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울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녹취자: 원수연
오늘 이 편지는 54년에서 56년경 네로의 박해시대에 베드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믿어집니다. 특히 이 편지는 로마에서 쓴 것으로 여겨지는데 5장 13절에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라고 한 구절로 미루어 그렇게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는 박해의 분위기속에서 실제로 고난 받고 있는 교회를 격려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본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뼈저린 기억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편지를 받는 이 수신자들이 이 편지를 통해서 커다란 격려를 받고 소망 중에 주를 부인하지 않고 인내하기를 바랐습니다.
1장의 주제는 소망입니다. 그 소망도 산 소망입니다. 실제로 살아서 운동력 있게 역사하는 그 소망 때문에 이런 핍박과 고난의 때에 예수를 든든히 붙들도록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이 실려 있는 제 2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1장의 소망과 2장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제를 연결하고 있는 연결점이 바로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이미 사도행전 4장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돌’이며 또 ‘모퉁잇돌’이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돌’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사도행전에서 성령강림 초창기에 사도들이 선포한 메시지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시대의 건축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필요하고 설계도가 제작된 다음에는 시공이 이루어지는데 기초를 파고 한쪽에서 벽이 지어지고 또 한쪽에서 벽이 지어져서 마지막 이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만나는 두 개의 벽이 하나의 돌멩이 위에 놓이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모퉁잇돌이라고 합니다. 즉 다른 방향으로 달려오던 두 개의 벽이 모퉁잇돌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는 건축학적인 그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신약의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각각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관과 인생관이 다르고 사상과 신앙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두 종류의 사람들이 만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형성해가는 것입니다. 많은 다른 점들이 있지만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사역을 통해서 그분께 붙어있음으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 모퉁잇돌은 단지 두 부류의 사람들을 연결한 연결돌이기 보다는 생명을 주는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방인들이든지 혹은 유대인이든지 간에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주어서 그들을 사랑하게 하고 또 살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는 그런 모습이 바로 교회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에 의하면 이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졌지만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접붙여져서 모든 불완전한 사람들이 각자각자 온전해감으로써 그 개인적인 성화의 발전이 그리스도께 봉헌되어 교회 전체를 온전하게 하는 그림이 바로 에베소서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온전케 되어가는 모습은 충만한 영적인 생명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차가운 지식과 이론이 아니라 그 차가운 지식과 이론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청교도나 혹은 개혁주의자들의 어떤 특정한 사상을 섭취하고 그러한 견해를 따르지 않는 모든 것은 이단인 것처럼 생각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견고히 하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대적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네오퓨리타니즘(neopuritanism)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풍조인데 이런 것들은 진정으로 청교도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도 아니고 개혁자들의 유산들을 물려받는 것도 아닙니다. 청교도와 개혁주의의 놀라운 유산은 그 무한하고 충만한 생명의 능력에 있습니다. 구원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받는 그 순간 중생을 통해서 그 마음속에 예전에 없던 생명의 원리가 심겨집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원리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그 충만한 사랑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로마서 8장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진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충만한 생명과 성령의 법은 원리적으로는 불변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진리와 함께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면 그 생명이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끊임없이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은혜를 살리는 삶을 살아가면 그 생명이 충만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생명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뻗어나가며 이 생명과 사랑을 전수해줍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만약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고 진리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불순종의 삶을 살고 정욕을 좇는 삶을 산다면 그들은 다시 그 죄로 울창해진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청교도들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탄식을 비중생자가 아니라 중생자의 탄식으로 보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의롭다 여김을 받아 우리의 구원이 결코 되물릴 수 없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구원이 정말 진실한 구원이라면 끊임없이 우리를 이렇게 구원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계획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행복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이 세계의 인류도 우리를 통해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의 움직일 수 없는 지대한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은혜, grace’라고 부릅니다. 원래 이 말은 ‘공짜’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무한한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에는 분명하게 거기에는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베푸시는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따라서 살 때 은혜는 정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신자의 소명은 바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살아있게 했으니 이렇게 살아있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중요한 건 우리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여서 이 세상에 살려두실 때에 하나님이 꿈꾸시는, 그 그리는 꿈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 없이 성취하려던 자신의 인생의 욕망을 이번에는 예수의 덕을 입어서 그것을 이루어보려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계획이 아닙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자신의 비전과 희망, 자신의 욕망과 이 세상에서의 욕심을 따라 살던 것은 모두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옛사람을 벗어버린 새사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사업에 성공하고 승리하는 사람이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패배하는 사람이 있어야하고 우리들 중 다수는 그 승리한 사람들보다는 패배한 사람들 편에 있는 비율들이 훨씬 많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면 다니엘과 같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자녀들 말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녀 중에 전교 1등하는 사람 한번 손 들어보십시오. 아마 한두 명일 것입니다. 아니면 서너 명 되겠지요. 많은 아이들이 그 밑에 있기 때문에 걔가 1등이 된 것입니다. 안 되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빙자한 엘리트주의도 거절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식을 낳으면 그렇게 되기를 꿈꿉니다. 우리 아이들 보고도 그랬습니다. “누가 너희들 보고 1, 2등을 하랬느냐? 3등만 하라니까.” 맘대로 안 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렇게 사업을 해서 큰 부자가 되어서 신문에다가 연재소설을 쓰는 사람처럼 안 되도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사업에서 성공하고 공부를 잘해서 유명한 학자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지 않아도 그래도 우리는 어차피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고 반에서 중간 이하밖에 못하는 우리 자식들도 어차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인생은 끝난 것인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그냥 여기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혼이 변화되고 그런 변화된 영혼 속에서 예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예전에는 자신을 이 온 우주의 중심으로 알고 살았지만 자기가 이 온 우주 안에서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최고의 가치가 자신의 행복이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창조되었고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 사람으로서 매일매일 주님을 사랑하며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찬양)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을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그가 비록 잡지에 인터뷰를 받을만한 어마어마한 사업을 일구지 못하고 동네에서 자그만 편의점을 하면서 겨우겨우 먹고 살아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 계획을 충분히 성취해드리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전교 1, 2등, 어차피 1, 2등은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해도 그 아이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신자의 정체에 대해서 몇 가지로 제시합니다. 그 중에 첫 번째만 오늘 말씀드리려고 여기 섰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라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게노스 에크레크톤’이라고 말합니다. 직역을 하면 그냥 ‘선택받은 족속’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족속이라고 번역된 ‘게노스’라고 하는 단어는 원래 ‘한 조상으로부터 한 핏줄을 받아 태어난 자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고 ‘민족이나 족속, 혹은 한 왕의 통치를 받아 동일한 왕권의 지배 아래 있거나 혹은 같은 문화를 향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동아리로 묶어서 ‘게노스’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어떤 왕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특정한 족속들이 있듯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보편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인 신자들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이것은 택하신 족속이 되라든지, 택하신 족속으로서 무슨 긍지를 가지라든지, 이런 이야기라기보다는 이미 있는 사실, fact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 세상도 인정하다시피, 너희는 그냥 똑같은 한 세상에 로마제국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다.” 그렇게 편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들도 있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섞여있지만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 시대의 사람들을 택하신 족속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물론 사람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못됐다, 부도덕하다, 기독교가 아니라 개독교다.”라고 욕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안 믿을 필요도 없고 다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 공정하게 우리의 가슴에 손을 얹고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는 한 시민으로서, 우리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어떤 점에서 예수 안 믿는 사람과는 다른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주일날 교회로 모이는 사람이요.” 아니면 “성경 찬송을 들고 주일이면 집을 나서는 사람이요.” 아니면 “교회의 여러 가지 봉사활동이나 아니면 무슨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이요.” 우리가 그렇게만 말하면 너무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조사를 해봤습니다. 성경 이외의 문헌가운데 ‘베드로의 설교’라고 하는 곳에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인상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제 3의 족속’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 당시에 사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유대인들이 보는 생각이었겠죠. 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철학, 사상, 모든 면에서 달랐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과 그리고 인생관 자체가 달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 3의 족속’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또 다른 것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폴리갑의 순교’라고 하는 작품 속에는 당시 기독교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족속들이 있습니다.” ‘영웅전’을 쓴 사람으로 유명한 플루타크는 ‘도덕론(Moralia)’이라는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이루어지는 법적인 판결을 거룩한, 혹은 신성한 판결이라고 불렀습니다. 핍박을 받아서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신성한 법정의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유세비우스의 ‘멜리토(Melito)’라고 하는 작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지금 왜 이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즉, 유대인들은 유일신 야훼와 율법, 모세를 중심으로 그 가르침에 따라 세계를 바라보고 인생을 바라보고 역사를 바라보고 인간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 사상을 가지고 체계화된 이념 속에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대로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삽니다. 특히 이 로마시대는 그리스의 문학과 철학이 부흥을 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지성을 갖춘 주전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그 탁월한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따라서 그들은 이 세계와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물으며 어떤 통일적인 사상을 갖고자 하였고 그것이 그들의 삶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위대한 인물이 쓴 작품 중에 ‘보편교회의 기독교인과 마니교의 신자들의 생활의 방식’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당시 많은 지성인들에게 환심을 사던, 유행하던, 마니교라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과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했는데 그것은 삶의 양식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다른 양식의 삶을 가져온 것은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 ‘족속’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박수나 치고 불 받으러 모여 다니면서 기도회나 했기 때문에 다른 족속이 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과도 다르고 헬라인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과도 다른, 두 종류의 삶의 방식이 눈에 익숙해졌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삶의 방식이 예수의 가르침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에 멸시하는 의미에서 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책을 읽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한 학생이 친척집에 잠깐 놀러왔습니다. 이쪽 동네였던 것 같아요. 경상도. 그 친척이 “가는 길에 여기 유명한 절이 있으니까 한번 구경해봐라.” 그 절이 어디인지는 안 나왔는데 하여튼 이 학생이 절을 구경을 하다가 툇마루에 앉았답니다. 그랬더니 저기서 웬 젊은 스님 한분이 오더니 툇마루 옆에 같이 걸터앉았습니다. 그러더니 “넌 누구냐?” 그러더랍니다. “전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고등학생인데 친척집에 놀러왔다가 이 절이 그렇게 유명한 절이라고 그래서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 스님이 “얘야, 너는 왜 사니?” 그러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대화를 하면서 선문답을 했습니다. 그러고 이 학생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올라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부모님께 무릎을 꿇고 출가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이 집은 대대로 유교를 믿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너무 황당한 겁니다. “네가 지금 이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인데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다 집어치우고 중이 되겠다고 하느냐?” 마침 그 집안에 사촌형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일본불교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부모님을 설득해서 “이 아이가 한 인간으로서 이제 자각이 생겨서 자기 길을 가려고 하니 놓아주십시오.” 그래서 이 아이가 스님이 됐습니다. 그것을 60년 후에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자기가 그 절간 툇마루에 앉았을 때 옆에 와서 “얘야, 인생이 무엇이냐?” 하고 물어보았던 그 젊은 스님이 바로 돌아가신 성철스님이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인가? 한 아이가 그래도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고 미래의 꿈도 많을 텐데 도대체 그 젊은 스님이 앉아서 한 시간 반 동안 잠깐 이야기한 것에 인생 전체가 뒤흔들리면서 속세를 등지고 스님의 길을 걸어가게 한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 분이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 같았기 때문에 아우라를 느꼈을까요? 아니죠. 그것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던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존재의 울림’. 그 사람의 지위나 학식이 아니라 그 사람이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울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돌아보게 만들고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을 이 세상에 두신 한 이유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는 않았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되었을 때, 정확하게 인생을 산 지 14년 3개월이 되던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것은 집이 가난해서도 아니고, 물론 가난했지만, 뭐 고민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고민이 있었죠. 그렇지만 그렇게 통곡하면서 울었을 때 그것은 뭐냐면 질문이 있어서 운 것입니다. 그 질문이 뭐냐면 “난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인생을 살아야 하나?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리고 이 세계는 무엇인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나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수많은 선생님들이 나를 가르쳤지만 난 이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교회에 가서 내 눈에 비친 많은 사람들은 생각이 좀 없어보였습니다. 그리고 열네 살 짜리 나 만큼도 인생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시름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또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이 사람은 이 길로 저 사람은 저 길로 각자 걸어가기 때문에 무엇인가 시원한 답이 없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서웠습니다. 사는 게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는 바로 그런 열네 살 먹은 아이의 입술이 새파래지는 질문에 대해서 최고의 답을 줄 수 있는 종교입니다.
결국 그런 모든 궁극적인 인간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 그 답을 발견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그 답을 발견했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이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이 가져다주는 행복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구별은 존재론적인 특성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방나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별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부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학생이 나에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세계사책에는 이스라엘이 두 줄밖에 안 나오는데 교회에서는 왜 이렇게 계속 이스라엘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합니까?”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라의 크기, 제도, 권력, 힘, 이런 것에 달려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말고 그 손톱만한 그 나라가 아니라 중국이나 로마, 몽골 같은 나라를 선택하셔야지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은 그러한 어마어마한 제국들이 이 땅에 존재했던 목적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구원의 계시를 전달해주는 방법은 그런 크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크게, 많이,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큰 권력을 가지고, 힘을 쓰고, 이런 것들을 사랑하는 가치는 바벨론의 가치이지 예루살렘의 가치가 아닙니다.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는 이 세상 끝날 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말로 선포되는 이 복음의 가치는 세상 끝날 까지 지속됩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은 우리가 숙명처럼 짊어져야 할 사명입니다. 그러나 말에 의해서 선포되는 이 선포가 웅장한 울림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각자각자가 존재적인 선포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두 가지 때문입니다. 사상이 다른 것입니다. 사고하는 체계,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어떤 사물을 볼 때 판단하는 틀 자체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살아내는 삶의 힘, 이것이 바로 삶의 방식을 규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거룩한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구별들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지배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은혜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존재하게 될 때 그 때에 우리는 비록 낮은 지위에 있어도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낮은 지위를 깔볼 수 없게 하는 그 어떤 아우라가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서 풍겨나는 것입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왔습니다. 불신자들을 상대로 하는 잡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인터뷰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 그랬더니 자기네들이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종교 이렇게 도는데 종교차례가 됐고, 가톨릭, 불교, 돌다가 이제 개신교 차례가 됐는데 목사님을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선교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 한 시간 반을 두 사람하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예수를 왜 믿는 것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가지고 진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인터뷰가 다 끝난 다음에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나를 황당하게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개신교 목사님들을 많이 인터뷰했지만 목사님은 다르십니다.” “뭐가요?”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고 스님 같으십니다.” 그 때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제 머릿속을 선명하게 스쳐가는 느낌이 나를 불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그 불신자 눈에도 스님은 철학자처럼 보였고 목사는 사업가처럼 보인 겁니다. 그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을 바쳐서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의 이야기를 반복해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몸 속에 흐르는 피 중 예수를 위해 쏟아지기를 싫어하는 피는 모두 뽑아주시옵소서. 내 몸의 살 중 예수를 위해 찢어지기를 싫어하는 모든 살은 도려가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죽도록 건강을 염려하면서 계속 몸을 사리는 사람들에게 “죽도록 주님을 위해 헌신하십시오. 그러다 진짜 죽게 되면 살려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살려주시면 다시 죽도록 일하십시오.” 그는 실제로 자신의 설교처럼 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끊임없는 어떤 일과 비즈니스에 종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첩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새롭게 경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회심은 반드시 신학적인 회심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이지 않은 회심은 회개가 아닙니다. 희랍어에서 ‘회개하다’라는 말을 두 개로 표현하는데 ‘메타노이아’라는 단어와 ‘메타멜로마이’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는 진실로 생각이 바뀌면서 회개가 어떤 신학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메타노’는 원래 ‘회개하다’라는 말보다도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자체가 회개를 통해서 바뀌는 것입니다. ‘메타멜로마이’는 후회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그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체험하고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기 이전에 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없는 새로운 체계, 생각의 틀이 바뀐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왜 그렇게 위대한 분이고 예수가 우리의 삶과 인간의 역사에서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마치 화인을 맞은 것처럼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우리의 가슴이 쳐지고 불에 지져져서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뀐 사상과 바뀐 인생관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를 닮아가고 그를 사랑하고 그분 앞에서 참인간으로 사는 진실한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사람 되게 하시려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 누군가는 묻겠죠. “우린 사람 아닙니까?”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 아닌 것들이 그 속에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것이 굉장히 많고 신자들은 그것들이 마음에 있고 은혜에서 떨어지면 또 많아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화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깨어지고 변화되면서 예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사랑하던 예전의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렇게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셔서 아직 여기에 살아있게 만드시는 이유입니다.
말씀을 맺자면 이것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산제사가 되도록 그렇게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되고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 속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빚어져갈 때 우리는 우리가 특별히 그렇게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울림이 되는 그런 그리스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열매를 거두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