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학교 교역자 특강
녹취지: 김경애
Ⅰ. 들어가는 말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여러분이 부교역자로 생활하는 이 기간이 앞으로 목회를 어떻게 잘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시간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신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목회의 바람직한 결과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받는 것이 중요하고 대부분 생각할 때에 자신들은 이제 상당히 많이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비유를 하자면 앞바다와 먼 바다는 완전히 다른 바다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사역을 해야 합니다. 내 제자 중에 마로도스가 있었는데 선장이었는데 5만 톤짜리 배를 몰았는데 태평양에서 최고로 만난 파도가 17미터 파도였답니다. 어마어마한 파도인데 상상도 할 수 없는 파도입니다. 요즘은 기상학이 발달해서 다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을 거의 안 만난다는데 그런데 간혹 가다가 게릴라성 폭풍을 만나면 예비치 않게 만나게 되는데 굉장히 긴장하고 오만 톤의 배라고 10층의 파도를 만나면 가랑잎처럼 흔들린답니다. 그런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그냥 이렇게 물장구치면서 노는 바다만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위를 돌아보면 목회자로서 얼마나 잘 훈련되었느냐는 것이 결정적으로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같이 한 10년을 데리고 하니까 뱃속까지 다 압니다. 내가 항상 나갈 때 아무개 목사가 나가는데 5년 내에 몇 명까지 목회할 수 있느냐고 알아맞혀보자고 하면 그러면 나는 거의 다 답을 내놓습니다. 내 예상이 빗나간 적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교역자중의 하나가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그래서 ‘하지마라.’ ‘왜요?’ ‘안 된다.’ ‘안되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이야기하는데 내가 보증한다. 너는 안 된다. 절대 너를 통해서는 교회가 안 세워진다.’ 지금도 서너 명이 모입니다. 3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되는 것은 되는 것이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아주 정직합니다. 그래서 들어간 만큼 나오는 것입니다.
Ⅱ. 목회자로서의 훈련
A. 영적 성장
그래서 이제 그러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해나가야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굉장히 많이 펼쳐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지금 내가 이번 세미나에서는 두 가지만 이야기하려고합니다. 첫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영적 성장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추구함입니다. 이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적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따가 저녁을 먹고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영적성장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입니다. 사역자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아주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그러는데 영적 성장이라는 것은 사역의 기술의 성장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영적성장은 한사람의 사역자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1. 지식의 성장
그 영적성장의 요소를 성경이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지식의 성장이고 두 번째는 은혜의 성장입니다. 지식의 성장이라고 그러는데 여러분 또래에서 굉장히 혼란을 느끼는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대부분 나와 같이 있으면 확실히 도전받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공부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자극을 받는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 상하는 것이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금방 또 자존감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별로 염려를 안 하는데 그런데 너무 잘못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도전을 하면 여러분이 평신도라면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사역자로 사역을 시작했다고 하는 이 현실을 인정하면서 지적 성장을 이야기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항상 어떤 것을 느끼느냐하면 그런 도전을 받은 다음에는 내가 저 목사님보다 책도 더 많이 읽어야하고, 내가 동료들보다 더 많이 알아야하고, 지식을 쌓아야하겠다는 이런 식의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영적성장의 요소는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영적 성장은 아닙니다.
방금 생각난 비유인데 이런 것입니다. 커다란 가마솥이 있습니다. 물을 설설 끊여서 100명분의 닭국을 끊이는 것이 미션입니다. 그러면 장작이 없이는 그 정도의 불을 지피려면 지푸라기로는 안 되고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을 끊여야하니까 커다란 장작들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장작은 물을 끊이는 미션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재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꼭 있어야 될 것은 장작불이지 장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장작이 없이는 장작불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장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고를 가지고 접근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잘 안합니다. 거기에 많이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엊그제 임목사가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많이 성숙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임목사가 공부에 상당히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공부를 할 수 없으니까 애가 넷입니다. 여자가 다섯입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유학 갔다 돌아올 나이가 되었는데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공부는 상당히 많이 한 것 같은데 판단력은 자기가 훨씬 더 정확하다는 것이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목회나 이런 사회현실이나 성경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판단 그것은 공부를 해서 배워온 지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Wisdom 지혜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성장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번에 내가 트리니티에 가서 논문을 쓰는데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풀세트를 읽을 때 사람들이 제일 무시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Sermon입니다. 설교입니다. 26권 중에서 내가 보기에는 10권 정도가 설교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제일 무시합니다. 그게 에드워즈를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사실은 거기에 에드워즈 신학의 진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그 신학적인 논설집과 그 다음에 의지의 자유 같은 매우 어려운 철학적인 문집들, 미셀러니 같은 것들은 장작이고 그 불을 땐 것이 사실은 설교입니다. 나는 설교를 읽으면서 에드워즈의 신학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신학, 철학,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면서 기독교를 변증하면서 진리의 벽돌들을 쌓아올리는 작업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나는 칼빈을 공부하면서도 그것을 느꼈습니다. 칼빈의 설교가 나의 신학을 형성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마 여러분도 칼빈을 읽으라고 그러면 차라리 칼빈에 관한 논문을 읽어야지 어디 가서 말발이 서지 설교를 읽는 것은 평신도 같은 느낌이 들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하면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형성해간다고 할 때 그 지식을 여러분도 사용하지만 언젠가는 전달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내용을 갖추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역자들이 사실은 제일 좋은 설교청취자가 되기 어려운 여건들을 많이 갖추고 있습니다. 주일날이면 사역에 대한 생각이 꽉 차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시간에 쫒깁니다. 구역예배도 없으니까 집에 가서 다시 들어보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불리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같은 설교를 요약한 것을 보면 평신도들이 훨씬 탁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역자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들으면서 자기의 사역에 필요해서가 아니라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할 마음으로 받아들인 지식들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학적인 얼개들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솔직히 이야기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그것 한 시간 반씩 시간을 내는 것 진짜 살점을 떼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 내가 잘난척하는 것이 아니라 보람 있게 쓸 시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교역자들에게 발동을 거는 이유는 자극제가 되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잘하고 있으면 그런 것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형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책을 계속 읽어야합니다. 방황하지 말고 내가 늘 추천하는 책, 그리고 새로운 책들을 통해서 새로운 것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독서와 옛것을 아는 독서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야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꾸준히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항상 중요하고 묵직한 신학서적을 읽으면서 그러면서 성숙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 성장이 지적인 성장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뭐냐 하면 그 신학을 많이 공부한다고해서 신앙의 지혜가 탁월하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거의 신학을 하면서 무시해버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명상입니다. 명상을 안 합니다. 사색을 많이 해야지만 신학이 느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철학자 한사람이 있었는데 옛날에 같은 교회에서 생활하던 지체입니다. 찾아왔습니다. 6, 700명이 모이는 교회에 간 것입니다. 나중에 갔습니다. 그전에는 서울대를 나와서 철학교수를 했는데 철학교수로 있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철학자입니다.’ ‘내가 알지!’ ‘그런데 왜?’ ‘Thinking이 안 돼요!’ 그러니까 철학을 한다는 것과 Thinking이 되는 것이 저절로 같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신학의 깊이만큼 신앙을 고민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같이 저절로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Thinking 안하고 철학을 하면 결국 어떤 사람이 되느냐하면 남이 이야기한 것은 막 논쟁을 붙여서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박종훈 씨가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이 그것과 함께 살고 죽을 수 있는 사상은 사색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지 남의 이야기들을 주워 모은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금부터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사색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색을 지금부터 부교역자생활 할 때부터 사색을 잘 하던 사람이 담임목사가 되어서 안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는 없습니다.
이번에도 어느 학교엔가 갔는데 내가 하도 많이 다녀서 어느 학교엔가 가서 아마 총신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지만 뭐냐 하면 신학교를 다닐 때 치열하게 기도하던 사람이 담임목사가 되어서 기도를 안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희귀합니다. 아주 희귀하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역을 하면서 공부를 하던 태도를 신학교 때는 견지를 했는데 담임목사를 하면서는 그것을 끈을 놓아버리는 경우는 많이 있는데 부교역자 때 그렇게 하지 않던 사람이 담임목회를 하면서 그렇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도서비를 주면 책을 사지 않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안 읽는 책을 사는 것도 스트레스입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읽는 책이 뭐냐 하면 내가 누구라고는 이야기하지 않겠는데 어느 목회자의 서재를 갔습니다. 그동안에 내가 보내준 책이 책꽂이 한 칸이었습니다. 나 혼자 있었으니까 무엇을 읽었는지 하도 궁금해서 보니까 내 책 중에서도 다 쉬운 책만 읽은 것입니다. 게으름, 싫증 이런 책만 읽었습니다. 나머지는 펴보면 책이 ‘오늘 처음 햇빛을 보는구나!’ 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외국에도 가고 그랬는데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지금 하지 않던 것을 담임목사가 되어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겸손하게 모른다고 그럴 수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된 다음에는 전지전능하게 비춰야하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말을 못합니다. 체면상으로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꾸 온갖 허위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집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책을 쓰면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어느 한 부분을 전공해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그래서 강영안 교수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나는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 이스라엘 문제를 전공했기 때문에 7장과 12장은 모른다.’ 그런 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관심사와 내가 유사합니다. 그분은 무슨 주제든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유장합니다. 그러나 논쟁가들이 하는 학문적인 방식으로써는 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평생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강의입니다. 항상 설교로 말하고 있습니다. 책도 그래서 따로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다 설교집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나하고는 생각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굉장히 존중할만한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충격적이 이야기를 해주겠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해박합니다. 역사, 사회부터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이미 벌써 영국의 의회에서 의회하는 회기 중에는 자주 거기에 가서 방청석에서 정치를 지켜보았습니다.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서를 읽으면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 서재에 적어도 만권 정도의 책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500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가지고 있는 사람은 2,000권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짧은 생애를 살다가 죽었는데 50대 중반에 죽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세계의 학자들이 연구를 해도 아직까지도 파악이 잘 안된다고 그러는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평생에 소장했던 서재의 책이 몇 권이었는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850권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와 지금하고는 인쇄매체나 이런 것들이 비교가 되지 않으니까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850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18세기에 뉴잉글랜드에서는 굉장히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책을 저쪽에서 수입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판단으로는 그 850권을 거의 다 읽고 그 다음에 수없이 사색을 하면서 그러면서 자기화 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대 사상가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깊이 읽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모든 책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자랑을 위해서 읽지 말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에 대한 지식입니까?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성품의 하나님이고 그 성품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개인의 삶속에서 실현되는가하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거기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교역자의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신학을 할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것을 어렸을 때 어마어마한 양을 읽어야합니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은 수없는 의문을 던져줍니다. 문학이 풀지 못합니다. 못 푸는데 의문을 던져주는 것입니다. 의문을 철학이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이 제공합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사실은 동양인과 서양인으로서의 문제가 아니라 To be or not to be. 는 영국 사람들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라파사람들이 특히 영국 사람들에게는 이게 초등학교 6학년 정도가 셰익스피어를 읽는 시기입니다. 그것을 아주 깊이 읽고 토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물음표는 셰익스피어 전집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문학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상세화 과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무엇이 고민인가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해답을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있는 아이들이 질문을 하는 것이지 ‘그것 알아야 돼?’ 그러는 애들은 질문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상서를 읽게 되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사상서를 읽기 시작하면 ‘아, 그것이구나!’ 하면서 무릎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성이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때에 읽었던 문학들이나 특히 실천적인 작가들의 글들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고민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많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문의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지금은 거의 문학작품은 못 읽습니다. 그리고 읽으면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옵니다. 옛날에 백금산 목사님과 도스트옙스키를 가지고 토론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책이야?’ 그러면서 3일 동안에 죄와 벌을 읽었답니다. 만나서 그럽니다. 좋긴 참 좋은데 목사로서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지금 황금 같은 시간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읽지 못하면 결국은 건너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수많은 의문들을 제공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고등 학교 때의 교육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 어렸을 때의 교육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 그러면서 우리는 공부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중심은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성경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가 있고 그 다음에 모든 학문들을 보면서 설정해나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아야할 것인가 하는 것들에 대한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주는 것이 신문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신문을 공들여 읽어야합니다. 다 읽는 것이 아니라 쭉쭉 넘어가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한 번에 이해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공부들을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성숙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들을 읽고 듣고 하면서 통합되는 것을 배워나갈 때 지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사역하기 때문에 공부 못한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은퇴할 때까지 그렇게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간을 딱 비워서 나는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것은 신학교에 가서 교수를 하거나 가르쳐서 먹고살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나는 별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그 학문들을 녹여낼 수 있는 신앙적인 고민들이 단절된 채로 신학을 하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자신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소화해내는 지식의 연단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해서 뜻이 정해져있지 않고 이 책, 저 책, 오만가지 책을 읽으면 우리들이 짜파게티라고 하는데 잡학이 잔뜩 있는 것은 설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루이스 벌콥의 책 7권을 놓고 묵상을 하면서 읽고, 묵상하면서 읽고, 묵상하면서 읽고 해서 나온 사람의 설교가 일관성이 있고 굉장히 깊이 있는 설교가 됩니다. 루이스 벌콥은 고영민씨가 번역까지 깨끗하게 다 해놓았습니다. 거저먹기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렇게 안합니다. 최소한 루이스 벌콥만 읽어서 정리를 하고 있어도 다른 책을 아무것도 읽지 않아도 그 사람이 토해 놓은 설교는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 책으로 출판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실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다음에 목회사역에 설교를 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일 년 정도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없겠습니까? 그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많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 년이 아니라 40년을 목회를 한다고 할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6개월만 교인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면 목회자를 우습게 압니다. 교만해집니다. 그러면 그 일관된 체계들이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꾸준히 읽으면서 거기다가 묵상을 더해야합니다. 적용하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묵상하고 계속 그러면서 공부해나가야 합니다. 세월이 좀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한글로 되어 있으니까 한 달이면 한권을 읽습니다. 일 년이면 7권짜리 넉넉하게 일독을 합니다. 더 상세히 처음에는 얇은 책을 읽다가 그 다음에 두꺼운 책을 읽고 그 다음에 기독론을 읽고 구원론을 읽다가 ‘안토니 후쿠마쿠도 좋다며!’ 그러면서 읽고 그 다음에 누구 것도 보면서 저변을 튼튼하게 쌓아야합니다. 한사람의 사상가를 붙들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너무 어렵습니다. 일 년에 세권씩 읽어도 10년을 읽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뭐냐 하면 누구에게서 싹 받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고 다시 한 번 다짐하는데 책에서 손을 놓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목표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면 그것은 세상적인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을 더 잘 믿고 섬기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아 철학이 필요하구나!’ 그러면 철학을 공부하고 ‘인문학을 공부해야하는구나!’ 그러면 인문학을 들여다보고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때보다는 비교도 안 되게 좋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하루에 30페이지씩 읽더라도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또 설교를 읽으면서 그러면서 그것을 실용화하는 연습을 자기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설교의 변화가 옵니다.
2. 은혜의 성장
a. 경건한 정서
그리고 깊이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나는 그 은혜를 둘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Spirituality 경건한 정서입니다. 여러분이 사역을 하면서 느낄 것입니다. 사역은 잘하는데 누가 보더라도 본전치기는 합니다. 그래서 어디서도 이용가치가 없다는 소리는 별로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심령이 아주 하드해진 것입니다. 같이 모여서 기도를 해도 기도를 거의 못합니다. 눈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거룩한 정서가 고갈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은혜 안에 살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표입니다. 매주 그럴 수는 없지만 그런 것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설교를 하다가 주체할 수 없는 정서를 느끼고 기도를 하다가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막 타는 듯한 마음이 되어서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습니다.’ 그런 소원이 생겨나야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다는 것은 심각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뭐냐 하면 매일 매일 은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 같은 때에는 눈물로 일과를 시작하고 눈물로 일과를 덮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교사 리바이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사가 하루에 두 번씩만 울 수 있다면 첫 번째는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펑펑 울고 두 번째는 내게 맡겨진 영혼들이 너무 불쌍해서 펑펑 울고 그럴 수만 있다면 그가 지식이 좀 모자라도 하나님이 훌륭하게 쓰십니다. 그런 사람은 인격이 너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 사랑에 감사하는데 하루 이틀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인격이 너절할 수 없습니다. 은혜의 정서 안에서 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자기연민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맹인들은 돈을 주면 이렇게 만져보면 금방 압니다. 돈을 보면 동그라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만져도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쉬는 시간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운 Sandpaper에다가 손을 갈았습니다. 지문이 없습니다. 지문이 있으면 만져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것도 그런 것입니다. 한번 설교를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절도시키는 그런 영력을 전기에나 나오는 그런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착하고 따뜻하고 눈물과 기쁨이 있는 Spirituality를 유지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 Spirituality를 유지해야합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경건생활을 건너뛰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못해도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는 말씀의 은혜를 받는 생활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b. 영력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영력입니다. 뭐냐 하면 설교할 때 언어도 투박하고 세련되지 않았는데 왜 그런지 그렇게 억하고 나를 굴복시키는 형언할 수 없는 내리누르는 큰 힘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력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지식은 면도칼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를 1㎜만 잘라내시오.’ 그럴 때는 면도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빗장에 굳게 가로지른 문을 부수시오.’ 그럴 때는 면도칼 가지고는 안 됩니다. 날이 좀 뭉툭해도 도끼이어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아주 예리하게 날이 서서 도끼인데도 창호지를 오려낼 수 있을 정도의 날도 서고 그 다음에 큰 힘도 가지고 있는 큰 도끼가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드문 것입니다. 지식이 날카로우면 영력이 모자라고 영력이 날카로우면 논리에 뭉툭합니다. 그것이 한계입니다.
사실은 지적으로 말하자면 파렐이 칼빈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파렐이 칼빈을 막 야단칩니다. 물론 나이차이도 좀 있지만 어린애처럼 펑펑 웁니다. 그렇게 신적 위엄을 느끼게 만들었던 그런 것들은 내셔텔에서 목회를 하던 파렐의 힘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정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인데 그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권세들은 귀신도 알아봅니다. 우리의 이 목회사역은 영적이 사역입니다. 그런 현장에 직면해서 그것들을 제압하고 이길 수 있는 영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Spiritual Power가 필요합니다. 깊은 Power가 필요합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가혹하리만치 하나님 앞에 외롭고 고통스러운 피눈물 나는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는 것이지 게임이나 하고 놀고 사역도 노라리로 하는 친구에게 어느 날 확하고 불이 내려서 소위 이야기하는 성령세례를 받고 하는 것은 만화에나 나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광야와 같은 목회사역을 통해서 아주 서서히 서서히 연단되어가는 것입니다.
3. 지식과 은혜의 결과
그 다음에 이런 지식과 은혜의 결과가 마지막으로 어떻게 나타나느냐하면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좋게 이야기하면 배짱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나쁘게 보면 뭘 몰라서도 그럴 수 있지만 나는 누가 나보다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주눅이 든 적은 없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뛰어나다는 이유 때문에 주눅이 든 적은 없습니다. 꼭 알아야할 것을 모르는 것은 Evil 이 되지만 몰라도 되는 것을 모르는 것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무지는 악이라고 할 때는 인간으로서 모르면 안 되는 것을 모를 때 그것이 악이지 예를 들어서 내가 무슨 최신 패션을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죄입니까? 나는 패션에 관심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어떻게 받아야할지 모른다고 할 때 그것은 죄입니다. 필요한 지식이니까 말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내가 주눅 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교수들이 모두 모였는데 채플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몇 번 들었을 것입니다. 레위기 24장의 등불을 가지고 쭉 설교를 했는데 끝나고 났더니 그 사람도 조금 개념이 없는 사람인데 여교수인데 오더니 ‘목사님!’ ‘왜요?’ ‘대단하십니다.’ ‘왜요?’ ‘아니 신학자들이 그렇게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 있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세요?’ 옆에 있는 교수가 ‘목사님 저분은 원래 저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것을 보면서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해본 적 없고 그러니까 정말 우리들이 사모해야할 것은 영혼의 배려입니다.
나는 신학적인 입장은 우리하고 조금 다른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R. A. 토레이 목사님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비평적인 독서를 하지 말고 공감적으로 한번 읽어보십시오. 강영안 교수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나는 신학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성령충만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R. A. 토레이 목사의 대표적인 책이 기도와 영력이라는 책이 그것입니다. 나는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정말 겸손해집니다. 지금 그런 것을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체득한 것입니다. 그 책들을 읽으십시오. 아주 뚜렷하게 영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하나님과의 관계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관심이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여기에 관심이 집중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 이외에는 너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아까 정지영 전도사가 이야기한 것처럼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참 과분한 은혜를 느끼는 것입니다. 나를 여기에 세워주신 것이 정말 과분한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하나님을 향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최근에 신문에서 어떤 사람을 봤는데 탈북자입니다. 지금 어떻게 돈을 모아서 편의점을 차렸습니다. 돈도 꽤 있어야하는데 대단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아주 당성이 좋은 사람으로 촉망받아서 북한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건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서 수용소로 가고, 거기서 죽도록 얻어맞고, 결국은 병신이 되다시피 되고, 그리고는 탈출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는데 그것을 떨어뜨렸습니다. 그것 하나입니다. 훈장을 가지고 있다가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형직전까지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주의했던 것들에 대해서 회개한 적이 있습니까? 부주의했던 것에 대해서 회개한 적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성찬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것을 들었다가 떨어뜨리면 치리 받는다. 치리인데 출교는 아닐 것입니다. 근신이나 경고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한손으로 들지 말고 조심하고 정신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아직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에 김성구 목사가 실수를 했는데 세례 줄 사람을 입교를 시키고 입교할 사람을 세례를 주어서 혼났는데 우리의 부주의함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율법의식이 굉장히 복잡하지 않습니까? 율법학자들에게 왜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묻는데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괜히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만드셨습니까? 당신을 경외하는지 안하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제물을 그냥 가져와서 죽이면 된다고 그렇게 포괄적으로 하면 그러면 죽은 것을 가져왔는지 다 죽어가는 것을 가져와서 숨통을 끊었는지 알게 무엇입니까? 복잡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없이는 그것을 다 지킬 수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제의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이 그런 코드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Careless 에 대해서 부주의는 하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여러분이 실수에 대해서 내가 너무 과도하게 책망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Careful 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다는 아주 중요한 표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분량만큼 하나님을 향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실수는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모든 면에 있어서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야 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말입니다.
b. 사람과의 관계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을 향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향해서 나타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사역에 대해서 나타나는데 사역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역을 해나가니까 그러한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나타나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전도사 생활을 할 때 교사를 자주 자르던 사람이 목회하면 장로들도 자주 자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을 깊이 스며들어서 녹여낼 수 있는 그런 관용, 너그러움, 여유, 이런 많은 것들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의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나는 사실은 대학에 있으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교수를 뽑는데 그렇게 허술하게 뽑는 줄 몰랐습니다. 서류가 여러 장이 들어옵니다. 다 쟁쟁한 학교에서 서류가 들어온 것입니다. 이 사람은 공부도 많이 하고 이 사람은 학적으로 최고라고 그러고 그런데 어떤 사람을 뽑았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외국에 가서도 데리고 온 학교가 신문에 낼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공부를 제대로 했을까?’ 누군가 제의를 하면 변호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학교 다닐 때 수석 했고요, 예일 에서도 공부할 때 장학금만 받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쪽에서 어느 한 사람이 ‘그래 공부는 많이 한 것 같아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좀 아는데 싸가지가 없어.’ 그리고 그게 끝입니다. 더 이상 그 싸가지는 변증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아무도 안 해줍니다. 그게 사실은 사역의 세계에서도 동일합니다. 심지어 내가 아는 경우는 부교역자 때 담임목사를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되게 힘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목사로 청빙을 받아서 가는 것입니다. 전화를 해서 그 사람을 뽑는 것은 실수를 하는 것이라고 내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다고 딱 끊는 것입니다. 그 청빙위원회에서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끝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통계가 나왔는데 대한민국 국민은 6다리를 건너면 다 알게 된답니다. 그런데 교계는 딱 2다리라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2다리만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다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다리를 건너면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내가 직장을 다닐 때의 일이었는데 최고 책임자가 나를 참 잘 봤습니다. 그때 사실 내가 교회행정에 대해서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불신자였는데 나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승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고 상부기관에서만 압니다. 그러더니 부르는 것입니다. ‘자네 내일 아침 9시로 승진이 되었다.’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 다음에 깜짝 놀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서류를 쭉 펴놓더니 빈자리가 9군데 있는데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맘대로 고르면 안 되지 않습니까? 윗사람들이 하도 많은 층층시하에 짓밟혀서 나도 한번 우체국장을 해보겠다고 하니까 ‘그래?’ 그 자리에서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 누가 승진해서 가는데 거기 우체국장으로 발령을 내주십시오.’ 거기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끊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기였는데 오 아무개라고 있었는데 엄청 찍혔습니다. 그것도 내가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새끼’ 그러는 것입니다. 전화를 거는 것입니다. ‘거기 오 아무개라고 내일 가는데.’ 그 사람도 발령이 났습니다. ‘돌려!’ 그런데 교회와 교계는 어떻게 보면 더 잔인합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세상이니까 ‘저 자식 돌리래!’ 그러면 돌립니다.
교계에서 한번 만나면 ‘안녕하세요? 김 목사님!’ 그래도 속에는 쌀쌀한 마음을 가집니다. 청빙을 하면 담임목사인 경우에는 100% 그 사람이 머물러있던 전도사교회까지 추적이 들어온다고 보면 됩니다. 내 친구 목사는 그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화를 한 것입니다. ‘거기에 김 아무개 목사님이 거기서 부목사 생활을 하셨지요?’ 담임목사가 전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 사람을 왜 찾습니까?’ 뭐라고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딱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빌립보서에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병욱 목사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마지막에 전병욱 목사에 대한 책까지 쓴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지 아십니까? 한종호 목사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익명으로 인터넷에 들어가서 전병욱 목사를 막 씹은 것입니다. 전 병욱 목사 교회에 똑똑한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IP를 추적한 것입니다. 두 달인가 육 개월인가 추적을 해서 잡아냈는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두란노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당신 그러면 고소해버리겠다.’ 그러니까 ‘그래도 나는 비판한다.’ 그게 나였다고 커밍아웃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내 이름 석 자를 내고 비판을 하겠다고 하니까 하용조 목사님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러면 하용조 목사님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면 나는 하용조 목사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사표를 내겠다고 하면서 좋은 직장을 사표를 내면서 그 다음에 그 일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느냐고 그랬더니 근처에서 그 두 사람과의 관계를 본 사람이 딱 한번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만났는데 내가 보기에는 한종호 목사가 전병욱 목사보다는 몇 살 더 많을 것입니다. 나보다는 좀 어릴 텐데 몇 살 많을 것입니다. 전병욱 목사가 나보다 8년인가 어린데 그러니까 아마 한 4년쯤 선배가 될 것입니다. 전병욱 목사 자기는 상당히 유능한데 그 사람은 기껏해야 잡지사의 한구석에 있는 사람이니까 만나자마자 반말로 씹은 것입니다. 그때 이 사람이 뜻을 세운 것입니다. ‘저 자식 내가 씹는다.’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보니까 이 사람의 판단이 아주 엉터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의 발제자로 나서서 전병욱을 맡겨준 것입니다. 가서 읽어보아라. 거기에 내 이야기도 나옵니다. 나는 실천신학교의 교수인 이승진 교수가 내 논문을 실었는데 그 교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잘근잘근 씹은 것입니다. 지난번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서 가장 무례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서 목록들 다 제시할 수는 없고 선배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떤 마음을 갖느냐하면 내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고 이분들의 선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갈수록 약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요즘에 두통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젊은 사모들의 그 코드를 소화하느라고 우리 집사람이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당신이 바뀌어야해!’ ‘나도 바뀌려고 하는데 코드가 너무 앞서가서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힘들고 내가 희생하고 다른 사람입니다. 지난번에 있었던 일인데 심방을 갔습니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어느 교역자가 죽으려고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다들 주차장까지 배웅을 내려온 것입니다. 축하할 일이 있어서 왔는데 그러니까 담임목사님이 왔으니까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그러고 잘 지내라고 악수를 다 했는데 교구 여전도사가 없어진 것입니다. 주차장에 내려가서 뒷좌석에 앉아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직까지는 담임목사도 타지 않고 심방 간 가족들은 인사를 하겠다고 내려왔는데 자기는 차에 기대앉아서 오늘 심방 잘 마쳤다고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배워가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현대인의 에티켓을 계속 읽어서 자기를 거울로 비춰보면서 고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사역이 마지막으로 끝날 때까지 하지 말아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뒷담화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뒤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도와줄 의무가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만족스럽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역에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래서 나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이롭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역을 해나갈 때 정말 좋은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런 자세를 가지고 그래서 그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넘쳐야합니다. ‘왜 나한테만 와서 그러는데?’ 그러지 말고 말입니다.
엊그제도 어느 교회에서 600명인가 사모들을 모아놓고 세미나를 하는데 세미나를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2년 동안이나 와달라는 것을 시간이 안 맞아서 못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주 유명한 목사님인데 직접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겠다고 그러고 갔는데 그런데 이틀 있다가 가야하는데 전화가 온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여기 목사님 친구들이 있는데 전화를 한번 받아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당신을 아들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전화를 바꿨는데 ‘누구입니다.’ 그러는데 보니까 신학교 동창들입니다. 그런데 잘 지냈느냐고 어쩌고저쩌고 그랬는데 다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런데 목사님!’ ‘왜?’ ‘저기 텔레비전 한 대만 가져오시면 안 돼요?’ ‘왜? 내가 말씀으로 봉사하러 가는데 텔레비전은 뜬금없이 왜 가져가?’ 사모님들이 모여서 뽑기를 하는데 열린 교회에서 김남준 목사님이 텔레비전을 가져오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확 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것을 하는 사람인가? 그러다가 지혜를 주셨어요. ‘그것은 아닌 것 같고 내가 말씀에 도움이 되는 책을 한권 주든지 선물을 가져갈게.’ 하면서 전화를 끊었는데 생각을 하니까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한다.’ 그것을 한권씩 주려고 보니까 600만원입니다. 만원씩 600명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몇 명이나 모여?’ 그랬더니 갑자기 천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막 굴려서 그러면 좋다. 목회자의 아내에 대한 설교를 CD로 모아서 하면 하나에 1200원이면 된다니까 600장을 만들어서 가면 72만원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시골에서 사모님들이 왔는데 MP3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고 임실장이 책을 주라고 그러는데 속에서 이런 것이 치미는 것입니다. ‘내가 봉인가? 왜 강의를 하러 오라고 그래서 내가 가는 것도 진짜 힘들게 가는데 몇 백만 원 짜리 책을 가지고 오라고 그러느냐 텔레비전이나 한 대 줄 것 그랬나?’ 하는데 텔레비전도 한 백만 원이 될 것입니다. ‘왜 그러나?’ 그러면서 화가 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은 아니고 생각을 바꾸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데 사모들이 600명인가 700명이 모였는데 얼마나 곤고한 사람이 많으면 거기까지 왔겠느냐? 네 개인 돈으로 주는 것도 아니고 교회 돈으로 사주는 것인데 사주어서 700명을 줬는데 9명은 읽지도 않고 처박아 두었다고 치고 10%만 읽고 변화만 된다고 해도 그것이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책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라고 그랬더니 다행히 딱 600권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말씀사 까지 통틀어서 600권밖에 없는 것입니다. 잘되었다.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해서 360만원에 해서 갖다 주었습니다. 가서 다 나누어주고 보니까 400명도 채 안되었습니다. 나누어주고 나머지를 가지고 오려고 그랬더니 두고 가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사모들이 다 내려갔다가 뽑기 하는 날은 다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올라오는 사람들이 700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래 참자.’ 그러면서 베풀면서 사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 회의를 하면 선배들이 교구에서 떡을 사와서 하나씩 나누어주지 않습니까? 교역자회의 할 때마다 내가 샀습니다. 그것을 한 다섯 번쯤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죄송하다고 저희가 하겠다고 해서 여기서 생겨난 전통입니다. 그래서 물을 뿌려놓고 그럽니다. 그래서 모인다고 하면 내가 가서 준비해야지 내가 이렇게 해주면 우리 사역자들이 편할 텐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속에서 깊이 우러나는 마음으로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마음을 다해야합니다.
Ⅲ. 맺는 말
나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의 큰 보람은 여기서 여러분이 목회를 잘해서 열린 교회를 크게 키우는 것도 보람이겠지만 그것보다도 박헌준 목사처럼 세월이 많이 지나도 ‘당신들이 그 사람을 못 모시면 손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정도 되면 교역자들이 어느 정도는 시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부목사들 다 나갈 때 아닙니까? 그런데 남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떠나있는 사람을 그것을 해서 그것을 4년 동안 유학할 비용까지 대주고 마지막에는 소개 들어온 것을 보낼 때 여기에 있는 목사들이 좀 빈정이 상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모두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박 목사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나 설교나 모든 면에 있어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바람입니다. 한사람의 목회자가 올바르게 되면 그 품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쉴 곳을 얻는 것입니다.
김경해 전도사님은 은퇴가 얼마 안 남으셨겠지만 내가 처음 만났을 때 4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날씬하고 예뻤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좋아하고 내 강의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인생이 그렇게 될 때 한사람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고 그럴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영혼들이 그분의 그늘 아래서 생명을 얻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엇 하지만 김경해 전도사님이나 이명희 전도사님이나 나머지 교역자들은 젊으니까 두 분은 신학대학원을 나와서 한 5,6백 명 목회하는 목사님도 못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그 속에서 안식을 얻고 은혜를 받고 두 분이 목회하는 교인들은 나한테 상담하러 온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게 목회를 잘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를 만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얼굴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은혜를 받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지 무엇 그리 대단할 것이 있습니까?
내가 맨 처음에 전도사 되고는 두드렸을 때 스물여덟 살이었는데 벌써 30년의 세월이 바람처럼 지나가버렸습니다. 30년 후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생을 Cool하게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정말 별것 아니구나!’ 몇 교회를 방황하면 인생 종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깊이 헌신하면서 그래서 주께 하듯이 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한 헌신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쓸쓸히 사라지는 것이 목회자의 일생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너희 가운데 역사하고 사망은 우리 가운데 역사한다는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조금만 있으면 여기 자매들은 김경해 전도사님 나이가 되고 여러분은 전부 다 내 나이가 됩니다. 그렇게 휙 지나갑니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말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쭉 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그렇게 걸어가면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을 주실 것이라는 그것을 굳게 믿기 바랍니다. 기운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