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와 영적부흥 4
설교자 그는 누구인가(마21:23_41)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새 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생략 .....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라”
저는 채플 시간에 본문을 다 설교한 것은 본문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9절에 제가 설교하고 싶은 말씀은 9절 10절 11절 12,13,14,15절 이것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필연적으로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설교자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온 여러분들은 이렇게 설교를 듣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죽을 때까지 봉사해야 될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에서 볼 때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귀를 기울여야 될 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가 누구인가? 이런 이야기를 설교자 스스로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다보면 반드시 자기에 관한 이야기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보면 반드시 자신에 대한 오류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대한 염려로 말미암아서 이런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설교자가 누구이며 그리고 그가 누구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며 그가 당한 고난이 무엇이고 그의 비전이 무엇이며 시대를 향한 그의 외침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경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만연해있는 이 피상적인 기독교 신앙들, 이런 것들은 곧 신학교에서부터 시작을 한다고 말을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4년을 배우고 다시 3년을 배웁니다. 다시 목사가 되기까지 1년을 더 배웁니다. 8년을 끝마치고 안수를 받고 혹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도무지 나는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러 나가는 사람이라고 하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설교자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이전에 오히려 그런 개념이 훨씬 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마치고 그리고 목회단상에 서게 된 사람을 가르쳐서 강도사라고 불렀습니다. 도를 강론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세상과 교회로 나가는 사람에 대한 아이덴티티의 의식이 얼마나 분명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강도사라는 이름을 행정적인 명칭일 뿐입니다. 누구든지 신학교를 졸업한 그 순간에 나는 비로소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비장한 생각을 대체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 나는 목회하러 나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합니다. 성경을 가르칩니다. 교회를 짓기 위해서는 건축가가 되어야 합니다. 재정을 또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세를 잘 쓰는 머리도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또 십일조를 잘 거둘까. 세무공무원의 마인드도 좀 있어야 될 것입니다. 또 당회장실에 커다란 챠트판을 만들려면 동 직원 같은 머리도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다 통틀어서 우리는 목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일들 중에 대부분의 일들은 특별한 소명을 받지 않았어도 다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평신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재능이 있고 훈련을 받으면 그들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심각하게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핑계하지 마십시오. 원고를 드리고 가겠습니다.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것들은 제가 지금 말씀드린 지적은 사소한 지적이 아닙니다. 교회에 생명과 관련된 아주 엄청난 지적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주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셨을 때 거셨던 기대와 직분과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위한 그 기능이 제대로 후대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직무는 누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까? 세상으로 보내어진 사도의 직무는 누구를 통해 이어집니까? 그리고 오직 초대교회 때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그의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전파되었습니까? 이적을 통해 전파되었습니까? 오직 성령을 통해 전파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있고 선포가 있는 곳에 교회가 섰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설교자였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엄청난 능력을 쏟아내는 (?)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능력보다도 그들 속에 역사하는 진리, 이것들을 외칠 수 있는 담대한 능력, 그리고 외치지 않고 살수 없는 내적인 충만함, 진리에 붙잡힌 그들이 바로 사도들이었고 그들은 설교했고 설교한 그곳에 교회가 섰습니다. 행정이 있던 곳에 교회가 섰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선포된 그곳에 회심이 일어났고 회심이 일어난 그곳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리워졌고 교회가 섰습니다. 목회라는 이상한 일로 얼버무린 그 모든 기능들이 오직 당회장 자기 혼자만 할 수 있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오해입니다. 병자를 심방하는 일, 목사보다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짓는 일, 목사도 어디 다 건축가를 나왔겠습니까. 그 중에는 건축 전문가도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 목사보다 훌륭하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목회라고 하는 말로 얼버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분명한 확신과 말씀에 근거해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설교자로서 소명이 없는 목회의 소명이 진실 된 것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성도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설교는 설교자로서 소명이 없는 목회가 소명이 진실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목회의 거룩한 소명은 지나온 인생을 세상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남은 생애를 보람 있게 살아봐야겠다는 그런 생각에서 출발된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소명은 설교자의 소명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로서의 명민한 소명을 느끼지 못하는 목회의 소명은 진실 된 것인가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설교자로서 분명한 소명이 없을 때 그 목회의 사역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셨을 때 거셨던 그 기대, 주님께서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의 참된 모습들을 회복하는데 기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 설교가 넘치는 이것은 결코 모든 성도들이 대치할 수 없는 직분입니다. 심방은 대치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현황판을 만들어서, 당회장실을 구청장실처럼 만들어놓는 일들은 목회의 소명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설교 테이프를 만들고 예쁜 전도지를 만들고 기가 막힌 주보를 만드는 것은 목회의 소명이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자로서의 소명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남과 하나님, 만남 바 예수 그리스도, 만진 바 기독교의 진리를 단지 선포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설교자로서의 소명인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는 엄청난 각성을 해야지 됩니다. 선생들에게는 7년 동안 맡겨진 사람들을 마지막 졸업시킬 때 어떤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사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들은 분명히 7년을 마치고 모든 신학의 마지막 목적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기 위한 준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행하는 수많은 강의와 배운 수많은 노트는 목회현장에서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정말로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주의 말씀을 능력있게 선포하는 설교자로서 여러분들을 세워주지 못한다는 교만케 하는 지식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 이것은 심방, 상담, 사무, 봉사, 면담, 목회를 돕는 다른 직분과 달리 아주 특별히 소명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인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도전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을 주님이 진정으로 내가 이 거룩한 목회의 사역에 부르셨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목회의 소명이라는 말로 얼버무리지 마시고 내가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느끼는가를 검증해보시면 압니다. 설교자의 소명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요? 설교하는 일들을 여러분들로부터 못하도록 환경이나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면 살아있을 존재 가치를 느끼지 않는 것, 그것이 설교자의 소명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게 있어서 허락되지 않는다면 내가 이 땅에 살아있을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그것이 설교자로서의 소명입니다. 선교의 소명이 무엇일까요? 선교를 위해서 내가 일을 할 수 없다면 살아있을 미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이 소명입니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과 차별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경험을 넘어서야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뛰어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이런 정도의 차원은 뛰어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헌신하는 일군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평신도 가운데도 헌신하는 일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내게 주셨고 나는 이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는 살수 없노라고 하는 분명한 신적인 소명을 느끼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무를 제외해놓고는 도무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이 땅에서의 생명을 생각할 수 없는 필연적인 소명감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의 사명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같이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이것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고난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헌신의 각오도 되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자의 소명에 대해서 챨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당신들이 설교자로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고 소명을 느끼십니까? 피하십시오. 도망 가버리십시오. 도망칠 수 있는 곳까지 도망가십시오.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의 소명은 소명이 아닙니다.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의 소명에 붙잡힌 그 사람,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은 그 사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손에 사로잡혀서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의 소명을 받은 사람이오, 이 사람은 비로소 목회 사역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은 있으나 외치는 자 많건만 생명수는 말랐도다. 강단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것을 인하여 교회에 영혼들이 애통하고 모든 피조물이 느낍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능력 있게 선포될 때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은 영혼들과 함께 감격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사람들은 온 우주를 흐느끼게도 만들고 기쁨으로 뛰놀게도 만드는 위대한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오늘날 우리들은 교회 역사 속에서 뒤틀린 기독교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비정상입니다. 뒤틀릴 때로 뒤틀려버렸습니다. 교회가 가진 비극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없는 설교가 신앙과 교회 생활에 증진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설교를 그렇게 중요시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영광스러운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모든 모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복음서를 열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병자를 고치는 모습입니까?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첫 번째 장을 여셨을 때 무슨 사역으로 시작하셨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선포를 시작했습니다.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하사 유대광야에 등장하게 되었을 때 무엇으로 그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까? 외치는 설교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헌신된 전도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은 단지 그리스도를 피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외치며 선포하는 설교의 삶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지나가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고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깃발이 드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을 회복하고 이름이 존귀히 받던 개혁시대에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강단을 통해 주어지는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강단에서 하나님의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은 3-4시간씩 이어졌습니다. 설교는 2시간 반 3시간씩 했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인파가 예배당으로 줄을 이었습니다. 예배에서 설교에 대한 위치가 존중히 여기던 시대는 바로 부흥의 능력이 역사하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든 문제는 이 강단에 있습니다. 나의 이 말을 믿으십시오. 이 확신을 여러분들이 갖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설교를 통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강단에서 생명수가 터지고 이 물이 어두우의 세력들을 휩쓰는 날 세상에는 여호와의 깃발이 세워지고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삽시간에 될 것입니다. 그 소망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뭐 얼마 안 되니 다 잘라버리고 요점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복음을 전파하시니까 이쪽저쪽에서 대들었습니다. 주님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기 위해서 포도원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 포도원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포도원 주인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주인이 소작을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작료를 받으러 간 종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누가 보든지 명백한 비유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작민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보내어진 종들은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내는 장면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이 비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설교자의 모습을 읽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구약의 선지자가 오늘날의 설교자와 모델이 될 수 있겠는가. 아주 분명합니다.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볼 때 선지자들의 그 직분은 어떤 점에서 신약시대의 설교자들, 우리가 설교자가 선지자의 후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라고 한다면 몇 가지 점에서 본다면 첫째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설교자들과 동일합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을 때 세상을 변형시킨 수단은 칼과 무력이나 수단이나 조직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선지자들 중에 누가 때를 지어 다니면서 큰 칼 옆에 차고 예언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무슨 행정적인 단체를 만들어서 기획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선지자를 세상으로 보내실 때 주께서 주신 것은 창과 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설교자들도 똑같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동일합니다. 또 하나는 이것입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증거의 직분은 사도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계승이 되었다고 우리는 신학적인 맥락에서 보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선포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고 그러므로 그들을 예수 믿게 하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일들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이 어디로 보냄을 받았습니까?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로 보냄을 받았습니까?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7년을 마치고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세상으로 간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혹시 이런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잘 준비된 교회에 간다는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의 기능과 모든 사역은 교회에 집중되어있고 어쩌다가 몇 사람씩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사역의 목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선지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고 사도들을 세상으로 부르셨습니다. 설교하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금 말씀드린 이런 나열된 생각들, 준비된 교회 속으로 가는 것, 뭐 벌써 신학교 졸업한지가 한참 되었으니까 개중에는 개척교회 간판 몇 번씩 뜯었다 내렸다 항복 깃발 세운 사람도 몇 있고 천명 모이는 교회의 당회장도 있습니다. 대게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단독 목회를 안 하니까 모르는데 엄청 부러운 모양입니다. 잠깐 만나서 얘기하는데 아무개는 천명 모이는 교회 당회장으로 갔다고 다섯 번이나 이야기를 합니다. 자존심이 드는가 봅니다. 잘 마음 밭이 좋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여력이 남으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와 주기를 기대하고 그런 일을 위해서 노력하는 어디까지나 두발은 교회 안에 있는 이런 일터가 여러분들의 소명에 일터라고 생각하시면 신약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은 모든 족속에게로 가라. 사도가 그러면 선교사들만이 사도의 후예입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으로 보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다 무슨 설교를 합니까? 세상이 우리말을 들어주겠습니까? 세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엄청나게 커보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문제는 설교가 세상도 이 설교를 들어야 할 세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영광스러운 부흥의 물결과 영적인 각성의 물결이 대륙과 그리고 우주를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성도들보다 불신자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불신자들 속에서도 높아졌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설교자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설교를 믿지 않으니까 자기의 소명의 광대함은 사라졌습니다. 지극히 협소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정말로 소명 받지 않은 사람이면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는 것은 아주 소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설교자는 분명하게 선지자가 이 설교자들의 그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소명을 받았던 선지자들의 영광스러운 모습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선지자는 소수였습니다. 시대는 많이 흘러갔고 수많은 일들이 교회사 속에 일어났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선포함으로 세상에는 변화를 가져왔던 설교자들은 똑같이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입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주님이 우리를 횟필드처럼 쓰실지 김일도 목사님처럼 쓰실지 아니면 빌립 브로스처럼 쓰실지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소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면 자기에게 결핍된 것을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첫째로 이 비유는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을 가르쳐줍니다. 포도원을 만들어서 소작인들에게 주고 간 주인은 인정이 많고 아주자상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그저 포도원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다고 되어있지만 마태복음는 포도원을 만들고 또 짐승들이 헤칠까봐 산울로 두르고 포도를 따면 또 즙도 짜라고 구유도 만들고 도둑이 들어오면 살피라고 망대도 지어주고 풀 서비스를 해주고 갔습니다. 완전히 생활하기만 하면 될 그런 완벽한 포도원을 만들어주시고 떠났습니다. 때가 이르자 포도원 소출 중 소작료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내었습니다. 아무 때가 아니라 열매를 거둘만한 때가 되자 주님은 보내셨던 것입니다. 포도원이 무엇인가?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랐더니 포악이요,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불을 지름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교훈하고 싶으셨던 것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 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그 관계 속에서의 설교자의 위치였던 것입니다.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난 백성, 타락하고 신앙을 버린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바로 농부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더 확대해서 보면 구원의 모든 기회를 부여받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설교자를 보내신 것은 소출을 얻기 위한 것인데 그 소출은 공평과 의로움입니다. 공평과 의로움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로 돌려드려야 할 몫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그 시대는 선지자를 보냈고 지금은 설교자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설교자와 오늘 본문을 증거하는 설교자가 얼마나 다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은 모든 설교자의 설교 속에서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비전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몇 만 명을 전도하고 죽는 것, 그것도 비전일 수 없습니다. 저는 감히 말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서 슬피 우는 마음이 있다면 드리워지지 못하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는 통곡하는 슬픔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비전은 영혼의 구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이 우리의 궁극적인 비전이 아니라면 교회를 짓는 일, 성도들의 수가 늘어나는 일에 엄청난 선교 계획을 만들어놓는 일 이런 일이 비전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유일무일한 비전은 하나님의 위가 이 땅에 비같이 내리고 패역한 이 시대에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가득하게 덮어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일어나는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비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이 바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런 의로운 삶을 이루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피도 눈물도 없이 심판만을 선고하는 비정한 설교자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하고도 신자들로 하여금 준엄하신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잊게 하는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부흥의 시대에 모든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혹시 이 설교를 인하여 주의 의로운 성품에 대한 오해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설교자에게는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이 많으신 분이지만 이 세상에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저버릴 때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고통이 설교자에게는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유학입니까, 학위입니까, 당회장입니까, 큰 좋은 교회입니까, 능력과 권세를 한 손에 쥐고 싶으십니까? 버리십시오. 이것들은 우리의 비전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내일은 역사에 기록이 되든지 말든지 데이비드 브레이드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어디에 잇든지 또 어디서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오직 말씀의 사역을 위하여 주님의 의로움이 모든 땅에 편만하게 나타나고 죄인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나라의 깃발에 세워져서 척박한 땅위에 주님을 높이는 경배의 찬양이 메아리치는 그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비유는 설교자의 고난을 보여줍니다. (?)종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심히 때려서 보냈고 둘째는 심히 얻어맞고 능욕을 당하고 돌아갔습니다. 셋째는 상하게 하였고 내어 쫓음을 당했다고 되어있습니다만 마태복음에서는 죽임 당하는 종과 더 많은 능욕 받는 종들이 나옵니다. 마지막에는 죽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약의 설교자들이 선지자들 대한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때리기만 했는데 그 다음에는 모욕까지 주었고 그 다음에는 온 몸이 피투성이 되도록 상처를 입히고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급기야는 죽게까지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정말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고민했습니다. 하박국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었습니다. 이 종의 모습이 바로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나의 모습이라고는 깨닫게 되었는데 내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산다면, 그럼 나는 뭔가 하는 것입니다. 자, 포도원의 백성들이 끝까지 주님을 순종치 않음으로 마지막에 가루가 되어버리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좀 안되었기는 했지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믿지 않았으니까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심판하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그런데 종들은 뭡니까? 종은 뭘 하는 사람입니까? 섬기는 사람입니다. 평생 주님을 섬겨왔습니다. 앞으로 섬길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종들을 사랑하지 않았겠습니까. 종이 주인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교제도 나눈 과거가 있습니다. 즐겁게 주인의 상에서 주는 음식을 먹으며 교제하였던 기억도 있습니다. 종은 주인을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그는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순종했습니다. 소작료를 받아오라. 갔습니다. 얻어맞고 부상병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다음번에 돌아오니까 그 다음에 네가 가라. 얻어맞고 왔는데 또 가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전투복장의 모습을 해서라도 보내야 되지 않습니까. 가면 얻어맞을 것이 뻔한데. 그래도 가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가나요? 너는 가서 얘기만 해라. 무슨 일로? 소작료를 내라고 해라. 그 다음에는 모욕까지 받고 왔습니다. 울면서 말합니다. 주인님, 주인님 말도 마십시오. 소작료는커녕 대문 앞에서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나와 주인님을 한꺼번에 욕하고 내어 쫓아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그럼 네가 가라. 전에처럼 갔는데 난 어떻게 갑니까? 너도 가서 말만 하라. 갔습니다. 시체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 다음에 네가 가라. 종은 뭡니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죽어가야 합니다. 선지자들 중에 누가 목에 들어오는 칼날을 성난다고 끊어버린 자가 있습니까? 죽일 때 죽임을 당하고 톱으로 켤 때 당했습니다. 불태울 때 불사름을 당했고 돌로 칠 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여전히 이해가 안 되고 있었는데 하루가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습니다. 마음에 섬광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빛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에 갈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님은 큰 음성으로 본문을 통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전하는 설교자, 하나님 편에 있는 설교자는 반드시 핍박과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핍박과 고난을 받는다고 제가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서입니다. 종들이 만약에 가서 여러분, 제가 주인이 보내서 왔는데요, 내가 주인에게 가서 여러분들의 편을 들어주려고 하는데 여러분 제가 도와드릴 것이 있을까요? 그렇게 말했더라면 포도원에서 엄청난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날은 당당히 말했습니다. 어찌된 일인가 때가 되었는데 소작료를 안 내는가. 주인이 분노하시는 것처럼 똑같은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돌을 던졌고 때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목회의 소명을 말하면서 고난이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까? 교인들이 속을 썩이는 것, 그것을 화낼 수 없으니까 참아야 하는 것, 또한 교회 건축을 하려고 했는데 교인들이 헌금을 안 내어서 몸부림치다가 위장병이 나는 것,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것, 지금 웃으면서 들을 이야기 같습니까? 저도 이렇게 얘기하지만 그 화두의 주인공인 목사님들에게는 피눈물을 흘리는 이야기입니다. 고난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입니다. 새벽마다 새벽잠을 못자는 새벽기도를 해야지 되는 것, 교인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처럼 생각해야지 되는 것, 다 고난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도전합니다. 그런 것 말고 진짜 고난은 말씀을 외치는 그것을 인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의 고난 중에 얼마나 많은 부분이 자기의 입으로 선포되는 이 말씀으로 인해서 당하는 고난인가? 선지자들의 고난이 바로 이런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고난이 이런 고난이었습니다. 제자들의 고난이 바로 이런 고난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말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인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하심에 여김을 받고 기뻐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씨름하는 고난이 바로 그런 고난이었습니다. 기를라보나 사보나의 고난이 바로 그런 고난이었고 피를 흘리며 죽어간 (?)고난이 바로 그런 고난이었습니다. 루터의 고난이 바로 그런 고난이었고 칼빈의 고난이 바로 그런 고난이었습니다. 말씀의 선포를 위해 당했던 그런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짓는 것을 인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고난이라고 생각도 안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그 시대를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이 비장한 소명 앞에 서서 말씀을 외칠 때 당하게 되는 이 고난,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설교자로서의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척도에 따라서 그 시대의 영광스러움에 비유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많은 설교자들이 비명에 죽어가고 말씀의 선포로 인하여 화영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다음 세대는 복음의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주의 영광 잠시 세상 가득히 이전되는 황홀한 교회사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런 것이 꼭 고난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오늘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 보다 높은 하나님의 영광에 서려고 하는 여러분들이라면 보다 높은 수준에 고난을 사모하고 기대하시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거룩한 하나님 앞에 무릎을 떨면서 서는 것보다는 설교자가 위로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역사는 전합니다. 설교자가 고난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의로움을 선포하지 않을 때 악령이 찾아왔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고리를 짜내어 호화롭고 방탕한 삶을 연연하던 러시아의 귀족들에게 말씀으로 사는가 먼저 설교하고 학대받는 농민에게는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준엄한 설교를 했습니다. 재정 러시아의 말입니다. 그들의 말로는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두려운 경고를 줍니다. 동토의 땅 러시아에 1917년 2월과 10월 두 번에 볼시기피 대 혁명이 발생했을 때 귀족 지주들과 함께 제일 먼저 농민들의 도끼와 낫에 무참히 학살된 사람들이 바로 이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설교자가 그 시대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외치지 않을 때 교회는 암흑이 깃들고 세상에는 어두움이 찾아왔고 역사는 어두움 속에 버려졌습니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역사 앞에 책임을 지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강한 정치자의 편에 서서도 안 되고 연약한 민중의 편에 서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는 설교자의 편이 없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죄악 된 삶에 마주서서 두려움 없이 외치다가 죽을 수 있는 하나님의 열정으로 무장되어야 됩니다. 이것이 소명의 핵심입니다. 두 번째 또 하나 아까 고민은 무엇인가? 하나의 해결을 만난 것이 있습니다. 그럼 내 종은 그렇게 죽어갔는데 하나님은(?)없으신가? 왜 종들이 그렇게 시체로 돌아왔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무방비상태로 보내시는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매 맞고 능욕 받고 상해서 돌아오는 과정을 모두 보시면서도 계속해서 종들을 보내시는 포도원의 모습 속에서 뭘 읽었습니까? 깨닫게 된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종들을 사랑하시지만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뜻입니다. 저는 역설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설교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를 기꺼이 죽게 내버려 두시면서도 우리의 후배를 계속 보내시고 선지자들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두시면서도 계속해서 보내시고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그들을 위해 보내주셨으니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받는 교훈은 설교자는 죽어도 설교는 남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은 끝까지 하나님의 선포를 거절하는 백성들이 당할 시련을 보여줍니다. 뭐라고 했는가 하면 무릇 이 돌이 위에 떨어진 자는 깨어지겠고 돌들이 이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말입니다. 앞부분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 와서 부딪히고 오해하던 사람들이 받는 심판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믿지 않는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명, 세 명 더 많은 종들이 주인의 뜻을 전하고 갔습니다. 비명에 죽어가기까지 그들은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죽어가고 아무 일도 못한 것 같지만 그들은 죽어도 설교는 허공중에 떠돌다가 마지막에 그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서 심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양단간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일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교훈을 여기서 받습니다. 설교자는 배척을 받아 사라져도 그 설교는 영원히 남아서 그것을 들은 자들 위에 말씀을 들은 책임을 묻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그 설교를 들었던 책임을 추궁을 받는다면 설교를 했던 사람들이 설교룰 인하여 하나님 앞에 두려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제가 있던 대신 대학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일반학과 학생들까지 하니까 한 천명씩 하루에 예배를 드리는데 돛대기 시장입니다. 기회가 있을 적마다(?)했습니다. 설교 시간이 끝나면 반드시 덧붙였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믿건 안 믿건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마음을 다하여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이 학교를 떠나고 나면 여러분과 헤어져도 이 설교는 영원히 남아서 믿지 않는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설교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 인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말씀의 선포, 이것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러운 사역입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이 땅에 살아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일을 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나의 생명을 거두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아무도 듣지 않는 흑암 속에서 (?)외치고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리지만 결국은 내가 외치는 이 강단의 선포를 인해서 굳은 심령들이 기경되고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폭포수처럼 내리는 영광스런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그 한 가닥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한 인간으로서는 모든 성도와 다름이 없는 연약한 한 마리의 양입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은 설교단상에 오를 적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저는 오늘 양들에게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로서 단에 올라가기가 그러나 하나님, 저도 설교자이기 이전에 저도 이들과 똑같이 싸매어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용서가 필요한 한 마리의 양인 것을 주님 기억해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여러분,(?)무슨 위로를 받았습니까? 그 속에서 무슨 동지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믿지 마십시오. (?) 우리가 끝까지 사랑하다 죽어야 할 대상이지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의지해야 할 대상은 아무도 아닙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의 붙드심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위로 올려 지는 기도와 위로부터 땅으로 내려지는 하나님의 은총, 지성소속에서 드려지는 이 기도로 말미암아서 말씀에 붙잡힌 진리로 말미암아서 외치는 일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불구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그 눈물을 닦고 말씀을 들고 설 때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강철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비로소 이 어두운 시대에 교회라는 배를 흑암이 가득 찬 폭풍으로 호령하고 그리고 뒤웅치는 파도를 넘어서 천국이라는 항구로 배를 인도하여 갈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인 여러분들이여 나는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의 소명이 진실한지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소명이 피할 수 없는 소명이라면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이외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설교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하늘 위에 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 중보기도의 가장 커다란 제목은 우리의 소명이 진실한가. 주께서 여러분들을 소명으로 부르셨습니다. 시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주님의 외치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