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도리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행19:18)
녹취자: 최영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길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하여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유언과 같은 설교를 이 사람들에게 남겼습니다.
사도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먼저 자신이 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어떻게 아시아에 있는 교회를 섬겼는지를 고백적인 서술로 진술했습니다. 그는 먼저 “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섬기는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이 위대한 고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먼저 진정한 사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 본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되 유창한 언변이나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원대한 계획, 불확실한 장래에도 확실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결과를 이미 얻은 것처럼 과신하는 것이 사역에 있어서는 훌륭한 사역자들과 함께 얻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을 아시아에서 잘할 때도 있었고 못할 때도 있었지만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의 섬기는 삶 모두를 보여주는 것 그 자체가 훌륭한 가르침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사역이 항상 우리가 기대했던 것처럼 성공만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일반적인 섭리이지만 아주 충성하고 헌신했는데도 눈에 보이는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거나 하찮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사역에 보이는 비디오처럼 우리가 어떻게 좋으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보스턴 신학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였습니다. 성공이 보장된 수많은 국내사역의 길을 버리고 그가 택한 것은 불교의 땅 버마에 선교사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하루는 아무것도 안하고 기도만 했습니다. 6년 동안 몸부림치며 애를 썼지만 단 한 사람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고, 첫 번째 결신자에게 세례를 주기까지 6년이 걸렸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남이 보기에 아주 아름다운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안 그럴 때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에 사역을 마무리한다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순교의 길이 될 수도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이제까지 내가 어떻게 섬긴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저는 열린 교회를 개척하고 19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우리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습니다. 내가 열린교회를 개척한 이래로 19년 동안 내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이니 그만큼 부족한 것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도바울은 자신이 이 사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신이 너무나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삶 안에 부끄러움이 없이 자신의 사역의 열매와 결과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종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적어도 자기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모든 사랑하는 장로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국내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이건 해외에서 선교 활동하는 사람들이건 모두 이 시대의 정신을 따라서 많은 성과와 화려한 업적, 남이 이루지 못한 위대한 일들의 결과 ,이것들을 보여주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들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들어보면 사도 바울이 만약 예루살렘에 올라가 순교하고 죽는다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교인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것은 그가 이룬 선교의 위업이 아니라 어떠한 자세로 일평생 마지막 이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어쩌면 죽음의 길이 될지도 모르는 그 길을 떠날 때 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겨레와 성도들을 섬겼는지 그 태도들이 오히려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져 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르쳐준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언젠가 우리도 여기서 사역을 끝내고 나면 “내가 중국에 들어온 첫 날부터 떠나는 그 날까지 내가 이들 가운데서 어떻게 섬긴 것을 너희가 아는 바니”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사역이 복된 사역이 될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 아시아 지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역했던 몇 가지 추억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에베소를 떠나며 사도바울의 가슴에 진하게 남았던 것은 이곳에서 섬기는 날 동안 그가 경험한 겸손이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겸비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하다는 말은 단지 사람 대 사람으로서 낮아지는 것이 덕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는 인간적인 겸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겸손의 출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라는 선교사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 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용서받은 죄인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용서받지 못한 죄인일 뿐입니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정신으로 보면 우월하고 열등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가장 훌륭하게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자기의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주고 순교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사도가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고백하게 된 그 겸손입니다.
디모데서를 쓸 때 사도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 서있었습니다. 그 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 함이니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이 괴수는 희랍어로 ‘프로토스(πρῶτος)’인데 영어로 말하면 ‘first’입니다. 죄지은 사람을 줄을 세우면 첫 번째 자리에 올 수 밖에 없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평생 가족도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 일평생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없이 고난을 당하고 지금도 순교를 기다리고 있는 죄수의 몸으로 고백한 사도의 자기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선교의 업적, 자기가 한 놀라운 일,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을 기록한 신학자요 저술가, 기독교의 기초를 놓은 위대한 인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보면 자신은 죄인중의 괴수일 뿐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가 맨 처음 불모의 땅인 이곳에 와서 주님을 섬기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화려한 지위였습니까? 장래가 보장된 높은 신분이었습니까? 아니면 분에 넘치는 삶을 살아갈 정도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한 연봉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질 않네
주님과 함께할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지켜주기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유일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높은 지위, 보장된 장래, 넉넉한 생활비가 없지만 우리는 이곳에 발을 들였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사랑, 자기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값없이 자기를 주신 그 은혜가 사랑의 동기가 되어서, 다른 일로서는 도저히 만져볼 수 없는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 크신 사랑과 은혜 때문에 소명을 느꼈기에 우리가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없는 것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얼마를 살든지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 분을 위해 바치기를 원하며 그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처음 정신을 유지하는 길이 우리의 모든 삶에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이 땅의 목회자, 이 세상의 모든 선교사들이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일꾼들이 하루에 두 번씩 펑펑 울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그 크신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감격하는 눈물이고, 또 한 번은 아직도 이 사랑을 모른 채 살아가는 많은 영혼들을 위한 연민 때문에 흐르는 눈물입니다.
이 두 가지 눈물을 잃어버릴 때 거기에서 모든 다툼과 분쟁, 그리고 허위와 가식, 위선과 탄압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아시아에서의 사역을 돌아볼 때에 그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함이었습니다. 이런 겸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희망의 겸비함이었다면 완고한 아시아 사람들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며 느꼈던 사역의 좌절에 이 사람을 현실적으로 겸손하게 하는데 훌륭한 도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면서 항상 형통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형통하지 못하게 하는 사건이나 어려움, 나의 사역에 발목을 붙잡는 마음에 들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혹은 악의를 품고 내가 한 이 일에 도전하는 대적자들을 보면서 이들만 사라져 준다면 나의 사역이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항해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순풍에 돛단 것 같이 우리의 삶이 흘러가게끔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고난과 시련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사역이 시련과 어려움이 올 때 어떤 사람 때문인지 어떤 이유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일이 생겼고 누구에게 이 책임을 물어야 될지를 고민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모든 사람들은 도구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그 일을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시련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고 사역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형통하고 편안한 나머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한번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고 교회의 역사를 고찰해 보십시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고 주님을 너무 사랑했던 종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꿈을 주셔서 그것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평탄하고 안일한 길을 걸어가며 일생을 바쳤던 사람들이 누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역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순풍에 돛단배처럼 일생을 산 사람, 선교의 길을 가면서 자기밖에는 없는 것처럼 행복했던 사람 도대체 누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네가 많이 받았으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라.’ 이게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자의 삶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때로는 사역의 과정 속에서 고통과 외로움, 좌절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게 만들게도 하고, 때로는 아무도 없는 광야에 외롭게 버려진 것 같은 그런 막막한 상황에 직면하게 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광야와 같은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고 마지막에 망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사람들은 우리의 일을 보고 성공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도 그렇게 평가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이므로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집니다. 내가 쓰러졌을 때 저 사람은 서 있었고, 저 사람이 서 있었을 때는 내가 쓰러져 있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그런 때에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이 모든 성공을 보장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형통할 때는 기도를 몰랐던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며 사는 목회자의 일생도 선교사의 생애와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고난과 역경을 만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저는 조용히 묵상하며 즐겨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하나님이 나를 오직 사랑하셨으니 당신만이 경험하셨던 이 큰 쓰라림, 나를 고난에 동참하게 하셨을까 생각하면서 주님의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일어나는 일을 사람에 의해 끌고 가면 비난하고 욕할 일 밖에 없겠지만 주님께 끌고 가서 “주님도 때로는 고난을 당하셨죠? 저도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가겠나이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이 겸손이 아시아에서 사역하면서 가장 가슴에 아로새겨진 사역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는 눈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눈물을 흘려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최고의 학자요 성령의 능력으로는 산자를 죽이고 죽인자도 살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헌신으로 말하자면 가족들도 모두 버리고 죽기까지 순교할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두려웠기에 그는 아시아에서의 복음사역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거론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위대한 신학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룬 위대한 선교 사업가, 그리고 출중한 설교자, 연단된 목회자 이런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가장 연약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닮아 주님 손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어린아이 같은 의존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능력 때문에 주님을 덜 의지한다면 오히려 하나님 섬기라고 주신 능력이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지식 때문에 주님을 덜 의지 한다면 그를 지혜롭게 한 것이 하나님의 큰일을 그르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쓰실 도구이지만 의지하려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은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눈물로써 아시아에서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같이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들에게 죄가 있으면 용서하시며, 능력이 모자라면 능력을 주시고 돈이 없으면 돈을 주십니다. 사람이 없으면 사람을 주시고, 재능이 없으면 재능을 가진 동역자를 보내 주십니다.
우리는 맨 처음 총장님 방에서 허허벌판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허허벌판에서 이 학교를 세우던 때 하나님을 의지하던 그 마음이 계속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큰 능력과 지식 ,훌륭한 동역자들을 붙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울며 매달려야 할 필요가 줄어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눈물로 이 사역의 장을 채워갔습니다.
이 눈물은 한편으로는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 맡겨주신 잃어버린 영혼들을 바라보며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와 모든 물리적인 조건들을 능가하는 성공의 비결입니다.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에게 붙잡힌 손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지만 그러나 주님이 없으면 이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붙들고 매달리는 간절한 마음을 간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돕고 계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눈물이 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간절히 당신을 찾고 주님이 걸어가신 발자취 따라 때로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때로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의존하며 이 길을 걸어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제가 처음 신학대학교에 교수가 된 것은 34살 때였습니다. 철없는 아이에게 신학대학교 교수라고 1학년을 맡겨주셨습니다. 신학을 싫어하는 학생들이 아니라 신학교에 들어와 방황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생각해 보면 처음 교수가 된 4년 동안 흘렸던 눈물이 열린교회를 목회하며 12년 동안 흘렸던 눈물보다 더 많은 것은 성도들에게 참 미안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참 많은 눈물을 주셨습니다.
4년 동안 신학교에서의 섬김을 통해서 하나 분명히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비록 아무것도 없어도 자기를 의지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불신자에 가까운 학생들이 회개하고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저에게 큰 위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처럼 그렇게 눈물이 있는 섬김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훨씬 더 커다란 생명이 넘쳐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유대인들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련을 참고’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네도디아’라고 나오는 이것은 영어의 ‘네로디’의 어원입니다. 복수로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한 번에 간사한 꾀를 베푼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험에 간사한 짓으로 이 사도 바울과 그의 복음 사역자들을 곤경에 빠뜨렸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처음부터 마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고 무엇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무서운 편견과 악독함으로 사도 바울을 죽이고자 하였고 심한 시련 속에 그를 떨어뜨리고자 온갖 모략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 모든 간계를 격파하겠노라. 내가 그 모든 간계를 다 미리 알고 더 심한 꾀를 써서 그들의 모략을 무효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하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온갖 계락과 모략으로 사도 바울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복음사역을 망치고자 하였을 때 그가 한 일은 오래 참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마가 벗어지고 키가 작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목이 짧고 아주 독선적이고 다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달려간 광경을 보면 여러분이 대충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랑의 장을 썼습니다. 사랑의 속성을 이야기한 가운데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을 참는다고 노래했습니다. 누구에게서 그 사랑을 배웠을까요? 그 포악한 사람이 누구 때문에 그 사랑을 알게 되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아주 어떠한 책망도 없이 들려오는 위엄과 자비의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입니다.
(찬양)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자기같이 열심으로 핍박하는 죄인중의 괴수와 같은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자 하고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에 자기를 다른 사람의 행복과 기쁨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게 했고 그 사랑이 사도 바울 속에 넘치게 스며들어 갔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간계를 알았을 때 모든 시험을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소원은 사도 바울을 죽여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유대인에 대해서 흐느끼면서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몇이라도 구원을 얻게 할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죽이고자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의 반응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우리의 사역을 마무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일찍 죽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오래 남아서 어떤 사람들의 장례식을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종말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물학적인 죽음이 찾아오기 전 언제가 우리가 주님을 섬기던 이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우리에게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이 세상을 하직하는 그 날, 혹은 우리가 섬기던 이 많은 사역들을 내려놓는 그 날이 이제 곧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동안 그 어떤 날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역을 이뤄놓은 다음에 허전하고 외로워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면 우리의 마지막이 얼마나 초라하겠습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참게하고 견디게 하고 또 인내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섬기는 모든 섬김이 하나님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그 날이 언제인지 이 학교를 떠나는 그날까지 일체의 오래참음으로 여러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주님 앞에 입증하며 훌륭한 사역자로 주님 앞에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