.’ 위격 안에 있는 사랑의 교통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이신데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부는 성자를 성령을 사랑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그리고 성자는 성령과 성부를 사랑하시므로 이렇게 삼위는 사랑의 교통을 이루심으로 각 위격은 개별적으로 다른 위격과 사랑의 교통을 나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5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그의 손에 주셨으니 나오는 것입니다.
2-2번) 삼위의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삼위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계십니다. 그런데 성자는 성부께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 이렇게 서로 질서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세 위격 사이에 완전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 이것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이 종속은 본질적인 종속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냐면 잘못된 신학자들이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100%하나님이고, 성자는 90%하나님이고, 성령은 80%된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질서가 종속적인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 덜 하나님 같은 성자를 낳으시고 그 담에 그 성자가 더 덜 성자 같은 성령을 낳으신다.” 그래서 “이렇게 종속적인 질서를 갖는다.”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관계의 질서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이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이 되시고 성자를 통해 성령을 통해 그 창조가 이루어지고 구속이 전개되고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경륜’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 경륜은 희랍어로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이코노미 경제라고 하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원래 가계입니다. 이것은 ‘집을 세우다’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할 때 둘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내재적 삼위일체 그 담에 경륜적 삼위일체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 안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시느냐 이것이 내재적 삼위일체라면 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으시느냐 이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입니다. 다시 내재적 삼위일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는데 어떤 관계로 계시는지 이것에 대한 이론이 내재적 삼위일체론입니다. 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영원한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세계 속에서 모든 인간과 피조물과 더불어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이 경륜적 삼위일체입니다. 성경은 내재적 삼위일체에는 오히려 큰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경륜적 삼위일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위격이 이제 인간의 창조부터 시작해서 완성에까지 관여하시면서 인류의 역사의 대파노라마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 담에 세 위격이지만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세 위격이 상호간에 사랑으로 교통하시고 세 위격은 질서로운 관계를 유지하십니다. 각 위격은 다른 두 위격에 대해 무한히 아름다운 방식으로 존재하시며 그 위격들에게 사랑을 받으십니다. 각 위격은 존재와 서열에 있어서 다른 위격을 배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가 막힌 설명이 이 삼각형입니다. 이것보다 더 훌륭한 설명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의 설명을 내가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렇게 삼각형을 그리고 여기 성령이시고 성자이십니다. 그리고 성부이십니다. 그런데 아랫부분이 이 세 개와 관련되는 부분이라고 이해를 합시다.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두 위격을 배재하고 혼자서 일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실 때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창조하시지만 성부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 일을 하시고 성령과 성자하나님이 거기 계셔서 함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담에 타락 후에 구속사건이 있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다시 이런 삼각형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는 성자가 되고 성령이 되고 여기는 성부가 되십니다. 그래서 삼위가 모두 이 일을 하시지만 그러나 성자하나님이 이 구속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담에 이 구속을 적용시키는 사역에 있어서는 어떻게 될까요? 여기는 성부 성자 성령 이 성령이 구속의 적용입니다. 이것은 구원입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경륜이 전개가 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예전에 했던 삼위일체 한 다섯 시간 할애해서 다시 한번 쭉 들으면서 정리를 하고 하시면 공과시간에 자신 있을 것입니다.
3번) 사랑은 자기 충족적 사랑입니다. 자기 충족적 사랑이란 무엇이며 이러한 사랑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의 행복과 배치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충족적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충분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무엇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받으셔야 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에게 무슨 이득이 된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거스틴이 개념을 이야기 한 것은 몇 번들은 이야기지만 ‘향유’는 그것 자체를 궁극적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고 ‘사용’은 그 보다 더 상위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펜을 이거 말고 새로 나온 좋은 것을 가져와라 그래서 이것을 버리고 100만 원짜리를 사왔다고 칩시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이것을 가지고 누구한테 자랑하고 싶은 게 아니라 이것을 그려서 설명을 잘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을 산 이유는 이것 스스로를 즐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을 잘하기 위해서 산 것입니다. 계속 할 때 인간의 사랑은 항상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랑이 아니라 항상 사유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좋아할 때는 그것을 건너뛰어서 끝까지 올라가서 무엇인가를 더 사랑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딱 두 개밖에 안 나옵니다. 자기냐 하나님이냐 둘 밖에 안 남습니다. 세상도 사랑하는 것도 세상 좋으라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할 때 자기가 좋아하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렇게 무엇인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어떤 피조물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사용하기 위해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종속적 목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는데 결국은 올바르게 향유하는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에는 결국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피조물 은 결국은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이냐 자기 자신이나 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충족적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부터 읽어 봅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성부, 성자, 성령은 자신에게 목적이 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위격들 안에서 살아나실 때 그 자체가 목적이지 그것을 뛰어넘는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의 원인이자 주체와 목적이 됩니다. 그 안에 피조물에 대한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을 그 사람이 하나님 사랑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그 사람이 하나님 사랑 때문에 또 다른 이웃을 그 사람이 하나님 사랑 때문에 또 이웃을 사랑하고 마지막에 이 모든 것이 휘돌아서 결국은 사랑이 하나님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를 들어서 금 장로님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잘 가르쳐서 금 장로님이 “하나님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면 내가 이 분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만 이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을 받고 그 담에 각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하면서 온 인류가 사랑으로 연결되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비전이었습니다. 많이 설명했으므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깨닫습니다. 아가페사랑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리따스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에 감화를 받은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입니다. 자연에는 사랑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말로 표현 할 때 아 우리 코코 참 사랑스러워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의입니다. 선의를 갖는 것입니다. 그 담에 하나님께서 계신데 인간이 결국은 사람과 피조물의 사랑에 매여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득을 목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꾸피디타스(cŭpídĭtas)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결국은 우리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육욕적 사랑입니다.
4번)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당신의 지혜를 이루는 것입니다.
4-1번) 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도덕적 목적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있고 창조의 목적이 있으셨으니까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창조하십니다. 그러면 종말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만물을 어떤 상태로 창조해야 되겠다.’ 이것만이 아니라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목적대로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자연적인 목적과 도덕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목적은 모든 피조물이 생성 생존 변화 소멸하는 자연적인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 속에서 자연이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연적인 목적이었고 인간도 이 자연적인 목적을 따라서 건강과 생명을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너무나 과도한 물질문명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가면 돌아 갈수록 우리 몸은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목적은 인간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입니다. 통치입니다.
4-2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지혜가 있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피조물들에 대해서는 선의로 인간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만물을 통치하시는데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 선하심이 결국은 이 모든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세상에 이렇게 악이 많고 자연의 재해도 많은가 그렇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 없다는 증거로 삼습니다. 반문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러면 이 세상은 완전하고 질서 있고 조화롭고 모든 피조물들이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번도 그래 본적이 없는데 인간은 끊임없이 그것을 가장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할까? 그 자체가 유신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신이 있어서 모든 만물들을 그렇게 통치한다는 기억 때문에 인간이 그런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안에 있는 모든 무질서와 악들 이런 것들은 결국은 인간의 죄에 의해서 악에 의해서 도덕 악과 자연 악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4-3번) 하나님의 지혜를 이루는 방법인 세 위격의 경륜의 일치는 무엇이며 구속사속에 나타나는 지혜는 인간의 사랑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구속의 계획자 성부, 구속의 실행자 성자, 구속의 적용자 성령. 창조, 구속, 완성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세 위격은 각각 고유한 역할을 하시는데 다른 두 위격을 배재한 채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함께 일하신다. 그러면서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당신의 역사를 펼쳐 가신다. 그래서 이렇게 인간의 사랑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결국은 이 창조하신 세계를 구속의 역사로 드러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들에 의해서 망가지고 병들고 악이 들어온 이 세상을 치료하고 고치고 투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계를 선하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만들어가는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