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섬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녹취자 : 김세나
맡은 자들의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얼핏 보면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하나님앞에 충성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된다는 뜻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고 이 의미는 맡은 자들은 충성스러운 자들로 나타날 것이 요구가 된다는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충현교회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왔는데, 직분을 맡은 자들은 충성스러운 사람들로 나타나기를 하나님에 의하여 요구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기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이런 표현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외적인 어떤 행위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의 내적인 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운 삶은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진데서 흘러나오는 외출적인 열매입니다. 우리의 그 내면과 외면의 삶은 항상 일치를 이루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치를 이루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굉장히 충성스러운 흉내를 내고 이렇게 보인다 할지라도 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러운 상태가 떨어지게 되면 잠시는 불균형을 이루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것들이 주저 앉아서 그래서 마음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낮은 쪽과 합치된다 이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균형을 이루려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항상 그렇게 일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이 정말 충성스럽게 살아간다, 그것이 진심으로 충성된 삶이고 또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오류가 없이 정확하게 참으로 충성되다 이렇게 판단하기만 한다면 정말 그렇게 올바르게 판단하기만 한다면, 판단하기만 한다면 그러면 그렇게 올바르게 판단하기만 한다면 그러면 그 정말 충성스러움과 충성스러운 삶은 나뉘지가 않는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맡겨 주셨을 때에는 항상 기대를 갖고 계신데, 그 기대가 뭐냐 하면 충성스럽게 그 일을 해 주리라고 하시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그런 기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약에 그런 기대를 따라서 잘 충성스럽게 살아가면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 하나를 하고 싶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고양시키고, 우리의 영혼의 변화,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는 일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 사실은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의 신앙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연약하고 그랬었는데 주님을 만나면서 그렇게 놀랍게 변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일 자체에서 그런 성과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섬기는 궁극적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서 그 일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그 일이,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혹은 그 일이 오히려 그 사람을 더 나쁘게 만들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쁘게 만든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런 것 아닙니까. 일은 굉장히 많이 하고 하는데, 사람과 교제를 해 보면 퍼석퍼석한 사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일을 통해서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 이런 것이 결핍된 가운데 일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냥 일을 할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경우에는 지난번에 한번 심방을 갔더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영혼의 상태가 정말 바닥까지 내려갔는데 구역장을 하라고 해서 자기는 바닥이기 때문에 도저히 못 한다 그랬더니, 그래도 그 바닥에서라도 해보라고 해서 구역장이 되고 나니까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감당할까, 그리고 생각을 하면서 기도를 하게 되고 그리고 회개를 하게 되고 변화되지 않은 구역 식구들을 보면서 변화되지 않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 같아서 뉘우치고 그러다보니까 구역장을 하면서 나의 영혼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다 고백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 경우는 일이 그 사람을 회복시켜 준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려고 마음을 먹으니까 은혜가 은혜의 작용이 그 사람안에 일어나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그러한 이치를 깨달아야 된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섬기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쓴 바울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지만 그러나 그 신학적인 모든 사유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깊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전도자로 출발을 했을지 모르지만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서 심오한 기독교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깊이를 처음에는 구원론적으로 그렇게 이해를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주론적으로 그 복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창조와 구속의 대드라마들을 아주 깊이 이해하는 그러한 학적인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을 소유했던 뛰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작은 신학자는 남이 해 놓은 신학을 가지고 꼬투리를 붙들고 그렇게 하면서 논쟁을 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내지만 큰 신학자들은 주님과 직접 대면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을 배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역사에서 1차 교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1차 교사들은 자기가 전개하는 하나님에 관한 탁월한 학문들에 대한 지혜를 다른 사람의 논거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장엄한 세계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언어로 새롭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을 진술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러한 삶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나서 그래서 그 사람들 속에 체득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갖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껏까지 간사로 교역자로 1년 혹은 2년 심지어는 10년 섬겼는데, 그 이력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렇게 자랑꺼리 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자랑꺼리가 될 수 없는데 잘못된 것이 너무 많았고, 또 잘 했다고 하더라도 잘 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지, 자신이 칭찬을 받아야 될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점에서 섬겨온 지난 날들에 대한 경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섬겨 오면서 어떤 사람은 점점 더 신앙이 좋아지고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고 은혜의 세계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지식들을 소유하게 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점점 더 잘 알기는커녕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가졌던 신앙 조차도 잃어버리는 것같은 그러한 경험들을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그 물체의 속성 가운데 소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체의 소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물체가 본래의 형체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물체의 소성입니다. 소성이 와해될 때에 물체는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액체였던 것이 고체로, 고체였던 것이 액체로, 혹은 고체였던 것이 기체로 이렇게 변화됩니다. 그렇게 물체가 소성을 상실하고 새로운 물질의 형태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반드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에너지가 없이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주 자체는 거대한 에너지의 덩어리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통해서 이 우주가 자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우리 이 모습 이대로 산다 그럴 때에 무슨 에너지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고 원래 생긴 그대로의 성품과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면 어마어마한 그 소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뭘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 무슨 물체가 있으면 이게 무슨 그렇게 고집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의도를 가지고 이것을 깨뜨리려고 하면 잘 안 깨집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엄청난 에너지로서 자기 본래의 소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버려두고 가만히 있을 때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녹이든지 깨뜨려보려고 애를 쓸 때에 저항하는 것을 보면서 그 물체의 소성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단단한 물질이고, 소성이 약하면 약할수록 연한 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자의 구조와도 관계가 있지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내가 무슨 그렇게 큰 소성이 있나 그렇겠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쇠 같은 것을 보면 불을 가하면 웬만큼 불을 가해도 녹지 않습니다. 굉장히 산소 용접기 같은 것으로 장시간의 열을 가하면 그때서야 이제 소성이 깨뜨려지면서 액체로 변하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의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의 본성에 있어서 변화는 우리가 그 본성에 거스르는 본성에 거스르는 어떤 에너지를 한번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받아서 결국은 본성 그 자체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받고, 그 본성 자체가 이렇게 그 녹아내리는 그러한 경험 없이는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성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좋은 비유가 지금 방금 떠올랐는데 쇠가 두 개가 있다고 칩시다. 쇠가 이렇게 있는데, 옛날에 보면 요즘은 기계가 좋은 것이 많이 나와서 뭐 레이저 같은 것으로 한다고 하지만, 옛날에 보면 철공소 같은 곳에서 보면 철판을 자릅니다. 지금은 레이저로 자릅니다. 싹 하면 톱으로 자른 것처럼 칼로 두부 자른 것처럼 모서리도 없이 딱 잘라집니다. 옛날에는 그러한 기계가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산소 용접기로, 그것도 전기 용접기도 아니고 산소 용접기로 카바이트 집어넣어서 막 펌프질 하면 칙하고 나옵니다. 그것 가지고 이제 철근을 이렇게 쭉 댑니다. 그 껍질에 붙어 있는 것들이 탑니다. 한참 들이댑니다. 그러면 이제 탑니다. 그리고 붉은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쇠의 소성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더 댑니다. 계속 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빨갛게 타오르던 부분이 하얀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눈부신 빛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이제 갑자기 쇠가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해 봅시다. 끝까지 대지 않고, 쇠가 있는데 한번 댑니다. 그리고 부스스슥 하면서 거기 붙어있는 오물 같은 것들이 연기를 내면서 타버렸습니다. 그래서 계속 들이댑니다.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떼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다 식은 다음에 다시 손을 대었습니다. 또 한참 있으니까 그러다가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또 뗍니다. 그것을 수시로 합니다. 쇠의 입장에서 보면 수없이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소성 그 자체는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이 변화되는 그것은 참기 어려운 인내와 고통의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그것도 잠깐 그러면 안 되고, 지속적으로 그 때에 그 자기가 자기일 수 밖에 없게 하는 잘못된 의미에서 자기가 자기일 수 밖에 없는 소성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가 오게 됩니다. 형체의 변화가 옵니다. 본성의 변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이 본성이라는 것 자체가 오랫동안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성질입니다. 그것이 바뀌려면 역시 하루 아침에 무 자르듯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이나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꾸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 강력한 에너지가 없으면 그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본성적으로 이렇게 어떻게 행동하고 작용하기에 편하도록 이미 물길처럼 이렇게 생겨난 자신의 본성을 거스리기 위해서는 그게 반드시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충성스럽게 살아가다가 보면 사역을 하면서 자기가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를 정직하게 성찰할 줄 모르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면서 늘 자기 합리화에 급급하는 사람들, 핑계와 이유를 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현실에 있어서 변혁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냥 일할 뿐이지 발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일을 시켜보면 승진할 사람이 있고, 승진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승진 못할 사람이 승진을 하게 되면 그것은 그 회사로서는 악수를 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승진시켜서 회사가 얻을 것이 없는데 정실에 의해서 승진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에 평직원으로 일할 때는 자기 일만 망쳤는데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하부에 있는 많은 조직들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승진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밥벌이 하다가 그냥 퇴사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정확하게 그런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려낼 수 있는 탁월한 해안, 이것이 경영을 하고 지도를 하는 사람들의 아주 중요한 안목입니다. 안목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그럽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기기를 바라는데, 그런 사람들은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충성된 사람으로서 나타나기를 원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하나님의 일을 해도 자기가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그리고 자기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것 때문에 고통해 하고 그래서 그 부족한 것을 매우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자신이 변화되려고 노력을 하고 하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가 그 하나님께 헌신하는 과정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맡겨주면 열심히 해. 힘 안 들때까지만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은 경우는 힘들어도 하는데 참을 수 있는 만큼 참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만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일을 계속 맡겨줘도 항상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하고 참기 힘들 때에는 다시 일로부터 마음이 떠나거나 다른 일을 원하거나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유를 하면 뭐냐 하면 쇠 덩어리에 계속 산소 용접기를 댄 것입니다.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그 다음에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쇠가 더 단단한 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 번 그렇게 달궜다가 물에 집어 넣고 그것을 담금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장장이들이 칼을 잘 만든 다음에는 그 칼을 뜨겁게 불에 달군 다음에 항상 천천히 식히는 것이 아니라 급히 식힙니다. 물속에다 집어 넣어서, 그래서 식히고 또 두들겨서 또 집어넣고 이것을 계속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하냐 하면 단단한 쇠가 됩니다. 그래서 쾅 하고 그 칼로 내리치면 칼날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칼날이 물러서 휘거나 꺾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담금질이라 합니다. 화살촉 같은 것들을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그렇게 그렇게 그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참고, 이런 식이 계속 되면 남들이 보면 굉장히 많은 연단을 받는 것 같아도 끝까지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연단이 안 되어서 그 사람 자신의 소성을 바꾸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강화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입증이 됩니다. 아주 강화됩니다. 그래서 더 바뀔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바뀔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면 정말 오히려 하나님을 오래 섬긴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마음이 어린 아이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을 하면 감동도 잘 받고 깨뜨려집니다. 오래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 이것저것 다 경험해 본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이 훨씬 더 단단합니다. 웬만한 것에 꺾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성이 강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잘 하면, 그 자체가 자기는 일을 변화시키려고 애를 썼는데, 일을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변화가 됩니다. 그리고 또 그 일을 잘 하려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변화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게 되어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주 공평하신 분입니다. 아주 공평하신 분이라서 당신에게 제가 사역을 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그것이 세상의 물질로 갚아주시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영광을 얻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도와 주십니다.
(예화) 제가 내수동 교회에 있을 때, 박희천 목사님이 한달에 한번씩 유치부, 매주 설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중고등부 한번, 그 다음에 유치부 한번, 유년부 한번, 초등부 한번, 이렇게 네 번이니까 네 주씩 돌아가시면서 설교를 매주 하십니다. 한달에 한번씩 돌아가면서, 그런데 하여튼 유치부 애들이 그 전도사가 설교하면 시끄러워서 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떠들고 까붑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만 내려오시면 조용합니다. 딱 2분 설교 하십니다. 그런데 그 어린 아이들이 일주일 동안 잊어먹을래야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에 심어주십니다. 정말 놀라우십니다. 한번은 그 유치부 내려오셔서 겸손에 대해서 설교하시는데, 노인네가 겸손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얘들아, 겸손은 낮아지는 거란다. 이렇게. 그러면서 팔을 벌리시면서 목사님이 계속 낮아져서 강단 밑으로 쑥 내려가셨습니다. 이게 겸손이다. 그러면서 겸손에 대해 아이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목사님이 지금은 뭐 연로하셔서 80이 넘으셨지만, 옛날에 한 때에는 부산 경남 쪽에서 아주 날리던 주일학교 사역자를 훈련시키는 지도자였습니다. 그 분이 개인적인 석상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충성되게 헌신할 때 그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전도사가 되어서 고신 다니시면서 전도사가 되어서 어느 교회학교 들어가서 사역을 하는데 애들 한 100여명 모이더랍니다. 목숨을 걸고 사역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 아이들을 잘 길러낼 수 있을까. 그렇게 하고 고민을 하면서 잘 하려고 했더니 그 분의 지론이 그것입니다. 충성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속 지혜를 주신다. 그래서 잘 하려고 했더니 지혜가 계속 떠오르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애들을 그 시골에서 100여명 밖에 안 모이던 주일학교에 가서 그 아이들이 700명이 모이는 주일학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유치부부터 시작해서 전부 혼자서 하는 것입니다. 700명을 만들었습니다. 한꺼번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아이들을 사로 잡으면서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탁월하셨습니다. 700명이 모였습니다. 그 교내 전체에서 관심사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했길래 700명이나 모이냐. 더군다나 그 700명의 아이들이 사회가 없는 예배를 드린다는데 그게 어떻게 되느냐. 사회가 없이, 무언 사회라고 하는데 무언 사회 설교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그널 음악이 나오면 아이들이 자동으로 묵도하고 묵도 끝나고 나면 궤도가 딱 펼쳐지면 그 궤도를 보고 찬송을 부르고 찬송이 끝나고 나면 기도를 하고 기도가 끝나고 나면 대표기도를 하고 대표기도가 끝나고 나서 후주가 나오면 성경본문을 읽고, 본문을 읽으면 설교하고 설교 끝나고 나면 다시 찬송을 하고, 이게 무언 사회로 예배가, 무언 사회의 예배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집중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참 특이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사역을 했더니 여기저기에서 자기를 와서 우리 그 교사들 모아놓을 테니까 가르쳐달라. 그러면서 한 때에는 아주 이름을 날리는 주일학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서 주일학교 하는 법을 가르쳐서 은혜를 끼치셨습니다. 그 분이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를 좋아하고 그렇게해서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는데, 자기가 그렇게 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강사가 되고 싶고 그러지 않았는데, 내게 맡겨진 영혼들을 잘 돌보기 위해서 충성을 했더니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그래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셔서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쓰임을 받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간증을 하셨습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래서 한계를 뛰어넘을 때, 한계를 넘을 때 그 한계가 바로 소성이 소성이 유실되고 새로운 본성이 생겨나는 그 경계선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경계선상에까지 가다가는 그만 둡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은 아예 도전도 안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신도 변화되지 않고 영혼들도 변화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누구든지 와도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독특한 그것을 가치를 못 갖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에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잘 하려고 깊이 고민을 하다보면 지혜가 생겨납니다. 더 잘하려고 깊이 고민하다보면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때 거기에서 변화와 도전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변화와 도전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은 거의가 영혼들을 돌보는 목회자들이고 구역장들인데, 잘 감당해야 합니다. 정말 잘 감당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그 사람이 새롭게 변화되는 일 같은 것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이는 그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되는 일 같은 것,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신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봉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역자들에게 내가 이야기 하는데,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습니다. 충성스럽다는 말에 거의 90%는 참는다는 것입니다. 참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충성스럽다는 것의 거의 90%는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참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화) 오토바이를 타 보신 분이 많지 않겠지만, 저는 한 때 오토바이 라이딩을 참 즐겼습니다. 그것 때문에 부부 싸움도 여러번 했는데 지금도 소원은 한번 그 오토바이 라이딩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래서 그 때야 뭐 오토바이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100km까지는 달려봤습니다. 지금은 오토바이들이 너무 좋으니까 아마 제대로된 오토바이 타면 180km까지는 밟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토바이를 타면서 느끼는게 뭐냐 하면 진짜 라이딩 하는 오토바이는 순찰차에 있는 앞에 있는 유리 같은 것 없습니다. 그냥 달리는 것입니다. 물론 핼맷 쓰고 하지만, 안경 쓰고 하지만 천천히 달릴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게 좋지도 않은 오토바이가 그 때 제가 타고다니던 것이 90cc짜리 스스키였는데, 그것 깡통같은, 물론 그것보다 더 후진 것도 있었지만 그 깡통이나 진배없는 90cc 오토바이, 90cc 오토바이가 사고가 제일 많이 납니다. 속도는 빠르고 차체는 튼튼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고 그렇습니다. 그것을 타고 100km까지 달려봤습니다. 95이상 100km까지 달려봤는데, 그 장난이 아닙니다. 그렇게 빨리 달리면 바람이 엄청나게 온 몸에 막, 몸이 잠바같은 것을 탁 입으면 잠바같은 것이 다다다다닥 하면서 달립니다.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엄청나게 붑니다. 엄청나게 붑니다. 한 180km 달리면서 유리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손을 내밀면 손 때문에 차가 이렇게 됩니다. 핸들 없어도 이렇게 꺾어집니다. 두 손 내밀어 보십시오. 180km에서 두 손을 내밀면 차가 이렇게 돕니다. 그렇게 엄청난 바람이 붑니다.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속도가 안 붙으면 고통이 없습니다. 속도가 붙으면 거기에는 고통아 따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뭘 그렇게 되는대로 하지, 고통 없습니다. 귀찮지 고통은 없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어디를 달려가려고 하면 바람을 맞이하게 됩니다. 수많은 저항 요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 속에서 자기가 연단되어 지면서 자기가 소성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대충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불쌍한 것입니다. 영혼은 망가지고 오래있으면, 오래 있지만 그게 그냥 힘들 때마다 타협을 하면서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고 그러면서 돌아다닙니다. 뭘 배울 수 있겠어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예화) 신학교 다닐 때 보면 일년 에 한 번씩 사역지를 옮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너는 족세처럼 일년에 한번씩 그렇게 사역지를 옮기냐. 이렇게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 대요. 그래서 유치부 1년, 중등부 1년, 고등부 1년 이렇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보면 한 교회에서 오래토록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한 교회에서 7년, 한 교회에서 8년, 그리고 그 다음 있다가 개척을 했으니까 그렇게 그렇게 오래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있는 사람들도 두 종류입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면서 오래토록 있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변화를 싫어해서 다시 새로운 교회에 가서 눈치보고 또 사람들 사귀고 얼마나 피곤한 일이에요? 새로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느낄 것입니다. 6개월 동안은 정말 괴롭고 낯섭니다. 그런 변화가 싫어서 그냥 소잡아 먹은 귀신처럼 눌러붙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어요? 자기는, 자기는 굉장히 오래토록 뭐 한 교회에 있었다고 자랑하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얼마를 있었던지 간에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면서 그 핵심이 뭐냐 하면 고통을 견디는 것입니다. 고통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르면서 그 자신의 소성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멸되고 새로운 본성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역에 대한 태도, 이러한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없이는 아무 좋은 것 생겨나지 않습니다. 정말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이야기 한 것처럼, 맡은 자들이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왜냐하면 충성되게 살아야지만 우리는 충성할 때 대게 하나님의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충성되게 살아야지만 자기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자신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 모든 것은 자기를 모든 것은 결국은 자기를 가르고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이 정말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에 일을 변화시켜야 되겠다는 욕심은 있지만 자기가 변화되려고 하는 생각은 없는 것입니다. 일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배워도 그것이 다른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신입니다. 정신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보면 정말 안타까운 게 뭐냐 하면 정신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일을 잘하는 기능적인 사람들만 많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교육의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선생이 되는 것은 기술과 기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정신을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모든 것을 여러분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승도 나이 많이 먹으면 제자처럼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스승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 선생님에게는 자기에게는 없는 정신이 있기 때문에 그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많이 생겨나야지만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갖게 되는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이제 사람들 속에서 멘토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각기 자신이 살아갑니다. 그 정신이라는 것은 일을 하는 것으로만 형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속에서 고통을 감래하면서 보다 더 높은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자기 극복의 몸부림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깊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자신을 쏟아붓는 그러한 친솔한 자기 헌신이 없이는 절대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변화되고 재형성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하고 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다못해 마당을 쓰는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충성을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속에서 정신이 생겨나게 됩니다. 정신이 깊이 배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정신은 정신 그 자체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기 때문에 그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러운 사람을 무엇을 맡겨도 충성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 충성스러운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과 그 사람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작은 일을 맡겨 놓을 때에는 충성할 수 없지만, 크고 멋있는 일을 맡길 때에는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일을 맡겨줄 때에는 충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충성스러운 삶은 충성스러운 사람이 사는 삶이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사람은 교회에서 화장실에 똥을 퍼도 충성스럽게 섬기고,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은 설교단에 세워놔도 충성스럽게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순간적으로 일에 임하는 생각일 뿐이지, 그 일이 반복되고 나면 다시 그 일이 익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집사 되고 교회에 와서 대중기도, 대표기도 한번 시켜 보십시오. 온 동네방네 전화해서 날 위해 기도해달라고 다음 주에 대표기도 한다고, 한 5-6년 해 보십시오. 그러면 있지, 10분 전까지도 자기가 기도인지 아닌지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옆구리 찌르면 뛰어 올라와서.