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 24:1-3)
녹취자 : 조원정
오늘 본문은 성막과 관련된 등잔불 규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막은 직사각형이 두 개로 이루어진 방으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나라 평수로 18평정도 되는 방으로 되어 있고 하나의 방은 12평, 또 하나의 방은 6평정도 되었는데 첫 번째 방을 성소라고 불렀고 두 번째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이동식 성전이었고 성막은 일체의 창문이 없는 물 돼지가죽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무티티 하고 비바람과 햇빛을 받았기 때문에 화려하지 않았습니다만 성소는 제사장이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이었고 지성소는 일 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만 들어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속죄를 올릴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뜬금없이 이 본문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목회는 30년 전의 목회와는 완전히 다른 일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좋은 의미, 나쁜 의미의 뜻이 아니라 그만큼 고도화된 산업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이 다양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인간들의 요구는 굉장히 폭증하고 있고 심리적인 자기 문제부터 시작해서 생활과 가정, 직장, 사회, 이런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키면서 살고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영위해야 되는지 가치의 혼란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클라이드 라이드라는 사회학자가 말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군중 속에서도 고독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옆집에서 사람이 6개월 전에 죽었어도 알지 못할 정도로 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극도의 소외감과 많은 인간의 문제들을 교회가 떠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떡하든지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들을 해주려고 여러모로 애를 쓰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과연 이것이 정말 우리의 목회 사역의 본질에 충실한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아주 신비주의적이고 기복적인 성령운동이 한 시대를 휩쓸더니 그 다음에는 마케팅 교회 시대가 뒤 흔들었고, 마케팅 교회 시대가 지나가고 나니까 이제는 뉴에이지적인 신비주의를 따라가는 교회로 탈바꿈 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한국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지금도 문제가 되는 관상기도 같은 것이 그런 예입니다. 이런 속에서 목회자의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성막을 짓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해서 이 불을 켜기 위해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내게 가져오게 하고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두는데 아론의 자손들을 대대로 등잔불을 꺼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생각해 보자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성막을 짓게 하셨을 때 창문을 만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자연 채광이 되도록 창문을 만들지 않고 물 돼지가죽으로 다 덮어 버렸습니다. 일체의 햇빛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등잔에 비취는 그 불빛으로 성소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울려 퍼져야 할 것은 상식과 이 세상에 있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오직 계시에 비친 진리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목회자들이 이것을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목회자가 곧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하고 신학자가 아닌 목회자는 의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신학자가 될 것인가? 슐라이 마흐 이전까지만 해도 개신교의 전통은 신학을 목회자만이 하는 학문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할 의무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었고 목회자는 좀 더 심화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헤르만 바빙크가 쓴 ‘마그넬리아데이’라는 책을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소위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 서론’이라고 번역된 두꺼운 책 말입니다. 화란 사람들은 그 책을 농부들이 밭 갈러 갈 때 그 책을 수레 뒤에 실고 가서 새참 시간에 읽던 책입니다. 그러던 것이 슐라이 마흐 이후에 신학 교육이 전문화 되면서 성도들은 신학을 할 의무가 사라지고 목회자들만이 신학을 해서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일반 학문의 계몽주의적 학습 방법을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신학자가 곧 목회자였습니다.
목회자의 중요한 의무는 삶의 지혜를 설교하는 것입니다. 아만두스 폴라누스라고 하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는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일의 학문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같은 세기에 화란의 신학자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트리나 에스터 비벤디 데오 베오 크리스투”, “신학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신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사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신학은 수많은 세기 동안 인간의 기원이 무엇이고 우주는 왜 창조되었으며 우리는 왜 여기서 인간으로 살아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나를 인간으로 지으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 결과 나도 행복하고 우리의 이웃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수많은 철학자들이 답을 못 내리고 죽은 문제에 대해서 최종적인 답을 주는 것이 기독교 사역의 목표였습니다.
여러분이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 가리켜 준 기독교 신앙(christian faith)을 그리스도교 철학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습니다. 저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글을 읽다가 충격을 받은 것이 있는데 테르툴리아누스 시대에 기독교 입교자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이 코스몰로지(cosmology)였습니다. 우주론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창조주의 위엄과 영광을 가르치고 인간으로 태어난 위엄과 목적을 가르치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교도와는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의 개종은 그야말로 귀의였습니다. 불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써도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불교는 아직까지도 총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출가하고 머리를 깎으면서 절에 들어가면서 자기가 이때껏 가지고 있었던 인생관과 철학, 심지어는 부모 자식의 인연까지도 모두 내려놓고 불가에 들어가서 자기를 완전히 비운 상태에서 새롭게 자기를 불교의 진리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전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 당시의 개종은 하나님을 배양하고 살던 삶에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돌이키는 것이고 그 진리의 핵심이 바로 성경이었고 성경의 핵심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 부활안에서 세계와 우주와 자신의 인생과 인류의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성경과 신학을 통해서 정립하면서 자신도 그 길을 따라 살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삶으로, 지식으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하겠다는 계획은 있는데 목회라는 말이 얼마나 애매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건축하고 은행에 돈 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시설물 고치는 것까지 세금 내는 것까지 다 목회 속에 들어갑니다. 아무것도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성도들이 모였을 때 외치는 설교를 듣거나 가르치는 교훈을 받으면서 자기의 상식을 깨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진리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진리가 가르쳐 주는 대로 죽기까지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오늘 성경은 창문 하나도 없는 성막을 그 등불로만으로 비취도록 우리에게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세상의 상식이나 논리나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것은 사실인데 결정적으로 그들을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데는 그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그 속에서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가 얼마나 달콤하고 아름다운지를 보여주어서 이 세상에 다른 지식들이 하찮게 만들어주고 그 진리를 사모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목회할 계획은 있는데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진리가 이 안에 없다면 그는 목회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소명을 받았다는 것과 코스를 이수하고 제도권에서 안수를 받았다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첫째는 진리를 자기 자신이 터득하고 살아내고 그 살아내는 비밀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기독교의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독교의 힘은 지성적으로는 사상의 체계이고 또 하나의 힘은 윤리의 힘입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인데 사상은 지성과 관련되고 윤리는 의지와 관련됩니다. 사상을 가졌다고 지식을 가졌다고 모두 그 지식처럼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매일매일 체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진정한 힘이 지성적으로는 사상의 힘이고 의지적으로는 윤리의 힘인데 이 사상과 의지를 묶어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윤리적인 생활도 눈에 보입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도덕과 사랑 이런 것들은 말로 하지 않아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럼 분석철학자도 윤리가 우리 눈에 보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상도 눈에 보입니다. 나는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표명을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책을 여러분에게 이번에 못 드린 것은 매우 유감인데 그 책을 보면 이 사람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슨 책을 보던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는 하나의 도움 없으면 진정한 기독교적 힘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삼위일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야 말로 사상과 윤리의 힘을 결합해 주는 진정으로 두 가지다 힘이 있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영역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목회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아마도 없을 겁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지 않으면 여러분의 인생도 없는 것입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물어보는데 첫 번째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은 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입니다.
최근에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부활의 영광, 다시 오실 재림에 대한 소망 때문에 가슴이 벅차 본지가 언제입니까? 그런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지만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골격이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이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처럼 모든 지식이 그리스도께로 수렴하고 그리스도께로 수렴된 지식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원천을 두고 있기 때문에 존 칼빈은 하나님이야 말로 모든 지식의 원천이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성령을 가까이 하고 성경을 어린아이처럼 잘 믿는 심성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신학교 다닐 때에는, 목회할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매일이야 그럴 수는 없지만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성경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어야 됩니다. 아 이런 말씀이었구나!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설교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나중에 기회 있으면 저를 부르십시오. 제가 아주 잘하는 특강 하나가 있는데 일평생 설교 준비 안하는 법이라는 건데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럼 목사님은 설교 준비 안합니까?” 하며 물을 것입니다.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이 먹을수록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젊었을 때는 정말 시간이 안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고 그렇게 은혜를 받을 때 그것을 기록해 놓으면 그 자체가 설교가 됩니다. 그것을 주석이나 원어 성경을 놓고 다시 잘 정리해서 요약을 해 놓으면 언제든지 그 하나만 빼면 그때 받은 감동이 살아 있어서 뜨겁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년을 열린교회를 목회하면서 ‘오늘 설교 뭐하지?’ 하는 적은 없었고 대부분 ‘이것을 또 설교를 해야 하는데 왜 일주일 후에 모일까?’ 그랬습니다. 19년 동안 5215편을 설교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경 자체를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배운 추억만 남은 분들 있지요? 그리고 알파벳이 기억이 안 납니다. 회개하고 원어 공부 하십시오. 원어 공부 안하겠다고 하는 것은 육군이 되어 바지에 흙 묻히지 않고 전쟁하겠다고 하는 것이고 해군이 돼서 바지에 물 안적시고 전투하겠다는 것입니다. 말만 되는 것입니다. 줄줄 읽을 정도는 안 되어도 한글 성경에 어디가 틀렸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여야 합니다.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신학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성경만 읽은 학생은 성경은 안 읽은 학생하고 비슷하게 위험합니다. 그래서 신학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신학을 공부할 때는 두 개의 원칙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보편성과 개별성의 균형을 이루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리폼드 신앙을 가진 고신 교단의 신앙 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신학의 개별성입니다. 그러면 신앙으로 여러분이 이 신앙고백인 리폼드 신앙 고백이 가장 온전에 가까운 기독교 신앙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선택을 했습니다. 자기들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제발 칼빈의 기독교 강요 하나가 개혁파의 모든 문서를 대변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게 생각하지 말고 칼빈은 그 시대에 개혁주의를 꽃피웠던 많은 사람 가운데 탁월한 한 사람입니다. 그런 개별성을 가지고 공부할 인물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저는 그 자료들을 지금도 수집하고 있는데 오만타이틀 이상 가지고 있습니다. 17세기 문헌만, 그런데 보면서 무슨 충격을 7년 전쯤 부터 받기 시작했는데 플라톤을 공부하면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어거스틴에 깊이 심취했었는데 저의 스승입니다. 어거스틴을 공부하면서는 기독교인인 것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루터와 칼빈을 공부하면서는 개신교도인 것이 너무 긍지가 느껴졌습니다.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 그 방대한 유산을 공부하면서 그중에 일부를 공부했을 뿐이지만 내가 개혁파 교인인 것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고 누구도 우리 개혁파를 따라 올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 공부에 있어서 개별성입니다. 충실하게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쪽 한쪽만 공부를 하면 안 되고 보편성을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 교회의 교부들에 대한 공부입니다. 여러분은 이레니우스가 카톨릭의 선조입니까? 개신교의 선조입니까?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신교의 선조입니까? 카톨릭의 선조입니까? 안셀무스는 어떻습니까? 피터롬바르두스는 어떻습니까? 토마스아퀴나스는 어떻습니까? 동방교회의 사실상 마지막 신학자 다메섹의 요한은 누구 편일까요?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역사와 인문학의 문외한들입니다. 공통된 뿌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한테 이런 충고를 합니다. 목사님은 요즘 어거스틴을 자주 인용하시는데 걱정됩니다. 어거스틴은 리폼드가 아닙니다. 어떻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리폼드가 생겨날지도 몰랐습니다.
인문학은 항상 그들이 공부한 시대의 맥락에서 이해를 하는 것이 일차적인 학습 방법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구원의 개념도 분명하지 않았고 교회의 개념, 인간론, 모든 것들이 불분명 했었는데 이세기에 로마의 사상적 박해가 시작되고 치열한 변증이 일어나면서 기독교 교리가 점점 공식화되고 심볼라이드 되어가면서 신학이 세워진 뿌리입니다. 그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서 꽂혀서 따라가면 매우 잘못된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성을 우리가 확고하다고 믿는 개별성의 리폼드 신학으로 비추어 보고 개별성의 리폼드 신학은 보편 신학을 비추어 보면서 우리의 신학이 정말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토대 속에서 이루어진 신학인가를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초대교회의 교부와 중세의 교부, 절대 안 읽습니다. 그 다음에 13세기에 기독교 철학이 무너지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주의가 무너지면서 니콜라스의 쿠사, 윌리엄 오캄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유명론 논쟁이라고 하면서 사상적으로 엄청난 폭풍이 불기 시작하는데 사실은 여기서 기독교 신앙을 버린 근대주의와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모두 잉태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의 역사를 배경으로 르네상스가 나오고 르네상스의 배경으로 기독교 인문주의가 나오고 거기에서 종교개혁이 나오고, 계몽주의가 나오고, 그 다음에 계몽주의 중에서도 온건한 계몽주의와 극단적 계몽주의가 나오고 이것이 현대로 연결되면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까지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지성사에 대한 이해와 그 자료들 속에서의 기본적인 지식들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성경을 볼 때 폭 넓게 보면서 적실성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쉽게 얘기해서 어느 본문을 설교하든지 자기만의 독특한 신학 사상을 가지고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불붙은 논리’입니다. 아침 마당처럼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처럼 혜민 스님의 누가 들어도 좋은 기분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화) 한 2년 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갔을 때 작년에는 개강예배를 가서 설교를 했는데 서부 웨스트민스터에 갔을 때 카프리 총장하고 마이클 호튼 교수님이 저하고 교분이 많이 있는데 같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당시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조엘 오스틴의 이야기로 점프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엘 오스틴이 무슨 사상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미국의 학자들은 조엘 오스틴을 그노시스주의 플러스 펠라기우스주의 플러스 등등 설명을 합니다. 저는 아니라고 합니다. 조엘 오스틴이 그런 것을 공부해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외국에 가면 숙소에 가면 텔레비전을 틀면 조엘 오스틴이 나옵니다. 그런데 리모컨을 끌 수가 없습니다.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개소리라는 것을 알겠는데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얼굴 잘생겼고 원고 없고 유창하고 목소리는 꼭 팝페라 가수처럼 아주 달콤합니다. 풍부한 예화, 수만 명을 울렸다 웃겼다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제가 한마디로 정의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죽음 이후에 나와 그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판단들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입 해다가 방송국에서 내보내고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거기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어마어마한 책들이 팔려나갔습니다. ‘긍정의 힘’은 이백만부가 팔려나갔습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나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 공부를 안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부를 어느 정도 해야 되는가 하면 치열하게 해야 됩니다. 이 학교에 와서 여러 번 설교를 했는데 저의 경험에 의하면 한 7년 정도는 생명의 위협이 느껴질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웃지 마십시오. 저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합니다. 최소한 양보할 수 없이 7년 정도는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올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워지는 크리소스톰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한때 그의 설교를 모으는 일에 엄청 공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탁월한 설교는 이미 십대 때 신학과 수사학에 헌신한 그 노력이 어마어마했습니다. 동방교부 중 마지막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대단한 신학자여서 그의 이름이 황금의 청산유수였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책을 몇 권 읽었는데 번역은 아직 안되었습니다. 정말 감탄을 할 정도입니다. 그 해박한 지식, 그도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로 공부에 헌신했습니다. 저의 스승 존 오웬은 십대 때에 신학을 공부하다가 해친 건강을 평생 십자가처럼 살다가 죽었습니다. 존 칼빈이 스물두 살 때 파리 로열 꼴레주에 있을 때에 유럽 최고의 지성인으로 꼽혔던 것은 어마어마한 공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라틴과 그리스의 교부들의 문헌을 거의 암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앞두고 스위스 로잔에서 카톨릭과 공개토론이 있을 때 이 사람은 완벽하게 암기된 상태에서 카톨릭이 알지도 못하는 자료를 가지고 카톨릭의 견해를 반박해서 거기 모였던 수십만 수도사들이 칼빈의 강연을 들으면서 회심을 하고 개신교로 넘어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지역 전체가 카톨릭을 버리고 개신교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공부하기 싫은 것은 소명이 아닌 가장 확실한 증거중의 하나입니다. 기도하기 싫고, 하나님 사랑하기 싫고, 공부하기 싫으면 이것은 소명이 아니라는 세 가지가 삼위일체적으로 충족됩니다. 이 세상에 가장 비겁한 사람이 신념 없이 인생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지금이라도 깊이 기도해서 정리하고 가서 취직을 해서 열심히 돈 벌어서 교회 헌금하고 약한 사람 돕고 평신도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더 올바른 삶입니다. 좀 더 하고 싶은데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하나만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뒤에 보면 하나님이 그 등불을 밝히는 기름 이야기가 나옵니다. 감람을 찧어낸 기름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써맨 자이트 자크’입니다. ‘써맨’은 기름이고 ‘자이트’는 올리브입니다. ‘자크’는 순결한 기름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성령이 우리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얼마나 본질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기름은 성경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것이 계속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불타오르는 것과 진리의 밝은 빛이 비취는 것과 하나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스피리투스 꿈 베르보’, ‘말씀과 함께하는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이 두 축이 그렇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가장 성령의 역사 중 고귀한 역사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어두운 지성을 밝혀 그분의 도움이 없이는 볼 수 없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학공부는 머리 좋은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학도 이성이 많이 개입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공부한 사람들은 습득은 할지 몰라도 갖고 와서 쓸데가 별로 없습니다. 강의 한 시간만 들으면 학생들이 압니다. 저 속에 생명은 없다는 것을, 그런 사람이 설교하면 교인들에게 감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의 설교와 말투에는 하나님의 체취가 묻어 있습니다. 그런 성령의 은혜 속에 붙잡히지 않고 이성으로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온 사람에게서는 종이냄새만 나는 것입니다. 하늘의 향취가 없습니다. 똑똑하긴 한데 거룩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말은 잘 하는데 그 속에서 왠지 그 사람 앞에 서면 하나님을 보고 온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언어가 없어도 느껴지는 그 어떤 하늘의 체취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월트 발로우라고 하는 사람이 위대한 선교사요,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앤드류 머레이를 만난 이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영국에서 태어났고 네덜란드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했는데 제가 만난 선교사 중 가장 깊이 있는 신학과 청교도의 영성을 겸비한 분입니다. 성화론에 있어서는 우리 개혁주의 입장하고 좀 다른 케직적인 성화론을 가지고 있지만. 그분이 1미터 65㎝밖에 안 되는 단신이었습니다. 월트 발로우라고 하는 사람이 그분을 만나고 와서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완벽하게 외우진 못했는데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문을 열고 그 방에 들어가 섰을 때 그분은 무릎을 포개고 그 위에 손을 얹고 우리를 환한 미소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았다. 그가 우리를 위해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올라갔고 그분의 기도가 끝났을 때 우리는 땅으로 내려왔다.”
그것은 공부만 많이 했기 때문에 줄 수 있는 감화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라고 하는 청교도를 기억을 할 것입니다.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설교하러 나오면 설교가 시작되기도 전에 온 교인이 흐느끼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 왜 울었냐 하면 하나님을 방금 만나고 온 사람이 저렇게 거룩해서 얼굴에 광채가 난다면 정말 그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하신 분일까? 그리고 오늘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일까? 그것 때문에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조지 길레스피’라고 하는 청교도를 기억하십니까? 어느 날 신앙고백을 작성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에 목회자들이 모였습니다. 길레스피 목사님의 기도로 시작을 하겠습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하나님을 송축하며 기도를 시작을 했습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 어떤 사람이 긴급동의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관한 묘사에 있어서 오늘 길레스피 목사님의 이 기도보다 정확하고 아름다운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이 목사님의 기도를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기를 동의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눈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찧어낸’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까띠뜨’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까따뜨라는 동사에 피동분사 남성 단수입니다. 까따뜨는 ‘투비트, 투브레이크’라는 뜻입니다. 아주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당시에 기름을 짜는 두 방법이 있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감람을 맷돌에 갈아서 프레스에다 집어넣고 돌려서 참깨 짜듯이 기름을 짭니다. 많은 양의 기름이 나옵니다. 또 하나의 방식이 있었는데 절구 같은 곳에서 맷돌 같은데서 깨트리고 누르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깨진 사이에서 저절로 기름이 흘러 나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프레스를 눌러서 짜면 기름이 많이 나오는데 거기에 불순물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불을 켤 때 그을음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름입니다. 순수하게 딱 깨트려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엑스트라 오일을 체취해서 최고의 순결한 상태에서 성소에 있는 등잔에 부어서 그을음이 나오지 않는 맑은 빛으로 밝힌 것입니다.
기름이 성령의 역사라면 깨어진 감람열매는 목회자로서 진리를 찾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깨어짐의 생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은 제가 ‘자기 깨어짐’ 책 속에서 기록을 했습니다만 여기 도서관에도 있습니다. 두 가지에 대한 깨어짐이 자기의 자기사랑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하기를 나는 회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우려하는 도덕적인 타락, 교계에서 오고가는 이 불미스런 추문들, 모두 결국은 한 가지 임무에 목회자가 헌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있는 회개의 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회개가 없으면 뭔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그것도 모자라서 하루에 몇 번씩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깊이 깨닫고 통렬하게 회개하면서 이생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한 것들이 눈물과 함께 씻겨 지고 그 회개한 눈빛으로 진리를 볼 때 진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주님의 거룩하심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발견하고 참회하고 자신이 그 진리에 합치하려고 애쓰는 삶이 진실의 삶입니다. 그렇게 6일 동안 살던 사람이 올라가서 온 마음을 다해서 증언할 때 그것이 연약한 인간이 하는 설교인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은 고생도 모르고 자란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깨어져야 됩니다. 어떡하면 깨어지냐고 자꾸 이야기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위대한 영적인 인물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지 말고 위대하고 탁월한 영적인 인물들을 전기와 생애, 그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가 얼마나 왜소한 사람들인지를 깨달을 때 격차를 느끼면서 통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신학자가 네 분이 있는데 어거스틴, 칼빈,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7년 전부터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입니다. 어거스틴도 눈물로 읽었고 칼빈도 그랬고 존 오웬은 지성의 벼락을 맞는 충격 속에서 그의 저작 만 팔천 페이지를 거의 읽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마찬가지로 만 육천 페이지 정도 되는 것을 만 사천 페이지 정도는 읽었습니다. 정말 꿈같이 달콤한 시간들을 이십년 동안 보냈고 그 속에서 그들의 눈물에 동참하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하고 싶습니다. 진리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령의 사람이 되십시오. 자기 깨어짐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